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병 제 3사단 학도병 중대(2)
1950년 8월 11일, 새벽 4시 40분...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날이 새면서 시야가 분명해질 무렵에 학교 정문으로 북한군의 행군 종대가 다가오는 것이 눈에 띄게 되었다.
척후병인 듯한 20여명의 인민군들은 길 좌우에서 접근해 오고 있었다.
중대장 김용섭의 지휘로 30미터 까지 유도한 다음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적의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20여명 전원이 사살되었다.
잠시 후 적은 증원을 받아 철로를 사이에 두고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2,30분후 적의 박격포탄 20여발이 투하됨, 학교 건물은 폐허로 변함
적은 20여분이 지난 후 전방의 도로 양편 배수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이동하여 저지선을 우회했다.
이때가 아침 6시...적들은 겹겹이 포위하여 정면으로 공격해 왔다.
적들이 100미터에 접근하자 집중사격을 개시했다.
적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도주해 버렸다.
얼마후 적의 대부대가 기관총을 앞세우고 정면으로 진격해 왔다.
적과의 거리는 100미터... 피아간 공방전이 40분간 계속되었다.
적병 30여명이 사살되었다.
학도병들은 지급받은 실탄을 다 발사했다.
유명욱 소대장, 김만규와 안영걸(서울 농대 수의과)은 군수품 창고로 가서 5상자의 탄약을 미군 지프차에 적재하고
안영걸이 운전해 중대로 돌아왔다.
그들은 실탄 상자를 어깨에 메고 포복을 해 실탄을 중대원에게 지급했다.
후방 지휘소는 아무런 연락없이 후퇴했다.
학도병들은 사령부 행정요원 60여명과 함께 사령부 주변 방어전을 전개했었다.
국군 잔여 병력이 학도병의 좌우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면의 적 공격을 용이하게 격퇴할 수 있었다.
적들은 100미터 전방과 좌우 측면을 포위해서 공격해 오고 있었다.
20분 후, 적이 우측 측면에서 포복으로 접근해 오자 또 사격전이 벌어졌다.
과수원 복판 초가집에서 적의 기관총탄이 날아왔다.
이우근(동성중학교 3학년)이 수류탄을 양손에 들었다.
김탄(서울 교통학교) 이병균(배제 중학교 3학년)도 수류탄을 두손에 쥐고 따라나섰다.
그들은 낮은 포복으로 과수원의 밭두렁에서 초가집까지 접근했다.
세 명의 학도병들은 기관총 총좌에 수류탄을 일제히 투척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초가 추녀 일부와 벽이 박살났고 기관총은 흔적도 없어졌다.
함경도 사투리로 독려하던 군관이 폭살되는 등 10여구의 시체가 뒹굴었다.
진지로 돌아온 이우근은 축 늘어진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교복은 여러군데 찢어져 속살이 보였다.
오후 1시 30분...이젠 탄알과 수류탄도 얼마 안 남았다.
8시간 이상 적과 치열한 접전을 했던 것이다.
적들은 바싹 다가 왔다.
세 번째 전투가 멎은지 2시간이 지났다.
시간은 오후 2시...학도병들은 적의 행동을 주시하면서 피가 마르는 시간을 보냈다.
어디에 선가 매미 소리가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학도병들은 두 끼를 굶었다, 건빵을 씹었지만 목에 걸려 넘어 가지 않았다.
폭양은 찌는듯 내려 쪼였다.
땅에서 발산하는 열기 때문에 땀방울이 비오듯 흘렀다.
이우근은 목이 타는듯 했다. 냉수를 실컷 들이키고 싶었다.
학도병들이 엎드려 있는 상록수 울타리 주변으로 개미떼들의 행렬이 부산했다.
이우근은 교복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무엇인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참 써 내려간 이우근의 손에 만년필 잉크가 묻었다.
한가롭고 적막한 시간이 흘렀다.
얼마 있으니까 적병 한 명이 둑에 올라서서 백기를 흔들자 그대로 사살해 버렸다.
한가롭고 적막한 시간이 흘럿다.
이러한 적막은 적들의 투항 권고 때문에 깨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인민군 766부대이며 장백산에서 유격 훈련을 받은 중국 팔로군 출신이라고 말했다.
참조:<학도의용군>인용하면~확성기로
"우리는 인민군 5사단 2연대인데 국방군 동무들을 해방시켜 주겠다. 30분 여유를 줄테니 잘 생각해 보라"
학도병들은 "동무들이나 항복해라 그래 포항은 어떻게 들어 왔나?"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어젯밤 국방군 암호를 대고 안강을 거쳐 들어왔다. 암호는 달과 별이더라" 고 대답했다.
참조:766유격 여단(여단장 오진우총좌)은 6,25발발 임원진에 기습 상륙했으며 보현산, 구암산 일대에 침입했다.
(766유격부대는 비학산쪽의 산악지대를 통해서 기계로 침입하게 된다)
아군 3사단은 영덕, 강구에서 인민군 제5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9일, 인민군 12사단이 안동을 거쳐 기계를 침입, 8월 10일 포항 북쪽 흥해를 점령함으로써
국군제 3사단의 퇴로가 차단되었다.
'6.25 전사'에 의하면 적 1개 대대규모의 병력이 포항여중 정문 쪽으로 장갑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고 함
길안영이 투항하라느 소리를 듣다 못해 선 자세로 M1소총을 난사했다.
그 순간 길안영은 적이 발사한 총탄에 맞고 쿵 쓰러지고 말았다.
피를 본 금병선(태백중)은 철길 둑을 달리면서 실탄을 냅다 갈겼다.
금병선의 총알에 맞은 적들은 외마디 비명소리를 여기 저기에서 질렀다.
금병선은 10미터도 채 못가서 적들의 집중 사격으로 피를 토하고 장열하게 전사했다.
금병선의 원수를 갚겠다고 중상을 입은 길안영은 비칠 거리다가 몇 발자욱 가다가 쓰러졌다.
이우근이 뛰어나가 길안영의 두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참조:김만규(78세 당시 연락병)씨의 증언: 인민군이 확성기로 항복하라는 회유로 길안영이 총을 놓고 걸어 나갔는데
몇 발자욱 안가서 그냥 쏘아 버렸다고 함, 이를 신호로 다시 총격전이 시작되었다고 함
시간을 끌려고 그렇게 했다는시각이 있다.
학도병 중대장, 소대장 및 연락병이 본 시각이 각각 틀리는 내용이 있다.
현장에는 없었던 남중령이 쓴 책의 내용도 역시 각 각 다른 부분이 있다.
난 주로 김용섭 교수 저 <학도는 이렇게 싸웠다>에 더 비중을 두었다.
인민군들은 정규 군인 부대가 아니고 누더기를 걸친 학도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총공격을 개시했다.
인민군들은 학도병들의 배후를 유린하고 서서히 포위망을 압축해 오고 있었다.
북한군은 장갑차 5대를 앞세우고 전진한다.
그 중 2대가 학교 정문으로 돌입하면서 기관포를 난사하고 있었다.
적병들은 10m 전방까지 육박하였다.
적들은 아군 진지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학도병들은 재빨리 방망이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며 혈전을 전개했다.
요란한 총소리와 수류탄 폭음 소리가 연신 들렸다.
기관총탄이 우박처럼 날아 들었다.
학도병들은 실탄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을 보고 사격을 늦출 수가 없었다.
오후 2시 반 쯤 되니까 실탄이 바닥이나서 이제는 최후의 결전만 남게 되었다.
흩어져 있던 각 부대는 소대의 주저항선으로 집결했다.
학도병들은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기 위해 돌격 개시선에 산개했다.
학도병들은 서로 아무말이 없었다.
적들은 서서히 포복을 하면서 접근하고 있었다.
오후 2시 40분... 김용섭이 수류탄을 힘차게 투척하고 선두에 나섰다.
적들은 앞으로 쓰러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1소대장 유명욱, 2소대장 김일호, 1소대 향도 이우근, 연락병 김만규 등 70여명의 학도병들이 함성을 고창하며
육탄 돌격을 감행했다.
삽시간에 백병전으로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잠시 주춤거리던 인민군들도 정신을 차린듯 학도병들을 향해 따발총을 난사했다.
학도병들은 여기저기서 "앗!" " 아이쿠!" " 어머니!" 하며 적탄에 쓰러졌다.
길안영이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은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탕!"하는 총소리에 이우근이 "어이쿠!"하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적탄이 이마를 관통했다.
이우근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힘없이 눈을 뜬채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김용섭은 뒷덜미에 총알을 맞고 의식을 잃었다.
1소대장 유명욱도 쓰러졌으나 정신을 차려 오른손을 상처에 대고 지혈시켰다.
"엄마! 엄마!" 를 연발한 15세의 소년 학도병 김만규는 적탄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윤병국은 적의 방망이 수류탄에 11군데에 파편상을 입고 쓰러졌다.
김일호, 김언구도 넘어지고 이상헌이 숨을 거두었다.
총대와 총대가 맞부딪히는 소리, 아군의 절규 소리 그리고 적군의 비명 소리...
처절한 살륙의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적의 대검이 학도병들에게 내려 꽂힌다.
학도병들은 분수처럼 선혈을 토하며 장렬히 산화했다,
이우근이 일기장을 남긴채 전사했다. 윤정한도 죽었다.
윤학이 최후의 만세를 고창했다.
김영환, 김춘식, 길안영, 서성용, 정문호 등이 차례로 전사했다.
목사의 아들인 17세, 대전 중학교 출신인 강희갑군도 전사했다.
이윽고 총성이 멎었다. 마침내 포항 전투도 끝난 것이다.
학생들은 동북 의용군 출신인 인민군 정예 부대와 장장 11시간의 혈투를 감행했다.
그들 또래의 학생들은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학도병들은 솔선수범하여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구하기 위해 혈서 지원 까지 해 민족의 제단앞에 목숨을 바쳤다.
48명의 군번없는 학생들은 교복차림 그대로 전사했다.
(처음에는 47명으로 기록, 나중에 포항여고 운동장 정지 작업 시, 시체를 발굴해 교복 명찰이 확인되어 전사자는 48명이 됨)
이 근접전에서 학도병들은 50명 내지는 60여명의 적을 사살했다.
남은 학생 13명은 포로가 되었는데 후에 전원 탈출했다.
4명은 행방불명, 중경상을 입고 살아 남은 자는 6명이었다.
전사자 수습은 사망 후 보름이 지나서 시체가 부폐하고 학생증은 비에 젖어 알아볼 수 없었다.
확실히 신원이 확인 된 것은 10명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김춘식(감포) 이상현(부안, 중앙대) 윤정한(양주, 성남중) 김영환(대구, 대구상) 이상헌(대구, 대구공고)
김언구(평택, 국민대) 이우근(양평, 동성중) 윤학(보은, 청주중) 윤재정(김해, 신흥중) 금병선(장성, 태백중) 이었다.
아군이 포항을 탈환한 뒤 3사단이 임무 교대로 오게 되자 김석원 준장은 학도병의 시신을 모아 일단 가매장을 하고
표를 세워두었다.
포항 전투 이후 3사단 학도병은 어떻게 되었을까?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복귀한 학도병들과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학도병이 다시 모여 들었다.
8월 20일, 9명의 학도병들이 계속 싸울 의지를 분명히 하자 김석원 장군은 이를 치하하고 무기와 군복을 지급했다.
나머지 학도병들이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경주,울산, 부산, 대구, 밀양으로 각각 모집 활동을 전개한다.
각각 56명, 48명, 계 113명을 증원하게 되었다.
8월 24일, 3사단 학도병 중대는 재편성을 해, 3사단 23연대 남상선 소위의 지휘를 받었다고 한다.
2소대장 유명욱을 제외한 두 소대장은 새로 뽑혔다.
이때 참모총장인 정일권장군이 격전지를 찾아와 묵념했으며 재편성된 학도병들을 집합시켜 훈시를 했다.
중대장을 맡은 남상선소위는 매일 같이 송도 해수욕장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밤에는 사령부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그후 3사단 학도병들은 북진하는 3사단을 따라 주로 후방 경계, 선무공작의 임무를 띄고 원산까지 가서 맹활약을 했다.
3사단 학도병들이 동해안 도로로 북상 중 묵호 여중생 두 명이 합류했다고 한다.
포항여중 전투에서 3사단 학도병들을 공격한 적의 부대는?
김용섭교수가 지은 전쟁수기에서는 학도병을 공격한 적의 부대가 인민군 5사단이라고 했다.
근래 김만규씨의 증언에도 인민군 5사단이라고 했다.
그러나 남상선 저 <3사단 학도 의용군>에 의하면 공격한 적부대가 인민군766유격 여단이라고 기록했다.
또 어떤 기록에는 인민군제 12사단(7사단을 개편)이라고도 한다.
인민군 12사단은 안동, 청송을 경유 기계까지 침입, 포항 북쪽 흥해까지 점령했다.
766유격여단 역시 비학산 산악지대를 통해서 기계로침입, 포항 북쪽으로 침입했다.
포항여중 정문으로 들어온 장갑차가 발사를 했다는 정황으로 봐 5사단은 강구쪽에서 대치하고 있는데
어떻게 장갑차가 태백산맥을 넘어 왔는가?'하는 면에서 부정적이다.
물론 수색대만 이라면 태백산맥을 타고 침투할 수는 있다.
766부대는 비정규전을 하는 유격대이니 장비 편제상 장갑차가 없기에 인민군 12사단이 이라는 부분에 무게를 두고 있다.
포항여중 전투가 막바지에 접어들 때 적의 확성기에서 항복을 권유하면서 30분간 시간을 주겠다고 해서
학도병 측에서 "너희들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되었나?" 물었는데 "어제 안강에서 왔다" 라고 답변했다(김만규 증언)
안강에서 왔다면 5사가 아니라 12사단이 맞은 것 같다.
기계 전투에서 적 12사와 766부대가 연계해서 공격했었던 사례가 있기는 해서 합동 작전이었을까?.
아마 인민군들이 역정보를 흘려 5사단이라고 확성기로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때 적의 병력 손실이40% 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학도병을 공격한 적의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라 함은
약 600 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인민군 12사단과 766부대는 전원이 조선 의용군 출신이었다.
학도병이 안전히 포위가 되고 적의 장갑차가 공격해 오자 중대장 김용섭은 사단 본부와 연락을 해 보겠다고
무전기를 들고 뒷산으로 올라 가다가 목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1소대장 유명욱이 지휘권을 인계받아 계속 항전했다는 기록이있다
(어떤 기록에는 2소대장 김일호가 중대장 대행을 했다고 함)
또 적이 3면을 포위, 적 특공대 8명이 위장을 하고 포복해서 접근, 30m 돌격선에 들어서자 1소대 김언구(19세 국민대)
이상헌(20세 중앙대 2년)이 수류탄을 던지고 집중 사격을 가해 적 특공대를 전멸 시켰다고 한다.
3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일본 육사졸업, 일본군 대좌 출신이어서 친일파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중일 전쟁 시, 소좌로써
산서성 동원전투에서 2개 중대의 병력으로 중국군 1개 사단 병력을 격퇴시킨 일화로 한, 중,일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대대장으로 출전, 북경 부근 전투에서도 용맹을 떨쳤다고 한다.
1949년 5월 1사단장 때, 적 38경비여단(여단장 최현)과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고 진천지구 전투에서
인민군 2사단(최현 소장)을 공격하여 이 지역을 7일 간 방어를 했다.
당시 최현에게 집을 빌려 주었던 마을 사람은
" 그 못된 놈을 또 만나 이 꼴이 되었군" 라고 푸념을 했다고 한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때, 육탄 10용사가 폭약을 안고 적 진지에 뛰어 들어 육탄 공격으로 자폭한 무용담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는 카이젤 수염에 일본도를(혹은 권총) 높이 들고 최일선에서 호령을 하며 위풍당당하게 지휘했을 뿐만아니라
후퇴가 없는 호랑이 사단장 이었다고 한다. (일본도는 부관이 가지고 다녔다고 함)
71명이 학도병들은 처음에는 존경하는 김석원장군이 사단장으로 있는 수도사단에 와서 배치되어 안강 전투에 참여한바가
있다.
학도병들이 수도사단에서 3사단으로 온 것도 그들의 우상인 김석원 장군의 부임지를 따라서 왔기 때문이었다.
56세의 김석원장군은 병환으로 고생하면서도 무사히 3사단 병력을 철수시켜 맥아더 원수의 찬사를 받었다고 한다.
김석은 장군은 무보직으로 있다가 1956년에 소장으로 예편해서 성남고등학교 교장, 이사장으로 육영사업에 전념했다.
그리고 1960년 무소속으로 5대 민의원에 당선되기도했다.
<가자! 김석원장군 휘하로!>라는 슬로건으로 자기를 따라온 학도병 48명이 산화하게된 것을 너무 가슴 아프게 생각한 그는
1955년 흑석동 한강변에 학도 의용군 헌충비를 건립했다고 한다.
후일 중대장 김용섭은 서울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중대 연락병(전령) 김만규는 대구 섬광교회 목사를 했었다.
TV에서 김만규씨의 증언에의하면 당시 나이는 15세, 자기 키보다 한 뼘 정도 긴 M1소총을 들고 다녔다는 것
죽을 고비를 일곱 번 넘기는 등 12군데 파편이 몸에 박히고 오른 손가락 일부가 절단되었다고 한다.
포항여고에 있던 학도병 전적비는 동작동 국립묘지로 옮겼다.
(1968년 국립 현충원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의 석함에 안치됨)
학도병의 넋을 기리고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포항시 용흥동 산자락에 위치한
학도 의용군 전승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난 KBS-TV에서 학도병 기념관 내부를 방영한 장면을 보았는데 이를 확충해서 대대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포화 속으로" 영화 상영 이후 2011년 10월 5일 3사단 연병장에서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5명(김만규, 윤병국, 장진영
정수득, 주정만)에게 명예 군번(19500811)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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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흑한 전투는 시작되었지만 후방 지원은 없고 실탄 떨어지면 전쟁은 패전으로 끝나는 불행한 사항을 눈물 흐르며,
그날을 생각해야 하는 우리 후배들은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해야합니까? 그 선배님들의 충정어린 큰 마음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지난날을 일깨워준 님께 고마움을 표합니다.
우리민족의 비극이었습니다.
한해솔님...이거 기록을 잘 남겨두셨습니다..후세들에게 도...소중히 보관하시길.... 좋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