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폭풍(暴風) 제일보(第一步) 지하빙부(地下氷府) 안. 미청년 하나가 입정(入定)하는 자세로 있었다. 그 앞에는 살색이 시퍼런 노인 하나가 반듯이 누워 있었다. 노인은 죽었으되, 죽지 않은 상태였다. 가늘게 뛰는 심장. 맥은 끊어졌는데, 심장이 뛰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노인의 살은 얼음같이 딱딱했다. 미청년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는 심마(心魔)에 빠지지 않게 주의하며 손을 폈다. 그의 손바닥 사이에는 세 치 길이 오금혈침(烏金血針)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시뻘겋게 달구어져 있었다. "천령(天靈)에서 용천(湧泉)을 뚫되, 혈(穴)을 다치면 아니 된다! 극도의 주의가 필요한 일이다!" 그는 복잡한 혈맥(穴脈)을 뇌리에 떠올리며 아주 천천히 노인의 머리에 침을 댔다. 파팍-! 노인의 머리에서 검은 연기가 일어났다. 한순간, 오금혈침은 청년의 손을 떠나 노인의 머리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머리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손가락이 조금만 떨려도, 침을 맞는 사람이 죽게 되기 때문이다. 청년이 시전하는 침술은 생사침법(生死針法)이라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구명술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잠재력을 한꺼번에 일으키는 침술이었다. 얼마 후, 너무나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딱딱하기만 하던 노인의 살이 물렁물렁해지며 그의 코에서부터 숨소리가 흘러 나왔다. "끄르르…!" 그는 입을 가볍게 벌리며 가래를 토했다. "성공이다! 이제 준비한 단약을 복용시켜 드리면 된다!" 청년은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빠르게 놀렸다. 그는 일곱 가지 단약을 빻아 만든 가루약을 노인의 입에 넣어 주었다. 다음, 그는 손바닥에서 진기를 발휘해 노인의 전신 혈도를 추궁과혈(推宮過穴)했다. 반 시진 후. "으으음, 료범이냐?" 노인의 입술 사이에서 인자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할… 할아버지…!" 미청년은 바로 호료범이었다. "네… 네가 이렇게 크다니… 으으음, 안력이 희미해 너를 잘 알아볼 수 없다만… 너… 너는 너무도 당당한 대장부(大丈夫)가 되었구나!" 노인은 바로 만허생 호륭(胡隆)이었다. 만허생은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는 숨만 붙어 있을 뿐, 몸을 움직일 정도는 되지 않았다. "너를 만나기 위해 죽음조차 뒤로 미루고 있었다!" "…" 호료범은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목이 메어 말을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네게 줄 것은 많다. 소림사에서 흘러 나와 노부의 손에서 완성된 불가절기 세 가지를 네게 줄 작정이다!" 만허생은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만허삼절기라는 것이다. 장(掌), 도(刀), 권(拳)인데… 장은 대폭풍장(大暴風掌)이고, 도는 대폭풍도(大暴風刀)다. 권은 파천무적권(破天無敵拳)이라는 것이다!" 만허생은 제일 먼저 세 가지 절기를 이야기했다. 세 가지 절기. 그것은 호료범이 만 권 고서를 외우던 시절, 만허생의 심득(心得)에 의해 창안이 된 것이었다. 그것은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 벌근세수경(伐筋洗 經), 소림칠십이종절기(少林七十二種絶技)에 능한 사람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 위력은 미지수였다. 만허생은 그것을 만들었을 뿐,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아니, 내공이 모자라 쓰지 못했다는 표현이 올바를 것이다. 만허생은 호료범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다 외웠느냐?" "다 외웠습니다!" "으으음, 그럼… 노부가 베고 있는 베개를 깨라." "예!" 호료범은 조심스레 만허생의 머리를 들췄다. 그가 베고 있던 베개는 냉옥(冷玉)으로 된 것이었다. 팍-! 냉옥침(冷玉枕)은 호료범의 손에서 두부같이 으스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냉옥침은 오금혈석에 비한다면 두부같이 물렁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베개 속에서 봉서(封書)가 나왔다. "할아버지, 편지 한 장을 찾았습니다!" "네게 주는 서찰이다. 그것을 펴 봐라!" "예!" 호료범은 조심스레 봉서를 개봉했다. <호료범은 팔기인(八奇人)의 공동전인(共同傳人)으로, 중원천하를 변황의 침입 아래에서 구해야 한다!> 그 안에는 그런 글이 적혀 있었다. 호료범이 그것을 읽었을 때. "너는 네 출생의 비밀을 아느냐?" 만허생의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모… 모릅니다." "너는… 부모가 없는 아이라는 것을 아느냐?" "부… 부모가 없다니요?" "사람에게는 부모가 있는 법이다. 하나, 네게는 부모가 없다." "그… 그럴 수가?" "성수신의에게서 의술을 배웠다면, 음양대절맥(陰陽大絶脈)이라는 것을 알 텐데?" "음양대절맥!" 호료범은 성수신의가 준 책에서 외운 것을 기억했다. <음양대절맥은 육양절맥(六陽絶脈)의 남자(男子)와 삼음신맥(三陰神脈)의 여자 사이에서만 나타난다. 십 세 때 죽게 되나, 기연으로 개정(開頂)한다면… 불괴천강신체(不壞天剛身體)가 되는 체질로…> 호료범이 그런 내용을 기억할 때. "너는…일부러 만들어진 아이다. 그래서 부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 그래도 저를 낳은 사람은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있다. 하나, 그들은 너의 부모가 아니다. 몸만 빌려 준 사람에 불과하지." 너무도 비정(非情)한 어조. 호료범은 아주 섬뜩함을 느꼈다. 만허생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너를 만든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네가 할 일이 많기에 근골(筋骨)이 고금제일(古今第一)이어야 했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것이든 출신(出身)을 가질 경우… 장차 할 일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신이 방해라니요?" "노부 만허생이 왜 쓰러졌는지 아느냐?" "모… 모릅니다!" "노부는 비타궁(飛陀宮)을 단신으로 막아 중원제일인으로 불렸다. 노부는 이제 변황이 쓰러졌다 여기고 은거했다." "…" "노부는 은거하며 거처를 열 사람에게 알렸다." 만허생이 하는 말, 그것은 그 어떤 사람도 모르고 있던 비밀 중의 비밀이었다. "노부가 일 년 가르친 소림 속가제자 인의대협(仁義大俠) 헌원종(軒轅鐘)이 알았고, 소림사에서 배분상 사질(師侄)이 되는 광허선사(光虛禪師)가 알고 있었다!" "…" "그리고 대비암주(大悲庵主), 원공장주(猿公莊主), 태양곡주(太陽谷主), 점창제일인(點蒼第一人), 청성제일검(靑城第一劍), 금삼서생(金衫書生), 개방주(蓋幇主), 무당장문인(武當掌門人) 함허(涵虛), 그리고 성수신의였지!" 만허생은 몹시 착잡하게 말했다. "노부는 그들이 힘을 합하는 한, 변황의 삼 파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믿었었다. 그래서 섭생하며 무위자연(無爲自然)한 가운데, 살았는데… 어느 날, 연공 중 암습당했다!" "암… 암습…!" "누군가 나를 벤 것이다!" "아아…!" "원래는 죽었어야 했다. 하나, 죽지 않았다. 노부는 구사일생(九死一生)한 다음, 노부를 벤 자가 변황제일인(邊荒第一人)이라는 자임을 알았다. 한데, 그는 무자비하게도 인의대협 헌원종을 쳐죽였고, 광허선사를 비롯한 명숙(名宿)들을 모조리 베었다!" "아아…!" "그는 점점 강해졌고, 급기야 변황의 삼절기에 능통하게 되었다. 그는 혈수미강살(血須彌剛煞), 해궁파천황검(海弓破天荒劍), 그리고 비타궁의 독장을 자유롭게 사용했다. 크으… 변황이 공동전인을 만들었다는 것은 상상 밖의 일이다. 그들 삼 파는 사실 섞일 수 없는 무리인데, 어이해 힘을 합해 변황제일인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 "그 자는 너무도 교활했다. 정파명숙이 있는 곳을 귀신같이 찾아 냈다. 그로 보아, 그 자와 손이 닿은 중원백도인(中原白道人)이나 백도문파가 있음에 틀림없다!" "배반자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변황의 무리와 결탁한 자가 있다. 노부가 출신이 없는 아이를 선택한 이유는 그런 이유다!" "으으음…!" "너는… 절대 신세를 숨겨야 한다. 일존(一尊)인 노부, 쌍우(雙友) 쌍기(雙奇), 삼천(三天)의 절기가 네게 다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너는 위태해진다. 변황제일인을 죽이고, 변황삼파를 없애고, 중원의 반도를 잡아 죽이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의 정체를 숨겨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연공실(練功室)에 있다. 거기 들어가면… 네가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고, 변황제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네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두 다 알게 될 것이다!" "연공실은 어디에 있는지요?" "노부가 누운 자리에 연공실의 열쇠가 있다." "…" "한데, 성수신의는 어디에 있느냐?" "돌아가셨습니다. 닷새 전에 할아버지가 깨어나시는 것을 꼭 보고 돌아가신다고 하시다가… 그만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으으음, 그럼 누가 있느냐?" "모두 다 돌아가셨습니다!" "노… 노부만 남은 셈이냐?" 만허생은 극심한 고독감 속에 파묻히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홋홋… 과거에는 모두 경쟁자들이었다. 변황제일인만 없었다면, 팔기인은 한자리에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만허생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흐릿해졌다. "할아버지, 돌아가시지 마십시오!" 호료범이 크게 말하자. "료… 료범아… 너… 너를 부모 없는 아이로 만든 것을 용서해 다오!" 만허생은 손을 들어 그의 볼을 만졌다. "흑흑… 부모는 없어도 됩니다. 부모는 없어도…!" 호료범은 눈물방울을 그의 손가락에 떨어뜨렸다. "녀석, 네게 눈물이 있는 것을 보니… 헛헛… 너를 믿을 수 있겠다. 사실 운다는 것은, 울지 않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그리고 네게 부모가 없어도 되는지는, 노부도 아직 확실히 모르는 일이고…" 그는 목소리를 길게 끌었다. 잠시 후, 만허생은 훨씬 인간다운 눈빛을 흘렸다. 만허생은 죽어 가며 입술을 달짝였다. "너… 너를 탄생시킬 마음을 먹은 것은… 인간으로 천리(天理)에 어긋나는 일을 한 것만 같다!" "크으으…!" 호료범은 입술이 찢어져라 질끈 씹었다. "왜… 왜냐하면… 너… 너는 부모가 원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 부모는 없어도 됩니다. 제… 제게는 할아버지가 오래 살아, 제가 뜻을 이루는 것을 봐 주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호료범이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말하자. "아… 아니다… 사… 사람에게는 뿌리가 있다. 그… 그것은… 나도… 그리고… 너도 부정 못하는 것이다!" 만허생은 숨을 헐떡였다. "죽…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으려 한 것이 있다! 그… 그것은… 누… 누가 너를 낳았느냐 하는 것이다!" "말하지 마십시오. 흐흑… 부… 부모가 있다면… 제 할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호료범이 쥐어짜듯 말하자. "나… 나는 네게 말해 주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듣지 않으려 하는 너는… 그… 그것을 바랄 것이다." "바… 바라지 않습니다!" "아니다. 너는 바랄 것이다. 언제고…" 그는 목소리를 아주 거칠게 했다. 그의 손은 점점 차가워졌다. "너의 부모는… 선택되었다. 육양절맥과 삼음신맥으로…" "…" "너… 너의 아버지 되는 사람은… 사… 사판(死判)이 찾았다. 그는… 거지굴에서 발견되었는데…특징은 두 다리가 없다는 것이다." "으으…!" "네 어머니는… 으윽… 비… 비구니(比丘尼)다!" "비… 비구니요?" "그… 그 여인은 거처가 확실하다." "예… 에?" "대… 대비(大悲)의 한 사람이다. 바… 바보이다. 너… 너를 모를 것이다!" "으으…!" "네… 네가 알더라도… 그… 그들은 모를 것이다. 그들은… 바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지. 으으, 너… 너를 믿기에이… 이것을 말했다. 부… 부디… 뜻을 이뤄 다오!" 만허생은 죽음을 느끼자, 마음이 조금 달라진 듯했다. 그는 영원히 말하지 않으리라 한 것을 말한 다음, 고개를 떨궜다. 그는 그대로 죽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호료범은 이제 완전한 고독을 느꼈다. 그는 부모가 원해 태어나지 않았다. 그는 중원천하를 구할 재목감으로 만들어진 아이였다. 그를 낳은 부모가 그를 모르고, 그를 만들어 낸 팔기인이 죽은 이상… 그는 너무도 완벽한 고독자가 된 것이다. 지하연공관. 호료범은 벽을 응시한 채 마치 석상으로 화한 듯,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응결된 곳, 그 곳에는 세 가지 이상한 물건이 걸려 있었다. 삼백육십오 개의 검흔을 가진 천잠사의(天蠶絲衣), 일그러진 태양신검(太陽神劍), 녹아 죽은 광허선사의 유골. 호료범은 그것을 보고 있었다. "세 가지를 꺾어야 한다!" 호료범의 눈빛이 한층 강렬해졌는 바, 용암이 분출하듯 격한 화염이 쉬임없이 폭사되어 나왔다. '파괴해야 한다. 나를 만들게 한 것들을…!' 그는 이를 악물며 손을 쳐들었다. 꽝-!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석벽에 세 자 깊이 장인이 찍혔다. "차아앗-!" 그는 땅에서 단검(斷劍)을 쥐며 벽을 그어 댔다. 스슥- 슥-! 검영이 무수히 날리며 검흔(劍痕) 하나가 깊이 파였다. 단 하나의 검흔. 하나, 그 강렬함은 천잠사의에 남겨진 삼백육십오 개 검흔의 현란함을 능가했다. 이어, 그의 손은 유골을 향해 활짝 펼쳐졌다. 우르르르릉-! 강기(剛氣)와는 다른 백무가 일어났다. 무시무시한 진원지기가 실린 흰 기류. 그것이 벽을 휘감는 순간, 벽 위에 걸린 세 가지는 모조리 벽 속으로 박혀 버리며 자취를 감췄다. "이제 여기서 더 얻을 것은 없다!" 호료범은 중얼거리다가 뒤돌아봤다. 그의 눈길을 끄는 석상자가 하나 있었다. 거기에는 봉인(封印)이 있는데… <봉(封). 불패(不敗)에 자신이 있다면, 이것을 열거라.> 오래 전, 만허생이 쓴 글이 거기 적혀 있었다. "자신 있습니다, 할아버지!" 호료범은 중얼거리며 석상자 가까이 갔다. 그는 먼저 석상자에 절을 한 후, 조심스럽게 그 뚜껑을 열었다. 석상자 안에는 한 장의 쪽지가 들어 있었다. 쪽지 전면. <네 몸 안의 자신감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다. 지금 노부는 죽은 몸일 것이다. 너의 무공을 시험할 수 없는 처지인 셈이지. 그래서 네게 두 가지 시험을 하려 한다. 그것은 시험이기도 하고, 네게 무적의 수단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너는 전설상의 이대금지(二大禁地)를 거쳐야 한다. 그 곳에는 네가 변황의 무리와 싸울 때, 꼭 필요한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을 다 취한 다음, 뒷면에 적힌 대로 행하라. 네가 가야 할 이대금지는 검각(劍閣)과 불회림(不廻林)이고…> 만허생의 배려는 너무도 치밀했다. "검각(劍閣)… 훗훗, 지옥(地獄)이었다면 더 통쾌했을 것을…!" 호료범은 아주 차게 웃었다. 사천(四川)의 동단(東端). 사천에서 중원으로 들자면, 거쳐야 하는 촉도(觸道)가 시작되는 곳이다. 촉도의 험난함은 이백(李白)의 시로 잘 표현될 것이다. 촉도란(觸道難)을 굳이 소개할 필요가 그 곳에 이르는 순간, 말끔히 사라진다. 구름이 비켜 가는 준령(峻嶺), 새가 감히 날기를 꺼리는 험애(險崖)… 잔도(棧道)도 이르지 못하는 단애(斷崖) 위에는 바람이 있을 뿐이었다. 유리알같이 미끄러운 벼랑. "잠룡승천(潛龍昇天)! 하앗! 청운적성(靑雲摘星)!" 원숭이보다도 날렵하게, 구름 덩어리보다도 가볍게 단애를 타고 날아오르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그는 간간이 벼랑에 매달려 진기를 바꾸며 힘차게 날아올랐다. 얼마를 갔을까? 그는 도끼로 찍은 듯한 협도(峽道) 앞에 이를 수 있었다. 그 한가운데. <입각자필사(入閣者必死)> 언제 만든 것일까?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주서석비(朱書石碑) 하나가 풍상을 겨우 버티어 낸 모습으로 그를 맞이했다. 석비 뒤에는 짙은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저 안에서 나를 시험하리라! 훗훗, 죽은 상대이건 산 상대이건나를 꺾을 것이 없음을 여덟 할아버님께 보이리라!" 잔혹히 웃는 청년, 그의 모습은 말소리의 냉기와는 달리 너무도 아름다웠다. 검각보다도 날카로운 눈썹, 봉황(鳳凰)의 눈매에 강인한 턱의 윤곽, 꽉 다물어진 입매에 서린 천하를 덮는 기개, 그리고 달을 쏴 떨어뜨릴 듯 날카롭게 뻗어 나가는 눈의 신광(神光)… 그 중 눈의 신광은 그가 진기를 일으킬 때에만 흘러 나왔다. 그의 눈빛은 평상시 아주 차고 맑은 눈빛이다. 바로 호료범(胡了凡)이 아닌가? 그가 십만대산에서부터 산맥을 타고 북상(北上)하다가 결국 검각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 안에서 무엇을 꺼내야 하는지도 몰랐다. 무려 오백여 년 간 인간의 발길을 거부한 검각(劍閣). 그 곳에는 일생을 괴벽하게 살다 간 한 기인의 전설이 비장되어 있었다. 검각노인(劍閣老人). 그는 평생 강호를 밟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전설은 소림사 장경각에 비장된 한 권의 고서(古書)에 적혀 있었다. 그 글은… <검각노인은 세 가지 기벽을 갖고 있다. 하나는 백 장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무엇이든 죽인다는 것이고, 둘은 성성이를 부려 천하의 보물을 취한다는 것이다. 셋은 기문대진(奇門大陣)과 기관(機關)으로 모든 생물을 조롱하기를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검각노인은 고금에서 보기 드문 광인(狂人)이었다. 그는 사람을 지극히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손대지 않고 죽이는 방법을 연구했다. 결과, 그는 기문진과 기관에 있어 고금제일(古今第一)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그의 거처가 바로 호료범의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짙은 안개 속.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며 흑의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오묘한 진세(陣勢)다. 일곱 가지의 기문진이 뒤섞여 있어, 구십구로(九十九路) 중 단 하나를 제외한 모든 길이 사문(死門)이다. 마지막의 문 하나도 생문(生門)이 아니라, 상문(傷門)이다." 미끈한 젊은이 하나가 안개를 뚫고 걸었다. 그는 취한 듯 비틀거리고 걸었다. '상문에는 막강한 함정이 있다. 죽음 직전의 아픔을 주는 관문이… 하나, 내게는 시시할 뿐이다. 그 어떤 것도 장중소(杖中笑)의 아픔만은 못할 테니까! 모든 것을 비웃으며 걷는 젊은이는 호료범이었다. 그는 상취대 선생에게서 배운 신법과 보법을 이용해 안개를 가르며 달려나갔다. 얼마를 갔을까? 협도가 아주 좁아지기 시작했다. 몇 걸음 더 가자 협도는 더욱 좁아져 한 사람이 어깨를 활짝 펴고 걷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호료범은 신형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더욱 가해 쾌속히 나아갔다. 갈수록 안개가 짙어졌으나, 그의 앞길을 방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아가기 잠깐, 호료범은 문득 지독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으으, 극한지기(極寒之氣)가 몰려든다!" 그는 입술을 놀리기조차 힘들 지경이 되었다. 휘이이잉-! 너무나도 지독한 한기가 갑자기 몰려들었다. 그것은 호료범이 경험한 지하빙부의 한기를 능가하는 절대의 한기였다. 그의 몸 위로 얼음이 덮이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찬바람이 눈을 뿌리기 시작하며, 호료범의 몸은 빙한설(氷寒雪) 안으로 꼼짝없이 갇혀 들었다. 진도(陳圖)에는 보통 사문(死門), 상문(傷門), 휴문(休門), 생문(生門)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갖춰져 있기 마련이다. 한데 검각노인의 거처에는 생문이 존재하지 않았고, 최소한 상문이었다. 호료범은 상문에 들어서며 꽁꽁 얼어붙고 마는 것이었다. '지극음풍진(至極陰風陳)이라는 것이다.' 호료범은 얼어붙은 가운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파팍-! 몸 위에 달라붙었던 얼음이 조각이 되어 뿌려졌다. "훗훗… 방심을 해서 당하기는 했다만… 미안하게도 나는 사람 같지 않은 불괴천강체(不壞天剛體)라오, 검각노인!" 호료범은 차게 웃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백 장 정도 갔을까? 우르르르릉-! 우레 소리가 나며 아주 뜨거운 바람이 몰아닥쳤다.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협도 안이 용광로 안같이 달아올랐다. "핫핫… 이번에는 이화적양도(離火赤陽道)로군. 그러고 보니, 이 곳은 바로 감리대진(坎離大陳)이구나!" 호료범은 즉시 불괴천강신공을 일으켜 몸과 옷을 보호하며 안으로 날아들었다. 음양대천기공(陰陽大天氣功)이라 불리는 특이한 내공법. 그것은 음양대절맥의 주인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이었다. 몸 안에 극음기(極陰氣), 극양기(極陽氣)를 함께 지니는 수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르르르릉-! 극심한 열풍(熱風)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호료범은 다시 백 장 간 다음, 분지(盆地)에 이를 수 있었다. 우선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전각(殿閣)이었다. <검각(劍閣)> 다 파괴되어 글씨가 흐릿한 현판(縣板) 하나가 보였다. 검각 위에는 연화대(蓮花臺)가 있었다. 그 위, 너덜너덜한 천으로 싸인 길쭉한 물건이 하나 놓여 있었다. 연화대의 전면에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음양감리진도(陰陽坎離陣圖)를 뚫고 온 자를 환영한다. 여기서 죽거나, 노부 검각노인이 이백 년 간 만든 것을 얻게 되리라. 검각노인(劍閣老人) 절필(切筆).> 연화대에 글을 새긴 사람은 검각노인이었다. "후후… 저 물건이 바로 내가 취해야 할 물건이구나!" 호료범은 웃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한순간, 그는 정강이쯤에 극렬한 통증을 느꼈다. "으으윽… 나의 신체는 도검(刀劍)에 베이지 않는 신체인데…!" 호료범은 다리에서 피가 쏟아진다는 것을 느끼며 아래쪽을 봤다. 그의 오른쪽 발목을 물어뜯고 있는 것이 있었다. 덫! 그는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 톱니 같은 이빨을 백 개 갖고 있는 커다란 덫은 사자(獅子)를 잡는 덫보다도 크고 강했다. 그것은 절세고수를 잡기 위한 덫이었다. "이 악랄한 늙은이!" 호료범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서 장력을 일으켰다. 꽈르르르릉-! 그가 화를 못 이기고 땅바닥을 후려치는 찰나, 그의 장력에 스치는 지면에서 덫이 수백 개 튀어나와 허공을 한 번 물다가는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연화대가 있는 검각 근처에는 덫이 가득 박혀 있었다. "으으, 하여간 기관학(機關學)에서는 더 이를 데가 없는 늙은이였다. 나는 물 위를 걷듯 걸었는데, 덫을 발동시키는 장치를 움직였으니… 휴우, 낙엽 한 장이 떨어진다 해도 덫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호료범은 인상을 찌푸리다가 오른 발목을 내려다봤다. 그는 그런 점에서 남달랐다. 그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자신의 발목을 꼭 남의 발목을 내려다보듯이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만년한철(萬年寒鐵)이 반, 그리고 자금사(紫金砂)가 반이다." 호료범은 허리를 천천히 기울였다. 그는 승냥이 이빨보다 날카롭고, 보검보다 날카로운 덫의 톱니에 손바닥을 댔다. 손에서는 피가 나지 않는다. 강기(剛氣)를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금혈석을 갈 때처럼…' 그는 덫의 양쪽을 쥐고 좌우로 가볍게 벌렸다. 땅-!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덫이 반으로 깨어졌다. 그 순간, 덫의 이음새 부분에서 화살 하나가 튀어올라 수직으로 날아올랐다가는, 이십 장 높은 곳에서 방향을 틀며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훗훗… 쪽지가 묶여 있군!" 호료범은 손을 내밀어 화살을 받아 들었다. 그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혀 있었는 데에도, 녹이 슬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화살 끝에는 양피지가 묶여 있었다. 호료범은 거만한 손놀림으로 그것을 풀어 봤다. 우선 보이는 것은 작은 단약 한 알이었다. <구전대이단(救轉大易丹)> 단약의 표면에는 그런 글이 금박(金箔)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단약을 싼 양피지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구천대이단을 먹으면 내외상(內外傷)이 모조리 낫는다. 힘을 되찾은 다음, 노부의 제자들과 비무(比武)하라. 이긴다면 노부의 벗 자격으로 검각에 들어, 노부가 남긴 것을 얻을 것이다. 검각노인.> 매우 오만한 글귀가 아닌가? 호료범은 단약을 손바닥에 놓았다. "훗훗… 이런 것 따위는 먹지 않는다!" 그는 차게 말하며 단약을 움켜쥐었다. 딱-! 단약은 손바닥에서 깨어졌다. 그 순간, 그는 손바닥에 돌돌 말린 종이쪽지 하나가 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단약 속에 쪽지가 있다니…" 호료범은 얼른 쪽지를 펴 봤다. <사실 단약은 독약(毒藥)이었다. 일보단장독(一步斷腸毒)이라는 것으로, 먹었다면 즉사했을 것이다. 노부는 들어선 자를 존경한다.> 검각노인은 소문보다도 흉험한 사람이었다. "훗훗… 검각노인, 이제는 나도 노인이 마음에 들게 되었소." 호료범은 웃다가 쪽지를 움켜쥐었다. 삼매진화가 일어나며 쪽지는 한순간 재가 되었다. 잠시 후,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입을 벌렸다. "나와라!" 그의 목소리로 인해 분지에 산사태가 일어났다. 폭포수를 침묵시켰던 목소리. "우…!" 그의 목소리는 바로 전진제일무공(全眞第一武功)이라 불리는 항마신후(降魔神吼)였다. "우우…!" 항마신후가 근처를 들썩일 때, 갑자기. 끼이이익- 끼익-! 끄으으- 끄으으-! 절벽 위쪽에서 후성(候聲)이 나더니, 절벽에 난 동굴 이 곳 저 곳에서 수십 마리의 원숭이가 훌훌 떨어져 내렸다. 키가 오 척 동자만한 원숭이들은 팔이 아주 길었고, 털빛이 붉었다. 어디 그뿐이랴? 눈빛은 촛불과 같이 붉었고, 찢어진 아가리 사이에서 튀어나온 세 치 길이의 송곳니가 섬뜩한 마음을 일게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갑옷과 장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슥- 슥-! 금모신후는 덫이 없는 연화각 주위로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수는 이십팔. 호료범은 금모신후가 일정한 자세로 내려서는 것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십팔숙(二十八宿)의 검진(劍陣)을 치다니… 금모신후는 사람보다 영리하다는 말대로군!" 호료범이 고개를 끄덕일 때, 다른 금모신후와는 달리 홍색호갑(紅色護甲)을 찬 금모신후 한 마리가 그를 향해 무엇인가를 내던졌다. 금모신후의 손을 떠난 것은 아주 빠른 속도로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호료범은 대접인수(大接引手)를 이용해 날아드는 것을 건네 받았다. 한순간. 팍-! 호료범은 손바닥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 했다. '금모신후는 용을 잡아 찢어 죽이는 괴력을 갖고 있다는 말대로다.' 그는 감탄하며 손에 쥐인 것을 봤다. 그것은 금패(金牌) 하나였는 바… 전면에는 위맹(威猛)한 노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검패(劍牌)> 그리고 깨알만한 글이 적혀 있는데… <노부 검각노인은 본래 명문(名門) 출신이었다. 하나 서자(庶子)라 대통(代統)을 이어받을 수 없어, 속세를 버리고 입산(入山)했다. 노부는 기연으로 두 분 상고기인(上高奇人)의 진전(眞傳)을 얻었다. 금모산인(金毛山人)의 비급 한 권, 그리고 검마경(劍魔經)이 그것이다. 노부는 평생을 두 가지에 심취했다. 하나는 금모신후 스물여덟 마리를 제자같이 키우는 것이고, 하나는 명가검초(名家劍招)를 깨뜨리는 반검초(反劍招)를 만드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절정(絶頂)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며, 어느 누구든 노부 제자들과 비무해 이기지 못할 것을 단언한다. 승부는 둘 중 하나가 죽을 때 날 것이다.> 검각노인의 글은 꽤 길었다. "명파의 검초를 깨뜨리는 반검초! 흐으음… 기인(奇人)이라기보다 괴인(怪人)이라 불릴 사람이나, 하여간 뛰어난 사람이다!" 호료범은 검패를 쳐들었다. 청색호갑(靑色護甲)을 찬 스물일곱 마리의 금모신후. 홍색호갑을 찬 한 마리, 대왕금모후(大王金毛 ). 스물여덟 마리 금모신후가 차고 있는 검은 하나같이 보검이었다. 물론, 이름이 있는 보검은 아니었다. 검각노인이 만들어 원숭이에게 준 것인데, 검신(劍身)에는 무시무시한 독이 발려져 있었다. 끄으으-! 금모신후들은 호료범을 비웃는 소성을 냈다. 눈앞에 있는 호료범 따위는 조금도 경계할 대상이 아니라는 듯. "훗훗… 나는 냉막한 자다. 그 따위 격장세에 넘어가지 않는다. 훗훗…!" 호료범은 비웃으며 검패를 쥐고 손에 힘을 가했다. 팍팍-! 매우 단단한 검패가 그의 손아귀 안에서 가루로 화했다. 끄으으- 끄으-! 금모신후들은 조사지령(祖師之令)이 부서지자, 몹시 분노해 숨을 씨근벌떡 몰아쉬기 시작했다. 호료범은 쾌재를 부르며 위로 날아올랐으며, 조금 엉성해 보이는 자세로 이십팔숙검진 안으로 뛰어들었다. 바로 그 순간, 스물여덟 자루 보검이 그를 향해 독광(毒光)을 일으켰다. 거미줄(蜘蛛綱) 같은 검막이 쳐지며, 수천 수만 개의 검화가 영롱히 피어났다. 호료범의 몸뚱이가 그 안에 파묻히기 직전. "핫핫… 너희들이 속았다!" 호료범은 취팔선보(醉八仙步)로 비틀비틀 움직이며 손가락을 빳빳이 세웠다. 그의 귀는 삼십 장 안을 듣고, 그의 눈은 스물여덟 자루 검의 검 끝을 모조리 간파하는 상태였다. 스슥- 슥-! 이십팔 검은 각기 다른 방향을 찔렀다. 번갯불 같은 검기가 호료범을 갈기갈기 찢을 듯할 때. "또 속았다. 허허실실(虛虛實實)에!" 호료범은 손가락을 내칠 듯하다가 치지 않고 위로 날아올랐다. 끄으으- 끄으-! 스물여덟 마리 금모신후는 화가 난 듯 호료범을 따라 날아올랐다. 무수한 금영(金影)이 허공에 난무(亂舞)될 때. "흥! 또 속았다. 나는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호료범은 몸을 뒤집으며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검진의 허점은 밑에 있다.' 그는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지면 가까이 떨어져 내렸다. 한순간. "차아앗-!" 그의 입술 사이에서 일어나는 항마신후가 금모신후들을 휘청하게 하더니, 손바닥에서 일어나는 대폭풍장(大暴風掌)이 스물여덟 마리 금모신후를 추풍낙엽같이 휘말아 올렸다.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금모신후의 진세가 흐트러졌다. 그것도 잠깐. 우우…! 금모대왕후의 부르짖음 소리와 함께 이십팔숙검진이 다시 완전하게 꾸며졌다. 호료범의 대폭풍장은 비록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으나, 거석을 가루로 만들 정도의 위력. 그러나 금모신후들은 조금도 다친 기색이 아니었다. '호갑(護甲)이 저 정도로 단단하다니…' 호료범은 눈에서 한망을 일으키다가 홍색호갑을 차고 있는 금모대왕을 싸늘하게 노려봤다. "너희 미물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괜히 나를 경동시켜 이 곳을 혈세(血洗)시키지 마라. 네가 괴수이니, 네게 말하면 해결이 되지 않겠느냐?" 그의 눈빛은 너무도 황홀했다. 금모신후들은 가공할 만한 기도(氣度)에 누그러지는 듯했다. '금모신후는 야수(野獸)같이 다루기보다, 사람같이 다룰 때 말을 듣는다고 했다.' 호료범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며 말을 이었다. "나로 말하면… 훗훗, 폭풍마검(暴風魔劍)이라는 사람이다. 너희 주인이 기다리던 사람이다. 나를 막지 마라!" 호료범은 부드럽게 말하며 팔을 늘어뜨렸다. 끄으으-! 금모대왕후는 조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호료범은 헛기침을 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호료범이 돌연 전의를 누그러뜨리자, 금모대왕후는 몹시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금모대왕후의 털복숭이 얼굴이 일그러질 때였다. 갑자기 호료범의 몸이 빛살보다 빨리 움직이더니, 금모대왕후의 목이 그의 양 손아귀 안에 정확히 들어섰다. 끄으-! 금모대왕후는 속은 것이 분한 듯, 눈물을 흘렸다. "훗훗… 너희들을 죽일 수도 있으나, 죽이지 않겠다. 왜냐하면, 죽은 주인을 위해 충절을 지키는 너희들을 차마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호료범은 금모대왕후의 목을 쥔 채 검각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붉은 호갑을 찬 금모신후들은 차마 덤벼들지 못하고 길을 내주었다. 호료범은 아주 당당히 연화대 앞에 이를 수 있었다. 연화대 위에 놓인 너덜너덜한 천을 벗기자, 금갑(金匣)이 나타났다. <일검일경갑(一劍一經匣)> 금갑 표면에는 그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이것이리라!" 호료범은 중얼거리며 금모대왕후를 놓아 줬다. 금모대왕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검각 아래로 내려갔다. 금모대왕후는 사람에 가까운 영물이었다. 속아서 당한 것이나, 패배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금모대왕후는 눈물을 흘리며 검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호료범은 일 수(手)로 금갑을 깨뜨리고, 그 안에서 두 가지의 물건을 볼 수 있었다. 두 자 다섯 치 길이 묵검(墨劍)과 양피지 비급 한 권인데… <태아신검(太阿神劍)> <구파반검비경(九派反劍秘經)> 제목을 보자면 그런 것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탓일까? 태아신검의 검집은 너무도 낡아 볼품이 없어 보였다. 얼핏 보면 그 안에 녹슨 보검이 있을 듯했다. 구파반검비경 안에는 아홉 문파의 진산검초(鎭山劍招)를 깨뜨리는 비법이 적혀 있었다. 소림사(少林寺), 무당검파(武當劍派), 해남검파(海南劍派), 복호사(伏虎寺), 점창(點蒼), 전진(全眞), 공동(空洞), 청해(靑海), 화산파(華山派). 아홉파 중 해남파와 청해파는 절전된 문파였다. 거기 적힌 글들은 정말 무서운 것들이었다. 비급이 정파를 노리는 악의인의 손에 들어간다면, 백도에는 바람 잘 날이 없을 것이다. 호료범은 구파반검비경을 품 안에 거둔 다음, 눈길을 태아신검 쪽으로 향했다. 너무도 볼품없는 검집이다. 검각노인이 남긴 금갑에 담길 만한 명품은 결코 아니었다. 호료범은 잠시 망설이다가 태아신검의 자루를 잡아 천천히 끌어당겼다. 스르르릉-! 갑자기 용이 나타나 울부짖는 듯 맑은 울음소리가 나더니, 근처가 금광(金光)에 휘감겼다. "아, 검신이 추수(秋水)같이 밝다니… 녹슨 검집 안에 이렇듯 훌륭한 검신(檢身)이 들어 있으리라 누가 상상하겠는가?" 호료범은 혀를 내두르다가… 끄으으- 끄으으-! 우우…! 스물여덟 마리 금모신후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다. 금모신후들은 조금 이상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태아신검을 향해 일제히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는 것이었다. 끄으으-! 금모대왕후는 울부짖다가 호료범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호갑을 풀어 두 손에 들고 호료범 앞에 와 무릎을 꿇었다. "호갑을 바친단 말이냐?" 호료범은 맑게 말하다가 호갑 안에 봉서 한 장이 들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금모신후를 죽이지 않고 일검일경(一劍一經)을 얻는다면, 의당 금모신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태아신검은 노부가 전설상의 명검 태아(太阿)를 본따 만든 것으로, 어떠한 마검(魔劍)이건 갈라 버리는 힘을 갖고 있다.> 검각노인, 그는 괴벽한 사람인 동시에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그가 인간 세상을 멀리했던 이유는, 인간 세상의 정리가 짐승간의 정리보다도 추악하다는 데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호료범은 미소를 지으며 금모대왕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게 죽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끄으으-! "내게 덤벼든 것을 미안하게 여기지 마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검각의 주인이니 편히 살거라!" 호료범은 말하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덫에 걸린 부분이 몹시 아프다.' 그가 인상을 찡그릴 때, 금모대왕후가 그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그의 눈빛은 가자는 뜻을 전했다. "핫핫… 몰래 담궈 논 술이라도 있느냐?" 호료범은 발을 절뚝이며 금모대왕후를 따라갔다. 금모대왕후는 검각 뒤쪽으로 가다가, 절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호료범은 의심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갔다. 얼마 후,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장소에 이르게 되었다. 금모대왕후가 그를 안내한 곳은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 동굴 안이었다. 동굴 안에는 어린아이 주먹만한 버섯이 가득 피어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열탕이 끓고 있었다. 끄으-! 금모대왕후는 웃는 듯 부르짖으며, 열탕 안으로 뛰어들었다. "핫핫… 이제 보았더니, 전설상의 회생약탕(廻生藥蕩)이로구나. 핫핫… 저기 몸을 담그면, 피가 금방 멈추고 몸이 강해지지!" 호료범은 의서에서 본 것을 기억하고 아주 크게 웃었다. 사흘. 호료범은 반검경(反劍經), 태아신검과 더불어 사흘을 보냈다. 사흘 간 그의 식량이 된 것은 옥지(玉芝)였다. 그것은 장복(長服)할 경우 밤눈이 밝아지고, 백독불침(百毒不侵)의 피를 갖게 된다는 영약이었다. 금모신후들은 그의 비무 상대가 되어 주었다. 호료범의 초식은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검진에 대항하는 방법에 남다른 성취를 지닐 수 있었다. 새벽이 될 때, 호료범은 금모신후들의 눈물 어린 전송을 받으며 검각을 벗어났다. 금모대왕후는 오백 리 밖까지 따라 나왔다. "대왕아, 나는 돌아올 것이니… 이제 그만 가 봐라!" 호료범은 동생에게 말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금모대왕후는 그의 소매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언제고 필요하면 너희들을 부르겠다. 그러니, 나를 보내 다오. 너의 자랑스러운 장소성 속에서!" 호료범이 다정히 말하자… 끄으으- 끄으-! 금모대왕후는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한순간. 우우…! 금모대왕후는 크게 부르짖었고, 호료범도 따라 부르짖으며 날아올랐다. "우…!" 십 리를 들썩이는 장소성. 그것은 근처의 산간 마을에 하나의 전설이 될 만한 것이었다. 신 하나가 내려와 부르짖었다는… "우…!" 호료범은 장소성을 끌며 아주 멀리 사라졌다. |
첫댓글 잼 납니다 효로범!
재미납니다.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