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3】
왜구의 본격적인 침략 시기는 중국에서는 원과 명나라, 한반도에서는 고려와 조선의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였고 일본에서도 분열과 혼란으로 유민이 대량으로 발생하고 식량기근이 극심한 때였다. 국제 정치 질서 붕괴, 자국 내 기근, 분열이 왜구 등장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당시의 일본열도는 국내적으로 막부가 실권을 잃고 수십 년 계속된 사회적 혼란과 불안 속에서 백성들은 기근에 시달렸다. 더욱이 13세기의 원과 고려의 정벌로 일본 내 무사들과 백성들의 생활은 경제적인 파국에 빠지게 된다.
특히 막부의 통제력이 약하고 정벌의 가장 전면에 위치했던 일본 서부지방 규슈와 인근의 섬 지역 사람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전쟁에 동원된 중소 무사나 물자를 대던 농민들과 어민들이 주로 살았던 대마도와 松浦 등 연안 일대의 생활이 더 어려웠다.
이후에 ‘三島倭寇’라는 이름에 나타나 있듯 壹岐ㆍ對馬島ㆍ松浦 출신 어부와 농민들은 어업과 농사를 할 수 없게 되거나 양식이 떨어지면, 부대를 조직하고 해적이 되었다.
적게는 1~3척, 10인 정도의 집단에서 크게는 약 400척, 3000인의 대집단이 꾸려져 약탈의 항해를 떠났다.
일본의 고전문학 ‘太平記’는 왜구의 발흥 원인에 대해서 “40여 년 간 본조(일본)는 크게 혼란하였고 외국(원과 고려)도 잠시도 조용하지 않았다”면서 일본과 원나라 고려의 정치적 혼란 상황에서 원인을 찾은 뒤 “일본도 남북조의 동란으로 산적과 해적이 급증하였고 결국 이 도적들 일당이 수천 척의 배를 모아 원나라와 고려의 해안가를 습격하고 중국의 명주와 복주의 재물을 탈취하고 관청과 사원을 불태웠다”고 기록한다.
아무튼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바다 건너 바깥으로 눈을 돌리게 된 왜인들의 눈길이 꽂힌 곳이 가까운 한반도 연안이고 중국의 연안이었다.
고기를 잡던 배들은 곧바로 노략선으로 둔갑을 하고 어부와 농민들은 몰락한 중소 무사계급의 조련하에 잔인한 무력집단으로 변신하였다.
배와 무기를 갖춘 아귀와 같은 배고픈 집단의 습격은 주변국 입장에서는 재앙이었다.
왜구는 초기에는 연안 국가의 식량창고를 습격하여 약탈하였지만 경비가 강화되고 반격이 거세지자 민가를 습격하고 문화재도 마구잡이로 약탈했다.
노약자와 늙은 여자들은 죽이고 젊은 여성들과 건강한 남자들을 닥치는대로 납치해서 농업노동력으로 충당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끌고 가서 노예로 팔기까지 하였다.
왜구의 규모는 몇 척 배로 이루어진 소규모부터 수백 척을 거느린 대선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3~5월경 규슈를 출발, 오키나와를 거쳐 중국 연안으로 쳐들어가거나 한반도 남부 지역을 약탈하는 패턴을 반복한 직업적 무법자들이었다.
동아시아 연안 가운데 한반도에서는 연안지역과 조세를 거두어 개성과 한성으로 올라가는 공선 등이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피해가 컸던 곳은 주로 산동반도와 연안 일대였으며, 여기서도 미곡을 약탈하고 사람을 납치했다.
불시에 한반도 어느 지역에 소규모로 때로는 대규모로 침략해 추격해오면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가는 왜구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다.
또한 100척에서 500척까지 이르는 선단으로 한꺼번에 밀려와 배에서 내린 뒤 말을 타고 기습적으로 연안 마을을 휩쓸고 내륙 깊숙이 기동성 있게 이동하면서 보병과 기병의 합동 작전을 펼친 이들의 전술은 고도의 훈련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들은 도적떼가 아닌 ‘정예병’들이었다.
김천에서 상주로 가는 왜유령, 왜넘이재는 고려 말 왜구가 넘었다하여 생긴 지명으로 왜구들이 내륙지역에 거점을 삼고 아예 정주하는 형태가 남긴 씁쓸한 유산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말 우왕 3년의 왜구 침입 때는 왜구들이 강화로부터 바닷가 고을을 모두 점령하고, 우리 전함 50여 척을 빼앗고 수원, 경양(현 직산), 양성, 안성까지 이르러 이 일대를 싹쓸이했다고 한다. 이때 수원부사 박승직은 왜구 침입의 소식을 듣고 곧바로 적을 쫓아 안성까지 왔으나, 오히려 왜구들에게 포위당하는 바람에 군사들은 대부분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히고 박 부사는 단기로 겨우 포위망을 뚫고 몸만 빠져 나와 목숨을 건졌다. 또한 같은 해에 왜적 1백여 기가 남양,안성,종덕을 침범하고, 또 강화를 침범하여 부사 김인귀가 살해되고, 군사 1천여 명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왜구의 전력과 세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 땅에 들어와 살다시피한 왜구들은 대담하게도 아예 김해, 안동을 거점으로 삼을 정도였다. 남해 해운의 중심 김해, 거제도는 왜가 한반도로 들어오는 통로였고, 안동은 한양으로 입성하는 주요 거점이었다.고려 관군은 이들을 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왜구들의 등쌀이 얼마나 심했던지 고려 조정에서는 “개경의 안전이 위협받으므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자”는 논의가 일기도 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