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극오관 "허허……, 남궁 소협에게 특별히 본궁의 태극오관을 개 방하겠네. 그곳을 통과하고 못하고는 오직 소협의 능력이 달려 있네. 만일 그곳을 모두 통과한다면 본궁의 비전절학을 전수해 주겠네. 그럼 무운을 비네." 천령군 을지후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하자 곁에 있다 기다렸다는 듯 옥기린이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이제부터는 소자가 남궁 아우에게 말을 할 터이니 이만 들어가 쉬시지요." "허험, 알았다." 천령군은 뒷짐을 진 채 서서히 안으로 사라졌다. 그의 신형이 사라지자 옥기린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이보게, 아우! 부디 무운(武運)을 비네. 최선을 다할 것이라 우형은 믿겠네." "후후……, 궁주님과 대형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남궁호는 빙긋 미소 지으며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는 옥기린의 눈은 안타까움으로 그득하였다. 사실 남궁호로서는 굳이 태극오관을 통과하여 태극은하궁의 무공을 얻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엄연히 외인인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그러나 옥기린은 생각이 달랐다. 방금 전 부친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어 말을 하였던 것은 혹여 부친이 태극오관을 돌파하여야만 세외천미와의 혼례를 허락하겠다는 말을 할까 봐 조마조마하였던 것이다. 아직 남궁호가 이러한 사실을 모르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 옥기린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보게, 아우! 정말 최선을 다해 주게. 태극오관은 우리 궁도들 가운데서 날고기는 자들도 통과하지 못한 어려운 관문이네. 과거 자네가 누구도 통과할 수 없었던 금겁오관문을 돌파한 것은 알고 있네만, 이것과 그것은 정말 수준이 다를 것일세. 최선을 다해 우형이 아버님을 조른 일에 대한 보답을 해 줄 걸로 믿겠네." 말을 하는 옥기린의 얼굴은 정말 진지하였다. 이런 모습을 본 남궁호는 너무 쉽게 대답하는 것이 그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 생각하고 좀더 신중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소제, 반드시 최선을 다하여 대형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호호호, 여기 계셨네? 어디 계시는가 한참 찾았어요." "어, 네가 여기 웬일이냐?" 갑자기 나타나 교소를 터뜨리는 세외천미의 모습을 본 옥기린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호호호, 오라버니. 소녀가 이곳에 나올 때가 언제인지 혹시 잊고 계신 것은 아니시겠죠?" "어? 오, 오늘이 그날이더냐?" 옥기린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쳤다. 세외천미가 무릉소축을 떠나 이곳까지 오는 날은 일 년에 단 하루뿐이었다. 오늘이 바로 돌아가신 모친의 기일이었던 것이다. 옥기린은 그 동안 부친과 남궁호 사이를 오가며 설득하느라 깜빡하였던 것이다. "호호호, 세상에! 누구보다도 어머니에 대한 정이 깊으셔서 늘 앞장서서 독려하시더니, 오늘은 웬일이죠?" "오오, 이 오라비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보다. 남궁 아우가 오늘 태극오관에 도전하는 날인지라 잠시 잊고 있었구나." "태극오관? 그게 뭐죠?" 세외천미는 자신의 배필을 고르기 위하여 태극오관이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 그, 그건……. 그래, 그건 본궁의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설치한 관문이란다." "어머, 그런데 왜 공자님이 거기에 도전하는 거죠? 공자님은 본궁의 제자가 아니잖아요?" 세외천미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옥기린은 얼른 그녀를 잡아끌어 밖으로 향하며 이야기했다. "하하……, 아우는 이제 잠시 후에 입관하게 될 것이니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게. 그리고 인아야, 우리는 어서 가자! 이러다 제사에 늦겠구나." 옥기린이 왠지 허둥댄다는 느낌이 든 남궁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선풍도골의 노인이 나왔다. "허허……, 공자가 새로 태극오관에 도전할 도전자인가?" "그렇습니다." 정중히 포권하며 답하자, 노인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였다. 노인의 뒤를 따라 일다경쯤 가자 거기엔 태극오관이라 적힌 현판이 있는 전각이 있었다. "여기에 성명을 적은 후 들어가게." "예!" 남궁호는 두말 않고 방명록으로 보이는 곳에 자신의 성명 석 자를 적은 후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관 미망관(迷妄關)> 전각 안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미망관이라 적힌 현판이었다. 그 외에는 온통 회를 칠하였는지 회벽뿐이었다. 그리고 현판 아래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문에는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 <미망관을 통과하는 자는 기억력과 굳은 심지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후후……, 이 안에 뭐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군." 남궁호는 나직이 중얼거린 후 문을 열고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앞에는 좁고 긴 복도가 놓여 있었다. 그 외에는 밖과 마찬가지로 회칠을 한 벽뿐이었다. "여길 통과하라는 것인가? 혹시 기관이 설치되어 있나?" 기관이 설치되어 있을 것이란 짐작이 든 남궁호는 안력을 높여 세심히 복도의 바닥과 천장, 그리고 양쪽 벽을 살폈으나 별다른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백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천장에 박힌 야명주뿐이었다. 일 장 간격으로 박혀 있는 야명주 덕분에 실내는 전혀 어둡지 않았다. 천천히 삼 장 정도 걸어 들어가자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기관이 설치되어 있는 흔적이 전혀 없었기에 남궁호는 마음놓고 우측으로 꺾어 들어갔다. 또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있음을 보고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가 보았으나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이곳은 삼 장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두 갈래로 나뉘는 통로였던 것이다. 다만 꺾이는 각도가 사람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약간씩 다를 뿐이었다. 자세히 살피니 먼저 도전하였던 사람들이 남긴 듯한 흔적이 벽 곳곳에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수도 없이 같은 곳을 되풀이하여 지나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흔적을 남겼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척 희미하게 보였다. 남궁호와 같은 안력을 지니지 않은 자라면 도저히 식별하기 힘들 정도였던 것이다. "흠, 태극오관을 깬 자가 아직 없다고 하였으니 이 흔적들 가운데 어떤 것이 이곳을 벗어난 자의 흔적인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남궁호는 움직이지 않고 머릿속으로 미로들을 그려 보았다. 자칫 착각이라도 한다면 수도 없이 같은 곳을 뱅뱅 돌게 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남궁호는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천장에 박혀 있는 야명주들의 광도가 약간씩 다르다는 것을 감지하였던 것이다. 어떤 것은 약간 붉은빛을 띠기도 하였고, 어떤 것은 황색, 또 다른 것은 청색을 띠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도의 안력이 없으면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미세한 차이였다. "후후……, 철기보 지하 뇌옥에서 익힌 안력 덕을 보려나?" 남궁호는 일단 적색을 발하는 야명주를 따라 걷기로 마음먹고 그렇게 하였다. 그러자 대략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이 같은 곳에 서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은 청색, 그 다음은 녹색을 따라 걸었다. 결국 남궁호는 자색을 따라 걸은 끝에 미망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도전자들은 이곳 미망관에서 거의 미칠 지경이 되어서야 포기하였었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호오, 최고 기록이오. 축하하오." 미망관을 벗어나자마자 그곳에 있던 사십 정도 된 체격이 큰 장한이 축하의 말을 던져 왔다. 지금까지 미망관을 벗어나는 데 걸린 최고 기록은 여섯 시진이었다. 그런데 남궁호가 불과 한 시진 만에 나왔던 것이다. "고맙소이다, 다음 관문은 어떻게……." "저기 보이는 전각으로 가시오." 남궁호는 장한이 가리켰던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탁자 위의 서책 속에는 한 가지 비밀이 담겨 있소. 그것을 찾아내시오. 비밀을 찾았거든, 곁에 있는 종을 치시오.> 전각의 벽에 적힌 글귀를 읽은 남궁호는 엷은 서책과 작은 종이 탁자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밀이 있다고? 후후……, 얇기는 하지만 머리 꽤나 아프게 하겠군." 서책은 불과 넉 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매 장마다 적어도 일천여 자씩 적혀 있었다. "어디 보자! 흐음, 역시……." 남궁호는 깨알같이 작은 글자들이 두서없이 쓰여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대체 말이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을 살펴보아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던 남궁호는 생사신의의 절학인 회광상단심법까지 동원하였지만 서책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다. 두 시진 정도가 흘렀건만 도저히 뜻을 알 수 없던 남궁호는 이번엔 다른 각도에서 서책을 보기로 하였다. 거꾸로도 읽어보고 한 자씩 걸러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후후……, 을지 형이 결코 만만한 관문이 아니라 하였던 것이 과언이 아니구나." 회광상단심법까지 동원하였지만 서책에 담겨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그의 눈이 반짝하고 빛난 것은 무언가가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났을 때였다. "가만, 단 한 자도 같은 글자가 없다. 그렇다!" 남궁호는 같은 책장에 같은 글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쓰여 있는 문자의 의미에 주안점을 두어 생각하였기에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의깊게 살핀 남궁호는 같은 책장에 같은 글자가 두 개인 유일한 문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첫 번째 장에 두 번 나오는 글자는 큰 대(大)자였다. 두 번째는 높을 고(高), 세 번째는 글귀 구(句), 네 번째는 고울 려(麗)자였다. "후후……, 간신히 풀어냈다." 남궁호는 탁자 위의 종을 들어 흔들었다. 그러자 예순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이 전각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비밀을 푸셨소이까?" "후후……, 다행히 그런 것 같소이다. 대고구려(大高句麗)가 이 서책의 비밀이오?" "호오, 대단하오. 지금까지 중 최단시간 내에 비밀을 찾으셨소이다. 경하 드리오." 노인은 정말 경탄했다는 듯 눈까지 크게 뜨며 축하의 말을 던졌다. 남궁호가 비밀을 푸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네 시진이 걸렸다. 종전 최고 기록은 무려 아홉 시진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를 푼 자는 손으로 꼽을 만큼 적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문자를 보면 그 안에 담겨 있는 뜻을 찾으려고 하는 심리를 역이용하여 낸 문제였다. 이를 풀 수 있다는 것은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제삼관에 도전하시오." 노인이 가리키는 곳으로 들어가니 또 글귀가 적혀 있었다. <탁자 위의 서책을 번역하시오. 이 관문은 네 시진 안에 통과하여야 하오.> 탁자 위에는 누렇게 변색된 서책 한 권과 문방사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서책의 표지에는 마치 사슴의 뿔을 그려 놓은 듯 삐죽삐죽한 글자들이 쓰여 있었다. "후후……, 녹도문(鹿圖文)이군." 남궁호는 쉽사리 녹도문을 알아봤다. 과거 생사신의(生死神醫) 곽홍(郭弘)이 남겼던 죽편(竹片)에서 이런 것을 보았던 것이다. 녹도문은 상고시대 때 쓰이던 문자인지라 현재에 와서는 이를 읽기는커녕 해독하기조차 힘든 사어(死語)이다. 그런 녹도문을 본 남궁호는 내심 태극은하궁의 저력을 짐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것을 관문으로 내세울 적엔 적어도 궁도들 가운데 이를 해독할 능력이 있는 자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적어도 태극은하궁은 무(武)만을 숭상하는 문파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무와 더불어 문(文)을 익히게 함으로써 궁도들의 의식이 깨고 나아가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둘러 서책을 펼친 남궁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것들을 번역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남궁호는 서책의 내용이 자신이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것임을 알고 그것들을 번역하는 한편 오의를 깨우치려 노력하였다. 이것은 회광상단심법이 없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서책의 내용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교훈을 주는 것이며, 수신 처세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총 삼백육십육 사(事)로 구성되어 있는 이것은 크게 나눠 모두 여덟 가지로 만사를 성취하게 하는 정성(誠), 만사를 반드시 이루게 하는 믿음(信), 어진 성품의 바탕이 되는 애(愛), 덕성이 갖추어진 착한 행실인 구제(劑), 악한 행실이 불러오는 재앙(禍), 착한 행실이 가져다 주는 복(福), 악함과 착함에 따라 재앙과 복으로 갚아 주는 보(報), 행실에 따라 행복과 재앙으로 받아 갚게 하는 응(應)으로 되어 있었다. 남궁호는 참전계경(參佺戒經)이란 서책을 번역하면서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것이 옳은 일인지를 가르치는 일종의 잣대와 같은 서책이었던 것이다. "후우! 중원에 이러한 서책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을지 형의 조상들은 참으로 대단하군. 이런 귀한 것들을 수천 년 전에 만들어 가르쳐 왔다니……." 모든 번역을 마치고 책장을 덮은 것은 불과 두 시진 만이었다. 그런 후 탁자 위의 종을 울리자 이번엔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늙어 계피학발(鷄皮鶴髮)의 모습을 한 노인이 죽장을 짚고 들어왔다. "헬헬……, 다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남궁호는 이런 귀한 서책을 보여 준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워 두 손으로 공손히 서책을 넘겨주었다. 노인을 말없이 그것들을 살펴본 후 입을 열었다. "얻은 것이 있더냐?" 노인의 말에 남궁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안개 속에서 살았다면 앞으론 청정(淸淨)한 광명 속에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얻었습니다." "헬헬헬, 합격이다. 한족(漢族)이라 들었는데, 참으로 대단하구나. 이곳에서 느낀 것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노인장!" 남궁호가 정중히 포권하는 사이 노인은 마치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엇? 어디로 가셨지?" 잠시 머뭇거리던 남궁호는 전각을 벗어나 다음 전각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의 서책을 번역하시오. 시간은 두 시진뿐이오.> 남궁호는 이번엔 또 뭔가 싶어 서책의 표지를 살폈다. "삼일신고? 셋을 하나로 돌아가게 하는 말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서책인 모양인데……, 좋아! 한번 해 보자." 겉장을 넘기자 거기엔 전비문(篆碑文)으로 쓰인 문자들이 그득하였다. "후후후, 이번엔 전비문으로? 태극은하궁, 정말 대단한 곳이군. 후후……, 천하에 전비문을 아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아마 황궁 한림원 학사들 가운데에도 가물에 콩 나듯 드물 것이다." 전비문 역시 녹도문과 마찬가지로 사어(死語)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생사신의가 남긴 죽편에 있는 문자이기에 남궁호는 별 어려움 없이 번역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남궁호는 이 서책이 단순히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찾는 실천 원리를 밝힌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제목에서 그러하듯 무엇인가 세 가지를 하나로 귀일시키는 어떤 원리가 감추어져 있는 듯하였던 것이다. "혹시……." 의혹을 느낀 남궁호의 두뇌가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회광상단심법을 운용한 것이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그의 머릿속에서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안개 속에 있는 듯한 느낌만 들었을 뿐이다. "좋아! 일단 이걸 몽땅 외워 두자 언젠가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궁호는 삼일신고라는 서책에서 무언가 현기를 느끼고 그것들을 외웠다. 삼일신고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창창비천(蒼蒼非天) 천무형질(天無形質) 무단예(無端倪) 무상하사방(無上下四方) 허허공공(虛虛空空) 무부재(無不在) 무불용(無不容). […… 하략 ……] 저 푸르고 푸른 것은 하늘이 아니면, 저 검고 까마득한 것도 하늘이 아니다. 하늘은 허울도 바탕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위와 아래와 사방도 없 고, 겉도 속도 다 비어서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무엇이나 싸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 […… 하략 ……]> 또다시 종을 울리자 계피학발의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헬헬……, 대단한 학문이로고. 그래, 이번엔 무엇을 얻었는가?" "노인장! 소생은 이곳에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듯함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안개와 같아 무엇을 얻었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소이다." "헬헬, 얻음이 얻지 않음이고, 잃음이 잃지 않음이라는 원리를 깨우칠 날이 있을 걸세. 노부도 그것을 깨우치느라 백 년 세월을 보냈다네." "예에? 배, 백 년이나요?" 남궁호는 노인의 나이가 백 세를 훨씬 넘겼다는 사실을 알고 해연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헬헬헬, 그래도 네녀석은 노부보다 훨씬 나은 모양이구나. 헬헬……, 노부는 거기에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는 데만도 십 년이 걸렸다. 헬헬헬, 이제 마지막 관문이다. 어서 가거라. 네녀석이 한족임을 알지만 부디 오 관문을 깨거라.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노인장!" 남궁호가 정중히 포권하는 사이 노인은 또다시 사라졌다. 이번엔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일부러 고개를 덜 숙이던 남궁호는 또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은 마치 아침 햇살에 안개가 스러지듯 그렇게 사라졌던 것이다. "세, 세상에! 저런 신법이……." 남궁호는 자신이 비교적 많은 무공의 구결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사라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이동하는 신법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과연! 태극은하궁의 무학이 중원의 그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구나." 크게 고개를 끄덕이던 남궁호는 마지막 관문이 준비되어 있는 전각으로 향하였다. 그곳 역시 탁자 하나와 의자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벽에 걸려 있는 족자 하나가 있었다. <족자의 글귀를 번역하시오. 시간은 열 시진이오.> "저, 저건 사라진 지 이미 삼천 년이 훨씬 넘었다는 가림토 문자? 세상에!" 남궁호는 넋을 잃다시피 하였다. 가림토 문자는 중원에서는 전혀 사용된 적이 없는 문자였다. 그것은 예전 중원 동북쪽 드넓은 평야를 차지하고 있던 한족(韓族)들이 주로 사용하던 문자이다. 생사신의가 남긴 죽편에는 별의별 사어들이 다 기록되어 있었으나 그 역시 가림토 문자에 대해서만은 잘 모르는 듯 아주 기초적인 몇 자 외에는 없었다. "이건 자신없는데……." 남궁호는 처음으로 자신을 잃었다. 그로서도 가림토 문자는 넘을 수 없는 철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버님?" 옥기린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 모친의 제사를 마치고 한담을 나누다 부친의 처소인 태극전에 들렀던 그는 태극오관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묻다가 이렇게 된 것이다. "이 아비를 원망하지 말거라. 한족은 한족과 혼례를 올리는 것이 좋다. 네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렇게 하였다." "아버님! 녹도문과 전비문은 집현전 학사들조차 그 오의를 깨치지 못하여 머리를 싸매게 하는 문자들 아닙니까? 좋습니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가림토는 정말 너무하셨습니다. 본궁에서도 그 족자에 쓰인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한데 그런 것을 관문에 걸다니요? 이건 너무 불공평합니다. 가림토 문자는 우리 한족만 쓰던 문자가 아닙니까? 그것을 한족(漢族)인 남궁 아우가 어찌 읽을 수 있겠습니까?" 옥기린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부친에게 항의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족 최고의 두뇌들이 모였다는 집현전 학사들조차 어려워하는 녹도문과 전비문, 그리고 더 나아가서 가림토 문자로 남궁호를 시험한다는 것이 공정치 못한 처사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참전계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삼일신고의 신자는 중원에서는 전혀 사용치 않는 글자라는 사실을 부친이 모를 리 없다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고조선 시대 이전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가림토 문자는 자신은 물론 태극은하궁 최고의 학사인 새반안도 모르는 문자였다. 그런 것을 관문으로 걸었다는 것은 고의적으로 남궁호가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려는 술책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남궁호와 세외천미 간의 혼사는 물 건너간 것과 같다는 말이 된다. 누이동생의 행복을 기원하는 일념에서 며칠 동안 부친에게서 면박당하면서까지 설득하던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허무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동방예의지국의 후손답게 부친의 처사에 굴복한 옥기린은 쓸쓸한 발걸음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휴우! 이제 이를 어쩐다?" 옥기린은 아까 제사를 마치고 누이동생에게 넌지시 건넨 말이 있었다. 그 말을 한 것이 이제와 몹시도 후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아까 세외천미에게 남궁호가 태극오관을 통과하면 그와 혼례를 올릴 수 있을 것이란 의미의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환하게 밝아 오던 세외천미의 옥용을 생각하니 옥기린은 어깨가 축 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말을 하지나 않았다면 누이동생이 받는 마음의 상처가 적었을 것인데, 하는 생각을 하며 돌아간 옥기린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취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그의 이런 심사를 전혀 짐작도 못하는 새반안은 형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는지 얼이 빠진 채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한편 같은 시각, 무릉소축에서는 흥에 겨워 흥얼거리는 세외천미의 콧노래 소리가 있었다. "라라랄…… 랄라라라……!" 마치 지저귀는 새의 노랫소리 마냥 경쾌하고 부드러운 노래는 그녀의 심사를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녀의 의복 중 가장 화사하고 화려한 연분홍 궁장을 골라 걸친 그녀의 모습은 선계(仙界)의 선녀보다도 월궁(月宮)의 항아(姮娥)보다도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못하지 않을 그런 모습이었다. 게다가 옥용 가득히 즐거운 빛을 흘리고 있기에 그녀의 시비들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며 어디론가 가 버린 지 오래였다. 사실 세외천미의 세 시비인 유연(琉淵), 채향( 響), 규진(圭珍)은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치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유연이 마치 만개한 장미처럼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녔다면, 채향은 고고한 난향(蘭香)이 느껴질 만큼 고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규진은 마치 드넓은 창공을 마음껏 희롱하며 노니는 제비처럼 늘씬하고 활짝 핀 도화(桃花) 같은 요염함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었다.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 화용월태(花容月態), 침어낙안(侵魚落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손색이 없을 미인들이었다. 아마도 그녀들 셋이 시대를 달리하여 태어났다면 각기 양귀비나 서시, 달기를 밀치고 그 자리에 앉았을지도 모른다. 또 지금이라도 강호로 나간다면 적어도 일개 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칭송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들의 미모로도 세외천미에 비하면 약간의 손색이 있었다. 그녀들이 지닌 모든 아름다움이 그녀의 한 몸에 부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역천내미지상을 타고나 보면 볼수록 아름다움이 더해 가는 그런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세 시비는 같은 여인의 몸이면서도 세외천미가 방긋거리며 웃는 모습에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뭔가 요상한 기분이 들어 자신들의 처소로 사라졌던 것이다. 세외천미는 이제 잠시 후면 남궁호가 당당히 태극오관을 깨고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태극오관이 결코 무공을 시험하는 관문이 아니라 도전자의 두뇌가 얼마나 뛰어난 지를 가늠하는 곳이라 들었기 때문이다. 전에 절벽 밑에서 같이 생활할 때 그녀는 남궁호의 두뇌 속에 대체 어떤 것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추측할 길이 없어 경탄한 적이 있었다. 거의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알기에 은 연중 태극은하궁 제일수재인 새반안과 비교해 본 적이 있었다. 그 결과 그녀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남궁호가 결코 새반안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그의 능력이라면 능히 태극오관을 깰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와의 혼사를 오라비인 옥기린이 적극 추진하겠다 하였기에 이제 그와 맺어지는 일만 남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옥용이 이토록 밝았던 것이고, 절로 콧노래가 나왔던 것이다. "랄라라…… 랄라라랄라……!" 무릉소축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선율은 세상의 근심을 모두 잊게 할 만큼 밝고 아름다웠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대체 무엇을 적었는지 어디 살펴보기나 하자. 흐음, 이건 일(一)이다. 이건 모르겠고, 이것들도 모르겠고. 엉? 또 일이네? 이건 모르겠고, 이건 삼(三)인데? 대체 무얼 적었기에 숫자가 이렇게 자주 나오지? 혹시, 주사위 놀이에 대한 것인가?" 남궁호는 족자에 적힌 문자들 가운데 자신 해독할 수 있는 가장 초보적인 몇 자를 보고서 대뜸 도박장에서 사용하는 주사위 노름에 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과연 중원제일 도신(賭神)인 운구기일다운 발상이었다. "가만 있자? 그럼 육 이하의 숫자만 나와야 하는데? 엉? 이건 칠이고, 이건 팔, 이건 구네? 그럼 주사위에 대한 것은 일단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숫자들이 반복해서 나오는 거지?" 남궁호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가림토 문자는 그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고, 그 연원조차 알 수 없는 문자이기에 다른 것들을 응용하여 유추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그가 일부터 십까지의 숫자를 아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한동안 족자를 뚫어져라고 살피던 남궁호는 회광상단심법을 다시 운용하여 자신의 뇌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더듬었다. 그 동안 엄청난 분량의 서책을 독파하였는지라 그의 뇌 속에 들은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아마도 중원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황과수에서는 마땅히 할 만한 다른 일이 없기에 화련득전장에서 실어 온 수만 권의 서책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였던 것이다. 그 안에는 세상에 있을 법한 온갖 해괴한 것에 대한 서책들도 있었기에 그의 뇌 속에만도 수천 권 분량에 달하는 잡서들에 대한 지식이 들어 있었다. 다른 것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거의 한 시진 가까이 머릿속을 더듬던 그의 눈이 번쩍하고 뜨이자 그의 눈에서는 희열의 빛이 흘러 나왔다. 뭔가를 깨달은 자의 눈에서만 나올 수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렇다! 이건 분명 전에 철기보 지하 뇌옥을 빠져나올 때 들었던 여든한 자로 된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석삼극(析三極) 무진본(無盡本) 천일일(天一一) 지일이(地一二) 인일삼(人一三) 일적십거(一積十鋸) 무궤화삼(無 化三)……. 맞아, 순서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족자의 글을 읽어 내리는 남궁호의 눈에는 희열의 빛이 가득하였다. 그는 전에 철기보에서 냉혈장비 독고태인에게 일 년 가까이 잔혹한 고문을 받다 모친의 사부인 창궁일학에게서 무공에 입문한 뒤 그의 배려로 지하 뇌옥에서 탈출하며 우연히 한 여인이 되풀이하여 되뇌는 것을 들었던 바로 그 이상한 경문을 여기서 다시 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 여든한 자에 어떤 현묘한 이치가 담겨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황과수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 오의를 깨우치려 여러 번 노심초사하였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깨우칠 수 없었다. 여든한 자의 경문만으론 무엇을 유추해 내기가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남궁호의 눈에서 이토록 희열의 빛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곳 태극오관을 통과하면서 보았던 두 권의 서책에서 희미하기는 하지만 어떤 심오한 무리(武理)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이 기초가 되어 지금 읽고 있는 족자의 여든한 자에 대한 어렴풋한 무리를 또다시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긴 분명 무엇인가가 있다! 으음, 이 경문은 단순히 세상의 어떤 이치를 가르치려는 의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 그것이 분명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끊임없이 탐구한다면 언젠가는 그 오의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좋다, 언제고 찾아내고야 말겠다!" 붓을 들어 일필휘지로 족자의 글을 번역하는 남궁호의 손은 희열에 젖어 약간씩 떨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정실에 머문 것은 거의 열 시진 정도였다. 그가 사 관문을 돌파하고 오 관문에 들어 밖으로 나오지 않는 다는 보고를 들은 천령군은 크게 놀랐다. 남궁호에게 어느 정도의 학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지만 설마 녹도문과 전비문을 태극은하궁 집현전 학사들보다도 빨리 번역해 낼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남궁호가 마지막 관문은 절대 깨지 못할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오 관문에 내걸린 족자는 태극은하궁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를 필사(筆寫)한 것이었다. 제일대 궁주였던 무신(武神)이 세상을 떠나면서 수천 년 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분이 을지가(乙支家)에 하사한 보물이라며 소중히 다뤄 줄 것을 부탁하였기에 대대로 내려오던 물건이었다. 무신의 후손들은 족자에 적힌 괴상한 문자가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이것을 해독하려 갖은 애를 썼지만 지금까지 해독할 수 없었다. 하여 일부러 남궁호를 탈락시키려 마지막 관문에 있던 것을 이것으로 대체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천령군의 얼굴에 여유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옥기린의 얼굴은 잔뜩 이지러졌다. 사 관문을 통과하고 오 관문에 들었다 할 때에는 자신의 무릎을 손으로 내리치며 쾌재를 불렀었다. 그러나 오 관문에 들어간 지 다섯 시진이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불안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덮었었다. 혹시나 하였지만 족자의 가림토 문자를 떠올린 그는 절망, 그 자체의 표정을 지었다. 새반안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포기했던 족자의 글을 남궁호가 풀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희망이 아주 없다 생각하였던 것이다. 시간이 자꾸 흘러 열 시진이 되어 갈 무렵, 그는 자신의 처소에서 완전히 탈진한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였기에 태극전에서 물러났던 것이다. "소궁주님! 소생, 곽은호(郭殷豪)입니다." "웬일이냐?" 옥기린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물었다. "소궁주님, 그가 방금 전 오 관문을 돌파하였다고 하옵니다." "뭐, 뭐라고? 방금 뭐라 말하였느냐?" 옥기린은 너무도 놀라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침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반문하였다.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남궁 공자께서 조금 전 태극오관을 돌파하여 현재 태극전에 있다 하옵니다." "그, 그 말이 정말 사실이더냐? 알았다!" 옥기린의 신형은 그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태극전으로 향하였다. 가히 섬전과 같은 속도였기에 곽은호는 자신의 곁으로 옥기린이 스쳐 지나간 것을 그저 한 줄기 돌풍이 지난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차암 이상하시네? 평상시엔 차분하기로 이름난 소궁주가 대체 왜 저토록 허둥지둥하는 거지?" 곽은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사라졌다. "우웃! 이, 이건……. 처, 천부경(天符經)이다! 그렇다면……? 이, 이건 그 분께서 직접 본가에 하사하신 것이란 말인가?" 남궁호가 번역한 것을 받아 든 천령군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족자를 보관한 정실에는 그것을 보관하기 시작한 연유가 자세히 기록된 서책이 있었고, 그 외에도 전대 궁주들이 그것에 대하여 나름대로 얻은 심득(心得)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천령군이 이토록 격동하는 것이었다. 만일 남궁호가 번역한 것이 천부경이 맞다면 그 족자는 바로 한족의 시조(始祖)이신 단군(檀君)께서 친히 을지가에 하사한 물건이라는 말이다. 천령군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남궁호를 바라보았다. "분명 족자에 적힌 것은 여든석 자인데 왜 여든한 자만 번역한 것이오?" "소생, 실력이 부족하여 마지막 남은 두 글자는 해독할 수 없었습니다. 족자의 글은 오래 전 한족(韓族)들이 주로 사용하던 가림토 문자로 되어 있는지라 중원인인 소생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남궁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천령군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지며 음성이 들려왔다. "처소로 돌아가 잠시 기다리시오. 본 궁주에게 급한 용무가 생겼소이다." 천령군은 사실 남궁호가 해독한 족자의 글이 천부경이란 사실을 알고 나머지 두 자의 해독을 지시하려 집현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든한 자를 알아냈다면 다른 두 자를 해독해 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궁호는 천령군이 경악하다가 갑자기 사라지며 전음을 남기자 잠시 멈칫하다 입을 열었다. "쳇! 시간만 더 있었으면 나머지 두 자를 해독해 낼 수 있다 하려 하였는데……." "아우! 이보게, 아우!" 이때 옥기린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대형, 대체 왜 이러십니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헉헉! 아, 아우! 고맙네, 정말 고맙네!" 옥기린은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감격에 겨워 남궁호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때 남궁호는 대체 옥기린이 왜 이러는가 싶어 멀뚱멀뚱 서서 그 연유를 생각하고 있었다. '후후……, 대형도 궁주님처럼 내가 그것을 해독한 것이 기쁜 모양이군. 한데, 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격동하는 거지?' 그 사이 옥기린은 남궁호의 등을 세게 두들기며 소리쳤다. "하하하, 되었네. 이제 되었네. 정말 수고가 많았네!" "아니, 대체 무엇이 되었다고 하시는 겁니까? 소생은 통 무슨 영문인지……." "하하하, 두고 보면 알게 될 걸세. 정말 수고하였네." "……?" 남궁호는 대체 왜들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옥기린은 포옹을 풀 생각도 않고 계속하여 그를 끌어안은 채 마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는 듯 움찔거리기까지 하였다. "이보게, 아우! 정말 수고하였네. 이런 기쁜 날 한 잔 술이 없어서는 안 될 말! 얼른 가세. 한 잔 하세나." 남궁호는 이 말이 가장 반가웠다. 그가 태극오관에 들어간 지 벌써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훨씬 넘었기에 뱃속에서 식충(食蟲)들이 빨리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하하……, 그러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남궁호는 자신이 태극은하궁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였는지도 모르고 그저 배가 고프니 음식이나 먹으러 가자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본 옥기린은 잠시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터뜨리다 서둘러 그를 데리고 자신의 전각으로 향하였다. 같은 시각, 집현전 학사들은 때아닌 궁주의 집합 명령에 일제히 집결하여 그의 면전에 도열해 있었다. "본 궁주가 학사들을 집결시킨 것은 본궁의 오랜 숙원이던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될 조짐이 있어 그대들을 부른 것이다." "……?" "본궁 대대로 내려오던 족자에 적힌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 이것이 여든한 자를 번역한 것이다. 내용은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천부경이다. 그러나 나머지 두 자만은 아직 해독을 할 수 없었다. 그대들은 서둘러 나머지 두 자를 해독하라. 만일, 만일 그 두 자가 우리의 시조이신 단군이라면, 본궁은 그 분이 남기신 유품을 보관하는 성스러운 장소가 될 것이다." 학사들은 느닷없는 궁주의 말에 잠시 웅성거리다가 그의 마지막 말에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 모두는 족자가 어떤 연유로 태극은하궁에 보관되어 오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궁주의 말대로 나머지 두 자가 단군이라는 글자로 판명되면 그것은 한족 최고의 보물이 될 것이다. 시조가 친필로 남기신 족자를 보관하고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마도 한족이 아니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즉시 여든한 자를 번역한 것과 족자의 원문이 비교 분석되었고, 나머지 두 자가 단군이라 쓰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불과 한 시진이 걸렸을 뿐이다. 최종적으로 태극은하궁 제일수재인 새반안이 그것이 맞다고 추인하자, 천령군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오오, 조상님들이시여! 드디어 족자의 비밀을 알아냈소이다.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하나이다!" 그가 감격하여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고 있을 때, 집현전 학사들은 일제히 의복을 정제하였다. 잠시 후 천령군 역시 의복을 정제한 후 족자의 원본이 보관되어 있는 태극은하궁 제일 중지(重地)인 태극은하전(太極銀河殿)으로 향하였다. 그 사이 전대 궁주인 무림왕 을지한담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으며 모든 궁도들에도 전해졌다. 반시진 후 태극은하전이 있는 너른 마당에는 이십만에 달하는 태극은하궁의 모든 궁도들이 운집하였다. "아버님! 이는 천우신조입니다. 누구도 풀지 못하였던 족자의 비밀이 이토록 쉽게 풀어지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습니다." 천령군의 말에 무림왕 을지한담의 노안에도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바로 남궁호가 제사관문을 통과할 때 보았던 바로 그 계피학발의 노인이었다. "남궁 소협이 본궁을 위하여 참으로 엄청난 공로를 세웠구나. 무엇이든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도록 하여라!" "아버님! 소자가 들어보니 남궁 소협은 인아에게 뜻이 있는 듯하옵니다. 그가 비록 한족(漢族)이지만 소자는 기꺼이 그에게 인아를 주려 하옵니다." "허허……, 그렇단 말이지?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라. 혼례식은 성대하게 하도록 하고, 모든 궁도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하거라. 그리고 오늘을 기리기 위하여 앞으로 열흘 동안 성대한 잔치를 열도록 할 것이며, 매년 오늘이 되면 성대한 잔치를 베풀도록 하라!"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소자, 반드시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천령군은 부친인 무림왕이 인가를 하자 이제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그가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희열에 찬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남궁호와 세외천미를 맺어 주는 데 있어 그가 한족이라는 꺼림칙한 기분도 전혀 들지 않았다. 이제 둘이 맺어지는 데 있어 모든 장애물이 제거된 것이다. 아마도 태극은하궁의 그 어느 누구도 그들 둘의 혼례에 이견을 낼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남궁호가 세운 공로는 지대하였던 것이다. 곧 태극은하전에서는 성대한 제사가 이루어졌다. 취타대(吹打隊)의 은은한 가락 속에서 치러진 제사는 태극은하궁이 매년 원단에 치르던 제사와는 격이 달랐다. 경건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진중하기 이를 데 없는 장중한 제사였다. 태극은하전은 단군성전(檀君聖殿)으로 개명되었다. 궁주를 포함하여 누구든 이 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엎드려 절을 하여야 하며, 근처 백 장 안에서는 음주 가무가 금지되었다. 이제 이곳은 적어도 한족에게 있어서만큼은 최고의 성지가 된 것이다. 또한 매년 원단이 되면 전 궁도들이 이곳에 모여 성대한 제사를 지내도록 궁규(宮規)가 새롭게 고쳐졌다. 전에는 수뇌부들만 모여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한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남궁호는 보는 사람마다 공손하게 절을 하는 통에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그가 자는 사이 제사가 치러졌고, 그가 바로 오랜 숙원을 해결한 인물이며, 장차 세외천미의 부군이 될 인물이라 발표되었기에 이토록 정중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 "아니, 대체 왜들 이러지? 이상하네?" 남궁호가 어리둥절할 때, 옥기린과 새반안이 다가왔다. "하하…… 아우, 이제 다 쉬셨는가?" "어어? 형님들! 한데, 다들 왜 저한테 이러는 거죠?" "하하……, 무엇이 이상한가? 이건 다 자네가 태극오관을 돌파하여 그러는 것이니, 너무 신경쓰지 말게. 그리고 아버님께서 자네를 부르니, 어서 가기나 하세." 남궁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그들을 따라 태극전으로 향하였다. "허허……, 오서 오시게. 수고가 많았네." "소생이 궁주님을 뵈옵니다." "허허……, 이리로 앉게." 남궁호는 궁주의 집무처인 이곳 태극전에 모든 수뇌부들이 뻑적지근한 잔칫상을 벌려 놓고 앉아 있자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하면서도 안내하는 대로 앉았다. 그는 궁주일가가 앉는 가장 상석으로 안내되었다. 그의 곁에는 세외천미가 면사를 쓰고 앉아 있었으며, 그의 맞은편에는 옥기린과 새반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보다 상석인 중앙에는 천령군과 계피학발의 노인이 있었다. "아니, 노인장은? 후후……, 이곳에서 또 뵙는군요." "허허……, 인사드리게. 본궁의 태상궁주님이시네." "예에? 태상궁주님이라 하심은……. 그렇다면 무림왕 을지한담 노선배님이시란 말씀이십니까?" 남궁호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천령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허허……, 그렇네. 본 궁주의 아버님이시지." "무림의 말학, 남궁호가 태상궁주님을 뵈옵니다." 남궁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서 정중히 포권을 하였다. "헬헬……,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 하였으니 그만 자리에 앉으시게." 무림왕은 계피학발의 노안에 미소를 띠며 손사래를 하였다. 남궁호는 자신이 제아무리 태극은하궁의 손님이지만 너무 과도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아 좌불안석인 채로 연회를 마쳤다. 곁에 앉아 있던 세외천미가 마치 그의 처라도 된 듯 너무도 현숙하게 그의 음식 수발까지 들었으나, 이를 제지하거나 탓하는 듯한 분위기가 아니자 더욱 그러하였다. '대체 왜들 이러지? 태극오관을 돌파한 것이 이토록 큰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인가?' 남궁호가 의문에 잠긴 채 연회를 마치고 나서려 할 때, 그의 귀로 전음이 들려왔다. "헬헬……, 노부에게 잠시 들리거라." "……!" 남궁호는 어디에서 전음을 보내는지 모를 육합전성(六合傳聲)을 듣고 주위를 살폈으나 어디에도 무림왕은 보이지 않았다. "소저! 태상궁주님의 처소가 어디이오?" "예? 대체 그건 왜……." "후후후, 소저의 조부께서 방금 소생을 부르셨소이다." 남궁호의 말을 들은 그녀의 옥용에는 잠시 발그레한 빛이 흘렀다. '호호호, 할아버지께서 남궁 공자에게 우리의 혼사에 대하여 말씀하시려는가 보구나.' 세외천미는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은 뒤 조부의 거처를 알려 주었다. 그러고는 마치 도망치듯 그렇게 무릉소축으로 가 버렸다.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들 이러지? 이상하네, 정말!" 남궁호는 세외천미가 친절하게 안내라도 해 줄 줄 알았는데 그냥 가 버리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가 가르쳐 준 대로 갔다. 잠시 후 남궁호는 허름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초가의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크기도 별로였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중원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초라한 초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초가의 지붕에 얹혀 있는 현판은 그렇지 않았다. 찬란한 보광(寶光)을 발하는 그것은 황금과 보석들로 만든 듯 보였다. <광개토전(廣開土殿)> "광개토전이라 함은 아마도 고구려가 가장 강성할 때 이십이 년 간 군림했던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한 전각인 모양이군." 남궁호는 천천히 자신의 뇌리를 뒤졌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대략 천 년 전에는 중원은 장강을 분계로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시대였다. 그때 장강 이남은 한족(漢族) 왕조가 통치를 하였으나 북조는 아니었다. 선비족, 갈족, 강족, 저족, 흉노족, 이렇게 다섯 이민족이 이주하여 열여섯에 달하는 나라를 세웠던 혼란의 시기였다. 흔히 말하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였던 것이다. 이때 고구려의 왕이었던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이끌고 비옥한 중원으로 진격하여 엄청난 넓이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광개토대왕 사후 그의 후계를 이은 장수왕 역시 선친 못지않은 활약을 하였다. 이때가 한족(韓族)이 최고조로 강성했던 시기였다. 고구려의 철갑기병을 깰 수 있는 군사는 그 어디에도 없었기에 무한정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당시 오호십육국들은 혹여 고구려가 자신들을 칠 것을 두려워하였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었다. 한족들은 그 후 당나라가 건국되면서 전투에 패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 갔던 것이다. 아마도 무림왕은 대고구려라 불리던 그때를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자신이 머무는 초가에 광개토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 것이다. 현재 태극은하궁이 자리하고 있는 대흥안령산맥도 당시에는 고구려의 영토였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태흥안령산맥이 고구려의 영토였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