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 수필문학의 아날로그적 패러다임
한상렬(韓相烈) 문학평론가
1. 지금 우리는 새로운 문명과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이테크
디지털 미디어 시대가 그것이다. 김종회의 말을 빌리면, 현대는 "문자
매체와 활자 문화에서 영상 매체와 전자 문화로의 변화, 아날로그적 서
사 구조에서 하이테크 디지털 미디어에 의한 글쓰기 모델로의 변화를
넘어서, 이윽고 문자와 영상과 소리의 혼합에 의한 통합 매체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다. 이러한 혁명적 변화, 금세기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그에 맞는 발화의 형태와 서사 구조를 촉발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
운 사정이라 할 터이다."라고 하였다. 1) 엄청난 변화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지금 우리는 그런 변화의 현장에 서 있다. 여기서 제일 먼저
떠 올릴 수 있는 것이 정보화 혁명이다.
여기 21세기 정보화 혁명의 주도자는 말할 것도 없이 인터넷일 것이
다. 인터넷은 1969년 미국의 군사전문가들과 컴퓨터 공학자들이 켈리
포니아 주립공과대학에서 군사용으로 개발한 시스템이 발전한 것이라
한다. 이는 컴퓨터가 2차 대전 당시 탄도계산을 위해 만들어져 발전한
과정과 유사하다. 이렇게 인터넷과 컴퓨터의 발전 과정에서 찾을 수 있
는 공통점은 자본의 요구와 기술적 발전이 일치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
에 대하여 곽형모는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2) 첫째로 자본은 빠른
속도를 원했다는 점이다. 즉 생산력 증대에 따라 폭증하는 정보와 고도
의 계산 능력이 요구되었는데, 수(手)작업으로는 이것이 도저히 불가능
했다는 점이며, 둘째로 20세기 과학이 속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
계로까지 진입하게 된 점이었다. 여기에 1999년 봄, 빌·게이츠는 "사람
의 생각 속도를 움직이는 비즈니스"의 세계를 예견함으로써 정보화에
혁명적 불을 지피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인간이 만든 기계가 두뇌 수준
에 육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반도체의 개발 덕분이었다. 처음 개발
된 컴퓨터는 집채만한 크기였다 한다. 이를 오늘날의 컴퓨터로 개발하
게 된 것이 바로 반도체의 힘이었다. 한 마디로 정보 혁명이라 할 것이
다. 이런 변화의 주역은 다름 아닌 디지털이었다. 최초의 컴퓨터는 10
진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부품을 필요로 하였지만, 디지
털이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2. 그렇다면 이런 디지털은 종래의 아날로그와 어떤 차이를 갖는가?
그 첫 번째가 바로 신호처리 방식에서의 차이다. 음성의 송·수신의 경
우 종래의 아날로그 방식은 목소리의 진동에 해당하는 전기 신호로 전
달하지만, 디지털은 송신기로 받은 전기 아날로그 신호들이 교환대의
전기회선 내에서 2진법 숫자들로 바뀌어 부호 형태로 전달된다. 그러므
로 디지털이 0과 1의 조합에 의하여 다양한 신호 전달체계를 갖는데 반
해 아날로그 방식은 자연 그대로의 진동이나 기계적 동력에 상응하는
신호체계를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런 신호 처리 방식의 차이보
다는 인류가 낳은 문명과 세계관에서 이 둘이 지니는 차이점일 것이다.
즉 아날로그 방식에서는 사물이 사진 찍듯이 수용된다. 광선이 사물의
영상을 필름에 그대로 비추는 것과 같은 원리라 하겠다. 그러나 디지털
은 0과 1, 참과 거짓에 대해 명확한 해석을 내린다. 따라서 디지털은 빠
르고 정확하다. 반도체는 이를 전류의 꺼짐과 켜짐의 신호를 이용해 설
계한 것이라 하겠다. 정보화 사회는 이런 디지털의 산물이라 할 수 있
다.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운동을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통일로 보고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활용도 이와 매한가지다. 즉 디지털은 아날로그
가 갖고 있는 연속적인 파형을 잘게 잘라 0과 1로 정리한 후, 사람들에
게 보여주거나 들려줄 때는 다시 아날로그화 한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
는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통일되는 셈이다. 이런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사회 발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인류사회는 발전하
지만 어느 시기에 이르면 비약이나 자기 혁신의 계기를 맞게 된다. 여
기서 계기는 단절이 아니라 계승과 지속적 준비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때문에 "고전물리학은 양자역학에 의해 극복되었지만, 고전물리학이
없었다면 양자역학은 절대 탄생할 수 없었다." 3) 는 것이다.
속도나 정확도, 선명성에서 아날로그는 디지털과는 비교도 되지 아니
한다. 그래서 현대는 아날로그 보다 디지털식의 삶을 요구한다. 우리는
매일같이 불연속적 '단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불연속성이 신
세대에게 있어서는 생활문화 전반에 걸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한다.
상대를 바라보는 자세에서, 어른을 대하는 태도에서, 대화 방식 자체에
서도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보다는 두세
단어로 탁탁 끊기를 좋아한다. 언어의 순수성을 깨뜨리는 토막 난 언어
가 보이는 파형적 언어의 사용이 그것이다. 컴퓨터 통신이나 영상문화,
뮤직비디오 등의 영향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단절'에 있을
것이다. 이는 현대인의 성향이 시시각각 변모하는 문화 속에서 오랜 동
안 반응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디지털 식의 삶은 문화의 세대
간 단절만이 아니라, 수평적 단절까지 우려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모색의 필요를 갖게 한다.
개개의 사물을 살피고 분석하는 능력이 관찰력이라면, 전체를 관찰하
여 그 흐름을 짚어내는 능력은 곧 통찰력일 것이다. 여기서 관찰력을
디지털적이라고 한다면, 통찰력은 아날로그적이라 할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여도 인간의 관찰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
다. 이런 불완전함을 보완해 주는 것이 바로 통찰력일 것이다. 그렇다
면 바로 아날로그는 자기 성찰의 능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무한으로 확장될수록 이런 자기 성찰은 더욱
필요하게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미래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은 수직적
인 조직이 아니라 네트워크라는 데 있다. 여기서 수직적 구조는 곽형모
의 언술과 같이 4) "전투력을 필요로 할 때는 강하지만,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관계를 재구성해야 할 때는 매우 취약하다."는 점에 있다. 그는 구
(舊)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체제가 변화하는 모습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센티브와 경쟁을 예로 제시하고 있다. 즉 협동농장의 옥수수와 개인
의 텃밭에서 자란 옥수수의 크기가 서로 달랐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21세기는 디지털 식의 관찰력과 아날로그식의 통찰력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될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
또 하나 디지털은 정확한 수치를 제공하지만 이는 반드시 연속적 사
고를 필요로 한다. 바로 아날로그적 사고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계획
하고 추진하는 실무자에게는 디지털식 사고가 필수겠지만, 한 집단을
이끌어 가는 리더에게는 아날로그적 사고가 필수적이게 된다. 이 점에
서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한다. 즉 아날로그식의 마음이다.
여기서 '마음'은 '사랑'이고, 사랑은 섬세하기 마련이다. 우리들 삶의 현
장은 기계적일 수만은 없다. 분자의 운동과 달리 '평균 속도'를 고집할
수 없는 게 삶이다. 한 마디로 삶은 희로애락으로 직조된다. 그러므로
이를 어루만지고 일깨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이라 하겠다.
곧 아날로그의 세계다. 의사에게 진단 결과를 수치로 보여 주어 진료를
하게 하는 것은 디지털이겠지만, 의사의 환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아
날로그와 조화를 이루어야 만이 온전한 진료가 될 수 있는 이치와 같
다. 그러므로 아날로그적 태도는 현실과의 부단한 교감을 통해 양자 간
의 괴리를 최소화하게 될 것이다. 곧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
해서는 이런 아날로그의 마음을 갖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3. 많은 사람들이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패러다임은
'세계를 보는 자세'다.
이런 패러다임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962년 토마스 쿤의 <<과
학혁명의 구조>>가 출간된 이후부터였다. 쿤의 이론은 과학철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과학의 역사가 객관적
자연현상에 대한 '의미 없는'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패러다임 혁신의
역사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은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을 지배해온 '모사이론'에 대한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패러다임을 읽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 변화의 법칙과
흐름을 파악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 패러다임은 특정한 인식의 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어서 실생활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사물의 본질과 현상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숨은 그림'을 찾아
야 한다. 숨은 그림 찾기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를 왜곡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옆그림에 둘러싸여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본질과 현상 사이에는 항상 대립과 모순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담겨 있는 숨은 그림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본질은 현상
뒤에 숨겨진 것을 찾아내는 일이다. 보물찾기와는 사뭇 다른 본질 읽기
는 다종다양한 현상 속에서 공통 성질을 보편화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뒤집어 보는' 일이다. 과거 미국 경제의 낙관론은 낮은 인
플레이션→ 낮은 이자율→ 높은 자본 투자→ 생산성 향상, 즉 성장으로
이어지는 순환이었다. 그런 미국의 최근 경제불황은 무엇을 말하는가?
미국 MIT의 폴 크루먼 교수는 이런 미국의 호황 신화를 결코 낙관하지
않았다. 성장 신화가 생산성 향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생산력을
최대한 활용하였기 때문으로 본 것이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 속에서
도 흥청대던 미국의 경제는 이처럼 불안 요소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현상을 '뒤집어 보는' 태도는 현실 파악에 있어 아주 중요한 시
사를 한다고 하겠다.
4. 김영현은 현대인의 삶을 "절망 속에서 꿈꾸기" 5) 로 표현하고 있다.
전통적 가치와 공동체적인 삶이 초토화되어 가는 이 시대에 우리는 지
금 절망하고 있다. 짙은 안개 지대에 서 있는 듯한 절망감. 불안감이 유
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런 시대. 그는 <<겨울 바다>>에서 절망
속에 현실을 이렇게 말하면서 꿈꾼다.
부서져라! 흔들려라! / …… / 흔들리고 나면 땅이 남아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 한숨도 흩어지고 자유도 흩어지고 / 천천히 때로는 급작스럽
게 변화가 오고 / 그렇다. 변화가 오고 / 진저리쳐지는 억압의 사슬도
끊어지리라. / …… / 부서져라! 흔들려라! / 두려워하지 말라.
―김영현의 <겨울바다>에서
이 땅에 독버섯처럼 자라났던 부정부패와 정통성 없는 정권의 특혜
아래 제 배만 불렸던 재벌들의 행패는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한탕주의
와 기회주의를 낳았고, 과도한 소비 풍조와 병적 경쟁 의식, 자기과시
가 만연한 사회를 만들어 왔다. 그런 사회 속에서 삶을 유지하고 있는
작가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제야말로 몽유병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잠꼬대가 아닌 이웃과 형제의 삶에 눈을 돌리는 문학의 본래적
기능으로 돌아와야 한다. 문학이 이렇게 겸손한 자리로 돌아올 때 비로
소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변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
다임에 익숙해지길 요청한다. 사회 전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문학이
라는 창작에 있어서도 이런 변화는 마땅히 모색해야 할 것이다.
수필문학에서는 이런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 한 마디로 디
지털시대는 정보 혁명이다. 그러나 문학은 관찰력보다는 통찰력을 필
요로 한다. 특히 수필문학은 인간과 관련한 인간학이라고 할 때, 아날
로그적인 패러다임이 요구됨은 말할 것도 없다.
註
1) 김종회 평론집, <<문학의 숲과 나무>>, 민음사, 2002. P.144.
2) 곽형모, <<디지털 시대의 세상 읽기>>, 들녘미디어, 1999. P. 292.
3) 위의 책, P. 299.
4) 위의 책, P. 301.
5) <<21세기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9. P.15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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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가 있는 한울문학언론인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우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