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비타존(飛駝尊)의 유서(遺書) 사막 가운데. 모래 속에서도 푸르름을 지키고 있는 곳이 있었다. 반경 이 리(里)에 달하는 거대한 녹지(綠地). 그 곳은 뿌연 김에 휘감겨 제 모습을 남에게 보여 주지 않는다. 한순간, 하늘 위에서 새 울음소리가 나며 금색붕 한 마리가 두 사람을 태우고 표표(飄飄)히 떨어져 내렸다. "여기예요. 바로 비타림(飛駝林)이라는 곳이지요." 자색 옷을 입은 미녀 하나가 사뿐히 모래 위로 내려섰다. 바람에 휘청이는 가는 몸뚱이. 그녀의 머릿속에 무수한 악계(惡計)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저기를 봐요.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테니까!" 자의여인은 섬섬옥수를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모래 바람을 이기고 서 있는 탑이 하나 있었다. 삼 장 높이의 탑, 그 좌우에는 낙타상이 우뚝 서 있었다. 탑신에는 글이 적혀 있었다. <영주지소(令主之所) 망입자사(忘入者死). 비타제일령주(飛駝第一令主).> 탑에 적힌 글은 그런 것이었다. "흠…!" 자의여인의 안내를 받는 사람은 몹시 야릇한 표정이 되었다. '이 계집이 나를 속여 함정에 빠뜨리는 줄 알았는데…' 그는 바로 호료범이었다. "비타궁은 저 곳에서 세워졌습니다. 저 곳은… 비타궁 사람들의 성역(聖域)입니다!" 마제갈은 탑을 보며 절을 했다. 한 번 두 번, 그녀는 쉬지 않고 아홉 번 절한 다음에도 몸을 펴지 못하고, 오체복지(五體伏地)한 상태를 유지했다. "저는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탑주!" 마제갈은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표정을 숨기는군? 원미옥처럼…' 그는 한 여인을 기억했다. 아주 착하기만 한 여인, 원미옥(元美玉). 그녀의 슬프고 둥근 눈매가 자꾸만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정의 그물에 얽혀서는 아니 된다. 그 시시한 여인 하나가 나를 어찌할 수는 없다. 나는 강하다. 절대 꺾이지 않는다. 슬픔이건, 고통이건…' 호료범은 비정한 기색을 하다가 차게 내뱉었다. "그럼 길 안내는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다음에 나를 보게 되면, 한 가지를 조심하게!" "호호… 목(首級) 말입니까?" "잘 아는군!" "그 말은 저가 할 말이지요. 여기는 비타궁이니까요!" 마제갈은 말하면서 아주 즐겁게 웃었다. 호료범은 차디찬 눈빛을 던지다가 속으로 말했다. '여인을 믿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였던 여인도, 그리고 칠절미인 헌원옥봉의 아름다운 표정도…' 그는 여심(女心)을 의심하는 사람이었다. 청련(靑蓮), 칠절미인(七絶美人). 두 여인은 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들이었다. "흥!" 호료범은 냉소를 치다가 탑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이형환위보(移形換位步)로 미끄러지듯 모래 위를 움직였다. 마제갈은 그가 멀리 간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무서운 놈!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제갈은 중얼거리다가 뒤돌아섰다. '신호를 보내면 반 시진 안에 사람들이 나를 데리러 올 것이다.' 마제갈은 뿌듯해 하며 품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던졌다. 펑-! 구슬은 허공에서 터져 자색 연기로 화했다. 그 때, 호료범은 녹원 안으로 들어서며 환경(環景)이 변화함을 느꼈다. 꽈광-! 우레 소리가 나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나무도, 하늘도, 그리고 맑은 공기도… 모든 것이 진세에 파묻히며 사라져 버렸다. 비타림을 휘감은 진세는 대폭풍탑의 진세와 비견될 정도였다. 아니, 진세의 독랄함은 이 곳이 폭풍탑보다 한 수 위였다. 선풍(旋風)으로 일어나는 바람, 그 속에는 지독한 독기운이 함유되어 있었다. 어찌나 지독한지, 만독불침지신인 호료범이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독기(毒氣)는 갈수록 심해졌다. "독기가 대단하다. 비타궁의 독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독이라는 말은 명불허전이었다." 호료범은 급히 혼신공력을 일으켰다. 독풍(毒風)은 그를 완전히 휘감았다. 그의 몸뚱이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밖에 서 있는 탑 위의 글씨를 실천하겠다는 듯, 독진의 위력은 갈수록 거세어져만 갔다. 비타림 밖. 말소리와는 조금 다른 울음소리, 발굽 소리가 나며 수십 마리의 백타(白駝)가 사원(寺院)을 가로질러 왔다. 두우- 두두-! 달리는 낙타의 무리들. 마제갈은 낙타들이 다가서자, 기뻐 환호성을 질렀다. "사부님! 오오, 사부님! 제가 돌아왔습니다. 중원에서 오 년 간 고생한 아벽(阿碧)이 이제 왔습니다!" 마제갈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자상하신 사부님, 그리고 다정한 사형제들… 아아, 중원에 있는 동안 여러분들의 품을 잊은 날이 없었습니다.' 마제갈은 본시 아벽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눈물에 젖을 때, 두 사람이 빠르게 그녀의 좌우쪽을 향해 다가섰다. "역도(逆徒)를 꿇어앉혀라!" "중원에 가서 일을 달성하기는커녕, 비타궁의 명예를 더럽히고, 많은 고수들을 죽이고 온 대역죄인을 죽여라!" "와아아…!" 사람들의 함성. 그 소리에는 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거기에는 살기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이… 이럴 수가? 궁법(宮法)이 아무리 심하기로서니, 직전제자인 나를 이렇게 푸대접하다니…!" 마제갈은 등에 철퇴를 맞은 기분 상태에서, 교룡근에 포박당했다. "아벽! 패자(敗者)가 되어 돌아올 수는 없다고 했었다!" 유난히 거대한 낙타 등에 올라앉아 있는 노파가 있었다. 비타성모(飛陀聖母). 이름은 고란(古蘭), 그녀는 비타족(飛駝族)의 족장 고답(古踏)의 외동딸이다. 비타궁은 비타족을 중심으로 뭉친 방파였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사람이 바로 비타존이었다. 그는 아주 뛰어난 사람으로 비타족에 비전되어지던 여러 가지 실전절기들을 터득해, 비타궁을 본시보다 십 배 확장시켰던 것이다. 비타성모 고란. 그녀는 지금도 비타존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를 믿었단다! 한데, 네가 나를 실망시키다니… 으으윽… 비타존은… 필경 사자(死者)일 것이다." 비타성모는 마제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비타제일령을 찾아 강호로 가신 비타존이시여! 아아, 어이해 삼십 성상이 되도록 돌아오시지 않습니까?'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눈물에 젖었다. 밤(夜). 그 아래 푸른 죽음의 장소가 있다. 비타림 안, 언제나 검은 독무로 휘감겨 있는 비타궁의 금지. 우르르릉- 꽝-! 진세는 밤일수록 더 심해진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금강신(金剛神)이라 해도, 핏물이 되어 죽을 것이다. 그 깊은 곳, 백무(白霧) 한 덩어리가 있었다. "훗훗…!" 흰 구름 덩어리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타궁을 얕잡아 본 것이 잘못이었다. 비타궁 안에 나도 쉽게 풀지 못할 기문대진이 있었을 줄이야!" 흰 구름 덩어리 안에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필경… 태음(太陰), 태양(太陽), 소음(少陰), 소양(少陽)의 사상(四象)을 동시에 다 일으키는 진세이다.' 호료범, 그는 진에 빠진 지 한 시진이 되도록 출로를 찾지 못하는 상태였다. 얼마를 갔을까? 그는 사상에 이어 천라(天羅)의 진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밀은 독무에 있다. 독무가 환각을 일으키고 있다. 이 비밀을 알게 되면, 대폭풍탑의 진세를 더욱 강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호료범은 진세가 독천라사상쇄혼천문대진(毒天羅四象碎魂天門大陣)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간이 시꺼먼 독수가 용암이 끓어오르듯 끓어오르고 있었다. 모든 비밀은 거기에 있었다. 독무가 일어나 진세에 의해 어지러이 흩어지며, 아주 기이한 환상을 만들어 내어 이목을 흐리게 했던 것이다. '이런 진세는 길(路)로 들어가면 아니 된다. 이런 진세는 심(心)으로 들어가야 한다!'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神法). 정지하는 가운데, 움직이는 수법. 그것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금강부동신공이 필요하다. 그것은 심마(心魔)를 끊는 방법이기도 했다. 금강부동신법은 주위의 마력(魔力)에서 어떠한 것을 보호하는 신법이었다. 그것은 공격적이 아니었다. "절대로 수비에만 치중하는 금강부동신법은 진세의 허점을 찾아 줄 것이다. 나는 금강심(金剛心)을 따라가는 가운데, 생문에 들 것이다!" 호료범은 입정(入定)의 심정이 되었다. 스슥-! 그의 몸은 안개가 흐르듯 움직였다. 강한 바람이 일어나면 그의 몸은 바람에 저항하기보다 바람에 날려 먼 뒤쪽으로 되돌아갔다. 굳이 상대를 꺾으려 하지 않는 방법. 하되, 절대로 상대에게는 굴복하지 않는 방법. 그것은 바로 불가정종(佛家正宗) 모든 무술의 비결이었다. 그러는 사이 호료범은 느릿느릿 진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반 시진 후, 그는 새벽 가운데 진중(陣中)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 내 생각대로였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한 채의 석옥을 볼 수 있었다. 석옥 지붕에는 거미줄이 수북했다. "사람이 사는 곳 같지 않군! 마제갈이라는 계집이 그래도 신의 있는 계집이라 여겼는데… 나를 철저히 우롱했을 줄이야!" 호료범은 즉시 밖을 바라봤다. '나는 일단 너의 말을 믿었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훗훗, 이제 남은 것은… 너의 자랑인 비타궁을 내 손으로 부수어 버리는 것뿐이다.' 호료범은 눈에서 한망을 쏟아 냈다. "돌아가자!" 그는 금색마조가 모래 바람이 이는 허공에 떠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며 얼른 등을 돌렸다. 바로 그 때, 우연의 장난일까? 끼이이익-! 조금 바람이 부는 듯하더니, 다 쓰러져 가는 석옥의 문이 빠끔히 열렸다. "으으응…?" 호료범은 그 안을 보고 조금 의아해 했다. '인기척은 전혀 없었는데, 이상한 힘이 있다니…' 그는 아주 야릇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는 안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한데, 너무도 신비한 힘이 그를 석옥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호료범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조심스럽게 석옥 안으로 들어섰다. 다 쓰러져 가는 석옥은 꽤나 넓었다. 그 안, 언제 죽었는지 모를 사람의 백골이 하나 있었다. 백골 위에는 거미줄이 수북했다. 신기한 것은, 백골이라기보다 적골(赤骨)이라는 것이었다. "사람의 뼈가 핏빛이라니…!" 호료범은 크게 놀라며 적색 인골 가까이로 갔다. 인골은 누워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무엇인가를 쥐고 있었다. 반면, 그의 왼손은 석벽에 박혀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거미줄이 벽을 다 덮었다!" 호료범은 독망(毒網)이 벽을 뒤덮고 있자, 손에서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위잉-! 뜨거운 바람이 일어나며 독거미가 만든 독거미줄이 모조리 불탔다. 순간, 그는 인골의 뼈가 적어 넣은 것으로 보이는 글을 볼 수 있었다. "글이 있다니…!" 호료범은 몽고어(蒙古語)로 된 글을 보고 급히 바짝 다가갔다. <인심(人心)을 저주한다!> 글은 첫 구절부터 섬뜩했다. <본좌는 정정당당히 천하를 얻으려 했었다. 그러기에 침입에 실패한 후, 약속한 대로 은거에 들었던 것이다.> 글은 정말 놀라웠다. "침입이라니… 설마, 이 곳에 정말 비타궁의 제일기인(第一奇人)이 머물렀었단 말인가?" 호료범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글을 계속 읽었다. <우연히라도 이 글을 보게 되는 사람에게 부탁할 말이 있다. 그것은 본좌가 후히 사례할 테니, 두 가지 부탁을 들어 달라는 것이다. 그 하나는 비타성모(飛陀聖母) 고란(古蘭)에게 가서 본좌가 죽었다는 것을 알려 달라는 것이다.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면 된다. '중원의 만허생(萬虛生)을 믿었기에 죽었다'라고…> 실로 눈이 빠질 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할아버지를 원망하다니… 이럴 수가?" 호료범은 아연실색하며 글을 계속 읽었다. <둘째 부탁은, 본좌 비타존(飛駝尊)이 만허생에게 독경(毒經)을 주고 되돌려 받은 비타제일령(飛駝第一令)을 비타궁에 돌려 달라는 것이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글이었다. 비타궁에서 그리도 찾던 비타존이 해골의 임자라니? 더욱이 그의 유서 안에 믿지 못할 글이 있을 줄이야? 비타존의 글은 계속되었다. <만허생은 은거 중인 본좌에게 천리전음으로 말했었다. 진을 열고 자신을 맞이하라고. 본좌는 궁리하다가, 그 말에 따랐다. 그는 비타제일령을 줄 테니, 비타독경(飛陀毒經)을 달라고 했다. 본좌는 비타제일령을 찾을 욕심에 쾌히 응낙했다. 본좌가 먼저 비타독경을 주었고… 그는 그것을 받아 지닌 다음, 비타제일령을 건넸다. 본좌는 그것을 받는 순간, 몸이 마비됨을 느꼈다. 본좌는 독인(毒人)이라 만독불침이나, 한 가지 약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오금혈석(烏金血石)으로 만든 침에 일보단장산(一步斷腸散) 천 년 지주왕독(千年蜘蛛王毒)을 섞어 만든 독을 발라 손바닥 가운데를 찌르면, 독공이 파괴된다는 것이다.> 글씨는 점점 흐려졌다. 그는 죽음을 알고 글을 쓰는 듯했다. <본좌는 독인이기에 더 빨리 죽어 간다. 그것은 바로 독인이 겪어야 할 비극이다. 독제경(毒帝境)에 들었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허생은 본좌가 독제가 되지 못했음을 알고, 비타제일령에 독침을 꽂아 전해 본좌를 죽게 한 것이다. 그 자가 인격자라 믿었기에 당했다 할 수 있다. 그 자를 믿지 않았더라면,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가 그리 사악해졌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본좌의 다른 손에는 비타제일령이 쥐어져 있다. 하나, 그것을 그냥 만져서는 아니 된다. 그냥 만지면 죽게 된다. 노부의 뼈에 손을 대도 죽을 것이다. 비타존을 제외한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는 비타림에 들어와 이 글을 보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며, 한 가지를 전한다. 그것은 비타독경(飛陀毒經)의 사본과 본좌가 지은 독존경(毒尊經), 그리고 비타족이 모은 일곱 가지 독경(毒經)이다. 그것은 석옥 지하석실에 있다. 그것을 익히고 난 후라면, 맨손으로 비타제일령을 잡아도 된다.> 글은 그렇게 끝이 났다. 비타존은 중원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만이 들고 나는 길을 알고 있는 비타림 안에서 연공하다가 암습당해 죽은 것이었다. 비타궁 사람들은 그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자, 슬쩍 그 곳을 떠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나… 사실, 그는 비타림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비밀의 열쇠는 비타제일령이었다. "…" 호료범은 묵묵히 있었다. 그는 그리 놀라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제야 미혹스러웠던 부분이 풀렸다.' 그는 선뜻 손을 내밀었다. 한순간, 그는 비타존의 손뼈를 펴고 그 안에서 금패 하나를 쳐들었다. 거기에는 극독이 발라져 있었다. 극독이기는 하나, 호료범을 쓰러뜨릴 만한 독은 아니었다. 그런 독에 쓰러질 호료범이었다면, 아예 이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손에 쥐인 금패. <비타제일령(飛駝第一令)> 그것은 만허생이 비타존을 쫓고 나서 취한 것이었다. 만허생은 변황제일인의 암습을 받고 그것을 잃었었다. "할아버지를 암살한 자는 바로 병대협이다. 할아버지를 암살한 직후, 비타제일령을 지니고 여기까지 와서 할아버지 행세를 하고 비타존을 죽였던 것이다. 놈은 이전부터 고수가 아니었다. 놈은… 할아버지를 암살한 이후에야 강해졌다. 놈이 할아버지를 암살한 이유는, 할아버지의 일 초 상대도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호료범은 한 얼굴을 떠올렸다. 슬픈 얼굴을 한 천하의 대협객, 헌원종. "이제야 네 꼬리를 잡았다. 네놈이 바로 진짜 초대의 변황제일인이라는 것도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그의 눈빛. 그것은 귀신도 놀라 도망갈 만한 눈빛이었다. 저녁 무렵. 호료범은 아홉 권의 고서(古書)를 앞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지하실에서 꺼낸 독경이었다. 그 중 다섯 권에는 독술만 수록되어 있고, 네 권의 비급에는 독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초식이 수록되어 있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패(百戰不敗)!" 그는 비급을 다 외운 상태였다. 그는 이제 비타궁을 세워도 될 만한 상태였다. 호료범은 아홉 권의 비급을 삼매진화로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다음, 몸을 일으켰다. "이것도 운명인가 보오. 비타존, 귀하의 글을 본 자가 바로 비타궁을 궤멸시키는 자라는 것이…!" 호료범은 웃다가 밖으로 나갔다. 초경(初更) 즈음. 호료범은 금색마조를 부르지 않고 경신술로 사막을 가로질렀다. 그는 독경을 보는 가운데, 비타궁의 자세한 위치를 알게 되었다. 그는 비타독경에 적힌 세 가지 신법을 시험하는 중이었다. 비타추운풍(飛駝追雲風), 무영백팔환신보(無影百八幻身步), 능영주천신법(凌影週天身法). 세 가지 신법은 호료범이 팔기인에게서 배운 신법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외몽고에 인재가 많았다면… 외몽고에 숨어 있던 절기만으로 중원을 무너뜨릴 만한 세력 열 개가 일어났을 것이다.' 호료범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치달렸다. 얼마를 갔을까? 삘리리…! 어디에선가 피리 소리가 들렸다. 사구(砂丘) 위, 달을 바라보며 피리를 부는 백의노파가 하나 있었다. 노파의 피리 소리는 아주 구슬펐다. '미안하다. 하나,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궁법(宮法)이 엄함을 제자들이 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노파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피리 소리는 더욱 구성져 갔다. '철혈법(鐵血法)이 있어야 전통이 오래 간다. 어린 너를 희생시키는 것이 나의 심장을 베어 버리는 것보다 아픈 일이나, 나로서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 노파는 달을 보다가 피리 소리를 멈췄다. "달이 지기 전, 사람이 나서지 않으면… 아아, 나는 나의 분신(分身)을 죽일 수밖에 없다!" 노파는 달이 져 가는 것을 싫어하는 듯했다. "달이 지게 되면, 나는 희망을 잃는 것이다. 아아, 전통과 희망을 맞바꾸기로 한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 노파는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모래 언덕을 걸어 올라오는 젊은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이는 달을 뒤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몸 뒤에 후광(後光)이 나타난 듯한 착각이 있었다. 그의 몸 주위에서 번쩍거리는 달빛의 편린. '그분이 나를 처음 찾을 때에도 저런 모습이었지.' 노파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다가서는 청년은 호료범이었다. 그는 노파가 웃자, 따라 슬쩍 웃었다. "할머니의 피리 부는 솜씨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상(隊商) 같지는 않은데… 왜 밤에 사막을 가로지르는가?" 노파의 한어(漢語)는 아주 정확했다. "갈 곳이 있어서입니다!" 호료범이 싱긋 웃자. "젊은이는 누구인가?" "호료범이라 합니다." "노신은 많은 사람을 대해 보았네만, 호씨 소년같이 영준한 소년은 처음 보았네! 게다가 무공도 대단한 듯하고!" "어이해,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자네 뒤엔 발자국이 없기 때문이네!" 노파의 눈은 정확했다. 호료범은 고운 모래밭을 가로질렀는데,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로는 노파도 마찬가지였다. 노파의 손에는 뿔로 만든 피리가 들려 있었다. 그 끝머리. <천뢰(天雷)> 두 자가 대전체(大篆體)로 적혀 있었다. 그것은 전국시대의 물건이었다. 머리가 두 개 달린 흑룡의 뿔로 잘라서 만든 피리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소리를 낸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물건이었다. "호씨 소년은 친구가 많겠군?" 노파가 불쑥 묻자.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흠, 마음을 주는 친구가 없는 게로구먼?" "그렇다 할 수 있지요." "장가는 들었는가?" "나이 약관(弱冠)이나, 미혼(未婚)입니다. 한데, 어이해 그런 것을 자세히 물어 보시는지요?" 호료범이 부드럽게 대하는 이유는, 노파의 얼굴이 너무도 자상하기 때문이었다. 노파는 한숨을 가볍게 쉬었다. "저 달을 보게!" 노파는 반월(半月)을 가리켰다. "오늘의 달은 의미있는 달이네!" "왜요?" "저 달이 지면, 사람 하나가 죽기 때문이네!" "어떤 사람이오?" "노신이 아주 아끼는 사람이 죽네!" "아아…!" 호료범이 탄성을 발하자. "노신이 피리를 분 이유는, 그 아이를 살릴 길이 없어서라네!" "길이 없다니요? 죽을 병입니까?" "그렇지 않네. 그 아이는 참수형(斬首刑)을 당할 예정이네." "으으음…!" "달이 떨어지는 찰나, 그 아이의 목도 떨어질 것이네. 노신은 그것이 슬퍼, 피리를 불며 심사를 달래려 했던 것이네!" 노파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늙게 되면, 마음이 약해지는 것인가? 노파는 울다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주책을 부려 미안하네!" 노파는 중얼거리듯 말한 다음, 천뢰소를 건네 주었다. "받게!" "예?" "만난 기념으로 주겠네." 노파는 천뢰소를 반강제로 호료범의 손에 쥐어 준 다음, 허리춤을 뒤져 아주 작은 책을 꺼냈다. <천음진경(天音眞經)> 전서(篆書)로 된 네 자 글씨가 유난히 돋보이는 낡은 책이었다. "이것도 주겠네. 이 안에는 십이 곡(曲)이 들어 있네만… 노신은 평생 익혀 한 가지를 얻었을 뿐이네! 아주 어려운 것이네. 자네에게 주는 이유는, 자네의 눈빛이 내가 사랑하던 사람과 같기 때문이네!" 사랑하던 사람… 노파는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제가 괜히 나타나 할머니의 심사를 어지럽힌 듯합니다!" "아니네." 노파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뒤돌아섰다. "너무 오래 산 듯하네. 점점 추해지기만 하고…" 노파가 쓸쓸히 말하자. "할머니!" 호료범이 보법을 밟아 노파 앞을 갑자기 가로막았다. '대단한 보법인데?' 노파는 호료범의 몸놀림을 보고 아주 크게 놀랐다. 호료범은 천음진경과 천뢰소를 들어 보이며. "이것은 아주 귀한 것인데, 제가 어찌 그냥 받겠습니까?" "노신에게는 필요치 않은 것이라 준 것이니, 심려 말게!" "할머니의 얼굴에 수심이 있는 것이 보기 싫습니다. 어찌하면 그 수심이 사라지겠는지 일러 주십시오!" 호료범은 자신이 대폭풍탑주라는 것을 잊은 듯했다. 사막은 너무 넓었다. 그리고 너무도 허전했다. 그러기에 사막에서 만난 사람이 더 값지게 여겨지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으으음…!" 노파는 호료범을 유심히 봤다. 얼마 후. "노신의 일 권을 받아 보겠나?" 노파가 손을 쳐들었다. "얼마든지요!" 호료범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심하게!" 노파는 기합을 치며 오 성 진력으로 일 권을 쳐냈다. 강기(剛氣) 기둥이 일어나며 벽력성이 진동했다. "평범한 개비권(開碑拳)인데, 할머니가 시전하자 천하절학이군요?" 호료범은 권풍이 다가서는 찰나, 몸을 틀어 권풍 안에서 벗어났다. 콰광-! 노파의 권법은 모래 언덕을 거의 다 허물어뜨렸다. 그녀의 무공은 중원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위력적인 것이었다. "대… 대단하네!" 노파는 엄지손가락을 쳐들었다. "왜 저의 무공을 시험했는지 궁금합니다." 호료범의 옷자락은 모래 알맹이 하나 묻혀 있지 않았다. "알고 싶나?" "할머니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호료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 같은 손자가 있다면… 모든 것이 즐거우리라! 역시 남자 아이라야 대를 물릴 만하다. 얼마나 듬직한가?' 노파는 호료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모진 표정이 되었다. "아주 힘든 일이네!" "제겐 힘든 일을 쉽게 하는 재간이 있습니다.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호료범이 독촉하자. "그리고… 한 가지 금제를 가져야 하는 일이네." "금제라니요?" "누군가의 신랑이 되어야 하네." "신… 신랑이오?" "왜 그리 놀라는가? 남자는 여자를 짝으로, 여자는 남자를 짝으로 취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 그렇기는 합니다만…!" 호료범은 조금 굳은 표정을 했다. 노파는 다시 달을 가리켰다. "저 달이 지는 찰나, 죽을 운명에 처해진 여인이 있네. 그 여인이 사는 길은 단 하나, 남자 하나가 그녀를 위해 싸워 주는 일이네!" "흠…!" "그것은 바로 사막무림(砂漠武林)의 불문율이네. 즉 그녀가 죄인이라 해도, 용사(勇士)의 아내라면… 살게 되는 것이네." "그 여인은 누군지요?" "노신이 아끼는 아이이네. 한데, 죄를 지었네. 그래서 사막의 법에 따라 참수형당하는 신세가 된 것이네." "살릴 길은 그 길 하나뿐입니까?" "그렇다네. 어떤 사내가 그녀를 위해 싸워 준다면… 그리고 승리 한다면 그녀는 살 것이고, 은혜를 갚기 위해 그 사람의 아내가 되는 것이네." "핫핫… 정말 야릇한 풍속이군요?" 호료범은 멋쩍게 웃었다. 노파는 시간이 가는 것이 아까운 듯, 입맛을 다셨다. "불행한 것은, 어느 누구도 그 아이를 위해 싸워 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네." "추녀이기 때문인가요?" "천만에, 사막제일미인(砂漠第一美人)이네!" "그럼 왜 그녀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없는지요?" "그녀를 구하려면 관주(關主)를 꺾어야 하는데, 관주가 너무 강해 어느 누구도 그녀를 위해 싸우려 하지 않는 것이지." "관주가 대체 누구길래?" "그 아이의 사저(師姐)라네." "예… 에?" "그 아이가 죽기를 바라는 아이라고 해야 좋겠지." 노파는 눈을 반개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피리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문득 왔다가… 훗훗, 정말 괴이한 일에 걸려들게 되는군.' 호료범은 노파를 유심히 바라봤다. 한참 후, 호료범이 불쑥 물었다. "그 여인이 죽으면, 할머니는 어찌 될 것 같습니까?" "몹시 슬플 것이고… 아마 다른 사람 일만 명을 죽여 그 아이를 잃은 슬픔을 메우려 할 것이네!" "정말 끔찍하신 말씀이십니다!" 호료범의 목소리는 아주 아름다웠다. 노파는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호료범의 눈빛은 달빛보다도 부드러웠다. 그에게도 이렇듯 부드러운 면모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 여인을 위해 싸워 주는 사람은 꼭 그 여인의 낭군이 되어야 합니까?" "물론이지!" 노파는 점점 호기심을 느끼는 듯했다. 호료범은 입술을 가볍게 빨다가. "그럼 과부로 지내는 것이 좋은가? 젊어 요절하는 것이 좋은가를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무… 무슨 소리인가?" "대답만 해 주십시오!" "으으음, 말하기 곤란하군. 하여간…" 노파는 생각을 정리하다가. "하여간… 노신은 그 아이가 죽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네. 과부가 되어 도망간 낭군을 생각하며 울며 사는 것이, 달이 지는 찰나 참수당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염화시중(拈花市衆)의 미소랄까? 노파와 호료범은 무언 중에 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그 여인이 있는 곳을 알려 주십시오!" "정말 가 보겠는가?" "그 여인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피리를 아주 잘 부는 할머니를 위해 가는 것입니다." "고… 고맙네." 노파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흐흑… 이런 정 많은 젊은이가 있을 줄이야!" 노파는 흐느끼다가 손을 쳐들었다. "저쪽으로 가다 보면 북소리가 들리네. 북소리 나는 곳이 바로 참형이 벌어지는 장소라네. 가서 보면 다 알 것이네!" "그럼 그 여인을 통해 제 소식을 알아보십시오. 핫핫…!" 호료범이 위로 날아오르자. "그… 그 아이는 아벽(阿碧)이네. 가서 아벽을 위해 싸우러 왔다 하고 외치면 된다네!" 노파는 아주 크게 외쳤다. 호료범은 찰나지간에 백여 장을 달렸다. "무서운 속도다!" 노파는 호료범을 통해 천하가 넓음을 아는 듯했다. '그분보다 세 배는 빠른 신법이다. 아아, 젊은 나이에 저렇듯 지고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 또 있을까?' 노파는 한동안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즐독 ㄳ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