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일 집사님께서 요약하신 '소설 하디' 입니다.
아직 책을 읽지 못하신 분들께는 예고편으로, 이미 책을 읽으신 분들께는 후기로, 또한 독후감 쓸때에 참고용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한글 파일과 PDF 파일도 첨부 합니다.
요약해 주신 김종일 집사님께 감사드립니다~^^
*** 소설 하디(고진하, KMC) ***
주인공: 로버트 알렉산더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한국명 하리영, 河鯉泳) 1865. 6. 11-1949.6.30
한국교회 부흥의 아버지' 로버트 하디, 캐나다 온타리오 주 세네카에서 출생한 그는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890년 9월 독립 평신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부산, 원산을 중심으로 환자들을 돌보던 그는 1898년 남감리회에 가입한 후 개성과 원산 및 서울로 파송을 받아 의료 및 복음전도사역을 폭넓게 펼치며 강원도 첫 교회인 지경터교회를 시작으로 고성교회, 양양교회, 강릉중앙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그러다 자신의 선교 역량 부족과 영적 능력 결핍을 뼈저리게 느끼던 중 1903년 8월 원산에서 선교사 사경회를 준비하며 성령의 강한 임재와 역사를 체험한다. 이것이 원산 부흥운동의 시작이며, 이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하디는 자신의 깊은 영적 체험을 간증하고 회개운동을 촉구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변화와 성숙, 부흥을 이끌었다.
1907~1924년 감리교협성신학교에서 교수 및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목회자 양성에 힘썼고, 1935년 45년간의 한국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정년 퇴임할 때까지 <신학세계>, <기독신보> 등을 통해 문서사역자로서도 뚜렷하고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귀국 후에는 미국 미시건 주 랜싱에 거주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949년 별세했다. -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저자: 고진하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세계의 문학>에서 시인으로 등단했고, 숭실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시집으로 <프란체스코의 새들>, <얼음수도원>, <수탉>, <거룩한 낭비>등과 산문집으로 <나무묵상>, <영혼의 정원사>, <누가 우편함에 새를 배달했을까> 등이 있다. 김달진문학상과 강원작가상을 수상했고, 현재는 원주에서 한살림교회를 섬기며, 틈틈이 대학과 도서관 등에서 인문학 강좌를 하고 있다.
저자는 어떤 이유에서 집필 요청을 받았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집필을 한 이유는 저자가 몸 담아 온 어머니교회의 한 초석을 놓은 분(하디)의 삶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싶어 집필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하디에 대하여 전기 형식을 빌리지 않고 소설로 쓴 이유는 본인이 교회사에 문외한 이기 때문이라 밝혔다. 이 소설의 주 키워드는 죄, 회개, 성령, 부흥 같은 언어라고 발기고 있다.
그럼 고진하 목사가 하디에 대하여 알리고자 한 소설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1. 시련의 여름
하디는 1890년 9월 30일 부산을 통해 아내인 마틸다 켈리와 한 살배기 딸 에바 릴리안과 함께 한국에 입국하였다. 켈리는 그 때 임신 중이었다. 하디는 의료 봉사와 선교 활동을 하였지만 본인 생각대로 되지 않아 깊은 상심감을 갖고 지내고 있었다. 그는 철원 지역에 뿌리를 내린 복음의 씨가 여름 해당화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에 상실감을 가지는 동안 선교사로서 사명이 자기의 몫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2. 복음의 닻을 내리고
하디는 임신한 아내 켈리와 딸인 에바와 함께 부산을 거쳐 하디보다 먼저 온 게일이라는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 최고의 병원인 제중원에서 일을 하게 된다. 당시의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 조선인은 새로운 의사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환자가 제중원으로 몰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하디는 한국어도 서툴고 의술도 초보라서 고생을 하지만 다른 의사가 오기 전까지 의료선교를 감당해야 했다. 다른 의사가 오자 마자 첫 겨울을 난 하디는 한국에서 태어난 둘째 딸 애니 포함한 가족을 서울에 두고 홀로 부산으로 이용하게 된다. 기후는 온화한 부산에서 살기는 좋았지만 박봉으로 얻은 두칸짜리 집에 숙소 겸 진료소를 차렸으나 계속 힘든 생활을 이어 갔다. 그 해 서울의 가족과 부산에서 만나게 되고 콜레라 전문 병원으로 이사하게 된다. 환자의 병실과 살림집이 서로 엉켜 있고 생계를 위한 의료 행위에 집중하다 보니 선교활동엔 등한시하게 되었다. 부산에서 1년쯤 지난 후 하디는 추운 원산으로 가겠다고 결정한다. 1892년11월19일 원산에 도착한다. 다른 선교사의 도움으로 감리교 진료소에 이삿짐을 푼다. 하디는 '남녀노소 아픈 사람은 누구든지 오시오. 아무 날이나 아침 10시부터 빈 병 하나씩 들고 의사를 보러 오시오.'라고 방을 진료소 문앞에 붙이고 환자를 오게 하였다. 빈병은 진료 후 좋은 약을 공짜로 받아 가라는 뜻인 것이다. 진료소는 잘 되었다. 2년쯤 지나자 서양 의사가 잘 환자를 잘 본다는 소문이 나서 새로운 진료소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채소도 키우고 닭 오리도 키우고 살게 되었다. 이 때쯤 청일 전쟁이 벌어 지게 되고 하디 병원에는 더 많은 환자가 몰려오게 된다. 하디는 육체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치유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틈틈이 복음을 전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동안 토론토 대학에서 8년 동안 지원하기로 되어 있는 선교지원금이 8년이 다되어 지원금이 끊기게 되어 하디는 결정한다. 남감리회 선교사로 활동하겠다고, 아내 켈리는 남편의 의견을 존중한다.
3. 실패한 사역
1898년 5월부터 미국 남감리회 한국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활동을 하게 된다. 하디는 부모님이 감리교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에 오기전 다녔던 캐나다 토론토 교회도 감리교이었기 때문에 감리교 소속이 된다. 1900년 원산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하디는 다짐한다. 온전한 복음전도자가 되겠다고… 하디는 원산 밖으로 눈을 돌려 강원도 북부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철원 평야에 도착하여 아무도 없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추수할 것이 많은데, 누가 나의 일꾼이 되겠는가?' 하디는 매우 이성적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듣게 되고 '오 주님! 제가 당신의 일꾼이 되겠습니다' 마음을 먹는다. 하디는 힘이 솟구쳤다. 그래서 그 지역에 주님의 교회를 짓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기도를 하였다. 겨울 어느 날 원산으로 윤승근 권사(전도자)가 방문하였고, 철원에 전도한 경험이 있는 윤권서에게 철원 지역에 교회설립에 대하여 조언을 듣게 되고 윤권서가 교회설립에 도움을 주기로 한다. 바로 하디와 윤권사는 당나귀를 타고 철원으로 행했다. 철원 지경터에 도착한 그들은 윤권사가 찾아 놓은 한옥집을 찾아가 수리하여 예배당을 만들었다. 벌써 유명한 의사가 치료도 해준다고 하니 금방 환자들이 몰려 들었다.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디는 재미있게 설교할 뿐만 아니라 힌국인 삶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하디는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감화된 한국인이 사경회가 끝날 무렵 세례를 받겠다고 해서 1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렇게 지경터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십리쯤 떨어진 곳에 세막술 교회를 세웠다. 점점 세막술 교회도 커졌다. 하디는 백성을 괴롭히는 보부상으로부터 교회와 교인을 지켜 주었다. 하디가 원산에 가 있는 동안 지경터를 지키고 있던 윤권사로부터 지경터 교회에 불이 났다고 연락을 했다. 바로 철원으로 간 하디는 검은 색으로 변한 마을을 발견한다. 하디는 불탄 교회 터를 붙잡고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 가난한 백성에게…. 이런 시련을…. 하지만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교인들과 함께 1년도 채 안 되어 새 예배당을 지었다. 그런 가운데 하디의 열정은 식고 의욕은 없어지고 있었다. 한국인에 대한 차별적 생각, 깔보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가짜 보부상 문제 때문에. 이런 죄의식으로 본인의 사역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 가고 있었다.
4. 영혼을 깨무는 자명종
하디는 원산에서 중국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1900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서양 선교사 마구 죽인 사건)피해 온 것이다. 하디는 이들과 수양회를 하여 영적 충전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원산에 거주하는 선교사들과 함께 영적 충전을 위한 수양회를 하기로 하였으며, 거기서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의 이야기를 듣고 모든 이들이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중국에서 온 선교사가 하디에게도 설교를 부탁하였다,
5. 회심
수양회에서 돌아온 하디는 요한 복음을 펼쳐 놓고 설교 메모를 정리했다.
1. 그리스도를 믿음-요한복음 14:12~14
2. 그리스도 안에 거함-요한복음 14:15~17
3. 성령의 체험-요한복음 16:23~24
이렇게 메모를 하고 정리하였지만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 감동도 없는데 무슨 설교인가 자책하였다. 하나님을 속여 가면서 설교는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동안 자신은 알아볼 수 없는 글씨를 쓰게 되었다.
"메네 메네 데겔 바르신…."
이 글은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는 글귀이다, '메데'는 '계수하니 기한에 차다', '데겔'은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란다', '바르신'은 '조각나다'라는 뜻이다. 하다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오, 주님! 현재 저의 영적인 상태가 벨사살 왕과 다름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주님의 저울로 달아보니 왕이 자격 미달이었듯이, 저 역시 함량 미달이라는 말씀이군요. 주님……… 주님께서 저를 당신의 저울에 달아 보셨군요. 오, 주님! 이제 저는 어찌해야 좋습니까………??" 하디는 하나님의 임재를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하디는 입을 벌려 주님 앞에 자신의 죄를 털어놓았다. "주님, 저는 한국인을 구원하겠다고 온 선교사이면서도 그동안 한국인들을 미개한 족속이라고 폄하하는 교만의 죄를 지었습니다. 한국인 조사나 권서 같은 이들이 선교사인 저를 드높여 '양대인!' 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런 호칭을 당연한 듯 여기는 거만의 죄를 지었습니다. 몸이 아픈 이들이 찾아와 굽신굽신 하며 병을 고쳐 달라고 할 때마다 순수한 사랑에서가 아니라 마치 시혜를 베풀 듯 한국인 환자들을 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이라면서도 성령의 능력과 도우심을 의지하지 않고 저의 학식과 능력만 의지하는 자만심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하디는 고백할수록 더 많은 죄가 떠올랐다. 새벽 닭이 울 무렵,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룩한 영이 임함을 느꼈다. "오, 주님! 티끌만도 못한 저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 다니요? 주님, 주님, 오, 주님갋갋갋갋갋갋 감사합니다!" 수양회에 가서 하디가 설교할 차례에 요한복은 14장 12~14절 말씀을 읽었다. 그리고는 어제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굵은 눈물을 흐르게 되었다. 솔직한 고백을 통해 그는 깨우쳤다. 그리고 모두를 통성 기도를 하였고 몇 선교사들은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였다. "저는 오늘 하디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얼마나 가증스러운 인간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수양회가 진행되는 동안 선교사들의 모임은 점점 더 뜨거워졌고, 선교사들 가운데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안팎의 숱한 어려움과 시련 속에 움츠러들었던 사역의 열정은 다시 타올랐고, 하나님에 대한 냉담했던 믿음은 회복되었으며, 자신들의 능력과 학식만 의지하고 선교활동에 임했던 그들의 마음에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겸손이 자리잡게 되었다.
6. 참회의 행렬
수양회가 끝난 9월 첫번째 주일이 다가왔다. 하디가 시무하는 원산남산동감리교회에서 성령에 찬 하디는 여느 때와 달리 또랑또랑 음성으로 수양회 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교를 하였다. 자신이 큰 죄인이라 고백하면서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 그리고 강원도 북부 지역에서 교회 개척의 실패 등을 말하였다. 교회는 눈물 바다가 되었다. 감동적인 예배가 되었다. 이 때 부인인 켈리가 출산하게 된다. 하디는 새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고무되고 있었다. 교회의 신도 중에 한 사람이 자기가 도둑질 한 것에 대하여 회개를 시작으로 여러 신도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면서 회개를 하는 일련의 사건이 벌어졌다. 더불어 중국에서 온 프란손이란 선도사가 주관하는 연합전도집회로부터 좋은 설교 방법을 하디는 전수받게 된다. 전수받은 설교 방법으로 하디는 계속적으로 원산남산동감리교회에서 계속 영적 대각성집회를 열었다. 어떤 여인은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흐느껴 할 때 하디는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여인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었다. 하디의 기도를 받고 난 여인은 수줍은 표정으로 얼굴에 묻은 눈물자국을 닦아 내며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그리고 기쁨에 넘친 얼굴로 자신이 얻은 평안에 대해 "이제 속이 시원해요!" 라고 말했다. 여인이 "시원하다!"고 말한 것은 이제 자기를 괴롭히던 죄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한국식 표현이었다. 하디는 여인이 표현한 '시원하다'는 한국말도 알아듣고 함께 기뻐했다. 열흘이 넘도록 열린 대각성집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하디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한 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 받은 것을 보고 매우 흡족해했다.
7. 공동체를 변화시킨 성령
대각성집회 끝낸 후 늦은 가을 시간을 내어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이 때 두아이가 홍역에 걸린 것이다. 딸 애니는 폐렴까지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애니를 돌보던 하디는 더 이상의 옛날의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하디는 이렇게 말하였다. "켈리, 그렇게 걱정하기보다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난 이제 아이들의 생사를 주님께 맡길 것이요. 그날 밤, 하디는 애니 곁에 앉아서 밤을 지새우며 기도했다. 간절히 기도하는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며 켈리는 생각했다. 이제 하디는 옛날의 하디가 아니구나! 병든 사람을 보면 자기 의술과 약에만 의존해 치료하던, 매사에 냉철하고 이지적인 의사가 아니야. 하나님의 보살 핌으로 애디는 무사하였다. 하디는 가족을 일본에 남겨 두고 원산행 배를 탔다. 하디는 다시 원산에서 사경회를 개최하였다. 하디는 교인들을 구역화 하고 여기에 담당을 정함으로써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활력을 불러 넣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 성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 대각성집회에서 모인 헌금(훔친 것을 교회에 헌금으로)으로 권서를 통해 전도 여행을 하도록 계획하였다. 권서인은 당나귀 등에 쪽복음과 신약성경을 잔뜩 싣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강원도 북부 지역을 향해 떠났다. 그가 떠나던 날 하늘에는 잔 눈발이 조금씩 날렸지만,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하디의 회심으로 인해 촉발된 부흥의 분위기는 그만큼 뜨거웠던 것이다.
8. 양심전
1901년부터 원산과 함흥 땅에 기근이 심해 사람들은 감자로 끼니를 이어 가고 있었다. 1902년 가을 추수는 예년 수확량의 십 퍼센트에 머물렀다. 1884년에 이은 조선조 최대 기근은 결국 대한제국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1904년 하디는 새해 벽두부터 두 주간 동안 원산남산동감리교회에서 사경회를 열 예정이었다. 사경회를 통해 신자들이 새롭게 변화된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도록 하려 함이었다. 하디는 집회를 시작하는 기도를 올린 후 성경을 펼쳐 읽었다.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눅 13:5)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눅 15:7) 성경을 읽고 난 하디는 '회개' 라는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삶 속에서 저지른 죄를 깨달아 반성하고 조물주 하나님이 기뻐하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회개라. 하디의 성경 풀이는 쉽고 간결해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더구나 하디가 선포하는 회개의 메시지가 회중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그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마저 털어놓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경회가 끝날쯤 윤권사가 회개할 일이 있다고 하디에게 고백하였다. 20년전 일이다, 윤권사가 일하였던 인천 주전소에서 4달러 이상의 초과 봉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디에게 초과로 받은 돈을 탁지부(세무서)에 돌려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는 탁지부에 돌려주었고 윤권사가 한국 정부에 되돌려준 이 양심전(良心錢)의 파급은 컸다. 그것은 이후의 회개운동과 더불어 양심전 운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교인들 사이에서 자기가 횡령하거나 훔친 돈을 돌려주는 양심전 운동이 일어났고, 돌려줄 대상이 없을 경우에는 그 돈을 교회에 헌금으로 바쳤다. 또 교인 가운데 돌려받은 자는 용서의 표시로 그 돈을 교회에 헌금했다. 헌금 봉투에는 '양심전' 이라고 썼다. 사경회가 끝난 후 몇주 후에 윤권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새술막에 전도를 하다가 지병인 폐결핵으로 죽게 된 것이다. 윤권사의 죽음은 하디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철원 지역을 개척할 대 윤권사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장례가 끝난 후에도 신앙의 동지를 잃은 슬픔으로 하디는 며칠 동안이나 마음이 먹먹하였다. 하지만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하디의 가슴을 꽉 차지하고 있는 윤권사가 그의 마음을 흔들어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사님, 어서 철원 땅 지경터로 가셔요. 목마른 영혼들이 목사님의 말씀을 갈구하고 있어요!'
9. 목마른 영혼들
1월 말까지 원산에서의 집회를 마무리한 하디의 마음은 벌써 철원 땅 지경터에 가 있었다. 무려 3년 동안 선교를 위해 무던히 애썼으나 만족할 만한 결실을 얻지 못하고 패배감만 안겨주었던 지경터. 하디는 어서 지경터로 달려가서 영적인 굶주림 가운데 있는 그곳 신자들의 가슴에 성령의 불을 댕기고 싶었던 것이다. 지경터로 떠나려 할 때 전쟁 소식이 들렸다, 러일간의 전쟁이었다. 청일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이 땅에 또 전쟁이라니… 기근과 전쟁으로 고통받은 한국인을 위해 그는 지경터로 발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많은 선교사가 서울로 피난하였지만. 산길이 계속 이어지는 여행은 무척 위험하고 힘들었다. 여행 첫날, 여관에서 고단한 잠을 자고 새벽 일찍 잠을 깬 하디는 기도를 한 후 성경을 펴 들었다. 무심코 펼친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네가 주 나의 하나님께 충성하였으므로, 너의 발로 밟은 땅이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유산이 될 것이다."이 말씀을 읽는 순간, 하디는 그것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푹푹 빠지는 눈길, 살을 에는 추위, 전쟁의 두려움 등 숱한 난관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새벽에 읽은 그 말씀은 하디에게 크나큰 힘이 되었다. 지경터교회에 도착하여 새술막교회까지 연락하여 많은 신자가 모이도록 하였다. 하디는 성경을 펼쳐 들고 읽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요 16:24)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된 사람으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1~13) 성경을 읽고 난 하디는 뜨거운 열망으로 불타는 회중의 눈동자들을 바라보며 말씀을 선포했다. "제 학식과 재능만을 믿는 오만, 한국인인 여러분보다 서양인인 제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해 온 인종적 편견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저 자신만을 의지해 온 교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토기를 부수듯 저를 산산이 깨뜨리셨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 잘못 살아온 저의 죄를 고백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솔직히 드러내는 공개적인 참회와 불을 토하듯 포효하는 하디의 설교는 첫날부터 회중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참회와 성령의 은총을 사모하는 사경회는 12일간이나 계속되었다. 서울로 피신한 선교사들이 지경터 교회로 모여들었다. 선교사들의 하디의 노고에 대하여 치하에 대하여 하디는 "별 말씀을요. 저는 그저 성령의 도구가 되어 이곳 신자들 곁에 있었을 뿐입니다. 사실 저는 이곳에 복음의 씨를 뿌린 후 좌절과 실망, 자책으로 몇 년 세월을 보냈었는데, 이번에 신자들이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 같아서 매우 기쁩니다." 하디는 일본군이 점령할 송도로 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디는 단호하게 "내일이라도 떠나야죠" 하였다.
10. 붓으로 다 기록할 수 없는 은혜
송도에 도착한 때는 1902년 2월26일이었다. 일본군이 많이 눈에 띄었다. 하디는 연합사경회를 열기로 한 송도남부교회로 가고 있었다. 사경회는 여러 교회의 신자들이 모였다. 150명쯤 모였다. 자기 고백으로 시작된 하디의 설교는 좌중을 흔들어 놓았다. 자기들의 은밀한 죄를 자복하며 회개하였다. 마지막날 최대건이라는 장사꾼이 자기 죄를 고배하러 나온 것이다. 자기가 내야 할 돈을 거짓으로 교인이라 하여 이를 회피하려 한 것이다. 이런 행동을 그는 회개하였다. 이 사건은 대단한 뉴스거리가 되었다. 교인들의 출석율이 증가하게 되었다. 김순일이란 자는 두명의 아내를 두려 한 것에 대하여 콜리어라는 선교사를 통해 교인은 두 아내를 둘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후처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순일은 다음과 같은 시를 쓴 두루마리를 하디에게 건넸다.
하나님 은혜 만만 감사하심이여, 나를 내시고 기르시도다.
하나님 사랑 지극히 크심이여, 나를 다시 살리셨도다.
일천구백년 전에 우리 예수 탄생하시사
십자가 사랑으로 만민 구원하셨도다.
내가 예수 믿은 후 영생복락 한량없도다.
만 가지 복 감사하니 기쁜 마음으로 어떠하든지
주의 말씀 전파할 때에 팔은 절로 춤을 추며
하나님 은혜 생각할 때 낮은 절로 화하도다.
길 갈 때도 생각하니 혼자 웃고 좋아하며
잠잘 때도 비몽사몽간에 좋다 소리 절로 나오네.
이 기쁜 것을 어찌 붓으로 다 기록할 수 있으며
입으로 다 말할 수 있으리오.
다만 뱃속에서 물이 강같이 흐르도다.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우리들이여, 우리가 복 받음을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한 소리로 크게 전도합시다.
우리 대한 사람은 다 예수를 믿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내 소원이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참회하며 새로운 영적 각성을 경험했고, 그로 인해 몇몇 지역에 새 교회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디는 서울로 떠나게 된다.
11. 부흥의 열매
서울에서의 부흥집회는 4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서울까지 도착하는데 닷새가 걸렸다. 서울에서는 정동에서 자교교회에서 부흥회를 열렸다. 자교교회는 1900년 경성 서부 인달방 고간동 자골에 있는 배화학당에서 캠벨 부인에 의해 설립되었다. 캠벨 부인은 1897년 45세 때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아담한 서구식 이층 벽돌집을 짓고 그 다음 해에 소녀들 만을 위한 배화학당을 시작했다. 배화학당이 자리를 잡자, 1900년에 배화학당 부속 교회 형식으로 자교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이 무렵 중국 여선교사인 여소저가 캠벨 부인을 도와 배화학당 교사로,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로, 자교교회 여자들을 가르치는 전도부인으로 열정을 바쳐 일했다. 부흥회가 열리던 날, 아침식사를 마친 하디는 서둘러 당나귀 등에 올라타고 거리로 나섰다. 예배당에는 학생들도 있었다. 서울에서 첫 부흥회인 것이다. 하디는 회중과 눈을 맞춘 뒤 기도부터 시작했다. 우렁찬 음성으로 드리는 하디의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일 만큼 힘이 있고 간곡했다. 그의 기도는 예배당 공간을 금세 기대와 열망으로 가득 채웠다. 그의 기도소리가 높아질수록 거룩한 영의 기운이 살아 움직이며 회중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기도를 마친 하디는 성경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회중 가운데는 성경이 없는 이들도 있었고 글자를 알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하디는 회중에게 성경 말씀을 한 구절 씩 따라 하라고 했다. 하디가 한 구절 씩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회중은 앵무새처럼 잘 따라 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간절히 비는 기도는 큰 효력을 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내리고, 땅은 그 열매를 맺었습니다." (약 5: 16~18) 성경을 함께 읽고 난 후 하디가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교는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신학문을 배우며 귀가 뚫린 젊은 학생들에게 하디가 전하는 말씀은 강력한 전류처럼 스며들었다. 어떤 학생은 전류에 감전이라도 된 듯 온몸으로 전율했고, 어떤 학생은 말씀에 감화되어 눈물샘이 라도 열린 듯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설교를 끝낸 하디가 통성기도를 시작하자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 은 자기의 죄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울부짖었다. 기 시작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기도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로 배제학당에 다니는 남학생들이었다. "얘들아, 너희 배고프지 않아? 금식한 지 며칠 째지?" 어떤 선교사는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금식하는 게 안쓰러워서 물었다. 한 학생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겨우 사흘밖에 되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이나 굶으셨다는데!" 제법 콧수염이 많이 난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학생이 초롱초롱 한 눈망울을 빛내며 말했다. "하디 목사님 말씀이 꿀맛이라, 말씀만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아요." 열흘간의 부흥회는 집회에 참석한 이들을 영적으로 각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집회 후에도 여러 가지 유익한 결실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배재학당과 배화학당 학생들의 실질적인 영적 변화는 자교교회에 새로운 성령의 신바람을 불어오게 하였다. 원산으로 돌아온 하디에게 켐벨부인으로부터 하디가 다녀간 자교교회 교회가 번창하게 된 후일담이 적힌 편지가 도착하였다. 하디는 "꽃이 활짝 핀 후 열매를 맺혀 잘 익어 간다는데,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어요?" 말하였다.
12. 소나기 같은 축복
1904년 가을이었다. 다시 서울로 부흥의 불길을 붙이러 하디는 떠나려 하였다. 당시 한국은 러일전쟁때문에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원산항에 일본인들이 많이 상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폭격이 심하였다. 하디는 저다인 선교사와 조사(보조)를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울 정동에 잘 도착하였다. 닷새가 걸렸다. 정동에 도착한 하디의 느낌은 낯설었다. 서양 공관들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었다. 아펜젤러가 불의 사고로 사망하지 정동교회를 물려 받은 최병헌 목사가 하디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최병헌은 '목사님, 이번 부흥회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을 위해 열었는데, 성인들도 많이 참석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울 지역의 많은 감리교 신자들도 기대를 가지고 참석할 것 같고요." "아, 그래요? 정동교회는 한국 감리교의 모교회가 아닙니까? 그래서 관심이 많은 것이겠지요." "네, 그렇기도 하지만, 지난 봄 자교교회에서 있었던 부흥회로 인해 목사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답니다. 그리고 그동안 원산과 송도에서의 놀라운 부흥에 대해서도 다들 익히 알고 있고 "그거야 뭐 제가 한 일입니까? 성령께서 하신 일인데………!" "하여간 저는 목사님을 모시고 여는 이번 부흥회에 기대가 큽니다'라고 하였다. 1904년 9월20일 부흥회가 시작되었다. 정동교회 예배당을 학생과 성인들이 꽉 채웠다. 최목사가 하디를 소개하였다. 하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작은 좀 하디입니다. 저는 이 부흥회에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이번 부흥회는 지금 앞자리에 많이 모인 젊은이들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의 미래와 희망이 되어야 할 귀한 일꾼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는 동안 저는 여러분이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삶을 뉘우치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라고 설교를 시작하였다. 성경에 해박한 하디는 여러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어린 학생들도 알아듣도록 쉽게 말씀을 전했다. 설교를 마친 하디가 기도를 시작하자 자기 죄를 깨달은 이들이 울음을 터뜨렸고, 또 어떤 이는 자기 가슴을 치며 흐느끼기도 했다. 둘째 날부터는 오전과 오후에 사경회를 하고 저녁에는 전도집회를 했다. 몇일 지나자 부흥회 소문이 널리널리 퍼져 나갔다. 부흥회가 시작된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최목사는 신도들의 열의에 연장하자고 하디에게 요청한다. 특히 배제학당 학생들이 요청한다고 하였다. 하디는 연장을 하기로 하였다. 연장되었다는 소식에 모든 회중은 박수 치며 기뻐하였다. 부흥회 기간에 일어난 가장 놀라운 변화는, 그동안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살면서도 열정이 식은 한국인 본처 전도자들, 부인 권서들, 속장들, 주일학교 교사들이 성령의 책망을 받아 회개하고 그리스도 제자 로서의 사명을 새롭게 다짐한 것이었다. 마지막 날 집회를 마친 후 숙소로 돌아온 하디의 방에 최병헌 목사와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하디 목사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최병헌이 빙그레 웃으며 "소나기 같은 축복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우리 학생들에게 소나기 같은 축복이 쏟아졌습니다."
13. 말씀의 검
하디가 평양에 도착한 것은 1904년 10월14일 금요일이었다. 이번에도 부흥 강사로 초청받은 것이다. 전세는 일본에 유리하게 흘러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흥회는 남산현교회에서 열렸다. 남산현교회에 모인 성도들은 하디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사회자가 하디를 부흥운동에 가장 열성적인 목사라 소개하였다. "저는 무스 선교사님(초청자)과 서울에서 평양으로 오는 동안 의미심장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특히 한국 교회의 부흥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무스 목사님은 지금 한국 교회가 막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상태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여러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사실을 들어서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주셨던 것처럼, 한국 교회도 지금 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는 상태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디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 갔다. "저는 무스 목사님의 이런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20여 년의 힘겨운 광야 시절을 보냈습니다. 복음의 씨앗이 온갖 시련과 역경을 통해 한국인의 가슴에 뿌려진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광야 시절을 보낸 한국교회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일, 즉 이 땅을 복음화 하는 일에 현신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가 회개하고 성령의 은총을 입어 전적으로 거듭난 영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새롭게 거듭나는 것, 이것이 곧 부흥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들만 많이 모이는 것이 부흥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실 만큼 변화된 신자들의 거룩한 삶이 부흥이라는 말입니다." 회중들의 하디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과 그 영적인 설교에 감동을 하였다. 둘째날에는 2000명이 넘는 사람이 몰려들었다. 셋째날에는 갓을 쓰고 흰 두루마리를 입은 남자가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괴롭힌 일을 회중 앞에서 회개하였다. 다른 노인을 예수 믿는 형제를 미워한 것에 대하여 회개하였다. 마지막날에는 전도 부인이 위선적 교인 생활에 대하여 회개하였고 이는 반향이 컸다. 선교사들 중에도 잘 못된 선교활동에 대하여 회개하면서 하디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에 하디는 "저는 부흥운동에 미친 사람인데, 이번 평양 부흥회 같은 놀라운 경험은 처음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앞으로 이 평양에서 한국교회를 새롭게 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 같습니다. 더욱이 평양에 계신 여러 선교사님들이 이토록 뜨거운 복음의 열정을 품고 계시니 말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14. 성령의 용광로
평양 부흥회를 끝내고 하디는 인천 제물포로 갔다. 11월1일에 열리는 부흥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제물포에 사는 내리교회 신자들 가운데는 1~2년 사이에 하와이로 이민을 많이 갔다. 당시 한국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리교회에서 부흥회가 시작되는 1일은 날씨가 무척이나 화창하였다. 농부들은 추수를 끝내고 부흥회에 참석하였다. 하디는 강단에 섰다. "한없이 부족한 주님의 종인 저 하디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깨닫도록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깨닫도록 해 주실 분은 오직 성령 뿐이시죠. 동양에는 이런 멋진 말이 전해져 오더군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아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저는 주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저를 보지 마시고 밝은 광명이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그 밝은 빛으로 여러분 안에 감추어진 죄를 깨닫게 하고 여러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디가 전하는 말씀은 오아시스에서 솟는 샘물처럼 영적인 갈증으로 목말라 하던 회중의 가슴 속으로 흘러 들었다. 설교 중에 몰래 동거중인 남녀가 회개를 하였다. 모두들 놀랐다. 하지만 두 남녀의 공개적인 참회는 들불처럼 다른 신자에게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개 회개를 한 것이다. 마지막 날 저녁 집회 때까지 이런 공개적인 참회는 계속 이어졌는데, 하디는 그렇게 참회한 이들에게 선포했다. "이처럼 여러분이 자신의 죄를 고백할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이 도우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죄를 모두 불태우실 것입니다. 아직도 죄의식으로 괴로운 분들은 성령의 용광로에 자신의 죄를 집어넣고 다 태우십시오.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 불안도 활활 타는 성령의 불길에 던지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선물로 받으십시오." 부흥회를 끝내고 떠나려는 하디에게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선교사가 이야기하였다. "유종의 미를 거두셔야죠" 다름 아니라 회개하였던 두 남녀의 결혼에 관한 것이었다. 두사람이 회개 후 모든 문제를 처리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결정하고 그 결혼에 대한 주례를 하디에게 부탁한 것이다. 하디는 예복으로 갈아 입고 한식과 서양식으로 같이 진행되는 혼례식을 주관하였다. "저는 오늘 두 사람의 혼례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태초부터 두 사람이 짝을 이루도록 예비하셨던 모양입니다. 부디 신랑 신부는 부흥회 첫날의 고백을 늘 기억하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의 특별한 이 혼례는 주례를 맡은 저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도 증인이 되신다는 걸 항상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디의 주례사는 길지 않았지만, 혼례를 올리는 신랑 신부와 거기 모인 하객들 가슴에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부산에 도착한 하디는 안식년으로 고국인 캐나다로 떠나게 되었다.
15. 값없이 주는 사랑
하디는 1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케리, 애니, 윌슨(한국에서 태어난), 조이 모두 같이 왔다. 원산에 계속 있었던 다른 선교사로부터 을사조약에 의해 한국인이 더욱 고통받는 다는 소리를 들었다. 원산의 생활이 안정되어 갈 즈음 신년 부흥 간사 요청이 전국에서 쇄도하였다. 이화학당 배당학당 두곳에서도 요청이 들어왔다. 하디는 바로 승낙하였다. 1906년 봄학기 중 두 학교에서 각각 1주일씩 부흥회를 열었다. 하디의 설교와 간증을 접한 학생들은 강한 흡입력으로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빨아 드렸다. 부흥회 마지막 날 이화학당의 이야기를 들었다. "집회가 끝난 매일 저녁이면 학생들이 거의 자정까지 채플에 남아 자기 죄를 고백했지요. 그리고 잠이 많은 여학생들이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기 위해 조용히 채플로 가는 것도 보았고요. 그래서 어느 날 제가 학생들에게 언제 어디서 너희의 죄를 용서받았느냐고 물었더니, 채플에서 새벽에 혼자 있을 때라고 하더군요." 서울의 두 학당에서 부흥회를 마친 하디는 인천 제물포로 갔다. 제물포는 1904년 11월에 부흥회를 열었던 곳이었다. 부흥회는 한 주간 동안 열렸는데, 하디가 인도하는 집회는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회중의 가슴을 사로잡았다.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 봄 내내 여러 교회를 돌며 부흥회를 이끌었다. 여름쯤 원산으로 돌아왔다. 모처럼 만에 가족과 원산 여름을 즐겼다. 그러나 하디의 마음은 이미 다음 부흥회 지역인 평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16. 천지사방 번지는 꽃구름
평양에서 하디를 초청한 것은 그곳에 주재하는 북감리교 선교사들과 장로교 선교사들이었다. 둘이 연합하여 하디를 작년에 초청하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 한국의 주권이 상실된 가운데 외국 특히 미국에 대하여서도 한국인이 반감을 가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절박한 마음으로 하디 목사를 초빙하여 연합 부흥회를 하기로 한 것이다. 하디는 기도하면서 이런 대가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평양 선교사연합집회은 8월 중순에 열렸다. 집회에 참여한 선교사는 30여명쯤 되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어린 아이가 있었다. 의료선교사인 윌리엄 홀의 아들인 셔우드 홀이었다. 아버지는 과로로 돌아 가셨다. 아들과 부인을 본 하디는 가슴이 메었다. 하디가 선교사들이 겪고 있는 위기의 현실을 좀 더 자세히 언급하고 나서 이러한 위기가 오히려 하나님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하자, 선교사들은 모두 아멘으로 화답했다. 하디는 요한1서의 몇 구절을 함께 읽은 뒤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 가부터 설명했다. "기독교 복음의 중심은 하나님의 은혜의 메시지에 있다고 믿습니다. 단지 하늘의 상급을 위해 영적인 투쟁을 하거나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고투하는 것은 은혜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고 우리 자신을 자만심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자만심에 차서 제 능력과 노력으로만 사역을 하다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뼈저린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실패와 좌절 속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침체된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성령의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디의 설교는 안일과 타성에 젖어 살아온 선교사들에게 새로운 도전이 되었고, 듣는 이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감동이었다. 하디는 모일 때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려면 기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 역시 저의 영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역을 하려 할 때 아무리 높은 이상과 고상한 동기가 있더라도 영적인 힘이 없으면 그것을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영적인 힘은 오직 쉬지 않는 기도로 써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몸이 날마다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건강도 기도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하디의 간증과 설교가 끝난 후에 여러 선교사의 회개가 뒤따라왔다. 그 중 그레이엄 리라는 선교사는 자신의 교만함이 산산이 부서졌으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그 이후로 평양 부흥운동에 중추가 되었다. 부흥회가 끝나고 열두 살 소년인 셔우드 홀을 보게 되고 부흥회에 대한 소감을 물어보았다. "성경을 딱딱한 말로 풀이하실 땐 좀 지루했죠. 그런데 목사님이 실패한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성령의 은혜로 거듭난 삶에 대해 말씀하실 땐 제 가슴도 뭉클했어요." 그러면서 셔우드도 고백할 게 있다고 했다. "목사님 말씀을 듣는 동안 제 꿈이 바뀌었어요! 그동안 저는 서양에 가서 큰 사업가가 되어 부자로 살고 싶었죠. 그런데 이번에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사업가 대신 의료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대견하였다. 부흥회에서 돌아온 하디는 꿈을 꾸게 된다. 어렵게 마침내 산봉우리에 오르자 갑자기 먼동이 환하게 터왔다. 산봉우리에 선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큰 도시가 한눈에 다 보였다. 그 도시는 언젠가 와 본 듯 낯설지 않았다. 그 도시의 하늘에는 붉은 꽃구름이 몽실몽실 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피어나는 꽃구름은 진달래꽃 같기도 하고 모란꽃 같기도 하였는데, 금세 도시의 하늘을 뒤덮었다. 잠시 후 거대한 모양을 이룬 꽃구름은 형형색색으로 자태를 바꾸며 천지사방 번져 나가고 있었다.
첫댓글 김종일 집사님의 진지한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집사님은 책을 공들여 읽으시고 꼼꼼이 정리하는데 이력이 많으신 분입니다. 다른 독후감을 검색하시려면 바이블25 오늘의 책 또는 인터넷 당당뉴스에서 '김종일'을 검색하세요. 벼락같은 보물들이 쏟아집니다
김종일집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술 받으러 가기 전에 다 쓰셨다는
얘기를 듣고 감탄하고 놀랐습니다.
잘 읽겠습니다~^^
아침 출근길에 올리신 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이리도 깔끔히 정리를하셨는지! 일단 다운받고.. 짬짬히 읽겠습니다.. 정리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참고 자료 득템한 기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