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초에, 이미 종전의 연주 기법의 대부분을 마스터한 파가니니는 15세가 되자 하루 10시간 이상의 격심한 연습으로 혼자서 새로운 연주기법을 습득해 나갔다.
그의 노력이 결실하여 1799년 17세에 북이탈리아 지방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 곧 명성과 부(富)에 휩싸이게 되었으나 급속한 성공으로 자만에 빠진 소년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져서 결국 연주에 필요한 바이올린마저 잃게 되는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 생활을 보냈으나
그동안 연주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사실 이 기간에 건강 회복을 기도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 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고 있었다.
1804년 22세 때 출생지 제노바로 돌아와 다음 해부터 다시 연주활동을 개시하여 이전보다 더한 칭송을 받았다.
그 명성으로 인해 나폴레옹의 누이동생에게 초대되어 보케리니의 출생지 루카의 궁정 가극장에서 3년간의 지휘 생활을 보냈다.
1808년 26세 때부터 1828년의 46세까지 20년간에 걸쳐 이탈리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였으며 종전의 바이올린 개념을 훨씬 초월한 입신(入神)의 기(技)를 펴냈고 청중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묘기는 이탈리아 이외의 각지로 퍼져나가 파가니니의 이름은 온 유럽 음악 애호가들의 입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1828년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국외 연주 여행을 하였다.
3월 말 빈에서 있었던 연주회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거둬,
파가니니의 이름을 팔아 상점마다 "파가니니 스타일"이라는 양복·모자·장갑·구두 등이 범람하였다.
다음 해 1829년 베를린에서도 이러한 성공을 거둔 파가니니는 독일 각지를 순회한 끝에 폴란드로 갔고
또 1831년엔 파리, 이어 영국으로 건너가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1832년 가을, 5년에 걸친 연주 여행으로부터 귀국하여 북이탈리아의 파르마를 안주의 땅으로 정하였다.
만년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왕복하면서 연주 활동을 하는 한편 프랑스의 악보 출판상에 자작의 작품을 출판하려고
했으나 파가니니가 요구하는 인세가 너무 높아 출판은 진척이 안되었고,
결국 파가니니의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극히 적다.
더욱이 출판된 작품이 적은 것은 파가니니가 자신의 연주 기법이 공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다.
1834년 1월 파가니니는 신진 작곡가로 세상의 주목을 끈 베를리오즈를 파리에서 만나 자신을 위한 비올라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했다.
완성된 작품은 파가니니의 기대만큼 비올라의 역할을 화려하게 다루지 않았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아 파가니니는
이를 "이탈리아의 하롤드"로 발표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무렵부터 파가니니의 건강은 좋지 않아 연주 활동도 뜸해져 1840년 5월 27일 인후 결핵으로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57세로 일생을 마쳤다.
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주법,
현을 손끝으로 튕겨서 소리를 내는 피치카토 주법,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대서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
이중 트릴 (떨 꾸밈음)등의 화려한 연주 기법을 만들어 냈다.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
파가니니의 놀라운 연주를 들은 관객들은 감동한 나머지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나폴레옹의 여동생이며 루카의 군주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만 들으면 까무러쳤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을 두 개만 사용하는 곡을 선보이자,
엘리자는 “그럼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영감을 얻은 파가니니는 정말로 G 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는데,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괴소문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즉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G현은 젊은 시절 그가 목 졸라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파가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탁월한 실력을 얻었으며,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소문이 어찌나 파다했는지 교회를 중심으로 파가니니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공연 때마다 관객들은 혹시 무대 어느 한 구석에 정말 악마가 숨어 있는지 보려고 눈을 크게 떴으며,
파가니니가 지나갈 때마다 정말 악마 특유의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걷는지 보려고 시선을 집중했다.
소설가 스탕달과 작곡가 리스트도 이런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언급했고,
시인 하이네는 공연 중에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 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고 단언했다.
왜 이런 헛소문이 그토록 기세를 떨쳤던 것일까?
‘마법’이나 ‘악마’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듯한 파가니니의 실력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그럴싸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관습과 권위를 무시하는 특유의 괴팍함과 자유분방함은 물론이고, 꼬챙이 같은 체구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두드러진 매부리코와 광대뼈를 지닌 파가니니의 외모도 악의적인 헛소문의 생성에 일조했다.
당시의 언론도 선정적인 기사를 함부로 써내 소문의 전파를 부추겼다.
나중에는 파가니니 본인이 해명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베른트 비테의 말마따나 “소문이란 제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때로는 불멸의 존재로 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파가니니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터넷 시대에도 마찬가지 이리라.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스 <24 Caprice for Solo Violin, Op.1> 은 니콜로 파가니니에 의해
1802년부터 1817년까지 작곡되었고 1819년 에디션 피터스(Edition Peters)에 의해 출판되었다.
이 카프리스는 연습곡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각기 다른 고난도의 기술들(더블 스탭 트릴, 아르페지오, 빠른 쉬프팅 등)을
학습할 수 있도록 작곡되었다.
이 때문에 바이올린을 위해 작곡된 곡들 중에서도 난곡으로 꼽히며,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곡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티스트중에 파가니니 같은 인물이 하나 있다.
비록 체구는 엄청 거구이고 미남형 얼굴이지만 잉베이 맘스틴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관습과 권위 그리고 유행을 무시하는 특유의 괴팍함과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음악에 아주 솔직하게
투영되었으며 그가 연주하는 프레이징, 비브라토, 톤, 그의 필링과 열정이 수많은 아류들을 탄생시켰으며,
그가 만든 거의 모든 곡들은 기타리스트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곡으로 평가받는다.
스스로 바하와 파가니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던 그였지만 이미 그는 파가니니의 역량을 뛰어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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