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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이수도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에 위치하고 물이 좋아 황금어장인 섬으로 면적은 0.384km2, 해안선 길이는 5km이며 인구는 1백여 명이다. 관광명소로는 옥포랜드와 덕포해수욕장 · 대금산 등의 관광지와 장목진객사 · 구영등성 · 구율포성 · 이수도패총 등의 유적지가 있다.
멸치잡이 권현망(權現網)이 들어와 마을이 부유해지자 바닷물이 이롭다 하여 ‘이로운 물의 섬’이라는 뜻으로 이수도라 붙였다고 한다. 이수도는 이물도, 학섬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육지에서 남강물을 끌어다 쓰고 있지만, 오래 전부터 물이 좋아 건너편 시방 사람들은 이수도까지 와서 물을 길어다 먹었을 정도였다. 이수도는 거제의 동쪽에 있는 섬으로 거제 대금산에서 내려다보면 한 마리의 학이 북쪽을 향해 날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거제도의 시방마을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지도를 보면 이수도는 경남 거제도의 오른쪽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부산과 이수도와의 직선거리는 매우 가까워서 불과 60km 정도 되지만, 차량으로 오면 통영과 진주를 거쳐야 하기에 2시간 10분 걸린다. 그러나 지난 2010년 12월 개통된 거가대교를 통해 자동차로 달려오면 50분 정도로 단축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해졌다. 게다가 대전과 통영간 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서로 연결되었다. 이에 따라서 포화 상태인 남해고속도로의 교통량을 분산시키고 부산과 거제와 통영, 남해, 여수, 목포로 이어지는 남해안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수도는 시방마을 선착장에서 도선을 타면 약 10분 정도 들어간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시방 선착장 부근에 볼거리가 하나 있다. 바닷가의 멋진 돌담집인데 모 방송사에서 방영한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 나온 집이다. 건축 분야에 무관한 분이 9년이란 기나긴 세월동안 일만여 개의 돌을 하나하나 직접 손으로 쌓아서 만든 성처럼 생긴 집이다. 주위에서는 이곳을 매미성이라고 부른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로 인해 큰 피해를 본 다음, 돌로 옹벽을 쌓으면서 지금의 집이 되었다고 한다. 정교하게 생긴 이 매미성은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성곽처럼 요새 같았다. 집 주인의 집념이 대단하다. 사람이 어떤 일에 몰두하고 정열을 쏟으면 불가한 일도 가능하다는 걸 말해주고, 무슨 일이든지 반드시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말이다.
시방마을은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외지인이 많이 들어와 새롭게 집을 건축하고 산다. 아무래도 거가대교의 건설로 부산과의 접근성이 뛰어나기에 부산과 창원 등지에서 전원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둥지를 틀고 살면서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위해 펜션도 운영하고 있다. 거가대교의 효과를 톡톡히 보는 곳이 거제도이며 이수도도 마찬가지이다.
도선을 타고 이수도에 들어가면 방파제에는 낚시꾼들이 많다. 이곳 방파제는 왼쪽 즉 북방파제는 외해 쪽에 삼발이들이 심어져 있지만, 짧은 오른쪽 즉 남방파제는 아무 것도 없는 말 그대로 순수한 방파제다. 그래서 남쪽 방파제에는 낚시꾼들이 거의 없다. 그리고 배도 북방파제 쪽에 접안해 있고 남방파제에는 거의 없다. 집들은 물양장에서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축대 위에 집들이 층층이 있다. 집들은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이곳은 구릉이 많고 평지는 10% 정도에 불과하다. 본토 쪽으로 뻗은 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완만한 만입이 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나머지는 모두 암석해안으로 곳곳에 해식애가 발달하였다. 물양장에서 오른쪽 즉 남방파제로 이어지는 서쪽으로 향한다. 마을에서 벗어난 길인데 이곳에 ‘이수도1길’이라는 팻말이 있다. 집은 거의 찾기 힘들고 넓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물양장의 연장선이다.
이수도 근해는 대구의 산란지역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가까운 이곳에서 일본 사람들이 멸치 권현망을 가지고 들어와서 부자 섬이 되었다고 한다. 우수한 어업기술과 동력선, 자금을 앞세워 일본인들은 한국의 풍부한 수산자원을 약탈해갔다. 우리나라 어민들은 일본인 선주에게 고용되어 생계를 유지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에도 섬과 바다에 대한 무지 때문에 바다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지만, 1953년 12월에 와서야 수산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점차 수산 분야의 행정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수도는 다른 섬들과 달리 위치가 좋아서 어선어업을 많이 하였다. 1950년 해방이 된 이후부터 1970년까지 대구의 어획량이 풍성해서 부자 섬으로 불렸다. 박영기 어촌계장은 ‘고기가 얼마나 많이 잡히는지 돈을 마대자루에 넣어 숨겨놓을 정도로 부자 말을 들었다’면서 ‘다른 마을이 대단히 부러워할 정도로 장목면의 세금을 대부분 이수도에서 부담하였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지금은 화려했던 옛날 이야기에 불과하다. 대구는 냉수대의 어족으로 추운 바다에서 서식하는데 우리나라의 동해에서 여름에 찬 바다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겨울에는 한류를 따라 남해까지 회유한다. 겨울에 대구는 남해의 연안에서 산란을 하는데 그 주요 산란지는 진해만이다. 이수도는 진해만의 입구에 있는데 대표적인 대구잡이 마을이다.
12월부터 이듬해 3월 초까지가 산란을 하기에 이때 잡히는 대구가 가장 맛이 좋다. 이수도 주위는 황금어장터로 대구, 갈치, 청어, 멸치 등 다양한 생선이 많이 잡히는 곳이다. 이수도는 해방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대구잡이가 풍어를 이루어서 ‘강아지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자 마을로 이름이 났다. 이수도는 한때 장목면에서 가장 풍요로웠다고 한다. 대구잡이가 전성기를 이루던 시절에 섬의 최고 인구는 93가구 552명(1973년)이었다고 한다. 생활이 넉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업 기술의 발달과 남획, 부산과 마산, 진주 등의 도시에서 생활하수와 공장폐수가 흘러들어서 연안 바다가 오염되어 점차 어자원이 고갈되고 있다. 젊은이들이 섬을 떠나고 학교도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폐교되었다.
어족자원의 회복을 위해 1981년부터 거제시는 대구 인공수정란 방류 사업을 하였으나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에는 대구 한 마리가 20만원 할 때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점차적으로 2006년 겨울부터 서서히 대구가 다시 잡히기 시작하였다. 대구 인공수정란 방류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 최근 몇 년 사이 대구 어획량이 크게 늘어나는 등 이수도가 대구 산란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제 대구는 겨울 바다의 효자산업으로 자리매김하여 어부들에게 주요 소득원이 되고 있다.
심 산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