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19]대한민국 엿장시와 국보급 돌칼石刀잽이
종로에서 인사동 사거리로 가는 초입에서 엿을 파는 노점상, 말하자면 ‘엿장시’(표준어 ‘엿장수’라고 하면 실감이 좀 덜하다)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만 28년째이고, 그 전에 인사동 두 곳을 거쳤다고 하니 30년이 넘었다는데, 이 양반이 걸작이다. 무엇이든 30년을 넘게 하면 ‘투리’(일의 요령)가 나게 마련. 엿에 관한 한 만물박사인 셈. 그를 말할 때 꼭 ‘대한민국 엿장시’라고 해야 한다. ‘인사동 엿장시’라고 하면 ‘부애(화)’가 나 죽겠다고 한다. 전세계 150개국 관광객을 상대하고, 엿이라 하면 일가견이 있으므로 그럴 법도 하다.
전북 남원에서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서울 오는 기차표 한 장이 ‘전 재산’이었고, 엿장시로 한우물을 파기 전까지 온갖 직업을 전전했다. 왜 그러지 안했을까. 허나, 정식 학교는 아니지만 배움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동아일보 평생 애독자이기에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어지간한 상식은 환했다. 인사동에 노점삼이 80여개 있고, 종로구에만 1200여개가 있다는데, 연합회 부회장으로 10년을 봉사하면서 권익에도 앞장섰다. 30여년전 명동의 상가지역을 주름잡은 조직폭력배들이 ‘자릿세’를 요구하는데 “배째라”며 온몸으로 막았다. 노점 가게에도 '보이지 않는 프리미엄'이 있을 때였다. 프리미엄 얹어 가게자리 확보해 알탕갈탕 버는데 '고지서 없는 세금'인 자릿세까지 내면 무엇이 남겠는가.
코로나 3년은 외국 관광객들이 막혀 힘들었지만, 요즘은 거리가 북적거리니 조금은 살맛이 난다며 험난했던 지난 세월과 추억을 곰씹으며 활짝 웃는다. 평일에는 12시부터 오후 6시까지, 주말엔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주말엔 아내가 일손을 거들었다. 그렇게 번 돈을 티끌 모아 비록 강남지역은 아니어도 아파트 4채와 빌라도 샀다. 아들 딸도 당당히 시집장가를 보냈다. 외국인들의 국적도 굳이 “from country?” 어쩌고 하며 콩글리시로 말하지 않아도 대충 알 수 있고, 각 나라의 인사말 정도는 흉내낼 수 있다. 그러니 ‘대한민국 엿장시’가 맞다. 유럽인들은 엿 대신 강정을 선호하고,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인들은 한국엿을 무척 뻗친다는 것도 안다.
엿! 하면 고향마을 어릴 적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투박하고 넓적하게 큰 엿장수 가위를 기억하시리라. 엿판을 광목으로 감아 목에도 걸고 쩔거덕 쩔거덕하는 소리가 고샅에서 들리면 우리는 몸살을 앓았다. 찢어진 고무신 한짝이면 어디랴? 할머니가 머리를 빗은 후 모아놓은 머리카락도 받았다. 아예 새 고무신을 갖다주고 엿 빨아먹다 죽살놓게 혼났던 기억도 있다. 네모지기 생강엿을 끌로 톡톡 쳐 적당히 잘라주던 그 엿들이, 이제 종류도 다양하고 아주 깨끗하게 포장되어 인사동 초입에서 우리의 입맛을 잡아당기고 있다. 오죽하면 '엿장수 맘대로'라는 말이 생겼을까. 마침 자형(누이의 남편)이 신당동에서 엿공장을 하여 그 엿을 떼다 팔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엿장시’는 서울에서 장사를 시작해 가위질은 해보지 않았다한다. 하지만 생강엿을 대패로 밀어 꽃봉오리 만드는 노하우도 갖고 있다. <6시 내고향> 등 방송사 프로에도 제법 출연한 고수이다.
바로 그 엿 노점상 옆골목에 국보급 돌칼잽이의 공방이 있다. 이 돌칼잽이의 파란만장한 역사도 본인에게는 엿장시만큼 눈물겹겠지만, 제삼자에게는 흥미진진한 휴먼스토리가 준비돼 있다. 10대 초반, 어머니가 돌아가셔 안계신 집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16세때 삼천리자전거를 몰래 판 돈 3400원을 들고 남원에서 용산으로 내달렸다. 이른바 영원한 가출이자 출가였다.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지 않고 오로지 도장을 팠다. 예전엔 육교 위에 500원, 1000원 하며 목도장을 파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렇게 연명을 하다 “이왕 이런 일을 하는 바에 이 일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자”는 가상한 생각을 했다. 전각篆刻과 붓글씨를 죽어라고 독공학습하여 익히며 오로지 한 길을 걸었다. 무려 50년. 전각을 예술로 승화시키는데 전력을 다했지만, 돈은 안됐다. 가난한 예술가. 하지만 돌에 온 마음을 던져 글과 그림을 새겼다. '돌꽃'을 무수히 피워냈다. 온 마음을 다해 새겼기에, 그가 만들어낸 말이 ‘심각心刻’이다. 인사동에 공방(갤러리)를 다시 차린 것은 2021년 겨울, 전북세계서예비엔날레 대상(그랑프리)을 수상한 직후였다. 이미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 내지 방황한 뒤끝이었다. 짐과 작품을 50번도 넘게 싸, 싸는데는 이골이 났다.
초심으로 돌아가 맨처음 둥지를 틀었던 인사동에 뼈를 묻고 싶었다. 인감도장도, 낙관도 새기고, 붓글씨 지도도 하고, 심각 제자도 기르고 싶었다. 결코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세상은 어느덧 사인sign시대가 된 지 오래, 그 흔한 목도장이나 돌도장조차 파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오래 남을 대작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수요자는 더욱 더 드물었다. 가게 임대료는 비싸도 너무 비싸다. 세상을 원망해본들 무슨 소용이랴. 작품 제작에만 몰두하고 싶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자칫하면 길거리에 쫓겨날 판이 아니던가. 그래도 오직 ‘밥은 하늘이 낸다’는 믿음 아래, 하루도 쉬지 않고 성심誠心을 다하고 있다. 어쩌다 작품 하나에 기백만원을 호가하는 데 군말없이 사가는 귀인貴人을 만나기도 했지만, 가뭄에 콩나기였다.
얼마 전, 군포공방을 폐하고 모든 작품을 인사동갤러리로 옮겼다. 1200점이 넘었다. 좁은, 그래도 다른 전각가의 공방보다는 몇 배 큰 공방에 차곡차곡 진열을 해놓으니, 보기에 심히 좋았다. 내로라하는 기념관들을 뺨쳤다. 주변에 인사를 하고 싶어 새삼스레 ‘집들이 고사告祀’를 했다. 말하자면 인사동 지신, 북악산 지신님께 삼배를 하며 ‘잘 되게 해달라’고 빈 것이다. 고사잔치래야 떡 두 말에 홍어 두 짝, 지리산 가양주 한 박스였으나, 이런저런 인연들로 많은 지인들이 찾아와 그 결연한 의지와 ‘장도長道’를 축하해줬다. 세상은 또 이런 맛으로 사는 게 아닐까. 이때 고향 남원 출신의 변호사 한 분이 희한한 작품 제안을 해왔다. 평생 자신 인생의 멘토로 생각했다는 황희 정승의 어록을 20여개 추려놓았는데, 그것들을 돌에 새겨달라는 것이다. 불감청고소원. 그런 것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열심히 새겨 그 귀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생각이다.
주말 오후, 공방 앞 풀밭에서 홍어회 냄새를 폴폴 풍기며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보시오. 내가 바로 그랑프리작가요. 열심히 살테니 지켜봐 주시오”하면서 행인들을 불러세우기도 했다. 주변 상점에 떡도 돌렸다. 그 자리에서 빠지면 안되는 오랜 친구가 있다. 엿만 팔아 ‘재벌’이 된 친구를 "야 야, 금방 다녀가라"며 불렀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고향마을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한 친구는 14살에, 또 한 친구는 16살에 낯설고 물 설은 이 한양에서 인생승부를 걸었다. 모처럼 둘이 술잔을 부딪치며 환하게 웃었다. 어느 봄날 서울, 하고도 종로, 종로 하고도 인사동 어느 가게 앞 풀밭 사각식탁에서 말이다. 나는 그들의 인연이 못내 신기해 사진을 찍었다. 엿장시는 다시 태어나도 엿을 팔겠다 하고, 돌칼잽이는 다시 태어나도 석, 도, 필, 묵(石, 刀, 筆, 墨), 그 길을 묵묵히 걷겠다고 한다. 아름다운 일이다. 좋은 일이다. 그들의 이름이나 한번 크게 불러보자. 김근기와 진영근, 그대들이여! 복 듬뿍 받을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