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소련 저항의 상징이자 록의 전설 빅토르 최(Victor Tsoi)를 아시나요?
자유의 가치를 주장하며 소련 공산정권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노래를 불렀던 러시아 대표 록가수 빅토르 최(Viktor Tsoi/Viktor Robertovich Tsoi:1962~1990)
28세의 짧은 삶을 음악에 바친 소련 공산정권의 저항과 자유 상징 록가수 빅토르 최(Viktor Tsoi/Viktor Robertovich Tsoi)
Знаете ли вы Виктора Робертовича Цоя, бунтарского рок-н-ролльного певца из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1. 소련공산정권에 대한 자유 향한 첫걸음 시작한 빅토르 최
구 소련 말기 활동한 빅토르 최(Viktor TsoiViktor Robertovich Tsoi1962~1990)는 러시아 문화에 동양적 사상을 결합한 러시안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발했다. 그는 노랫말에 자유와 저항의식을 담아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불리며 러시아의 영웅적인 존재였다.
러시아 특유의 선율에 소련의 압제적 분위기에 맞서는 저항과 자유의 메시지를 담은 그의 노래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리면서 최는 소련 록의 전설로 떠올랐다.
그의 본명은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최(Viktor Robertovich Tsoi), 예명은 초이 빅토르(Tsoi Viktor)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실행으로 소련 사회에 개혁 · 개방 분위기가 급격히 전개되자, 서방의 록 음악을 소개하여 유행시켰던 고려인 가수이다. 소련 록 음악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고려인 출신 빅토르 최는 1962년 6월21일 구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카자흐스탄 출신의 고려인 3세 엔지니어인 아버지 로베르토 최(원주 최씨)와 체육교사인 러시아인 어머니 발렌티나 최 사이에서 태어난 최는 19세때 록 그룹 키노(Kino)를 결성해 약 9년 동안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참고로 이주 고려인 2세인 그의 할어버지는 원주 최씨인 최승준으로 카자흐 고려인 출신으로 KGB 소령으로 카자흐지역 담당지부장으로 근무했다고 한다.
청소년기인 17세 때부터 음악을 비롯하여 미술, 조각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음악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그는 이때부터 직접 노래를 작사,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빅토르 최는 1962년 6월21일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 로베르토 최(원주 최씨) 는 카자흐스탄에서 러시아로 이민하신 고려인이고 어머니 발렌티나 최는 러시아사람이다. 빅토르 최는 엄격한 아버지보다 어머니랑 더 밀접한 관계로서 빅토르 어머니가 아들한테 능력과 자질을 기르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뒷줄 가운데가 고려인 아버지이고 뒷줄 오른쪽이 어머니, 그리고 앞줄 가운데 어린 아이가 빅토르 최이다.)
빅토르 최는 엄격한 아버지보다는 본인을 지극히 사랑해 주는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랑 더 가까운 사이로서 음악을 좋아한 빅토르 어머니는 아들한테 음악적 능력과 자질을 이어주고 길러주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가 작사, 작곡한 노래의 주제들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들이었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당시 소련 음악차트등의 대중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스타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소련 공산당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순수한 팝가수들과는 달리 저항적인 록음악은 소련 정부에게는 마땅치 않은 음악의 장르였다.
빅토르 최와 그의 첫 사랑이자 부인인 마리안느 최와의 결혼식 사진. 마리안느 최는 두살 연상으로 이혼녀였다.
부인인 마리안나와 아들 샤샤와 함께 사진촬영한 빅토르 최.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소련 공산정권의 정치적 압박 속에서 소리도 못 내고 있던 당시 소련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음악 자체가 이들의 의사표현의 자유 등의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항상 감시와 핍박을 당하며 어떠한 지원이나 원조를 받지 못했고,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관영 매체에서는 이들의 음악을 국가를 위한 예술로서 인정하지 않아 대중들에게 전혀 소개될 수 없었으며, 마약 중독자나 부량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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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망한 후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타 공원에 세워져 있는 빅토르 최의 동상.
그러나 퇴학에도 불구하고 그는 록 음악에 계속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파티 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래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던 극소수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최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데 솔로로 연주한다.
빅토르 최(Viktor TsoiViktor Robertovich Tsoi : 출생:1962년 6월 21일,카자흐스탄~사망:1990년 8월 15일 (향년 28세)/경력1981.~ 그룹 'KINO' 리더보컬)
공연 중인 소련 록그룹 키노(KINO)의 리더보컬 빅토르 최.
이러한 영향으로 록가수였던 빅토르 초이는 18세 때 다니고 있던 세로프 예술학교에서 정치적인 압력에 의해 성적부진이라는 이유로 쫓겨나게 된다.
그러는 동안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는 아무도 걸으려 하지 않았고, 아예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런 시도는 점차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아지면서 드디어 대중음악의 록가수로서 성공을 거두고, 데뷔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록그룹 키노(KINO;러시아어 영화, 극장)를 결성한다.
소련 록그룹 키노('KINO)' 리더보컬인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왼쪽 두번째)
그들은 빅토르 최의 아파트에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이 테이프는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의 록 매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
1982년 록그룹 키노(KINO)는 첫 앨범인 <45(소록 피아트; 러시아어로 45라는 뜻)>를 발표한다. 이 앨범의 이름이 45로 정해진 것은 이 앨범의 재생시간이 총 45분이었기 때문이다.(후에 46(소록 쉐스트)라는 앨범도 냈다.) 이 앨범에서 빅토르 최는 음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는 시도를 하였다.
<외곽전철>이란 노래는 원치 않은 곳으로 가는 전차에 끼여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이런 가사는 분명히 당시의 공산주의 소련사회에서의 민중들의 삶을 은유한 것이었으며, 이 노래는 곧바로 소련정권에 의해 공연이 금지된다.
1980년대 소련의 위대한 록스타 빅토르 최
그러나 자유를 갈망하며 자유의 가치를 외치는 이 노래의 메시지로 그의 노래는 당시에 소련 공산체제에 혐오를 느끼며 반항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며 록그룹 키노KINO)와 리더보컬인 빅토르 최는 그들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제2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콘서트에서 키노(KINO)는 자신의 정치색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키노(KINO)는 빅토르 최의 반전음악인 <내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포한다>로 1등을 차지하고, 이 노래는 당시 수만의 소련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았고 있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소련 모스크바 지하철역으로 내려가고 있는 빅토르 최.
1987년은 키노(KINO)의 해였다. 7집 앨범 <혈액형>은 "키노마니아"로까지 불리는 사회현상을 불러일으킨다. 당시 소련 공산당 서시장으로 부임한 고르바쵸프에 의해 시작된 글라스노스트로 인해 풀린 개방적이 된 정치상황은 그의 가장 정치색이 짙은 앨범인 <혈액형>을 마음껏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앨범의 메시지만 청중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라 앨범에 담긴 음악 그 자체도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새로운 것이었다.
소련 모스크바에서 공연 중인 록그룹 <키노>와 리더 빅토르 최
대부분의 곡의 내용들은 소련의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었으며, 능동적으로 나가서 국가를 변화시키라고 호소했다. 몇 개의 노래는 소련을 옥죄고 있던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 앨범은 빅토르 최와 키노(KINO)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켰다.
이후 몇 년간 그는 몇 편의 성공적인 영화까지 찍었으며 영화제에 그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에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으며 밴드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만 갔다. 그는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는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노래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기에는 개방된 소련사회에서는 너무 힘들었고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실을 관리하면서 집도 없이 어렵게 보일러실 안에서 거주하며 힘들게 살아갔다.
그러나 자신의 힘든(!) 직업을 이어가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고는 있지만 정부의 보조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정식으로 판매되기 보다는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해 돈이 부족했다. 그의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당시 어렵게 살고 있던 소련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28세 젊은 나이로 요절한 소련 록의 전설 빅토르 최
1989년에는 미국과 프랑스 등으로 순회공연을 하였으며, 1990년 6월 키노(KINO)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쿠즈니키 경기장)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콘서트를 열어 6만 2천의 팬들이 군집한 가운데 성공적인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그 이후인 1990년 8월 14일 모스크바에서 그들의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치고 다른 멤버들이 녹음과 리가 공연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라트비아 리가로 가기 위해 이동하였다.
그는 이번 공연을 마치고 9월에는 일본과 미국 등으로부터 공연 제안을 받았으며, 또한 9월 한민족체육대회 때 내한공연을 위해 조국인 한국을 방문하여한국의 유명 가수 조용필을 직접 만나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이 개최한 1988년 88서울 올림픽에 대해서도 같은 한민족으로서 많은 자부심과 뜨거운 동포애를 느꼈다고 1988년 러시아를 방문한 일본 TV방송 인터뷰에서 언급할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뜻한 감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이동하는 도중 8월 15일 아침 러시아 서북부 도시 리가(현재 라트비아 수도) 외곽에서 빅토르 최가 운전하던 승용차는 갑작스럽게 마주오던 버스를 피할 겨를 없이 그대로 충돌하게 된다.
이 사고로 빅토르 최의 승용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으며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개방된 러시아에서 위대한 록의 전설로 불리우던 고려인 록가수 빅토르 최는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약관 28세였다.
자신의 앨범을 들고 있는 빅토르 최.
그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당시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를 추모하며 특별히 글을 올렸다.
“빅토르 최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한 번도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름 그대로 빅토르 최였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우리는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여 지는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이 없는 유일한 록커, 그가 바로 빅토르 최이다. 그는 그가 노래 부른 대로 살았으며 그는 러시아 록의 마지막 영웅이었다. 소련의 희망 로커 빅토르 최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은 너무 행복했었다.“라고.....
소련 록그룹 <키노>와 리더보컬 빅토르 최.
2. 소련 정권 이단아 빅토르 최 ‘의문의 교통사고’ 사망, 진실은?
1990년 빅토르 최의 죽음이 알려지자 그의 팬들은 장미꽃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계속되는 추모 열기 속에 장례식이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으며 5명의 여성이 모방 자살했고, 30명의 팬들은 빅토르 최의 무덤에서 4년 간 시묘살이를 했다.
소련 진보세력 정치인 고르바초프는 "아무도 그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아닌 믿고 싶지 않다"는 말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에 비해 그의 죽음에 대한 수사는 미흡했다. 경찰은 빅토르 최의 차와 충돌한 버스 운전 기사의 진술만으로 "빅토르 최가 사고 당시 130km의 속도로 졸음운전을 했다"고 밝혔을 뿐 정확한 사고 경위를 공개하지 않았다. 버스 운전기사는 이 사건 이후 종적을 감췄다.
경찰은 또 부인인 마리안나에게 조차 빅토르 최의 시신을 공개하지 않았다. 경찰은 마리안나에게 그의 여권과 반지를 유품으로 전달했을 뿐 시신공개는 끝내 거부했다.
때문에 그의 죽음과 관련한 타살 의혹이 제기됐다. 그가 가수로 활동할 당시는 고르바초프의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이 심하던 때였다.
러시아의 전설적 록가수 빅토르 최. 그가 잠들어 있는 공동묘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동쪽에 위치해 있다.
빅토르 최의 묘지 앞 통로 건너편엔 그를 따라간 그의 러시아인 아내 마리안나 최의 무덤이 있다.
그가 개혁성향의 노래를 불렀고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비춰볼 때 그의 존재는 보수파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수 있다.
실제 그는 활동 당시 제약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에 진보주의자 고르바초프의 반대세력인 공산당 보수파가 KGB 서부지역담당자인 푸틴 등을 시켜 그를 암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정치 변혁기에 미흡한 수사가 낳은 추측일 뿐이다"는 의견도 있다. 20년이 지난 뒤에서 숭배받는 까레이스키 빅토르 최. 그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였을까, 보수파에 의해 암살 당한 것일까.
그의 유일한 집이자 일터인 보일러실 안에서 잠시 차를 마시며 상념에 잠긴 빅토르 최.
3. 2010년 당시 빅토르 최 사망 20주년 추모 열기로 가득찬 러시아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등에서 수천명 모여 빅토르 최를 추모하고 있다.
옛 소련의 전설적 록가수 빅토르 최(고려인 3세) 사망 20주년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러시아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리아노보스티 등 현지 언론들이 2010년 8월 15일 보도했다.
수도 모스크바에서는 그를 따르는 수백 명의 팬들이 시내 중심가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빅토르 최 추모의 벽'에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추모객들은 최의 사진이 놓여 있는 추모의 벽에 꽃다발을 바치고 촛불을 밝힌 뒤 '그루파 크로피(혈액형)' 등 그의 인기곡을 함께 불렀다. 이들은 "우리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한 추모객은 리아노보스티와의 인터뷰에서 "최는 우리의 전부다. 천재 가수인 그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빅토르 최가 태어나 활동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추모 열기가 뜨거웠다. 그의 무덤이 있는 보고슬로프스키 묘지에는 수백 명의 추모객이 몰려와 꽃을 바치고 그의 노래를 불렀다.
러시아 모스크바 시내 아르바트 거리 인근의 꽃집들은 최의 팬들이 장미와 카네이션 등을 앞다투어 사가면서 꽃이 바닥날 정도였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최가 태어나 활동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추모 열기가 뜨거웠다. 그의 무덤이 있는 보고슬로프스키 묘지에는 수백 명의 추모객이 몰려와 꽃을 바치고 그의 노래를 불렀다. 최가 한때 보일러실 화부로 일했던 시내 공장에도 추모객이 몰려들었으며 밤에는 시내 미하일로프스키 성에서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이처럼 빅토르 최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2020년, 벨라루스(Belarus)의 수도 민스크(Minsk) 거리에서 빅토르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시민들이 길거리로 나와 빅토르 최의 노래 ‘변화’를 불렀다.
‘우리의 심장은 변화를 원한다. 우리의 두 눈은 변화를 원한다. 우리의 웃음에서, 우리의 눈물에서, 우리의 맥박에서, 변화를! 우리는 변화를 기다려!! ’(‘변화’ 가사 중에서)
지난 2020년 벨라루스에서는 20년 이상 기간동안 장기간 독재정치를 하고 있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군중들이 고 빅토르 최의 호추 페레멘을 부르고 있다.가수이자 보일러 엔지니어인 Viktor Tsoi의 Khochu Peremen은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후 에도 여전히 러시아권에서는 변화의 상징이자 찬가가 되고 있다.
2020년 벨라루스 대선에서 26년쨰 집권 중인 벨라루스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80%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벨라루스 시민들은 독재자의 부정투표에 저항하는 민주화 시위를 일으켰다. 그들은 사람들은 빅토르 최의 노래 ‘변화’를 부르며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행진을 했다.
Protest rally in Minsk, Belarus - (Виктор Цой - Перемен требуют наши сердца)벨로루시 민스크 시위 집회 - (빅토르 최 - 우리 마음은 변화를 요구합니다)
빅토르 최가 태어나 활동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추모 열기가 뜨거웠다. 그의 무덤이 있는 보고슬로프스키 묘지에는 수백 명의 추모객이 몰려와 꽃을 바치고 그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2014년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제22회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러시아명 빅토르 안)가 러시아 쇼트트랙 역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안현수에게 ‘빅토르 최의 혼을 안고 달린 빅토르 안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내용으로 축전을 보냈다.
1999년 윤도현 밴드(YB)가 ‘한국록 다시 부르기’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들국화, 송창식, 강산에 등 대한민국 록음악가들의 명곡을 리메이크한 앨범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빅토르 최의 대표곡 ‘혈액형’ 번안곡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노래는 러시아 본국에서도 인기를 얻었으며 윤도현 밴드는 러시아 록페스티벌에 참가해 이 노래를 원곡 가사로 불러 빅토르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빅토르 최가 태어나 활동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추모 열기가 뜨거웠다. 그의 무덤이 있는 보고슬로프스키 묘지에는 수백 명의 추모객이 몰려와 꽃을 바치고 그의 노래를 불렀다.
최가 한때 보일러실 화부로 일했던 시내 공장에도 추모객이 몰려들었으며 밤에는 시내 미하일로프스키 성에서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인기 절정에 있던 그는 1990년 순회공연차 들른 라트비아 리가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2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공식 사고 원인은 졸음운전으로 발표됐으나 일부에선 소련 KGB의 타살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유철종 기자 cjyou@yna.co.kr
빅토르 최를 추모하며 1999년 러시아에서 발행된 빅토르 최 기념우표.
빅토르 최를 대표사진으로 제작한 소련 록그룹 키노(KINO)> 앨범 사진.
Виктор Цой. ЛУЧШИЕ ПЕСНИ И ХИТЫ(빅토르 최의 히트곡 모음)
Следи за собой будь осторожен Виктор ЦОЙ группа КИНО(키노(KINO)-조심하세요)
#виктор цой #цой легенда #цой жив #котельная #Петербург
"Перемен!" (фрагмент из к/ф "Асса") #мосфильм "변화!" (영화 "Assa"의 일부)
НОВЫЙ КОНЦЕРТНЫЙ ЗВУК Кино - Перемен [Ремастер/Кавер] (NEW CONCERT SOUND Kino - 변경 [리마스터/커버])
빅토르 최 -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한글자막)/Виктор Цой - Хочу перемен!
키노 - 변화를 원한다 / Кино - Хочу перемен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 - 소련 가요, 빅토르 최(Viktor Tsoi, Виктор Цой)
KBS 스페셜 - KBS Special - 빅토르 최 (1995년 6월 11일 방영)
빅토르 최(Victor Tsoi)의 사진 보기
현재에도 공연 이어가는 러시아 록그룹 KINO(키노)...생전 빅토르 최의 영상음성 보컬 사용
러시아 록그룹КИНО(키노) — Спокойная ночь Live 2021(KINO-<굿나잇 라이브2021>)
1990년에 사망한 리더보컬 빅토르 최를 추모하며 옛 그룹멤버들( 알렉산더 티토프, 이고르 티코미로프, 유리 카스파리안)의 라이브 공연 모습 (2021년)-빅토르 최의 생전 공연 음성과 나머지 멤버들의 연주로 콘서트가 진행된다.
КИНО 2021 LIVE — Концерт в ЦСКА Арене 15.05.2021(KINO 2021 LIVE - CSKA 아레나 콘서트 05.15.2021)
(빅토르 최의 생전 공연 음성과 나머지 멤버들의 연주로 콘서트가 진행)
키노(KINO) 그룹 알렉산더 티토프, 이고르 티코미로프, 유리 카스파리안 등 옛 멤버 3명은 빅토르 최가 사망한지 3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룹 활동하고 있다.
(빅토르 최의 생전 공연 음성과 나머지 멤버들의 연주로 콘서트가 진행)
Группа "Кино" - Стук. Концерт в Ледовом Дворце. 21.06.2022(그룹 KINO - <노크>. 얼음 궁전에서의 콘서트. 2022년 6월 21일)
(빅토르 최의 생전 공연 음성과 나머지 멤버들의 연주로 콘서트가 진행)
Кино (Мурманск, Ледовый дворец, 03.12.23)(키노(KINO) - 무르만스크 얼음궁전 공연 2023년 12월 3일)
(빅토르 최의 생전 공연 음성과 나머지 멤버들의 연주로 콘서트가 진행)
첫댓글 좋은 글 되시길 바랍니다.
매우 유익한 정보네요. 감사합니다.
빅토르최에 대해서는 전에도 잘 알고 있습니다 ~
당시 소련 젊은 세대들이 공산당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록그룹. 키노의 리더였죠,,,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인 28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일설에는 소련 KGB의 암살테러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사고 직후 키노그룹은 강제 해체되었고요...
여기에 당시 KGB 지역 담당인 푸틴에 의해 직접 주도되었다는 설도 있답니다.
최근 우크라이나 출신 길거리 가수가 빅토르 최의 노래를 러시아어로 부르다가 현지 우크라이나 시민들과 다툼이 있었다.
'러시아어 금지’인 우크라이나서 한국계 소련 가수 ‘빅토르 최’ 노래 불렀더니… 우크라이나 주민들과 길거리 가수와의 충돌에 우크라이나 정부 개입하여 러시아어로 노래한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문화부 공문. 이를 통해 문화부는 빅토르 최 노래를 부르는 게 불법인지에 대해 “러시아 연방 시민이 아닌 빅토르 최의 노래와 작품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공개공연 금지 대상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빅토르 초이에 관련해서 매우 좋은 정보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고려인 러시아가수였던 빅토르초이에 관해 많은 정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더욱 힘내시고 파이팅하시길 바랍니다
수고하세요 😊 😊
Надеюсь, это очень полезная информация о Викторе Цое, лидере великой российской рок-группы КИНО.
Victor Tsoi is a South Korean singer. He is a great Korean singer who ruled Russia. I hope that the day when Koreans rule the world will come soon.
Виктор Цой — южнокорейский певец. Он великий корейский певец, правивший Россией. Я надеюсь, что день, когда корейцы будут править миром, скоро наступит.
K-POP의 1세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