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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새로읽는 고전:14)
◎현대인의 내적모순 자유분방한 기록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의 하루생활이 장대한 서사시로 기록될수 있을까. ‘율리시스’의 주인공 블룸의 하루는 현대인들이 접하는 일상성으로 엮어진다.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오줌기가 밴 돼지 내장을 지져 아침식사를 하는데서 시작하여 늦은 밤 담장을 넘어 잠이 들려는 아내의 곁에 거꾸로 눕는 일로 블룸의 하루는 끝을 맺는다.
아침식사의 메뉴가 특이하다면 이는 블룸이 자신의 혈통인 유태인의 식성을 닮았기 때문이다.아내의 발가락이 블룸의 머리쪽으로 향하고 블룸의 발바닥이 아내의 머리쪽으로 가도록 거꾸로 누운 두 사람의 잠자는 자세가 기이하다면 이는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협소한 세계 무한한 내면
블룸 나름대로의 개별성은 이밖에도 무수히 나열할 수 있다.유난히도 여성다운 섬세함과 소심함,신문 소설란에 응모하여 일확천금을 모으고 싶어하는 허황된 욕망,하루의 경비를 일일이 따져보는 현실적인 꼼꼼함,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쭈그러진 감자,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은밀히 사랑의 편지를 주고 받는 관계,노출된 여성의 다리를 훔쳐보는 즐거움,정확지도 않은 잡다한 과학상식들,싸구려 연애소설에 대한 취향 등.
블룸의 개별성은 사실상 우리들 자신에게서도 발견되는 평범한 모습이기도 하다.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과학적 호기심이 대단하면서도 미신적이고,점잖은가 하면 은근슬쩍 여성의 몸매를 훔쳐보고,흑인에 대한 편견이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블룸의 상호 이질적 특성은 결코 색다른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모순되는 특성이 공존할 때 한 개인의 참된 성격이 형성된다.더구나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성격은 다면체가 된다.
현대인의 자아는 모순 덩어리이며 분열되어 있다.배타적 요소들이 상대방을 밀어내며 충돌하는 갈등의 장소이다.잠재된 의식들이 불쑥 표층을 뚫고 표출된다.
조이스는 분열된 현대인의 자아를 있는 그대로 파노라마처럼 펼쳐나갔다.조이스 문학에 언제나 따라붙는 ‘의식의 흐름’이란 수법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현재에서 과거의 흔적을 더듬는 방식이다.
우리의 의식에서 흔히 체험하는 연상작용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가는 일이다.차곡차곡 풀어가는 리얼리즘의 방식이 아니라 의식의 심층부에 갇혀있던 잊혀진 기억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뛰쳐 오르며 의미를 갖는 작용이다.
책갈피에 꽂아논 장미의 마른 꽃잎을 보는 순간 장미 향기를 풍기던 옛 애인과의 입맞춤을 떠올리는 것과 같다.
단순한 과거 사건을 회상하는 것만으로 우리의 의식작용이 움트는 것은 아니다.프로이트의 지적처럼 욕망의 세계는 더 크게 요동한다.현실세계에서 억압되었던 숨은 욕망들은 현대인의 분열된 자아의 틈을 비집고 떠오른다.
조이스는 잠재의식의 자유분방한 분출을 기록하였다.현대의 평범한 소시민이 접하는 세계는 협소할 수 있지만,한 개인의 내면에서 분출되는 기억과 욕망의 세계는 무한히 확장된다.내면세계의 서사시가 ‘율리시스’에서 확인된다.
○고향잃은 현대인의 방랑
‘율리시스’는 직접적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중요한 모티브를 많이 따왔다.그러나 고대의 영웅 오디세이아는 조이스의 작품에서 평범한 더블린의 소시민 블룸에게 그 역할을 넘긴다.
오디세이아의 10년간 방랑은 ‘율리시스’에서 놀랍게도 하루의 생활상으로 축소된다.방랑의 지역은 온갖 세계가 아니라 아일랜드의 자그마한 수도 더블린으로 좁혀진다.
방랑하는 현대인.단순히 시내를 떠도는 방랑이 아니다.현대인의 방황하는 내면세계를 이 소설은 서사시처럼 읊고 있다.
삶의 안정된 터전을 이루며 개인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근원을 고향이라고 부른다면,현대인은 전통,종교,가정의 뿌리를 잃어버린 이방인이며 방랑자이다.
주인공 블룸은 헝가리에서 더블린으로 이주한 유태인 부모의 아들이다.어렸을 적에 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한 상흔이 의식에 깊이 맴돌고 있다.
태어난지 12일만에 죽은 아들의 쓰라린 충격으로 블룸은 그 이후 아내 몰리와 육체적 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다.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몰리는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으며 이를 블룸도 눈치채고 있지만 차마 터놓지 못하고 있다.오쟁이 진 남편의 위상이란 현대인의 불모성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가정에서 고립된 블룸은 유태인이란 혈통으로 더블린의 동질적 사회에서 배척받는 이방인이다.종교적으로도 부모에게서 유대교를 이어받았던 블룸은 이주하며 신교로 개종하였고 결혼시에는 다시 가톨릭으로 바꾸었지만 중년이 된 현재는 성당에 가본지가 오래된다.가톨릭 신자가 90퍼센트가 넘는 더블린 사회에서 블룸은 소외당한 이방인이다.
○삶의 긍정으로 의미 창조
그러나 조이스의 작품은 절망과 비극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고립과 소외 속에서도 현대사회의 불모성에 도전하는 해학과 웃음으로 이어진 건강한 삶을 내비친다.냉혹한 풍자가 아니라 폭소를 자아내는 희화적 패러디를 이용한다.
무엇보다 조이스는 지배와 권위로 이루어진 폐쇄된 사회에 도전한다.조이스가 자주 사용하는 패러디는 권위적 목소리를 해체하는 의도를 지닌다.
‘율리시스’에서 패러디는 단순한 비판적 풍자의 역할만이 아니라 다양한 목소리의 공존을 뜻한다.서로 배타적인 목소리가 공존할 수 있는 개방된 사회가 펼쳐질 때 불모의 삶은 종식되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게 된다.
조이스 문학은 현대인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에 국한되지 않는다.그의 문학의 지향점은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삶의 의미를 생산하는데 있다.조이스가 때로 비판받는 지나친 언어의 말장난은 바로 그가 의미생성에 집착하는 데에서 생겨난다.
새로운 의미생성은 현실상황을 도피하지 않고 ‘지금 여기’라는 철저한 현실감에서 가능해진다.블룸은 이방인으로서의 자기 현실을 은폐하려 하지 않고 이를 수긍한다.고향을 상실한 현대인의 상황을 받아들인다.분열된 현대인의 자아를 부정하지 않고 이를 수용한다.
과거의 통합된 사회,통합된 자아는 폐쇄된 세계이다.오히려 분열된 파편들이 각기 모여 공존하는 사회가 열릴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남편 블룸에게 불만을 가졌던 아내 몰리가 블룸이 처음 프로포즈하던 때를 상기하는 긴 독백으로 이루어진다.푸른 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6월의 만병초 꽃이 만발한 호우드 언덕에서 두 사람은 열렬히 입을 맞췄다.
이미 사랑에 빠진 몰리는 자신이 ‘예스’라는 대답을 하게끔 블룸에게서 프로포즈의 말을 끄집어내던 절정의 순간이었다.상대방을 인정하고,이해하고,긍정한다는 ‘예스’이다.이 ‘예스’로 인해 새로운 삶의 의미가 생성된다.
갈수록 삶이 고달파지고 내 존재의 의미를 회의하는 요즈음의 시대에서 적극적인 긍정은 쉽지 않다.그렇지만 이방인과 방랑인으로서의 현실을 긍정할 때 삶의 의미가 새롭게 생성된다고 하겠다.
<홍덕선 성균관대 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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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아일랜드 소설가, 시인 (1882–1941)
제임스 오거스틴 앨로이시어스 조이스(영어: James Augustine Aloysius Joyce, 1882년 2월 2일 ~ 1941년 1월 13일)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작가로, 소설, 시,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모더니즘의 전위예술에 기여하였으며 20세기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인식되고 있다.[1]
유명한 소설은 《율리시스》(1922)와 매우 난해한 후속작 《피네간의 경야》(1939), 단편인 《더블린 사람들》(1914), 반자전적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 등이 있다. 성인이 되어서 삶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지만, 그의 정신적 가상적 세계는 그의 고향인 아일랜드 더블린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더블린 사람들》에서도 드러나듯 더블린은 그의 소설의 주제와 설정의 많은 부분을 제공해 주었다.
생애
제임스 조이스는 1882년 더블린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라스가(Rathgar)의 브라이턴 서부 스퀘어 41번지에서 아버지 존 스태니스라우스 조이스(John Stanislaus Joyce)와 어머니 매리 제인 머래이(Mary Jane Murray) 사이에서 첫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치에 관심이 높았으나 직업적으로 거의 사회 밑바닥을 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매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제임스를 포함하여 10명의 자녀들을 낳아 가톨릭 신앙에 따라 키우고자 노력하였다. 제임스는 아일랜드의 예수회가 운영하는 클론고즈 우드 콜리지와 벨비디어 콜리지에 다녔는데 예수회 신부들의 교육은 몹시 엄격하고 절대적 복종과 규율을 강조했다. 이러한 교육 하에 제임스는 신부들의 부당성과 잔인성을 알게 되고 가톨릭 종교에서 멀어지고 그의 작품 속에 비판적으로 묘사하게 된다.[2]
문학세계
〈더블린 사람들〉에서는 20세기 초의 더블린 사람들의 냉소적이고 우울한 모습과 당시의 각박했던 사회상을 그려냈다.
가족
부인 : 노라 바나클 (1884년 ~ 1951년)
아들 : 조지오 조이스 (1905년 ~ 1976년)
손자 : 스티븐 조이스 (1933년 ~ 2020년)
딸 : 루치아 조이스 (1907년 ~ 198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