2015년부터 매년 이어져 올해로 세 번째인 이번 답사는 기념사업회 운영진이 준비한
설명문에서도 '남해 미조항을 중심으로'라고 하였듯이 미조항과 충장공 한백록 장군의
옛 묘터를 답사하는 것이 주된 것이었다.
첫해에는 지세포를 중심으로 거제도와 고성 쪽의 전적지를 답사한 뒤에 답사기도 자세하게
썼었는데, 작년 통영을 중심으로 세병관, 충렬사, 한산도를 돌아본 뒤에는 답사기를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넘겨버려 아쉬움이 남았었다. 매년 30명이 넘는 인원에 올해는 37명으로
최대의 인원이었다. 올해도 청주한씨 춘천종친회에서 물심양면으로 후원이 컸다. 문화
예술계의 여러 인사들이 함께한 4월 8~9일의 1박2일은 좋은 봄날의 여행이었다.
하지만 매년 답사를 더해갈수록 충장공의 임진년 마지막 몇 달 간의 행적은 궁금증만
더해왔다. 이제까지 새로 밝혀지고 보태진 사항은 충장공께서 진잠현감으로 나가기 전에
수문장을 지냈다는 기록이 옛 묘비문에서 확인된 것, 경상우수영의 수군진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경상우수영>이란 자료집이 나왔다는 점 정도이다.
3차출전 이후 7월 17일 순국하셨다는 <행장>의 '미조항전투'는 기록대로 종일 분전할 만큼
적잖은 규모였음에도 왜 역사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는 것일까? 미조항의 주민들이 충장공의
'구묘유허지(舊墓遺墟址)'에 단을 세우고 제향을 치렀다는 기록은 언제 어떻게 춘천의 후손
들에게 전해진 것이었을까? 개인적으로 이런 의문점을 품은 채 답사 여정에 올랐다. 더구나
이번에는 작년말 이래로 충장공 일대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한다고 장이레 감독은 새 장비까지
갖추어 이번 답사길에 동반하면서 하나하나 촬영하여 기록으로 남긴다고 하였다.
먼 길에 새벽 5시 40분에 모여 6시경 춘천을 출발하였다. 아침으로 김밥과 과일 등이 나눠졌고
또 사천에 가서 점심 예정이니까, 적어도 3번은 휴게소에 들르려니 하는 기대가 있었으나
단양, 거창 휴게소로 두 번만 쉬었다. 중간에 남원주에 들러 신청자 세 분을 마저 태웠다.
사천에 들어서며 12시 못 미쳐서 바로 식당으로 향하였다(초당 농촌순두부).
춘천보다 이 남녘은 몇 도쯤 기온이 높은 듯하였다. 가로수 벚꽃나무들이 온통 만개하여
있었고, 첫 답사지를 향하는 점심식사 뒤의 버스 안에서는 창밖을 내다보며 탄성들이 절로
터져 나왔다.
① 사천 선진리 전적지
사천은 진주 바로 남쪽이다.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진주 남강의 진양호에서 지금은 가화천이
인공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예전은 그렇지 않았고 그저 바다가 곤양과 사천 땅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길게 만을 이루고 있었다. 사천해전은 1592년 5월 29일 경상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의
연합전으로 거북선이 첫 출전한 전투이기도 했다. 하지만 선진리에는 1597년 정유재란 이후에
왜적들이 쌓은 왜성이 있고 이곳에서 해전이 아닌 육군의 더 큰 전투가 벌어졌었다. 첫 답사
장소가 바로 이 유적이었다.
- 조·명군총
선진리에 조성된 널다란 주차장에서 버스를 내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전투 결과로 남은
조·명군총을 찾았다. 언뜻 뵈는 엄청난 규모에 놀라운 마음이 되었다. 사전답사를 다녀온 한희민
이사님이 답사지마다 해설을 맡아 해주었다.
사당 명칭은 그냥 '선진사(船鎭祠)'다. 선자만 행초서로 써서 대뜸 들 읽히지 않아 하였다.
사방 36m로 곡장(曲墻)을 둘렀고 높이도 많이 높다. 물론 후대인 1984년에 정비한 것들
이었다.
주변에는 위령비도 해서 세웠고 '귀무덤(耳塚)'비도 세워져 있다. 전시관도 둘러보았지만
사천해전과 선진리성에 대한 설명까지 함께 담은 그곳의 팜플렛 설명이 자세하였다. 사당 앞
안내판에는 10월 1일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고만 적혀 있으나, 사천시에서 비치해놓은
팜플렛에는 '8천여 명'이 죽어 '대패'한 전투였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무덤을 만든 당사자도
그때의 지역 주민들로서, 왜적들이 시신의 귀나 코를 베에 일본에 보내고 왜성 밖에 쌓아놓고
승전을 자축하던 것을 거두어 한곳에 안장했다가 지금 장소로 옮겼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1598년 10월이면 이미 7월에 죽었다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망정보와
왜군의 퇴각 정보가 나돌았고, 조명연합군은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 해군의 '4로병진작전'으로
각각 울산왜성(가토군), 사천왜성(시마즈군), 순천왜성(고니시군)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천에는 중로군인 명장 동일원과 조선의 정기룡 장군이 사천으로 공격해 들어와 정기룡 장군은
9월 28일에 떨어져 있는 사천읍성을 먼저 탈환하였고 왜적은 이 군총의 바로 서쪽인 왜성으로
집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읍성에 있던 군량미를 왜적이 불태웠고 마침 아군 진영에서 화약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고 설명된다. 이 전투의 패배는 울산이나 순천 등
다른 전선에 나쁜 영향을 끼쳤던 전투였다. 이곳의 왜군 수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결국 11월말 순천 쪽의 고니시를 위해 왜선들을 모아 구원에 나섬으로써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이 치열해졌던 것이다.
더구나 나중에 재확인해본 결과 이 왜장이야말로 춘천 및 강원도 사람들이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둬야 할 임진왜란의 왜적이었다. 이 시마즈가 이끄는 부대가 임진년에 제일 늦게
제4군으로 조선에 들어와 바로 강원도 지역을 유린했던 그 부대다. 휘하부대에서 아들 시마즈
히사야스(島津久保)가 김화에서 원호 장군을 순국하게 하였고(그러나 거제도로 퇴각하였다가
사망!), 조카 시마즈 도요히사(島津豊久)는 춘천읍성을 유린한 당사자였다. 후대에 <정한록>(
1671년)이란 저술이 바로 이 가문에서 나와 19세기 일본에 다시 조선을 침략하자는 '정한론(
征韓論)'으로 이어지게 한 그런 가문이기도 한 것이다.[이상의 내용은 작년에 춘천역사문화연구회에서
역주하여 간행한 <강원도도세요람> 제2장의 '우두산'에 붙인 필자의 주석 참조!] 조선시대의 역사서인
19세기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여기서 3만 8천 명의 코를 베어갔다고 적혀 있다.
네이버에서 '일본의 인물'로 검색하면 아래와 같은 초상도 버젓이 보이고 있지만 비판적인
언급은 별로 보이지 않아서 기가 막힌다(출처:일본사학회, <일본 다이묘>). 임진왜란의 기억은
사무라이들 가문에 턱없이 부풀려지며 무용담으로 칭송되며 전수되어, 결국 일본의 근대
역사학에도 국수주의적이고 침략성이 담긴 깊은 그늘을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조선의 역사나
임진왜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한국에서 일본학이란 걸 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요즘 부쩍 커지고 있기도 한 것이다.
- 선진리성
이어지는 일정에 다소 여유가 있어서 인근에 있는 왜성까지 산보하며 둘러보기로 하였다.
배가 출입하도록 성을 사천만에 잇대어 축조한 이 터는 원래 고려시대부터 12조창의 하나였던
통양창이 있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1597년에 왜성을 짓기 이전인 1592년 5월 29일의
사천해전 전적지도 바로 여기였다. 그런데 왜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진리성'이라고 표기한
이유는 근래의 발굴조사 때 고려시대의 토성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두 가지를 모두 복원해
놓으며 그렇게 부르기로 하였다고 하였다.
마침 성에는 올해 '선진리성 벚꽃축제' 개막일이어서 주말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로 가득했다.
이렇게 벚꽃이 만개한 시점에 이곳을 찾은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화사하기 이를 데가 없다.
바닷가 쪽의 제일 안쪽 높은 곳에 핵심처인 천수각(天守閣)터가 있었는데 지금은 충령비만
세워져 있다.
벚나무 사이로 사천만이 얼핏 보이나 잘 보이지는 않았다.
남쪽으로 돌아 나오는 길에 1978년에 세운 사천해전 승첩비와 안내판이 있었다.(사진:이창연. 이하에도 섞여 있으나 별도 표기는 하지 않았음)
아군은 거북선을 앞세운 26척이었고 적선은 13척으로 우세한 형국이었다. 먼저 1척을 격침
시키고 후퇴하는 듯 물러났다가 밀물과 함께 공격하여 모두 격침시킨 것이었다. 승첩비에
적힌 이 사천해전의 '전적문'에는 '이순신 장군의 묘책과 용전'이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승첩에는 분명 경상우수영의 3척도 참가하였다고 하였으니 전라좌수영만의 승첩은 아니었을
것이다(1593년 통제사 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흔히 '통합함대'란 말도 학계에서 보이지만, 어느
한편의 통솔이 없던 때였으므로 '연합함대'란 말이 적절하지 않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혹 누군가
먼저 지적했던 언급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 비를 장군의 승첩비라고 명명한 것은
여러 모로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였다. 그냥 '(조선수군의) 사천해전 승첩비'라고
하든지, 이순신 장군의 공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영웅사관 냄새가 나는 것이다. 충무공은 이
해전에서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으셨다고 하였다.
충장공께서는 2차출전인 이 해전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행장 등의 기록에서 말한
부산첨사로서 패졸들을 수습한 일들이 이 때쯤 있었으리라는 추정도 있었지만(유재춘,
1996년), 전투가 급박한 자기 관할지역의 상황에서 전투 이외의 다른 일로 결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패졸을 수습하는 일은 경상우수영의 장수로서는
당시에 병력을 보충하는 중대한 일로 항상 관심을 기울였을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고,
가능한 시간도 6월 7일 율포해전 이후 3차출전으로 7월 8일의 한산도해전을 치르기까지에는
특히 한달여의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또 이때는 우수영의 배도 3척에서 갑자기 7척 출전으로
늘어난 것이 확인되므로(제장명, 2016년) 이 기간에 배나 병력보충을 위한 노력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의문점은 충장공께서 부산첨사(종3품)에 임명된 시점이다. 후대의 행장 기록에는
날짜를 밝히지 않고 그 직책으로 패졸들을 수습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한산도대첩과 순국
이후로 올린 원균의 유일한 승첩보고 사실이 선조실록에는 8월 24일자에 실려 있다. 이
기록은 간접화법이어서 장계가 그 전에 이미 당도했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 문제는 그 실록
기록에서는 '만호 한백록'을 당상(堂上.정3품, 절충장군 이상)에 추증하라고 비변사의 말로
상주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에 따르면 행장과는 달리 조정에서는 8월 하순에도,
즉 타계하신 시점 뒤에도 충장공을 여전히 '만호'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부실한 선조실록을
탓하더라도 비변사 말과 그 시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행장대로 첨사 승진이 먼저
있었는데 그 기록이 누락되고 여기선 순직과 증직문제 때문에 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이
시점에선 만호가 아니라 '부산첨사'라고 호칭해야 옳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행장에서 임금의 명에 따르는 공직 문제를 잘못 기록했을 리는 없다. 행장이 아주
후대인 1807년의 기록이지만 그 전에도 기본적인 기록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가필하며 작성된 글이라고 봄이 옳을 것이다. 전해오는 부산첨사직 자료로는 인조 때인
1628년의 병조참판 증직교지에 와서야 가시적인 증명이 가능하다. 이때는 이미 절충장군으로
증직도 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 절충장군 증직은 여기서 처음 거론하는 바이지만, 이미 선조
때인 1605년의 <선무원종공신녹권> 본문에서 '절충 한백록'이 2등에 책록되었다고 기록한
사실로써 훨씬 이전의 시점에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朴大傑에게 준 서울대규장각 소장의
<宣武原從功臣錄券> 석문 참조). 그러니까 이 녹권은 선조가 임진왜란의 전공자들에게 이미
1604년에 선무공신의 정공신으로 18명에게 공신교서를 내린 이후 공신도감의 건의에 따라
이듬해 선무원종공신으로 당시 1, 2, 3등 모두 9,060명이나 되는 엄청난 인원들에게 맨 앞쪽의
전지(傳旨) 내용 1장만 달리 찍어서 반포함으로써 신분제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고 알려진
녹권이다. 이 녹권을 한장군 측에서도 받았다고 한다면, 거기에 그간의 임명 사실과 관련한
전지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녹권이 실제로 한장군에게도 하사되었었는지 현재
로서는 알 길이 없고 실물도 전하지 않는다(관련 내용은 뒤에서 다시 이어짐). 다만 녹권에
현직 없는 품계만의 기록이 '절충'이므로 그 전에 이미 충장공께서 이렇게 증직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다. 부산첨사 임명도 바로 그 즈음이라 추정해볼 수 있지만, 결국 당시의
급박한 전시상황에서 이런 사항들이 명확히 기록들로 남겨지거나 혹은 전해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충장공과 관련한 이후의 추증과 선양을 위한 노력들이 어려운 길을 걷을 수밖에 없었
다고 보이는 것이다.
한낮의 날씨가 더워졌다. 오후 2시경 이제 일행은 말 그대로 '삼천포로 빠진다'. 엉뚱한 데로
잘못 접어든다는 뜻인 이 말이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지만, 철도와
같은 근대 교통이 생기면서 인근의 진주 등의 큰 도시에 비해 외진 바닷가 도시를 빗댄 말임
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지금은 삼천포가 사천시에 통합되어 있지만 시원하고 수려한
경치가 그만이다. 잠시 주차하여 풍경을 둘러봤다. 삼천포대교와 녹도대교 너머로 창선도와
남해도가 보였다.
창선도부터 남해군인데, 남해도로 넘어가는 창선대교 주변에는 전통어업시설인 죽방렴이
여럿 보인다. 아래 사진은 작년 12월 사전답사 때의 사진이다. 여기서 잡은 몸통이 온전한
죽방멸치가 반찬에 자주 보였다.
② 미조항 전적지
남해군은 경상남도의 서남쪽 끝이고, 동쪽의 거제도와의 사이에는 매물도 욕지도가 바깥으로
자리잡고 있다. 남해도는 진도보다 작아서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고 무인도까지
65개나 되는 섬들이 있단다. 고대에는 변한 소속이었고 이미 신라 때인 8세기 중엽에 남해현이
설치되었다고 하고 조선시대엔 하동과 합쳐 하남현이라 불린 적도 있었다. 해도(海島), 전야
산군(轉也山郡), 전산(轉山), 윤산(輪山), 화전(花田) 들이 남해도의 별칭이다. 지금이야 대교로
육지나 별다른 애로가 없지만 예전은 말그대로 절해고도였고, 조선시대엔 '절도안치(絶島安置)'
라는 유배형의 장소, 곧 유명한 도배지(島配地)로서 알려져 있기도 했다. 나로서는 서너 번
다녀간 적이 있고 작년말 사전답사 때는 다시 금산(錦山)도 올랐었는데,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선도(仙島:신선의 섬)'라는 남해도의 이미지가 예로부터 '선동(仙洞)'이라 여겨졌던 춘천의
이미지와 겹쳐지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오후 3시 20분경 미조항 노인회관 앞에 당도하였다. 미리 약속한 무민사현충회 분들은 이미
구묘유허지 께서 다른 분이 기다린다고 하였다. 미조항(彌助項)은 남해도의 동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하는 작은 어항이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초유사였던 김성일의 말대로 대마도에서 조선
으로 건너오는 두 길 가운데 한 길로서 미조항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이어서
예로부터 왜구의 출몰이 잦았고 첨사직의 수군진이 있었다. 고지도의 지리 인식을 살펴보자.
18세기 말의 <여지도>(규장각 소장) 경상도 부분이다.
아래는 <미조항진지도>(1872년.규장각 소장)를 확대한 그림이다.
미조면사무소 근처의 길에서 일행은 버스를 내려 옛 묫자리를 찾아 언덕길을 올라갔다.
위 사진의 언덕 위에 보이는 슬라브집이 묫자리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을 들려준 문화유씨
할머니댁이었다. 길가의 밭에서는 마늘이 한창 자라 벌써 마늘쫑이 나고 있었다.
조용한 작은 마을에 갑자기 여러 손님이 찾아온 느낌이 들 정도로, 언덕 위에서 바라본
앞바다는 섬들 사이로 자리잡은 황토색 작은 동산을 감싸듯 에워싸고 있는 듯 보였다.
- 구묘유허지와 제례
길가에는 희끗희끗 여기저기 장딸기 포기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구릉 위에서 남쪽으로
꺾이는 길로 접어들면 멀리 다시 바다가 트여 보이고 언덕 자락 중턱 쯤에 빈터 너머로는
바다 위의 조도, 호도, 죽암도 바위가 바라보인다.
준비해온 제수를 차리는 동안 위쪽 축대를 올라가 앞산과 바다를 조망해보았다. 파노라마
사진도 찍어봤다.
마을분들의 전언에 의하면 저 아래 만을 이룬 바다에 조선사람과 왜군의 시체들이 가득 떠밀려
들어와 있었다고 하였다. 기념사업회의 민성숙 대표와 신대수 공동대표를 초헌으로 제례가
시작되었고, 곧 도포와 유관을 차려 입은 한희민 님이 425주기를 맞아 "추모하며 영원히
전하고자(追慕永傳)"제수를 올려 흠향하시게 한다고 축문을 읽었다.
이렇게 멀리서 찾아와 제를 올리는 것은 이곳 묘를 비록 춘천으로 반장하기는 하였으나 처음
묻히시어 피와 살의 흔적을 남기신 장소라는 사실이 엄연하고, 또 조선시대부터 이곳 마을
분들께서 장군의 무덤 터라고 참례하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묫자리와 그 전설을 보존해온
사실이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행장>에 "한장군님이 돌아가신
곳이다. 제단을 설치하고 희생을 써서 제사지내고 있다[韓將軍死所 爲設壇場 享以牲牢]"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렇게 제를 올리는 의례는 수백년간 이어져온 오랜 전승의 매듭을 이제
드디어 풀어서 확인한다는 의미가 있었고, 참례자들 모두가 마음속으로 그런 깊은 울림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미조'란 말을 한동안 자호명(自號名)으로 쓰기까지 했던 이
고축자의 목소리에서 후손으로서의 느꺼움과 함께 그 오랜 관심과 열정이, 역사적인 깊이에서
나오는 떨림이 전해지는 듯하였다.
제를 마치고 뒤이어서 마을의 무민사현충회에서 묫자리의 고증을 위해 보내신 할머니
주민분께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도착시간을 정확히 몰라 오래 기다리셨다는 81세의 이
할머니께서는 어려서 여상을 나오신 분으로, 50년 전부터 근방에서 염소를 키우며 자식들을
대학을 보내셨다고 하셨다. 요지는, 근래에 묫자리 부근의 땅이 부산사람에게 팔렸고 그
사람이 위쪽 밭에 택지를 조성하면서 축대를 쌓았다는 말씀이셨다.
움푹 패였던 가시덤불의 묫자리를 그때 봉분으로 만들어 표시한 것이 지금 눈앞에 보는 이것
이라고 증언을 해주신 것이었다. 사시는 집이 산잔등의 길모퉁이만 돌아가면 바로 근처라
조금치도 다른 말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근래의 일들이 그 후손에게 전해져 알려지기를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고 계셨다는 말씀도 하셨고, 이제 이렇게 성대하게 찾아들 와서
그런 사실을 전부 알려주게 되어 마음이 후련하시다고도 하셨다. 본인도 관심이 있지만
선친께서 무민사현충회에 관여하셨기에 더 마음이 쓰였다는 말씀에서는 예전 우리나라 마을
어르신들의 넉넉하던 인정이 느껴지는 듯하였다.
지금은 밭도 아니고 그냥 초지로 남은 빈자리 한가운데 구묘유허지가 자리한다. 이창연 선생은
묘터가 바닷바람을 심하게 받지 않도록 딱 알맞은 자리를 골라서 쓴 고심이 보인다는 말을
하였다. 땅주인과 연락이 닿기만 하면 어떻게든 예전처럼 '단장(壇場)'이라도 마련하여 그곳이
충장공의 구묘유허지임을 기리는 표지를 하고 보존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은 것이 이번 답사
참가자들 모두의 마음일 것이었다.
- 무민사
산을 내려온 일행은 4시 50분경 마지막 일정으로 미조항 마을의 사당인 무민사를 참배하는
길에 나섰다. 무민(武愍)은 바로 고려시대의 무장인 최영 장군의 시호였다. 최영 장군이 왜구를
물리친 일은 있었지만 딱히 미조항과 관련이 있지는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타지역에서도 여러
무속신으로 최영장군상을 모시는 것처럼 어항인 이 마을에서도 오래 전부터 일종의 해신당(
海神堂)처럼 무민사가 있었다. 현재의 무민사현충회는 근대 이후에 주민들이 미조항 마을의
정신문화를 중심으로 새로이 꾸려 운영하고 있는 단체라는 느낌을 받았다.
무민사 뒤편은 예전 성곽이 남아 있고 마을 중턱으로 성곽의 돌담이 돌아가며 남아 있는 모습도
조망된다. 자리가 높아서 미조항 마을이 다 내려다보이는데, 아래 사진에서 건너편 산자락의
왼편 잔등 뒷쪽에 충장공 구묘유허지가 위치한다.
남은 일정이 없으므로 일행은 모두 천천히 산보하며 마을길을 걸어 노인회관 곁의 펜션
숙소로 돌아와 방을 배정받고 저녁식사를 하러 나섰다. 마을 반대편에 있는 음식점에서
저녁은 종친회 회장님께서 내신다고 하셨다. 무민사현충회 및 노인회분들도 초대하여 담소를
나누셨다. 아래 사진의 모자를 쓰고 정면을 바라보시는 분이 회장님이다.
매년 5월초면 어항에서는 멸치축제를 연다고 한다. 바닷가에 광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곁인
마을 중앙 뒷산에는 천연기념물 제29호인 '미조리의 상록수림'도 있어 보호되고 있었다.
큰 키의 느티나무와 팽나무 아래로 말채나무, 이팝나무, 졸참나무와 같은 활엽수들이 자라고
정작 상록수인 후박나무, 육박나무, 감탕나무, 무룬나무, 사스레피나무 들은 그 밑에서
자란다고 한다.
많은 것을 본 꽉 찬 답사일정의 하루였지만, 일찍 마무리한 여유로움 때문에선지 저무는 항구의
저녁 공기가 싱그럽게 느껴졌다. 이후의 시간은 자유롭게 담소하며 술도 마시고 즐기도록
하였다. 노인회분들께서 노인회관을 하룻밤 숙소로 내주셨지만 실내보다는 아직 어두워지기
전의 마당 같은 실외를 더 선호한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친지 얼마 안 되었어도 풍족할 만큼
회를 사다가 광장 주차장 옆에 자리를 펴고 둘러들 앉았다.
사실 노인회의 무민사현충회 분들과는 알고 지낸 시간이 길었다. 종친회 측에서는 이미
2002년에 미조항 마을을 다녀가며 무민사 배향 문제를 상의한 적이 있었고 근래에는 부산
충렬사에도 제향문제를 확인한 적이 있었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지역사회마다의 역사적인
관점과 문제점들이 연관되어 있으므로 종친회만의 관심과 결정으로 결정될 성질의 일만은
아니란 점도 확인이 되었던 셈이었다. 그리고 작년말 12월의 사전답사 시에도 마을에 남아 있는
충장공 관련기록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사진:권명원)
현충회분들은 <보존문서철>에 예전의 상의 내용도 기록해두었고, 충장공 관련기록을 찾아서
복사물로 합철해둔 모습도 보였었다. 아래 사진은 일본 자료라고 해서 나중에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확인해보았더니 순조 대에 추증과 관련한 기록으로서, 다른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서 1934년에 낸 <조선사> 제6편 제1권에 실린 내용이었다.
식민사관에 따른 이 편년체 사서에 수록된 내용은 순조실록 순조 7년(1807년) 9월 6일의
기록을 인용한 말로서, "고(故) 첨사 한백록에게 정경(正卿)을 가증(加贈)하"기로 하였다는
짧막한 기록일 뿐이다.
그밖에 관찬이건 사찬이건 여느 지방지처럼 '남해현지' 같은 데 남아 있는 기록이 혹시라도
없었을까 찾아도 보았으나 그런 별다른 기록도 더 이상 찾아지지는 않았다. 다만 이때 받아온
<미조면지>(1996년)의 머리말 기록에 충장공께서 미조항첨사와 함께 순절하시던 장면을
기술한 대목이 있어 주목을 끌기도 했었지만, 전후의 맥락이나 연도, 성명이 착종되고 잘못
되어 있어 의심만 키울 뿐이었다. 옥포승첩 이후의 관련 대목을 이렇게 적어놓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여세를 몰아 당포로 향하고 지세포만호 종4품 한백록 장군 일행과 미조첨사 김응성 등
일부는 욕지도를 거쳐 왜군 잔당을 쫓아 미조항까지 온 것이다. 사기를 잃은 왜졸들을 미조에서
뒤쫓고 싸우는 마당에서 전단의 앞장에서 지휘하던 지세포만호 한백록 장군이 전사한다. 이 역사적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47쪽에 나타나 있다. 이때가 바로 1598년 7월 7일 여명이 밝아오는 때였다
한다."
아다시피 1592년 5월초의 옥포해전 이후로는 합포-적진포 해전으로 이어졌고, 다시 20여
일이 지나서 2차출전시에야 사천-당포-당항포-율포 해전들로 이어졌다. 미조첨사는 김응성이
아니라 김승룡이었으며 충장공과 함께 했다는 기록도 나타나 있지 않다. 전거로 제시한 실록
47쪽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선조실록에는 그런 서술이 없다. 1598년이면
임진년이 아니라 정유재란 때이고, 또 운명하신 때까지 '여명'이라고 근거없는 허위사실을
적어서 퍼뜨린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니까 잘못된 기록이라고 판단되는 이 면지 기록을 빼면 남해 측에도 결국 기록 자료로
남아 있는 것은 없고 그냥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내용뿐이었다는 점이 이번에 확인된 셈이다.
그렇다면 200여년 전에 남해 미조항의 충장공 이야기를 <행장>에 남긴 것은 어떻게 해서
가능했던 일일까? 분명 누군가 당시에 직접 미조항에 다녀갔음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청주한씨 춘천종친회에서는 지금도 경남 합천의 시제에 매년 먼길을 마다 않고 참여하는데,
예전에도 많은 일정이 드는 그 행사에 꼭 다녀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시제의 행차를 연장해서건
충장공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서건 미조항을 다녀가며 확인하지 않고서는 그런 서술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후손으로서 종일 전투하시다 돌아가셨다는 미조항을 직접 찾아보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미조항은 단순한 전몰지가 아니라 충장공이 분전하신 전적지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해전사(海戰史)에서도 그런 전투명칭은 알려진 것이 없다. 위의 <미조면지>에서 그런 기록을
실은 이유도 역사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 미조항전투에 대한 관심에서였을 것이다.
<행장>은 명백하게 미조항전투가 벌어졌던 사실과 순국의 순간을 전해주고 있다.
"7월 17일에 또 왜적과 미조항에서 큰 전투가 벌어지자, 공은 몸을 가벼이 하며 죽을 힘을 다해
곧바로 적의 소굴을 쳐부수셨다. 종일토록 칼을 휘두르시면서도 담력과 기백이 더욱 장해지셨으니,
적은 살아날 수 없게 되자 바야흐로 돛을 돌려 멀리 달아나려고 하였다. 홀연히 날아든 유탄을
맞으시어 기운이 늘어지며 끊어져갔지만 오히려 벌떡 몸을 일으키시며 달려가 쫓으라는 몸짓을
세 번 보이시고는 이내 돌아가셨으니, 향년 서른여덟이셨다.[七月十七日 又與倭賊오(鹿+金)戰于
彌助項 公輕身效死 直도(才+壽)賊巢 終日交鋒 膽氣益壯 賊救死不可 方欲回帆遠遁 忽中流丸 氣垂絶
猶作蹶起馳逐之狀者三 而乃歿 享年三十八]"
17일이면 3차출전의 한산도해전(8일) 이후로 10일의 안골포해전(웅천, 가덕도 북쪽)도
치른 다음으로 이레나 뒤에 해당하는 날짜다. '오전'이란 한자말은 국립국어연구원의 국어
사전에도 나오는 말로, "적을 모조리 죽일 때까지 힘을 다하여 싸움, 또는 많은 사상자를 낸
큰 싸움"라는 뜻이다. 문맥으로만 보면 미조항 육지 어딘가에 있던 왜적과의 싸움인지,
정박중이거나 해상에 있던 적과의 선상 교전인지도 명확히 구분이 안 가는 서술이지만 종일
치열하게 싸워야 할 만큼 그 규모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다른 수군과의 협조도
없이 전투를 치른 것을 보면, 어떤 이유에서건 미조항에 갔다가 거기 숨어 있던 잔적들을 소탕
하고자 한 것이거나, 그곳에 새로 당도해온 왜적과 갑자기 마주치게 되었던 상황일 수도 있을
것이다.
<행장>에서는 충장공의 임종을 지킨 사람의 말에 이어서, '공을 좇아 군영에 있던[從公在軍]'
늙은 노비 득충(得忠)의 시신 수습 사실을 전해준다. '시체가 쌓인 가운데서[於積屍中]' 시신을
수습하였다고 하였으니 운명하신 시점과도 한참의 차이가 났을 것이다. 이 역시 당시의 미조항
전투가 그만큼 치열하였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장차의 세밀한 연구가 더해져 임진년의
미조항전투를 포함하는 해전사가 쓰여지기를 기대한다.
나중에 찾아보니 미조항에서는 전에도 왜구를 토벌한 대대적인 작전이 펼쳐진 적이 있었다.
아래 자료는 의외로 16세기 전반 왜구토벌의 정황을 상세히 담고 있는 보기 드문 글이지만
아직 그 내용이 자세히 소개된 적이 없는 것 같다. 여기서 경상도 각 지역의 수군들이 대규모의
연합작전을 펼치며 조직적으로 운용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은 이후의 시기에 이른바 '제승방략
(制勝方略)'이라는 새로운 지방군체제가 왜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70년 전인 1522년의 일로서, 당시 남해도에 유배와 있던
김구(金絿)가 남긴 <왜구수토록(倭寇搜討錄:왜구를 수색하여 토벌한 기록)>이라는 기록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원문 <自菴集>권2).(김구에 대해서는 후술 설명이 있음)
이에 따르면 1522년 4월에 추자도에서 왜구가 조공선을 침탈하여 40여 인이 살상하였고 이어
6월에도 회룡포에서 왜선 8척이 분탕질을 하자 조정에서는 일거에 제압하려는 계책을 세웠고
원팽조(元彭祖)를 경상도조방장으로 삼고 김세희(金世煕)를 경상도절도사로, 허곤(許琨)을
수사로 삼았다. 조방장은 미조항첨사, 남해현령, 사량만호, 적량만호, 평산포만호, 소비포권관,
상주포권관, 삼천진권관들을 거느리고 각 소속 병선 백여 척으로 미조항에 결진하였는데, 7월
6일 아침에는 욕지도로 바로 갔다가 읍포(邑浦)에 정박하였다. 절도사는 창원부사, 김해부사,
함안군수, 거제현령, 진주판관, 진해현감, 사천현감, 당포만호, 오양권관을 통솔하여 각각 낸
이백여 척의 병선과 함께 8일에 욕지도로 와서 정박하였다. 또 제포첨사, 안골포만호, 영등만호,
지세포만호, 조라포만호, 옥포만호, 율포권관의 배도 백여 척으로 매매도(매물도)에 와서 정박
하면서 수군의 위용과 군세를 5일간이나 펼쳐 보였다. 전라좌수영에 척후선을 보내 탐색작전을
약속하고 군대를 나눠서 미조항과 평산포에 복병을 배치하고는 각기 소속군과 함께 충분(
忠憤)의 마음으로 달포를 보내고도 다시 석 달을 보내며 바다를 지켜냈다고 하였다. 김구는
이 장쾌한 '대장부의 행위[大丈夫之行]'를 기억하고자 성명을 적어둔다며 일일이 그 이름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었다. 이 기록에서도 미조항이 차지하는 지리적 중요성이 여실히 감지되거
니와, 임진년 당시에 충장공께서 마주치셨던 상황 역시 당시의 해전사에서 앞으로 더 철저하게
재조명을 받아야 할 것이다.
어둠이 깔리자 항구 마당에는 불빛이 밝혀졌고 술자리 흥도 더해갔다. 나는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쉬도록 해야 했다. 노인회관 안으로 자리를 피했지만 이런저런 담소는 계속 이어
졌다. 만학을 불태우는 신대수 공동대표님과도 오래 간만에 여러 이야기를 나눴고 10시가
넘어서야 잠자리를 찾아 펜션 방으로 올라갔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기념사업회와 후손분들의 열정과 애쓰심이 보입니다.
지난 18일(화) 이순신국제학술회의에 다녀왔는데,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주최로 서울시/여수시/아산시/아산문화재단이 후원하였고 서울시청 3층대회의실에서 오후내 개최되었습니다. 학술대회는 노르웨이(영국), 미국, 일본, 중국에서의 이순신 연구를 개괄하며 평가하는 내용들로 이순신장군의 전투와 거북선이 차츰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 자리 토론자로 부산 해군사관학교의 제장명 교수가 와서 인사를 나눴는데, 재작년 충장공한백록기념사업회에서 춘천에 초빙하여 강의를 들은 인연이 있었고, 제가 교수님이 운영하는 다움까페 회원(이배사-이순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기도 하지요. 답사기 상편을
'이배사'에도 실었더니 마침 제교수가 보시고 반가워하시는 댓글을 다셨길래, 만나서 그 글의 주요내용인 한백록장군의 '미조항전투'에 대해 의견을 들었습니다. 임진왜란 해전사에는 없는 전투라는 말을 다시 했지만, 다른 기록이 없는 한 사적인 기록이지만 사료적 가치가 평가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는 거 같았습니다. 제교수는 경상우도의 수군장수들을 소개하는 논문을 2015년에도 집필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 글을 새로 문화재청/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편, <경상우수영>(2016.11)에 수록하면서는 순서를 바꾸어 맨 앞자리에 한백록 장군을 놓으셨습니다. 물론 이는 당시 우수사 원균이 올린 장계에 보였던 평가의 말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간 제장명 교수가 나름으로 한백록 장군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계셨다는 반증으로 보여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