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무색황 天武色皇 2 - 『무무색황(無武色皇)』 속편 - 차 례 - 손약빙의 실종 도화요정 북리운혜 천향기원에서의 하룻밤 눈먼 자는 죽는다 용문석굴에서의 기연 낙화유수(落花流水) 대마도 정벌 시작된 혈겁 삼성단(三聖壇)의 기연 ▶ 손약빙의 실종 남궁호가 깨어난 것은 모두가 잠든 한밤중이었다. "으으음……." 지난 며칠간 단 한숨도 자지 못하고 부상자들을 돌보느라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취했던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체의 장식물이 배제된 정실에는 달랑 침상 하나만 있을 뿐 다른 물건은 없었다. 기지개를 켜 긴장을 되찾은 남궁호는 밖으로 향하였다. 모두가 잠든 시간인지라 사위는 적막하였다. 문득 천공을 바라보자 붉은빛을 발하는 두 개의 별이 교교한 빛을 발하여 월광을 완전히 잠식시킨 것을 볼 수 있었다. "기이한 현상이군." 최근 들어 야공을 바라본 적이 없는 그는 마치 서천에 저녁 노을이 걸린 것처럼 붉은 하늘이 이상하였다. 그러나 아직 천기를 짚는 방법에 대하여는 문외한인 그는 이상하다는 감정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자세히 살피기 전에는 발견할 수 없는 별 하나가 천공에 걸려 있기는 하나, 아직 그 빛이 희미하다는 것까지 본 그는 다시 정실로 들어갔다. 정실 안에는 여전히 유옥경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거의 모든 부상자들을 치료하였지만 그녀만은 너무도 깊은 내상을 입었는지라 아직 완치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이제 며칠 후면 이곳을 떠나 태극은하궁으로 회궁하여야 하기에 그 전에 그녀를 치료한 후 돌려보내야 하였다. "좀 나아졌을까?" 남궁호는 침상으로 다가가 여인의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안에 받쳐입은 얇은 상의가 하나 더 있었고, 그것마저 벗기자 결코 작지 않은 설봉 두 개가 솟아 있었다. 그것은 누워 있지만 옆으로 늘어지지 않고 제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설봉 바로 아래 거궐혈(巨闕穴) 부근은 시커멓게 색이 죽어 있었다. 바로 파천도부의 주먹에 격중되었던 그 부위였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는 거궐혈을 약간 비켜 맞았기에 지금껏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창졸간에 내질렀기에 내공이 제대로 실려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그 주먹의 여파로 부러졌던 갈비뼈는 거의 다 붙어 있으나 문제는 내상이었다.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유옥경의 전신 혈맥은 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행쇄맥증(五行鎖脈症)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었기에 범인에 비하여 진기가 유통되는 혈맥의 수효가 월등히 적었던 것이다. 그것은 체내에서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어야 할 오행의 기운들이 상극(相剋)만 할 뿐 상생(相生)을 하지 않을 때 발생되는 희귀한 질병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혈맥은 약하였고 그나마 막혀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젊기에 생기가 모든 것을 막아 주고 있으나 이제 조금만 더 지나 노화를 시작하면 바로 죽음에 이르는 질병이었다. 너무도 희귀하여 아마도 세상천지에 이것을 진맥으로 알아낼 수 있는 의술을 지닌 사람은 생사신의의 유전을 얻은 남궁호 하나뿐일 것이다. 물론 능히 그것을 치료할 방도가 있었다. 그러나 쉽게 손을 쓸 수 없었다. 그것을 치료하려면 오행의 기운을 지닌 각각의 기물을 준비하고 전신을 추궁과혈한 뒤 시침(施鍼)을 하고 음양조화대법을 시전하여 오행이 상생하도록 물꼬를 터주면 된다. 하지만 정조를 목숨처럼 여기는 한족 여인에게 그런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하여, 내장의 출혈을 제어하는 방법만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내공이 오 갑자에 달하는 순양진기를 지닌 고수가 자신의 진기로 치료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음양조화대법이 시전되어야 하며, 그런 화후에 이른 고수를 어디에서 찾는다 말인가? "으음, 일단 내상 먼저 치료한 뒤 돌려보내야겠다." 남궁호가 시침을 마친 것은 새벽닭이 홰를 치며 긴 울음소리를 낼 때였다. "으으응, 어머!" 혼혈이 해혈되자 유옥경은 가느다란 신음을 내며 눈을 뜨다 누군가가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두 손으로 황급히 가슴을 감싸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후후……, 이제 정신이 드시오?" "누, 누구세요? 그리고 여, 여긴 어디죠?" 남궁호가 말을 하자 유옥경은 놀랍게도 유창한 한어로 반문하였다. 그녀는 백두산에서부터 지금까지 점혈되어 있었기에 자신이 군막이 아닌 다른 곳에 있자 놀란 모양이었다. "후후……, 걱정 마시오. 이곳은 백하라는 곳이오. 낭자는 심한 부상을 입어 지금까지 정신을 잃고 있었소이다. 하지만 이곳은 안전한 곳이오." 유옥경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옷매무새를 만져 보고는 아무런 이상이 없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긴? 그리고 공자님은……?" "후후……, 소생은 남궁호라 하오. 그리고 여긴……." 남궁호는 태극은하궁도들이 일월성군 제일군단을 궤멸시킨 이야기를 간단히 하였다. "그럼 다른 여인들은 다 어디에 있죠?" "이십여 명은 혼란 중에 죽었고, 나머지는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소이다. 낭자는 부상이 심하여……." "그럼 공자님께서 소녀를 치료해 주셨나요?" 유옥경의 물음에 남궁호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였다. "이제 며칠만 더 머무시면 고향으로 가셔도 괜찮을 것이오." "고마워요.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어요. 소녀는 유옥경이라 해요. 언제고 평양에 오실 일이 있으시면 꼭 들러주세요." 남궁호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화살처럼 흘러 태극은하궁으로 회궁할 때가 되자 유옥경은 남궁호에게 은장도를 건넸다. 그것은 그녀가 정조를 지키려 파천도부를 찔렀던 그것이었다. 남궁호는 거부하려다 여인의 정성을 생각하여 별다른 생각 없이 그것을 받아 들고 떠났다. "헬헬……, 수고가 많았구나." "무슨 말씀을……. 소생은 한 일이 없습니다." 태극은하궁에 회궁하자마자 가장 어른인 무림왕의 처소를 찾은 남궁호를 맞는 그의 얼굴엔 만족스런 빛이 흐르고 있었다. "많은 부상자를 치료하였다고? 그래, 어떻던가?" "소생은 이번에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남궁호는 조선이 힘이 약하여 외세에 거의 무방비로 당하는 것에 울분을 느꼈는지 많은 말을 하였다. "헬헬……, 자네는 우리 한족이 정말 약하다고 생각하는가?" "……?" "한족은 강하네! 그러나 조정에서 그것을 쓸 줄 모르고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지. 반상을 나눠 통치하기에 그런 것이네." "반상이라 함은?" "양반과 상놈 말일세. 양반이란……." 무림왕은 조선의 사회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였다. 남궁호는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중원에도 양민과 천민이 나눠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어떤 명확한 선이 그어져 있지 않았다. 누구든 비천한 직업을 선택하면 평민이었다가도 천민으로 전락하고, 비록 지금은 천민이라 할지라도 능력이 있어 재물을 모으거나 학문을 익히면 양민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그럼 한번 양반이면 죽을 때까지 양반이고, 한번 상놈이면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남의 하인밖에 못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승려들이 모두 상놈 대접을 받는다고요?" "그렇네!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무예에 소질이 있다 하더라도 상놈이면 허드렛일밖에 할 수 없는 곳이 조선일세. 조선엔 양반보다 상놈이 훨씬 많지. 하여, 그렇게 당하는 것일세." 무림왕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러 이야기를 하였다. 조선의 신분계급과 사회제도, 풍습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남궁호는 왜 왜구들이 그렇게 준동하는 데도 그것을 완전히 박멸시키지 못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더 이상 중원인이 아니고 한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은근히 울화가 치솟았으나 일개 야인인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묵묵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헬헬……, 이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세. 한데, 혼례식은 언제 하기로 하였는가?" "모든 보고가 끝나고 잠잠해지면 하기로 하였으니, 아직 며칠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네. 이만 가 보게. 인아가 무척이나 기다릴 걸세." 광개토전을 나선 남궁호는 태극전에 들러 천령군과 한담을 나눈 후 무릉소축으로 발걸음을 돌려 태극은하궁 이룡일봉인 옥기린과 새반안, 그리고 세외천미와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남궁호는 세외천미와 둘만이 남게 되자 유연과의 일을 어떻게 고백하여야 할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잠겼다. 그는 너무도 즐거워하는 그녀의 감정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었기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궁내의 모든 소란스러움과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자 혼례식 준비가 착착 진행되어 이제 사흘 후면 식이 올려질 무렵이었다. "아우, 이곳에 있었는가? 그렇게 책만 읽으면 눈 나빠지니, 가끔 쉬기도 하게." "하하하, 형님. 오셨습니까?" 남궁호는 자신의 거처로 들어오며 정감 어린 잔소리를 해 대는 새반안을 보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후후, 이제 사흘 후면 자네는 정식으로 매제가 되는군. 좋아. 자네 같은 아우가 우리 인아를 차지한다니, 괜히 우형까지 기분이 좋군." "하하, 고맙습니다. 한데, 어인 일로……?" 새반안은 잠깐 잊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품에서 잘게 접힌 서찰을 건넸다. "후후……, 깜박 잊었구먼. 이건 자네한테 온 서찰이네." 밀랍을 녹여 봉인한 것으로 보아 이것을 전하는 사람조차 볼 수 없게 만든 서찰이었다. "어디서 온 거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서찰을 펼친 남궁호의 표정은 그것을 읽는 동안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왜 그러나?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겐가?" 심상치 않은 표정을 살핀 새반안이 조심스레 묻자, 남궁호는 들고 있던 서찰을 건넸다. <이 서찰을 받는 즉시 중원으로 돌아와 주어야겠네. 빙아가 괴한들에게 납치당하였는지 벌써 며칠째 소식이 없네. 손해랑.> "빙아가 누구고, 손해랑이 누구이길래 그러는가?" 새반안의 물음에 남궁호는 대답도 않고 물었다. "이 서찰은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해서 전해진 겁니까?" "글쎄,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 종이는 본궁에서 연락할 때 사용하는 것일세. 한데, 아마도 누군가 본궁의 궁도를 만나 전서구로 보낸 듯하네." 남궁호의 어두운 신색을 본 새반안이 재차 물었다. "이보게! 빙아가 누구고, 손해랑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는가?" "휴우! 소생의 처와 그녀의 조부이오이다." "무엇이? 그렇다면 이거 큰일이 아닌가?" 새반안의 안색 역시 급변하였다. 남궁호의 처가 실종되었다면 며칠 후 있을 혼례식은 또 연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잠시 놀라고 있는 틈을 타 남궁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을 열었다. "형님! 소생, 이 길로 중원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 새반안은 아무런 제지의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알겠네. 다른 사람들한테는 우형이 잘 이야기할 터이니, 걱정 말고 어서 가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아닙니다.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그럼……." 남궁호는 너무도 급한 마음에 그대로 중원을 향하여 떠났다. 그의 뒤로는 상황호천대 소속 오십여 명이 따르고 있었다. * * * "무엇이? 제일군단부터 사군단까지 모두 괴멸당했다고?" 열이 누워도 충분할 만큼 호화롭고 큰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여인들의 보드라운 손길로 안마를 받던 뇌진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세수 이백이 넘었기에 웬만한 일로는 동요조차 않는 그였지만 전혀 상상도 않던 보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교주! 파사국과 서하국, 그리고 왜에 있던 수하들은 상황호천대의 손에 의하여 괴멸당하였고, 조선 쪽에 있던 자들은 모두 태극은하궁에 당했다 합니다. 살아서 돌아온 자는 전무하다 하옵니다." "으음, 그렇다면 일월장이 중원 상권을 손에 넣는 것이 아직도 요원한 일이란 말이냐?" 뇌진자는 분노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 그러하옵니다." 보고하는 체격이 장대한 장한은 마치 제 잘못인 듯 부르르 떨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뇌진자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으음, 좋다. 처음부터 다시 한다! 각 성(省)마다 무예에 재능이 있는 자들을 각기 삼천 명씩 선발하여 보내라 지시하라. 그들을 키워 천하를 아예 박살내 버리고야 말겠다." "존명!" 장한은 혹여 자신에게 불똥이 튈 것이 두려운지 대답을 하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뇌진자를 안마하고 있던 여인들 모두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장한이 정실 안으로 들어와 보고를 하는 사이 무형진기가 그녀들의 마혈과 혼혈을 점혈하여 그대로 굳어 버렸기에 아무것도 보거나 듣지 못한 상태였다. 뇌진자는 그 상태로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곧 옆에 있던 자색 줄을 힘껏 당겼다. 잠시 후, 정실 안에는 두 개의 안개 같은 인영이 나타나 부복한 채 입을 열었다. "교주의 하명을 기다리오." 두 인영은 안개 같은 것에 휩싸여 있기에 나이가 몇인지, 생김생김은 어떤지, 심지어는 체격이 얼마만한지조차 알 수 없었다. "너희 둘은 곧 강호로 나가 금겁장과 태극은하궁에 대하여 좀더 상세한 정보를 캐어 오라. 그리고 약점이 무엇인지도……." "존명!" 두 인영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나타날 때처럼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사라지자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뇌진자의 입이 다시 열렸다. "좋아, 주물러라." "으응? 교주님, 언제 일어나셨어요?" 뇌진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인들은 꿈길을 걷다 깨어난 듯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그의 전신을 나긋나긋한 손길로 주물렀다. '감히 상황호천대 따위가 본좌의 야망을 가로막다니……. 두고 보아라! 으드드득, 금겁장과 태극은하궁 역시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쓸어버리고야 말겠다.' 여인들의 손길을 받으며 뇌진자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천자(天子)의 위에 오르는 일이 뒤로 연기되었기에 노화가 치솟은 것이었다. 간교한 효웅(梟雄)의 표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심기가 이토록 불편하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 * "크크크, 요희(妖姬). 뇌진자란 놈이 수를 부리는 모양이오." "호호호, 그깟 놈이 제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요? 어차피 토사구팽시키기로 마음먹고 있지 않던가요?" "크크크, 역시 요희는……. 맞소! 그 자는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노폐물이오. 나이만 잔뜩 먹었지." 당고랍산맥 깊숙한 곳 혈황곡 정상에 위치한 만마앙복탑 최정상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는 한시도 천공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제일백이십칠대 혈황마군인 범광무(范侊武)와 사갈요희 문지란(文芝蘭)이었다. 그들 둘은 매일 밤이면 이곳에서 천괴성을 살피는 것이 일과였다. 그 동안 둘은 제법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 내용은 향후 어떻게 천하를 요리할 것인가가 대부분이었다. 우선은 뇌진자가 주장하는 대로 일월교를 급속도로 전파시켜 스스로 중원천하를 바치게 할 셈이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귀암요맥의 고수들을 중원으로 급파하였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일월교 교주 행세를 하고 있는 뇌진자가 교도들을 진두지휘하여 처리하기에 그저 주색잡기나 하고 있으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귀암요맥에서는 뇌진자 일가 이외의 다른 인물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충실히 중원의 모든 것을 파악하여 보고할 것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천괴성을 타고난 인물과 격돌한 이후 천하를 경영할 것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그런 후 파사국, 서하국, 왜, 조선, 천축, 서장, 신강 등등 점차 범위를 확대시켜 온 세상을 지배하기로 하였다. 만일 이 일을 가로막을 유일한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광명천계(光明天界)에 속해 있는 천괴성(天魁星)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자일 것이다. 현재 그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임무를 맡고 있는 자가 바로 뇌진자였다. 따라서 일단 그를 죽이고 중원천하를 장악하게 되면 뇌진자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다. 천괴성이 빛을 발하지 않는 이상 누구인지 알 길이 전혀 없기에 이대로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호호호, 마군(魔君). 중원 정복을 하기 전에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요." "후후후, 쓸데없는 소릴랑 마시오. 그것은 장차 중원을 정복한 후에 보아도 늦지 않을 터! 이대로 조금만 더 기다리시오." "아니에요. 소매는 그 전에 세상을 보고 싶어요." "후후, 요희가 떠난 후 천괴성이 빛을 발하면 어쩌지?" "호호호, 천괴성이 빛을 발하려면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설사 천괴성이 빛을 발한다 하더라도 마군 홀로 대적해도 충분하잖아요? 안 그래요?" 문지란의 말에 범광무의 고개가 처음으로 끄덕였다. "후후……, 그건 맞소! 그 자가 설사 광명천계의 모든 것을 얻었다 하더라도 본좌를 대적할 수는 없을 것이오." "맞아요! 마군은 이미 인간으로선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극고의 경지에 도달하였기에 아마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상대할 수 없을 거예요." 사갈요희의 말에 혈황마군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그건 그렇소. 너무 강한 것이 탈이지. 그래서 상대를 이토록 기다려야 하는 것이고……." "호호……, 맞아요. 그래서 강호로 나가 보고 싶은 거예요. 어차피 천하는 우리 귀암요맥이 장악할 거 아니에요? 그 전에 어리석은 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를 보고 싶은 거예요." 사갈요희의 봉목에서 이상야릇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현재 혈황마군의 기분을 맞춰 주면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후후……, 그래서 나가 보고 싶은 게요?" "호호호, 그래요. 그러면서 뇌진자가 도대체 천하를 상대로 어떤 장난을 치는지도 보고 싶고요." "후후후, 뇌진자가 어떤 장난을 치는지 살펴본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 좋소!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보시오. 대신……." 혈황마군의 입에서 승낙의 말이 떨어지자 사갈요희의 눈에 희열의 빛이 흘렀다. "호호호, 그 뒷말은 걱정 안 해도 돼요. 언제든 천괴성이 빛나면 그 자의 최후를 보기 위해서라도 꼭 돌아오겠어요. 그건 선대 사갈요희들의 염원이기도 하니까요." 그녀의 말에 혈황마군의 얼굴에 또다시 미소가 어렸다. 냉막한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는 순간은 오로지 사갈요희와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후후후! 잊지 마시오, 모든 일이 끝나면 우리가 혼례를 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호호호, 알아요.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에게 천하를 물려줘야 한다는 것도……." "후후후, 좋소. 언제든 원하는 시기에 떠나시오." 만마앙복탑 정상의 대화는 그날로 끝이었다. 다음 날 사갈요희가 그곳을 떠나 중원으로 흘러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단 하나의 시비도 거느리지 않고 혈혈단신으로 떠났다. 귀암요맥의 선조들은 수천 년 간 지저에 머물면서 따로 할 일이 없었기에 엄청난 무공들을 창안해 내었다. 그것들은 모두 서책으로 묶여 한곳에 보관되어 왔다. 그것들이 보관된 장소는 바로 귀암장서각(鬼暗藏書閣)이었다. 이곳은 내각(內閣)과 외각(外閣)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외각에는 수백만 권의 무공기서들이 있고, 내각에는 수천 권의 무공기서들이 있다. 외각은 귀암요맥의 인물이라면 누구든 드나들며 연공할 수 있으나 내각은 아니었다. 내각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은 오직 넷! 혈황마군과 사갈요희,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뿐이었다. 내각의 장서(藏書)들은 선대 혈황마군과 사갈요희들이 직접 창안한 무공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대대로 혈황마군과 사갈요희의 후계자는 귀암요맥의 인원들 중 가장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왔다. 혈황마군이나 사갈요희가 노쇠하여 죽음에 도달하면 뒤를 잇기 위하여 모든 맥도들은 의무적으로 무공과 지혜 등을 시험하는 관문에 도전하여야 했다. 모두 삼십육 관문으로 이루어진 이곳엔 강하기만 하고 생각할 능력이 부족하다면 장차 귀암요맥을 이끌거나 중원 제패에 어려움이 있다 판단하여 지혜를 시험하는 관문이 유난히 많았다. 이 관문을 모두 돌파한 최후의 승자가 후계자로 선정된다. 그들은 그때부터 내각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 더욱 강해지게 된다. 내각의 모든 무공을 연성한 후 혈황마군과 사갈요희 처소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혈황마전(血皇魔殿)과 사갈요전(蛇蝎妖殿)이란 곳에 비전(秘傳)된 모든 장서(藏書)들을 통해 혈황마군과 사갈요희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을 익히게 된다. 그곳에 있는 서책들은 선대 혈황마군과 사갈요희들이 직접 작성한 서책들이 보관되는 곳이다. 그 서책들은 장차 자신의 대에 천괴성이 나타날 경우 어떤 방법으로 중원을 도모할지에 대한 가지각색의 계략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후, 개정대법(開頂大法)으로 막강한 내공마저 물려받게 된다. 이런 절차를 모두 밟은 후 비로소 혈황마군과 사갈요희가 되는 것이다. 일단 혈황마군과 사갈요희가 되면 그들에겐 모든 귀암요맥 맥도들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이 주어지며, 누구도 그들의 명에 거역할 수 없다. 또한 그들에겐 가공할 시위들이 배치된다. 그들은 각기 혈황마군과 사갈요희의 후계를 잇기 위하여 도전하였던 자들 가운데 이위부터 십위까지의 인물들이다. 최후의 승자가 정해지면 그들은 즉각 혈황마군과 사갈요희에게 불려가 특수한 사도대법(邪道大法)으로 이지(理智)를 상실한 실혼인(失魂人)이 되어 죽을 때까지 그들을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든 이인자들이 모반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감안한 조치였다. 따라서 관문을 통과할 때 도전자들은 생사를 걸고 도전하였다. 덕분에 귀암요맥은 나날이 강해져만 갔던 것이다. 귀암요맥의 맥규 중 특이한 것은 혈황마군과 사갈요희는 중원 정복에 성공하였을 경우에만 혼례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천괴성이 나타나지 않으면 비록 정혼자의 관계라 하지만 절대로 동침이 허락되지 않는다. 둘 사이에 아이라도 태어나게 되면 그 아이에게 귀암요맥의 모든 것을 물려주려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의 아이가 반드시 전 귀암요맥도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런 맥규(脈規)가 생긴 것이다. 따라서 현재 혈황마군 범광무와 사갈요희 문지란은 정혼자의 관계만 유지할 뿐 신체 접촉은 전무한 상태였다. 만일 이 시대에 천괴성을 타고난 자가 출현하게 되어 그를 죽이게 되면 둘은 그때서야 혼례를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혈황마군은 사갈요희를 볼 때마다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끼나, 맥규 때문에 그녀를 취할 수 없어 다른 여인들을 침상으로 끌어들여 재미를 보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여인과 교합을 하든 그의 뇌리에는 언제나 사갈요희가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귀암요맥의 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기 때문도 하였지만, 선대 사갈요희와는 달리 남자에게 순종하는 형이기 때문이었다. 귀암요맥의 대부분 여인들은 기가 세고 거칠었던 것이다. * * * "어서 오게!" 남궁호를 맞는 손해랑의 얼굴은 얼마나 노심초사하였는지 시커멓게 타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호위들은 모두 어디로 갔고요?" 남궁호의 물음에 손해랑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노부가 약초를 구하려 나갔다 왔을 때에는 이것밖에 없었네. 빙아를 호위하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어 노부도 모르네." 남궁호는 손해랑이 내미는 꾸깃꾸깃한 종이를 받아 펼쳤다. <무무색황 남궁호 대협 전(前). 대협의 내자와 자식은 우리들이 잘 데리고 있소. 차후 우리들의 요구 조건이 이행되면 돌려줄 것이니, 찾지 마시오.> "이, 이런!" 남궁호는 손약빙과 아들인 남궁진이 납치된 것이 분명해지자 노화가 치솟았다.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까?" "휴우! 아무것도 없었네. 혹시 몰라, 빙아가 쓰던 방은 손을 대지 않았으니 혹시 무슨 흔적이라도 있는지 찾아보게." 남궁호는 재빨리 손약빙이 쓰던 정실을 자세히 살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얌전히 있는 것으로 보아 납치되면서도 반항을 한 흔적이 없었다. "흐음……."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손약빙과 아들을 납치해 갈 만한 은원이 없기에 남궁호는 깊은 고심에 잠겼다.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역시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여인들 가운데 무공이 가장 약한 손약빙을 위하여 호위들을 특별히 강한 사람들로만 구성하였었는데,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이건 분명 누군가 아는 사람이 아니면 지독하게도 무공이 강한 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흐음, 오십여 호위들 모두를 한꺼번에 제압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 분명 누군가 약빙과 아는 자일 것이다." 남궁호는 나름대로 추리를 하여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꾸민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손에 쥐고 있는 종이 조각 외에는 아무런 단서도 없어 더 이상은 추리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혹시 이상한 말을 했다던가?" "그런 것 없네! 노부가 약초를 구하러 나갔다 온다 하였을 때에도 잘 다녀오라는 말밖에 없었네." "흐음……." 남궁호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 되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을 때, 손해랑이 어디론가 가더니 무엇인가를 들고 나왔다. "노부가 잊고 있었는데, 전에 어떤 사람이 와서 자네가 오면 꼭 전해 주라는 서찰이 있었네." 남궁호는 말없이 서찰을 받아 펼쳤다. <금겁공자 남궁호 대협 전(前). 귀하에게 문의할 것들이 있으니 바쁘시더라도 시간을 내어 본보를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철기보 무정검 북리대손 배상.> "으응? 철기보? 이 서찰은 언제 온 것입니까?" 남궁호는 천하인들 모두가 자신을 무무색황이라 부르는데, 예전의 명호인 금겁공자라 쓰인 서찰을 보자 상당히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고 물었다. "노부가 정신이 없어 깜빡했네. 그건 자네가 황과수로 떠나려 할 때 온 것이네." "그렇다면 꽤 오래 전에 온 거군요?" "맞네! 일 년이 훨씬 넘었네." "한데, 이것을 왜 이제서야……." 남궁호의 말에 손해랑은 헛기침과 함께 머리를 긁적거렸다. "흐흠, 그저 늙으면 죽어야지.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네." 남궁호는 손해랑에게서 서찰을 전한 자가 전신에 철갑을 두른 기병이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철기보와는 좋은 인연이 없는 그로서는 대체 왜 자신을 찾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왜 나를 찾지? 혹시……?" 남궁호는 손약빙의 실종이 철기보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자신을 불러들이기 위하여 이런 일을 꾸몄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 생각에 무리가 있음을 금방 깨달았다. 손약빙이 철기보와 일면식이라도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간과하였던 것이다. "흐음, 대체 무슨 이유로……?" 남궁호는 철기보에서 자신을 찾을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손약빙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라도 그곳에 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철기보는 희수에서 그리 머지않은 곳이기에 그는 사흘 만에 그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무한 시진 한복판에 자리잡은 철기보는 여전히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후후……, 이번이 두 번째군." 철기보의 성곽을 바라보는 남궁호의 눈에는 감회가 어렸다. 흑심수라 장호삼에게 무공을 배우려는 목적으로 방문하였다가 일 년 동안이나 냉혈장비 독고태인에게서 지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곳으로 말미암아 무림에 뛰어들게 되었고, 많은 여인들을 얻지 않았던가! 그리고 태극오관을 돌파할 때 마지막 관문을 돌파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철기보 지하에서 들었던 천부경 구절 때문이 아니었던가! "누구냣? 철기보는 당분간 외객을 받지 않으니, 썩 물러가라!" 남궁호가 막 다리를 건너 정문으로 다가서자, 수문위사가 날카로운 창으로 겨누며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후후, 소생은 철기보의 초청을 받아 온 것이오." 서찰을 꺼내 건네자 수문위사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크하하, 소보주께서 보를 떠나신 지가 언제인데……. 감히 누구를 속이려는 것이냐?" 수문위사가 서찰을 건네받고도 경계를 풀지 않자 남궁호는 자못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후……, 분명 초청을 받았는데 그 무슨 말이오?" "어쨌든 본보에서는 당분간 외객을 받지 않으니 썩 물러가라!" 수문위사의 싸늘한 반응에 남궁호는 무정검 북리대손은 분명 철기보의 소보주인데, 그의 서찰을 이토록 가볍게 여기는 그가 이상했다. 그러나 자신이 지니고 온 서찰이 일 년이 넘은 것이기에 일단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알겠소이다! 소생은 앞에 있는 객잔에 있을 터이니, 안에 전갈이나 해 주시오." 남궁호는 두말 않고 몸을 돌려 객잔으로 향하였다. 객잔 안은 의외로 한산하였다. 이층 주루에는 불과 서너 탁자에만 손님이 있을 뿐 거의 텅 비어 있다시피 하였던 것이다. ― 이보게, 자네도 얼른 짐을 꾸릴 생각을 하게. ― 그게 무슨 말인가? 짐을 꾸리다니? ― 곧 세상이 뒤집어질 거라는 소문일세. ― 허참! 답답하게 그러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을 해 줘야 알 것 아닌가? ― 일월교에서 천하를 장악하겠다고 나섰다네. ― 그게 어때서 짐을 꾸려야 하나? ― 아, 이런 바보를 보았나? 철기보도 일월교가 무서워 모두 도망갔다고 하지 않는가! ― 철기보가 도망을 가? 이 사람, 자네 제정신인가? 철기보가 어떤 문판데, 도망을 가나? 저기 보게, 저렇게 수문위사가 딱 버티고 서 있는데……. ― 이런 바보! 자넨, 소식도 못 들었나? 철기보에 공급되던 식품들이 백분지일도 안 되게 줄어들었네. 제아무리 무공이 높다 하더라도 굶고는 살 수 없는 법! 그들은 벌써 도망갔네. ―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 아, 내 친구 중에 철기보에 식품을 납품하는 자가 있는데……. 한 잔 술을 곁들여 천천히 식사를 하던 남궁호는 바로 곁 탁자에서 침을 튀기며 시끄럽게 떠드는 양민들의 입을 통하여 철기보가 어디론가 잠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으음, 일월교가 강호에 큰 파장을 일으킨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강호십정 가운데 하나였던 철기보가 잠적을 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명적암(我明敵暗)! 즉, 아군은 밝은 곳에 노출되어 있는 반면 적은 어둠 속에 은신해 있다면 상당히 곤혹스런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잠적함으로써 적으로부터의 암습을 대비하자는 취지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후후후, 철기보의 지낭이 있다더니, 과연…….' 남궁호는 도화요정(桃花妖精) 북리운혜라는 꾀주머니가 철기보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 가서 철기보를 찾는단 말인가? 지금 현재론 약빙의 행방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데…….' 남궁호는 난감하였으나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에 다소 곤혹스러웠다. 상대가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을 능력이 있다면 상황호천대를 동원하여도 찾을 수 없을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날 밤 남궁호는 이런저런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러나 내려진 결론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조반을 들고 있을 때 남궁호는 철기보의 수문위사를 볼 수 있었다. "공자님!" "후후……, 어서 오시오. 웬일이오?" "어제는 죽을죄를 졌습니다. 시간을 내주실 수 있는지요?" 어제의 뻣뻣하던 자세와는 달리 수문위사는 더 이상 정중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후후……, 좋소이다." 그는 허리를 숙여 남궁호의 귀 가까이 입을 대고 속삭였다. "후후……, 알겠소이다." 그가 사라진 후 남궁호는 서둘러 무한을 떠나 어디론가 향하였다. 철기보의 수문위사는 어제 남궁호가 떠난 후 전서구를 통하여 상부에 보고하였고, 회답을 받았던 것이다. * * * "호호……, 이제 궁도들의 서열이 정해졌느냐?" "그러하옵니다, 성녀!" 운남성(雲南省) 대리(大理)에 있는 만산(滿山) 깊숙한 곳에서 영롱한 음색을 지닌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이곳은 옥성궁(玉聖宮)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옥녀탑(玉女塔) 칠층이었다. 얇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채 태사의에 앉아 있는 여인은 바로 옥성궁의 궁주인 옥화성녀(玉花聖女) 백리무영이었다. 그녀의 전면에는 마치 천상 선계에서나 볼 법한 그런 의복을 걸친 여인이 시립해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팔선녀라 불리는 여인들 가운데 하나인 건일이었다. 팔선녀는 각기 건일(乾日), 태월(兌月), 이성(離星), 진천(震天), 손지(巽地), 감인(坎人), 간해(艮海), 곤산(坤山)으로 불렸다. 이들의 명호를 살펴보면 팔괘(八卦)인 건태이진손감간곤(乾兌離震巽坎艮坤)과 천지만물을 결합시킨 것으로, 이는 장차 옥성궁이 천지만물을 다스리려 한다는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호호, 좋아. 본궁의 지휘 체계를 어찌할 것인지를 보고하라." "예, 성녀. 우선 옥성궁은 궁주이신 성녀님 예하……." 옥성궁은 옥화성녀 백리무영 밑으로 팔선녀가 있고, 다시 그 밑에 옥황전(玉皇殿)과 상제전(上帝殿)이 있다. 옥황전과 상제전은 각기 두 개씩의 각(閣)을 두는데, 그들은 각기 옥천각(玉天閣)과 황천각(皇天閣), 그리고 상지각(上地閣)과 제지각(帝地閣)으로 불린다. 그들 밑에는 또다시 두 개씩의 당(堂)이 있고, 그 밑에 두 개씩의 향(香),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 향마다 여덟 개의 대(隊)가 있다. 그 밖에도 팔선녀의 직속의 팔열지옥(八烈地獄)이 있다. 이곳은 다른 문파의 형당(刑堂)에 해당하는 곳으로 죄지은 자를 처벌하는 곳이다. "호호……, 그래? 좋아! 수뇌부들을 불러모아라." "존명!" 건일은 마치 희뿌연 안개가 아침 햇살에 스러지듯 스르르 사라졌다. 지난 세월 동안 백리무영은 뛰어난 오성(悟性)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던 잔결오마(殘缺五魔)와 칠지악법(七指惡法) 등의 마공과 옥성궁도들이 자진해서 내놓은 강호 구파일방의 정공들을 취합하여 익히기는 쉬운 무공들을 많이 창안하였다. 그것들은 마공이 지니고 있던 마성이 많이 사라져 누가 보아도 정공과 다름없는 절정무공이었다. 덕분에 옥성궁도들의 무공은 일취월장을 거듭하여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이곳 만산은 인적이 끊긴 지 오래 된 곳이었기에 기화이초와 온갖 영약들이 무진장으로 자생하고 있었다. 천의곡(天醫谷)이라는 궁주 직속 기관의 곡주를 맡고 있는 자면신의(紫面神醫)는 올해 육십이 갓 넘은 노인이지만 옥화성녀의 미모에 혹하여 이곳까지 따라온 자였다. 그는 현재 성녀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만산에서 나는 기화이초로 내공을 높일 수 있는 영단을 제조하여 진상하고 있었다. 덕분에 옥성궁도들의 내공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높아져 가고 있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의 공명심 때문에 궁도들 대부분이 마약에 중독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조한 영생환(永生丸)에는 상당량의 앵속(罌粟) 성분이 함유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일 영생환을 열흘 이상 공급받지 못하면 금단 증세로 전신에 오한이 나고 발열과 경련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영생환이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한 부작용은 없다. 현재 무진장으로 제조된 영생환이 천의곡 창고에 쌓여 있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 영생환 덕분에 십만 옥성궁 궁도들은 가히 일류고수로 발돋움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궁도들 전원은 옥성삼십육관이라는 관문을 설치한 후 이것에 도전하였었다. 그들 모두는 정사마의 무공이 적절히 배합된 옥성무경(玉聖武經)이라는 무공기서의 무공들을 충실히 익혔기에 대부분이 십 관을 우습게 돌파하였다. 이 정도만 하더라도 강호의 이류무사들을 뛰어넘는 경지였다. 도전자들은 제각기 돌파한 관문 수에 따라 직책이 주어졌다. 그 중 삼십오 관을 돌파한 화화공자(花花公子) 서문일기(西門佚基)와 냉면수라(冷面修羅) 곽호(郭葫)가 최고의 성적이었다. 그들은 각기 옥황전과 상제전의 전주직을 제수받았다. 삼십육 관을 모두 돌파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들은 지금 강호로 나가도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능히 백초 이내에 격파할 실력과 능력을 겸비한 자들이었다. 옥화성녀 백리무영이 팔선녀를 대동하고 옥녀탑 오층 의사청에 나타나자 자리에 앉아 있던 이 전, 사 각, 팔 당, 십육 향, 일백이십팔 대의 수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옥성성녀(玉聖聖女) 만세무궁(萬歲無窮)!" "오호호홋, 그 동안 수고들 많으셨소." 옥화성녀의 맑고 투명한 교소소리가 의사청에 퍼져 나가자 모두의 얼굴엔 마치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가 서렸다. 이것은 그녀가 그들에게 시전한 바 있는 수라제혼법에 의한 결과였다. 언제든 자신의 음성이 들리면 제아무리 고통스런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미소짓게 만들었던 것이다. "본궁은 이제 강호로 나아가 정의를 실현하여 본궁의 위상을 드높임과 동시에 전 강호인들을 본궁에 투신케 하여……." 옥화성녀는 장차 옥성궁이 강호를 제패하여 통치하여야 한다는 말을 갖은 감언이설로 교묘히 설파하고 있었다. 이를 듣고 있는 수뇌부들의 얼굴엔 자긍심과 결연함이 그대로 배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적어도 백리무영의 음성이 들리는 곳에서는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인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수라제혼법은 시전자의 음성을 자주, 그리고 많이 들을수록 영혼의 금제가 더욱 심해지는 수법이었기에 그들의 영혼은 점차 그녀에게 귀속되어 가고 있었다. 옥성궁은 현재 모든 정비가 갖춰져 하나의 문파로서 개파대전을 열 충분한 실력과 아울러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다. 강호에 새로운 문파가 창건되었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 갔다. 그 문파는 정의실현을 기치로 내건 옥성궁이었다. 총단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부분 아직 젊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문파이며, 궁주는 여인의 몸이지만 강호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다 소문났다. 세인들은 이 말을 들으면서 처음엔 긴가민가하였다. 그러나 곧 그들은 이 말에 수긍하였다. 옥성궁에서는 강호의 그 어느 누구든 도전만 하면 이에 응전하겠다고 반포하였었다. 옥성궁에서는 이를 위하여 동정호변 드넓은 초지에 누대를 설치하였다. 지금까지 대략 백여 명이 도전하였으나 모두 패배하였던 것이다. 이름하여 옥성도전대(玉聖挑戰臺)라 불리는 이곳에서는 연일 도전자들이 갖가지 관문에 도전하고 있었다. 도전자들은 이미 패한 백여 명이 무림에서도 혁혁한 위명을 날리던 고수들이었기에 만일 자신이 승리를 하게 될 경우 명예와 더불어 기막힌 절세미녀를 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옥성궁의 궁주인 옥화성녀는 이제 겨우 이십 세를 갓 넘겼으며, 천하제일미인 세외천미 을지예인과 대등한 미모를 지녔다고 소문이 나 있었고, 누구든 자신을 꺾는 자에게 일생을 의탁하겠다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옥성도전대의 대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모두 다섯 관문을 넘어야 한다. 자칫 실력도 없는 자가 호승심만 가지고 대에 오르는 것을 제지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물론 대부분이 이 관문들에서 탈락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관문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절세미녀들이기 때문이었다. 팔선녀로 지칭되는 건일, 태월, 이성, 진천, 손지, 감인, 간해, 곤산으로 불리는 여인들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대부분의 도전자들이 한눈을 팔다 손발이 어지러워져 탈락하곤 하였다. 탈락자들 중 일부는 그녀들의 미모에 혹하여 옥성궁에 투신하는 자들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물론 그 자들의 처자나 부모, 사문에서 극구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여색에 눈먼 그들에겐 어떻게 하면 팔선녀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가 절대 관심사였기 때문이었다. 하여, 옥성궁도들의 수효는 점점 늘어만 갔다. * * * 일월교에서도 이제는 내놓고 교도들을 모으고 있었다. 누구든 원하는 상대와 언제든 즐길 수 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번져 가면서 이제는 불한당들 이외에도 색에 관심이 많은 서생들까지 교도가 되겠다고 나설 정도였다. 우려를 표명한 황궁에서 일월교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하였으나 수뇌부들은 구름에 가린 신룡처럼 신분을 알 수 없었다. 남북 십삼 성에 지부가 만들어진 지는 오래였고, 촌락마다 마을 이름을 딴 전(殿)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덕분에 실종되는 여인들의 수효가 급증되어 세인들은 여인들을 납치하는 자들이 바로 일월교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일월교의 전(殿)이 없는 곳에서는 실종되는 여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금강수라마강시와 귀수혈사단 등으로 한바탕 혈겁을 겪은 강호에는 거대 문파가 없었기에 이런 파렴치한 일을 벌일 만한 문파가 거의 없었던 것도 그들이 의심받는 이유 중 하나였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