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문학사에서 동인(동인지)의 의미는 남다른 데가 있다. 우리 문학사를 동인지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는 조연현의 경우를 상기해보라. 1920·30년대의 창조·백조·장미촌·영대·폐허·시인부락·구인회 등의 이름을 내건 동인 집단의 궤적은 그 자체가 곧 문학사의 한 장으로 기록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선 문인의 수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다는 데에 있다. 기껏해야 수 십명 정도가 고작인 문인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동인을 결성했던 것이다.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치고 동인을 형성해 활동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인 중심의 문학사가 가능했던 또 다른 이유는 각각의 동인 집단들이 그 나름의 문학적인 이념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는 점이다. 1920년대 이후 쏟아져 들어온 외국의 문예사조가 문인 각자의 취향 및 상황에 적절하게 수용되어 문학적인 색깔을 갖게 했다고 할 수 있다. 동인의 결속력 내지 구속력이 강제적이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문학적인 이념의 동질성으로 인해 이 시대의 동인들은 공고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학적인 이념의 동질성은 동인 형성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문학적인 이념의 동질성 없이 형성된 동인이란 기껏해야 문학을 통한 문인 사이의 친교적인 의미밖에는 없는 것이다. 문학사에서 동인이란 단순한 친교를 넘어 문학적인 이념을 구현하는 집단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상식이지만 그러한 상식 없이 동인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최근 우리 문단 특히 시단의 경우에도 동인의 결성이 눈에 띄게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 많은 동인 중에서 비교적 최근 우리 시단의 전면으로 부상한 동인 집단으로는 빈터·시천·시산맥 등을 들 수 있다. 빈터는 인터넷 문학 동인회이다. 2000년 1월 창립모임을 갖고 홈페이지를 개설하면서 결성된 이후 그해 6월 동인지 『빈터』를, 2002년 12월에는 엔솔로지 『보임』을 출간했다. 인터넷 문학 동인회답게 국내와 국외의 회원을 포함해 무려 86명의 동인이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동인의 동질성은 인터넷을 이용한다는 것밖에는 없어 보인다. 문학적인 이념의 동질성이 허약하기 때문에 이 동인의 정체성 또한 견고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인터넷 문학 동인회라고 하지만 오프라인 상의 문학을 단순히 온라인 상에 옮겨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시천은 70년대 생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동인이다. 세대적인 동질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 이 동인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대론적인 의미를 제거하고 나면 이 동인이 지향하는 문학적인 이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제 막 시단에 등단했거나 등단 지망생들이 모여 결성된 동인이기 때문에 문학적인 이념의 동질성 문제는 좀더 지켜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시산맥은 1994년에 첫 출발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시산맥이 동인에 걸맞는 모습을 갖춘 것은 〈시산맥〉이라는 동인 이름과 시산맥 홈페이지(www.poemmts.com)의 발족이 있은 2000년 11월이라고 할 수 있다. 2003년 3월 현재 동인은 모두 16명(권영준·김왕노·문정영·박남희·배홍배·서안나·신수현·위승희·유춘희·윤성택·이기와·이덕규·이은유·김양정 등 14명의 시인과 강경희·노철 등 2명의 평론가)이다. 동인의 규모로 보면 크지도 또 작지도 않다. 14명의 시인과 2명의 평론가, 8명의 남성과 6명의 여성, 5명의 50년대 생과 10명의 60년대 생 그리고 1명의 70년대 생 외관상으로는 다른 동인들과 비교해서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떤 문학적 이념의 동질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이 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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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맥 동인의 구성 목적과 문학적인 이념이 드러나 있는 곳은 시산맥 홈페이지이다. 여기에서 이들은 세상에 대해 자신들의 문학적인 이념을 표나게 드러내 놓고 있지는 않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소박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나름의 발언을 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고 있는 동인 구성의 목적과 문학적인 이념은 다음과 같다.
1) 시산맥(詩山脈)이라는 동인 이름은 인사동의 소줏집에서 거나하게 마시고 문학열정에 치받혀 건성으로 문학을 논할 게 아니라 뭔가 뜻있는 구성체가 되어보자는 의지에서 머리를 맞대고 짜낸 이름이다.(… 중략 …)
산맥처럼 거대한 정신의 줄기로 맥을 이어나가는 시(詩), 작은 생명과 사소한 것들의 숨소리까지 젖줄을 이어, 하나 하나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시의 산맥. 우리는 그 잠재적 힘의 능력을 믿고 있는 것이다. (시산맥 홈페이지 「동인출범」중에서)
2) 시산맥 동인은 새천년 한국시문학의 새로운 마당을 연다는 자긍심과 포부로 앞으로 지난날의 과학기술문명에서 비롯된 '환경오염', '삶의 황폐화'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에 따라 자연성을 거스리지 않는 젊은 언어, 젊은 이미지, 젊은 감각으로 고루한 문학관의 답습에서 벗어나 이상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언어와 의식의 확장을 모색하고자 한다.(시산맥 홈페이지 「동인 모임의 목적과 방향」중에서)
1)이 다소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동인의 의지의 표명이라면 2)는 그것의 좀더 구체적인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시에 대한 신뢰와 열정을 토대로 과학기술문명에서 비롯된 환경오염과 삶의 황폐화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동인 구성의 목적과 문학적 이념인 것이다. 시에 대한 신뢰와 열정이란 일반적으로 모든 동인들이 표명하는 의례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과학기술문명으로 비롯된 환경오염과 삶의 황폐화를 극복한다〉는 발언과 〈그에 따라 자연성을 거스리지 않는 젊은 언어, 젊은 이미지, 젊은 감각으로 고루한 문학관의 답습에서 벗어나 이상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언어와 의식의 확장을 모색하고자 한다〉는 발언은 주목해 볼만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발언 역시 막연한 감이 없지 않다. 문명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야 근대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시적인 테마 아닌가. 그러나 이들이 여기에 민감한 자의식을 드러내는 것은 이 주제들이 그만큼 〈지금〉, 〈여기〉에서 이들에게 절실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이러한 문학적인 이념을 얼마나 시적인 실천을 통해 구현하고 있는가. 그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시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텍스트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최근에 발간된 『천마가 날아간 하늘』(시작, 2002, 이하 『천마』로 표기)은 좋은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천마』는 시산맥 동인의 이름으로 출간된 첫시집이다. 김양정 동인을 제외한 동인들의 시 65편(각 다섯 편)과 노철·강경희 동인의 평론 2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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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의 시는 훼손된 가치에 대한 복원을 꿈꾸고 있다. 이러한 훼손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것에 대한 분명한 성찰의 의지는 희미하지만, 이들이 밝힌대로 그것이 과학기술문명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시적 자아의 내면 자체가 훼손되어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시적 자아의 광폭한 혹은 흉폭한 세계에 대한 민감한 자의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편이 「실어증」(김왕노)이다. 시인은 자신의 말이 부조리한 세계에 대해 어떤 발언도 할 수 없다고 자조한다. 시인은 자신의 이런 처지를 〈차가 질주해 오는데도 길 가운데로 굴러간 공을 막무/가내로 줏으러 가는/아이를 불러세울 수 없다〉 혹은 〈잃어버린 양을 찾을 어떤 말도 내 안에는 없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조리한 세계에 대해 어떤 발언도 할 수 없다는 시인의 태도는 성찰과 반성의 문맥에서 비롯된 일종의 자의식적인 산물로 볼 수 있다. 부조리한 세계에서 말을 상실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시인은 그 세계에 편입되지 않은 채 그것을 냉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실어증〉의 형태로 드러난 시인의 자의식은 〈비만한 정신〉으로 변주된다. 비만한 정신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시인은 천마처럼 하늘을 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날아간 하늘을 찾아가고, 눈 시리도록 그것을 관측하는 일 뿐이다. 비만한 정신의 소유자인 시인과 새털구름처럼 가벼운 천마 사이의 대비는 시인이 지향하는 시적 비젼의 강렬함을 더욱 강화시켜준다. 비만의 정신 속에 투영된 시인의 자의식은 시 속에서 도시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천마가 날아간 하늘을 찾아가면서 〈도시를 몰아서 가고 싶〉어한다. 시인이 그리고 있는 도시는 〈무료하〉고, 〈어둠이 사납게 몰려다니〉며, 〈우울증이 번지는〉 그런 세계이다. 이런 도시 속에 존재를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시인은 늘 천마가 날아간 하늘을 그리워하고 또 찾아나서는 것이다.
시인으로 하여금 이탈하고 싶어하게 만드는 그 도시란 대체 어떤 세계인가. 그의 시에서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실어증〉, 〈비만한 정신〉, 〈어두운 기억〉 등 다소 관념적인 개념을 통해 환기될 뿐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무래도 박남희의 시편에서 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 시대의 삶, 좀더 정확히 말하면 〈속도〉(「폐차장 근처」)와 〈시뮬라크르〉(「시뮬라크르 서울」)로 표상되는 문명화된 세계(도시)의 삶이다. 속도가 노동생산성과 연결되어 거대한 자본주의의 문명을 낳고, 시뮬라크르가 실재하는 형상을 대체하여 끊임없이 부유하는 이미지만을 확대·재생산하는 문명화된 세계의 삶은 시인에게서 자유와 총체적인 감각을 빼앗아가 버렸다. 속도가 사라진 〈폐차장〉에서 시인이 자유를 체험하고, 서울이라는 21세기 문명화된 텍스트를 하나의 〈거울〉로 환치하고 여기에서 〈그림자를 잃어버린 햇빛〉과 〈시들지 않는 꽃〉(시뮬라크르)을 체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러한 세계에서의 시인의 운명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명화된 세계의 삶은 시인에게 황폐함 그 자체로 인식된다. 시인이 창 밖의 나무들을 통해 〈우물〉을 발견하는 것과 자신도 〈한 채의 우물일 수 있다〉(「나무의 우물」)고 상상하는 대목은 황폐함에 대한 시인의 미적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가 표상하는 이러한 세계의 황폐함 혹은 불모성은 시산맥 여성 동인들의 시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한 특장이다. 여성 자신이 불모성의 이미지로 드러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상처〉로 표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에게 불모성이란 곧 죽음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상처를 노래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다. 서안나의 경우는 〈펀치볼〉, 〈스타킹〉, 〈건빵 봉지〉 같은 사물에 자신의 상처를 투사한다. 그녀는 이 사물들의 속성과 자신의 상처를 아주 섬세하게 연결시킨다. 가령 〈스타킹을 신을 때면//잘 풀리지 않는 세상일처럼 조잡하게 말려 있는 두 가/닥의 길. 풀기 없이 뭉쳐져 있는 길들. 그 길속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면 망사그물처럼 단단하게 조여오는 아픈 기억들〉(「스타킹 속의 세상」) 같은 표현은 섬세함이 없으면 얻기 힘은 시행이다. 섬세하기 때문에 그녀가 드러내는 상처는 일정한 미적 효과를 획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기와가 상처를 드러내는 방식은 자기 모멸과 냉소를 통한 자기애의 회복이다. 「영자야 2·5·6」 군산 윤락가 화재사건을 소재로 하면서 영자라는 창녀의 불행에 대해 거침없는 언설을 쏟아낸다. 그러나 그녀의 영자에 대한 언설은 기실 자신에게 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시인과 영자 사이의 전이로 인해 그녀의 시는 상처받은 영혼들 간의 공고한 연대감을 환기한다. 그녀의 시가 세계에 대한 진정성의 결핍이라는 불안의 요소를 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난 세간에 뜬다
너의 치욕의 살을 발라
너의 탈진한 등을 쳐서
생의 음란한 내막을 갈기갈기 요절내고서야
구천에서 빌어먹을 종문서를 얻는다
너의 오랜 설움을 헐값에 팔아
간신히 오늘 하루 내 설움을 모면한다
동정심을 구할 수만 있다면
모든 날조된 저속한 채널 앞에서
몇 번이고 너를 모른다고 부인 할 것이다
억울해 하지 마라, 끝끝내
우리는 서로의 꼬락서니를 능멸해야 산다
- 「영자야 5 - TV 방송타는 날」부분 인용
〈미친년〉(「영자야 2- 군산 윤락가 화재 사건」)이라고 영자에 대해 독설을 퍼붓던 시인의 본심이 기실은 그녀에 대한 애정(사실은 시인 자신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다. 시인과 영자가 공고한 연대를 유지한 채 세계(부조리한 세상)와 맞서고 있는 모습은 상처에 대한 자폐적인 인식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수현의 경우 상처는 자신의 방을 누군가 들여다본다는 인식을 통해 드러난다. 〈누군가(타자)에 의해 보여진다〉(「방을 들키다」)는 것은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에 균열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나의 모든 것들이 노출되면 그만큼 나의 존재성은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춘희의 상처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녀는 「도둑에서」 〈내 안의 전부를 그는/만지작거렸다. 보이지 않는 것/숨겨놓은 것들을 들쑤셨다. 취약 부분을/뒤적였고 뒤적이는 곳마나 나는/취약했다. (……) 고통은 깊고 시간은 잠깐이었다. 상처난/바람 하나 열린 문 찌걱찌걱 흔들어주었다〉라고 그 상처를 노래하고 있다. 도둑이 그녀에게서 훔쳐간 것은 무엇일까. 바로 〈젊음〉, 다시 말하면 〈시간〉이다. 이보다 더 가혹한 것이 어디 있을까. 시간을 강탈당한 시인의 아픔이 문의 찌걱찌걱하는 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환기되고 있지 않은가. 유춘희의 상처가 청각을 통해 환기된다면 위승희의 그것은 후각과 촉각을 통해 생생하게 환기된다. 〈청어·프라이팬·식용유·소금〉등의 질료를 통해 형상화되는 그녀의 상처는 상당히 신선함 감각을 획득하고 있다. 이 질료들의 작용을 통해 얻어진 결과는 〈숯덩이로 타버린 나〉(「생각을 굽는다-痛點12」)이다. 이것은 나무가 타서 숯덩이가 되는 것과는 층위가 다른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은주의 「내 사랑 변기」는 처절한 실존의 노래이다. 자신의 몸을 〈변기〉로 치환하고 있는 그녀의 상상력은 불온하지만 아름답다. 변기란 모든 것을 다 마구마구 쏟아보내는 질료이다.(그래서 그녀는 〈나는 똥구멍이 아프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 〈변기에 자신이 깔려 숨막힐 수 있다면 불안에 질식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한 점의 살을 허락하지 않게 나를 말라죽게 하라고 외친다. 그녀의 외침은 자기 학대 내지 자기 상실의 의미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섬뜩하다.
여성시인들이 보여주는 상처는 그녀들이 노래하는 세계의 황폐함을 드러내고 있지만 시산맥 동인의 궁극은 여기에 있지 않다. 이것은 이미 예견된 바이다. 이들이 비록 황폐하고 불모의 세계에 놓여 있지만 천마가 날아간 하늘을 끊임없이 찾아나서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모두 천마를 꿈꾸면서 비대한 정신을 덜어내고 다듬어 깃털처럼 가벼운 날개를 갖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하고 있다. 권영준 시인의 다음 시에서 우리는 그것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튀밥처럼 터지며 살점이 되는
생각, 생각, 생각…
놀아워라, 형체도 없는 것이
내 이백여섯 개 튼튼한 뼈를 흔들어 댈 수 있다니
- 「생각에 대하여」부분 인용
비만한 정신을 담금질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뼈가 같이 흔들려야 된다〉는 인식은 이들이 지향하는 시의 세계가 단순한 포오즈를 넘어 어떤 깊이 있는 진정성의 차원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인식의 너름과 깊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덕규의 「칼」, 「毒」, 「自決」, 「숙박계」, 「막차」에서 읽어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가령 〈몇몇 꿈의 조직들이/암세포처럼 칼날에 묻어 나와/현실이 된 얘기를/현실이 다시 꿈이 되는 얘기를 들려주지〉(「칼」)나 〈아직도 잠이 덜 깬/그 가시나무 가시에/맑고 투명한/이슬 한 방울이 매달린 채/바르르 떨고 있었습니다〉(「自決」), 그리고 〈그 슬리는 숫눈 위에 가볍게 목숨을 내려놓듯, 첫 발자/국을 또박또박 찍으며 걸어가본 적이/있으신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기록들을…… 당신은 또박 또박〉(「숙박계」)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상상력은 단순한 손재주 혹은 손끝의 유희에서 얻어질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배홍배·문정영·윤성택이 보여주는 시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머니의 자궁 같은 벌건 조상의 무덤을 보며/불끈 성욕을 느끼고, 자위행위를 한다〉(「가계」)는 배홍배 시인의 발상은 도덕이나 윤리보다 앞선 핏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자연스러움을 자각하지 않고서는 얻기 힘든 시행이다.
또한 문정영이 「下弦」에서
어느 한 生이 무거워지면 다른 한 生이 가벼워지고
어느 한 잎이 시들면 다른 한 잎이 피어나는
그것이 하늘과 지상 사이에 떠 있는 불가피한 몸짓인가
신발은 신었을 때보다
벗어 놓았을 때 더 아름다워야 한다
라고 노래했을 때, 여기에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드러냄과 숨김, 환함과 어두움, 무거움과 가벼움, 탄생과 죽음 사이의 교차와 재교차와 같은 세상의 이치는 우주삼라만상에 대한 심원한 감각이 없고서는 얻을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산동네의 밤〉을 〈불씨〉의 상상력으로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는 윤성택의 「산동네의 밤」은 살가운 감성과 사람의 삶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 없고서는 얻을 수 없는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창밖을 보면 보일러의 연기 따라 별들이/늙은 은행나무 가지 사이마다 내려와/불씨 하나씩 달고 있었다」라는 시행은 천상과 지상, 늙음과 젊음(불씨) 사이의 경계가 해체된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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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한 정신은 비만한 시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 천마가 날아간 하늘을 찾아가고 싶은 시산맥 동인들의 희구는 이번 시집에서 어느 정도 그 진면목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지독한 순수주의의 산물일 수 있다. 타락할대로 타락한 그래서 더 이상 타락할 것이 없는 〈지금〉, 〈여기〉에서 이들의 시에 대한 지독한 열정과 순수는 마치 그 옛날 〈소도〉처럼 보호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순수는 이 타락한 시대의 감각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들의 시가 엄격함과 품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시대와의 소통 속에서 활발한 의미작용을 일으키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시산맥 동인들이 내세운 문학적인 이념 - 지난날의 과학기술문명에서 비롯된 '환경오염', '삶의 황폐화'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에 따라 자연성을 거스리지 않는 젊은 언어, 젊은 이미지, 젊은 감각으로 고루한 문학관의 답습에서 벗어나 이상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언어와 의식의 확장을 모색한다 -이 제대로 구현된다면 이러한 불안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아쉽게도 이들이 내세운 문학적인 이념이 텍스트 속에 온전히 반영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들이 다루고 있는 소재와 주제 의식은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이 구사하는 언어 역시 고루한 문학관의 답습에서 벗어나 젊은 감각을 온전히 획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언어에 대한 젊은 감각, 곧 모던함은 시대와의 긴장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시대적인 감각의 상실은 시를 관습화내지 패턴화의 차원으로 몰아 갈 위험성이 있다.
시대와의 긴장을 획득하지 못하는 동인은 친교적인 모임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첫 동인시집을 낸 시산맥 동인의 갈 길은 비만한 정신에 대한 자의식의 예각화와 함께 우리 시대의 코드를 읽을 수 있는 감각의 확보와 그것의 시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시는 내밀한 고백의 양식이지만 그 고백이 시대와의 정서적인 소통 속에서 성립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만족의 차원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첫동인 시집을 낸 시산맥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다소 불안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가능성은 크다고 할 수 있다. 동인의 문학적 이념과 정체성은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시산맥 동인들은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것은 천마가 날아간 하늘과 산맥(지상) 사이에서 시인의 의식이 추처럼 진동할 때 얻어지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재복
1966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고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6년 『소설과 사상』겨울호에 「동양적 존재의 숲-윤대녕론」으로 등단하였다. 2001년 한양대에서 「이상 소설의 몸과 근대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간 『한국문학평론』 기획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현재 한양대, 성신여대, 추계예대, 서울산업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강의하고 있다. 비평집 『몸』과 편저 『몸속에 별이 뜬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