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사람 / 최지인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먹고 살 궁리 같은 건 흘려보냈다 어떤 사랑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늦은 밤이고 아픈 등을 주무르면 거기 말고 하며 뒤척이는 늦은 밤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것은 고작 설거지 따위였다 그 사이 곰팡이가 슬었고 주말 동안 개수대에 쌓인 컵과 그릇들을 씻어 정리했다 멀쩡해 보여도 이 집에는 곰팡이가 떠다녔다 넓은 집에 살면 베란다에 화분도 여러 개 놓고 고양이도 강아지도 키우고 싶다고 그러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하고 몇 년은 성실히 일해야 하는데 씀씀이를 줄이고 저축도 해야 하는데 우리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키스를 하다가도 우리는 생각에 빠졌다 그만할까 새벽이면 윗집에서 세탁기 소리가 났다 온종일 일하니까 빨래할 시간도 없었을 거야 출근할 때 양말이 없으면 곤란하잖아 원통이 빠르게 회전하고 물 흐르고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 암벽을 오르던 사람도 중간에 맥이 풀어지면 잠깐 쉬기도 한 대 붙어만 있으면 괜찮아 우리에겐 구멍이 하나쯤 있고 그 구멍 속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다 보면 빛도 가느다란 선처럼 보일 테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이 어두워질 거라고 우리는 가만히 누워 손과 발이 따뜻해지길 기다렸다
-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창비, 2022)
* 최지인 시인 1990년 경기도 광명 출생, 중앙대 연극학과 졸업 2013년 「세계의 문학」 등단 시집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동인 시집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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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 평생직업이라는 개념이 소수에게만 적용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보람과 성취의 시간은 줄이고 우울과 불안의 시간을 늘려놓고 있다. 불투명한 미래는 이미 뻔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현재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가속되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행복했던 시절(그런 시절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로는 복원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비가역성은 이럴 때 적합하다. 또한 불확실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확실한 게 우리의 현실이고 우리는 그런 틀을 받아들여야 하는, 질서로 새겨들어야 하는 불편한 세계를 살고 있다.
위 시에서 시인은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라는 절망적인 진술을 보여준다. ‘의지’가 없는 게 아니라, ‘의지’를 갖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계속 일을 할 수 없고 계속 살아가기 힘들어서 “의지가 없다”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에 더욱 서글프다. 넓은 집에서 베란다에 화분도 놓고 싶고 고양이, 강아지도 키우고 싶지만 돈이 필요하고 씀씀이를 줄여야 하는데 현실은 “곰팡이”가 떠다니는 겉만 말짱한, 결코 바라지 않는 생활을 사는 것은 비참하다. 이런 생활은 비단 “우리”만의 일이 아니다. 빨래할 시간도 없어 밤에 세탁기를 시끄럽더라도 돌려야 하는 윗집도 마찬가지다. 이런 생활은 “키스를 하다가도” “그만할까”라며 멈춰야 하는, 일상과 본능조차 침해받는 지극히 불편한 삶을 초래한다. “그만할까”라는 진술은 이번 삶을 살기를 그만할까라는 말로 들리기도 하는 이유이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의지와 노력만 있으면 확실한 미래를 보장하고,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행복한 시절이 꼭 올 것이라는 약속을 분명하게 지켜주는 사회라면 위 시는 잠깐 동안의 불행과 고통을 토로하는 것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알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불확실성이 이미 이 세계를 잠식해버렸다는 것을.
시는 아무 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 불확실성을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 시인은 “우리에겐 구멍이 하나쯤 있고 그 구멍 속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다 보면 빛도 가느다란 선처럼 보일 테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이 어두워질 거라고” 말한다. 불확실성의 질서 속에 산다는 것은, 그 질서를 따른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도 권장할만한 일이 아니다. 그 비가역적이고 불유쾌한 현실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막막하고 막연하며 막중하다. 포스트 확실성의 시대에선 누구나 그러하다. 우리는 어디까지 감당해야 하고 희망고문을 언제까지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바뀌지 않고 극복되지 않는 불확실성의 질서에 대해 삶의 형식과 인식의 저변을 맞춰나가야 하는 것일까.
필자는 위에 언급한 질문 중 후자의 질문이 적절한 답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삶의 형식과 인식을 불확실한 현실에 맞춰나가야 하는 것도 변화라면 변화이고 극복이라면 극복이다. 우리는 세계를 파헤치고 규정하고 이끌어왔지만 이제 우리를 파헤치고 재규정하고 우리가 따라나서야 하는 시대를 직면하고 있다. 이분법적 세계가 붕괴되었다면, 이분법적 세계가 원래 있었고 지금에서야 그것이 붕괴된 것이 아니라 원래 이분법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불확실성의 질서가 세계의 현상으로 대두되었다면 원래 확실했던 것이 불확실해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불확실한 질서만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거슬러 온 것이었고 순리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 윤의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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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최지인 시인이 건네준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의 초고 뒷면에 직접 추천사를 적어보고 있습니다. 문학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에게 시집의 등을 맡긴 용기에 일단 박수를 보냅니다. 하나 그렇기에 저는 이 시집이 얼마나 위대한 시집인지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문학적으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부분은 전략 실패.
다만 제가 적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미완성 시, 미완성 노래 들을 서로에게 미친 듯이 보냈던 그 어느 날들의 새벽녘, ‘그리운 금강산’ 한편에 앉아 시가 이렇고 음악이 이렇고 세상이 이렇고를 떠들던 무수한 밤들, 우리 각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허황된 마음을 떠나보낸 다음에야 알게 되어서 다행이야 하면서 주고받았던 대화 같은 것들뿐입니다.
최지인 시인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으나 꿈을 꾸고, 일이라는 굴레를 회의하면서도 일을 하고, “이것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동시대 문학」) 싶지만 사랑을 하고, “슬픈 마음이 안 슬픈 마음이 될 때까지”(「1995년 여름」) 슬퍼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시집에 그것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삶을 작품에 담아낸다는 건 사실 굉장한 일입니다. 보통의 작품은 가까운 사람들이 보기엔 꽤나 많은 삶의 덧셈이나 뺄셈으로 이루어지기 쉬운 법이니까요.
그동안 수도 없이 쓰이고 버려진 시들 가운데에서 끝끝내 완성된 이번 시집에 경의를 표합니다. 끝끝내 살아낸 최지인 시인의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는 평소 서로의 모든 말에, 모든 삶의 방향성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저는 그의 이번 시집이 ‘마스터피스’라는 사실에는 동의합니다. 찬성합니다. 재청합니다. 이의 있으십니까? 이의는 기각!
최지인 시인의 시가 이 책을 펼쳐든 여러분의 마음과 상황과 고민들에 알맞게 가닿기를.
이상, 태어나 시집이라곤 열권도 채 안 읽어본 이의 추천사였습니다.
- 이승윤 (음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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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부부일까? 아니면 결혼을 준비하는 오랜 연인의 동거장면일까 매일매일 진이 빠져라 일을 하는데, 돈이 모이진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암벽을 오르는 기분이다 우리는 넓은 집에 화분도 두고 개도 고양이도 기르고 아이도 키우고 단란하게 살고 싶은데 역시 돈이 문제다 그럴때면 아무리 회사생활이 힘들고 어려워도, 그래서 엉엉 우는 너에게 빈말로도 그만두라고 못하겠다 어짜피 산다는 건 그런거니까 일하고 일하고 일하는 거니까 그래도 돈이 모이진 않지만 그래서 못견디게 힘든 날에 서로 기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지 앞으로 내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있을까 서로 등을 다독이며 나아가보자 해도 그건 결국 '일단 걸어보자'에 그치고 나는 애도 낳고 개도 기르고 넓은 집에 살고 싶은데 하고 덧붙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도 너도 그게 어렵다는 계산은 다 되니까 구태여 우리 사이에 놓을 문장은 아니니까
그래도 일하고 일하고 일하는 와중에도 우리는 사랑을 한다. 일하고 일하고 일만하는 그 말도 안되는 여정을 그래도 묵묵히 갈 수 있는 건 아마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 그래도 역시 세상이 너무 무거워서 우리의 사랑은 조금씩 변해가는데 늦은 밤, 피로에 지쳐 몸을 씻고 누워 서로를 주무르는 중년 부부의 사랑과 닮아간다 먹고살 궁리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사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열정적인 키스와 밤들은 이제 아주 멀어졌고 키스를 하다가도 너가 꿈꾸던 넓은 방과 그 방을 채우는 화분과 어쩌면 함께 할 수도 있었을 개와 고양이가 지나가고 우리 그만할까? 내일도 일이 많으니까 윗집에선 세탁기 소리가 울린다. 방음도 잘 되지 않는 공간에 늦은 시간 울리는 몰상식한 세탁기소리는 분노보다 먼저 연민을 가져온다. 너도 나처럼 고단한 하루를, 고단한 등반을 하고 있구나
암벽을 오르던 사람도 중간에 맥이 풀어지면 잠깐 쉬기도 한대 붙어만 있으면 괜찮아
다섯번째 연이 참 오래 남는다
우리에겐 구멍이 하나쯤 있고 그 구멍 속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다 보면 빛도 가느다란 선처럼 보일 테고 마침내 아무것도 없이 어두워질 거라고
잠깐 쉬어가도 괜찮아. 붙어만 있자.
잠깐 쉬었다가 우리 손과 발이 따뜻해지면 다시 올라가보자 물론 언제까지고 우리를 기다려 주지는 않지만 내일 아침 출근 시간이 오기 전에 따뜻해져야만 하지만 잠시간 서로 끌어안고 얼른 따뜻해지기를 기도하자 일하고 일하고 일만하는 게 아니라 일하고 일하고 사랑도 하자
- 이덕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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