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평성대 그리고 음모 "후후……, 이 녀석 좀 보게?" 남궁호는 자신을 쏙 빼어 닮은 아이를 두 손으로 안고 눈을 맞추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남궁진(南宮震)이라 이름 붙인 아이는 희수약녀 손약빙이 낳은 아이였다. 계절의 변화가 없는 황과수(黃果樹)에서 지낸 일 년은 남궁호에게 있어 참으로 꿈결 같은 나날들이었다. 그 사이 그의 여인들은 각기 하나씩의 아이를 낳아 이제 그에게는 모두 아홉이나 되는 자녀가 생겼다. '정마장(征魔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이곳에는 아이들이 늘어난 것 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대명제국 제삼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의 장중주였던 희란공주(囍蘭公主) 주영령(朱瑛玲). 중원 상권을 한손에 거머쥐고 있는 상황(商皇)이자 금겁장주인 개세거부(蓋世巨富) 용철수(龍 隨)의 장중보옥인 상계일미(商界一美) 용문경(龍雯瓊). 당당히 강호를 십분했던 강호십정(江湖十鼎) 중 하나이자 여인들만의 문파인 만화옥녀보(萬花玉女堡)의 보주인 산화옥녀(散花玉女) 취소군(翠小君). 천하제일 도박장인 화련득전장(華蓮得錢場) 장주이자 북해빙궁(北海氷宮) 공주였던 요지빙녀(瑤池氷女) 금기향(金琦香). 화산파의 후기지수인 화산칠수(華山七秀) 가운데 막내이자 남궁호의 어릴 적 소꿉친구였던 천향소화(天香小花) 진교연(晋嬌燕). 금겁장의 사대총관 가운데 하나인 빙화(氷花) 황보혜(皇甫惠). 하오밀문(下午密門) 문주인 천심투(天心偸)의 손녀이자 소문주인 묘랑(猫浪) 유옥교(兪玉嬌). 과거 천하를 혈겁으로 몰아넣으려던 마마혈보(魔魔血堡) 보주 음혈마신(飮血魔神)의 제자이자 강호오기(江湖五奇) 중 고금제일 살인귀 수라혈귀(修羅血鬼) 노기심(盧琦尋)의 진전인 일만살인법(一萬殺人法)을 이은 귀향요정(鬼香妖精) 도옥진(淘玉珍). 남궁호에게 첫 정을 주었던 희수약녀( 水藥女) 손약빙(孫葯氷).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청백지신을 유지하고 있는 강호십정 가운데 하나인 경천문집장(驚天文集莊) 장주이자 현재 승상(丞相)인 무답대학사(無答大學士) 기치우(奇峙瑀)의 손녀 만뇌서시(萬腦西施) 기연빙(奇燕 )이 현재 정마장의 안주인들이었다. 이렇게 열 명에 달하는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은 한결같은 그의 사랑을 받으며 연일 행복한 교소(嬌笑)를 터뜨리고 있었다. 단 만뇌서시만은 침울한 표정으로 있곤 하였는데, 그것은 고질인 구음절맥폐맥협심증(九陰絶脈閉脈狹心症)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데 가장 중요한 약재인 축년영지(畜年靈芝)가 정마장에 무진장 있기에 그녀의 생명은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고질을 완치시키지는 못하기에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울한 것이다. 천하제일의 의술을 지닌 남궁호조차 그녀가 이러한 고질로 우울해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구음절맥이나 폐맥협심증 중 한 가지만 걸려 있었다면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나, 그 두 가지가 한꺼번에 걸려 있었기에 겉으로 전혀 표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청백지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남궁호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그녀가 처녀의 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남궁호가 그녀의 규방에 들를 때에는 고담준론을 나누거나 반상대담(盤上對談)을 나눌 뿐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그의 접근을 허락지 않기 때문이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으로 그와 부부의 연을 맺어 만일 아이라도 태어나게 된다면 하는 생각이 들어 한사코 거부하였던 것이다. 정마장의 내원에는 모두 열한 채의 고루거각들이 지어져 있었다. 각기 기린각(麒麟閣), 천향소축(天香小築) 등의 명칭을 지닌 이 전각들은 각기 한 여인이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녀들에게는 만화옥녀보에서 선발한 각기 네 명의 아리따운 시비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머지 한 개의 소축은 장차 자라날 아이들을 훈육하기 위하여 천하각지에서 구해 온 서책들을 정리해 놓은 서실이었다. 서실의 지하에는 조용한 가운데 무공을 참오할 수 있도록 연공관(練功關)이 여러 개 준비되어 있었다. 전각들의 중앙은 마치 세외선경(世外仙境) 같은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되어 운치를 더해 가고 있었다. 정원에는 옥연정(玉淵井)이라 이름 붙인 연못이 있으며, 인공적으로 만든 섬에는 휴정(休停)이라 이름 붙인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이곳은 간혹 정마장 내원의 모든 식솔들이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내곤 하는 곳이다. 내원 뒤쪽에는 무공을 연마할 수 있도록 연무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시비들이 생활하는 전각이 따로 지어져 있었으며,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준비하는 곳들도 있었다. 정마장의 살림을 맡은 총관은 태원부에서 낭인들의 대부를 맡았던 용화서생(勇華書生) 단리운(段里雲)이 맡고 있었으며, 혹시 있을지 모르는 외부의 침입을 저지할 경비 담당 총관은 상황호천대(商皇護天隊) 특급시위였던 천행쾌검(千行快劍) 마진충(馬晋忠)이 맡고 있었다. 그 밖에도 이제는 해산된 파잔대(破殘隊) 대주였던 은자천수(隱者天首) 부의탁(扶宜濯)은 자라날 아이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기 위한 무공교두(武功敎頭)로 초빙되어 있었다. 정마장 안살림은 만화옥녀보 총관이던 다정선자(多情仙子) 방인영(方璘瑛)이 맡고 있었다. 이들은 정마사총관으로 불렸다. 전에 있던 촌락에는 상황이 파견한 일천 상황호천대와 사백 파잔대, 그리고 본시 태원부 낭인이었던 이백오십 낭인들과 이천 만화옥녀보의 여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누가 와서 보더라도 평범한 양민처럼 농사를 짓거나 상행위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이뤄 아마 중원에서 가장 평화로운 촌락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주인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서로 반목하거나 질시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황과수에는 중원의 다른 촌락처럼 기루(妓樓)도 있고, 객잔(客棧)도 있으며, 청루(靑樓)와 홍루(紅樓)도 있다. 또한 도박장도 있다. 따라서 누가 봐도 평범한 촌락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남궁호가 황과수로 돌아와 이곳을 재건하면서 황과수 주변에 엄청난 절진을 설치해 두었다. 현재는 전혀 진세가 발동되지 않으나 유사시에 돌 몇 개를 움직여 놓으면 즉시 그 어떤 것들도 난입할 수 없는 철옹성으로 변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 진세는 만일 중원에 또다시 금강수라마강시 같은 마물이 나타날 것을 우려하여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황과수는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나 실은 무림의 그 어떤 방파보다도 강력한 힘을 지닌 공동체이며,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이었다. 그러나 세인들은 남궁호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비록 황제와 개세거부, 그리고 하오밀문주가 알고 있기는 하나 그들은 결코 이러한 사실을 발설하지 않기로 단단히 약조를 해 두었기에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한바탕 겁난의 손톱이 할퀴고 간 장강 이남은 무무색황(無武色皇) 남궁호와 개세거부가 내놓은 재원으로 한창 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장강 이북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촌락을 이루고 생활의 터전을 닦고 있었던 것이다. 장강 이남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겐 각기 은자 오천 냥이란 거금이 주어졌기에 장강 이북에서 곤궁하게 살던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안고 이주하였기에 어디에서건 활기찬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림 역시 엄청난 겁화로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구파일방만은 별다른 손실을 보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많은 손실을 본 철기보는 다시 무적철기병(無敵鐵騎兵)들을 훈련시키느라 여념이 없는지 잠잠한 모습이었다. 강호의 마도 문파이던 귀수혈사단과 마마혈보, 잔마유령단과 호련백마장, 그리고 왜인들의 집단이던 사일검보가 사라진 현재 강호에는 수없이 많은 방파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구파일방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구파일방은 오랜 세월 동안 강호십정 때문에 별다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강호의 일에 별로 상관 않는 경천문집장이나 금겁장, 그리고 이제는 활동을 하지 않는 만화옥녀보와 다시 대흥안령산맥 속으로 사라진 태극은하궁이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자 예전의 영화를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 동안 늘 어둠 속에서만 활동하던 하오밀문이 더 이상 어둠 속에 있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비록 소매치기나 양상군자 등의 집단이지만 현재 하오밀문주를 맡고 있는 천심투의 손녀인 묘랑이 무무색황 남궁호의 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과거와는 달리 무림의 한 문파로 당당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다시 말해, 강호는 구파일방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마도나 사도를 표방하는 방파들은 꼬리를 내리고 어둠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천하가 다시 태평성대를 맞이하자 산 속으로 숨어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 돌아왔고, 많은 기인이사들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강호에서는 무무색황 남궁호를 천하제일인이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비록 그에게 내공이 없다 하나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그에게 적대감을 표하거나 덤벼들 수 없기에 그러는 것이다. 세인들이 천사쌍성(天賜雙聖)이라 부르는 귀향요정과 묘랑의 무공이 현재 강호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마마혈보를 치기 위하여 운강석굴에서 딱 한 번 보여 준 그녀들의 무위는 구파일방의 장문인들보다 훨씬 강하면 강했지, 결코 아래는 아니었다. 그런 그녀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남궁호야말로 천하제일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말에는 그 어느 누구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인들은 천하의 재건을 위하여 엄청난 재화를 푼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남궁호는 천하인들의 민심을 얻은 것이다. 그런 그를 찾아 보은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종적을 찾았으나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설마 그가 오지인 황과수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 * * "아미타불……, 이 모든 것이 무무색황의 덕이오이다." 무림의 태산북두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숭산 소림사 방장실에서 창노한 음성이 들려 나왔다. "후후……. 무량수불, 본파에서도 그것은 인정하고 있소이다." 승려의 방에서 웬 도호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그곳엔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바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었다. 소림사 장문방장 영공선사(靈空禪師), 무당파(武當派) 운학진인(雲鶴眞人), 개방( 幇) 무취신개(無臭神 ), 곤륜파(崑崙派) 조화옹(造化翁), 화산파(華山派) 열혈신창(熱血神槍) 두진악(杜秦岳), 청성파(靑城派) 단천일섬(斷天一閃) 간연호(幹椽豪), 아미파(峨嵋派) 구인사태(救仁師太), 점창파(點蒼派) 현현수사(玄玄秀士), 공동파( 派) 구룡검호(九龍劍豪), 종남파(宗南派) 천현신도(天現神刀)가 그들이었다. "헬헬……, 아마 그 녀석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여기에 이렇게 편안히 앉아 있는 일도 없었을 것이오." 무취신개가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쑤시면 말하자, 구인사태가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맞아요! 그 덕분에 우리 구파일방이 다시 옛 영화를 되찾은 것 같아요." 구인사태는 전에 잔마유령단에게 많은 제자들을 잃었었으나 남궁호가 이끄는 군웅들이 그들을 전멸시켰기에 호의적이었다. "맞소! 무무색황, 그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휴우! 그 다음은 말하기 싫소이다." 열혈신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닫았다. 그는 만일 남궁호가 없었다면 지금쯤 구파일방이 모두 박살이 나서 사라졌거나, 아니면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음을 말하려 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 덕분에 호천대(護天隊)가 모든 연공을 마칠 수 있게 되었소이다. 이제 노화순청(爐火純淸)의 경지에 이르도록 연마만 계속하면 되게 되었소이다. 장문인들 모두가 수고를 아끼지 않은 덕이오이다."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조화옹이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였다. 과거 구파일방에서는 다가올 겁난을 예견하고 각 파에서 가장 무공에 자질이 높은 백 명씩의 제자들을 선발하여 이곳 숭산으로 보낸 바 있었다. 그들은 각 파의 장문인들로부터 직접 각 파의 비전절기를 아낌 없이 전수받을 수 있었다. 이제 호천대가 만들어진 지 삼 년 만에 그들은 구파일방의 비전절기들을 모두 익혔다. 그들은 지옥과 같은 고된 수련을 겪었기에 이제는 예전에 비하여 괄목상대한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아미타불……, 노납은 여러 장문인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소이다." 영공선사 뒤쪽에 있던 승광대선사(承光大禪師)가 입을 열자 또다시 시선이 옮겨졌다. 그는 현 소림의 장문인인 영공선사의 사부이자 전대 방장이었다. 또한 호천대의 태상호법이기도 하였다. 이제부터 호천대는 호천무맹주인 조화옹이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태상호법인 승광대선사가 지휘하게 된다. "아미타불……, 호천대가 이 정도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오이다. 하나 요즘 귀암마성(鬼暗魔星)과 혈요마성(血妖魔星)이 급작스럽게 빛을 더해 가는 것을 보니, 겁난이 머지않았음을 짐작하게 하오이다. 노납은 감히 장문인들께 이렇게 마음놓고 있을 일이 아니라 각 파로 돌아가 제자들의 무공을 높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싶소이다." 승광대선사의 창노한 음성에 지금껏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차갑게 식었다. 그렇다. 소림의 신화인 달마선사(達磨禪師)가 그토록 중요하다 강조하던 겁혈마전(劫血魔傳)에 기록된 귀암마성과 혈요마성은 요즘 들어 부쩍 그 빛을 더해 가고 있었다. 세인들은 이것의 존재를 모르기에 밤하늘에 붉게 빛나는 별들을 보고 그저 천하에 태평성대가 오려는 징조로 알고 있었다. 귀암마성과 혈요마성이 뿌리는 휘황한 빛은 월광보다 훨씬 더하여 요즘은 밤만 되면 하늘이 온통 뻘겋게 보이고 있었다. 조만간 천하에 또 한번 엄청난 혈겁의 회오리가 불어올 징조였다. "알겠소이다, 선사! 그럼 이제 오늘의 안건인 호천대주를 누구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합시다." 조화옹이 한 마디 하자 장문인들의 안광이 약간씩 빛났다. 일천 호천대원 중 자파의 제자들이 각기 일백 명씩 있기에 비록 그들 전체가 구파일방의 공동제자라고는 하나 원래의 출신 성분이 어디냐에 따라 명예가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맹주! 빈도에게 한 가지 제안이 있소이다." "말씀하시오, 진인!" "그간의 성적이 모두 집계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빈도는 그간의 성적순으로 호천대주와 각 단의 단주들을 선발하기를 원하오이다. 대주는 누구보다도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오이다." "아미타불……, 노납도 찬성하오이다. 호천대주란 무림의 겁난을 해소시키기 위하여 발군의 기량을 보여야 한다 생각하오이다. 하여, 본사에는 특별히 대주의 무공을 높일 수 있도록 하나 남은 대환단(大丸丹)을 내놓겠소이다." "……!" 각 파의 장문인들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소림의 대환단은 복용하면 단숨에 일 갑자 내공을 얻는 천고의 영단이 아니던가! 하여 소림사에서는 지난 수백 년 동안 하나 남은 대환단을 애지중지하여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귀한 것을 내놓겠다 하니 감격하여 말을 꺼낼 수 없었던 것이다. "흐흠, 노개는 전 무림을 대표하여 장문방장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오이다. 소림의 높은 뜻은 무림의 홍복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참으로 숭고한 뜻이외다." 무취신개가 해학스럽고 장난스런 평소와는 달리 정중히 포권하며 고개까지 깊숙이 숙였다. 그만큼 감격하였던 것이다. 소림에서 이렇게 하는 마당에 다른 문파에서는 감히 반대할 수 없어 모두의 고개가 끄덕였다. 각 파의 장문인들이 각기 찬성의 뜻을 표하자 마지막으로 승광대선사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이것은 그 동안 연공한 호천대원들의 성적이오이다. 모두들 비슷하지만 발군의 향상을 보이는 대원도 몇 있었소이다. 그들 가운데서 일위부터 십일위의 성적이오이다." 말을 마친 승광대선사는 미리 준비한 듯 여러 장의 종이를 장문인들에게 나눠줬다.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은 각 장문인들이 호천대 교두 노릇을 하면서 매긴 성적이 합산된 것이었다. 제일위 아미파 소수백연(素手白燕) 진추하(晉秋霞), 제이위 곤륜파 요금추상(瑤金秋霜) 초군엽(草 燁), 제삼위 청성파 흑요무후(黑妖武后) 석규미(石圭薇), 제사위 소림사 정현대사(淨玄大師), 제오위 무당파 규화진인(規華眞人), 제육위 개방 상취신개(常醉神 ) 조금기(趙金琪), 제칠위 공동파 육지신룡(六指神龍) 나궁(羅穹), 제팔위 화산파 능공번천(能空飜千) 육영북(陸鍈北), 제구위 점창파 적우교창(赤羽巧槍) 사공수(司空穗), 제십위 종남파 사해조사(四海釣士) 소원추(蘇元 ), 제십일위 소림사 정각대사(淨覺大師). 각 파의 장문인들은 자파의 제자들이 하나씩 끼여 있자 모두들 안도하는 눈치였다. 만일 자파의 제자만 빠져 있었다면 천하에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무림의 태산북두를 자처하던 소림과 무당은 자파의 제자들이 수석의 자리에 있지 못하자 다소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미, 곤륜, 청성의 장문인들은 제자들이 소림과 무당을 누르고 상위에 있자 희희낙락한 모습이었다. "헬헬……, 상위 셋이 몽땅 계집들이구먼." 무취신개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호천대를 계집이 이끈다는 말씀이오?" 점창 장문인이 입을 열자 조화옹이 그를 바라보았다. "장문인! 호천대는 명예를 위한 집단이 아니오이다. 다가올 겁난을 막아내려면 무엇보다도 무공이 우선이오. 그 다음은 지혜이오이다. 본 맹주는 그 동안 대원들이 연공하는 것을 세심히 살폈소이다. 아미파의 소수백연은 비록 나이는 어리나 무공에 대한 엄청난 잠재력이 있소이다. 게다가 지혜마저 뛰어나니, 그 아이가 단주를 맡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소이다." 곁에서 지켜보던 구인사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파 제자를 칭찬해 주는 조화옹이 역시 맹주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미타불……, 그건 맹주의 말씀이 맞소이다. 노납이 보기에도 그 아이는 뛰어난 무공뿐만 아니라 친화력이 있어 능히 호천대를 이끌 재목감이오이다." 영공선사에 이어 운학진인이 입을 열었다. "승광대선사의 말씀대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결정하기로 합시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여기 적힌 성적순으로 했으면 하오이다. 마침 각 파마다 한 사람씩의 제자들이 있으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들이 호천십단(護天十團)의 단주가 되도록 하고, 각기 아흔아홉씩을 지휘하도록 합시다. 호천대주는 소수백연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싶소이다. 그렇게 해야 호천대 내부에서도 반발이 없을 것이오이다." "좋소이다. 진인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싶소이다." 공동 장문인이 거들자 모두의 고개가 끄덕였다. 대세는 기운 것이다. 구파일방의 공동제자들의 집단인 호천대의 단주는 소수백연 진추하가 맡기로 결정된 것이다. "좋소이다. 그럼 장문인들께서는 이만 자파로 돌아들 가시지요. 노납은 호천대에게 이를 알리고 더욱 용맹정진하도록 하겠소이다." 방장실은 이내 휑하니 텅 비게 되었다. 승광대선사와 영공선사 사제만 남게 되자 승광대선사가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장문인, 이제 노납도 그만 가 보아야 하겠네." "사부님, 사부님께 연락하려면 어디로 해야 할는지……." "아미타불……, 모르고 계신 게 좋을 듯싶네. 호천대는 지금부터 구파일방과는 연락하지 않을 셈이네. 아무래도 이번 겁난이 예사롭지 않기에 무공을 좀더 연마해야 하겠네." 승광대선사가 나서자 영공선사는 따라 나서려다 그 자리에 멈췄다. 스승의 성격을 잘 아는 그인지라 한 번 아니라면 죽어도 아니기에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으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그 사이 승광대선사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 * * "무무색황이라고? 흥! 두고 보자." 이곳은 동정호가 그리 머지않은 악양의 한 객잔이었다. 방금 전 소리는 이층 주루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자음자작하던 한 청삼경장인이 내는 소리였다.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는 파락호인 그는 안주도 없이 독한 화주를 마치 붓듯이 그렇게 목구멍 속으로 들이키고 있었다. 마시기 시작한 지 한참 된 듯 그의 탁자 위에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술단지들이 널려 있었다. 멀리서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점소이의 눈에는 조마조마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저러다 쓰러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봐! 점소이, 여기 하나 더 가져와." 청삼인이 소리치자 점소이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사라졌다 곧 술단지를 들고 왔다. 아까 그만 마시라고 하였다가 뺨을 맞았기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점소이의 눈에는 조금의 불만도 서려 있지 않았다. 큼직한 은 덩어리를 선불로 받았기에 무전취식의 우려가 없을 뿐더러 청삼인이 제아무리 많은 술을 마신다 하더라도 적어도 반은 남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청삼인은 술단지의 뚜껑을 열더니 거침없이 들이부었다. "크하하하, 좋다! 크흐흐, 한 맺힌 이 세상! 모든 은원을 잊는 데는 그저 술이 최고야. 하지만 무무색황, 그 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도대체 천하인들이 모두 천하를 구원한 은인이라고 칭하는 남궁호에게 어떤 은원이 있어 이토록 말끝마다 그의 외호를 되뇌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청삼인의 말을 주루 안 그 어느 누구도 듣지 못했다. 너무도 나직했고 술에 심하게 취했는지 혀가 말려 제대로 발음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청삼인이 일어선 것은 서천이 아름다운 노을로 붉게 물들 무렵이었다. 휘청이는 걸음으로 주루 밖으로 향한 청삼인은 천천히 악양성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마침 만월인지라 관도는 환했다. "크흐흐흐, 무무색황 네놈이 감히 원수를 보호한단 말이지? 희란공주!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거야. 나의 모든 것을 버렸음에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어. 크흐흐흐, 두고 봐! 언젠가는 꼭 원수를 갚고야 말겠어." 휘청이는 걸음으로 관도 위를 걷던 청삼인은 낡은 관제묘로 들어가 큰 대자로 눕는가 싶더니 이내 잠들어 버렸다. 시간이 흘러 월광이 천천히 관제묘 안을 비추자 파립을 쓴 청삼인의 용모가 보였다. 씻지 않아서인지 약간 시커멓고 얼룩이 져 있었지만 청삼인의 용모는 천상미동처럼 수려하였다. 그린 듯한 아미(娥眉)와 하늘거리는 귀밑머리, 그리고 가슴이 약간 불룩하고 체형이 아담하며 목울대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남장한 여인인 모양이었다. 그렇다. 청삼인은 바로 잔마유령단에 희란공주 주영령을 살해해 달라고 청부하였던 수어장군부의 유일한 생존자인 백리무영이었다. 그녀는 안락도가 군웅들에 의하여 공격당하는 동안 이를 지켜보다 잔마유령단이 멸망할 것이란 것을 짐작하고 서고에서 마공비급을 잔뜩 꺼내 들고 탈출하였다. 백리무영은 예전에 부친인 수어장군으로부터 수공(水功)을 배운 적이 있는지라 수없이 떠 있는 시신들 틈에 끼여 시신인 양하다 탈출을 감행하였다. 그 후, 정처없이 떠돌다 이곳 악양 부근 지헌장(知獻莊)에 몸을 의탁하였다. 이곳은 과거 수어장군으로부터 목숨을 구원받은 즙포사신( 捕使臣)이 관직에서 은퇴한 후 머무는 장원이었다. 그가 현직에 있을 때 억울한 모함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수어장군이 그의 강직한 성품을 알고 음모를 파헤쳐 그의 무죄를 증명하여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처음 그녀를 발견한 그는 억울하게 죽은 수어장군을 생각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언제까지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지헌장에서 백리무영은 과거 잔마유령단주였던 칠지악법(七指惡法) 호굉(胡宏)의 무공과 잔결오마의 마공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무공을 연마하는 줄 눈치챈 즙포사신은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 한 뿌리를 구해 주었기에 현재 그녀의 내공은 거의 일 갑자를 상회하고 있었다. 그래서 잔결오마 중 색환요희의 색공(色功)은 거의 극에 달해 있었다. 그녀의 무공이 이토록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원한 때문이었다. 오백이 넘는 불구자들의 정액을 받아내면서 느꼈던 그 치욕이 그대로 기억나기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이제는 철천지원수처럼 느껴지는 희란공주를 죽일 일념으로 무공일도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처로 맞아들여 보호하고 있다는 무무색황 남궁호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척살 대상 이호가 되었다. "으으음,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깊은 잠에 들어 뒤척이던 그녀의 입에서 잠꼬대가 나왔다. 아마도 그녀는 꿈에서조차 희란공주를 용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일부함원(一婦含怨) 오월비상(五月飛霜)이란 말이 있듯이, 지헌장에서는 천하인들이 앙망해 마지않는 무무색황 남궁호와 희란공주 주영령을 해치고자 하는 작은 음모가 하나 탄생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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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