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Don Quixote, 1605, 1615) / 세르반테스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1605년에 출판한 소설. 전 세계 문학사를 대표하는 고전 중 하나다.
총 2부작으로 구성되는데, 전편은 1605년에 발표되었다.
후편은 10년 후인 1615년에 발표되었는데, 세르반테스는 그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전편의 제목은 《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
(재치 있는 이달고 라 만차의 돈키호테), 후편의 제목은 《Segunda parte del ingenioso cavallero Don Quixote de la Mancha》
한편 돈키호테가 여행을 떠나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해프닝을 그린 전편은
당시 기준 초대박인 3만부가 팔리며 대박을 치게 되었으나, 정작 세르반테스는 당시 빚에
쪼들리던 터라 이미 출판 저작권 상당수를 넘겨준 상태라서 큰돈을 벌진 못했다.
게다가 그가 받은 특허장이 그 당시의 카스티야 지방에서만 유효한 특허장이라서 리스본이나
다른 지방에서 나온 해적판이 카스티야로 역수입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출세작조차 경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진 못한 셈.
어쨌든 후편이 나오기 전에 다른 작가가 후속작을 써낼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온갖 해적판이 퍼져 나아갔는데, 일부는 신대륙까지 진출했다.
1부가 출판되고 7년 후에는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야말로 당대의 베스트셀러. 이러한 인기로 초판 400부 중 몇 권이 신대륙으로 보내졌고
출판사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더 나은 가격을 받기를 희망했다.
비록 대부분의 책이 아바나 근처에서 난파선 속으로 사라졌지만, 약 70부가 리마에 이르렀고
거기서 책은 사라진 잉카 제국의 중심부에 있는 쿠스코로 보내졌다.
돈키호테는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있었고, 세르반테스의 이름은 이제 스페인을 넘어 알려지게 되었다.
1605년 8월까지, 마드리드 판이 리스본에서 출판되었고, 또 발렌시아에서 출판되었다.
출판사 프란시스코 데 로블스는 아라곤과 포르투갈의 2판을 위한 추가 저작권을 확보했다.
이러한 출판권의 판매는 세르반테스가 1부에 대한 추가적인 재정적 이익을 빼앗았다.
1607년, 브뤼셀에서 판본이 인쇄되었다. 마드리드 출판사인 로블스는 1608년에 제3판,
즉 모두 일곱 번째 출판물로 수요를 충족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이 책의 인기는 밀라노 서점이 1610년에 이탈리아 판을 발행할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1611년에 또 다른 브뤼셀 판이 요청되었다.
이 작품은 뉴사우스웨일스 주립도서관의 세르반테스 컬렉션(Cervantes Collection)에는 판본
1100여 개가 포함되었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책이 큰 인기를 끌자 돈키호테 2편 서문에서 중국의 황제까지도
돈키호테를 읽고서 사신을 보내와 자신을 대학 총장으로 임명하려 했지만 거절했다고 허풍을 떤다.
이후 10년 후에 《돈키호테》의 후편이 발매되었고, 전작 이상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동시에 그 전에 발매된 가짜 후속작들을 완전히 발라버렸다.
사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2부 발매 후 세르반테스가 곧 세상을 떠난 걸 감안하면,
가짜 후속작들 덕분에 《돈키호테 2부》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돈키호테 2부》는 《돈키호테》라는 책이 출간된 상태에서, 그 책으로 인해 사람들이
돈 키호테와 산초를 알아보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자신들의 모험을 담은 책에 대해 궁금해 하는 대목도 나온다.
1권에 끼워넣어진 이야기들 대신에 《돈키호테》와 가짜 《돈키호테 2권》이 채워 넣어졌다고 보면 된다.
저 가짜 후속작 사건에 대해서 원작자인 세르반테스는 꽤나 분노했던 모양으로, 2부의 서문이나
전반에 관련 에피소드로도 등장한다.
후반부에는 돈 키호테는 나만을 위해 존재했다고 공언하기까지 한다.
아예 돈 키호테와 산초가 이 가짜 후속작을 직접 읽어보고 까는 장면도 있다.
까는 내용을 보면 설정파괴가 굉장히 심했던 데다가 필력도 떨어진 듯하다.
설정파괴의 예를 들자면 돈 키호테가 둘시네아에 대한 사랑을 버린다거나 산초가 식탐이 심하고
술주정뱅이로 나온다거나 한다. 이를 읽어본 산초가 황당해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
심지어는 저 가짜 후속작에 나왔던 캐릭터가 돈키호테와 산초를 만나며 자기가 만난
돈 키호테와는 딴판이라는 얘기를 하기 까지 한다.
돈키호테는 오직 나를 위해 태어났고, 나는 그를 위해 태어났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Es la misión del verdadero caballero. Su deber. ¡No! Su deber no. Su privilegio.
그것은 진정한 기사의 임무이자 의무. 아니!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노라.
Soñar lo imposible soñar.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Vencer al invicto rival,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Sufrir el dolor insufrible,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Morir por un noble ideal.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Saber enmendar el error,
잘못을 고칠 줄 알며,
Amar con pureza y bondad.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Querer, en un sueño imposible,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Con fe, una estrella alcanzar.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에 유행했던 기사도 소설을 조롱하기 위한 작품으로 나왔으며 대체로
정석적인 감상도 이쪽이다. 굳이 현대 한국에 빗대자면 양판소를 비판하기 위한 풍자소설쯤 되겠다.
아예 작중에 돈 키호테가 읽던 기사도 소설을 줄줄이 꺼내놓고 불살라버리는 장면까지 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는데, 펭귄 클래식판의 역자인 전기순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런데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조금씩 아이러니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포르노 영화의 해로움을 설득하기 위해 아들에게 며칠에 걸쳐 미친 듯이
포르노 영화를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아버지를 상상해보세요.
'도대체 얼마나 포르노 영화를 많이 봤으면...' '정말로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걸까?'
적지 않은 독자들이 <라만차의 비범한 이달고 돈키호테>를 읽어가면서 기사소설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또 그 매력에 젖어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니 어느순간 작가의 의도를 의심하게 될 수밖에 없지요.
기사도 문학을 비판하는 것 같지만, 기사도 문학을 비난하는 비평가들도 비판하고 있다는 평가도 있다
이 영상에 따르면 작중 돈 키호테의 모습은 민폐 투성이에 맛이 간 영감이지만 정작 그로 인한
결과는 좋은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1부만 해도 돈 키호테가 사고 치고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난게 서로 헤어졌던
연인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었고, 2부에선 돈 키호테가 공작 부부에게 림감이 될 무렵에는
그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부분도 있으며 원래 다소 무식한 농부였던 산초가
그와 함께 하면서 꽤 지혜로운 인물로 성장한다는 점에서 이상을 비웃는 사람에게 이상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이로운가를 역설하는 면도 있다고 얘기한다.
손 카라스코가 돈 키호테와의 결투에서 승리한뒤 그를 "치료"하려 한다는 목적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자 듣던 사람이 깜짝 놀라서 미친 돈 키호테가 세상에 주는 즐거움이
제정신인 돈 키호테가 주는 이로움보다 크다며 말리려는 모습도 나온다.
물론 일단은 '작가의 말'에 기사도 문학을 엿먹이고 싶어서 썼다고 밝히고는 있으니
엄연히 주된 해석은 '기사도 문학 비판'쪽이지만, 사실 저 작가의 말에도 세르반테스가
온갖 개드립을 쳐놨기 때문에 저것 또한 믿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 관점에 따라서 해석 자체가
완전히 뒤집힐 수 있을 만큼 모호함과 재치로 가득한 소설이며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꿈보다 해몽이 좋게끔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이다. 이런 강의도 있다.
이외 최근에 나온 돈 키호테의 해설서로는 출판사 작은길에서 나온 고전 찬찬히 읽기 시리즈 "돈 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과 돈 키호테의 번역자 중 한 명인 안영옥씨가 낸 "돈키호테를 읽다."가
나왔는데 저자 각자의 관점으로 돈 키호테에 대해 해설해주고 있다.
또한 스페인의 철학자 겸 유명 비평가인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 1883~ 1955)가
쓴 비평서인 "돈 키호테 성찰(Meditaciones del Quijote, 1914)"도 을유세계문학전집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또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돈 키호테의 고향인 라 만차는 구체적인 하나의 지역이 아니라
현대 마드리드 남부, 역사적 카스티야 지방의 남쪽에 있는 안달루시아와의 변경 지대를 의미한다.
현대 행정구역 상으론 카스티야-라만차 자치공동체의 알바세테, 시우다드 레알, 과달라하라,
톨레도, 쿠엔카 일대로, 더 세밀하게 보면 알바세테-톨레도-시우다드 레알 지방을 가로지르는
몬티엘 평야 일대가 주 무대이다.
그리고 작중 둘시네아의 고향인 엘 토보소는 톨레도 지방의 실존하는 마을이다.
미겔 데 우나무노를 비롯한 역사, 문학 비평가들의 평에 따르면 애초에 이야기의 무대를
라만차 지방으로 설정한 것 부터 세르반테스의 의미심장한 재치가 돋보이는 점인데, 이 지역은
먼 과거, 즉 세르반테스가 살던 16세기 기점으로는 가까운 과거였던 레콘키스타 시절만 해도
남부의 무어인 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국경 지대였으며, 따라서 용병업으로 먹고 사는
유와 기사들을 비롯한 개척자 사회의 언더독들이 많으며, 오랜 전쟁에서 다져진 상무
정신을 굉장히 높게 쳐 주는 지방이었다.
한때는 이렇게 이베리아 반도의 중부 지방에 있다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톨레도를 비롯한
경제적, 문화적 번영도 누렸으나 세르반테스가 살던 16세기 말에는 신흥 수도 마드리드의
성장과 스페인 제국 전반의 경제적 침체, 그리고 이 와중에서 중앙 정부의 입김에 직접적으로
노출 되어 집중적으로 당한 경제적 착취 때문에 라만차를 비롯한 카스티야 전반이 침체되고
황폐해지던 시절이었다.
이 와중에서 토질과 풍경도 척박하기 짝이 없는 라만차 출신으로 끊임 없이 지나간 시대의
이상과 대의를 외치는 돈 키호테야말로 당시 경제적으로 황폐해져가면서도 스페인 군사 문화와
기사 계급의 수도로서 지역적 자긍심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던 남부 카스티야의 지역적 영혼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세르반테스 본인만 하더라도 이 라만차가 포함 된 카스티야 라 누에바의 지방 대학도시였던
알깔라 데 에나레스 태생이기도 했고. 지금도 카스티야-라만차 지방에 가면 소설에 나오는
풍차와 황량한 산맥들을 고속도로변이나 도시 외곽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돈키호테가 최고의 소설이라고 호평 받는 이유는 형식과 내용 두 가지에 걸쳐 있다.
우선 형식 면에서는 그 안에 근대적 맹아가 다 들어있다.
17세기 초 작품인데 상호 텍스트성, 작가의 죽음, 독자비평 같은 것들이 다 나온다.
그 이전 및 비슷한 시기, 심지어 이후의 문학조차 현대인이 읽으면 매우 낯설 정도로
현대 문학과 괴리가 큰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가 흔한데, 돈키호테는 그런 점에서는
비교적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내용 면에서는 우리가 인간이기를 잊을 때,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제 모습을 잊을 때 우리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를 둘러싼 환경, 정치, 사법체계, 경제는 어때야 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돈 키호테 데 라 만차와 애마 로시난테, 그리고 순진한 산초 판사의 모험집.
시골 지주인 알론소 키하노(Alonso Quijano)가 기사도 소설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망상이
심해져서 자신을 진짜 기사 돈 키호테로 생각하게 되고, 자신이 생각해낸 가상의 레이디인
둘시네아 공주를 그리며 세상의 악을 무찌르기 위해 여행을 떠나서 겪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참고로 돈 키호테는 위에도 있다시피 Don Quixote로, Don은 존칭이자 우두머리와 비슷한
의미이고 Quixote가 이름이다. 즉 띄어 쓸 때는 돈 키호테로 써야 한다. 키호테가 무슨 뜻인고 하니,
허벅지 안쪽을 보호하는 갑옷 부위로, 정력을 의미하는 은어다.
즉 호칭부터 '정력왕'이라는 의미라 성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농담.
우선 돈 키호테의 배경이자 당시의 스페인에서 기사가 어떤 존재였는지부터 알고 들어가는 것이 좋다.
돈 키호테가 생각하는 '중갑기병'으로서 기사는 도태된 지 오래고, 총의 보편화로 기사하면
생각나는 전신갑주는 흉갑을 제외하고 사라졌다.
'기사'는 귀족 군인이 하사받는 호칭으로나 남아 있었다. 즉 아주 옛날에나 쓰던 중갑을 착용하고
비루먹은 말을 끌고 다니는 꼴은 당시 사람들도 폭소를 터트릴 만한 모습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본작이 집필된 시대는 16세기 말이고, 스페인 문학사에서 본문에서도 수없이
언급되는 골족의 아마디스 같은 르네상스 기사도 문학이 가장 유행했던 때는 작품이 집필된 시기에
대충 60대쯤이라 설정된 돈키호테가 어린 소년이었을 시절, 즉 16세기 초중반 코뮤네로 봉기
전후로 카를 5세 치세 무렵이었다.
스페인어 원문으로 보면 가장 전형적인 예로 현대 와선 hermano(형제), Hernando(에르난도 이름)을
돈키호테는 fermano, Fernando란 식으로 H 대신 F를 쓰는데 이 철자 변화가 생긴 때가 16세기 중반쯤이다.
전통적인 중세 유럽의 중갑 기사 기병도 16세기 초반 이탈리아 전쟁까지는 엄연히 현역으로 맹활약하다.
1525년 파비아 전투 때 전 유럽이 주목하지 않을수 없을 만큼 대규모 군사기술적 혁신을 겪고
16세기 중반 생캉텡 전투쯤 되면 스페인군에서 모습이 거의 완전히 사라졌으며, 산티아고
기사단을 필두로 15세기 말까지만 해도 진짜 '기사단'으로서 군사적 목적이 뚜렷했던
성직기사단들 또한 이 시대를 기점으로 군사적 목적은 거의 사라지고 귀족들의 친목집단으로 성격이 변했다.
따라서 세밀하게 따지고 보면 작중에서 돈키호테는 진짜 아아주 옛날이 아니라, 딱 그 시대
살아있는 노년들은 대충 기억할 법할 16세기 초반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의 시점에선 진짜 조선시대라기보단 딱 구한말, 6.25 전쟁 이전 어렴풋하게
그 사회의 세대적 기억 끄트머리에 남아 있는 과거의 모습이 시대의 벽을 찢어발기고
현대에 툭 튀어나왔으니, 깨면서도 뭔가 친숙하고 익숙해보이는 것이다.
돈키호테란 작품을 카스티야 지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작품이라 설정하고 해석할 때
돈키호테는 이렇게 멀면서도 가까운 과거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이란 미묘함이 굉장히 중요하다.
스페인의 라만차의 어느 마을에 사는 알론소 키하노라는 이름의 쉰 살도 넘은 이달고(하층 귀족)가
그 신분에 어울리게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시 유행하던 기사도 소설에 빠져 밤낮 가리지 않고 식음을 전폐한 채 탐독한 나머지,
급기야 미치게 되어 스스로 편력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몸소 세상에 정의를 내리고 불의를 타파하며 약자를 돕겠다는 원대한 꿈을 세우고 실현하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 기사가 되기 위해 자신의 이름부터 기사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돈키호테 데 라만차'로 고친다.
그리고 이웃 마을의 촌부 알돈사를 사랑하는 여인으로 세워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이름의 공주이자
귀부인으로 격상시킨다. 그런 다음, 증조부로부터 내려오던 낡은 갑옷으로 무장하고 비쩍 마른 말인
로시난테에 올라 세 번에 걸쳐 길을 나선다.
첫 번째 출정에서는 객줏집 주인에게서 기사 서품을 받고 그의 충고대로 기사로서 갖추어야 할 것들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집으로 돌아오다가 안드레스 소년과 그의 주인 후안 알두도를 만난다.
돈키호테는 이들에게 정의를 행함으로써 자신의 정의가 어떤 것인지 전한다.
이어 만난 톨레도 상인들에게도 맹목적인 믿음을 요구하지만, 이에 대한 답으로 상인들의 우롱과 매질만 돌아온다. 만신창이가 되어 땅바닥에 나뒹굴며 자신이 만투아 후작의 로만세에 나오는 발도비노스라는 생각에 고통을
호소할 때, 이웃인 페드로 알론소가 그를 알아보고 집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사흘간의 첫 출정은 끝난다.
집에서 몸을 추스르는 사이 마을 신부와 이발사와 가정부와 조카딸은 돈키호테 서재의 책 검열과
화형식을 행하고 그를 광기로부터 끌어내려 한다. 그래놓곤 돈키호테가 따지자 한다는
변명이 '마법사가 그랬다.' 결국 돈키호테는 종자 산초를 대동하고 두 번째 출정에 나선다.
두 번째 출정에서 돈키호테는 일신상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모험을 불사한다.
하지만 승리는 단 몇 차례, 거의 항상 부서지고 깨어지기만 할 뿐이다.
오로지 자신의 이상만을 추구하는, 그래서 실패에 대한 인식도 없는 광인 돈키호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현실을 잊지 않고 욕심을 채우며 겁도 많지만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주인에게
충실하기 그지없는 단순 소박한 종자 산초, 이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충돌은 독자들에게
끝없는 유쾌함과 해학을 선사한다.
다양하게 삽입된 모든 장르에 걸친 이야기들 속에서 산초는 수많은 속담과 의견들을 쏟아놓는다.
그리고 주인 돈키호테의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를 비롯해 군사, 행정, 법, 자유, 평등, 인류애 및
경제와 문학, 통치, 철학 등에 관한 인본주의적이자 이상주의적인 해석이 넘친다.
이것은 사랑과 믿음과 소망의 주제와 맞물려 한 권의 금언집이나 도덕서로 탄생하고도 남을 정도이다.
돈키호테는 이 두 번째 출정에서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우리에 갇히고
소달구지에 실린 채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로써 돈키호테 이야기의 전편인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는 끝난다.
전편이 출판되고 10년이 지난 1615년, 돈키호테가 한 달간 집에서 요양하다가 세 번째로 집을 나서는
내용으로 속편 '기발한 기사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출판되었다.
'행동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이달고에서 기사가 된 돈키호테와 그의 종자 산초가
한 일들이 책으로 출판되어 세간의 호평을 받았으며, 이제 세상 사람들 모두 이 두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는 시작된다.
전편을 통해 이들을 알게 된 공작 부부가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이 두 주인공을 가지고 집요하게 장난을 친다.
이런 장난과 더불어 돈키호테를 고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한 삼손 카라스코 학사의 끈질긴 추적이 이어진다.
산초는 바라타리아 섬의 통치자가 된다. 돈키호테는 '하얀 달의 기사'로 분장한 삼손 카라스코에게
패해 편력 기사로서의 모험에 종지부를 찍고 집으로 돌아와 꿈을 잃은 자로서 우울증에 빠져 영면한다.
통치 경험을 마친 산초가 자신의 꿈은 어리석은 자의 소망이었음을 고백하는 모습 또한 의미심장하다.
자신의 당나귀에게로 가서 돈키호테와 지냈던 시절이 가장 평화롭고 행복했다는 그의 술회와 임종을
앞둔 돈키호테에게 어서 일어나 편력 기사로서 모험을 찾아 다시 나가자며 터뜨리는 오열은, 현실 앞에서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의 가슴에 비수처럼 아프게 꽂혀 온다.
세상의 진리를 절절하게 맛본 작가 세르반테스가 거대한 현실의 벽 앞에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포용하고, 그 약점까지 관용으로 사랑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중간 중간에 등장인물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등장인물들이 보는 소설의 형태로 다른 이야기들이
몇 개 들어가 있기도 하다. 세르반테스는 자칫 이야기가 지루해질까봐 몇몇 다른 이야기를 끼워
넣었다고 하지만, 독자에 따라선 큰 줄거리의 맥을 끊는 산만한 구성으로 보일 수도 있고
작가도 2권에선 이를 사과하며, 주연인 돈 키호테와 산초에 집중하겠다고 얘기한다.
액자식 구성으로 편성된 이야기들도 꽤 재미있다.
이야기들 중에는 결혼도 하지 않고 양치기처럼 돌아다니는 미소녀를 사모하다가 죽은
양치기의 장례식 이야기가 있는데, 이곳에서 양치기들은 죽은 청년의 사랑을 거부한
소녀를 저주하고 비난한다.
그러다가 그 소녀가 장례식에 등장, "나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고 내가 그를 모욕한 것도
아니며, 그 청년 혼자 '나와 결혼해달라'고 매달리다가 스스로 죽은 건데, 왜 내 잘못이냐." 하며 변호한다.
이 변호가 아주 논리정연하고 이지적이었기에,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데꿀멍,
혹은 소녀에게 반해서 따라가려고 한다.
그러다가 소녀의 모습에 감탄한 돈 키호테가 "소녀를 더 귀찮게 하지 말라"고 버텨 서자,
그에게 쫄은 것인지 아니면 장례식을 마치려는 것인지 다들 물러선다.
2편에서 나오는 공작 부부가 굉장히 특이하다. 돈키호테를 끝내주는 이 시대의 유명인
코미디언이 오셨다며 겉으로는 지극히 극진하게 대접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재력과 재산,
능력을 총동원하여 돈키호테를 골려먹고 꿀잼 컨텐츠를 뽑아내는 데 혈안이 팔려 끝에는
오히려 돈키호테보다 더 정신 나간 사생팬스런 모습까지 보여준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을 돈 키호테의 의붓아버지라고 표현하며, 자신은 라 만차의 연감이나,
시데 아메데 베넹헬리라는 아랍인이 쓴 아랍어 판 돈 키호테 이야기를 무어인의 도움을 받아
번역해서 쓰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물론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나 라만차의 연감 이야기는 세르반테스가 지어낸 가상의 설정이다.
당시 기사도 문학의 전형적인 클리세로, 본 작품이 기사도 문학에 대한 패러디인 만큼 당연히
이 클리세도 쓰였다. 이런 기법은 이야기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역할로 쓰인다.
이를테면 돈키호테 8장의 경우 한참 사건이 절정에 올랐을 때 갑자기 다음 문구가 뜨며 이야기가 끊긴다.
그런데 아쉽게도 작가는 바로 이 대목에서 이야기를 끝내며, 돈 키호테의 공훈을 기록한
필사본을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9장에서는 희귀한 필사본을 발견했다는 설정을 붙이며, 끊겼던 8장의 이야기를 계속해나간다.
이런 작중작 설정과 필사본, 재창작은 보르헤스의 메타픽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외에도 간혹 '세르반테스'란 사람이 페드로 페레스 신부가 불태우는 책의 저자로 언급되고,
참전 용사의 대사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명대사 아닌 대사가 없지만, 중반부 세르반테스의 피를 토하는 부르짖음은 그야말로 작품의 백미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면 누가 제정신일 수 있겠소?
너무 똑바른 정신을 가진 것이 미친 짓이오!"
이런 사상 덕분인지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사회풍자적인 소설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즉, 기사도문학을 풍자한 개그의 외양 안에 세르반테스의 이상과 사상을 표현해낸 것으로 본다.
다만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의 말 안에 광기와 이상을 워낙 교묘하게 뒤섞은지라,
어느 쪽을 편들고 저술하는지 확실치가 않다.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끝까지 읽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결말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새드 엔딩이다.
돈 키호테의 고향 마을(라 만차)에서 돈 키호테를 데려오기 위해 온 고향 마을의 학자 삼손 카르라스코가
백월(은빛 달)의 기사로 위장하여 돈 키호테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기사도 소설에 나온 결투와 맹세를 이용해, 돈 키호테를 자연스럽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한다.
그리고 두 번째 결투에서 삼손 카르라스코가 이기게 되고 돈 키호테에게 고향 마을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런 상황에서 산초는 돈 키호테가 동경하던 공주 둘시네아 델 토보소의 마법은 풀 수 없다는
거짓말을 하며 귀향을 부추기고 결국 돈 키호테는 고향에 되돌아 오지만 병을 얻는다.
그리고 자신의 유산을 자신의 시종 노릇을 했던 산초와 가족들에게 모두 주게 된다.
돈 키호테가 죽기 전에 산초와 삼손은 그에게 활력을 돌려주도록 함께 양치기가 되기로 하지 않았냐는
얘기와 함께 둘시네아의 마법이 풀렸다며 그를 격려하려 하지만, 제정신으로 돌아온 돈 키호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이한 점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부터 죽기 직전까지,
지금까지 보였던 이상한 행동을 보이지 않으며 매우 정상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쳐서 체념한 듯한 행동을 보이며 쓸쓸히 눈을 감는다.
많은 이들이 이런 엔딩을 모르는 탓에 돈 키호테를 단순한 재미있는 이야기로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슬픈 이야기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르반테스가 (설정상) 작가인 시데 아메데의 입으로 "나를 위해 돈 키호테는 태어났고,
나 또한 그를 위해 태어났다"며 죽은 그를 쉬게 내버려두라는 얘기도 한다.
상술한 우나무노의 엔딩 해석도 참고할 만하다. 당시 기독교 사회의 가치관에서 연극 배우는
진실을 기만하기 때문에 죄스러운 일이었고, 따라서 돈 키호테라는 하나의 인물을 '연기' 했던
알론소 끼하노 또한 돈 키호테로서 행복한 최후를 맞기란 불가능했으리라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을 위대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가 산초 판사 같은 민초에서부터 2부의 공작 부부나
1부의 돈 페르난도 같은 사회의 최상류층 대귀족, 그리고 그 중간에 낀 돈 키호테/알론소 끼하노 본인이나
카라스코 같은 하급 귀족 같은 온갖 사회의 계급과 계층을 넘나드는 해학이다.
저런 동시대 높으신 분들의 공식적인 입장과 실제 사회와 민초들의 현실의 차이를 세르반테스가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오히려 처음에는 끼하노를 미친X 취급했던 산초 판사 같은
주변 인물들이 오히려 돈 키호테가 자연인 끼하노로 돌아와 죽을 때 다시 여행을 하자고 울며
보채는 건 시대의 공식적인 도덕관에서는 죄악이었던 '연기'와 '픽션'이 실제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힘을 마지막까지 교묘하게 비틀어 묘사한 것이며, 따라서 비극적인 요소도 있지만 풍자적인
요소가 더 핵심이라는 해석이다.
한편으로 이런 결말은 저작권 등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렸던 세르반테스가 작품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
채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 에피소드 형식으로만 쓰고 따로 결말을 두지 않았다가, 표절에
자극받은 세르반테스가 이를 비판하고 자신의 작품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후속편을 썼고
그 마지막을 돈 키호테의 광기의 종말 및 죽음으로 끝맺음으로써 더 이상 다른 누군가가
도용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세계 최초의 근대 소설이자 스페인의 국민 문학이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중 하나로 전세계 문학사를 대표하는 걸작이자 고전들 중 하나이다. '2002년에는
노벨연구소가 주최한 전 세계 유명 작가 100인이 뽑은 최고의 책 1위를 차지했으며
투표한 작가 50% 이상이 돈키호테에 투표했다.
돈키호테의 압도적인 세계적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출처1출처2 스페인어 문학에서 돈키호테가
차지하는 위상은 영문학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 독문학의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쓴 파우스트,
불문학에서 몰리에르의 희곡들이나 혹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이탈리아어 문학의 단테
알리기에리가 쓴 신곡에 비견된다.
20세기 최고의 문학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최고의 소설로는 돈키호테를, 최고의 작가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꼽았다. 또한 오늘날까지 전세계를 대표하는 고전 소설이자 스테디셀러다.
현재까지 5억부 넘게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다.
1,2 돈키호테는 또한 성경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장 많이 번역된 책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다.
또 수많은 인류의 지성들과 대문호들이 좋아하는 책이다.
대표적으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마르케스, 아인슈타인, 밀턴, 체호프, 스위프트,
디킨스, 투르게네프, 워즈워스, 멜빌, 제퍼슨, 괴테, 실러, 프로이트, 헤겔, 쇼펜하우어.
마크 트웨인, 포크너, 헨리 필딩, 스턴, 콜리지, 새커리, 체스터턴, 오든. 오스터, 만,
플로베르, 카프카, 푸시킨, 고골, 불가코프, 쿤데라, 발자크, 보르헤스 등이 있다.
돈키호테는 역사상 총체소설 문학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최초의 근대 소설이며, 최초의 다각적인 소설이며, 이후에 서양의 모든 작가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돈키호테는 서구 문학사에서 ‘중세와 근대의 경계‘,’최초의 근대 소설’,
‘포스트모더니즘의 배아’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는 ‘현재진행형’ 소설이다.
또한 그 해석의 역사만으로도 근대 서구의 문예사를 아우를 수 있으며 새로운 개념과 방법론이
등장할 때마다 적용의 대상이 되어왔다.
중세와의 단절이며 동시에 바로크의 전형이었고 낭만주의와 여러 형태의 리얼리즘 그리고
안티 리얼리즘의 모델이었으며 동시에 네오 바로크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천이었다.
서구문학에서 이처럼 거의 모순적으로 보일 만큼 다양한 해석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작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주인공은 투르게네프가 ‘햄릿형 인간’과 ‘돈키호테형 인간’을 구분할 때처럼
인간성의 한 전형이 되었고 작품의 많은 에피소드들은 다른 유럽 작가들의 개작의 대상이었다.
돈키호테는 처음 출간되자마자 스페인은 물론 유럽 여러 나라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당시에는 중세 편력 기사를 흉내 내는 복고적 돈키호테의 모험과 기행은 정신 나간 미치광이의 소극으로 읽혔다.
하지만 당대에도 의식 있는 일부 지식인은 “경의와 두려움을 표한다”고 했다.
그 후 세르반테스가 죽고 난 뒤 17-18세기 동안 스페인에서는 별 언급이 없었다.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재조명하면서였다.
그러면서 비로소 돈키호테의 초월성, 근원적인 메시지를 파악하게 됐다.
돈키호테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했던 인물이었고 구원의 메시지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 점을 독일 낭만주의가 드디어 '이상주의'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독일 당대의 최고 지성인들이 돈키호테를 주목하게 됐다.
돈키호테가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하고 세상을 구원하겠다며 집을 나선 건
당연히 이상주의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독일 낭만주의는 돈키호테 속에서 현실에서 벗어나는 초월성의 개념을 처음으로 읽어냈다.
그런 면에서 돈키호테가 전하려고 했던 진정한 메시지의 전달은 19세기에서야 독일
낭만주의에 의해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어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세르반테스의 자서전과 작품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당대 최고의 문학 편집자 존 보울은 세르반테스가 당시 인기 있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작가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하다고 주장했고, 1781년에 주석으로 된 번역본을 출판했다.
그 후 20세기 들어 실존주의가 등장하면서 인간 존재와 실존, 언어의 역할 같은 주제를 돈키호테에서
읽어내기 시작했다. 19세기말 20세기초에 나온 철학 이론도 그 속에서 맹아를 찾았다.
19세기에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는데 교회가 모든 소설을 유해 매체로 금지했지만
그에 반발해 해적판이 만들어져 대중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현재 돈키호테는 모든 주요 언어로 번역되어 700여 판에 이른다.
현대의 멕시코의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세르반테스를 그의 동시대의 셰익스피어, 호메로스,
단테, 디포, 디킨스, 발자크, 조이스 등과 함께 전 세계 서술적 전통의 한 부분을 형성할 것을 제안했다.
다정한 독자여, 이 서문을 통해 당신은 제 친구의 신중함과 절실할 때에 그런 조언자를 찾은
행운과 더불어, 유명한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이야기를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진지하게
만날 수 있게 된 당신 자신의 위안을 맛보시게 될 것입니다.
돈키호테 데 라만차에 대해서는, 몬티엘 지역 주민들 말에 따르면 그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그 지역에서 나왔던 가장 순수한 연인에 제일 용감한 기사였다고 하더군요.
그토록 품위 있고 명예로운 기사를 소개하는 제 노고를 알아 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종자인 그 유명한 산초 판사를 아시게 된 점에 대해서는 제게 감사하셨으면 합니다.
제가 보기에 쓸데없는 잡동사니 기사 소설들에 흩어져 있는 종자들이 지닌 모든 매력들이
그자에게서 한꺼번에 보일 테니 말입니다.
이만 하느님의 가호가 당신에게 있기를 바라며, 안녕히 계십시오.
―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전편「독자에게 드리는 서문」 중)
여러분께 내놓는 이 『돈키호테 속편』은 전편과 같은 천으로 같은 직공이 재단해서 만든 것이며
이 작품은 확장된 돈키호테, 그리고 마침내 죽어 무덤에 묻히는 돈키호테를 당신께 드리고 있다는 겁니다.
무덤에 묻는 이유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에 대한 새로운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것으로 충분합니다. 또한 이 기발한 미친 짓거리들에 대해 소식을 알리는 것은
정직한 한 사람만으로 충분하지요.
새로이 이 미친 짓들에 개입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너무 많으면 소중히 여겨지지 않는 법이고, 아무리 나쁜 것이라도
부족하면 약간은 소중하게 여겨지는 법이니까요.
―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후편「독자에게 드리는 서문」 중)
최초의 소설이자 가장 뛰어난 소설이지만 소설 이상의 작품.
― 해럴드 블룸
최초의 근대 소설인 돈키호테는 여전히 가장 훌륭한 소설로 남아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만이 세르반테스의 천재성에 근접합니다.
거의 동시에 죽은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적어도 단테 이후 서양의 중심 작가이며
그 이후로는 톨스토이나 괴테, 디킨스, 프루스트, 조이스도 그들에 근접하지 못했습니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문맥에 속할 수 없습니다.
스페인의 황금 시대와 엘리자벳-자코베안 시대는 우리가 주어진 것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부차적인 것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쓴 것처럼『돈키호테』 희극은 물론 비극입니다.
비록 그것이 산문 중에서 이 소설의 탄생으로 상징되고, 여전히 모든 소설들 중
최고이지만 저는 이 소설의 슬픔이 제가 그것을 다시 읽을 때마다 증가함을 발견하고,
미겔 드 우나무노가 이 모든 이야기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을 "스페인 성경"으로 칭했듯이,
그것을 "스페인 성경"으로 만듭니다.
『돈키호테』는 경전이 아닐지 모르지만,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관점을 얻기 위해
그 경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책 안에 있습니다.
기사와 그의 누추한 산초 판자의 훌륭한 대화를 들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세르반테스와 융합되기도 하지만, 더 자주 우리는 그들의 모험과 나락에서
숭고한 한 쌍을 동반하는 보이지 않는 방랑자들입니다.
『돈키호테』의 미학적 진리는 다시 단테나 셰익스피어처럼 우리가 위대함과 직접 대면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돈키호테』의 탐구와 그것의 동기,
그리고 원하는 목적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쁨에 굴복하는
동안에도 우리를 놀라게 하는 반사 거울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세르반테스는 항상 우리 앞에 있고, 우리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헨리 필딩, 로렌스 스턴, 괴테와 토마스 만, 플로베르와 스탕달, 허먼 멜빌과 마크 트웨인,
도스토옙스키, 이 작가들은 세르반테스의 숭배자이자 제자들 중 하나입니다.
― 해럴드 블룸
인간의 내부 세계를 가장 깊이 파들어 가 묘사한 인류의 바이블이다.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 (프랑스 문예비평가, 근대 비평의 아버지)
스페인어 성경.
― 미겔 데 우나무노 (스페인 소설가)
최초의 근대 소설, 아마도 지금까지 쓰여진 소설 중 가장 만고 불멸의 소설일 것이며
확실히 유럽과 미국 소설의 원천일 것이다.
― 카를로스 푸엔테스 (멕시코 소설가)
『돈키호테』는 문학 사학자들이 역대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로 꼽고 있으며, 최초의 근대소설로 자주 인용된다.
―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저 친구는 이성을 상실했거나 아니면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 게로군."
― 펠리페 3세, 지나가는 길에 포복절도하는 젊은이를 보면서 내뱉은 말.
『돈키호테』는 근대 소설의 효시다.
― 알베르 티보데 (프랑스 비평가)
『돈키호테』 이후에 쓰인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쓴 것이나, 그 일부를 쓴 것이다.
― 르네 지라르
기사소설에 대한 풍자 이상이다. 우연적인 요소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책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소설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돈키호테』다.
―벤 오크리 (나이지리아 시인)출처
『돈키호테』를 읽어라. 훌륭한 작품이다.
그건 거의 셰익스피어와 한 계열에 놓아야할 세르반테스의 작품이다.
나는 내 형제들에게 투르게네프의 <햄릿과 돈키호테>를―아직 읽지 않았으면―읽으라고 권한다..
― 안톤 체호프
성경과 견줄 만한 작품.
― 워싱턴 어빙
『돈키호테』를 모르면 서양사를 이해할 수 없다.
― T. S. 엘리엇
모든 소설가는 어떤 형식으로든 모두 다 세르반테스의 자손들이다.
―밀란 쿤데라
전 세계를 뒤집어 봐도 『돈키호테』보다 더 숭고하고 박진감 넘치는 픽션은 없다.
지구의 종말이 찾아와 그분이 우리에게 ‘너희는 지상에서의 삶을 이해했는가?
그 삶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는가’라고 물으면 우리는 묵묵히 『돈키호테』를 내보이며
‘여기 삶에 대한 우리의 결론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돈키호테』보다 더 심오하고 힘 있는 작품을 만난 적이 없다.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나는 『돈키호테』 속에서 나의 근원을 발견했다.
― 귀스타브 플로베르
매년 성경처럼 『돈키호테』를 읽는다.
― 윌리엄 포크너
『햄릿』을 사랑하기는 어려우나 『돈키호테』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이반 투르게네프
이 얼마나 창조적이고, 비범하고, 자유롭고, 인간적인 작품인가!
― 토마스 만
세르반테스의 삶은 온갖 사건과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에스파냐어권의
뛰어난 작가가 쓴 소설처럼 드라마틱하다. 그의 명성은 서양 언어권에서 단테,
셰익스피어, 몽테뉴, 괴테와 톨스토이가 보여주었던 탁월함처럼 영원한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글 쓰는 방법을 알았고, 돈키호테는 행동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오로지 서로를 위해 태어난 하나다.
― 해럴드 블룸
소설을 읽는 방법과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할 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이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사는
폴스타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는 그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돈키호테』에서는 끊이지 않고 사건이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산초와 돈키호테 간에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손길이 닿는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 봐도 두 사람이 대화의 늪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변덕을 부리기는 해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세르반테스는 우리 중 대다수의 사람에게 돈키호테적인 모습과 산초척인 측면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왜 『돈키호테』를 읽는가?
모든 극작가들 가운데 셰익스피어가 최고라면,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이다.
따라서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알기 전에는 우리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해럴드 블룸
두려움과 경의를 느낀다.
―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스페인 작가)
아!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떤 것이며, 사물에 접하는 그의 방식이 어떠한 것이지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텐데. 언제가 될 것인지는 몰라도 만일 누군가 와서
세르반테스가 지니고 있는 문체의 신비로움을 폭로해 낸다면, 그래서 그 사실이 다른 여러 문제들로
연계되어 간다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깨어날 수 있을 텐데!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스페인 철학자)
소설은 높고 고귀한 질서가 될수록 내면을 더 많이 나타내고 외면을 덜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비율은『트린스트럼 섄디』로부터 기사나 강도의 가장 구질구질하고
선정적인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소설이든 판단하는 수단을 제공할 것이다.
트린스트럼 샌디는 실제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만큼 훌륭하다; 그리고 라 『신엘루이즈』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는 많은 것이 없다.
심지어 『돈키호테』도 비교적 적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하지 않은 것이 있고,
단지 재미를 위해서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네 권은 현존하는 모든 소설 중에서 최고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넘어지는 것은 물론 똑같다. 하지만 한눈을 팔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과, 별만 바라보다가
우물에 빠지는 것은 다르다. 돈키호테가 열심히 보았던 것은 바로 별이다.
이 공상과 망상의 정신이 추구한 웃음의 깊이는 얼마나 심오한가.
― 앙리 베르그송
『돈키호테』는 문학의 지평선, 야윈 잔소리를 하는 수척한 거인, 너무나 경이롭게 비추고 있어,
그 책은 그의 순전한 생명력을 통해 살아가고 살아갈 것이다....패러디는 모범이 되었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가장 위대한 천재적인 창작은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홀로 만들어낸 것이다.
―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와 산초라 불리는 밭에 사상의 씨앗을 뿌렸을 뿐인데
그 땅과 씨앗이 워낙 풍요한 것이라서 대대손손 열매를 맺어 가고 있다.
― 살바도르 데 마다리아가 (스페인 작가, 외교관)
이 시대에 왜 『돈키호테』를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돈키호테』를 읽으면 사람이 지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읽고 나면 그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 호세 마리아 파스 가고 (스페인 라코루나 국립대 비교문학 교수, 전 세계기호학회 사무총장)
“우리는 흔히 엉뚱한 괴짜나 황당한 사람을 두고 『돈키호테』 같다고 하지요.
하지만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돈키호테 원작을 제대로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처음엔 낄낄대며 웃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울게 되는 책이지요.”
『돈키호테』는 흔히 ‘인류의 바이블’이라고 불린다. 바이블이라는 건 가장 모범적인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준다는 의미다. 내가 생각하는 『돈키호테』의 메시지는
‘인간은 자기 생의 창조자’라는 것이다. 남이 하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
육체는 망가져도 정신은 펄펄 나는 삶, 이런 삶을 사는 이에게는 좌절도 경쟁도 상대적 박탈감도 없다.
대기업 취직에 목매는 현실에 저자의 메시지가 살아서 작동하길 바란다.
사회적으로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본다.
일자무식인 산초가 한 섬의 통치자가 됐을 때 모두들 비웃지만, 어떤 지식인보다 훌륭하게
통치하는 모습을 통해 정치에 필요한 건 법이나 정치학이 아닌 바르게 통치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평범한 서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이 같은 설정은 당시라면 종교재판에 회부돼
화형에 처해질 수 있을 내용이지만 세르반테스는 이를 웃음으로, 미치광이의 짓거리로 포장했다.
포장을 벗기고 그 안의 텍스트를 흡수하는 게 오늘 우리의 할 일이다.
― 안영옥 (고려대학교 스페인어문학과 교수)
8. 번역
한국에서 최초로 출간된 건 일제강점기 시절, 어느 한국인이 1915년에 일본어 중역판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작품이다. 1960년 신곡 번역으로도 유명한 최민순 신부가 스페인 유학 중에
번역한 역본이 최초 완역이다.
그 전에는 보통 축약판이나 번역가가 원작 반달수준으로 심하게 훼손해버린 어린이용 출판물이 대다수였다.
이 때문에 겨우 '풍차에 돌격하는 괴인에 관한 소설' 같은 이미지가 굳어져 있는데 이 때문에 원작의 엄청난
재미를 놓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커서 다시 돈키호테를 읽는 사람 중에서 돈키호테가 이렇게 두껍고
긴 내용의 소설이었냐고 놀라는 사람도 많다.
신곡 번역에서 보여준 최민순 신부의 탁월함이 여지없이 발휘되어 현재까지 출간된
모든 역본 중에 가장 풍성하고 맛깔나는 번역어를 보여주는 역본이나 아쉽게도 2부가 없다.
최민순 신부는 2부도 번역했으나 원고가 분실되어(추정) 출간되어 전해지는 건 1부뿐이다.
이후로는 서문학계 원로 김현창 교수의 역본이 수십년간 출판사를 달리해가며 읽혀 왔다.
돈키호테 시공사
시공사의 돈키호테
돈키호테 열린책들
열린책들의 돈키호테
2004년에 고려대학교 민용태 교수의 번역으로 창비에서 완역판이 출간되었다.
이 외의 역본으로 윤문거쳐 아직도 팔리고 있는 김현창 번역본(동서문화사, 범우사),
한국외대 박철 교수의 번역본(시공사), 안영옥 교수의 번역본(열린책들) 등이 있다.
가장 많이 추천되는 번역판은 열린책들과 시공사.
창비 번역은 된소리가 많고 삽화가 없어 추천순위에서 밀려나는편.
2021년 5월 문예출판사에서 살바도르 달리의 삽화가 포함된 에디션이 출간되었다.
번역자는 스페인어 문화원 김충식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