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물 양세봉
영원한 인간사랑 ・ 17시간 전
한국의 인물 양세봉
2024.07.03. 02:06조회 5
만주 무장투쟁 이끈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1894~1934)
“친애하는 동지들, 이번 전투는 동만동포들의 생사를 담판하는 결전입니다. 나를 따라 생명을 각오하는 동지들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동지들, 너무 조급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일당백의 전사들입니다. 범의 굴에 들어가 범을 잡아낸 전사들입니다. 아시다시피 목전형세는 호전되어 천재일시의 좋은 기회가 돌아왔습니다. 음우(陰雨)하던 가운데 서려있던 검은 구름이 헤쳐지고, 청천백일하에 우리 국기가 하늘에 휘날리는 것을 보십시오. 이 얼마나 보람있는 일입니까. 조국 광복군과 동만 백만동포들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우리는 일당백의 용감한 정신과 아울러 이번 전투에 승리의 믿음을 선포합니다.”
흥경현 전투서 큰 전과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중국 동북지방(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위세가 날로 어려워져 가던 1932년 3월초 조선혁명군 총사령은 일·연합군과의 대회전을 앞두고 승리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3월 11일 조선혁명군 80여명은 중국의용대와 함께 영릉가에서 박격포와 기관총을 퍼붓는 일·연합군 30여명을 사살한 반면 아군의 전사는 7명에 불과한 압승을 거두었다.
항일무장투쟁 사상 가장 끈질기고도 빛나는 전과를 기록한‘흥경현 전투’의 서막이자 중국 반일군과 연합한 무장투쟁의 첫 포성이었다.
그해 7월까지 흥경현을 놓고 일진일퇴가 계속된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공군기까지 동원, 양면작전에 나서 흥경현을 다시 빼앗았으나 2백여명 이상 사살당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흥경현 전투를 지휘한 조선혁명군 총사령 벽해 양세봉
25살 나이로 민족해방운동 전선에 뛰어들어 죽을 때까지 적을 향한 총구를 한시도 거두지 않고 신출귀몰한 군사전력을 구사, 군신(軍神)으로 불리며 일제의 오금을 저리게 했던 사람. 그러나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아직 낯설다. 지금까지 국내 학계의 항일무장투쟁사 연구가 주로 20년대에 집중돼 있어 이청천·이범석·홍범도 등에 비해 양세봉의 역사의 무게는 그만큼 가볍다.
오히려 양세봉 장군과 조선혁명군에 대한 연찬은 80년대 이후 연변 등 중국에서 활발히 이루어져 그는 중국동포는 물론 중국인들에게까지 중국 동북지방 항일부장투쟁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여기에 그 밑에서 활동했던 몇몇 왕년의 조선혁명군 전사들이 남긴 수기나 증언들이 양 장군의 활약에 신화적 색채를 더 해준다.
양세봉은 1894년 6월 5일 평안북도 철산군 세리면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조선혁명군의 일원으로 양세봉의 비서를 지냈던 중국동포 박윤걸(89년 중국에서 사망)씨가 생전에 남긴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약사>는 양 장군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양세봉 사령은 일찍부터 가정이 매우 빈한하여 소년시절부터 철산군 어느 서당에서 소사로 일하고 있었다. 매우 총명한 사람인지라 소사일을 하면서 서당에서 가르치는 천자문, 무제시, 동몽선습, 마상시, 명심보감, 소학,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귀동냥해 한자를 많이 습득하였다.”
16살 때인 1912년 아버지가 병으로 죽은 뒤부터 형과 동생과 함께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던 그는 25살 나던 해 자신의 일생을 바꿔놓는 중요한 사건을 목격한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이 전 조선에 타오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직화되지 못한‘무저항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일제의 총칼 앞에 온 강토가 피바다로 변하는 것을 본 청년 양세봉은 그 길로‘입산’한다.
그가 찾아간 부대는 평안북도 천마산을 중심으로 일제의 경찰서·주재소·군청·면사무소·우체국 등을 습격, 용맹을 떨치던 최시흥 사령관 휘하의 천마산 부대였다.
최시흥 사령관이 중국 경찰에 붙잡힌 뒤 천마산 부대가 만주로 근거지를 옮기자 그는 가족을 데리고 만주 봉천성 흥경현(지금의 신빈현)으로 이주, 그곳을 중심으로 본격 독립투쟁의 길에 접어든다.
이때 양세봉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일화를 박윤걸씨는 이렇게 전한다.
“그는 처음에 통신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통화현에 주재하고 있던 부영사란 놈이 봉천으로 출동한다는 비보를 듣고 안홍 중대의 일원이 되어 매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휘관인 안흥 대장은 적의 숫자가 많아 매복권에 들어와도 감히 신호를 내지 못하고 주저하자 양 사령이 참지 못하고 고함소리와 함께 맹사격을 가한 뒤 총알이 떨어지자 총알이 들지 않은 부인의 총을 들고 다니면서 적의 무장을 3분의 1이나 해제 했다는 얘기를 노인들은 농한기 때면 화제삼아 꺼내곤 했다.”
빈총 들고 무장해제 시켜
양세봉은 22년 8월 23일 대한통의부와 24년 통의부 후신으로 조직된 정의부를 거쳐 29년 4월 정식 발족된 국민부라는 새로운 군정부의 제5대장을 지내기까지 일본군과의 크고 작은 대적을 통해 뛰어난 지휘관에 이르는 경험을 쌓는다.
국민부는 1920년대 후반부터 추진되었던 민족유일당 조직운동과 3부 통합운동의 산물로 태어났는데, 종전의 정의부를 주축으로 신민부 민정계 계열과 참의부의 심용준 계열 등이 연합한 행정조직이었다.
그뒤 그는 그해 7월께 국민부의 군사조직 13개 대대 6백여명으로 창군된 조선혁명군의 제1중대장으로 참여하는 한편 12월 20일에는 국민부의 당조직으로 세워진 조선혁명당 군사위원회 부사령으로 부상한다.
조선혁명군은 1920년대 이후 끊임없이 계속돼온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계승한 정통적 무장조직이라는 인식 아래 제1차적 투쟁목표를‘조선민족’의 독립국가 건설에 두었는데 “반동적 친일주구세력의 박멸”이 주요 활동목표의 하나였던 점이 이채롭다.
실제 당시 양세봉의 활약상을 기록한 중국쪽 자료들에서 양세봉이‘친일주구기관’인 신민부를 습격, 혁혁한 전과를 올려 조선인의 반일투쟁을 크게 고무시켰다는 구절이 여러 차례 나오는 것은 일제와 친일파라는 이중의 적을 가진 조선혁명군의 싸움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외부의 적 말고도 아군의 전열을 흐트러뜨리고 전력의 약화를 초래한 이념간의 갈등이 독립군 내부에서 심화돼 서로 죽고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양세봉은 이때 민족주의 계열에 속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혁명군 참모장을 지낸 바 있는 김학규는 자서전에서“내가 조선혁명군의 중앙간부가 되고 조선혁명군의 참모장이 됨에 이르러 공산주의자들과 치열한 정면충돌을 불면케 되어, 그들은 나의 동지들을 많이 죽이고 또 나도 실제행동을 벌였다. 그때 그들은 조선혁명당 책임자 현익철과 조선혁명당 총사령 양세봉, 나를 가리켜 ‘3대살인 반동영수’라고 불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가 34년께 중국공산당 계열인 동북인민혁명군 양정우 부대와 조·중‘병견작전’(합동작전)을 위해 협상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그의 독서목록 중에 <유물사관 해설>등이 들어 있었다”는 박윤걸씨의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일본 침략자라는 공동의 적 앞에 적어도 편협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1월 5일 국민부 지도부가 대량 체포되자 3월 10일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책임자인 총사령 자리에 오른다.
이 당시 그와 관련된 증언이나 기록은 그가 총사령이란 직책에 오를 수 있었던 요인을 짐작하게 한다.
“1930년 음력 12월께 양세봉 부사령이 유하현 대화촌 민가에 잠복해 있던 중 중국 보안대에 탐지되자 주인할머니 의복을 빌려 입고 노파 행세를 하며 중국어로‘할머니가 변소 간다’고 위기를 모면하려다 눈치챈 보안대가 총을 내미는 찰나 재빨리 먼저 총을 꺼내 이들을 인질로 잡고 무사히 빠져나왔다”(조선혁명군에서 활동했던 계기화(80)씨)
“양세봉 사령이 지휘한 전술은 누구도 상상키 어렵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만 범을 잡는 전술이다. 중국 장학량 부대의 유명한 사령으로 양 사령과 병견 작전을 함께 한 바 있는 이춘윤 사령은‘옛날 삼국시대 '동오'의 장군이 흰옷을 입고 강을 건너 명성을 떨치던 관운장을 처단하고 형주를 탈환했는데 그보다 더 우수하다”며 양세봉 사령을 대단히 흠모하였다.“(박윤걸씨의 <양세봉 총사령 약사>중에서)
초봄 잠방이 입고 강행군
박씨는 또 양세봉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부대를 인솔하는 대장 임무를 띠고부터는 가정과의 관계가 영원히 단절되었고, 부대를 인솔해 주둔하는 지방에 가서는 농번기면 농민들의 일손을 도왔으며 패잔병들이 약탈을 일삼는 것을 교육하여 원래 부대로 단합함으로써 한족들까지 칭송해 마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오른 양세봉은 일제가 만주를 강점한 이후 독립군 근거지를 옥죄어 오던 불리한 형세를 만회하기 위해 1932년 2얼 중국 동북부지방 동변도 일대에서 결성된 중국의 요녕‘항일민중자위대’와 손잡고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준비한다.
그해 7월까지 계속된 흥경현 일진일퇴전이었다. 이 작전에서 정면을 돌파하기로 한 양세봉은 5백여명의 대원 가운데 80명의 선발대로 영릉가를 향해 강행군을 하던 도중 큰 난관에 부닥치게 된다. 경릉가 앞으로 흐르는 소자강 때문이었다.
중국연변에서 나온 <봉화>라는 잡지는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때는 해동 무렵이어서 얼음이 풀린 소자강은 수심이 깊었다. 게다가 성애장이 뗏못처럼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 강을 건너지 못하면 영릉가로 쳐들어갈 수 없었다. 밤12시 정각까지 영릉가에 들어가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을 올려야만 했다. 양 사령은 전사들에게 소자강을 건너라고 명령하고 나서 자기부터 먼저 강물에 뛰어들었다. 강을 무사히 건넌 양 사령은 강행군에 거추장스런 바지를 벗어던지고 잠방이 차림으로 나섰다. 전사들은 사령을 본받아 다 잠방이만 입고 행군했으나 찬바람이 살을 에었는데...”
결국 양 사령의 불요불굴한 정신에 힘입은 영릉가 전투의 승리는 중국인들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이간질로 조선인을‘얼구이즈(둘째왜놈)’이라고 욕하고 약탈·살해하던 반목에서 벗어나게 하는 큰 계기가 됐고,‘항일민중자위대’의 책임자 당취오는 조선혁명군의 뛰어난 전투력을 인정, 조선혁명군을 민중자위군‘특무대’로 편성하는 한편 그를 특무사령으로 임명하는 특별대우를 한다.
조선본토 수복전쟁 꿈꿔
그로부터 그해 10월까지 양세봉은 만주에서 일·만 연합군과 2백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뿐 아니라 1932년 한해 동안 조선에 소부대를 파견해 16차례나 일본 국경수비대나 경찰서 등을 습격하는 등 조선 본토를 수복하기 위한 작전도 활발히 펼친다.
이에 대해 독립기념관 독립연구소 연구원 장세윤씨는“이는 조선혁명군이 장차 조선본토에 진입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하는 원대한 목표를 추진한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본토 수복의 꿈은 공군기까지 동원한 막강한 화력과 병력을 지닌 일본군대에 밀려 점점 이루어지기 어려워지면서 그의 제거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제의 계략에 말려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1934년 9월 8일 친일 주구단체‘일본 관동군 특무기관 동변도 유격대’의 사주를 받은 이동양이란 산림대 우두머리가 조선혁명군과 연합할 의향이 있다며 자기의 거처에 가서 협상하자는 꾐에 넘어간 양세봉은 길을 가던 중 길 옆 수수밭에 매복하고 있던 박창해 등‘친일주구’가 쏜 총탄을 맞고 숨진 것이다. 그때 나이 40살이었다.
일본군, 시신 파내 목베어
그는 숨을 거두면서 “조선독립혁명을 환성하지 못하고 가는 나는 조선민족 앞에 죄를 짓고 죽습니다. 각자 형제들이 나의 등에 지워준 총사령이란 사명이 내 생명보다 위대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몸을 잘못 놀려 개죽음을 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민족의 죄인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박윤걸씨).
조선동포들은 그날 밤 그의 시체를 마을 뒷산에 묻었으나 이를 알고 달려온 통화일본영사관 군경들이 시체를 내놓으라고 요구, 말을 듣지 않은 마을 촌장 등을 작두로 목을 베고 결국 양세봉의 목을 떼어 통화현 소재지의 담장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그는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생사는 불분명한 상태이다. 계기화씨에 따르면 그는 일절 집에 들어가는 일이 없어 부인은 유부청상으로 아이가 없었는데, 이 아이도 양 사령이 어머니 문병차 집에 머무르던 5~6일 사이에 생겨났으며, 해방 이후 부인이 조국으로 나온 뒤 당시 12살난 아이는 만경대학원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양세봉이 죽은 뒤 조선혁명군은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인민 혁명군과 연합작전을 전개, 항일무장투쟁을 계속해나가다 38년 동북인민혁명군에 흡수된다.
이런 결과는 일·만 군경의 끊임없는 토벌과 회유로 조선혁명군의 세력이 상당부분 독자성을 잃어가는 상태에서 많은 구성원들이 항일구국을 위해서는 이념에 좌우되지 않는 폭넓은 자세를 유지한 데 있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다시 말해 조선혁명군이 북만의 조선독립군과 달리 약 10여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생존하며 투쟁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의와 사상을 달리하는 무장집단과도 연합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 연구가 이종석씨는“조선혁명군이 높게 평가되어야 하는 이유는 20년대 무장투쟁시기와는 달리 조선혁명군이 활동했던 30년대에는 일제가 만주를 영사관을 통해 직접 통치, 대대적 공세를 펼 수 있었던 상황에서 싸움을 10년 가까이 계속해 나갈 수 있었던 데 있다”라고 평가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조선혁명군에 대해“20여년의 오랜 기간 동안 조선독립을 꿈꾸며 용맹무쌍하게 활동, 치안의 암”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