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태양천(太陽天)의 내막 ① 옥봉 사옥교.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자 한 동안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자신이 금 침 위에 누워 있는 것을 깨닫고는 중얼거렸다. '이 곳이 태양천인가?' 그녀는 태실봉에서 여기로 옮겨졌는데, 그 전에 일천 태양영반 중 검령십좌(劍領十座)에게 비밀 정보를 말할 테니 자신을 태양천으 로 데려다 달라고 자청했던 것이다. '그 때 그들은 내 수혈을 짚었었지.' 사옥교는 지금도 이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태양천의 어느 곳이라는 정도를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잠시 머 리가 어지러워 멍한 표정으로 있었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자 사옥교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안색이 일변했다. 핏빛 광채가 몰려들 듯 들어선 자는 전 신에서 혈광을 흘리는 괴인, 혈영자(血影子)였다. "크크... 네가 옥봉 사옥교란 아이냐?" "네." 사옥교는 잔뜩 긴장하여 모기 소리만하게 대답했다. 혈영자는 뒤 로 문을 닫으며 물었다.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그는 침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네. 그것은 극비로써......." 사옥교는 중도에서 말을 그쳐야 했다. 혈영자가 손을 들어 제지시 켰기 때문이었다. 그는 핏빛 안광을 흘리며 말했다. "그 전에 네가 첩자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해야겠다." 그 말에 사옥교는 힘껏 도리질을 했다. "아니에요! 소녀가 어찌 감히 노선배를 속이겠어요? 전......." 혈영자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듯 잘라 버렸다. "노부는 태양천의 천금상이다." 사옥교는 가슴이 떨려와 잠자코 있었다. "너는 노부의 말을 따르겠느냐?" "네, 물론......." "벗어라." "네에?" 뜻밖의 말에 사옥교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혈영자는 그녀의 몸 을 아래 위로 훑어보며 음침하게 말했다. "노부에게는 특수한 비술이 있다. 너를 취해보면 네 말이 사실인 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다." 사옥교는 그제서야 마음이 진정되었다. 혈영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잘되었어. 천금상이란 높은 지위일테니 이 자를 가까이 하면 장차 천주의 눈에 들기도 쉬울 것이다.' 그녀는 야심가답게 이내 안면을 바꾸었다. "호호호... 성급하시기는......." 사옥교는 교소를 지으며 몸을 살짝 비틀었다. 워낙 그 방면의 대 가(?)이다 보니 한 동작도 지극히 유혹적이었다. "으음!" 혈영자는 자신의 손녀뻘도 안되는 여인을 취하려 한 만큼 그녀의 몸짓에서 극도의 음욕을 느꼈다. 사옥교는 몸을 움직여 옷을 벗었다. 그녀의 동작은 사내의 혼을 녹일 정도로 요염했고, 한 겹씩 껍질이 떨어져나갈 때마다 혈영자 는 체면도 잊고 침을 삼켰다. 마침내 그녀는 완전한 나신이 되었다. 혈영자는 형형한 안광을 스 러뜨리는 대신 핥듯이 사옥교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그의 용모는 추악하기 이를데 없었다. 곰보에다 전신 피부에 마치 파충류의 그것처럼 푸르스름한 비늘이 돋아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봐줄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사옥교는 조금도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혈영자가 괴소를 흘리며 물었다. "흐흐흐... 내 모습이 두렵지 않으냐?" "아뇨, 전혀." "나를 낳은 부모조차도 두려워했는데도 말이냐?" "전 쑥맥이 아니에요." "흐음?" 그가 침상으로 다가들자 연한 비린내가 느껴졌지만 사옥교는 역시 개의치 않았다. 그는 걸쳤던 혈삼을 벗어 던졌다. 혈영자는 따지고 보면 불행한 인간이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끔 찍한 외양 때문에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어린 시절에도 줄곧 혼자서 유랑 생활을 해야 했다. 세인들은 그를 짐승 취급했으며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항상 멸시 와 천대 뿐이었다. '하악!' 혈영자가 사옥교를 덮쳤다. 그녀는 전신에 비늘이 돋은 그의 몸이 닿아오자 사지를 활짝 열어 맞아 들였다. 역겹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흐흐흐... 혈영마공을 터득한 뒤로 노부는 달라졌다. 나를 괴롭 힌 모든 인간들에게 복수를 할 수가 있었지." 혈영자는 그녀의 몸에 자신을 밀어 넣으면서도 계속 주절거렸다. 사옥교는 전희(前戱)도 무시한 그의 행위에 질려 버렸으나 입으로 는 짐짓 기성을 발했다. "흐윽!" 이후로 혈영자는 기수(騎手)가 되어 미친 듯이 그녀의 육체를 질 타해 갔다. 이는 응어리진 한에 대한 보상심리였다. ② "하아악......!" 사옥교는 자신의 몸 위로 광풍이 지나간다고 생각했다. ....... 혈영자는 사옥교의 나신에 엎어져 만족스런 웃음을 흘렸다. "흐흐... 넌 꽤 괜찮은 계집이다." '쳇! 정사의 묘미도 모르는 주제에.......' 사옥교는 내심 냉소하면서도 겉으로는 달리 말한다. "흐응, 소녀와 좀 더 가까이 지내시면 더 좋아지실 거예요." 혈영자는 그녀의 유방을 우악스럽게 주무르며 물었다. "네가 제공하겠다는 정보는 무엇이냐?" 사옥교는 그의 손이 싫었으나 태연히 말했다. "네, 그것은......." 그녀는 군웅들의 봉황맹 본거지에 대해 털어 놓았다. "모두 틀림없는 사실이렷다?" 혈영자가 흥분을 내비치자 사옥교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소녀가 이제 와서 왜 거짓을 아뢰겠어요?" "좀더 자세히 말해 봐라." 사옥교는 득의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봉황맹의 실태에 대해 모조 리 얘기했다. 혈영자의 눈에 기광이 어렸다. "흐흐흐......." 그는 사옥교의 아랫배를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네 정보가 전부 사실이라면 놈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게 된다. 그 렇게 되면 너에게도 큰 상을 내리마." 사옥교는 자못 교태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녀는 단지 천금상만 모시게 되면 족해요." "오냐, 알았다."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사옥교의 몸에서 내려왔다. "내 향후로 너를 섭섭지 않게 대해 주겠다." 혈영자는 마음이 급한 듯 곧바로 일어나 장삼을 걸쳤다. '이번 일이 잘되면 천주에게 신임을 얻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될 수 있다. 지금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천문상 온양후를 후대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그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③ 인공연못 위에 떠있는 운치있는 부각(浮閣)이다. 딱... 딱......! 예외없이 바둑돌을 놓는 소리가 들려온다. 천사 온양후는 태양천주를 상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태양천주는 현재 신선 풍모의 노인이었다. 기품도 그렇거니와 동 작이나 음성이 영락없이 고희 노인의 그것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바둑을 두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내가 패했소이다." 온양후가 돌을 던졌으되 태양천주는 겸손히 응했다. "천문상의 양보 덕분이었소." "허허... 무슨 말씀을. 천주께는 노신이 못당하오." 태양천주는 정색을 했다. "천문상." "네." "얼마 전에 중요한 정보가 들어왔소. 백도의 반도에게서 얻은 것 이니 정확성에도 별 문제가 없을 듯 하오." 온양후가 아무 내색도 않자 태양천주는 담담히 물었다. "궁금하지 않소?" 온양후는 허허롭게 웃었다. "헛헛... 천주께서 노신이 여쭌다고 말씀해 주시겠소?" 그는 긴장을 감추기 위해 일어나 바둑판을 치웠다. 태양천주의 무 공은 당세무적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좀체로 드러나 지 않는 그의 본심과 추측할 수 없는 그 깊이였다. 태양천주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그 정보란 백도인들의 은신처에 관한 것이오." "흠!" 온양후는 가슴이 쓰렸으나 그것도 내색할 수는 없었다. 태양천주 도 그의 심중을 아는 듯 했지만 표시하지 않았다. "숭산(嵩山) 태실봉(太室峰), 구련암(九蓮庵)의 지하에 봉황맹이 라는 집단을 형성하고 천마공자와 합세했다는 게요." 온양후는 절망을 느꼈다. '아아! 이제 천하를 구할 방도는 없구나.' 그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천주의 근심거리가 없어졌으니 축하드려야겠구려." 태양천주는 조금도 들뜨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결정을 못 내렸소. 수하들을 보내 그들을 제거해야 할지, 어떨지를 말이오." 온양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천주께서는 끝까지 노신을 시험하시는구려. 그렇듯 중요한 정보 를 미리 알았다면 노신도 계책을 짜 보았을 것이외다." "그 말, 진심이오?" "허허허... 글쎄올시다." 온양후의 애매한 대답에 태양천주는 피식 웃었다. "내 그리 말할 줄 알았소. 아무튼 나는 그 일에 별로 비중을 두지 않소. 까짓 백도의 잔당들이야 어찌 되건 상관없소." "하면......?" 온양후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이번 일에는 천문상도 개입시킬 생각이 없소. 내 전에도 말했지 만 때가 되면 그대는 크게 수고해야 할 일이 있소." "대체 어떤......?" 온양후는 그 일에 대해 물어보려 했으나 또 실패했다. 스스스....... 어느 새 태양천주의 모습은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온양후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그는 언제나 태양천주에 대 해서라면 안개처럼 몽롱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이제껏 지혜로는 해결하지 못한 것이 없는 온양후이건만 태양천주 에 관한 사항만은 줄곧 오리무중이었던 것이다. '군웅들을 제거하는 것보다 더 비중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또 내 가 크게 수고해야 할 일이란......?' 그는 시선을 돌려 연못을 바라보았다. '정말 알 수 없군. 그의 무공과 지략이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 거늘, 무슨 비밀을 계속 지니고 있는지.......' 노을이 비친 연못은 그를 더욱 침울하게 만들었다. 그 핏빛이 마 치 백도의 종말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아!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나 문득 온양후는 생각난 듯 중얼거렸다. '그렇군. 오늘은 철엽이 살인령을 시행하는 날이다. 결정을 내려 주어야겠다. 후후... 그것마저도 실패하면 나도 더 이상은 세상을 살아갈 필요가 없겠지?' 그는 낙조에 물든 하늘로 시선을 옮겨갔다. "려아야, 오늘따라 네가 더 보고 싶구나." 그의 눈시울이 젖었다. "불쌍한 녀석......." ④ 운중산(雲中山). 운무에 가리워진 풍경이 신비롭다기 보다는 왠지 음산하다. 그 가 운데 우뚝 서 있는 고봉의 형상도 기괴하기 그지 없어 선뜻 오를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스스스......! 고봉의 한 끝에 내려선 한 인영이 읊조렸다. "태양천주가 왜 이 곳을 본거지로 삼았는지 알겠군." 그는 주위를 둘러 보며 계속 중얼거렸다. "단천애라......." 용비운이었다. 그가 내려선 곳은 단천애였다. 문자 그대로 하늘을 자른 듯 깎여져 나간 벼랑이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그 곳에서 그는 푸른 달빛을 온 몸으로 받으 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군. 내 안력으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모래알 을 헤아릴 정도였거늘,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니." 그랬다. 그는 운무 속을 꿰뚫어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심하기를 한참여. 용비운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음! 이 운무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진세에 의한 것이다." 그는 진세를 가늠해 본 결과, 그 배치를 알아내고는 놀라움을 금 치 못했다. "정말 교활하게 안배된 진세다. 보보마다 위험이 중첩되어 있어 웬만큼 상식이 있어도 비명횡사하기 쉽상이다." 다행히도 기문진학에 관한 그의 지식은 일반의 상식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는 지체없이 신형을 날렸다. 스스스....... 그는 아득한 벼랑을 허공에 뜬 채 날아가고 있었다. 얼마쯤 가자 자욱한 운무 속에 우뚝우뚝 솟아오른 석주(石柱)들이 보였다. 그것은 징검다리 격이었는데, 오 장에서 십 장 간격으로 솟아 있었으며 인공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용비운은 석주를 하나씩 밟으며 쾌속하게 전진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운무 속에서 수림이 우거진 지반에 당도했다. 원반형을 이룬 그 지반은 거인이 손으로 떠받친 듯한 형상이었다. 그 곳에 내려선 그는 긴장을 다졌다. '저 속에 태양천이 존재하나 본데 주의해야겠군.' 용비운은 일단 안력을 높여 수림지대를 관찰했다. 그의 전면으로 는 무릎 높이로 풀이 자라 있었고, 그 풀숲이 끝나면서부터는 송 백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아무리 주위를 살펴 보아도 경비무사나 매 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듣던 바와는 다르군. 왜 이렇게 경비가 허술할까?' 그래도 그는 방심하지 않고 환혼사유술을 전개했다. 스스스....... 그의 환신(幻身)이 육신을 떠나 전광처럼 날아갔다. 이어 환신은 송백림을 한 바퀴 돌았으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시 한참의 숙고 끝에 그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 그것이다. 태양천주는 자신의 수하조차 못 믿을 정도로 의심 이 많은 자다. 그래서 경비무사 대신 이 곳에 복잡한 기관진세와 함정을 설치함으로써 경비를 대신했구나.' 용비운은 히죽 웃었다. '차라리 그의 성격이 도움이 되는군.' 그런데 그가 막상 풀밭으로 신형을 날렸을 때였다. 츳! 츠으으......! 갑자기 핏빛 혈초(血草)가 솟아올라 그의 발목을 휘감았다. '흡!' 그는 아연실색했다. 이런 경우는 그도 처음 당하므로. 그것은 일명 흡혈사초(吸血死草)라는 것으로 남만지방에서 자생하 는 일종의 식인초였다. 피냄새나 생물체를 감지했다 하면 즉각 움 직여 공격을 가해오는 무서운 식물이었다. 흡혈사초는 금세 용비운의 하반신을 완전히 휘감아 버렸다. 그러나 그 끔찍한 식물도 천마금강지체를 이룬 그의 피는 한 방울 도 빨 수가 없었다. 그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투... 투툭......! 흡혈사초는 힘없이 끊겨져 나갔다. "별 것도 아닌 것이 사람을 놀라게 했군." 용비운은 중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가 송림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하 지만 난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니....... 그가 송림에 들어서자 주위 풍경이 싹 바뀌었다. 송림은 어디로 가고 아찔한 벼랑과 험단절지가 그를 가로막았다. 그는 그것들이 환영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일시지간 머리가 혼란해지고 말았다. 본래 진법이란 설치자가 아니고서는 파진법 (破陣法)을 알아 내기가 지난한 법이기에. 용비운은 한참의 시간을 허비해 간신히 진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그 뿐이 아니었다. 백팔수라철탑대진(百八修羅鐵塔大陣), 혼천미로대진(混天迷路大 陣), 혈사류(血死流), 만년장독지(萬年 毒池) 등 모두 극랄하기 이를데 없는 절진, 또는 함정들이었다. 용비운은 그 모든 것을 통과하고서야 넓은 평지에 다다랐다. 그는 시야가 탁 트임과 동시에 수많은 누각들을 볼 수 있었다. 누각들 은 규모가 컸으며 위용도 무쌍했다. 그것이 바로 신비를 벗은 태양천의 전경이었다. 스스스......! 용비운은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그는 천면환용기환술로 주위의 바위나 지형지물로 화해 안으로 스며 들었다. '한 놈을 잡아 이 곳의 구조와 천사의 거처를 알아야겠군.' 그는 지면에 낮게 깔린 채 은밀히 움직였다. 설사 유령이라 한들 그의 실체를 알아보기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전각군에서는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접근해 갔다. ⑤ 황촉(黃燭)의 촛농이 흘러내려 촛대가 굵어져 간다. 천사(天邪) 온양후는 침상에 걸터앉아 미간에 구기고 있었다. 그 는 고심 중으로 머릿 속이 복잡하기 그지 없었다. 촛불에 의해 그의 뒤에는 그림자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의 체구는 왜소했으나 그림자는 그 두 배에 가까웠다. 그림자 속에는 한 인영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자세 히 보지 않으면 결코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자는 냉막한 면모의 중년인으로 품에 한 자루의 첨도(尖刀)를 안고 있었다. 섬뜩한 것은 그의 자세가 언제, 어느 때라도 발도 (拔刀)할 수 있는 자세라는 점이었다. 그는 살인정주(殺人井主)인 무정사신(無情死神) 철엽(鐵葉)이었 다.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이 떨어졌다. "태양천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봉황맹이 위험하지 않소? 소제가 이 곳을 떠나 위험을 알리겠소이다." 그 말에 온양후는 고개를 저었다. "철노제, 자네는 군웅들의 안위와 천하무림의 운명 중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가?" 철엽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비해 그는 담담히 말했다. "봉황맹에 모인 군웅들이 전부 죽는다 해도 무림이 결단나지는 않 네. 하지만 태양천주가 살아 있으면 그리 되네." 온양후는 입가에 묘한 웃음을 매달았다. "자네는 태양천주의 목숨을 노리기 위해 오늘까지 불명예를 감수 하고 살아오지 않았나?" "그렇다면......?" 철엽의 안면이 마구 씰룩였다. 그는 본래 협사는 아니라도 장부와 무인으로서의 의기는 지니고 있었다. 태양천주에게 완패하여 어쩔 수 없이 그 수하가 되기는 했지만. "노선배, 사실 그는 소제에게 몇 번의 기회를 주었소. 그러나 소 제는 그 때마다 그의 옷자락 하나 베지 못했소." "흐음! 그런 일이 있었나?" "어쨌든 소제 비록 세상에 한이 많아 살인단체의 괴수가 되었지만 누구를 상대로든 신의 만큼은 반드시 지키오." 온양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나는 자네가 천하무림을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 준 것을 늘 감사히 생각하고 있네." 철엽은 칭찬에도 일체 흔들리지 않았다. "그게 아니오. 소제가 열 번의 기회를 모두 사용한다면 다시는 그 에게 칼을 들이대지 못할 것이오." "그럼......?" 온양후의 얼굴이 촛불에 몹시도 일렁였다. "소제는 모두 아홉 번의 기회를 사용했소. 오직 한 번의 기회가 남아 있다는 얘기요." "으음......." 그의 신음을 들으며 철엽은 계속 말했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이오." "아홉 번을 실패했는데... 이번이라고 성공할까?" 철엽의 안광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번뜩였다. "살수에게 있어 실수란 곧 죽음이오. 소제는 아홉 번을 실패했으 니 아홉 번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소. 나는 그 치욕 속에서 완벽 한 살식(殺式)을 창조해 냈소." "오오!" "사각(死角)의 도(刀)가 그것이오." 온양후는 과연 지혜로웠다. "사각의 도라...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의 발도겠군." 철엽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말만 했다. "소제가 노선배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태양궁으로 잠입하는 방 법이오. 그것을 내게 일러 주시오." 온양후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태양궁은 무적불파(無敵不破)의 천강지살(天 地煞)의 진세가 주 야로 지키고 있네. 삼십육천강(三十六天 )은 낮 여섯 시진을, 칠 십이지살(七十二地煞)은 밤 여섯 시진을 담당하고 있지. 따라서 유일한 잠입 방법은......." 반쯤 열려진 창문 사이로 한 가닥 연기와도 같은 인영이 스며든 것은 그 때였다. "그 방법을 제게도 일러 주십시오." 흑의경장 차림의 그 인물은 용비운이었다. 소리없이 방 안에 내려 서는 그를 보자 온양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얘기하는 동안에도 천사신이통으로 주위를 감시하고 있었거늘, 언제 이 자가 이렇게 가까이 왔더란 말인가?' 용비운을 향해 하나의 그림자가 바닥에 깔리며 무서운 속도로 도 광을 흘렸다. 츠읏! 그 공세를 주의한 사람은 없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공격, 사각 의 도란 그것이었다. 피신도 반격도 불가능했다. 사각! 그 완벽한 살식은 용비운도 피하지 못했다. "헉!" 비명과 함께 그의 신형이 주르르 밀려 나갔다. 도(刀)는 정확히 그의 턱밑에 박히려다 또한 튕겨져 나갔다. 반면에 비장의 살식을 전개한 철엽은 자신이 틀림없이 상대를 죽 였다고 확신했다. 그것은 손에 느껴진 감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피를 뿜으며 쓰러져야 할 상대는 단지 손으로 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낭랑하게 말하고 있었다. "완벽한 살식이오." 철엽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금강불괴......!" ⑥ 황촉의 촛불은 소리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온양후는 본래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철엽도 그 뒤에 그림자 처럼 앉아 있었고, 용비운만이 창문가에 기대서 있었다. "촛불을 끌 시각이 되지 않았습니까?" 용비운이 묻자 온양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해시(亥時)가 되지 않았네. 그보다 자네는 누구인가?" "차음기공을 펼쳐 놓았으니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 것은 우려하 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나?" 용비운은 빙그레 웃었다. "그 동안 별래무량 하셨습니까? 원주(院主)." "원주라니......?" 온양후는 비로소 경계를 풀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용비운의 얼굴 이 점차 변해 준수한 진면목을 회복해 갔다. "용공자!" 온양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하하... 이제야 알아 보십니다, 그려." 온양후는 당장이라도 침상 아래로 내려가 그의 손을 부여잡고 싶 었으나 때가 때이니만치 침착을 잃지 않았다. "자네, 무사했군. 려아는 어찌 되었는가?" "무사합니다. 그 간에 구음절맥도 치유되었지요." "뭐, 뭣이?" 온양후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물었다. "자네... 설마 이 늙은이를 놀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얘기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속히 저와 함께 이 곳을 탈출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자세히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럼 자네는 나를 구해 내기 위해 이 용담호혈로 뛰어 들었단 말 인가?" 그의 기쁨과 감격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용비운은 온주려와 헤어진 후 항산 은한림으로 간 대목부터 대충 얘기했다. 그 속에는 강호일정 용비운의 죽음과 그의 명성을 빌리 게 된 자신에 대한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씁쓸히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주려는 삼대혈공, 천절칠환사 등과 태실봉 봉황맹에 있습니다. 공공천야께서도 함께 계시지요." 철엽이 무거운 어조로 말을 받았다. "공자는 지금 봉황맹을 토벌하기 위해 태양천의 고수들이 출동한 사실을 알고 있소?" 용비운은 흠칫하여 온양후를 바라보았다. 온양후는 배꼽까지 내려 오는 긴 수염을 천천히 내리 쓸었다. "천주로부터 들었으니 틀림없을 것이네." "그런데 어찌 태연하십니까? 애지중지하시던 손녀가 위기에 처했 는데도 걱정되지 않습니까?" "허허... 노부의 손녀는 고금제일의 오성을 지닌 아이네. 게다가 정도제일의 지자인 공손찬과 백도의 정예 고수들이 운집해 있는데 내가 왜 걱정을 한단 말인가?" "과연 천사이십니다. 실은 맹에서도 태양천의 기습을 예상하고 있 으니 큰 위험은 없을 것입니다." 철엽이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그 비열한 반도는 누구요?" "옥봉이라고도 불리우는 녹월서시 사옥교요." "그 계집은 내가 죽이겠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온양후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허허... 놔 두게. 그 계집은 스스로 죽음의 길로 뛰어 들었거늘, 또 어떻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무슨 뜻이오? 그 말은." "공손찬과 려아가 있으니 태양천은 대패를 당할 것이네. 그렇게 되면 혈영자가 그 계집을 가만히 두겠는가?" 용비운이 밖의 동태를 살피며 말했다. "어르신, 지금 나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온양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부는 나갈 수 없네." "왜......?" 용비운은 너무도 뜻밖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온양후는 그 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봉황맹에는 내가 필요없네." "그렇다면 여기 남아 내분이라도 꾀하시겠단 말씀입니까?" 온양후는 시치미를 뚝 뗐다. "노부가 언제 내분을 꾀한다고 했는가?" "어르신, 그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다 만일 발각이라 도 되면 어르신의 생명은......." "스스로 지키지 못할 생명이면 누구도 지켜주지 못하네." 온양후는 웃음기를 지우며 진지한 어조로 당부했다. "그냥 돌아가게. 가서 노부의 뜻을 전하면 공손찬은 그에 대비할 것이네. 노부도 려아의 소식을 들었으니 금후로는 마음 놓고 계책 을 강구할 수 있네." 이쯤 되자 용비운도 그의 의견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사라의 구출 문제는 어찌해야 합니까?" 온양후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건 어려운 일이야. 그녀는 태양궁 안에 있거든." 용비운은 그 일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어르신께서는 태양궁의 출입 방법만 말씀해 주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철엽이 나섰다. "용공자, 태양궁의 잠입은 내 임무외다." 용비운이 모르는 부분은 온양후는 대신 설명했다. "무정사신은 천후의 신임을 받고 있지. 그녀는 천주가 사라에게만 빠져 있어 잔뜩 부아가 났네. 무정사신으로 하여금 사라를 죽이라 는 명령을 내렸어." "그 참에 잠입하여 태양천주를 척살할 계획이었습니까?" 온양후는 안색을 굳혔다. "그런 셈이지." "불가능합니다." "왜, 사각의 도는 공자도 피해내지 못했지 않소?" 철엽이 따지고 들자 용비운은 잘라 말했다. "그건 내가 이처럼 버젓이 살아있기 때문이외다. 그 자도 금강불 괴지신이라면 정주의 살식은 수포로 돌아가오." "태양천주는 금강불괴지신을 이루지 못했소." 용비운은 거듭 분명한 음성으로 응대했다. "잠입은 그렇다쳐도 빠져 나오는 문제는 또 다르오." "나는 살아나올 생각은 버린지 오래요." "한 가지 더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소. 태양천주가 만일 태양궁 안에 없다면, 그 때는 어찌 하겠소?" 철엽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실상 태양천주의 움직임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는 출타할 때도 아무도 모르게 한다. 용비운의 말대로 태양궁 안에 그가 없 다면 자신은 영원히 그를 죽일 기회를 잃게 된다. ⑦ 용비운은 철엽의 동요를 눈치채고는 더욱 고삐를 조였다. "정주, 당신이 불명예를 감수하면서까지 태양천의 일원으로 활동 해온 것은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태양천주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소?" "맞소." "그러면 왜 구태여 철옹성으로 뛰어드는 악조건 하에서 그 일을 벌이려 하시오?" 철엽은 고집을 꺾었다. "좋소! 내가 졌으니 용공자의 뜻대로 하시오." 그 틈에 온양후가 끼어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자네도 태양궁에 뛰어들면 안되네." "아니, 저는 무슨 이유에서......?" "사라만 있다면야 구출할 수 있겠지. 그러나 태양천주가 같이 있 다면 자네도 어쩔 수 없이 그냥 나와야 할 것이네." 그는 뭐라 말하려는 용비운을 막았다. "그녀가 혼자 있더라도 태양궁을 벗어나기를 거부한다면 자네는 공연히 헛고생만 하는 격이 되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온양후는 혀를 끌끌 찼다. "사라가 태양천주의 여자가 된 지도 근 반년에 가깝네. 태양천주 가 어떤 위인이건 예속된 여자는 떠나기를 거부하지." "아! 그럴 수도......." 온양후는 천색으로 시각을 가늠하고 촛불을 껐다. 어둠이 덮힌 실 내로 열려진 창문을 통해 희미한 월광이 스며 들었다. "자네가 그녀를 빼내 가면 내가 곤란해지네." "그 말씀은......?" "사라는 구출되어 갔는데 내가 여전히 남아 있다면 천주의 의심을 사기 쉽상이지." "그렇군요." 용비운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양후가 침상에서 내 려서며 그의 손을 쥐었다. "자네는 이 곳에 왔다는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게 좋겠네." "알겠습니다. 깨끗이 돌아가도록 하지요." "잠깐, 자네 태양십군(太陽十軍)의 약점을 알고 싶지 않나?" 용비운은 눈을 번쩍 떴다. "어르신께서 알고 계십니까?" "노부도 모르네만 천후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네." 용비운은 어이가 없었다. "절더러 그녀를 만나보란 말씀입니까?" "자고로 여인의 질투란 무서운 법이야. 의외로 남자를 망가뜨릴 수도 있거든?" 용비운은 일 년 전, 운익대서원에서 보았던 그녀의 요악하면서도 거만한 자태를 뇌리에 떠올렸다. '그래, 그녀라면 능히 일을 저지를 수도 있으리라.' 온양후는 철엽에게 지시했다. "자네가 금성까지 용공자를 안내하게. 그래야 자네도 사라를 죽이 지 못한데 대한 징계를 면할 수 있네. 모든 일은 용공자가 하기 나름이지만." "알겠소이다." 용비운은 작별인사를 했다. "다시 뵐 때까지 존체 보중 하십시오." "무운을 빌겠네. 그리고... 려아를 잘 부탁하네." "네, 어르신." 두 노소는 눈빛을 통해 뜨거운 정을 교환했다. ⑧ 금성(禁城)은 태양궁의 반대편에 위치한 화려한 수정궁이다. 하지 만 주인의 상심에 궁전마저 음울해 보인다. 천후(天后) 하옥군(霞玉君). 그녀는 중천의 은한 속으로 쓰러져 가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아름다웠다. 창문가에서 야천을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은 달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사라, 요사한 계집! 넌 죽어야 해." 음성만은 피내음이 물씬 풍긴다. 그녀는 엷은 잠옷만을 걸친 자신 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내가 뭐가 모자라서? 더구나 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었는데 어째서 나를 저버리고 그 계집에게 빠졌지?" 하옥군은 쓰린 심정을 안고 침실로 돌아섰다. 보나마나 크고 화려 한 침실은 텅 비어 있으리라. 그녀는 벌써 오 개월 째 독수공방으 로 부군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진귀한 침향목 원탁을 앞에 두고 한 명의 흑의 청년이 단정히 앉 아 있었다. 창문을 제외한 모든 문이 봉쇄되었건만 이 심야의 침 입자는 멀쩡하게 침실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누구냐?" 하옥군은 천후라는 신분답게 경망되이 놀라움을 표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이 신비로운 침입자에 대해 상당한 호기심 마저 가 지고 있었다. 용비운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일례를 올렸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천후." 하옥군은 그와 마주 앉았다. "대담하군. 앉아도 좋다." 그녀는 상대의 얼굴을 응시하다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초면이 아니군? 아, 그렇지. 운익대서원에서 보았어." "기억해 주셔서 감사하구려. 본인은 천마공자라 하오." "천마공자? 그대가......?" 하옥군은 크게 놀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천마공자라면 공손찬과 함께 태양천에서 양대 천적으로 손꼽는 인물이었다. 그 가 자청하여 태양천의 심처로 찾아 들었으니....... "용기가 가상하군. 그러나 살아 돌아갈 생각을 하고 온 것은 아니 겠지?" 하옥군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살폈다. '악의로 방문한 것은 아니로군.' 용비운은 단도직입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갔다. "천후에게는 부군 되시는 태양천주가 중요하오, 아니면 천하무림 을 석권하는 일이 중요하오?" 하옥군은 눈치가 지독히도 빨랐다. "협상인가?" "혹시 잃어버린 부군을 되찾고 싶지 않소?" "호호... 나의 약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왔군." 하옥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산호 장식의 벽장으로 다가섰다. 그녀 는 두 개의 백수정잔과 하나의 비취빛 술병을 꺼내 왔다. "아주 오랫만에 말이 통하는 인물을 만났어." 그녀는 두 개의 잔에 술을 따랐다. "축배부터!" 용비운은 그녀의 잔에 건배하고는 단숨에 한 잔을 들이켰다. 하옥 군은 서너 잔을 거푸 비우고서야 입을 열었다. "천주는 나에게 남편이자 원수이기도 하지." 그녀는 취기에 빠져들며 허탈하게 말을 이었다. "나의 왕국을 멸망시킨 흉수... 하지만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어. 나는 그를 너무도 사랑하 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여자니까." 하옥군은 신세한탄을 하고는 툴툴 마른 웃음을 흘렸다. "훗, 이런 날 보고 남편을 배반하라고?" 용비운은 대충 그녀의 심정을 짚어갔다. '이 여인은 극도의 상심으로 냉정을 잃고 있다.' 하옥군은 깔깔거리며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그래,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태양십군의 파괴 방법이오." 용비운은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자 하옥군은 입 술을 파르르 떨며 안면에 노기를 드리웠다. "죽고 싶으냐? 날 무시하다니." 용비운은 정색을 지었다. "나는 당신의 술주정이나 받아 주려고 온 것이 아니오. 나는 무림 의 정통성을 보존하기 위해, 당신은 사모해마지 않는 남편을 되찾 기 위해 진지하게 얘기해야 할 것이오." 그의 강경한 태도는 오히려 하옥군의 노기를 풀어 주었다. "당신은 내게 틈을 주지 않는군. 호호... 좋아, 그 편이 아첨하는 것보단 훨씬 낫지."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새삼 흩어진 옷매무새를 여몄다. 엷은 잠옷 밑으로 출렁이는 그녀의 탄력있는 육봉이 용비운의 눈 에는 차라리 서글퍼 보였다. "태양십군의 파괴 방법은 천하에 오직 한 사람만이 알고 있어.천 주도 그저 불파(不破)의 병기로만 알고 있지." "그가 누구요?" "서하국(西霞國)이란 곳을 알고 있나? 그 곳에 가면 알아낼 수 있 지. 그 아이 홀로 남아 왕국의 최후를 지키고 있는......." 하옥군은 목이 메이는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서하국이란 중원과 서장 사이에 위치해 있다는 신비의 소왕국이었 다. 특히 서하국의 재보(財寶)는 어마어마하여 그것을 풀면 중원 전체를 살 수 있을 정도라는 일설이 있다. 하옥군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원탁에 기대 앉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겠다." "말하시오." 용비운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옥 군은 술잔을 기울여 한 모금을 또 들이켰다. "태양십군이 파괴된다 해도 나의 남편을 이기기는 어려울 게야. 그는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초인(超人)이지. 만에 하나, 태양천이 붕괴되더라도 그를 죽이지는 말아." 용비운은 선뜻 약속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요구였 다. 죄과가 큰즉 중론이 그를 죽이자면 어쩌겠는가? ⑨ 하옥군은 입술 꼬리를 묘하게 말아 올렸다. "왜, 알 것을 알았으니 약조를 할 수 없단 말인가?" "그건 아니오. 나혼자 결정할 일이 아닌지라......." "이걸 알아야 해. 지도가 없으면 서하국은 찾아낼 수 없어. 그대 들은 태양십군의 마수 아래 멸절될 테고." 하옥군은 교구를 일으켰다. "서로의 요구가 맞지 않으니 이 협상은 결렬이군." "잠깐!" 용비운은 그녀를 불러 도로 앉혔다. "우리 측에는 늘상 태양천주의 목숨보다 천하의 안녕이 더 중요했 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요. 그가 위협이 되지만 않는다면 실 종으로 처리해줄 수 있소." "맹세하는가?" "물론이오." "기다리라." 하옥군은 침상 아래 기다란 목갑에서 두 개의 두루말이를 꺼내 들 었다. 그녀는 용비운에게 두루말이를 넘겨 주었다. "하나는 서하국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이고... 또 하나는 태양천의 구조와 경계 상태에 대한 지도이다." "천후......." 용비운의 음성이 흔들리자 그녀는 자존심 탓인지 신형을 홱 돌려 침상으로 향했다. "나는 태양천이 붕괴되는 것도, 보존되는 것도 원하지 못한다.앞 으로의 모든 것은 운명에 맡길 뿐." 그녀는 손가락에 낀 옥환을 그에게 던져 주었다. 그 자옥환(紫玉 環)에는 전체적으로 무수한 봉황이 음각되어 있었다. "서하국의 그 아이에게 이 천봉옥환을 보이면 모두 말해줄 것이 다. 안할 수도 있지만 그건 그대의 수완에 달렸다." 그녀는 괴로운 듯 침상 위에 푹 쓰러졌다. 용비운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남편이 쌓아 올린 대 업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사랑을 되찾으려 하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 지야 누가 알겠는가? "고맙소, 천후." 그는 한 줄기 연기로 화해 수정궁을 빠져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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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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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ㄳ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