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을 보면서 이토록 문을 뚫어져라 바라본 적은 없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26호 소목장 심용식 씨의 공방이자 삶터인 ‘청원산방’.
전통 창호 장인인 그의 집은 문에서 시작해 문으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서단의 거목 초정 권창윤 선생이 쓴 ‘계수헌’이라는 현판 아래의 대청마루 문은 ‘숫대살만살문’이다.
옛날에 셈을 할 때 쓰던 막대기를 늘어놓은 모양으로 짠 문살은 간격이 촘촘해 아주 견고하며
반복되는 마름모무늬가 현대적 감각을 선사한다.
2. 둥근 달을 닮은 ‘달아자살문’을 열면 나타나는 주방의 창은 ‘용用’ 자를 바탕으로 짠 ‘용자살문’이다.
“사실 우리 집이 아주 화려하긴 해요.
어떤 때는 너무 욕심을 부렸나 싶기도 하고….” 종로구 계동 좁은 골목길에 숨어 있는 소목장 심용식 씨의 집.
아늑한 ㄷ자 한옥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화가가 캔버스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의 그림을 응시하는 것과 다름 없다.
대목이 한옥을 짓는다면 소목은 한옥의 문과 가구를 제작하는 사람.
소목인 심용식 씨의 시선은 한옥을 아름답게 감싼 캔버스, 그러니까 창호에 머물러 있다.
1. 오랜 시간 함께해온 연장이 가득한 작업실에 선 무형문화재 소목장 심용식 씨.
한옥의 팔할은 창호다
“이 집에 설치한 창호는 1백80여 개, 종류는 30여 가지에 달하죠.
처음 개조할 당시에는 분기별로 창호를 바꿔보리라 다짐했는데 쉽지 않은 일이네요.
” 지난 2007년, 1년간의 개조 작업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춘 청원산방淸圓山房.
심용식 씨가 이 집을 보수할 당시 욕심을 부린 부분은 당연 창호다.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과 고택을 돌아다니며 창호란 창호는 모두 섭렵한 장인의 진지한 호기심이란 창호가 곧 벽이요,
벽이 곧 창호인 한옥이다 보니 다채로운 문살의 향연이 펼쳐지는 건 당연한 수순.
청원산방은 크게 세 가지 스타일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궁궐과 사찰 그리고 민가의 공존.
다소 파격적인 믹스매치였지만 다행히 이는 전통 창호와 한옥을 온몸으로 체득한 장인의 손길과 심미안을 통해
유일무이한 한옥으로 거듭났다.
“안방은 빛을 가려주는 ‘흑창’까지 설치해 사대부 집처럼, 주방은 둥그런 ‘달아자살문’과 꽃문을 달아
궁궐 느낌을 만들었습니다.
서재는 글씨를 새겨 넣은 ‘서각장지문’을 달았죠. 사찰의 느낌은 마당에서 바라본 안방 창문을 통해 감지할 수 있죠.
안방 제일 바깥 창은 절에서 사용하는 두 가지 종류의 꽃살문을 매치했죠.”
심용식 씨의 설명을 따라 살펴보니 한옥 인테리어의 시작과 끝은 문이라는 게 확실한 듯했다.
기본 구조는 같을진대 문의 형태와 창살의 모양에 따라 확연히 다른 분위기로 변신하는 공간.
한곳에서 대표적인 전통 공간의 특징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도 놀랍고,
이 모든 것이 천연덕스럽게 어우러지는 것 또한 신기하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이 한옥이 저 한옥 같은’ 얕은 심미안을 지닌 범인凡人의 눈이 창호를 보며
그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기 시작했으니!
감히 말하건대, 한옥은 창호를 아는 만큼 보이는 게 분명하다.
2. 내부 문이 화려하면 바깥문은 간결하게 매치하는 이중 창호 연출법.
꽃완자문의 바깥문은 가장 대중적인 직선형 세살문으로 짝지었다.
3. 휜 문지방을 살려 문 아랫부분을 접히도록 만든 접이세살문.
해남 대흥사에 있는 것을 재현했다.
4. 각기 다른 문을 설치해 화려한 분위가 감도는 한옥.
1. 사랑방과 서재로 두루 사용하는 두 공간 사이에 가벽 역할의 서각장지문을 설치했다.
서각은 심용식 씨가 서예 작품을 탁본한 후 나무에 조각한 것이다.
바닥은 붉은 황토로 물들인 삼베 장판과 원목 마루를 깔았다.
2. 대청마루 안쪽은 완자교살문을 설치했다.
그림 족자처럼 보이는 것 또한 창문으로, 이를 가운데로 밀면 빛을 차단하는 흑창이 되고, 병풍을 친 효과가 난다.
창과 벽이 되는 문, 창호의 이중 미학
초등학교 시절, 학교 앞 목공소에서 나무를 만지며 목수의 꿈을 꾸었다는 심용식 씨.
열일곱 청년이 되어 목수로 입문할 당시 그는 대목의 도제가 되어 한옥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묘하게도 마음이 간 것은 창호.
한옥을 짓고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도 문살이요,
창호를 만들 때 손끝으로 전해오는 섬세한 나무의 촉감은 자신이 목수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제가 문에 미쳐서 그런지 몰라도, 한옥의 전부는 창호 같아요.
기둥이 짧아 답답해 보이는 한옥도, 단아하고 지루해 보이는 집도 창호를 달리하면 금세 다른 공간이 되지요.
” 해인사 비로전, 창경궁 경춘전, 창덕궁 인정전 등 문화재를 포함해 일반 한옥까지 무려 5백여 채에 달하는
전통 가옥을 만들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한옥은 곧 창호라는 것이다.
특히 한옥을 짓고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하는 사람에게 창호를 교체하는 작업을 통해
마음에 드는 집으로 만들어줄 때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청원산방을 감싼 창호는 반세기를 바라보는 소목장 심미안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현재 그는 이 집이 살아 있는 창호 박물관이 되기를 바라면서 외부에 공개하고 있다.
“방문객들이 가장 신기해하는 문은 둥근 ‘달아자살문’이에요.
궁궐에서만 사용하던 것이라 민가에서는 볼 수 없는 문이죠.”
동산 위에 보름달이 뜬 모양 같다 해서 이름 앞에 ‘달’이 붙었고, 문짝 살대가 한자 ‘아亞’ 모양이라 해서
‘아자살’이라 불리는 달아자살문은 보름달이 둥실 떠 있는 고즈넉한 자연의 정취를 전한다.
한편 주방과 서재, 사랑방이 일자로 탁 트인 가운데에는 마치 병풍같이서예 작품과
사군자 그림을 배접한 문이 눈에 띈다.
이는 ‘서각장 자문’으로, 큰 방을 다양하게 나눠 쓰기 위한 ‘가벽’의 용도를 겸한다.
그리고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 앞·뒷 면이 서로 다른 모양이라는 것.
즉, 문을 다 닫으면 한쪽 방은 서예 작품, 다른 한쪽은 사군자 병풍을 두른 듯하다.
그러고 보니 한옥이 창호만으로 충분하다 자신할 수 있는 이유 또한 이런 것 때문 아닐까.
문짝의 표면과 이면을 달리 표현하고, 이중 삼중으로 설치할 때는 안과 밖을 서로 다른 창호로 매치할 수 있으며
문짝 조합 또한 각기 달리할 수 있다는 것.
이와 맥을 같이하는 청원산방의 창호는 그래서 어느 하나 아름다운 ‘반전’이 없는 것이 없다.
열고 닫았을 때 새록새록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는 묘미란!
3. 대청마루를 관통해 보이는 안방 문은 사각불발기문으로, 문짝 중앙에 불발기창을 낸 뒤 이 부분만 창호지를 바르고
창의 위아래는 벽지를 발라 빛이 투과하지 못하도록 만든 문이다.
불발기 창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드는 눈높이에 배치한다.
4. 문살을 주제로 가구도 만드는 심용식 씨는 육각형이 반복되는,
거북이 등을 닮은 귀갑살문을 모티프로 책장을 만들었다.
시대를 받아들이는 한옥, 창호도 진화한다
“이 집에 있는 모든 요소는 문화재로 만든 겁니다.
문고리, 바닥, 현판, 한지, 꽃담 모두 전통을 계승하는 장인들이 제작한 것이죠.”
지난 2006년 무형문화재가 된 심용식 씨는 작은 부분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신세’가 되면서
전통에 대한 애착이 더욱 커졌다.
그래서 문고리 하나도 ‘진짜’가 아니면 달 수 없었다.
그 결과 ‘오리지널 중에서도 최고급 정석’이 모인 한옥이 바로 이곳, 청원산방인 셈이다.
그런데 이 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설명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고 만다.
콩기름 바른 누런 종이 장판을 기대했던 안방은 붉은색 장판이 깔렸고 손톱이 스치면 뚫어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열고 닫았던 문은 창호지를 닮은 특수한 종이며,
밖의 풍경을 감상하도록 만든 ‘꽃완자문’은 투명한 유리로 마감한 것이니….
전통을 고수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묻고 싶다.
“한옥처럼 억울한 공간이 또 있을까 싶어요.
멋지다 감탄하지만 살기 불편하다는 오명을 벗어날 수 없으니 말이죠.
그래서 이 집에는 지금 생활에 맞는 전통을 반영했습니다.
” 한옥이 불편하다는 대목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창호.
바람 숭숭 들어오고, 철마다 찢어지거나 낡은 창호지를 새로 붙여야 하는 관리 대상.
하지만 이는 한옥의 속사정, 나아가 공시성을 무시했을 때의 관점이다.
“원래 제대로 만든 한옥은 오중창이에요.
특히 안방과 같은 곳에서는 ‘흑창’이라고 해서 제일 마지막으로 닫는 문이 있는데,
병풍같은 형태로 빛과 바람을 완전히 차단하죠.
만약 한옥이 모두 이런 문을 갖고 있었다면 그렇게 춥지 않았을 테고, 유리창이나 물에 젖지 않는 창호지가 있었다면
종이를 새로 붙이는 수고도 없었겠지요.”
한옥에 대한 누명을 벗기고자 노력한 결과, 청원산방 문살은 먼지가 끼지 않아 관리하기 편하고,
겨울철 외풍 없는 아랫목에서 단잠을 자는 호사도 누린다.
“삼베에 황토를 물들인 장판은 사찰에서나 사용하는 것인데, 요즘은 한옥에 시공하기 좋게 개발하고 있지요.
방수와 내구성 뛰어난 특수 창호지도 현대에 맞게 발전한 형태고요.
이런 모든 것은 전통을 고수하는 전문가들이 현재 시간에 맞춘 것이기에 전통의 맥을 같이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