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의 현장을 가다] (13) 1968년 1ㆍ21사태 북악산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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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현장을 가다] (13) 1968년 1ㆍ21사태 북악산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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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현장을 가다] (13) 1968년 1ㆍ21사태 북악산 일대
47년 전 北 특수부대원들과 교전... 등산로 곳곳에 아직도 낯선 철조망
박주희 기자
한국일보 수정: 2015.01.09 20:23 등록: 2015.01.09 15:27
무장공비들 청와대 습격 실패 후
北 가기위해 북악산으로 숨어들어
군경 포위망 좁히자 22일 새벽 총격전
검문 걸려 교전 벌인 자하문 고개엔
현장지휘 중 숨진 최규식 서장 동상
백악마루 가는 길엔 '1ㆍ21 소나무'
선명한 15발 총탄 흔적.
.. 비극 짐작만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에 실패한 북한 정찰국 124군부대 대원들 중 상당수가 자하문고개와 연결된 북악산 능선을 탈주로로 삼았다. 지금은 이길로 한양도성 성벽을 따라 걸을 수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서울 종로구 숙정문을 통과해 한양도성 성벽을 따라 걸으면 근무를 서고 있는 군인과 곳곳에 설치된 철조망이 눈에 띈다. 정해진 등산로를 벗어나면 군인이 제지하고 사진촬영도 정해진 장소에서 일정한 방향으로만 할 수 있는 등 제법 살벌한 분위기도 펼쳐진다. 도심 속 산길과 어울리지 않는 풍경에 품었던 의아함은 50여 분 간의 산행을 이어가면 비로소 풀린다. 북악산 백악마루 방향으로 1㎞쯤 걸으면 15발의 총탄 자국이 새겨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47년 전인 1968년 1월 22일 새벽의 총격전 흔적이다. 백악마루 일대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던 시각 서대문구 홍제동 세검정 바위 부근에서는 한국 군경과 한 사내가 대치 중이었다. “나오면 살려준다. 손 들고 나와라.” 확성기의 외침이 끝나자 바위 틈새에서 스물여섯 살 난 사내가 두 손을 들고 나왔다. 한 손에 수류탄이 들려 있었다. 자폭을 할까 고민하던 사내는 이내 군경에 투항했다. 곧바로 효자동 육군방첩부대(방첩대)로 이송됐다. 그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 부대 소속 김신조 소위였다. “청와대 까고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다.” 당일 저녁 방첩대 식당에서 기자들을 향해 던진 그의 단호한 한 문장은 국민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24군 부대 31명 모두 남한을 왔다 갔다 했던 사람들이에요. 이미 남파훈련을 꾸준히 받았던 최정예 특수부대라 청와대 습격 훈련은 정작 보름 남짓 밖에 안 받았어요.”
김신조(73) 목사는 당시 훈련과정을 이렇게 회상했다. “개성 송악산에서 청와대까지 300고지가 되는데 독도법(지도를 보는 법)을 반복 훈련했어요. 매일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악구보를 하면서 체력도 키웠습니다.”
68년 1월 13일 명령이 하달됐다.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에게서 청와대 습격 작전지시를 받은 124군 부대원들은 18일 0시를 기해 휴전선을 넘었다. 서부전선에서 하룻밤 숙영을 한 부대원들은 그날 밤 영하 10도의 혹한으로 꽁꽁 얼어붙은 임진강 얼음판을 걸어서 건넜다. 만 하루 동안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한의 산 속으로 이동했지만 국군의 검문은 없었다. 김 목사는 “당시 한국군의 경계는 상당히 허술했다”며 “그대로 청와대까지 쭉 내려가면 작전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밤에 이동하고 낮에 숨는다”는 원칙으로 파주 법원리 야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124군 부대원들에게 19일 오후 변수가 생겼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가던 우희제ㆍ경제ㆍ철제ㆍ성제씨 형제와 맞닥뜨렸다. 26사단 마크가 달린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AK소총 등 북한군 무기를 들고 있다는 점이 내심 걸렸다. 나무꾼 형제를 불러 세운 공비들은 남한에 대해 이것저것 물은 뒤 그들의 생사를 결정지을 투표를 했다. 김 목사는 “교본에는 작전 도중 만나는 사람은 무조건 죽이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원들 중 대다수가 ‘죽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반대했습니다. 시체를 묻기 위해 꽁꽁 언 땅을 파는 것도 문제라 결국 살려두자는 쪽으로 투표결과가 나왔어요.” 해가 지고 나무꾼 형제를 풀어준 부대원들은 다시 청와대를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신고하면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협박을 했지만 124군 부대원들은 내심 나무꾼 형제를 살려둔 게 마음에 걸렸다. 평균시속 12㎞의 급속 산악행군이 시작됐다. 법원리를 떠난 부대원들은 미타산-앵무봉-노고산을 지나 20일 새벽 북한산 진관사계곡에 도착했다. 개인무기 2정, 실탄 350발, 수류탄 14발 등 20㎏이 넘는 군장을 메고도 놀라운 속도로 행군을 펼친 것이다.
124군 부대원들이 법원리를 떠난 19일 밤 9시쯤 우씨 형제들은 창현파출소에 간첩 신고를 했다. 대간첩 작전 대책본부가 설치될 합동참모본부에 정보가 전달된 건 세 시간이 지난 20일 0시 무렵이었다. 20일 오후 2시쯤 6군단 예하 3개 사단과 김재규 중장의 6관구 병력이 동원돼 전방에서부터 서울 외곽까지 수십 겹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그 시각 124군 부대원들은 이미 서울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북한산 사모바위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남파 공비들이 다 지나간 자리에 포위망을 구축한 셈이었다. 당시 국군의 평균 행군속도가 시속 4~5㎞ 수준이었기 때문에 북한군의 이동속도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북한산 승가사 인근에서 1박을 한 124군 부대원들은 21일 밤 특무대 복장으로 위장하고 세검정 도로에 들어섰다. 이때 부대원들 사이에 약간의 의견충돌이 있었다. 김 목사는 “세검정 도로에 들어서자마자 버스 종점이 보였는데, 그 버스를 타면 자하문고개를 지나 청와대에 갈 수 있다고 판단해 총조장에게 버스를 타자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총조장이 도보로 청와대에 들어가자고 말해 그 순간 ‘이 임무는 실패다’고 직감했습니다.” 김 목사는 그 순간부터 이미 ‘교전이 벌어지면 바로 도망간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김 목사의 직감대로 도보 이동이 결국 작전 실패를 불러왔다. 밤 10시쯤 자하문 고개에 이른 부대원들을 임시 검문소에서 근무 중이던 종로경찰서 소속 정종수, 박태안 형사가 막아 섰다. 신분증을 요구하는 두 형사에게 124군 부대원들은 방첩대원이라고 둘러댔지만 두 형사는 최규식 당시 종로경찰서장에게 “불심검문에 응하지 않는 괴한들이 나타났다”고 무전 보고를 한 뒤 대열의 맨 뒤에 따라 붙었다. 곧이어 지프 한 대가 달려오고 최 서장이 권총을 뽑아 들고 이들의 이동을 막았다.
북악산 백악마루 인근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총알 자국이 남은 소나무.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신분을 둘러싸고 실랑이를 벌이던 중 최 서장 뒤로 시내버스 한 대가 멈춰 섰다. 124군 부대원들은 이 버스를 국군의 지원병력으로 착각했다. 곧이어 또 한 대의 버스가 이들 앞에서 급정거를 하자 총격전이 시작됐다. 최 서장과 말다툼을 하던 124군 부대원 중 한 명이 최 서장의 가슴을 향해 연발 사격을 가했다. 이때가 밤 10시 15분쯤이었다. 당시 서른 여섯 살의 최규식 서장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고, 버스에 타고 있던 청운중학교 3학년 김형기군과 회사원 홍유경씨도 124군 부대원들이 버스를 향해 던진 수류탄 파편을 맞아 숨졌다. 이 외에도 이 날밤 숨진 희생자는 7명, 부상자는 3명이나 된다. 김 목사는 “당시 총격전은 불과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벌어졌어요. 그 짧은 순간에 소중한 생명이 사라진 거예요.” 이날 총격전으로 사망한 최 서장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자하문 고개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양도성 성벽을 따라 걸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위치다. 기자가 현장을 방문한 8일에도 시민 20여명이 산행에 앞서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자하문 고개 총격전 이후 124군 부대원들은 작전이 실패했다고 판단해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북한산으로 일부는 북악산으로 올라갔다. 북한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든 북쪽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김 목사는 생각이 달랐다. 김 목사는 “북악산이나 북한산으로 올라갈 경우 동료들과 몰려있게 된다고 생각해 아예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어요. 경복고를 지나서 인왕산으로 들어갔죠. 그래서 교전 직후에 제 쪽으로는 군인들이 포위망을 펴지 않았던 거예요.”
밤 10시 40분경 세검정길과 북악산 일대에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30대대 병력이 투입됐다. 총격전 끝에 22일 오전 8시쯤 북악산에서 3명, 오전 11시쯤 1명의 124군 부대원이 사살됐다. 생포됐다가 무장해제 중 수류탄 폭발로 죽은 것으로 알려진 김춘식까지 더해 총 5명의 부대원이 죽은 것이다. 이후 31일까지 군경 합동수색을 전개한 결과 124군부대원은 총 28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북으로 돌아갔다. 당시 북으로 도망갔던 박재경은 북한 인민군 대장 신분으로 2000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 목사는 1ㆍ21사태에 대해 회환과 안타까운 감정을 쏟아냈다. “남북한 희생자들 모두 20, 30대의 젊은이들이었는데 얼마나 아까운 목숨들인가요. 그 뒤 47년간 한국에서 사죄와 보은의 감정으로 살면서 항상 그날의 희생자들을 생각해요.”
김신조 "정부에 고마움과 서운함 아직도 공존"
총 쏘지 않은 것 참작 반공국시 주제로 전국 대중 강연에 동원
김신조 간첩단 침투 1.21사태, 초청 강연
이념대결이 치열하던 1960년대, 그것도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에 무장공비를 살려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한국 정치인도 좌익세력으로 몰아 사법살인을 일삼던 정권 아래서 김신조 목사는 어떻게 사형을 면하고 살아 남았을까.
김 목사가 살아남은 결정적 이유는 그가 1ㆍ21사태 때 단 한발의 총알도 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당시 인왕산 바윗돌 사이에 무기를 숨긴 뒤 자폭용 수류탄 하나만 들고 홍제동 고개로 빠져 나왔다”며 “숨겨둔 무기의 총신에서 탄약냄새가 나지 않았고 총에 총알이 그대로 장전돼 있던 점 등이 수사과정에서 확인돼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형을 면했다고 해서 무장공비가 곧바로 민간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는 1968년 3월 전향을 결심했다. 김 목사는 “수사관들이 남대문 시장, 동대문 시장 등을 보여주며 ‘한국에서 열심히 장사하면 저들처럼 잘 살 수 있다’고 설득했고, 나도 서울시민들이 평온한 표정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고 밝혔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회장과의 만남도 전향을 결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김 목사는 68년 2월 수사를 받던 도중 이 회장의 사무실에서 이 회장과 대화하고 함께 밥을 먹었다. 그는 “북한에서 ‘남조선 대자본가 이병철은 노동자를 착취해서 몸무게가 120㎏이 나간다’고 교육받았는데 실제로 만나본 이 회장은 호리호리한 모습이었다”며 “마음 속에서 ‘100㎏이 넘는 김일성이 오히려 인민의 등을 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권의 정치적 노림수도 한 몫 했다. 김 목사는 “3선 개헌, 10월 유신을 앞두고 중앙정보부가 나에게 중ㆍ고ㆍ대학교, 회사, 군ㆍ시청 등을 돌며 반공국시를 주제로 오전, 오후 각 한 번씩 대중강연을 시켰다”고 말했다.
강연을 하며 사회생활을 이어갔지만 무장공비라는 꼬리표는 늘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1970년 결혼한 아내에게도 ‘공비 마누라’ 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1ㆍ21사태를 배우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름도 김재현으로 바꿨다. 후회와 회환으로 자살까지 생각했던 김 목사를 잡아준 건 신앙의 힘이었다. 1980년 서울 신길동 서울성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는 1991년 년 2월 서울 침례신학대를 졸업한 뒤 한국에 건너온 날을 기억하기 위해 1997년 1월21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40여년이 훌쩍 넘었지만 당시 정부에 느꼈던 고마움과 서운함은 아직도 김씨의 마음에 공존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줬다는 고마운 마음이 크다”면서도 “당시 강사비로 받은 돈을 한푼 두푼 모아 서울 정릉동에 사글세 방을 얻어 살았는데 정부에서는 ‘나라에서 집을 줬다’고 말하라고 시켰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돌이켜보면 정권유지를 위해 나를 이용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출처] [현대사의 현장을 가다] (13) 1968년 1ㆍ21사태 북악산 일대|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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