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도’에 가다
어느 날 친구가 나에게 전화로 히라도에 가 보았느냐? 하고 물었다. 난 이 생소한 지명을 듣고 그곳이 어딘데? 하고 되물었다. 일본 큐슈지방의 후쿠오카에 접해 있는 섬이라고 했다. 그리고 롯데관광에서만 갈 수 있는 여행지라고 말했다. 나는 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날짜가 문제라고 대답했다. 일정을 물어보니 토요일에서 월요일까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갈 수 있다고 했다.
친구는 나를 비롯해 자기가 가르쳤던 야학 제자들과 동행하면 어떠하냐고 했다. 우리 둘이 가는 것도 좋지만, 그들과 함께 가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그 분들은 늦게 배움에 뜻을 둔 여성으로 인식욕이 대단한 사람들 같았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해 본 적이 있어도 배로써 해외로 가는 것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필자도 지난번 초등학교 친구들과 아이넷 크루즈온 여행을 해 본 것이 처음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라 설레는 마음은 없었다.
우리는 여행을 가기 전에 모임을 가졌다. 여권 준비며, 1인당 경비, 개인 준비물에 대해 토의를 했다. 친구가 공동경비, 엔화 구입, 식사(선내식, 현지식, 호텔식) 등등 내용을 자세하게 준비해 왔다. 또 히라도에 대한 약간의 소개도 빼놓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친구의 일행들과 함께 히라도에 가게 되었다. 5월 18일 17시 30분 부산 신국제여객터미널 3층 카멜리아 카운터 앞에서 집결했다. 출국 수속을 밟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승선할 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 제자 한 분은 가이드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객실에서 혼숙해야 된다고 했다. 나는 지난번 크루즈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혼숙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이드의 안내를 받고 19시에 출국 수속을 밟고, 승선하기 전 면세점에 들렀다. 나는 누구의 부탁을 받고 로얄 살루터 38년산이나 32년산을 사려고 했다. 종업원에게 물었더니 품절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부탁한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이 술은 현재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발렌타인 30년산을 사 달라고 했다. 친구가 물건은 배 안이나 비행기 안에서 사는 것이 제일 싸다고 했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이 술을 샀다. 특별히 살 만한 것도 없고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19시 30분 승선 수속을 밟았다. 사람들이 빨리 승선하기 위해 바쁜 걸음으로 갔다. 우리도 뒤질세라 빨리 걸었다. 승선해서 우리가 거처할 방을 찾았다.
객실 433호에 짐을 내려놓고 홀에 앉아서 이야기할 좌석을 차지했다. 좌석은 네 개였다. 다섯 사람이 앉아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곁에 붙어 앉아, 가지고 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배가 출발할 때까지 우리는 계속 술을 마시고 안주와 준비해 온 음식을 먹었다. 저녁 식사는 배가 불러 식당에 가 먹을 여유가 없었다.
우리가 사용할 객실은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과 왼쪽 벽에 각각 10명씩 누울 수 있도록 배치되었으며 한쪽 모퉁이에 탈의실이 있었다. 내가 판단했던 것과는 달랐다. 여러 여행객이 섞여서 잘 수 있게 되었다. 마침 다른 일행들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 두 명, 여자 세 명이 혼숙을 하게 되었다. 나이가 모두 60세 이상이지만, 낯선 여자와 한 방에서 잔다는 게 좀 이상했다.
배는 22시 25분에 출발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해 파도가 거셀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잠 잘 준비를 했다. 탈의실에서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목욕탕에 갔다. 먼저 양치질을 하고 목욕탕에서 온천욕을 했다. 찝찝했던 몸을 말끔히 씻고 바닷바람을 좀 쐬고 방에 들어왔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내가 있는 쪽에는 여자 한 분, 반대편은 친구와 두 여자가 잠을 청했다. 피곤한 관계로 모두 잠은 잘 잤는데, 내 친구는 술을 좀 많이 마신 탓으로 쉽게 잠들지 못했다. 배가 출발한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파도에 의해 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배 멀미를 할 정도는 아니지만 누워서도 파도가 좀 거세다는 느낌을 받았다. 잠을 자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하카타항에 하선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짐을 가지고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갔다. 짐은 하선할 입구에 두고 식권을 구입하러 갔다. 팀장인 친구가 아침 식사로 무엇을 먹을 것인지 친구들에게 물었다. 뷔페식이라 특별히 주문할 것도 없었다. 식당에 들어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골라 쟁반에 담아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했다.
우리는 하카타항에 내려 준비된 버스에 탔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았다. 가이드는 일본 역사에 대해 설명을 했다. 일본에 대해 크게 아는 바가 없는 나로서는 새로운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일본은 섬나라로 4대 섬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일본의 4대 섬은 홋가이도, 혼슈(본토), 시코쿠, 큐슈이다. 제일 많이 들은 것은 홋카이도, 그 다음으로 큐슈이다. 처음 알게 된 것은 혼슈와 시코쿠이다. 오늘 우리가 여행하는 곳은 큐수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히라도이다. 이 섬은 나가사키현 북서부 최서단에 있다.
가이드는 문답식으로 관광 안내를 재미있게 했다. 이런 정보도 없이 여행지에 간 나에게 귀에 와 닿는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오다 가문이었다. 오다 가문에 대해 최초로 접한 것은 수덕사의 김일엽 스님의 아들 일당 스님이 쓴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라는 책에서이다. 이 책에서 김일엽과 오다 가문의 장자 오다 세이조와의 만남이 나온다. 그래서 큐슈와 오다 도켄과의 관계를 알고 싶었다.
가이드에게 카톡으로 질문을 했다. 가이드는 일본역사에 대해 개괄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오다와 큐슈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정확하게 모르겠다고 하였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가이드는 우리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가라츠로 이동하면서 3일차 답사 일정으로 정해져 있는 다자이후 천만궁을 먼저 보아야 셋째 날 출국하는데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했다. 내 기억에는 이곳을 가는 길에 일본의 3대 송림의 하나인 ‘니즈노 마쓰바라(무지개 송림)’를 버스로 지나갔다. 가이드의 소개는 국가지정 특별 명승지로 100만 그루의 소나무 숲길이라고 한다. 내려서 한 번 걸어봄직도 하지만, 일정에 없는 것이어서 이렇다 할 구경은 하지 못했다.
다자이후 천만궁 근처에 있는 주차장에 내려서 천만궁에 들어갔다. 이 신사는 일본 천만궁의 총 본산으로 학문의 신으로 이름이 높은 스기와라 미치자네(管原道眞)를 모신 곳이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정문이 아니고 후문이었다. 처음 만난 것은 부부장(夫婦樟)이라고 명명되어 있는 나무였다. 수령이 상당히 많은 나무였다. 이곳을 지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니 옆으로 참배하는 데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가게가 있고 오른쪽에 본전(本殿)이 있었다. 참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샘물이 있는데 손을 담그면 안 되고 족자로 물을 떠서 입과 양손을 깨끗이 씻고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또 이곳은 매화 명소로 다른 지역의 매화보다 먼저 피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년 2~3월에는 약 6,000그루의 매화가 만발해 경내를 아름답게 물들인다고 한다.
우리는 정문으로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아름다운 다리가 나오고 그 밑으로 연못이 있었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다리를 지나니 다리 입구에 견상(犬像)이 나란히 있다. 다리를 오르기 전에 오른쪽에 있는 것이 수컷(입을 벌린 것)이고 왼쪽에 있는 것이 암컷(입을 다문 것)인데 신사 앞에서 모든 나쁜 운을 물리치는 의미라고 한다. 정문에서 들어오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이 소의 와상이다. 이 소의 머리를 만지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한다. 복을 비는 사람들이 손으로 만져서 튀어나온 부분마다 반질반질하였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도리이(鳥居)가 있는 쪽으로 나가니 길 양옆으로 기념품 가게와 상점들이 즐비하게 있다. 다자이후의 명물인 ‘무메가에모치(梅ヶ枝餠)를 파는 가게 앞에 섰다. 번역을 하면 ’매화가지 떡‘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찹쌀떡이다. 가이드가 이 떡을 먹으면 병마를 물리치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하면서 꼭 사서 먹어 보라고 했다. 그래서 친구와 나는 다섯 개를 사서 우리 일행들과 매화나무 그늘에서 하나씩 먹었다. 우리들은 여러 가게를 둘러보면서 본 것은 종업원들이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이 정갈한 모습으로 서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때 일본은 노인들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잘 마련돼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이가 들어 수입이 없으면 생활하기가 어렵다. 어디든지 일할 수 있으면 건강도 유지할 수 있고 수입이 있어 삶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40여분 관람을 하고 우리는 약속된 시간에 버스를 탔다. 우리는 히라도로 향해 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일본의 산은 산림녹화가 잘 되어 있었다. 그들의 산림정책을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로 수목관리를 잘 해 놓았다. 그리고 시골의 집들도 아주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특히 그들의 집은 2층으로 돼 있었다. 주로 살림은 2층에서 한다고 한다. 방마다 커튼을 쳐 놓았다. 개인 생활의 보호를 위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한 것인지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히라도에 대한 안내가 시작되었다. 고려요에 대한 안내가 있었다. 히라도에서 대대로 도자기 가업을 하고 있는 다테이시 후예가 살고 있는 집에 『고려도자기 도래원조지지(高麗陶磁器 渡來元朝之地)』라고 쓴 입간판이 있다고 했다. 이곳은 한국의 진해 웅천에서 도공으로 활동하다가 임진왜란 때 잡혀온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반일 감정이 뱃속에서 솟구쳤다. 진해에서 살았기 때문에 진해는 신라시대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웅천은 일제가 침략을 일삼았던 삼포 가운데 하나인 제포(薺浦)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떠올라 이분들이 이곳에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겠나 하는 추측도 하게 되었다.
우리는 히라도 대교를 지나 삼손호텔에 도착해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다. 호텔 뷔페에서 먹는 점심은 정말 일품이었다. 일본식으로 회를 먹어 보았는데 아주 쫄깃쫄깃하여 식감을 더 높여 주었다. 식당에서 바라보는 히라도만의 잔잔한 물결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멀리 보이는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식사를 마치고 히라도성으로 갔다. 천수각에 올라가 중요 진열품을 구경하였다. 명치천황옷, 명치천황 행기, 명치천황의 사진 등을 보았지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천수각에서 바라본 히라도 전경을 눈에 담고 내려왔다.
히라도성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음 코스로 간 곳이 가와치도게였다. 천국의 계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왜 천국의 계단이라고 하는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그것은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날씨가 흐리고 비가 약간 내려 시원한 바람을 쐬고 주변의 경관을 보고 내려왔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이 이끼츠끼섬이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이끼츠끼대교를 거쳐서 가야 한다. 이 다리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 최장 경간교량이다. 다리 전체의 길이가 960m, 폭 6.5m로 이끼츠끼섬 출신의 ‘카네코 이와조’라는 분이 자기 고향 발전을 위해 국가예산을 받아서 건설한 것이라고 한다. 이 섬에 들어가서 대어람관음상을 보았다. 가이드의 구수한 입담은 관광객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관음상에는 소쿠리에 고기 한 마리가 담겨 있었다. 굉장히 큰 불상이었다. 이 불상을 만든 분은 이끼츠끼대교를 만든 분과 동일인이며, 어민들의 안전한 어업을 기원하는 뜻에서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시오다와라 절벽을 관광했다. 거친 파도로 인해 생성된 현무암 주상절리로 이끼츠끼섬의 대표 명소이다. 비가 오면 팽창하고 해가 뜨면 수축하는 5~7각형 벌집모양의 주상절리가 늘어서 있지만, 눈길을 끌 정도로 볼 만한 곳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제주도 주상절리나 경주 양남면 주상절리보다 경관이 좋지 않았다.
선셋로드는 바다를 따라 약 10Km 걸쳐 펼쳐지는 해안 드라이브 코스이다. 해안절벽과 석양, 가축의 방목 등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 남아 있다고 소개하고 있으나, 차량 관광이 되다보니 실감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역사의 거리이다. 제일 먼저 간 곳이 노천 온천수가 흐르는 곳으로, 세계 유일의 완탕(腕湯)과 족탕(足湯)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맨발로 발을 넣어 온천 체험을 하고 또 팔을 넣을 수 있게끔 시설이 되어 있다. 이 옆에는 히라도의 노래 석병풍이 있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이 육각 우물로 갔다. 이곳은 히라도와 명나라 간의 무역이 왕성하던 시기에 당시 시내 중앙부에 음료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만든 우물이라고 한다. 형태가 전래의 일본양식과 다르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이 400년이 된 소철나무를 구경했다. 이곳에서 친구와 사진을 찍었다. 역사의 거리에는 네 개의 동상이 있다. 바쁜 일정 때문에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일본어를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히라도 관광을 마치고 숙소인 카이죠(해상) 온천호텔로 돌아왔다. 차 안에서 가이드의 안내가 있었다. 대중탕과 노천탕을 이용하는 방법을 안내하고 식사는 일본식 정찬(카이세키)으로 하는데 인원이 많아 순차적으로 음식을 분배하지 않고 한꺼번에 다 차린다고 하였다. 나는 카이세키를 처음 대하였다. 친구와 나는 그냥 있을 수 없어서 일본 소주 한 병을 주문하여 마시기도 하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온천욕을 즐기려고 목욕탕에 갔다. 외국의 목욕탕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호텔용 목욕탕이라 시설은 깔끔하게 잘 돼 있었다. 깨끗하게 세신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았다.
내해라 그런지 바다는 잔잔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히라도대교와 천수각의 야경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천수각의 불빛이 바다에 비친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것을 바라보며 친구와 나는 한 잔의 술을 나누었다. 친구가 이 경치를 스마트폰에 담기에 나도 따라서 폰으로 이것을 찍었다. 이렇게 밤은 깊어가고 우리들은 내일을 위한 준비로 잠을 청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노천탕에 가 온천욕을 즐겼다. 바깥 경치를 바라보며 맨손체조를 하였다. 공기가 맑아 기분이 상쾌했다. 여행 가방을 호텔 밖으로 내놓고 호텔 식당으로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식판에 담아 의자에 앉아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한 후 후쿠오카로 올 버스를 탔다. 어제 가보지 못한 고려요지(高麗窯趾)에 들렀다. 이곳은 원래 차 안에서 보고 지나가는 여정인데 내가 한 번 가 보자고 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운전기사와 한국 가이드 사이에 약간의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을 안다. 그래서 저녁에 호텔로 가는 길에 들러야 했던 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아침에 들르게 되었던 것이다. 진해 웅천에서 임진왜란 때 도공으로 잡혀온 우리 조상의 삶이 어떠했는지 상상해 보았다.
우리들은 다시 후쿠오카로 오게 되었다. 오는 도중에 가이드는 일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 기억할 수 없지만, 일본 사회의 흐름은 거품 경제의 아픔을 겪은 후 지금은 조용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목표는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를 현재 23명에서 50명으로 늘이는데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정말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노벨상 수상이 1명인데 비해 현재 일본은 27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것도 물리학상 9명, 화학상 7명, 생리학·의학상 5명, 문학상 2명, 평화상 1명이 일본 국적이고 일본 출신의 외국 국적 수상자는 물리학상 2명이고 문학상이 1명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과학부문의 수상자의 숫자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야말로 일본이 기술 강대국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그들의 세계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늘날 세계는 과학기술이 지배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일본은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항상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나라다.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우리도 과학기술 우대 정책을 펼쳐야 한다.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말고 냉정하게 우리의 삶을 존속시키기 위해 과학기술개발에 과감하게 투자를 해야 한다. 미천한 내가 외친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특히 기초과학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우대를 많이 해 줘야 된다고 생각한다.
관광객 중에는 선물 사는 곳을 알려 달라고 했다. 면세점에 들르기 전에 우리는 하카타타워에 들렀다.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후쿠오카타워라고도 했다. 이것은 후쿠오카와 하카타가 후쿠오카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이드는 일본의 약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일본에서 제조한 약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일제강점기 731부대의 생체실험에 의해 발달되었다고 한다. 미국이 점령을 했을 때 731부대 생체실험실에 근무했던 사람은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미국에서 그들에게 돈을 줘 가면서 대우를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실험한 데이터를 미국이 가져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료가 소련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유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실험의 대상은 누구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바로 조상들이 그들의 실험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히라도! 일본 본토와 교량으로 연결된 최서단에 위치한 섬으로 1550년부터 유럽을 수입한 곳이다. 1432년에서 1554년까지는 <왜구의 본거지>와 <포르투칼 무역항구>로서 번영하여 <서쪽의 수도>로 불리는 항구가 되었다. 1550년 여름 포르투칼 무역선이 이곳에 들어와 히라도 사람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신상품들을 내 놓았다. 그들이 주식으로 먹던 빵, 카스테라, 비스켓, 1552년 포르투칼 선교사 루이스 알메이다가 서양의술 해부학을 전래하고 1543년 벨기에인 안드레아 베살리루스가 인체해부학을 출판하여 전수하였다. 1601년 포르투칼 신부가 약용으로 담배를 가지고 왔다. 1609년 네덜란드가 페인트, 1613년 영국 상선 “그라브 호” 선원들이 맥주, 고구마 등 서양문물이 이곳을 통해 들어왔다. 특히 이곳은 임진왜란 때 우리 조상들을 살상한 조총이 1543년 포르투칼에서 들어온 곳이다. 또 임진왜란 때 우리 조상들이 포로로 잡혀가 포르투칼로 노예로 팔려간 곳이다. 세계 3대 노예시장의 하나가 이곳이다. 힘이 없는 나라의 백성은 갈 곳이 없다. 팔려간 우리 조상들의 가슴에는 무엇이 응어리져 있었을까?
내가 어릴 때 들은 말이 생각난다. “미국놈 믿지 마라, 소련놈에 속지 마라, 일본놈 일어나고, 되놈은 되나온다, 조선아 조심하라”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기 덩어리 하나를 두고 네 마리의 개가 서로 먹을 것이라고 응얼거리고 있는 장면이 떠오른다. 현재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역사상으로 중국의 밥이 되고 일본의 노예가 되지 않았던가. 강대국 속에서 살아남을 묘안을 찾아야 우리 민족이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 절실히 느꼈다.
첫댓글 조용하면서도 살아가는데 도움될만한 여행하셨습니다 요즘처럼 상대국에 대한 감정으로 편한마음으로 여행할수도 없는 처지이지만 그들의 의식이나 생활태도에
참고할만한것은 참고해야 겠습니다
재미 없는 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본의 4대 섬?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폭염도 곧 떠날 채비를 하겠지요. 마지막 더위 잘 마무리하셔 건강하시기를 ....
감사합니다^^
일본여행을 모두들 조심하고 있는 터이지만 ..
기회가 되면 한번 가보고 싶은 여행지군요~
글속에 나타난 일본과의 노벨상 비교도 참 생각을 하게되는 대목 입니다.
1540년 그들은 서양의 인체해부학을 받아들였다는 점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튼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