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태양천주(太陽天主), 그는... ① 태실봉에 이르려면 하나의 험준한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골짜기 는 나선형을 이루고 있어 마치 구렁이가 또아리를 튼 듯하니, 선 망곡(旋 谷)이라 불리워진다. 두 개의 강렬한 불덩이가 나타났다. 그것은 화갑을 걸쳐 입고 태 양천봉을 비껴 쥔 태양십군 중 쌍군이었다. 화르르르― 이들의 화력을 앞세우고 소리없이 전진해 가는 일단의 무리가 있 었다. 수효가 족히 일백이 넘을 듯한 그들은 태양천의 일천 태양 영반 중 하남 일대를 관장하는 백대영반이었다. 태양쌍군과 백대영반 사이에는 또다른 여섯 명의 인물이 끼어 있 었다. 혈영자와 태양천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변황제일인 변황천 불, 십이대천마 중 생존해 있는 사대천마 등이었다. 혈영자가 선망곡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옥봉, 다른 길은 없느냐?" 옥봉 사옥교는 냉큼 대답했다. "보기보다는 그다지 길지 않아요. 이 곳만 지나면 백도인들이 은 신해 있는 구련암이 보이죠." 혈영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봉황맹 토벌을 확신하고 있어 계곡 의 지형에서 느껴지는 불안감도 쉽게 떨쳐 버렸다. '감히 누가 본 천에 대적한단 말인가?' 반면에 심마는 혈명사엽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흡사 거대한 소라 고둥 속을 오르는 기분이다. 만일 위아래서 놈 들이 공격을 해온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 그는 혈영자와는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천 년 이래 한 번도 사마에게 완전히 제압된 적이 없는 백도의 저력을 의식했 기 때문이었다. 그는 혈영자의 옆으로 다가섰다. "천금상, 태양쌍군을 보내 계곡 상단을 지키게 하십시다." 혈영자도 그 말에는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쌍군은 계곡의 출구를 지켜라!" "캬오오오―! 쌍군은 괴성을 발하며 불길과 함께 솟구쳤다. 대기 중이던 백도 측의 두 사람, 즉 고죽군과 화옥미가 환영(?)했다. "태극천수!" 고죽군의 일수가 태양일군의 가슴에 적중되었다. 쾅! "끄으으......!" 태양일군은 기괴한 신음과 더불어 일 장 정도 미끄러졌을 뿐 끄떡 없었다. 청강석도 단번에 파괴된다는 태극천수의 위력도 태양일군 에게는 약간의 충격을 주는데 그쳤던 것이다. 사정은 화옥미라 해서 다를 바 없었고, 두 사람은 일신의 공력을 최대한 쏟아 내면서도 태양쌍군의 반탄지기에 떼밀려 계속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 광경을 보며 혈영자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으으... 네 년이 감히 거짓 정보로 태양천을 우롱해?" 사옥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변명했다. "아... 아니에요, 이건 뭔가 일이 잘못된......!" 그녀의 눈에 막 당도한 공손찬 일행이 보였다. 동시에 그녀는 혈 영자의 손이 자신의 목덜미를 잡아채는 것을 느꼈다. '끝났군!' 피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사옥교는 올가미에 걸린 사 슴처럼 파들파들 떨다가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한 채 목이 졸려 죽고 말았다. 이렇듯 그녀를 간단히 처치한 혈영자가 크게 외쳤다. "기습은 실패다. 모두 구련암으로 가라!" 일백 태양영반은 대오에 관계없이 휙휙 날아올랐다. 콰르르르―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린 것은 그 때였다. 태양천의 고수들은 의외의 사태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콰르르르릉― 골짜기 위로부터 무수한 바위덩이들이 그들을 내리덮쳤다. "앗! 피해라―!" 고절한 무학을 자랑하는 일백 태양영반도 바위 세례에는 대책이 없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함정이었으되 욱일승천의 기세로 날 뛰던 그들을 곤두박질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더구나 나선형의 골짜기에서는 퇴각도 용이하지 않았다. ② 콰르르릉― 콰쾅―! "크아아아악―!" 바위덩이에 깔리고 으스러지는 육편(肉片)들이 사방으로 핏물을 뿜어내자 가살불가욕(可殺不可辱)을 외치며 세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그들도 저마다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상황이 이쯤되고 보니 바위덩이와 맞서는 무지한 충성을 보이는 자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화르르르륵― 쿠르르르― 암석더미에 이어 거대한 불의 수레바퀴가 맹렬하게 굴러 내려왔 다. 그로 인해 일백 태양영반들은 기겁을 하며 몸을 빼내기 위해 서로 밀치고 밟는 등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그 다음으로는 목극렴과 십대금사, 삼대혈공, 천절칠환사, 오대고 수와 봉황맹의 군웅들이 우렁찬 함성과 함께 전열이 흩어진 태양 천의 수하들을 향해 밀물처럼 쏟아져 내려갔다. 와중에서 가까스로 냉정을 되찾은 혈영자가 다급히 명했다. "태양십환금쇄진을 구축하라!" 그에 따라 살아 남은 오십여 태양영반들이 즉시 태양십환금쇄진을 구축하며 군웅들을 상대해 갔다. 위이이이잉―! 진세는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군웅들과 정 면으로 맞부딪쳐 갔다. 파파파팍―! 선두에 선 몇몇 군웅들이 그 기세를 당하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그러나 여기에 대비한 공손찬의 안배가 있었다. "극사패공(極邪覇功)!" 삼대혈공 중 극사혈공이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다가 태양십환금쇄 진의 정중앙으로 돌진해 갔다. 진세를 구축한 영반들은 크게 당황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 은 얼마든지 차단시켜도 한가운데로 파고드는 공격의 대응책은 미 처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이야말로 태양십환금쇄 진의 정확한 파해법이었다. 콰쾅―! 급기야 진세가 찢어지며 오십여 영반들은 산산이 흩어졌고, 그들 을 맞아 군웅들이 기다렸다는 듯 맹공격을 퍼부었다. 차차차창― 펑! 퍼퍼펑―! 선망곡은 삽시에 피의 골짜기로 화해 버렸다. 공손찬과 온주려. 두 사람은 구련암의 입구에서 나란히 바퀴의자에 앉아 있었다. 온 주려가 잔잔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진행 되었어요. 저들도 이번 싸움에서 계략 이 자신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았을 거예요." 공손찬이 말했다. "음, 다 좋은데 태양쌍군이 문제로군." 온주려는 그의 눈이 되어 기슭 한편에 설치된 천압대진(天壓大陣) 을 살피더니 설명해 주었다. "고죽군 노선배와 옥미 언니의 유인에 걸려들긴 했지만 십만 근의 압력을 지닌 천압대진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꽝! 꽝! 연이어 폭음이 터졌다. 칠 색의 강막이 펼쳐져 있는 천압대진이 태양쌍군의 마력을 이기지 못해 폭발했던 것이다. 공손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녕 인간의 능력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마물들이네." 온주려는 타는 듯 붉은 서천을 응시했다. "결과적으로 용오빠가 파괴 방법을 알아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 는 도리 밖에 없군요." 태양천. 그들은 처음으로 대패(大敗)를 기록했다. 무리들 중 백대 태양영반은 몰살했고 혈영자, 태양쌍군, 범패륵, 심마, 검마만이 겨우 생존해 귀환했다. 철마는 암석더미에 깔려 죽었으며, 환마는 사환혈공의 혈사지공에 분사했다. 하지만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가? 곤륜산에서 날아온 비보(悲報)는 태실봉 봉황맹의 군웅들로 하여 금 승리의 기쁨도 잊게 만들었다. ③ 곤륜산 야황곡. 천 년을 이어 내려온 불사천황성이 일대 위기를 맞았다. 정사(正 邪) 개념을 떠나 태양천과의 일전을 치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사천황성을 공격해온 오백여 무리들은 다름 아 닌 오행천군도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도주 사렴빙후 해 령령이 꼿꼿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고죽군, 나는 그 분을 절대 놓칠 수 없어." 설명하자면 대사를 그르친 것은 그녀였다. 병적인 애정과 집착으로 인해 전날에도 을목상군을 어지간히 괴롭 혔던 그녀가 마침내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그녀는 몰래 태양천주를 만났고, 그와 결탁하여 사형들인 을목상 군과 금륜패왕, 적융염왕 등을 제거했다. 그리고는 오행천군도의 고수들을 이끌고 야황곡으로 왔던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의 한마디로 인해서였다. - 불사천황성을 격파하면 고죽군을 넘겨 주겠다. 그 때는 고죽군이 태양천주의 수중에 묶여 있을 시기였으므로 그 녀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그 제안을 수락했다. 아울러 그녀는 자신의 애정을 숭고하다고 여기며 오늘에 이르렀다. 사형들도 암습하여 죽이는 마당에 오행천군도의 제자들을 이용하 는 것쯤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차라리 순리였다. 불사천황성의 침입자는 그들 말고도 또 있었다. 대밀종천(大密宗天). 그 곳의 대제자인 아목함을 필두로 일천여 명에 달하는 변황의 절 정고수들이 야황곡에 당도해 있었던 것이다. 아목함을 청해 태양천주는 이런 말을 했다. - 불사천황성을 쳐라. 그 정도면 그대의 사부인 범황천불과 누이 사라를 살리는 조건 치고는 아주 미약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목함은 사대존자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중원의 경 계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는 진세에 싸여 있는 불사천황성을 내려 다 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제자들은 사부를 위해 죽는 것을 크나큰 광영으로 생각하고 있습 니다. 사부의 뜻이 어떠 하시던......." 그 눈에서는 결연한 의지가 피어 올랐다. "태양천주! 만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 때는 대밀종천의 전 제자들이 태양천과 일전을 불사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같은 천마일맥인 오행천군도, 서역의 지배자인 대밀종천, 그들 천오백여 군단이 불사천황성을 덮쳐갔다. "쳐라―!" "와아아아아―!" 천마후 설화군. 그녀는 백 년 만에 남편과 해후한 후로 두 달 간의 이별을 또 거 치게 되자 외로움을 못견뎌 부르짖고 있었다. "염병할 늙은이! 원수가 따로 없다니까." 그러나 창 밖을 내다보던 그녀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기습자들로 인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감히... 감히 어떤 찢어죽일 놈들이 본 성을......!" 설화군은 급히 전륜(轉輪), 혈예(血藝), 붕천(崩天), 천강(天 ) 의 사대마각주들을 소집했고, 그들에 이어 십이원주도 황망히 성 도들을 모아 기습자들을 상대해 갔다. 물론 천극사패왕도 이 대전 에 빠지지 않았다. 대혈전(大血戰)! 그 결과란 참담했다. 오행천군도와 대밀종천의 제자들은 거의 전 멸했으며 불사천황성의 성도들도 성을 사수하기 위해 무수히 피를 뿌렸다. 그리고....... "아악!" 수렴빙후 해령령은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에 풀썩 고꾸라졌다. 금 후 설화군의 천마패혈륜에 적중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붙들고 최후의 한마디를 쏟아냈다. "사랑했어요, 죽군......!" 아목함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는 불사오제 중 무현성마제의 무현마음에 전신의 경맥이 파열되 고 말았다. 애초부터 죽음을 각오했기에 여한은 없었으나 그는 피로 얼룩진 대지 위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태양천주... 그는 악마의 화신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인간 세상을 이토록 파괴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그의 죽음을 끝으로 치열한 혈전은 종식되었다. 무려 이천이백여 생명이 한 사람의 계책에 의해 덧없이 죽어갔다. 남은 인물들이란 고작 불사천황성의 성도 삼백여 명 뿐으로 주전 력 중 칠 할을 잃게 된 그들은 비분을 금치 못했다. 설화군은 진저리를 치며 분개해마지 않았다. "도저히 이럴 수는 없다! 이 모든 사태가 태양천주, 그 놈의 농간 이었다니......." ④ 서역의 봄은 무더웠다. 용비운은 지친 표정으로 황무지를 헤매고 있었다. "설마 천후가 준 지도가 가짜는 아니겠지?" 그는 아득한 지평선을 응시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하국을 찾아 나선지도 벌써 열흘 째였으나 그는 지도의 끝부분에 왔음에 도 불구하고 아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서하국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소왕국이라 했거늘, 이 척박한 땅에 어찌 그런 옥토낙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가죽으로 된 물주머니를 꺼내 목을 축였다. "태양천이 구련암을 습격했다면 공손사형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 게 되었겠지. 따라서 태양천주는 또 무슨 계략을 꾸미려 할 것이 다. 어서 태양십군의 파괴법을 알아내야 하는데......." 그러다 문득 용비운은 눈을 크게 떴다. 황무지의 끝인 지평선에 녹색의 벌판이 신기루처럼 나타났던 것이다. "이럴 수가......!" 그는 급히 지도를 들여다 보았다. 거기에 그려진 서하국의 형태는 원반형 초지 위의 왕국이었다. 용비운은 안력을 높여 지평선에 걸 쳐진 초지를 유심히 살피고는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저 곳이 전설의 서하국인가?" 그는 공공비행술을 펼쳐 신비롭게 드러난 초지로 날아갔다. 그 사 이에 초지는 서서히 스러지더니 자취를 감추려 했다. 용비운은 그 기현상이 서하국을 수백 년 동안 전설의 왕국으로 만 든 요인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 차렸다. "이번에 못들어가면 몇 날을 더 헤매게 될지 모른다." 그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황무지의 장막으로 덮혀가는 초지의 끝 자락에 간신히 내려섰다. 뒤를 돌아 보니 불과 한 뼘 차이로 방금 전까지의 삭막만 황무지가 이어지고 있었다. 용비운은 너무도 신기하여 읊조렸다. "황폐한 사토(死土) 위에 초지를 형성해낸 것도 그렇거니와 보였 다, 안보였다 하는 건 일조현상 때문인가?" 어쨌든 그는 자신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믿으며 걸음을 옮겨 눈 앞의 녹색 언덕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줄곧 잔디가 깔려 있어 푸 른 풀잎에서 싱그러운 내음이 물씬 풍겨 왔다. 이윽고 구릉으로 오른 그는 탄성을 발했다. "아! 저것인가?" 서하국은 거대한 초원 내 분지에 해당되었다. 구릉 아래로 둥근 지붕의 아담한 전각들이 솟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아름다워 그 전 경이란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런데 왕국의 앞에는 넓은 잔디광장에 있었으며 그 곳에는 수백 개의 무덤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용비운은 잠시 왕국의 공동묘지 인가 생각했으나 고개를 저었다. 봉분들은 상태로 미루어 모두 세 워진지 일 년도 안되어 보였던 것이다. 용비운은 왕국을 가로지르는 대로들을 살폈다. 역시 고운 잔디가 깔려 있기는 했는데 기이한 것은 그 위를 지나는 사람이 전혀 보 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하국에는 인적이라곤 없어 죽음의 왕국처럼 느껴졌다. "그럼... 사람들이 모두 죽어 저 무덤에 묻혔단 말인가?" 용비운은 신형을 날려 무덤가에 이르렀다. 묘 앞에는 각기 화환이 하나씩 놓여 있어 신선한 꽃향기를 그에게 전했다. "이걸 보면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확신과 더불어 크게 외쳤다. "누구 없소?" 그의 음성은 소왕국의 정적을 깨뜨리며 긴 메아리를 울렸다. 그러 나 대답은 없었고, 용비운은 적막한 공간에서 무한한 외로움을 느 꼈다. 망자(亡者)의 무덤만이 함께 있어서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어깨를 짓누르는 적요의 무게는 더 했다. 그는 그 중압감을 도저히 참기 힘들어 다시 외쳤다. "진정 아무도 없소?" 비로소 왕국의 한 편에 위치한 거대한 화원으로부터 하나의 섬세 한 인영이 모습을 보였다. '여인......?' 용비운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 인영에게 다가갔다. 짐작대로 상대는 새하얀 소복을 걸친 여인이었다. 그녀도 용비운 을 향해 차분한 걸음으로 마주 다가왔다. 두 남녀는 한 개의 무덤을 사이에 두고 동시에 멈추어 섰다. 그들 은 한 동안 서로를 살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⑤ 용비운은 그녀를 보자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에 사로잡혔다. '아직 나이도 이십 전인 듯 한데 설마 홀로 이 곳에서 수백 개의 무덤을 돌보며 살아 온 것은 아니겠지?' 소복여인의 용모는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 다만 유난히 큰 눈망 울이 인상적으로 보일 따름이었다. 그녀는 한 아름의 수선화묶음 을 안고 있었다. 용비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낭자 혼자 사시오?" 소복여인은 말도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낭자는 이것을 아시오?" 용비운은 그녀로 하여금 경계를 풀게 할 양으로 천후가 준 천봉자 환을 내밀었다. 과연 소복여인은 품에 안고 있던 수선화 다발을 떨어뜨리며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당신... 언니가 보냈군요? 난 우연한 침입자로 알고......." 여인은 천봉자환을 받아 손가락에 끼더니 활짝 웃었다. 그녀의 맑 은 음성이나 웃음은 의외로 무척 매력적이었다. 용비운은 미소로써 답하며 말을 이었다. "낭자가 천후의 동생일 줄은 몰랐소." "그럴 거예요. 언니와 나는 닮지 않았으니까요." 소복여인은 묻지도 않은 말까지 스스럼없이 했다. "나는 하교예(霞橋霓)라고 해요.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언니를 만나게 되었죠? 형부는 편히 지내시는지......?" 그녀는 많은 질문을 던졌으나 용비운은 간단히 대답했다. "나는 천마공자라는 사람이오. 나도 당신에게 물을 것이 많은데 무엇부터 질문해야 할지 모르겠소." 하교예는 예의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렇군요. 당신이 곧바로 떠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금방 떠날 사람은 아니오." "그래요? 참 잘됐군요. 이 꽃 좀 들어 주시겠어요?" 용비운은 그녀가 떨군 수선화 묶음을 안아 들었다. "우선 오늘 할 일을 마쳐야 해요. 그래야 쉴 수 있어요." 하교예는 무덤에서 화환을 걷어내고 수선화 묶음 중 한 송이를 내 려 놓았다. 그리고는 그 앞에서 가볍게 손을 모았다. "여기에 있는 무덤은 모두 몇 개나 되오?" "정확히 칠백육십오 개죠." 그녀는 다른 무덤 앞에서도 똑같이 꽃을 갈고 예를 취했다. 그 광 경에 용비운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하나 본데... 끝내려면 적어도 두 시진은 쉴 새 없이 돌아 다녀야겠군.' 정말로 하교예는 칠백육십오 번째의 헌화를 마치고서야 손을 툭툭 털었다. "됐어요. 당신이 도와주니 훨씬 쉽군요. 참, 무엇이든 대접을 했 어야 되었는데 예의가 아니군요." 용비운은 그녀를 마주보며 빙긋 웃었다. "괜찮소. 개의치 마시오." "저와 함께 가요." 하교예는 몸을 돌리더니 화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왕궁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소?" "거긴 아무도 살지 않아요." 용비운은 담담히 말하는 그녀가 약간은 이상히 여겨졌다. '이 낭자는 슬픔이나 고독을 모르는가? 분명 백치는 아닌데 이런 환경 속에서도 천진스러울 정도로 밝기만 하니.......' ⑥ 방대한 화원. 이 곳은 꽃의 세상인 듯 세상의 꽃이란 꽃은 총망라되어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화목만 해도 수백 종에 달했고, 화초는 수만 포기 는 될성 싶었다. 그림처럼 고운 나비와 꿀벌들도 꽃과 더불어 화 원을 장식하는 구성원이었다. 꽃으로 장식된 작은 방에서 용비운은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오는 화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하교예는 몇 개의 과일과 꽃가루로 만든 기이한 음식을 그의 앞에 내놓았다. 용비운이 음식을 드는 동안 하교예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줄곧 미 소를 띄고 있었다. 그는 과연 이 여인이 태양십군의 파괴 방법을 알고 있을까고 의심스러웠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심각한 얘기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낭자는 형부가 어떤 분인 줄 알고 있소?" 하교예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형부는 중원 왕가의 후손이었어요. 그 왕가가 반역죄로 멸절되는 바람에 방황을 하다 본 국에 오게 되었대요." 용비운은 흥분을 억누르며 애써 담담히 물었다. "그 다음은......?" 하교예는 과일을 집어 한 입 베어물며 말했다. "언니와 결혼하게 되었지요. 언니는 대공주(大公主)니까 당연히 형부와 함께 본 국의 대권을 이어받기도 했구요." "하낭자가 서하국의 소공주였소?" 용비운이 놀라 묻자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그래요. 하지만 언니처럼 정비(正妃)의 소생이 아니라 공주이기 는 해도 별 특권은 없었어요." 그 말인즉 천후와는 모친이 다르다는 얘기였다. "음, 한 가지 특별히 궁금한 점이 있소." "뭔데요?" "이 곳의 무덤들은 어찌 된 게요? 모두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 은 것 같은데, 설마 그 사람들이 일시에 죽지는......?" 하교예는 갑자기 안색이 변해 대답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 비운은 그녀를 따라 일어나며 정중히 사과했다. "소공주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용서하시오. 짐작되는 바가 있어 묻기는 했지만 싫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소." 하교예는 문득 애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 이 곳에서 나하고 같이 살면 안되나요? 약속하면 모든 것을 말해 주겠어요. 본 국에는 중원인들이 탐내는 보화가 굉장히 많아요. 그것들도 당신에게 주겠어요." 용비운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공주, 나는......." "좋아요. 그런 일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니까." 하교예는 그녀답지 않게 쓰게 웃더니 그를 이끌었다. "따라 오세요. 언니가 당신을 보낸데는 뭔가 달리 이유가 있을 거 예요. 그렇지 않은가요?" 용비운은 그녀에게 정말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자신이 그 녀의 마음 밑바닥을 휘저어 놓은 격이 되었기에. 그의 심중에서는 소리없는 탄식이 일고 있었다. '태양천주, 여기서도 당신이 무슨 짓을 해 놓았는지 대강 짐작이 가는구려.' 지하보고(地下寶庫). 그 곳에는 하교예의 말마따나 진귀한 보화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심히 그것들을 지나쳐 한 쪽의 어두운 통로를 가리켰다. "저 곳은 지옥혈(地獄穴)이라고 하는데 중죄인을 가두는 곳이었 죠. 일단 들어가면 아무도 살아 나오지 못해요." "지옥혈?" 용비운은 그녀가 왜 그 곳을 알려 주는가고 의문을 갖는 한편, 어 떤 강렬한 힘이 자신을 잡아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데... 안되겠소?" "나중에요. 더 보여드릴 것이 있어요." "무엇을......?" "이리 오세요." 하교예는 그를 하나의 밀폐된 철문 앞으로 인도해 갔다. "자, 태양천인(太陽天人)들이 만들어진 곳이에요." "오오!" 용비운은 가슴이 뛰어 내심 부르짖었다. '그렇다! 그들의 제조 방법을 안다면 파괴할 수 있는 방안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⑦ 부글부글....... 용암이 달구어진 쇳물처럼 끓고 있었다. 지표를 뚫고 솟아 오르려 고 요동치는 용암은 악마의 몸부림과도 같았다. 용비운과 하교예는 높다란 난간 위에서 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용암을 응시했다. "태양천인들은 본 국의 수호신으로 이 용암 속에서 단련된 인간들 이에요. 전 대의 서하국왕(西霞國王)께서 만들어 놓으셨죠. 언제 고 국난이 닥쳤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요." "으음......."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태양천인을 세상에 나가게 해서는 안된다 는 유시를 남기셨어요. 그 힘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자 칫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까 우려하신 것이지요." 하교예는 난간에서 약간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왕국을 떠나셨던 형부가 서하옥새를 가지고 와서 태양천 인들을 이 곳에서 꺼내셨어요. 왕께서는 이미 붕어하신지라 아무 도 그 분을 말릴 수가 없었지요." 그녀는 격정을 억누르느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형부는 태양천인을 어디 쓸 데가 있다며 본 국 밖으로 데 리고 나가려고 했어요. 신민들은 완강하게 반대했죠. 선대 국왕의 유시가 있는 한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용비운은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형부는 서하옥새의 권위로 신민들을 복종시키려 했어요. 그러다 실패하자 태양천인들을 움직여 그들을 전부......." "오오! 그런 일이......." 그는 고통의 전이(轉移)로 인해 급기야 하교예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그의 심중에서는 절로 이런 외침이 일었다. '천후! 안되었소만 당신과의 약속은 지킬 수 없소. 당신은 그를 용서했을지 몰라도 나는 그럴 수가 없소이다.' 서하국의 밤. 용비운은 꽃의 방에서 하교예가 깰까 봐 살며시 빠져 나왔다. 그 것은 지옥혈이라는 곳에 가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끝내 알지 못했다. 잠든 줄 알았던 하교예가 눈물을 떨구며 비탄에 젖어 있는 것을. 그녀는 용비운이 멀어져 가는 기척을 느 끼자 홀로 울부짖었다. "아아! 언니, 무사한 건가요? 저 분을 보낼 정도라면 틀림없이 언 니는 형부에게......." 그녀는 간절한 기원도 잊지 않았다. "바라건대 부디 저 분은 형부와 다른 사람이기를......!" 어두운 통로. 용비운은 음산한 기운을 헤치며 삼십 장 정도 전진해 갔다. 그러 자 통로는 끝나고 대신 거대한 동혈이 수직으로 뚫려 있었다. 매 캐한 냄새가 아득한 암혈(巖穴)로부터 풍겨 왔다. "중죄인을 가두는 곳이라고? 그 말은 누군가 중요한 인물이 갇혀 있다는 뜻인 듯 했다." 용비운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암혈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는 깃털처럼 가볍게 하강해 갔다. 다만 암혈의 내부는 짙은 먹빛이어서 초인적인 그의 안력으로도 오 장 이상은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는 암혈의 바닥에 이르렀다. 그 곳은 적막과 함께 역시 어둠만이 두텁게 덮혀 있는 지하광장이었다. 광장이 얼마나 넓은지는 용비운으로서도 추측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안력을 최대한 높여 암흑 속을 둘러 본 결과, 한 귀퉁이에 쓰러져 있는 하나의 물체를 보게 되었다. '저것은......?' 그 물체란 인간의 시체였다. 죽은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시체는 그 다지 부패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몰골은 처참무비했다. 사지가 절단된 데다가 온갖 악형 (惡刑)을 두루 거쳤는지 걸레쪽이나 진배 없었다. 말라 붙은 핏덩이가 바닥 곳곳에까지 엉겨 있었는데, 시체는 엎어 진 상태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물론 안면도 심하게 파 손되었으며 안구도 뽑혀 나가고 없었다. "악랄하군. 이것도 태양천주의 솜씨인가?" 이는 태양천주의 잔인성을 감안할 때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었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시체가 누구냐는 점이었다. 용비운은 뭔가 단서가 될만한 것을 찾아 시체의 주변을 살피다가 바닥에 휘갈겨 쓴 혈서(血書)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자는 사지가 잘렸거늘, 어떻게 유서를 썼을까?" 그는 중얼거리다 말고 흠칫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입 밖으로 비 어져 나온 채 엉망으로 뭉개진 시체의 혀에 고정되었다. "맙소사! 이 자는 스스로 혀를 깨물어 피를 내면서......." 용비운은 전율과 함께 짚히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 누구라도 처절한 원한을 품고 있다면 능히 이럴 수 있으 리라. 그대로 눈을 감을 수 없었을 테니까.' 혈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이 통한을 누가 알겠는가? 나는 천면귀자(千面鬼子).......> ⑧ 용비운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천면귀자라면 십대고수의 일 인으로 아직 아무도 그 진면목을 본 사람이 없다는, 이른바 천의 얼굴의 가진 인물이었다. '오오! 신비에 가리워졌던 그가 이 지옥혈에서 이렇듯 참혹한 최 후를 맞이했을 줄이야......' 그러나 그 충격도 혈서를 읽고난 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용비운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전신을 떨고 있었다. "이럴 수가!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그는 일시지간 하늘이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벌써부터 그의 고막 으로는 그 붕괴음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와르르르....... 운중산 단천애. 이 천애의 벼랑 위로 군웅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봉황맹을 구축한 무림의 명숙들을 비롯하여 삼대혈공과 천절칠환사가 이끄는 사도 무림의 거성들, 게다가 뜻밖에도 태양천의 주구였던 암흑십세의 무리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르자면 정사무림이 최초의 규합을 이룬 것이었다. 그 수효는 무려 오만에 달하니 천하무림인들의 절반에 해당되는 셈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같았다. 모두가 태양천을 괴멸시킴으로 써 무림의 정통성을 보존하기 위해 나섰다. 태양천주의 삼불칙(三不則)은 기실 무림 자체를 말살시키려는 수 단이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그것을 옹호하던 무리들도 이제는 반대로 깨부수기 위해 분연히 검을 잡았다. 공손찬과 온주려는 여전히 바퀴가 달린 의자에 앉아 운무에 가리 워진 단천애를 향하고 있었다. "천야, 예상보다 십 배나 되는 세력이 운집 되었어요. 비록 최강 의 정예라 할 수 있는 불사천황성과 오행천군도의 고수들이 태양 천주의 계략에 희생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태양천이 무너지는 것은 기정사실로 보여지는군요." 공손찬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천천히 깨어났다. "태양구백영반과 백팔천강지살은 모두 제거되겠지. 하지만 태양십 군만큼은 아직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군." "으음......." "또 한 가지, 내가 우려하는 것은 태양천주의 진정한 속셈일세. 그는 설사 현재의 기반이 무너진다 해도 잠적해 버리면 언제든지 제 이의 태양천을 창건할 수 있네." 그의 우려는 결코 과한 것이 아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온주려 는 나직이 탄식했다. "저의 할아버님께서 무슨 조치를 취해 놓으시기만을 바랄 따름이 에요. 천주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붙들어 두실 수만 있다면 이번의 대전으로 천하는 안녕을 되찾을텐데......." "맞네. 그것이 관건이지. 용사제도 기다려야 하고." 공손찬은 처음으로 용비운을 그렇게 칭했다. 그는 이제 강호일정 무영금마선의 망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그 후신(後身)으로서가 아닌 정당한 이름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휘이이익―! 서천을 시원스레 가르며 하나의 인영이 군웅들에게로 날아왔다. 창백한 안색에 청의를 걸친 그 청년은 모습을 보이자마자 군웅들 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앗! 천마공자다." "와아아아―!" 그러나 공손찬의 앞에 내려선 그의 안색은 어둡기만 했다. "사형, 잠시 결전을 보류해 주십시오." 공손찬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러는가? 무척 긴장하고 있는 것 같군." "경위는 차후에 밝히겠습니다." 용비운은 계속 무겁게 응대했다. "자네 무슨 엄청난 비밀을 알아낸 것 같군. 그래, 단신으로 태양 천주를 상대할 작정인가?" "그렇습니다. 어쩌면 소제가 이렇게 함으로써 수많은 생명들이 산 화되는 비극이 방지될지도 모릅니다." 공손찬의 음성은 그보다 훨씬 더 무거웠졌다. "으음, 자네가 혼자 그 짐을 떠맡게 되다니......." 온주려도 침중하게 말을 꺼냈다. "용오빠께 엽소저의 소식을 알려 드려야겠군요." 용비운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지금 그 말을......?"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아서요." 그 말은 곧 그가 이 길로 죽을지도 모르니 말해야겠다는 의미였 다. 온주려는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엽소저는 여전히 용오빠를 죽은 사람으로 알고 있지요. 누구도 용오빠 대신 설명해줄 수가 없었으니까요. 하여 그녀는 보타성니 를 따라 남해의 보타섬으로 떠났어요. 상심을 이기지 못해 불문에 귀의하겠노라고." "뭣이? 그 따위 어리석은 짓을......!" 용비운은 벌컥 화를 내더니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소. 도리로 따지자면야 그 쪽으로 달려가야겠 지만 알다시피 나는 그럴 입장이 못되오." "용오빠......." "엽소저는 사실 내 은인 중 한 사람이나 다름이 없소. 그녀에 대 한 애정 때문에 영웅이 되고 싶었고, 사형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 들 덕에 영웅은 못되어도 오늘에 이르게 되었소. 그녀의 존재가 없었다면 나라는 인간은 아마도 지금까지 골동품이나 모조하며 살 았을 게요." 그는 아득한 벼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녀를 망쳐 놓음으로써 평생 한을 품게 될지도 모르오. 하 지만 그것을 피하고자 천하를 저버릴 수는 없소." 스스슥......! 용비운의 신형은 이내 운무 속으로 사라져 갔다. 공손찬이 그답지 않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온낭자... 그저 고마울 따름이네. 용사제에게는......." 동공이 없는 그의 눈에는 어느 덧 눈물이 고여 있었다. 부각에서 온양후는 바둑을 두고 있었다. 상대는 물론 태양천주였다. 온양후는 그의 대담성에 줄곧 감탄을 금치 못했다. 태양천을 치기 위해 흑백무림의 오만여 고수가 단천 애에 운집해 있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태양천주는 바둑에만 전념 하고 있는 것이었다. 딱... 딱... 딱....... 명쾌한 음향만이 잔잔한 수면 위로 파문처럼 흐른다. "천주, 어떻게 할 작정이시오?" 온양후가 참다못해 물었다. "하하... 무엇을 걱정하시오? 저들의 숫자가 오만이 넘기는 해도 본 천에 이를 경공을 지닌 자들은 이만에 불과하오." 태양천주는 수중의 바둑알을 굴리며 쾌활한 어조로 대답했다. 청 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는 어김없이 젊은 음성이다. 온양후는 그의 말에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단천애에서 태 양천에 이르려면 십여 장 거리의 징검다리식 석주를 건너뛸 만한 경공조예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적어도 일류급 고수에게나 해 당되는 얘기였다. "그러고도 저들이 과연 본 천에 발을 디딜 수 있을까?" 태양천주는 조소를 머금었다. "저들이 내려설 곳에는 본 천의 태양십군이 지키고 있소." 온양후는 내심 신음을 발했다. '끙! 그래서 이처럼 태평이었군.' 태양천주는 바둑돌을 내려 놓았다. "천문상께서는 오늘 별로 바둑을 두고 싶지 않은가 보구려? 하 하... 하긴 호적수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럴만도 하겠지." "호적수라면......?" "삼십 년 전 그 수모를 잊으셨소? 공공천야로 인해 천하제일문이 라는 명예를 획득한 사빈성을 스스로 해체했으면서." 온양후의 긴 수염이 바람도 없건만 파르르 떨렸다. '아니, 천하에서 오직 공공천야와 나만이 알고 있는 그 사실을 이 자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⑨ 그랬다. 당시 사도제일지자로 불리우던 천사 신비대종은 공공천야 공손찬으로부터 도전을 받았고, 패자는 승자의 요구 한 가지를 들 어주어야 한다는 조건 하에 서로 맞붙었다. 이들 양대 현자는 열 가지 대결을 벌였는데 그 중 여덟 번째 판까 지는 사대 사로 팽팽한 승부수를 유지했다. 하지만 온양후는 나머지 두 가지 승부에서 연달아 패하여 전체 승 부에서 패자가 되었으며, 공공천야는 그에게 사빈성의 해산을 요 구했다. 그것은 사도무림의 득세로 무림의 흑백 균형이 깨지는 것 을 우려한 처사였다. 온양후는 참담한 심정이었으되 충실하게 약조를 지켰으며, 공공천 야를 증오하지도 않았다. 그를 평생의 적수로 생각한 것은 사실이 지만 인간적으로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삼십 년이라는 세월 속에 묻혀진 비사를 태양천주가 끄집 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떻소, 설욕하고 싶지 않소? 이번이 절호의 기회요." "만일 그렇다면... 천주는 내 힘이 되어 주겠소?" 온양후는 짐짓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그는 이것을 달리 태양천의 내분을 조장할 수 기회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애초부터 공공천야는 그대에게 맡길 생각이었소." "그럼 천주께서 노신에게 맡기시겠다는 일이 바로......?" "후후... 맞소. 본 천에서도 공공천야를 감당할 만한 대기(大器) 는 그대 밖에 없소. 내 그와 맞붙게 할 요량으로 천문상을 붙들어 놓고 있었던 것이오." 온양후는 놀라면서도 의혹을 금치 못했다. 태양천주의 지략은 자 신보다 절대 하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혹 공공천야를 직접 상대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것인가?' 그는 일단 내심을 접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하오, 천주. 노신에게 그 권한을 넘겨 준다면 단숨에 저들을 격파해 보이겠소." 태양천주는 즉시 승천하는 금룡의 형상이 양각된 태양천령(太陽天 令)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손에 받아 쥐면서도 온양후는 계속하 여 뭔가 석연치 않다고 생각했다. '과연 이 자가 태양천령을 선뜻 내줄 정도로 나를 신뢰하는 것인 가? 아니면 이 또한 계략의 일환은 아닌지?' 연못을 가르며 한 척의 화려한 배가 날 듯이 다가왔다. 거기에는 천후 하옥군과 금위장 무정사신 철엽이 타고 있었다. 하옥운이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천주, 금위장의 보고에 의하면 천마공자가 단신으로 본 천에 들 어 왔다는군요." "천마공자가?" "네, 그는 금강불괴를 이룬 듯 태양십군을 밀치고 진세로 뛰어들 었다고 해요. 그 자를 막을 인물은 당신 밖에 없어요." 태양천주는 별반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음, 가 봐야지.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으니 당신은 금성에서 편히 쉬고 있도록 하시오." 하옥군은 서글픈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정말 해도 너무 하는군요. 만일 사라라는 계집이 이렇게 나왔다 면 당신도 그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태양천주는 담담히 대꾸했다. "사라는 당신같이 호들갑을 떠는 여자가 아니오." "닥쳐요! 감히... 내 앞에서 그 계집을 두둔하는 건가요?" 하옥군은 새파랗게 질린 채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순간을 기해 그녀의 뒤에 시립해 있던 철엽이 태양천주를 향해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츠읏! 기합성도 없었다. 단 한 초의 살식, 일명 사각(死角)의 도라는죽 음의 도식이 펼쳐진 것이다. 전혀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과 장소, 각도, 게다가 그의 오랜 살수경험까지 보태어진. 철엽은 몸을 뒤집은 채 바닥으로 미끄러져 태양천주의 턱을 올려 찔렀다. 그리고 성공을 확신했다. 이런 경우의 척살은 실패할 가 능성이 전무했으므로. 그러나 고개를 뒤로 젖히며 상체만을 슬쩍 움직이는 간단한 동작 으로 태양천주는 결과를 뒤집고 말았다. "헉!" 철엽은 일순 체내 진력이 전부 허공으로 스러지는 것을 느꼈다. 무심하던 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에 반해 태양천주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철엽! 열 번째 살수마저 실패했으니 이제 그대는 완전한 내 수하가 된 것으로 알겠다." "우우......!" "사실 그 동안 나는 이 열번 째 암습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대 같 은 수하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의 이러한 심기와 배포에는 온양후도 크게 놀랐다. '무서운 자! 어쩌면 나도 이 자에게는 당할지 모른다.' 태양천주가 말했다. "철엽, 내 첫 번째 명이다. 천후를 죽여라." 하옥군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당신... 당신이 정말로 내 남편이었나요?" 자신의 아내마저 죽이려는 태양천주의 잔인성에 철엽은 새삼 진저 리를 쳤다. 그는 첨도를 번쩍 치켜 들었다. "안돼......!" 하옥군은 몸을 떨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철엽의 첨도 는 그녀가 아니라 그 자신의 가슴을 찍어 갔다. "태양천주! 내가 죽으면 약조도 파기된다." 그의 행동은 너무 급작스러워 누구도 제지할 틈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 가닥 무형의 기류가 날아와 철엽의 첨도를 먼 지처럼 분쇄시켜 버렸다. 퍽! 우수수....... 그 바람에 그의 손에는 도의 손잡이만 남았다. "정주, 약조는 인간을 상대로나 지키는 것이외다." |
첫댓글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