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동하는 겁난 강호에 새로운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중원의 서쪽 청해성(靑海省)에서 발원한 소문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금강수라마강시 등으로 인한 혈겁이 끝나고 간신히 평화를 되찾은 강호에 엄청난 기세로 확산되는 일월교(日月敎)가 바로 그것이었다. 정파의 승리로 지하 음습한 곳으로 잦아들었던 마도인들이 대거 참여한다는 일월교는 해괴한 형상을 한 마신(魔神)을 믿는 종교 집단이었다. 쌍두사비(雙頭四臂)를 한 마신의 이름은 혈황마군(血荒魔君)이라 하였다. 마신의 곁에는 늘 아름다운 여인의 형상을 한 여마신이 있는데, 그녀는 사갈요희(蛇蝎妖姬)라 하였다. 누구든 일월교에 몸을 담으면 절세의 절학을 전수받음은 물론 만일 누군가와 원한이 있다면 그 원한마저 풀어준다 하여 순식간에 교세가 확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흑색 장포를 걸치고 가슴에는 기괴한 형상의 철탑이 수놓아져 있다 하였다. 하지만 아직은 그늘에 묻혀 있었다. 정식으로 개파대전을 연 것도 아니고 또 아직은 강호 마도의 위세가 잔뜩 움츠러든 상태인지라 겉으로 드러내 놓지 않고 암암리에 교세를 확장시키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듯,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이 소문 덕에 일월교의 성세는 오히려 늘어만 가고 있었다. 깊은 산중에 은거 중이던 전대거마들이 대거 나타났다는 소문도 있었고, 지금까지 하류잡배 노릇을 하던 많은 한량들이나 불한당들의 횡포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이 그 반증이었다.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지 일월교의 지파들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사람들은 이러다 강호에 또 한 차례 혈겁이 불어닥치는 것이 아니냐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크흐흐흐, 모두들 모였느냐?" "예, 전주(殿主)!" "좋다. 이번 달 목표 인원은 어떻게 되었느냐? 달성되었느냐?" "크흐흐…… 초과 달성이옵니다, 전주!" 낙양성 저잣거리 한쪽에 있는 도살장 뒤편 허름한 전각 안에서 누군가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각 안에는 마치 뱀의 눈처럼 눈꼬리가 길게 찢어진 사십 전후의 인물이 태사의에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에는 여덟 명의 장한들이 공손한 자세로 시립하고 있었다. 사십 전후의 장한은 이곳 낙양 뒷골목에서 불한당 짓을 자행하던 낙양일부(洛陽一斧) 장추린(張樞 )이란 자였다. 그는 원래 낙양의 유명한 홍등가인 추월로(秋月路)의 한 기원에서 매화부(梅花夫:기둥서방) 노릇을 하던 자다. 그는 눈꼬리가 찢어지고, 입술은 얇으며, 광대뼈는 툭 튀어나왔고, 매부리코를 하여 대체적으로 잔인하며, 포악하게 생겼다. 그는 생긴 대로 성품이 괴팍하고 잔인독랄하였다. 그런 그에게는 무공은 없었지만 타고난 근력과 도끼를 다루는 솜씨만은 일품이었다. 하루에 보통 사람 일고여덟이 간신히 팰 수 있을 분량의 장작을 패는 그의 부술(斧術)은 미친 소의 정수리를 내리쳐 단 한번에 즉사시킬 정도였다. 전문적인 도부(屠夫)도 아닌 그의 이런 부술은 상당한 것이었다. 평생을 기원의 기녀들 상대로 마치 기생충처럼 뜯어먹으며 살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일월교 낙양전 전주가 되어 나타났다. 과거 낙양일부를 괄시하던 다른 무뢰한들이 그의 도끼에 정수리가 갈라지는 비운을 맞아하게 되자, 한 달 만에 낙양성을 주름잡던 다른 자들이 모두 그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명실상부하게 낙양성의 암흑가를 장악한 것이다. 그의 앞에 시립해 있는 자들은 과거 낙양성 암흑가를 주름잡던 악한들의 괴수들이었지만 이제는 낙양일부의 충실한 개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 그럼 낙양전의 인원이 몇이나 되는 것이냐?" "크흐흐……, 모두 삼백하고도 칠십이 명입니다, 전주!" "좋다! 다음 달엔 반드시 오백을 채우도록. 낙양전의 인원이 일천이 되면 너희들에게 절정의 무공을 전수하도록 하겠다. 그러니 한눈 팔지 말고 교도들을 모집하도록 하여라. 한데, 교도들 가운데 여인의 숫자는 전부 몇이냐?" 낙양일부의 매서운 눈초리에 지금까지 보고하던 장한은 겁을 먹었는지 약간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여인은 모두 열아홉입니다." "열아홉? 그걸 지금 보고라 하였느냐? 본좌가 전에 무어라 하였느냐? 교주께서 우리 일월교는 교도들끼리 혼례를 올려 번창하여야 하니, 사내들뿐만 아니라 여인들을 많이 입교시켜야 한다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겨우 열아홉이라니?" 장한은 또다시 주춤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런 모습은 몹시도 공포에 젖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 그게…… 일월교의 교리를 듣고는 모두 도망을 가는 바람에……. 그, 그래서……." "뭐라고? 무엇이라 교리를 설명하였느냐?" 낙양일부의 눈꼬리가 매섭게 치켜올려지자 보고하던 자는 하의에 소변이라도 지렸는지 축축이 젖어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과거 낙양일부에게 보고를 하던 이인자가 그의 도끼에 정수리가 갈려져 뇌수를 쏟으며 죽는 것을 본 이후에 생긴 습성이었다. 사실 낙양일부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기원의 주인을 반으로 쪼개 죽인 일이었다. 추월루(秋月樓)라 이름 붙었던 기원은 낙양에서도 꽤 연혁이 깊은 기루였다. 전에 이곳 매화부로 있을 적 기녀들을 혹독하게 다루던 그를 주인이 질책하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가 그를 죽여 버린 것이다. 그 후 누구든 그의 눈에 거슬리는 자는 그의 도끼를 선혈로 적셔야 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그가 일월교 낙양전주임을 밝힌 이후 그의 손에 죽은 수하들만 해도 벌써 이십여 명에 달하였다. 그렇기에 이토록 공포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보고하는 자는 과거 낙양일부를 함부로 대한 경험이 있기에 언제 그의 도끼가 날아들지 모를 일이기에 더더욱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그, 그게 일단 일월교도가 되면 누가 원하든 그 자와 그 짓을 해야 한다고……." "이런 바보, 멍청이 같은 놈! 그렇게 말하면 색욕에 미쳐 환장한 계집이 아니라면 누가 입교하겠느냐? 네놈은 머리가 그것밖에 되질 않느냐?" "그, 그럼 어떻게 말해야……." 장한은 더욱 겁에 질린 듯 몸을 움츠리며 떨었다. "이 바보 같은 놈아! 계집들을 입교시킬 때는 이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전부 맛보게 해 주겠다고 해야 한다 몇 번이나 말했느냐? 그렇게 해도 입교할까말까 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 그게 그 말 아닌가?" 장한은 떨면서도 낙양일부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일월교의 교리에 의하면 사내건 계집이건 같은 교도들 중 누가 원하든 항상 응해야 한다 되어 있었다. 신분의 고하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만일 여인이 더 높은 직급에 있다 하더라도 무조건 응해야 한다는 것이 교리였다. 만일 이를 지키지 않으면 즉시 일월십형(日月十刑)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 일월십형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한 형벌이다. 가장 가벼운 형벌인 장형(杖刑)만 해도 거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 무려 일 장 높이에서 떨어지며 내리치는 오백 장(杖)을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가벼운 형은 석형(石刑)이다. 삼 장 거리에서 던지는 주먹만한 돌 오백 개를 맞아야 하는 형이다. 던지는 자가 제아무리 살살 던지려 해도 만일 죄수의 몸에 맞추지 못하면 참수형에 처해지기에 세게 던지기 마련이다. 셋째는 맨주먹으로 서장흑견(西藏黑犬) 다섯 마리를 물리쳐야 하는 견형(犬刑)이다. 거의 송아지만 한 서장흑견은 웬만한 늑대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이기에 대부분 그들의 먹이가 되기 마련이다. 넷째는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사굴(蛇窟) 안에서 열흘을 버티는 독형(毒刑)이다. 굶주려 독이 잔뜩 오른 사굴에서 아직까지 살아난 사람은 없다 알려져 있었다. 이 형은 여인들에게만 내리는 것이 특징이다. 다섯째는 잔형(殘刑)이다. 음양교합에 응하지 않은 자가 사내이면 성기를 절단하는 것이고, 여인이라면 국부나 유방을 도려내는 잔인한 형벌이었다. 여섯째는 사형(蛇刑)이다. 비늘이 있는 뱀을 선택하여 사내의 항문이나 여인의 국부 속으로 넣은 뒤 이를 뒤에서 잡아당기는 형이다. 뱀이란 놈은 묘한 구석이 있어 앞으로 전진할 때는 비늘이 거의 일어서지 않으나 누가 뒤에서 잡아당기면 끌려가지 않으려 비늘을 잔뜩 세우는 경향이 있다. 이 형에 처해지면 사내는 거의 반년 동안 지독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용변을 보아야 하고, 계집은 더 이상 계집 구실을 못할 정도로 국부가 망가지고 만다. 일곱째는 첨형(尖刑)이다. 일 장 정도 길이에 굵기가 어른 팔목보다 조금 굵은 나무를 끝이 뾰족하게 깎은 후 이를 항문에서부터 박아 넣는 것이다. 형을 당하는 자가 제아무리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더라도 어찌나 솜씨가 좋은지 척추를 뚫고 목덜미까지 빠져나오게 한다. 이렇게 한 뒤 사람들이 오가는 한가운데 세워 두게 되면 필경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죽기 마련이다. 여덟째는 말뚝을 박고 손목과 발목을 물에 잔뜩 불린 가죽끈으로 묶는 혁형(革刑)이다. 가죽이 말라 가면서 수축되어 사지를 잡아당기는데, 어찌나 조이는지 종래에는 사지 중 일부가 찢어져 나가게 되는 고통스런 형이다. 아홉째는 침형(針刑)이다. 팔만사천 개에 달하는 제각기 굵기와 길이가 다른 침을 전신에 박아넣는 형이다. 침의 끝에는 고통을 주는 독이 발라져 지독한 통증에 스스로 혀를 깨물게 하는 잔혹한 형이다. 마지막 열 번째 형은 교도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정형(精刑)이다. 사내라면 지독한 음약에 취하여 오백 번을 파정(破精)할 때까지 음양교합을 하도록 하여 목내이처럼 삐쩍 말라죽게 하며, 계집이라면 쉬지 않고 오백 명의 남자들을 받아야 하는 형이다. 이 형에 당하게 되면 사내든 계집이든 반드시 죽게 되는 형이다. 이런 일월십형이 있기에 일월교도들은 감히 교리를 어기지 못하고 원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상대와 교합을 하였다. 그렇게 하여 태어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장차 일월교의 기둥이 되기 위하여 혹독한 수련을 거치게 된다. 그렇게 하면 약관이 되기 전에 현재 구파일방 장문인에 버금가는 무공을 가지게 될 것이라 하였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어미의 품에서 벗어나기에 누가 어미인지 모를 것이고, 그 어미란 여인은 수도 없는 상대와 교합을 하였을 것이기에 자연 누가 아비인지도 모르게 된다. 제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기에 인성이 메마를 것이고, 그렇게 됨으로써 혹독한 수련을 거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하였다. 일월교는 독특하게도 입교를 맹세하면 즉시 어깨에 해와 달을 문신하게 되어 있었다. 이는 일월교의 모든 교리를 철저히 지키겠다는 맹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교리를 미처 몰랐다고 항변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일벌백계 당하여 다른 교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월십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이를 지켜본 다른 교도들은 심중으로는 불만이 있을지 모르나 겉으로는 전혀 드러낼 수 없게 되었다. 장한은 교도들을 모집할 때 남과 여의 비율을 반반으로 하라는 말을 누누이 들었었다. 그래서 평소에 알고 지내던 건달이나, 불한당들을 찾아가 일단 일월교에 입교하면 적어도 교내에서만큼은 언제든 원하는 어떤 여인과도 즐길 수 있으며, 절정의 무공을 전수한다 감언이설로 꾀었다. 그의 말에 혹한 대부분의 불한당들이 입교를 하였으나 여인들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질겁을 하며 도망쳤다. 그나마 입교한 열아홉 여인들은 모두 나이를 먹어 찾는 이가 아무도 없는 퇴기이거나 너무 박색이어서 모두가 외면하는 그런 여인들뿐이었다. 하여 그의 말을 듣고 입교하였던 자들 중 상당수가 그에게 드러내 놓고 불만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 낙양전 내에는 자신들이 원하는 여인이 없다고……. "이 멍청이 같은 놈아! 어떤 방법을 쓰든 빨리 계집들을 교도로 만들도록 하라. 다음 달까지 적어도 이백오십 명은 계집으로 채워야 할 것이다. 만일…… 크흐흐흐,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네놈을 정형(精刑)에 처할 것이다." "예에? 저, 정형이오?" "크흐흐흐, 그렇다. 네놈은 며칠 전 곽가 놈이 정형에 처해져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으렷다?" 한 십여 일 전, 낙양성 대장간에서 일하던 곽가라는 자는 모든 일월교도들이 운집한 가운데 정형에 처해졌었다. 몹시도 박색인 여인이 그와 동침을 요구했으나 거절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지독한 음약에 취한 상태에서 열아홉에 달하는 여인들과 차례로 음양교합을 하게 되었고, 예순일곱 번을 파정한 끝에 기력이 탈진하여 죽고 말았다. 처음엔 황홀한 표정을 짓던 그였으나 파정의 횟수가 더해 감에 따라 점점 이지러지던 그의 표정이 생각나 장한은 부르르 떨다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거의 애원조로 말하였다. "저, 전주! 다음 달까지 이백오십 명을 채우라 하심은 속하더러 죽으라는 말과도 같소이다. 제, 제발 방도를 알려 주시오." 고개를 조아리고 이마로 바닥을 치며 애원하는 그 모습을 보던 낙양일부의 입가에는 조소가 떠올랐다. 과거 매화부 노릇을 할 때 눈앞의 장한은 옆 기원의 총관을 맡고 있던 자였다. 그때 그에게서 괄시를 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면서 자신의 눈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즐거웠던 것이다. "크흐흐흐, 그러니까 네놈은 바보라는 말이다. 말로 해서 안 되면 힘으로 하는 방법도 있지 않느냐? 크흐흐흐, 수하들을 이끌고 가서 강제로라도 교도를 만들어라. 그렇게 한다면 쉽게 이백오십이라는 숫자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럼 납치를 해도 괜찮다는……." "크흐흐흐!" 낙양일부의 입가에 또다시 미소가 어리자 장한의 얼굴에도 금방 화색이 돌았다. 정식으로 일월교에 입교시킬 수 없다면 강제로 입교시켜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여인들을 납치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던가! 예전에 그는 양민들의 딸이나 부인 중 반반한 여인들을 골라 점찍은 뒤 한밤중에 그녀들을 납치하여 온갖 재미를 본 뒤 사창굴에 팔아먹어 짭짤한 재미를 보았던 자였다. 그러니 납치가 손쉽게 교도를 늘리는 방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단 납치한 뒤 여러 명으로부터 겁탈을 당하게 되면 수치심과 아울러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들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여인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린 것이다. "크흐흐흐, 이왕 그렇게 할 것이면 반반한 계집들을 고르도록 하라. 알겠느냐?" "존명!" 장한의 얼굴엔 언제 공포에 떨었느냐는 듯 욕정에 번들거리는 듯한 안광과 흉소가 어려 있었다. "크흐흐! 걱정 마십시오, 전주! 다음 달까지 반드시 목표량을 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시식하실 숫처녀 삼십을 준비하겠습니다. 적어도 한 달 동안은 적적하지 않으실 겁니다." "크흐흐, 좋다. 본좌는 네 말만 믿고 기대하고 있겠다." "존명!" 장한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한 손은 주먹을 쥐어 가슴에 대는 일월교만의 예를 취한 후 사라졌다. 사라지는 장한의 뒷모습을 보던 낙양일부의 입에서는 앙천광소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크하하핫!" 과거에는 감히 대들지도 못했던 자가 자신의 앞에서 벌벌 떠는 모습에 너무도 통쾌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낙양일부는 너무도 심심한 나날들을 보내다 우연히 만난 괴한에게서 한 달 동안 일월교에 대한 교리와 무공을 배운 것이 꿈만 같았다. 자칭 일월교 하남지부(河南支府) 순찰사자(巡察使子)라는 그는 엄청난 무공을 지닌 절정의 고수였다. 그에게서 배운 부술은 그를 단숨에 낙양성 암흑가를 장악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삼 개월 내에 낙양전에 일월교도들이 일천으로 늘면 자신을 일월교 총단으로 보내 집중적인 무공을 수련을 거쳐 자신과 버금가는 고수로 만들어 준다는 언질을 받았기에 이토록 교도들을 늘리는 데 신경쓰는 것이다. 순찰사자의 말로는 중원의 각 성마다 각기 삼십 명씩의 순찰사자가 있으며, 각 성을 총괄하는 일월교 지부가 있다 하였다. 각 성의 지부주(支府主)는 일월교도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지니고 있다 하였다. 그리고 장강을 기점으로 강북에는 혈황각주(血荒閣主)가 총괄하고, 강남은 사갈각주(蛇蝎閣主)가 지휘한다 하였다. 혈황각 휘하에는 사단이 있는데 그들을 흑단(黑團), 자단(紫團), 적단(赤團), 황단(黃團)이라 하였다. 각 단마다 백여 명에 달하는 절정고수들이 배치되어 있다 하였다. 사각갈 휘하 사단은 청단(靑團), 녹단(綠團), 남단(藍團), 홍단(紅團)이라 하였다. 그들 역시 일백여 고수들이 배치되어 있다 하였다. 그들은 각기 소속된 단의 명칭과 동일한 색상의 장포를 걸치고 있기에 쉽게 신분을 알아낼 수 있다 하였다. 이 각의 위로는 총단이 있는데, 거기엔 얼마만한 인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순찰사자도 모른다 하였다. 결국 현재 중원에 있는 일월교도 중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의 수효는 이천오백이 넘는다 하였다. 이 수효는 각 현(縣)이나 부(府)를 관장하는 전주를 포함한 교도들의 수효는 포함되지 않았다 하니, 그 이하로는 얼마만한 숫자가 되는지 짐작조차 못할 일이다. 낙양전주를 맡고 있는 낙양일부조차 하남지부가 어디에 있는지, 누가 지부주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순찰사자 하나뿐이었다. "크흐흐흐, 이제 시작이다. 한낱 매화부로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던 내가 일월교 전주가 되다니……. 하루라도 빨리 천 명을 채워 총단으로 간 뒤 기필코 일월교 핵심인물이 되고야 말겠어. 크크크, 한데 이 자식들이 과연 잘 해낼까?" 낙양일부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을 때 그의 휘하들은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혹시 낙양일부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진심으로 일월교에 입교하고 싶어하는 여인들만 만나 왔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하여 삼백오십여 일월교도들은 눈썹이 휘날리게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그들은 과거 자신들이 점찍어 두었거나 자신들이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던 여인들을 납치하기 위하여 삼삼오오 짝을 이뤄 사라진 것이다. 이런 일은 비단 낙양성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다른 지역에 비하여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벌써부터 천하각지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여식이나 부인이 실종되었다며 그녀들을 찾아 헤매는 사내들이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처음에 사라진 여인들은 주로 청루나 홍루 등 홍등가에 있던 여인들이었다. 그들을 납치하기란 손바닥 뒤집기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일월교도들이 그 바닥에서 놀던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기루에 있던 여인들이 사라지고 난 뒤부터는 양민들의 여식이나 고관대작의 여식, 탁발 나온 비구니나 여도사 등이 사라지더니 급기야는 무림 세력의 여인들까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일월교도들은 간이 배 밖으로 나올 정도로 대담해졌던 것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들의 수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던 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어떤 사내들이 열 계집을 마다하겠는가! 일월교 각 전(殿)마다 반반한 계집들이 그득하고, 원하기만 하면 그녀들 중 아무하고나 음양교합을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간 자들이 엄청난 숫자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일월교에 입교한 후 자신들이 원하는 여인들과 얼마든지 운우지락을 나눌 수 있었기에 나날이 일월교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지고 있었다. 소문으론 일월교도들의 수효가 백만이 훨씬 넘었다는 말도 들려왔다. 하지만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강호에 독버섯 같은 일월교가 날마다 창궐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강호의 제 문파들과 관에서는 그들을 색출하려 갖은 수를 썼지만 그들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과거 마마혈보가 그랬듯이 어쩌다 그들의 종적을 발견하여 완전히 괴멸시키고 돌아서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 다른 전이 들어서곤 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여 각 문파와 관아에서는 여인들을 지키기 위한 방책을 세웠다. 그러자 적어도 무림이나 관의 여인들 가운데 실종되는 여인들의 수효는 급감되었다. 그러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양민들의 여식이나 부인들은 더 많이 사라져야 했다. 아무튼 강호는 새로운 겁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 * * "대형의 말씀은 소생더러 태극오관에 도전해 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본궁에서는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여 그에 걸맞는 무공을 전수한다네. 과거 왕휘지가 말했던가?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을 자네는 알 걸세. 본궁의 무공은 중원의 무학과는 차원이 다르네. 이 무학은 몇 단계로 나뉘어져 있네. 그 중 가장 강한 무공은 아버님과 우리 형제 외에는 익히지 못했네. 본궁에도 그것을 익힐 만한 자질을 갖춘 자가 없기 때문이지. 본궁에서는 설사 궁주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자질을 갖추지 못하면 무공을 전수하지 않는다네." "한데, 왜 소생에게……?" "후후……, 자네는 이제 누가 뭐라 해도 도산검림을 걷는 무림인이네. 그러나 우형이 알기론 자네의 무공은 일천하기 그지없네. 비록 자네가 엄중한 호위를 받고 있기는 하나, 그것은 한계가 있는 법일세. 만일 누군가 자네를 해하려 암습을 한다면,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와 시간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말일세." "……!" 남궁호는 옥기린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누군가 암습하려 마음먹고 은신해 있다 공격한다면 자신으로서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비록 상황호천대 등의 엄중한 호위를 받기는 하나 혼자 있을 때라면 상황이 틀려진다.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형은 자네가 태극오관에 도전하길 바라네. 태극오관을 깬다면 아마 아우의 몸 하나는 능히 지킬 능력이 생길 것이네." "한데, 소생은 태극은하궁도도 아니고 외인인데……." 남궁호는 자파의 무공을 외인에게 전수하려 하지 않는 습성이 강한 무림에서 왜 이런 호의를 보이는지 궁금하였다. "후후……, 우형에게 있어 자네는 남이 아니네. 아우의 목숨을 구해 줬고, 또한 인아의 우울증을 치료해 준 은인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제는 우형의 의제가 아니던가?"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무림에서는……." 을지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며 남궁호의 말을 끊었다. "자네의 말이 무엇인지 우형을 잘 아네. 이건 충심에서 하는 말일세. 우형은 자네가 본궁과 좋은 유대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했으면 하네. 그런 자네가 살수의 손에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휴우! 그 다음은 말도 하기 싫으네. 우형이 며칠 전 아버님으로부터 내락을 받아 둔 상태이니, 우형의 말을 믿고 일단 태극오관에 도전하게." "하지만……." 옥기린은 남궁호가 무림의 법도에 얽매여 계속하여 거절하려 하자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궁에서 외인에게 태극오관을 허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일세. 아버님과 장로 등으로부터 간신히 허락을 받은 것이니 두말 말고 도전하게. 자네가 만일 우형을 형으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게. 그러나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면 앞으로 우형은 자네를 보지 않을 것이네!." "예에? 그, 그건……. 알았습니다. 대형의 말씀대로 하지요." 남궁호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 바라보는 옥기린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진실로 자신의 안위를 바라는 열망에서 태극은하궁주를 설득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휴우우! 고맙네. 태극오관은 내일 열릴 것이니, 이제 가서 편히 쉬게." "알겠습니다." 남궁호는 옥기린의 처소에서 나와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며 생각에 잠겼다. 며칠을 계속하여 무릉소축에서 지내는 동안 세외천미에게서 조금의 우울증 증상도 발견할 수 없어 그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일부러 수를 쓴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여 무릉소축에서 나와 태극은하궁 내원에 마련된 작은 전각을 배정받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 사이 많은 병자들이 그의 의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와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는 한편 매일 저녁 새반안, 옥기린 형제와 더불어 고담준론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다.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 새반안의 제의로 셋은 의형제를 맺었다. 옥기린이 맏이고, 새반안이 가운데, 그리고 가장 나이가 어린 남궁호가 막내가 되었다. 오늘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전각 안에 마련된 희귀한 서책들을 읽는데 옥기린이 보자는 전갈을 보내 그를 찾아갔더니 대뜸 태극오관에 도전하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대형이 정말 궁주님을 설득하느라 애를 많이 쓰신 것 같아." 남궁호는 아까 옥기린의 입술이 짓물러 터진 것을 보았다. 그것은 심인성(心因性)으로 마음 고생이 많이 했다든가 할 때 생기는 것이었다. "태극오관이라……. 형님의 말대로 사나이 대장부로 태어나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한다면 대장부가 아니지." 남궁호는 진심으로 옥기린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러 나왔다. 외인에게 가전무학을 전수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에게 그것을 전수시키기 위하여 부친을 설득했다지 않던가! 아마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라 짐작한 남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 * * "아버님! 소자, 대손이옵니다." "오, 그래. 들어오너라." "예에!" 철기보 내원 입구에 있는 보주의 집무처인 만세무적전(萬歲無敵殿)에 칠 척 장신 거한이 찾아들었다. 그는 철기보의 소보주인 무정검 북리대손이었다. 과거 청룡대를 이끌고 금강수라마강시들과 대적하였다가 수하들은 전멸하고 자신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온 바 있는 그였다. 안에서 대답한 자는 철기보의 보주이자 파천검법이라는 강호 최절정의 검법을 지닌 철사자 북리승혁이었다. 전각은 독특하게도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렸는데, 들여쌓기와 내쌓기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아름다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예! 무무색황이 다시 강호에 나타났다는 소문이옵니다." "무엇이? 무무색황 남궁호가 나타났다고?" "그러하옵니다. 현재 황궁을 떠나 태극은하궁에 들어간 듯하다는데, 조만간 다시 남하하여 어디론가 갈 것 갔다 하옵니다." 북리대손의 보고에 철사자의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좋다! 무슨 방법을 쓰든 그가 본보를 방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라. 알겠느냐?" "예!" "한데, 그 자는 어떻더냐?" 무정검은 부친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태인은 현재 지하 뇌옥에 잘 있습니다." "좋다! 그를 잘 감시하도록. 무무색황이 본보에 방문하면 그 자의 죄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철기보에서는 귀수혈사단에서 풀어놓은 금강수라마강시에게 그토록 호되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냉혈장비 독고태인을 살려 두고 있었다. 그가 귀수혈사단의 간세임이 밝혀지기는 하였으나 명확한 증거가 없기에 처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거 무무색황이 빠져나간 듯싶은 지하 통로는 이미 봉쇄하여 두었으니,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를 지녔다 하더러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알았다. 그만 나가 보거라." 무정검이 막 일어서서 나가려는데 뒤에서 다시 철사자의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무무색황을 청할 때 절대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예, 알겠습니다." 무정검은 부친이 무슨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과거 그가 상황의 후계자라는 신분만 지니고 있을 때에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판국이었는데, 지금은 거기다 대명제국의 부마도위라는 지엄한 신분까지 겸비하게 되었으니 무례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다. 만일 그의 비위라도 거스르게 된다면 혹여 관에서 질책을 받을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철기보가 제아무리 강호십정 가운데 하나였고, 지금은 예전보다도 강호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더라도 황궁에서 보면 일반 양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주지시킨 것이다. 무적만세전을 벗어난 무정검은 지하 뇌옥으로 가서 냉혈장비 독고태인이 잘 있는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다. 그곳에 갇힌 지 벌써 일 년이 훨씬 넘었기에 그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지하 뇌옥은 전과는 달랐다. 그곳엔 죽어서 썩고 있는 시신도 없었고, 지저분한 건초더미도 없었다. 또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청석 바닥이 두꺼운 철판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이다. 철기보에서는 과거 지하 뇌옥에서 탈출을 할 수 있었던 남궁호가 바로 무무색황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청석 바닥 밑 좁은 통로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하여 이곳에 두꺼운 철판을 깔아 더 이상 죄수들이 탈출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냉혈장비는 무공이 폐쇄된 듯 힘없는 모습으로 그냥 맥없이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산다는 것에 대한 애착이 없어 보였다. 그의 신체를 속박하고 있는 유일한 것은 재갈이었다. 스스로 혀를 끊어 자진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후후……, 잘 있구나." "으으…… 으으으……!" 재갈 때문에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던 냉혈장비는 무정검을 보자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후후……, 조금만 기다려라. 네놈이 고문하였던 남궁호라는 사람이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 자리에서 네놈은 모든 것을 실토하여야 할 것이다." 철기보에서는 냉혈장비의 처소에서 나온 수십 가지 증거물을 잘 보관하고 있었다. 그 중엔 중원 최고의 전장인 만해전장에서 발행한 은표가 수북하게 있었다. 모두 이천삼백만 냥이 조금 넘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냉혈장비는 이를 남궁호로부터 얻었다고 하였으나 철기보에서는 믿을 수 없었다. 남궁호가 이곳에 억류된 것과 그가 상황의 후계자가 된 것에 시차가 있기에 도저히 그가 이런 거금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러한 거금이 남궁호의 것이 아니라면 냉혈장비가 무엇인가를 숨기는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지금까지 살려 두었던 것이다. 사실 은자 이천삼백만 냥이라면 철기보 같은 문파를 열 개나 세우고도 남는 엄청난 거금이었던 것이다. 철기보에서는 이 거금을 지금까지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잘 보관하고 있었다. 철기보가 비록 패(覇)를 숭상하는 문파이긴 하지만 결코 남의 재물을 탐하는 그런 문파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한 철기보에는 문파를 꾸려 갈 만한 충분한 재원이 있었다. 그것은 어딘가에 감춰진 철광(鐵鑛)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철을 파는 것만으로도 능히 보를 운영하고도 남을 정도였던 것이다. "후후……, 그가 온 후 다시 보기로 하자." "으으으…… 으으으으……!" 냉혈장비는 눈에 눈물까지 흘리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말뜻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이렇게 갇혀서 사느니 차라리 통쾌하게 죽여 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러나 무정검은 그를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물론 그가 귀수혈사단의 간세라는 것을 알기는 하였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철기보에서는 최근 경사스런 일이 있었다. 개망나니 짓을 도맡아 하던 북리성린이 스스로 서책을 잡은 것이다. 원래 그는 삼 세 때 사서삼경을 줄줄 읽어 내리던 신동이었다. 그렇기에 요즘 그의 서실을 담당하는 하인은 죽을 맛이었다. 매일 철기보 서실에서 그가 원하는 서책들을 고른 후 이를 날라야 하기 때문이었다. 독서삼매경에 빠지기라도 하였는지 그를 부르는 소리는 낮과 밤의 구별이 없었다. 아무 때고 북리성린이 부르면 득달같이 달려가 그가 원하는 서책을 찾아다 대령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처음 그가 이 소임을 맡았을 때 나머지 하인들은 그를 무척 부러워하였다. 북리성린이 독서하는 것을 본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매일 빈둥거려 남들의 부러움을 샀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었다. 차라리 낮에 뼈빠지게 일하고 밤에는 편히 쉴 수 있는 자신들의 처지가 그보다 훨씬 좋다고 자위하며 오히려 그를 동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군(馬郡)아! 마군아!" "예에! 소인, 달려갑니다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북리성린은 어느새 성장하여 이제는 약관에 달하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관옥 같은 얼굴은 그의 모친을 닮은 것이라 하였다. "헉헉! 소인, 대령입니다요, 공자님!" "후후……, 그래. 지금 가서 천기누설진해(天機漏泄眞解)라는 서책을 찾아오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요." 마군이라 부린 하인은 눈썹이 휘날리게 철기보 서실로 향하였다. 그런 그의 입에서는 남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런, 제길! 지금이 어느 때인 줄 알고 저러는 건가? 에잉! 내 팔자야!" 현재의 시각은 삼경이 넘어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닭이 홰를 치며 울 시간이었다. 그는 지난밤 의복도 못 벗고 신도 신은 채 꾸뻑꾸뻑 졸다가 놀라서 달려온 것이다. 요즘은 이런 생활의 연속이기에 그의 눈은 언제나 수면 부족으로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피로가 풀리지 않아 늘 전신이 뻑적지근하였다. "에잉! 전이 좋았는데, 차라리 매일 기원이나 가시지 왜 하필이면 서책을 읽는다고 이 고생을 시키는지 몰라! 이럴 줄 알았으면 글을 모른다 할걸." 사실 그가 이 소임을 맡게 된 것은 순전히 제법 글줄 꽤나 읽을 줄 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언젠가 북리성린이 파천검보를 들고 나가 잔뜩 술을 마시고 돌아온 뒤 누이인 북리운혜로부터 모진 매질이 있었다. 그 후, 그녀가 철기보의 모든 하인들을 집합시켜 놓고 누구든 글을 읽을 줄 아는 자가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이때 마군은 손을 번쩍 들고 나갔었다. 다른 모든 하인들은 그보다 글을 읽는 실력이 낮았기에 그가 낙점(落點)되어 한동안 무지하게 편했던 것이다. "가만……, 천기누설진해라 하였던가? 어디 보자." 마군은 높이가 거의 어른 키만 하고 길이가 오 장에 달하는 수십 개의 서가를 돌며 북리성린이 원하는 서책을 찾고 있었다. "천기누설진해라, 천기누설진해라……. 이 빌어먹을 게 어디 처박혀 있는지 알아야지. 에잉! 쯧쯧쯧, 천기누설진해……." 거의 반시진을 돌아다니던 마군은 하도 집중해서 서책을 찾은지라 눈이 침침해져 옴을 느끼고 자신의 눈을 비비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이런 젠장!" 그의 뇌리로 한 열흘쯤 전에 천기누설진해라는 서책을 찾아 대령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다시 북리성린이 있는 서실에 당도한 마군은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감정을 누르고 나직이 보고하였다. "공자님! 소인, 마군입니다요." "어, 그래? 그래, 그 서책은 찾아왔느냐?" "예! 그 서책은 소인이 공자님께 벌써 열흘 전에 가져다 드린 것이옵니다." 마군의 음성은 볼멘 티가 역력하였다. 그의 말에 대답 없이 여기저기를 들쑤시는지 한동안 말이 없던 정실에서 북리성린의 음성이 들려왔다. "허어, 이거 미안하게 되었구나. 되었다. 이제 가서 자거라." "예!" 마군은 휙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제기랄! 잠들만 하면 또 깨우려고?" 마군은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처소로 사라졌다. 요즘 북리성린이 있는 서실에는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곤 하였다. 갑자기 서책을 잡기 시작한 그는 마치 지난 세월 동안 읽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읽으려는지 엄청난 속도로 서책들을 독파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보고 그의 부친과 형, 그리고 누이는 요즘 흡족해하는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세인들은 모르고 있지만 철기보에서 잠룡(潛龍) 하나가 드디어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려 하고 있었다. |
첫댓글 고맙습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