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적이나 관념적으로 누군가를 존경하기란 쉽다.
그러나 날마다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존경하는
사람을 갖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내겐 가족 중에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앞에서 마음껏 고통을 표현하다가 같은 고통을 견디는
그를 보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사람인지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나는 예민한 체질이 무슨 벼슬이나 되는 것처럼 가장
먼저 충격받고, 가장 먼저 앓아 눕고, 가장 먼저 망가지는,
문제가 많은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가족들은 무슨 일에든 과민하고,
충격파 또한 큰 나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중 삼중의 고통이 부여된 것이었다.
어느 날, 세상이 끝난 것처럼 낙담하여 방 안에
틀어박혀 허공을 쏘아보고 있는 나에게 앞에서 말한 나의 가족이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다. 나는 누군가와 소통하는 것이 내 고통의
순결함을 잃는 행위라도 되는 양 입을 굳게 다물고 꼼짝 않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밖으로 나갔다가 곧
다시 돌아와 내 옆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조용히
있던 그가 얼음도 얼릴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최소한 너만큼은 힘들어. 다들 제 몫을 견디며 사는 거야.”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나는 자신이 느끼는 고통의 질량으로 다른
사람들도 힘들다는 사실을 한 번도 고려해서 행동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때부터 인내하는 공동체의 질서를 가장 먼저 깨뜨리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나는 과거의 내가 얼마나
허약한 사람인지 알게 되었고, 가족들이 왜 내게 그토록
너그러웠는지도 알았다.
지금 우리 골목에서는 한 가족이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도 역시 그가 먼저 괴성을 지르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옛날 나의 가족 중 하나가 얼음처럼 차갑게 아둔한 나를
깨워 줬던 것처럼 싸움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며 되뇌어 본다.
‘다들 제 몫을 견디며 사는 거야.’
조은 _곤궁한 삶이 거느리는 아스라한 풍경들을 투명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으로 헤아리는 시인입니다. 시집 사랑의 위력으로
무덤을 맴도는 이유 따뜻한 흙을, 장편 동화 햇볕 따뜻한 집과
산문집 벼랑에 살다 를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