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문석굴에서의 기연 "후후……, 모르면 몰랐으되 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알면 서도 새겨넣지 않을 수 없구나." 남궁호는 이곳에 들른 많은 의생들이 약방문을 베껴 환자들을 치료할 것이라 짐작하고 숙(熟)자를 새겨넣으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쇠꼬챙이 같은 것이 한 구석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본 그는 그것을 주워 석벽에 올라섰다. 글자를 새겨넣을 곳이 제법 높은 곳에 있어 움푹 파인 그곳에 올라서야만 했던 것이다. "흐음, 어디 보자. 다른 글자와 틀리면 안 되겠구나." 남궁호는 자신이 만일 다른 서체로 글자를 새겨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 이를 믿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가능한 한 같은 서체가 되도록 일단 살짝 긁었다. 석벽은 보기보다는 단단하지 않은 듯 별로 세게 긁지도 않았는데 돌가루가 떨어져 나갔다. 약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세 치 깊이로 새겨놓은 다른 글자들처럼 깊숙하게 글자가 파였다. 이제 두서너 번만 더 힘주어 긁으면 다른 글자들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 생각한 남궁호가 힘주어 긁자 쇠꼬챙이 끝에 무언가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어? 이게 뭐지?" 남궁호가 막 지금까지와는 다른 촉감에 이상하다 생각하려는 순간, 갑자기 발 밑이 허전해졌다. 우르르르릉! "아앗!" 미처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신형이 밑으로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그의 시야로 석벽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아악!" 남궁호는 마치 무저곡인 듯싶은 깊디깊은 틈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분명 글자를 새기기 위하여 올라선 석벽은 단단해 보였고, 그 부근은 평범하였는데 어디에서 이런 깊은 협곡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남궁호는 전에도 대흥안령산맥을 넘는 도중 세외천미가 실족하는 바람에 그녀를 구하여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던 기억을 되살려 재빨리 밑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떨어져 내리는 두 벽면은 사람의 팔다리로는 닿을 수 없는 일 장이 넘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발 밑으로는 마치 거울처럼 매끄러웠기에 무엇을 붙잡거나 할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시커멓게만 보이는 밑에는 대체 무엇이 있으며, 얼마만큼의 깊이인지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귓전으로 들리는 바람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려 몇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종래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남궁호가 혼절한 상태로 떨어지기를 얼마간 드디어 깊디깊은 바닥이 드러났다. 첨벙! 하얀 포말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가라앉는 사이 남궁호의 신형은 깊은 물 속에 잠겼다가 서서히 떠올랐다. 다행히도 그가 떨어져 내린 곳은 지저에 있는 호수였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지만 혼절한 남궁호는 그것도 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빙빙 돌고 있는 소용돌이 쪽으로 끌려들고 있었다. 아무리 노련한 어부라 할지라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세차게 도는 이 소용돌이 앞에서는 절로 소변을 지렸으리라. 그렇다. 소용돌이는 보통의 것과는 달라도 엄청나게 달랐다. 우선 소용돌이가 치고 있는 곳은 수면이 다른 곳보다 무려 삼 장이나 낮았다. 그리고 소용돌이의 권역은 엄청나게 넓었다. 남궁호가 빠진 수면은 거대한 지저 호수인데, 반경이 무려 일백 장은 족히 될 크기였다. 그 대부분이 소용돌이의 권역이었다. 다시 말해, 아주 가장자리로 떨어지지 않는 한 어떤 것이든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들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 남궁호의 신형은 물에 젖은 지푸라기처럼 맥없이 소용돌이로 빨려들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무엇이? 뇌진자가 급사(急死)를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혈황마군은 천공에 찬란히 빛나는 귀암마성과 혈요마성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수하의 보고를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금 전 수하는 일월태상각으로부터 뇌진자가 급사하였다는 전갈을 받았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말도 안 된다. 비록 그가 이백이 넘은 고령이긴 하지만 뇌진자의 화후가 어떤지 뻔히 알거늘, 어찌 급사를 한단 말이냐?" 범인들은 고령이 되었을 경우 잠을 자다 죽는다든지, 아니면 멀쩡히 있다가 쓰러져 죽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뇌진자처럼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화후에 이른 사람에겐 급사란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혈황마군은 뇌진자에게 적어도 팔 갑자에 달하는 내공이 있음을 익히 알기에 수하의 보고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으음, 본좌는 믿을 수 없다. 직접 눈으로 보아야겠다." 자리에서 일어선 혈황마군의 신형은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눈앞에서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보고를 하던 수하는 그의 이런 신법에 얼이 빠졌는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역시 대단한 내공을 지니고 있지만 눈앞의 혈황마군같이 순식간에 감쪽같이 사라지는 신법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만마앙복탑을 나선 혈황마군의 신형은 허공을 나는 새보다도 빠르게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단 한번도 땅에 내려서지 않고 허공에서 진기를 몇 번 고르는 일밖에는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형은 쏜살보다도 빨리 날았다. 무림의 최절정 고수들이나 시전할 수 있다는 초상비나 축지성촌 같은 신법은 이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였다. 일월태상각에서는 교도들이 내는 곡소리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곳에 무공을 익히러 온 자들과 제례를 배우기 위하여 온 여인들이 내는 곡소리는 십 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전에 뇌진자로부터 자신이 혈황마신으로 거명된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혈황마군은 짐짓 허공에 신형을 멈추고 육합전성(六合傳聲)의 수법으로 전음을 보냈다. "본신은 교주를 살피러 왔노라. 교도들은 모두 물러서라!" 한참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던 교도들은 귓전으로 들리는 너무도 엄숙한 음성에 일제히 허공을 우러렀다. 대략 백여 장 높이에서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계단을 딛고 내려서듯 천천히 하강하고 있는 혈황마군의 천신 같은 모습을 본 그들의 입은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정도로 벌려졌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감탄사가 섞인 음성이 터져 나왔다. "마, 마신이시다! 모두 오체투지하라" 소리를 들은 교도들은 일제히 오체투지하며 외쳤다. "만마앙복(萬魔仰伏) 마신현신(魔神現身)!" 그와 동시에 일월태상각은 완전한 적막에 휩싸였다.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혈황마신이 교주의 죽음을 애도하러 나타났다는 데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었고, 그 동안 들어온 바에 의하면 누구든 마신의 얼굴을 보는 자는 즉사를 면치 못한다는 데서 오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은은한 향이 가물거리며 올라가는 제대에는 뇌진자의 위패가 놓여 있었다. 위패를 바라보던 혈황마군이 천천히 휘장 뒤로 들어가자 뇌진자의 시신이 담겨 있는 수정관이 보였다. 연자색을 띠고 있는 투명한 수정관에는 뇌진자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부교주는 안으로 들라!" 휘장 뒤로부터 혈황마신의 음성이 들리자 엎드려 있던 교도들의 선두에 있던 부교주가 일어났다. 그는 뇌진자의 장자였다. "속하가 맥주를 뵈오이다." 그는 원래 귀암요맥의 일원이었기에 공손히 포권하며 한쪽에 시립하였다. 이때 그의 귀로 혈황마군의 전음이 들렸다. "교주가 서거한 것은 언제인가?" "선친께선 어젯밤에……." "사인(死因)은?" "그, 그게……." 뇌진자의 장자인 혁철환(赫撤紈)은 귀암요맥의 사십 장로 중 말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행마군(五行魔君)이란 외호를 지닌 그는 혈황마군의 질문에 답을 제대로 못하고 진땀만 흘리고 있었다. 상명하복이 철저한 귀암요맥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인을 말하라고 했다!" 나이는 이미 일백오십이 넘은 그였지만 겨우 사십 정도로 보이는 그가 맥주의 채근에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혈황마군이 노화가 치솟는지 음성이 약간 커졌다. "태상장로의 사인은 무엇이더냐?" "그, 그게…… 복, 복상사(腹上死)이옵니다." "무엇이? 복상사? 태상장로의 연치가 얼마이거늘……." 혈황마군은 너무도 어이없는 답변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가 기억하기로 뇌진자는 올해 이백칠 세였다. 그런 그가 젊은 사람들에게나 볼 수 있는 복상사를 하였다니, 기가 찼던 것이다. "아, 아버님께서는 요즘 유난히도 새, 색을 밝혀……." 그래도 혈황마군은 믿기지 않았다. "맥도들 가운데 수뇌부들을 이곳에 집결시켜라." "예에? 이, 이곳으로요?" 오행마군이 곤란해하였지만 혈황마군의 안색은 싸늘해졌다. 얼마 전부터 수하들로부터 뇌진자의 세력이 너무 커져 자칫 모반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보고가 있었다. 어느새 뇌진자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귀암요맥의 오할 정도가 된다는 보고였다. 그래서 혹시 암계를 꾸미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의문이 일었던 것이다.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가 그랬고, 금선탈각지계(金蟬脫殼之計)가 그랬다. 뇌진자처럼 꾀가 뛰어난 자는 교토삼굴(狡 三窟)의 술수를 능히 부릴 줄 안다는 것을 짐작하는 혈황마군은 하고 많은 사인 가운데 복상사라는 말도 안 되는 사인으로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아직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엇하고 있느냐? 본주의 말이 들리지 않는단 말이냐?" "조, 존명!" 오행마군 혁철환은 허리를 반으로 꺾고는 사라졌다. 홀로 남은 혈황마군이 허공을 격하고 가볍게 손짓을 하자, 수정관의 뚜껑이 천천히 열렸다. 적어도 일천 관은 족히 될 관 뚜껑을 손짓 한 번으로 여는 그의 공력은 가공할 지경이었다. 뇌진자는 죽은 지 이미 하루가 넘어 시신이 뻣뻣하게 경직되어 가고 있었다. "흐음, 복상사라……." 혈황마군은 자신이 예전에 읽었던 의서에 의하면 복상사를 한 자의 양물(陽物)은 만 하루 동안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그의 사타구니를 더듬었다. 뇌진자는 정말 복상사를 하였는지 하물이 곧추선 채 있었다. "흐음, 정말 복상사를 하였다는 말인가?" 그래도 믿기지 않은 혈황마군은 뇌진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혹여 인피면구를 씌웠거나 역용약으로 역용을 하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던 혈황마군은 이번엔 그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헤쳐 보았다. 자신의 부친이자 선대 혈황마군은 개정대법으로 내공을 전수하기 전 이런 말을 하였었다. ― 뇌진자가 뛰어난 사람이기는 하나 결코 그를 완전히 신뢰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 아비가 보기에 그와 그의 후손들은 언제고 본맥에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니, 언제든 그들을 견제하거라. 알겠느냐? ― 예! 소자, 알겠사옵니다. ― 참, 뇌진자에게는 남이 모르는 신체의 비밀이 있다. 그것은 그의 머리에 콩알만한 사마귀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자식들조차 모르는 비밀이다. 언제고 그의 신변에 이상이 있거든, 이것으로 그를 확인하면 될 것이다. 이 말 이외에도 혈황마군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많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처럼 그의 신원을 확실히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머리카락 사이를 뒤지던 혈황마군은 백회혈에서 삼 촌 가량 떨어진 곳에 콩알만한 사마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흐음, 그렇다면 사실이었다는 말인가?" 사마귀를 확인하고도 못내 믿기지 않던 그는 시신의 체내로 진기를 넣어 보기도 하였고, 심장이 뛰는지도 확인하였다. 뇌진자는 분명 싸늘한 시신이 되어 누워 있었다. "속하들이 맥주를 뵈오이다." 혈황마군이 막 수정관을 도로 덮고 돌아서려는데 일월태상각에 머물던 십여 명의 장로들이 나타나 오체투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핀 혈황마군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뇌진자의 가문인 오행마가와 전혀 상관이 없는 천부마가와 도룡마가, 그리고 추혼마가의 인물들이 있었다. 게다가 자신과 같은 가문이며 자신에게는 조부 뻘인 철혈마가 소속의 장로도 있었다. "흐음, 본맥이 큰 별을 잃었소이다. 이제 천괴성이 나타나 그를 물리치기만 하면 되는 시점에 그 동안 큰 역할을 하던 태상장로를 잃었소. 장례를 마친 후 오행마가에서 새로운 장로를 추천하시오. 그리고 당분간 일월교는 혁장로가 맡아 이끌도록 하시오. 본맥이 이제 천하를 얻게 되었는데……. 쯧쯧, 참으로 애석한 일이오이다." 혈황마군의 말을 들은 장로들은 그가 이제 뇌진자의 죽음을 확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다시 당고랍산맥으로 돌아간 후 일월태상각에서는 또다시 곡성이 터져 나왔다. 죽은 뇌진자가 일월교의 교주였기에 그의 장례는 사십구 일 동안 치르기로 하였다. 그 사이 중원각지에 있던 일월교의 수뇌부들이 조문을 올 것이다. * * * "끄으응! 여, 여긴 어디지?" 물먹은 솜처럼 늘어져 있던 남궁호의 몸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눈이 떠지며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저곡처럼 깊은 곳으로 떨어져 내리던 기억을 더듬은 남궁호는 자신이 하반신은 물 속에 담겨진 채 낯선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일어났다. 다행히 물로 떨어졌기에 다친 곳은 없는 모양이었으나 너무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렸기에 전신이 마치 쇠뭉치로 얻어맞은 것같이 욱신거려 검미를 찌푸렸다. "우우욱!" 그는 자신이 엄청난 소용돌이에 끌려들어 무려 이천 장이나 떨어진 곳으로 이동되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소용돌이로 빨려든 그의 신형은 쏜살보다도 빨리 지하 수맥을 타고 이곳까지 이동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에게 의식이 있었다면 소용돌이에 빨려들지 않으려 저항하였을 것이 분명하였다. 그랬다면 아마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너무도 엄청난 흡입력을 견딜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렇다면 쓸데없이 기력을 탕진한 자가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의식을 잃어 순리대로 순응하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긴 대체 어디지?" 남궁호는 주변을 둘러보며 어리둥절해하였다. 다행히 철기보 지하 뇌옥에 머물며 익혔던 안공 덕분에 사방을 볼 수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사방을 손으로 더듬으며 살펴야 할 정도로 어두웠던 것이다. 마치 해변처럼 끊임없이 철썩이는 곳에서 벗어난 그는 천천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 수억 년 동안 인적이 없었는지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였다. 모래밭을 벗어난 그는 천천히 발을 옮겨 더욱 어두컴컴한 곳으로 접어들었다. 이곳 말고는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천연적으로 생성된 동혈이었다. 높이가 일장 정도 되는 이 동굴은 폭이 약 삼 장 정도 되는 제법 넓은 굴이었다. 동혈을 따라 반시진 정도 전진하자 한 줄기 빛이 어디선가 흘러드는지 제법 밝아졌다. 한시바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남궁호는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빛의 근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서 이채가 빛났다. 모든 곳이 울퉁불퉁한 자연 그대로인 반면, 한 곳만은 마치 인공이 가미된 듯 매끈해 보이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궁호는 황급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만일 그것이 인공이 가미된 것이 틀림없다면 이곳을 벗어날 방도가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었다. 벽면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오래 된 듯한 이끼들의 잔재가 붙어 있었다. 아마도 예전엔 이곳까지 물이 들어왔었는지 그 흔적 또한 남아 있었다. 그는 이곳을 벗어날 뾰족한 수가 없기에 일단 이끼들을 제거해 보기로 하였다. 만일 그것이 인공이 가미된 것이라면 살아날 방도가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꼼짝없이 굶어 죽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였던 것이다. 이끼는 무려 한 자 두께나 되었다. 다행이 고사(枯死)한 지 오래 되어 쉽게 떨어져 나갔다. 거의 한 시진에 걸쳐 이끼를 뜯어내던 남궁호의 눈에서 또다시 이채가 솟았다. 무언가 무척 오래 되기는 하였으나 글귀가 있는 듯하였던 것이다. 서둘러 이끼를 제거하자 그곳에는 누군가가 남긴 것이 분명한 글귀가 있었다. 용비봉무(龍飛鳳舞)한 고대 전서체로 쓰인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인연이 있어 이곳까지 온 후인에게 남긴다. 노부는 서진(西晉) 세조무염제(世祖武炎帝) 때 촉(蜀) 사람 위세기(魏世基)라 한다. 후인이 이곳에 온 것은 노부와 인연이 있어 온 것이 확실하나, 노부는 후인이 진정한 인연자가 아니라면 이곳에 들지 말 것을 권하노라. 만일 무리하여 안으로 든다면 목 숨은 유지할 수 있으나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발길을 돌린다면 살 방도가 있도다. [중략……]> 벽면 가득히 적힌 글귀는 만일 한족(韓族)이라면 안으로 들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발길을 돌릴 것을 권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곳을 벗어나는 방법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가만 있자, 위세기? 위세기? 분명 어디선가 들은 이름인데……. 가만, 서진 세조무염제 때면 적어도 천 년은 족히……. 아앗! 그, 그렇다면…… 설마 천 년 전 천하무적이었던 무적풍 위세기 대협이란 말인가?" 남궁호는 위세기라는 이름이 왠지 눈에 익은 것 같아 기억을 더듬다 화들짝 놀랐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고금제일인 무적풍 위세기가 누구이던가! 중원으로 온 이후 주루나 객잔은 물론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라면 쉽게 들을 수 있던 이름이 아니던가! 남궁호는 주루에서 신세 한탄이나 하는 한량들의 입에서도 들을 수 있는 그 위대한 이름 앞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수없이 도박판을 돌며 엄청난 액수를 놓고 도박을 하는 동안에도 결코 흔들림이 없던 남궁호의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지난 천 년 동안 그 어느 누구도 얻을 수 없었던 그의 유학을 볼 수 있는 천고의 기연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행히 한족(韓族)만이 들 수 있다니, 한 번 들어가 보자!" 남궁호는 서슴없이 석벽에 기록된 대로 한쪽 구석에 잔뜩 녹이 슬어 있는 쇠막대를 밀어넣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만들어진 지 너무 오래 된 기관이고, 동굴 속에 습기가 많아 그런 모양이라 생각한 그는 한참을 기다렸다.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거의 한 시진을 기다렸으나 반응이 없자 그의 안면에 초조한 빛과 더불어 실망의 기색이 흘렀다.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라 생각하고 막 돌아서려는데, 미약하기는 하지만 분명 안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이익― 끼기기기긱― 끄르르르릉―! 연속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점점 커졌고 종래에는 시끄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남궁호는 그 소리가 반가운지 벽면에 귀를 바짝 대고 있었다. "좋아, 이제 열릴 모양이군. 후후……, 내가 천 년 만에 무적풍 위세기 대협의 유전을 볼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인 모양이구나." 잔뜩 녹이 슨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어보니 지금껏 단 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듯 무척이나 느렸고, 마찰음도 대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도 거의 한 시진이 지나고 나서야 이끼가 잔뜩 끼여 있던 석벽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석벽의 안쪽은 정갈하게 만들어진 석실임이 분명해 보였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벽면이 울퉁불퉁하지 않았고, 바닥 역시 매끈하였던 것이다. 천장에는 야명주가 박혀 있어 실내는 전혀 어둡지 않았다. 남궁호가 사방을 둘러보는 동안 그의 등뒤에서는 석벽이 스르르 닫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전혀 소음이 일지 않았기에 그는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쿵! 마지막으로 석벽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아귀가 물리자 그제야 이를 눈치챈 남궁호가 잽싸게 뒤를 돌아보았으나 이미 그의 등 뒤는 차디찬 석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후후……, 한 번 들어오면 영원히 나갈 수 없다고 하였는데, 만일 내가 위 대협과 인연이 없다면 어떻게 하지? 이곳에서 꼼짝없이 굶어 죽어야 한단 말인가?" 남궁호는 적지 않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장방형의 석실은 대략 반원 십 장 정도 되는 거대한 석실이었다. 남궁호가 서 있는 반대쪽에는 모두 다섯 개의 문이 있었고, 그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후후……, 일단 저곳으로 가 보아야겠군." 남궁호는 지체없이 석실을 가로질러 맞은편 문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다섯 개의 문에는 각기 한 글자씩이 용사비등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약방동에 있던 용문이십품이라는 필체와 같은 필체였다. <문(文)> <무(武)> <예(藝)> <약(藥)> <휴(休)> 문 앞의 글자를 확인한 남궁호는 일단 휴라 적혀 있는 석실의 문을 열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너무도 지쳐 일단 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위 대협의 절학을 지친 몸으로 볼 수 없다! 일단 운공조식하여 기력을 회복한 후 맑은 정신으로 접해야 그 분께 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석실 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은 넷이 누워도 충분할 만큼 거대한 석침(石寢)이 있었다. 그 뒤쪽에는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는 시렁이 있었다. 그곳에는 고대 복식의 의복들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너무 오래 되어 만지기만 하여도 가루가 되어 버렸다. 선반의 아래쪽에는 아이들 키만한 단지들이 이십여 개가 놓여 있었다. 가까이 손을 대보니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희귀한 만년한옥으로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안에는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벽곡단( 穀丹)이 가득 들어 있었다. "후후……, 준비성이 철저하신 분이시군." 벽곡단의 양은 열 사람이 적어도 백 년은 먹어도 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만일 인연이 없는 자가 이곳에 든다 하더라도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도록 배려한 것이 틀림없었다. 침상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는 두 개의 자그마한 못이 있었다. 한 사람이 들어가면 알맞을 크기의 못에서는 희뿌연 운무가 조금씩 솟아나고 있었다. 하나는 열천(熱泉)인지 따뜻한 증기가 솟고 있었고, 다른 곳은 한천(寒泉)인지 차가운 증기가 솟고 있었다. 남궁호는 일단 운기조식을 하려 침상에 올랐다가 그것이 보통의 석침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만년온옥(萬年溫玉)으로 만들어져 따뜻한 기운을 뿜고 있었던 것이다.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삼주천을 마친 남궁호는 심신이 개운해짐을 느끼고 눈을 떴다. 아직 오륙 년에 불과한 내공이지만 한 번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조금씩 느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이제 위 대협의 위대한 절학을 견식하러 가 봐야지." 석실을 나선 남궁호는 무(武)라고 쓰여 있는 석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십팔반 병기와 가지각색의 기형 병장기들이 꽂혀 있는 병기대가 보였다. 천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점의 녹도 슬어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모두들 천고의 기병들인 모양이었다. 병기대를 거쳐 안으로 들어서자 거기부터는 서가(書架)였다. 어른 키 정도의 서가는 하나의 길이가 대략 오 장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런 서가가 무려 이십사 개가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빽빽하게 꽂혀 있는 무공기서들은 모두 특수 처리를 하였는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 바퀴 둘러본 남궁호는 서가에 있는 무공기서들이 천 년 전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문파의 무공들임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엔 정파의 무공비급도 있었고, 마도나 사도의 무공기서들도 있었다.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 남궁호는 아까는 보이지 않던 석대(石臺)가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엔 자그마한 석궤가 놓여져 있었다. "이건 뭐지?" 서둘러 석궤를 열자 안에는 양피지가 놓여 있었다. <후인에게 남긴다. 이곳은 노부가 천하를 주유할 당시 모아 두었던 무공기서들을 보관한 무고(武庫)이다. 후인과 노부와의 인연은 후일 시험할 날이 있으리라.> 무적풍 위세기는 누구든 일단 석실 안에 발을 들여놓으면 문무를 익힐 수 있도록 배려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위 대협의 무공은 이곳에는 없다는 이야긴데……." 남궁호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안배를 찾으려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의 시간을 허비하고도 아무런 소득이 없자 남궁호는 서가에 꽂혀 있는 서책 가운데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소림사에서 오래 전에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금강항마선공(金剛降魔禪功)이었다. 아주 오래 전 소림의 신승(神僧) 하나가 음성만으로 만마(萬魔)를 제압하였다는 전설 같은 말이 전해져 오는데, 그때 사용하였던 무공이 바로 금강항마선공이었다. 이것은 운기조식법뿐만 아니라 지닌 바 내공을 바탕으로 만마 만사를 물리치는 효용이 있는 항마무공(降魔武功)이었다. 남궁호는 선 채로 독서삼매경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만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금강항마선공 비급이 덮여졌다. "휴우! 대단한 무공이다! 소림이 무림의 태산북두라 하는 말을 이제야 알겠구나." 남궁호는 금강항마선공이 지닌 바 내공을 최극도로 끌어올려 몸 전체를 공명(共鳴)시키는 방법으로 시전하는 음공(音功)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 불가에서는 아침 예불이나 저녁 예불 때 범패(梵唄)를 하기 마련이다. 이를 하면 잡귀가 물러가고 불타의 가호 아래 놓이게 된다고 믿었다. 금강항마선공은 바로 그것을 실제로 만든 무공이었던 것이다. 그날부터 남궁호는 닥치는 대로 무공기서들을 뽑아 읽고 또 읽었다. 원래부터 서책 일기를 즐겨하는 그였기에 하나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간단히 소제를 하고 벽곡단 한 알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무고에 들러 비급 읽기를 일 년. 드디어 무고의 모든 비급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은 그는 이제 걸어다니는 무공비고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현 무림의 정사마(正邪魔) 각 파가 지니고 있는 무공의 원류를 완전히 그의 두뇌 속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이는 과거 생사신의 곽홍이 남긴 회광상단심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무고를 돌아본 남궁호는 감회 어린 표정을 지은 뒤 이번엔 문고(文庫)로 들었다. 문고를 둘러본 그는 그 중 상당수의 서책들을 이미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었기에 불과 반년 만에 모든 것을 독파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들어간 곳이 예(藝)라 쓰여 있던 석실이었다. 그 안에는 천하각지에서 사용되던 거의 모든 악기들이 있었다. 비파(琵琶), 금(琴), 약( ), 생황(笙簧)은 기본이었다. 현재에는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희귀한 악기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정교하게 제작된 명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석실을 둘러본 남궁호는 악기들 이외에도 금기서화(琴棋書畵)에 정통할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악보가 있었고, 기보가 있었으며, 서체 교본까지 있었다. 또한 기막히게 정교하게 그린 그림들이 족자 안에 있었다. "후후……, 이곳은 심심하지 않겠군." 남궁호는 어차피 이곳을 나가는 방법도 모를 바에는 무공 연마를 하는 한편 익힐 것은 익히고 봐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이곳 석실은 다른 석실과 달리 매우 편안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남궁호는 이 석실에서 일 년 간이나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는 악기들과 씨름을 하여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일 년이 다 되어 갈 무렵, 남궁호는 검을 퉁기며 호탕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강호영웅가(江湖英雄歌)였다. 세상에 태어나 한 자루 검으로 풍운을 일으키는, 나는야 강호영웅! 도산검림이 앞을 막아도 당당한 군림보로 중원을 지키겠네. 양귀비 같은 미인들과 한 잔 술을 마시는데 어느새 귀밑에는 흰머리가 있었네. 에헤야! 한 번 가면 그만인 인생, 영웅처럼 살다 가리. 이 노래는 중원의 어린아이들도 즐겨 부르는 노래였다. 지난 일 년 사이 남궁호는 악기가 필요 없는 경지에 도달하였다.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하여 한 자루 검이나 풀잎만 있어도 흥겨운 가락을 흘려낼 줄 아는 경지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들어간 곳은 약(藥)이라 쓰인 정실이었다. 이곳에서 남궁호는 처음으로 배울 것이 없었다. 과거 생사신의의 유전이 이곳 약실보다 더 뛰어난 의술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익히고 난 이후 남궁호는 할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무료함을 잊으려 예실(藝室)의 악기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하나하나 탄주하여 보았다. 그러던 중 문득 무실(武室)에서 익힌 만파격랑공(萬波激浪功)이 기억에 떠올랐다. 그것은 누가 남긴 무학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검에 음공을 결합시킨 희대의 기공이었다. 내공을 운기하여 이 무공을 시전하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사방 백여 장의 모든 것이 초토화 될 것이라 적혀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오 갑자 이상의 공력이 있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기에 지금껏 단 한번도 시전해 본 적이 없던 것이다. "흐으음, 어디 보자. 지금 내 내공이 대략 십 년은 넘은 것 같은데, 과연 그것으로 효과가 있을까?" 남궁호는 내공을 주입하여 병기대에서 꺼내온 검을 퉁겨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자 약이 오른 그는 다시 혼신의 내공을 끌어올려 퉁겨 보았다. 남궁호는 지금까지 검을 여러 번 퉁겨 보았지만 지금처럼 아무 반응이 없던 적이 없었기에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계속하여 검을 퉁기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곁에 두었던 비파 하나가 박살이 나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어? 이게 왜 이렇게 됐지?" 그는 만파격랑공이 시전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어리둥절한 남궁호가 고개를 들어 보니 바로 앞 탁자에도 많은 금들이 생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던 그는 만파격랑공의 위력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정말 대단한 무공이었구나. 한데, 이를 어쩌지?" 남궁호는 잔뜩 금이 간 석탁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감히 무적풍 위세기가 준비해 둔 석탁을 못쓰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석탁의 윗부분 약 일 촌 가량이 들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괴이하게도 석탁은 전체가 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 속은 시커멓게 보였다. "대체 뭘로 만들었지?" 석탁의 부스러기를 가볍게 손으로 비비자 우수수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이건 돌이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석탁은 그 색이 돌이라 하기엔 너무 희었다. 서둘러 부스러기들을 떨구어 내던 남궁호는 그것이 석회석 가루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석탁은 무엇인가를 속에 넣고 그 위를 석회석 반죽으로 잘 감추어 두었다는 결론이었다. 석회석들을 걷어내자 그 안에는 거무죽죽한 철비(鐵碑) 하나가 있었다. <인연자에게! 후인과 노부에게 인연이 있어 이것을 발견하였으리라. 이제 후인이 진정한 인연자인지를 시험하리라. 철비의 홈에 무적패(無敵佩)를 끼 워라! 만일 무적패가 없다면 후인은 인연자가 아니노라. 무적풍 위세기.> "무적패? 대체 무적패가 뭐야? 내겐 그런 것이 없잖아……." 남궁호는 철비에 새겨져 있는 글귀의 첫 구절을 읽을 때만 하여도 자신이 무적풍의 유학을 얻는 천고의 기연을 만나는 줄 알고 희열에 잠겼다가 이내 침통한 표정과 아울러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철비의 아래에는 이 푼쯤 되는 홈이 파여 있었다. 아마도 거기에 무적패라는 것을 넣으라는 모양이었다. "에이, 좋다 말았네. 무적패라는 것이 있어야 뭘 해 보든지 할 것 아니야? 한데, 대체 그게 뭐지? 그런 게 있다는 소리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남궁호는 무적패라는 것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고금제일인으로 불리는 무적풍 위세기가 남겼을 것이 분명한 무적패라는 것에 대한 말을 왜 듣지 못하였는지 이상하였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지난 천 년 간 그의 유학을 얻으려 혈안이 되어 돌아다녔건만 그 어느 누구도 무적패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무적패라는 말이 금시초문일 수 있겠는가? 비록 남궁호의 일신에 있는 무학이 일천하다 할지라도 그의 모든 처가들은 무림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던가! 그런데도 단 한번도 무적패라는 것에 대하여 들어본 바가 없었기에 그것이 이상하였다. "제기랄! 대체 사람들은 무얼 얻겠다고 돌아다녔다는 거야? 무적패라는 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모양인데……." 남궁호는 지난 천 년 간 무적풍의 유학을 얻겠다면 돌아다녔을 사람들이 한심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무적패가 없는 것이 확실하니 이만 욕심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에이, 좋다 말았네. 이럴 때 그저 시원하게 수욕이나 하면서 노래나 부르는 게 최고야." 남궁호는 미련 없이 침상이 있는 곳으로 가서 열천과 한천을 오가면 수욕을 즐겼다. 그는 일부러 기분 전환을 하려 강호영웅가를 흥얼거리기까지 하였다. 지난 세월 동안 남궁호는 거의 매일 이곳 열천과 한천을 오가면 수욕을 한 덕분에 금종조(金鐘 )나 철포삼(鐵布衫)의 경지를 넘어서 치명적인 조문( 門:약점)이 없는 육신갑(肉身甲)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금종조나 철포삼은 피부가 마치 쇠처럼 단단한 외문기공인데 반해서 육신갑은 원래의 피부처럼 부드럽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렇지만 어찌나 탄력이 있는지 화살을 맞아도 박히지 않는다. 수욕을 즐긴 남궁호가 늘어지게 한잠을 자려 침상으로 다가갔을 때 그의 눈에서 이채가 빛났다. "이건……, 혹시 이것이……." 남궁호는 수욕을 하기 위하여 풀어 두었던 옥패를 움켜쥐었다. 그때 그의 뇌리로 지난 세월의 한 부분이 섬전처럼 흐르고 있었다. ― 가가, 이건 본궁의 신물이었어요. 이제 본궁은 없어졌으니 대신 이것으로 가가에 대한 소녀의 정을 표시하고 싶어요. 그의 처인 요지빙녀 금기향이 건네주었던 만년온옥으로 만든 패의 전면에는 승천하는 용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어찌나 정교한지 지금이라도 꿈틀거리며 승천하려는 용의 두 눈에는 반짝이는 보석이 박혀 있었고, 입에 물고 있는 여의주는 찬란한 빛을 발하는 금강석으로 되어 있었다. 배면에는 하늘 천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침상의 만년온옥과 패의 만년온옥이 같은 재질이듯 보였다. 그리고 배면에 새겨져 있는 하늘 천자는 용문이십품의 필체가 아닌가! "그,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무적패?" 남궁호는 자신이 아직 벌거벗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황급히 철비로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철비의 홈은 들고 있는 패와 거의 그 두께가 일치하는 듯 보였다. "아아, 북해빙궁을 찾은 잔결오마가 빙궁주에게 무적풍의 유학을 내놓으라 한 말이 헛말은 아니었구나. 한데, 그들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지? 무적패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을 터인데……."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잔결오마가 어떻게 북해빙궁에 무적풍과 관련이 있는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는 영원한 비밀이 되고 말았다. 남궁호는 패의 전면과 배면을 잘 살펴본 후 신중히 철비의 홈에 그것을 끼워 넣었다. 패의 양면에 튀어나온 용과 글씨가 있듯 홈에도 굴곡이 있었던 것이다. 딸깍! 무적패가 완전히 홈 안에 들어가자 작은 소리와 함께 철비가 밑으로 꺼져 버렸다. 철비가 사라진 공간에는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기에 남궁호는 서슴지 않고 밑으로 내려섰다. 대략 백여 개의 계단을 내려선 남궁호는 널찍한 지하 광장을 만날 수 있었다.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백발백염(白髮白髥)을 한 선풍도골의 한 노인이 좌대에 앉아 있었다. 남궁호는 즉시 그가 좌화한 무적풍 위세기임을 알아차리고 지체없이 삼고구배(三顧九拜)를 하였다. 삼고구배란 세 번 고개를 숙이고 아홉 번 대례를 올리는 최고의 예절이었다. "무림말학 남궁호가 감히 무적풍 노선배의 영면을 방해한 죄를 부디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남궁호는 최대의 예절과 말로써 죄를 빈 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의 귀로 나지막하면서도 힘이 담겨 있는 창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인연이 있는 후인을 만나 참으로 기쁘도다. 노부의 예감이 맞는다면 아마도 천 년쯤의 시간이 흘렀으리라. 노부는 무적풍이라 불리던 촉 사람 위세기 니라……. [중략……]> 남궁호는 정신을 집중하여 위세기의 말을 들었다. 이것은 고도의 내공을 지녔던 자가 자신의 말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시전해 둔 절정음공이었기에 매우 또렷이 들렸다. 무적풍 위세기가 남긴 말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천년 전, 천하를 혈겁에서 구한 그는 무림의 경원을 받으며 쓸쓸한 노후를 보내던 중 천 년 후에 천하가 멸망하고 영원히 암흑 천지에 잠길지도 모른다는 천기를 읽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 혈겁으로부터 천하를 구할 대영웅의 탄생 또한 볼 수 있었다. 그는 지체없이 이곳으로 와서 대영웅을 위한 안배를 하고 기다렸다는 것이다. 천하를 겁난으로부터 구할 대영웅은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한족(漢族)이 아니라 해동(海東)에서만 사는 한족(韓族)이라는 것까지 알았다. 그렇기에 남궁호가 처음 보았던 석벽에 한족이 아니면 돌아가라 하였던 것이다. 이곳에 모든 안배를 마친 그는 북해빙궁을 찾아 당시 빙궁주에게 무적패를 건네며 천 년이 지나면 그것을 강호로 내보내라 하였다. 북해빙궁에서는 이 약속을 지켜 오직 궁주만이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대대로 전해 오고 있었다. 아마도 잔결오마가 몇 년만 늦게 북해빙궁을 찾았다면 빙궁주는 순순히 그것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그곳을 찾았기에 그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놀랍게도 무적풍 위세기는 광명천계(光明天界)라는 곳에서 혈겁을 종식시키라고 파견된 사람이었다. 광명천계는 바로 아득한 옛날 하늘을 다스리던 환인천황(桓因天皇)이 아들 가운데 하나로 하여금 동쪽 땅에 살고 있는 착한 백성들에게 지도자가 없자 이를 다스리라 내려보낸 환웅(桓雄)이 만든 문파였다. 환웅은 태백산(太白山:현재의 묘향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신시(神市)를 만든 한족의 시조였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한족들은 해동 땅 가운데 가장 신령스런 강화도 마니산에 삼성단(三聖壇)을 쌓고 매년 그곳에서 제례를 올린다 하였다. 무적풍은 사람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지난 수천 년 간 광명천계와 귀암요맥이라는 곳이 보이지 않는 암투를 전개하였다는 것도 이야기하였다. 아수라와 제석천의 혈전 또한 광명천계와 귀암요맥의 대결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남궁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단순히 전설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 시대에 귀암요맥이 출현할 것이며, 남궁호가 그것을 막아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어깨가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귀암요맥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광명천계에 대대로 내려오는 천황검(天皇劍)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한족(韓族)만이 지닐 수 있는 검이라 하였다. 만일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그것을 만진다면 그 즉시 한 줌 재로 변하고 만다는 영험을 지니고 있다 하였다. 천황검만이 광명천계의 무학을 시전할 수 있는 신령스런 검이라 하였다. 그것은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며 만일 주인이 될 자격이 없는 자가 그것을 취하려 한다면 허공에서 스르르 사라지고 말 것이라 하였다. 현재 천황검은 삼성단(三聖壇) 안에 있다 하였다. 무적풍은 자신이 막아냈던 혈겁은 귀암요맥이 만든 혈겁이 아니기에 자신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으나, 이번 혈겁은 자신의 힘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니 반드시 삼성단으로 가서 천황검을 취하고 아울러 광명천계의 무학을 익혀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였다. 광명천계의 무학은 천황검의 주인이 나타나면 저절로 나타난다 하였다. 광명천계의 무학을 익히려면 먼저 기초가 있어야 한다며 자신이 남긴 무공비급을 반드시 익히라 하였다. 남궁호는 좌화한 무적풍의 앞에 놓인 석궤에서 한 권의 두툼한 무경을 찾을 수 있었다. <해동무경(海東武經)> 비급의 표지에는 용사비등한 필체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날부터 남궁호는 침식을 잃고 무학 수련에 여념이 없었다. 무적풍 위세기가 처음부터 철비를 드러내 이곳에 이르게 하지 않았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인연이 없는 자가 자신의 유학을 익히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고, 둘째는 무학의 바탕이 일천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무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들기 전 이미 상당한 무공 구결을 익히고 있었고, 거기에 무고에서 엄청난 무공을 익혔기에 남궁호는 별 어려움 없이 무학을 익힐 수 있었다. 과연 무적풍의 무학은 그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무학보다도 강했다. 무적검(無敵劍)이라 불리는 한 자루 검으로 펼치는 무학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듯하였기 때문이었다. "허참! 이렇게 강한 무공이 겨우 기초밖에 안 된다니……." 이기어검술까지 망라되어 있는 해동무경을 덮은 남궁호는 혀를 찼다. 대체 광명천계의 무학이 얼마나 지고한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해동무경의 오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단계가 되자 남궁호는 무적풍의 좌화한 시신을 향하여 다시 한번 삼고구배를 하였다. 그런 단계가 되면 그렇게 하라 하였기 때문이었다. "남궁호가 노선배의 염려 덕분에 무사히 무경을 암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궁호가 삼고구배를 마치고 고개를 드는 순간, 무적풍의 시신이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아앗!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러지?" 남궁호는 자신이 실수를 저질러 시신을 건드린 줄 알고 대경실색하였다. 서둘러 어떻게 해 보려 하여도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데, 어쩔 도리가 없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서 있던 그의 눈에 좌대에 남겨진 것이 보였다. 하나의 오색영롱한 빛을 발하는 어린아이 주먹만한 구슬과 하나의 양피지였다. "이게 뭐지?" <후인은 보아라! 이는 노부의 모든 내공이 함축된 내단이니라. 부디 이를 복용하여 귀암요맥을 무찌르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노라.> "아아……!" 남궁호는 눈가가 시큰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코끝이 찡해지며 한 방울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너무도 숭고한 희생정신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선배의 살신성인한 마음이 헛되지 않도록 말학 후배, 최선을 다할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남궁호는 진심으로 우러나 또 한번 삼고구배를 올렸다. 엄청난 기연을 만났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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