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꿈을꾸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남동생이 바다에서 건져져서 한 줌의 재가 되어 뿌려진 그 날 이후 나는 매일 밤 마다 꿈을 꾸었다 관에 넣기 전에 입힌 파란 양복을 입은 모습으로 동생은 그렇게 꿈에 나타났다 지금도 기억한다 그 비릿한 물 냄새...찰싹거리는 파도 소리. 그리고 누부야... 부르는 목소리. 도대체 왜? 왜 나의 꿈 속에서만 나타는 것인지 알수도 없고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엄마는 동생의 일을 입에 담는 것 조차 용서하지 않았고 두 여동생은 꿈에도 한 번 안보인다고 울먹이곤 했다 그런 식구들에게 내 꿈에서 동생을 거의 매일 보는 것을 말할수 없었다 8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동생이 꿈에 나타나는 일이 점차 드물어졌고 그 대신 나의 그리움이 더 깊어졌다
어머니의 한 태에서 일 년을 사이로 태어나 그리 살가운 사이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나와는 달리 병약하게 태어난 남동생은 엄마의 모든 것이었다 아마도 남동생은 커가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나를 많이 미워하고 질투했었나 보았다 나를 괴롭히는 장난을 많이 하고 골탕 먹이는 짓을 끊임없이 했다 들켜서 아버지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고 두 분의 싸움은 거의 남동생과 나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가 특별히 남동생을 그리워하고 못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왜 내 꿈 속에서만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나는 외할머니의 일을 기억해 내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꿈 속에서 나는 외할머니를 따라가곤 했다
어딘가까지 따라가면 외할머니는 돌아서서 막 손사레를 치며 나를 못오게 했는데 그 때 깨어나면 사나흘은 아팠다 그 이야기를 아버지께만 했는데 처음엔 외할머니가 너를 많이 이뻐하셔서 보고 싶으신가 보다라고 다독이셨다 그러나 일 년여 동안 반복해서 꿈을 꾸고 아픈 기간이 길어지자 아버지는 송정리로 가셨다 외할아버지와 크게 싸우시면서 외할머니의 면례를 주장하셨고 모든 비용과 이장할 산소 자리까지 만든 다음 일을 벌리셨다 외갓댁 식구들은 이후 오랫동안 그 때의 광경을 거듭해서 이야기 했다 관이 물에 잠겨있고 외할머니의 시신은 하나도 썩지않고 퉁퉁 불어 어떻게 할수없어 화장한 뒤 뼈만 다시 묻었다고. 무덤을 조금 건드리자 벌써 물이 배어나와 노발대발하시던 외할아버지가 땅에 주저 앉으시며 그렇게 우셨다고...
정말 거짓말 처럼 나는 그 후 한 번도 외할머니의 꿈을 꾸지 않았다 아들이 없던 외가에 아들 노릇을 했던 아버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후에 큰 이모가 말해 주었다 -밸일이지야 딸이 다섯인데 우째 손녀한테 그래스까이 밸나게 쟈를 이삐해 쌓더니 선몽해 뿌렀구마이- 큰 이모가 신기한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꿈은 저 먼 알수없는 곳의 통로였고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인 것을 나는 어린 나이에 알았다 그런데도 굳이 그 사실을 외면한 것은 내 삶이 너무나 편치 않았고 꿈으로 인해 아프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의 꿈을 꾸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무어라 표현할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이 심장을 옥죄어 왔다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야 했다 나를 도와줄 아버지는 남동생이 죽은 삼년 후 돌아가셨고 어떻게 해야할지를 알수가 없었다 결심을 하고 나자 마치 그래야하는 것 처럼 나는 고갈산 중턱에 있던 그 만신 집을 물어 물어 찾아갔다
팔 년 전 겨울 남동생은 군대간 후 첫 휴가를 나왔고 엄마는 갖은 음식을 장만해서 동생과그 친구들을 먹였다 친구들은 2차를 가야 한다면서 싫다하는 동생을 데리고 나갔는데 엄마가 극구 말리셨다 동생이 하는 일을 말리는 법이 없던 엄마였는데 그 날은 유별나게 동생을 잡았다 비도 오고 시간도 늦었는데 다음날 놀아라고 그렇게 잡았건만 ... -어무이 쫌만 놀다가 오께예 걱정마이소- 동생은 여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그렇게 집을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와이라지? 와 이리 가슴이 두근거리노? 오랜만에 바서 좋아서 이러꺼나?- 엄마는 그렇게 혼잣말을 했고 신혼이던 나는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렸고 받으니 엄마였다 동생이 돌아오지 않았단다 술이 취해 어디 친구 집에서 잘꺼라고 말하면서 좀 있으면 오겠지라는 내 말에 엄마는 욕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저녁이 되어도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고 엄마는 친구들을 수소문했다 세 명은 동네 친구였고 나머지는 학교 친구였는데 이틀을 알아본 결과 아무도 동생의 자취를 몰랐다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곳이 남항의 포장마차였고 다들 술이 너무 취해 각자 집으로 갔다는 말이었다 -그라믄 야가 어디 갔노? 어디 갔단 말이가? 문디 자슥들아 델꼬 나갔으면 너거들이 델꼬 와야지 처음 휴가나온 아가 술을 오랜만에 마시가 억수로 취했을낀데 야가 취해서 어딜 갔다믄 말이고?- 친구들의 잔등을 때리며 엄마는 올부짖었고 아버지는 영도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했다
마치 사라진 것 처람 동생은 찾을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연일 경찰서로 불려가서 심문을 받고 엄마는 식음을 전폐했다 동생의 실종이 닷새째가 되었을 때 엄마가 나를 앞세우고 어디론가 향했다 엄마는 평소 점복을 믿지도 찾지도 않는 사람이었는데 누군가가 아주 용한 무당이 있다고 알려준 모양으로 고갈산의 그 꼬부라지고 가파른 길을 잘도 올라갔다 다마네기 보살집이 어디인교? 몇 번을 묻고 헤멘 끝에 오래된 양철 지붕에 마당이 제법 넓은 무당 집에 도착했다 아침이었는데도 몇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고 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냄새에 무척 기분 나빴으나 엄마 때문에 무어라고 말을 할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