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무색황 天武色皇 3 - 『무무색황(無武色皇)』 속편 - 차 례 - 위기에 빠진 호천성 일야삼녀(一夜三女) 뼈와 살이 타는 밤 또 다른 혈겁 혈전(血戰) 해후(邂逅) 악전고투(惡戰苦鬪) 무공초현(武功初現) 혈겁이 끝난 뒤 ▶ 위기에 빠진 호천성 "헉헉! 조금만 더 참자, 참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쉴 수 있을 거야. 헉헉헉!" "헥헥! 안 돼요! 이제 더 이상은 못 가겠어요. 너무 힘들고 너무 목말라!" "헉헉! 미매, 조금만 참아! 저기 보이는 숲으로 가면 은신할 곳이 분명 있을 거야!" 대흥안령산맥 깊숙한 오지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세 인영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지난 자리에는 점점이 붉은 선혈이 떨어져 있었고, 깊숙한 발자국이 남고 있었으나 너무도 지쳐 완전히 탈진하다시피 한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듯하였다. 세 인영 모두 긴 흑발을 지닌 것으로 보아 여인의 몸이 분명하였다. 그녀들은 각기 봉두난발이 되어 있었고, 걸치고 있는 의복은 수없이 베어져 나풀거리고 있었다. 예리한 병장기에 베인 듯한 의복 사이로 붉은 선혈이 간간이 내비치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와 지독한 혈전을 벌인 끝에 이곳으로 오는 모양이었다. "헉헉헉! 하매, 대체 태극은하궁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벌써 사흘이나 헤매고 다녔는데……." "헥헥! 태극은하궁이고 뭐고 간에 시원한 물이나 마셨으면 원이 없겠어." "조금만 더 가면 분명 있을 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 여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힘겹게 발을 옮기고 있었다. 사실 그들은 이렇게 산을 오르내릴 정도로 힘이 남아 있지 않는 상태였다. 일천에 달하는 괴한들과 혈전을 벌여 그들 가운데 오십여 명을 죽이고 간신히 몸을 뺐기에 전신의 모든 진기가 고갈되어 있는 상태였고, 적지 않은 부상도 입은 상태였다. 원래 다섯이었던 일행 가운데 둘은 이들 셋이 몸을 뺄 수 있도록 스스로 목숨을 던져 괴한들을 막았기에 이미 이승을 떠난 지 오래였다. 만일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살신성인의 정신 덕에 치욕스럽게도 간신히 도주할 수 있었으나 쫓기는 것은 여전하였다. 이들은 바로 황산을 떠나 태극은하궁과 합류하려 길을 떠났던 호천대의 수뇌부였다. 세상을 완전히 장악한 일월교의 이목을 피해 밤이면 산등성이를 타고 이동하고 낮이면 쉬던 이들은 재수 없게도 대흥안령산맥 초입에서 그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일월교에서는 이제 무림에 남은 세력 중 총단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옥성궁을 빼고 유일한 세력인 태극은하궁을 치기 위하여 거의 십만에 달하는 엄청난 인원을 풀어 산맥 전체를 샅샅이 뒤지던 중이었다. 그들이 호천대원들을 보고 정찰 나온 태극은하궁도들인 줄 알고 다짜고짜 공격을 감행하자, 이들은 지니고 있는 모든 무공을 총동원하여 그들과 대적하였다. 일 대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으나 일인당 이백여 명씩 벌떼처럼 달려드는 일월교도들을 당해내기란 중과부적이었다. 수가 적을 때에는 지형을 이용한다거나 기타 다른 방법으로 대적하여야 하나, 안타깝게도 이들과 조우한 곳은 사방이 훤히 보이는 초지(草地)였다. 덕분에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정현대사와 규화진인이 정파무림에서는 사용이 금지된 폭신혈공(爆身血功)을 사용하여 그들의 발을 묶은 덕에 지금껏 살아 있었던 것이다. 폭신혈공은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하여 호천대원 전체가 익힌 무공이었다. 간신히 생로를 열고 도망친 이들의 뒤로 일천에 가까운 일월교도들이 추적하는 중이었기에 잠시도 쉬지 못하고 내리 사흘간이나 산 속을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그 동안은 사방 천지가 몽땅 초지였으나 대략 일 리 정도 앞에 지금까지는 볼 수 없던 울창한 삼림이 우거져 있었기에 그곳으로 들어가 일단 휴식을 취하려는 것이다. "헉헉! 이제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쉴 수 있으니, 그때까지만 참아!" 호천성녀 진추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따르는 요금추상 초군엽과 흑요무후 석규미를 독려하였다. 그녀들의 몸에는 장력에 당하였는지 시커먼 장인이 여러 개씩 있었다. 일월교도들이 사용하는 무공은 지금까지 강호에 나타난 적이 없는 괴이한 장법이었다. 흡음독마장(吸陰毒魔掌)과 흡양독마장(吸陽毒魔掌)이라는 괴이한 마공은 상대의 정기를 빨아들여 자신의 내공을 높임과 동시에 상대를 중독시키는 무공이었다. 일단 이 장력에 당하게 되면 여인들은 순음지기가 계속하여 줄어들게 되고 남자들은 순양진기가 점점 줄어들게 되어 종래에는 목내이(木乃伊)처럼 삐쩍 말라죽게 되는 악랄한 마공이었다. 또한 이 장력에 격중당하면 모든 경락과 대소 혈맥이 수축하게 하는 독에 중독되기에 운기를 할 수 없게 된다. 반면에 이를 시전한 자는 적지만 상대의 공력을 흡수하기에 점점 더 강해지는 마공이었다. 그래서 세 여인들이 내공을 전혀 쓰지 못하고 근력만으로 도주하여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아직까지 별다른 느낌이 없었던 이유는, 강한 내공의 소유자였기에 독의 반응이 늦어서였다. "크크크, 계집들! 뛰어봤자 벼룩이다." 일단의 인영들이 초지에 줄이어 나 있는 발자국을 보고 흉소를 터뜨렸다. 이들은 바로 일월교도들이었다. 이들을 이끄는 자는 과거 낙양전 전주였던 독안서뇌였다. 그는 전주직을 내놓고 일월태상각으로 호출당하여 간 뒤 새로운 마공을 습득한 후 현재 이끌고 있는 흑룡대(黑龍隊)의 대주가 되었다. 현재 일월교에는 이러한 대가 무려 오천여 개나 있다. 그렇기에 무림의 기인이사들조차 맥없이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크크! 대주, 계집들이 제법 반반한 것 같았소." "클클……, 그래서?" "흐흐……, 설마 그냥 죽이려는 것은 아니겠죠?" 독안서뇌의 바로 뒤를 따르던 수염이 시커멓고 빳빳하게 나 있는 자가 흉소를 지었다. 그는 흑룡대의 부대주를 맡고 있는 낙양일부(洛陽一斧) 장추린(張樞 )이었다. 그는 독안서뇌보다 먼저 낙양전 전주였으나 일월태상각에서 실시된 비무에 패해 부대주로 전락한 것이다. "크크크, 걱정 마라. 한 계집은 네게 주겠다." "흐흐흐, 고맙소." 독안서뇌는 폭신혈공같이 죽음을 불사하는 무리라면 일월교에 대항하는 무리가 틀림없고, 내력도 심상치 않다 생각하여 느긋하게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자신이 시전한 흡음독마장에 격중된 이상 경공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토록 느긋한 것이다. 그는 이번 기회에 계집들을 생포하여 실컷 재미를 본 뒤 그녀들을 문초하여 상부에 보고할 생각이었다. 일월교에서는 죄를 지으면 일벌백계로 다스리지만, 공을 세우면 그에 상응하는 포상을 하기에 잘하면 순찰사자로 승차(陞差:진급)하는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일월교에서는 일월척살단(日月擲殺團)으로 알려진 호천대의 행방을 보고하는 자에게는 일 계급 승차를, 수뇌부를 생포하는 자에게는 이 계급 승차를 상으로 내놓았다. 또한 태극은하궁 총단을 찾아내는 자에게도 이 계급 승차가 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곳만 괴멸시키면 명실상부하게 강호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독안서뇌가 호천성녀를 생포하여 압송하게 되면 순찰사자가 아니라 그보다 윗단계인 순찰로 진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 여인이 바로 일월교를 그토록 괴롭히던 호천대의 수뇌부임을 모르고 있었다. 만일 알았다면 이토록 느긋하게 추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호천성녀 등이 흘린 선혈 냄새를 맡고 대흥안령산맥의 영물인 일천여 마리의 백호들과 삼천여 마리의 혈랑들이 은밀히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 한 마리 한 마리가 무림의 고수 못지않은 흉폭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 * * "후후……, 정말 살기 좋은 곳이군." 남궁호는 느긋하게 대흥안령산맥 초입에 접어들고 있었다. 지난 며칠 간 억수처럼 쏟아 붓던 폭우 때문에 계곡마다 물이 넘쳐나고 있었고, 나무들은 더욱 초록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곳에 찌는 듯하던 더위는 어느새 물러갔는지 제법 선선한 기운까지 느끼게 하자 유유자적하게 걸으며 낭랑한 음성으로 도도한 시흥(詩興)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는 이번 조선행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선량한 성품을 지닌 한족들은 서로가 서로를 아끼며 슬기롭게 살아가고 있으나, 위기가 닥치면 그 어떤 민족보다도 더 강하게 변모할 줄 아는 민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비록 내공이 반으로 줄었으나 자신의 품에 안겨 마냥 행복해하던 유옥경의 옥용을 떠올린 그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후후……, 그런 여인을 내자로 얻을 수 있었으니 이번 조선행은 얻는 것이 너무 많았구나.' 며칠 후 남궁호는 천천히 걸어 울창한 삼림을 뚫고 본격적인 대흥안령산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곳부터는 끝없이 펼쳐진 초지가 있고, 그곳을 지나면 기기묘묘한 바위와 울창한 삼림이 우거진 곳이 있다는 것을 안 그는 하룻밤 유숙할 생각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제 며칠 후면 태극은하궁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헉헉! 간신히…… 왔어요. 이제 좀 쉬어야지. 도저히 한 발짝도 더 내디딜 수 없어요." "헥헥! 나도 그래." "휴우! 이제 살았어. 어디 조용한 곳을 찾아 우선 상처를 치료하고 내상도 치료해야 할 것 같은데……." 여인들은 산림 한가운데 있는 자그마한 바위에 걸터앉아 거친 숨을 내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록 의복이 다 찢어지고 봉두난발이 되었지만 생기를 되찾은 여인들은 발랄하게 보였다. "그나저나 추적자들은 없는지……." 삐익! 삐이이이익! 막 요금추상이 말을 이으려는 순간, 멀리서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세 여인의 안색은 눈에 뜨이게 창백해졌다. 간신히 숨을 돌렸다 생각하는 판에 추적자들에게 위치가 발각되면 꼼짝없이 저승 행차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하죠?" 위기에 몰렸다 생각한 여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중얼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난 사흘간 먹지도, 자지도, 심지어는 쉬지도 못한 이들은 이제 더 이상의 기력이 없다는 것을 피차간에 잘 알기에 어떻게 행동하자는 의견을 내놓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 * * "호호호, 언니! 이제 된 것 같아요. 이제 슬슬 강호로 나가요. 그래서 못된 일월교도들을 혼내 줘요." 너른 연무장에서 땀흘리며 검무를 추는 이백여 장한들의 모습을 본 여인이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때가 된 거야. 우리라도 무너진 강호 정기를 세워야지. 저들은 새로 태어나는 무림의 초석이 될 거야." 이곳은 팔달령 깊숙한 곳에 위치한 널찍한 분지였다. "소녀가 듣기론 일월교의 힘이 전 중원에 미치며, 엄청난 세를 지니고 있다 들었어요. 우리의 힘만으로 그들을 깨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황궁과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과 합세한 후 각개격파를 해야 해요." "맞아요! 구파일방이 완전히 무너진 이상 어디 기댈 곳도 없어요. 이제 손실을 최소화시키는 방법만이 살 길이에요." 여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장차 나아가야 할 방법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들은 바로 남궁호의 처들이었다. 가장 먼저 혈겁을 감지한 만뇌서시 기연빙이 모든 여인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경천문집장의 학사들을 일당백의 무인으로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만뇌서시를 비롯하여 귀향요정 도옥진, 희수약녀 손약빙, 요지빙녀 금기향, 묘랑 유옥교, 천향소화 진교연, 광뇌자사 용문경, 빙화 황보혜, 산화옥녀 취소군이 이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빠진 사람은 유일하게 희란공주 주영령뿐이었다. 그녀는 황궁에 머물고 있었다. 하오밀문의 오만여 고수들과 과거 화련득전장에 몸담았던 일천여 파잔대, 만화옥녀보의 이천여 여인들, 태원부에서부터 남궁호를 따랐던 용화서생 단리운을 비롯한 이백여 낭인들은 현재 만뇌서시의 명에 따라 은밀한 곳에서 무공 수련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남궁호의 모든 처자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는 것이다. 만뇌서시는 황과수를 떠남으로 해서 세상에 그들의 거처가 드러난 이상 그곳이 안전하지 않다 생각하여 이곳으로 장소를 바꾸었던 것이다.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지 이 년이 넘자 모든 것이 틀을 잡았고, 학사들의 무공 또한 일취월장하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제 전서구를 날리도록 해!" 손약빙이 입을 열자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동안 준비하였던 것을 이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잠시 후 분지를 떠나 창공을 나는 전서구가 있었다. * * * 동정호 한가운데, 무성한 갈대 숲으로 모든 것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곳에 은밀한 움직임이 있었다. 거의 기어가다시피 이동하여서는 한 곳에 멈춰 오랫동안 멈춰 있다 돌아오곤 하던 움직임은 매시진마다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성한 갈대로 외부에서는 전혀 보이지는 않는 곳에는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구멍이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이곳은 바로 위도(葦島)였다. 이곳에서 동정호변은 불과 십 리. 시력이 좋은 자라면 맞은편 호반을 살필 수 있는 거리였다. "아아, 영원히 뜻을 이룰 수 없는가? 장부로 태어나 한 세상 호령하는 것이 꿈이었건만 이토록 눈치를 살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다니……." 시커먼 구멍 바로 안쪽은 드넓은 광장이었다. 이 안에는 전각들이 처마를 잇대고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지붕이 매우 부실하다는 것이다. 하긴 비 한 점 들이칠 수 없는 곳이고 보면 사실상 지붕이라는 것이 필요 없는 곳인지도 모른다. 방금 전 신세를 한탄하는 듯한 소리는 바로 전각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전각의 삼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곳에는 시커먼 수염에 점점이 백염이 섞인 이제 장년의 나이에 접어든 거한이 있었다. 그는 바로 강호십정 가운데 하나였던 철기보를 이끄는 철사자 북리승혁이었다. 올해 오십이 된 그는 이곳 위도로 몸을 숨긴 채 있어야 한다는 것에 울분을 느꼈는지 적지 않은 양의 술을 마신 듯하였다. 그의 앞에는 그의 자식들인 무정검 북리대손과 유성활도 북리운비, 그리고 도화요정 북리운혜와 이제는 철기보의 지낭이 된 북리성린이 있었다. 그들은 부친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고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있었다. "보주께 보고드립니다." 문득 침묵을 깨는 걸걸한 음성이 있었다. 그는 철기보 총관이었다. 모두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의 입이 다시 열렸는지 소리가 들려왔다. "호변은 조용합니다. 그러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모두를 대표하여 북리성린이 의젓하게 입을 열자 다시 소리가 들렸다. "호변에 수십 척의 배가 준비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화선(花船:기녀들을 태우고 유람하는 배)인 듯하나, 규모가 매우 크옵니다." "모두 몇 척이나 되오?" "대략 오십여 척 정도 되옵니다." "알겠소." 총관은 사라졌는지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버님! 오십여 척이라 하면 마신이라는 자가 기녀들을 태우고 즐기기 위한 것이라 하기엔 너무 규모가 크옵니다. 혹시 저들이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아닌지요?" 북리운혜가 입을 열자 철사자의 안색이 약간 변하였다. 그 역시 총관의 보고를 들으면서 혹시 일월교에서 이곳의 동정을 눈치채고 급습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던 것이다. "으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수하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릴까요?" 사실 철기보가 이곳 위도로 자리를 옮긴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간세를 색출해 내기 위함이었다. 과거 냉혈장비 독고태인으로 인해 구파일방에 정중한 사과를 해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곳 위도로 옮긴 후 누구든 전서구를 날리면 즉시 색출하려 이곳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 외에는 외부로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둘째 무적철기대의 철갑을 이곳에서 직접 제련하기 위함이었다. 과거에는 이곳에서 전해지는 철로 철기보에서 만들었으나 원낙 무겁기에 많은 양의 수송이 곤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으로 자리를 옮김으로써 가장 좋은 철을 재료로 철갑 등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셋째 교토삼굴(狡 三窟)이라는 말이 있다. 이곳 철광은 수십 갈래로 나뉘어 있기에 유사시에는 적의 이목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또한 그 중 몇은 동정호 바닥을 지나 육지까지 이어졌기에 그곳을 통하여 도주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후 철기보에서는 심혈을 기울여 이곳저곳에 기관을 설치하였다. 유사시에 굴을 통하여 도주를 하면서도 추적자들을 철저히 괴멸시키기 위한 무시무시한 기관이었다. 일월교의 마신이 악양루로 자리를 옮긴 후 철기보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혹시 자신들이 있는 곳을 눈치챘기에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매시진마다 사방을 살폈다. 현재 철기보에서는 강호가 이미 일월교에 접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구파일방이 무너졌고, 모든 무림세가들이 무너졌다. 또한 중원의 모든 사마외도까지도 철저히 무너졌다. 충성을 맹세한 자는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자는 죽어야 하였다. 세상에 인정은 말라붙었고, 모든 것은 일월교의 뜻대로였다. 이렇게 가다간 황궁도 천자 자리를 내줘야 할 판이었다. 철기보에서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나서지 못하고 이곳에 웅크린 채 사태의 추이만을 살폈던 것이고, 창공을 박차고 나가 멋지게 비상하려던 철사자는 마치 날개 꺾인 새처럼 매일 술타령만 하였던 것이다. 북리운혜의 의견을 들은 철사자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지금 즉시 너희 둘은 이곳을 떠난다. 세상의 일이란 예상대로 되는가 싶다가도 의외의 변수로 인해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법! 일단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만일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면 즉시 천괴성을 타고난 사람을 찾거라. 그의 곁에 있어야만 유사시에도 우리 북리가를 이을 수 있다. 알겠느냐?" 철사자는 놀랍게도 북리운혜와 북리성린을 지목하고 있었다. "아버님, 소자보다는 큰형님께서 가셔야……." "아니다! 호랑이는 약한 새끼를 기르지 않는 법! 네 형이 지금은 너보다 강하나, 만일 본보가 괴멸당한다면 복수를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너희 둘이다. 누이의 머리와 네 근골이면 능히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다. 네 형들과는 이미 이야기가 된 것이니, 어서 떠나거라." 형형한 안광을 빛내며 말하는 철사자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무정검과 유성활도 형제를 불러 놓고 긴 이야기를 하였었다. 일월교에서 눈치를 챘다면 누가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했던 것이다. 당연히 장자인 무정검이 가야 할 것이라 생각하던 그는 막상 본인으로부터 자신보다는 막내인 북리성린이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도 기뻤다. 천하를 제패하겠다고 자식들의 훈육을 나 몰라라 하였건만, 너무도 훌륭하게 장성한 자식들이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북리운혜와 북리성린이 그럴 수 없다면 한사코 고사하였으나 그들은 부친의 뜻을 읽고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떠난 후 위도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섬 주위 십 리 가량이 자욱한 운무에 가려 제 손가락조차 분별할 수 없도록 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철기보에서 준비한 안배 중 하나였다. 그리고 위도에 있던 모든 갈대들은 베어졌다. 과거 남궁호에게 당했던 잠마유령단은 화공(火攻)으로 멸문당하지 않았던가! 이를 타산지석 삼아 그 동안 철기보에서는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갈대를 베어낸 곳은 갈대처럼 보이도록 만든 가느다란 봉들이 세워졌다. 이것들은 모두 쇠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만년강모를 제련하여 만든 것으로, 유사시에는 원하는 방향으로 마치 화살처럼 발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것들은 능히 철판을 뚫을 정도의 돌파력을 지니고 있기에 웬만한 자들은 접근하였다가는 그 자리에서 고슴도치처럼 되어 황천길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한 번 발사한 것들은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가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질기기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질기다는 천잠사로 그 끝을 매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천잠사의 길이가 이십 장밖에 되지 않기에 이십 장 밖의 적은 살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 위도에 일어난 변화는 외지로 나가는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다. 이는 외부로 향한 북리성린과 북리운혜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하려는 계책이었다. 만일 이곳에서 철기보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북리가를 이을 수 있게 하려는 일종의 고육지계였던 것이다. 또한 외부로 통하는 모든 통로가 차단된 이상 배수의 진을 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여 무적철기대로 하여금 최후의 일 인까지 공격하게 하려는 것이기도 하였다. * * * 삐익! 삐이이익! "찾았다! 여기다! 이 숲으로 들어갔다." 가슴에 일월이 수놓아진 백의경장을 걸친 장한이 마치 대단한 발견을 했다는 듯 호각과 함께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앞에는 선혈을 흘린 자국과 더불어 깊숙한 발자국이 있었다. 이곳은 오랫동안 인적이 끊겼던 곳인지라 떨어진 낙엽이 부엽토(腐葉土)를 만들고 있었다. 부엽토는 그 성질상 조금만 눌려도 선명한 자국을 남기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찐득찐득한 선혈을 만져 본 장한은 여인들이 숲으로 들어간 지 불과 반시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을 알아내곤 흉소를 지었다. 흑룡대를 이끄는 독안서뇌는 누구든 계집들의 흔적을 가장 먼저 발견한 자에게 계집 하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기에 오늘 자신이 오랜만에 회포를 풀 수 있으리란 기대에서 흉소를 머금었던 것이다. "크크크, 수고하였다. 무엇들 하느냐? 이곳을 샅샅이 수색하라. 계집들을 발견하면 반드시 생포하여야 한다. 알겠느냐?" 부대주인 낙양일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명을 내렸고, 곧 일천여 흑룡대원들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큰일이야! 놈들이 여기까지 따라왔나 봐! 어떻게 하지?" 요금추상 초군엽이 다급한 음성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의견을 구하자, 흑요무후 석규미 역시 사방을 둘러보며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여인들은 은신한 채 쉴 만한 곳을 찾기 위하여 아무리 돌아다녀도 은신할 만한 동혈도 없었고, 큰 바위도 없어 시간만 낭비하였다. 당연히 제대로 쉬지도 못하였다. 반시진 동안 한 일이라곤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잠시 숨을 돌리는 정도였었다. "일단 기문진세로 저들의 눈을 속이는 수밖에 없어. 도주하기엔 너무 지쳐 금방 발각당하고 말 거야." 호천성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좋아! 일단 기문진식을 펼쳐 놓고 보자!" 그녀는 주변에 있는 돌멩이들과 나뭇가지들을 이용하여 진세를 펼쳤다. 그녀가 펼친 진세는 과거 진세의 대가인 귀곡자가 창안한 장안미리진(障眼迷 陣)이었다. 이 진세는 진법의 대가가 아니면 알아보기 힘든 것이 특징으로, 안에서 밖은 훤히 보이나 밖에서는 진세 안이 보이지 않는다. 과거 귀곡자가 임종을 앞두고 이 진법이야말로 자신이 창안한 모든 진법 중 최고의 정화라 하였는데, 이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는지조차 알아보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누구든 이 전세에 발을 들여놓으면 헛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보아 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였다. "호호……, 장안미리진을 설치하였으니 그냥 지나칠 거야. 우리는 이 안에서 소리만 내지 않고 있으면 돼!" 호천성녀의 밝은 음성을 들은 두 여인은 바위에 기댄 채 운공조식을 하려는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일행이 있는 부근에 일월교도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병장기를 이용하여 주변을 샅샅이 뒤지는가 싶더니 이내 산등성이를 넘어 지나쳤다. 과연 장안미리진이었다. 불과 일 장 앞까지 왔던 자들도 세 여인을 전혀 보지 못한 듯 그냥 지났던 것이다. "휴우! 지나갔어요. 이제 살았네!" 흑요무후가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일월교도들을 보며 긴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자, 호천성녀의 입이 다시 열렸다. "아냐! 그들은 아마 되돌아올 거야! 이곳을 지나서부터는 우리의 흔적이 없으니,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과연 그녀의 말대로 일월교도들은 일각도 되기 전에 다시 산등성이를 넘어서고 있었다. 또다시 주변을 샅샅이 뒤지던 그들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다시 추적하려는 모양이었다. 무림에서는 흔히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하여 신발을 거꾸로 신고 가는 방법이 있었다. 그들은 그런 줄 알고 오던 길에 혹시 다른 흔적이 있는가를 알아보려 간 것이었다. "이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제 갔잖아요?" "아냐. 우리는 이곳까지 오면서 다른 흔적을 남긴 것이 없어. 그러니 그들은 또다시 흔적을 따라올 것이고, 그러면 이번엔 틀림없이 발각당하게 될 거야." "아잉! 이제 조금 살 만하다 싶었는데……." 흑요무후가 나직이 투정을 부리자 호천성녀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매, 조금만 참아! 이번엔 가면서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 저들의 이목을 분산시켜야 돼. 알았지? 그리고 가면서 혹시 동굴이 있나 알아봐. 동굴이 있다면 저들의 추적을 따돌릴 방법이 있으니……." 호천성녀는 동굴 입구에 또 다른 진식을 펼쳐 아예 동굴이 있다는 것을 외부에서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잠시 뒤 세 여인은 지금까지 발견할 수 없었던 입구가 좁은 동굴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은 울창한 수풀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기에 은신하기에는 너무도 알맞은 곳이었다. "휴우! 이제 살았네요." 흑요무후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다리를 길게 뻗을 무렵 호천성녀는 동굴 입구에 기문진식을 설치하였다. "이제 한숨 돌려도 돼!" 진추하는 돌아서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짓는 미소였다. 잠시 침묵하며 운기요상을 하려 할 때,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크어어어헝! "으앗! 백호닷!" 일월교도들이 다시 흔적을 따라오던 도중 백호의 무리들과 조우하였던 것이다. 백호들은 감히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인간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고, 일월교도들은 창졸간이지만 병장기를 뽑아 들고 이에 대응하려 하였다. 크어어어헝! "으아아악!" "아아악!" 천여 마리에 달하는 백호들은 웬만한 고수들보다도 몸놀림이 영활하였다. 비록 일월교도들 모두가 웬만한 고수를 뺨치는 무공을 지녔지만 그들의 흉폭한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어 수세에 몰리다 죽어 갔다. 바로 동굴 주변에 울창한 덤불 때문이었다. 수백 년 동안 인적이 없었던 곳이기에 덤불들은 질기기 이루 말할 데 없었고, 그것들이 서로 얽혀 있기에 병장기를 휘두르다 걸리면 검세가 무뎌지거나, 아니면 검로가 변경되어 제대로 공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병장기를 버리고 장력으로 대응하라!" 흑룡대주인 독안서뇌가 금방 이러한 것을 간파하고 명을 내렸지만 그때는 이미 십여 명의 수하들이 죽어 간 뒤였다. 퍼펑! 퍼퍼퍼펑! 케엑! 끄르르릉! 크아아앙! 곧 그곳은 니전투구(泥田鬪狗)의 양상을 보이는 격전장으로 변모하여 갔다. 장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일월교도들의 가공할 장력은 백호들을 두들겼고, 그 결과 쉽사리 평수를 이루어 갔다. 그러나 성난 백호들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기에 그들은 정신없이 전후좌우에서 마치 죄듯이 달려드는 백호들을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장력을 날리고 있었다. 이러다간 먼저 지치는 쪽이 전멸당할 판이었다. 그 즈음 백호들의 뒤쪽으로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혈랑들이 호시탐탐 전장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양패구상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혈랑들의 선두에는 거의 황소만큼이나 체구가 큰 혈랑이 유심히 전장을 지켜보는 모습이었다. "으앗! 혈랑들도 나타났다." 격전을 벌이던 중 누군가의 눈에 엄청난 수효의 혈랑이 눈에 뜨이자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말은 분전을 펼치던 동료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백호들을 대적하는 그들의 손발이 어지럽도록 하는 기폭제였기 때문이었다. 크허허허엉! 끄아아앙! 백호들은 등뒤에 혈랑이 있건 없건 맹렬한 기세로 일월교도들을 공격하여 갔다. 거대한 곰 발바닥보다도 큰 백호들의 앞발에 걸리면 그 즉시 갈기갈기 찢어지며 쓰러져야 했다. 그들의 어마어마한 송곳니는 웬만한 도검으로는 상대하기엔 너무도 버거운 것이었다. 퇴로를 차단당한 일월교도들은 죽기 살기로 검을 휘두르는 한편 장력을 날렸는데, 때로는 그 장력에 동료가 피떡이 되어 쓰러지기도 하였다. 곧 일월교도들의 수효는 급감하여 갔다. 만일 백호와 일 대 일로 붙었다면 아마도 승리는 일월교도들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격전을 벌이기에는 워낙 좋지 않은 덤불 사이에 있었고, 백호들은 웬만한 무림고수들의 신법보다도 빨랐다. 눈이 돌아갈 지경으로 여기저기에서 달려드는 백호들은 그들의 손발을 어지럽게 하였고, 그 결과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대략 오백여 명이 처참한 시신이 되어 쓰러지자 이때까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혈랑들의 눈빛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하였다. 우우우우―! 혈랑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것이 길고 긴 소리를 내자 지금까지 잠잠하던 혈랑들의 털이 곤두서는가 싶더니 곧 일월교도들을 향하여 달려들기 시작하였다. "아앗! 혈랑들이 온닷! 아아아악!" 등뒤에서 다가오는 혈랑이 있는지도 모르고 소리치던 일월교도는 날카로운 이빨에 목이 물린 채 발버둥치다 쓰러졌다. 그에 이어 일월교도들은 순식간에 그 수효가 급감되고 있었다. 다만 흑룡대주인 독안서뇌와 낙양일부만이 서로 등진 채 다가서는 백호와 혈랑들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대략 이각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들 둘은 비교적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끄르르르릉! 크허어엉! 백호들은 자신들의 먹이를 노리고 다가온 혈랑들을 쫓기 위하여 그들과 대치한 상태가 되었을 때 신속히 신법으로 올랐던 것이다. 거의 희생이 없던 백호와 혈랑은 팽팽한 대치 끝에 급작스럽게 혈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이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놓았다. 백호와 혈랑의 싸움은 자신들의 먹이를 가로채려는 혈랑들을 백호들이 엄청난 기세로 달려들어 몇 마리를 희생시키자 순식간에 끝났다. 혈랑들은 물러가는 와중에도 몇몇의 시신을 잽싸게 물고 가 한쪽에서 먹고 있었다. 백호들은 승리자답게 시신들을 먹으면서 가끔 혈랑들을 노려보곤 하였다. 대흥안령산맥에서 먹이를 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약한 짐승들은 이들 백호와 혈랑에게 당할 만큼 당해 그 수효가 너무 적었기에 그 동안 굶주렸던 것이다. 백호가 물러간 것은 적당히 배를 채우고 난 뒤였다. 어슬렁거리며 그들이 사라지자 지금껏 노려보기만 했던 혈랑 떼가 달려들어 남아 있던 잔해를 깨끗이 먹어 버렸다. 그러나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굶주린 혈랑들은 일월교도들이 흘린 선혈을 핥으며 혹시 남아 있는 것이 없나를 살피는 듯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혈랑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대한 혈랑이 여인들이 은신해 있는 동굴을 향하여 어슬렁거리며 다가서고 있었다. 크르르릉! 거대한 혈랑이 포효하자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먹이를 찾던 다른 혈랑들이 일제히 동굴의 입구로 몰려들며 질질 침을 흘리고 있었다. 은신해 있던 여인들은 미처 이러한 짐승들의 공격을 예상치 못하고 있었기에 크게 당황하였다. "큰일이다! 진세로는 저들을 막을 수 없어!" "하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진세를 펼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고 했잖아요?" 호천성녀가 당황한 듯 소리치자, 곁에 있던 흑요무후가 물었다. "그 진세는 사람들의 이목을 속일 수는 있어. 하지만 짐승들은 예민한 후각이 있어. 그래서 저놈들은 진세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단 말이야." "그, 그럼 어떻게 해요?" 요금추상 초군엽은 벌써부터 풍겨 오는 혈랑들의 노린내 때문에 정신이 없었기에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침착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어떻게 하긴? 다행히 동굴의 입구가 좁아 한 마리씩밖에는 공격할 수 없을 거야. 우리는 셋이니 교대로 저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해." "그, 그러다 우리가 지치면?" 흑요무후는 약간 겁먹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휴우! 그 다음은 운명에 맡기는 거지." 호천성녀의 대답에 두 여인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마, 말도 안 돼. 그럼 우리가 저놈들의 먹이가 된다는 말이에요?" 초군엽 역시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반문하였다. "일단 막아야 해! 우리가 교대로 쉬어 가며 막으면 어쩌면 제풀에 지쳐 물러갈지도 몰라! 지금 현재론 그 방법 외에는 없어. 우선은 내가 막을 테니, 엽매와 미매는 좀 쉬어." 호천성녀를 비롯한 두 여인들을 대흥안령산맥에 서식하는 혈랑들이 어떻게 백호들과 영토를 반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혈랑들은 한 번 목표로 한 먹이를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없는 짐승들이었다. 그 특유의 끈질김으로 인하여 백호들과 영역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 스스로 물러선다는 것은 그녀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호천성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는 막 동굴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려는 혈랑을 향하여 위맹한 장력을 날렸다. "이얍! 항마복호장(降魔伏虎掌)―!" 소림의 절기인 항마복호장이 발출되어 혈랑의 정수리 부분에 격중되었다. 끼낑! 끼끼끼낑! 평소 같으면 혈랑의 두개골이 박살날 정도의 위력을 지닌 장력이 발출되었을 것이나, 독안서뇌에게 격중당한 흡음독마장의 여파로 그녀의 장력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위력이 있었는지 혈랑은 아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바로 그 뒤에 있던 또 다른 혈랑이 동굴로 들어오려 하였다. 또다시 장력이 발출되었으나 여전히 장력의 위력은 형편없어 뒤로 물러서게만 할 뿐이었다. "내상이 심한가 봐! 소매가 한 번 해 볼게요!" 요금추상은 호천성녀의 장력이 평소의 일할도 채 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의 내상이 생각보다 심한 듯싶어 자신이 나섰다. 그러나 그녀의 장력 역시 호천성녀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러자 흑요무후가 나섰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크, 큰일났어요. 우리 셋 다 심한 내상을 입은 모양인데, 이제 어떻게 하죠?" 요금추상은 쉴새없이 들어오려는 혈랑들을 향하여 장력을 날리면서 호천성녀의 모습을 살폈다. 그 순간,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흡음독마장에 격중당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력을 끌어올려 장력을 날렸기에 드디어 흡음독마장의 효력이 발생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나머지 두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별히 내장이 상한 것 같지도 않은데 괴이하게도 숨이 가빠오고 전신의 기력이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증상이 일며 급격하게 장력이 약해져 가자, 여인들은 이제 모든 희망이 사라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직은 미약하나마 장력에 격중된 혈랑들이 뒷걸음질치고 있기는 하나 그것은 앞으로 일각을 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여인들은 이제 꼼짝없이 혈랑들의 먹이로 전락한다 생각하고 절망적인 안색이었다. '아아,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이 순간, 여인들은 공통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구파일방의 공동전인이 되어 강호의 협의를 세우기 위하여 혹독한 고련을 거듭하였건만 이름도 없는 산중에서 한낱 미물의 먹이로 죽어 가야 한다는 자신들의 처지를 비탄하고 있었다. 여전히 혈랑들은 동굴 속에서 버티고 있는 싱싱한 먹이를 잡아먹기 위하여 으르렁대며 달려들고 있었다. 천천히 초지를 따라 오르던 남궁호는 머지않은 곳에서 짐승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후후……, 먹이 사냥을 하는 모양이군."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맹수들이 다른 짐승들을 사냥하는 모습을 심심지 않게 보아 왔던 그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숲을 우회하여 가기로 마음먹었다. 맹수가 약한 짐승을 사냥하여 포식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 생각하였기에 별다른 생각이 없던 그는 몇 발짝을 떼기도 전에 여인의 다급한 비명소리를 들었다. "아아아악! 사람 살려! 살려 줘요!" 순간, 남궁호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낱 미물들이 감히……!" 비명성을 듣자마자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일학충천의 신법에 이어 운룡대구식과 궁신탄영(弓身彈影)을 시전한 그의 신형은 쏜살보다도 빨리 날아 촌각 만에 비명성이 들렸던 부근 나뭇가지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불과 손가락 굵기였지만 그의 신형이 올라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휘지 않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서는 혈랑들이 좁디좁은 먼저 동굴로 들어가려 니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으르렁대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 그리고 노릿한 냄새는 보통 사람 같으면 정신이 아찔할 모습이나 남궁호는 그런 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있었다. 주변을 살핀 그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천 조각을 발견하고 쌍심지를 돋구었다. 본디 백의였던 것 같은 그것들엔 시뻘건 선혈이 묻어 있었으며, 여기저기 허연 백골들이 널려 있었던 것이다. '으음, 저 정도면 족히 수백 명은 된다. 고약한 놈들. 저놈들을 없애지 않으면 장차 수많은 사람들이 곤란을 겪겠구나.' 그 사이 혈랑들의 몸은 조금씩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물론 들어가는 족족 뒤로 물러서기는 하였지만 이로 보아 동굴 안에 있는 사람의 기력이 다해 가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에 천황검을 쓸 수는 없지.' 남궁호는 등뒤에 메어 놓은 무적풍 위세기의 애병이었던 무적검을 뽑아 든 뒤 혈랑들이 모여 있는 중심으로 내려서며 무적검법 제일초를 시전하였다. "이얍! 무적파천(無敵破天)―!" 드디어 일 대 삼천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무적검에서는 오 장 가량의 검강(劍 )이 뻗어 나와 닿는 것이 무엇이든 모조리 베어내고 있었다. 서로 동굴 속으로 먼저 파고들어 맛있는 먹이를 먹으려던 혈랑들은 무지막지한 검강에 닿는 족족 비명을 터뜨리며 양분되어 갔다. 쓔와와와왕! 케엥! 켁! 끙! 케켕! 단 일 검에 백여 마리의 혈랑들이 죽자 그제서야 남궁호의 존재를 눈치챈 나머지 혈랑들이 일제히 그를 향하여 쇄도하였다. 비릿한 냄새와 더불어 노린내가 심하게 풍겼으나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이얍! 무적만멸(無敵萬滅)― 무적파천황(無敵破天荒)―!" 무적검법 제이초와 삼초가 연달아 펼쳐지자 장내는 순식간에 혈랑들의 시신으로 그득하게 되었다. 잠시 남궁호의 무지막지한 검세에 눌려 뒤로 물러섰던 혈랑들은 우두머리의 신호에 따라 마치 차륜전을 펼치려는 듯한 양상을 보이며 교대로 달려들었다. 한 번에 단 네 마리씩 달려드는 혈랑들은 마치 잘 조련된 군사들처럼 우두머리의 명에 의하여 달려들었기에 남궁호는 처음과 같이 단 한 번에 여러 마리를 죽일 수 없었다. 그러나 남궁호는 왜구들에 이어 혈랑들을 상대로 실전 경험을 풍부하게 쌓을 수 있게 되었다.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혈랑들의 시신은 쌓여만 갔다. 마침내 지금까지 뒤에서 남궁호와 동족들 간의 혈투를 지켜보던 우두머리의 입에서 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우우우―! 그때는 천여 마리에 달하던 혈랑들의 수효가 불과 일백여 마리로 줄어들어 있던 때였다. 우두머리는 자신이 합세한다 하더라도 전혀 승산이 없음을 간파하고 더 이상 무의미한 희생을 줄이려는지 퇴각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자 으르렁대며 사납게 포효하던 혈랑들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들 눈의 시뻘건 안광만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제아무리 상대가 강하다 하더라도 전혀 기죽지 않는 혈랑 특유의 모습이었다. 혈랑들은 한동안 남궁호를 노려보더니 일제히 사라졌다. 장내에는 구백여 혈랑의 시신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선혈로 흥건하였다. 잠시 장내를 둘러본 남궁호는 서둘러 동굴 속으로 기어들었다. 동굴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져 종래에는 일어서서 다닐 정도는 되었다. 미약한 노린내가 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짐승이 겨울을 났던 동굴인 모양이었다. 안에는 이미 혼절해 버린 세 여인이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다. 재빨리 다가가 진맥한 남궁호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땅히 뛰어야 할 맥이 미약한 것은 차체하고서라도 여인들이라면 의당 감지되어야 할 순음지기가 무척이나 미약하였던 것이다.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여인들의 신체에서는 괴이한 변화가 일고 있었다. 조금씩 말라드는 듯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이것은 채음보양술 등으로 체내의 순음지기를 몽땅 빨렸을 때나 일어나는 일인데…….' 남궁호는 서둘러 여인들의 소매를 걷어 보았다. '정말 이상하네? 아직 수궁사(守宮絲)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청백지신임이 분명한데……. 대체 어떤 연유에서 이럴까?' 남궁호는 서둘러 품안의 침통을 꺼내 더 이상 순음지기가 줄어들지 않도록 시침을 하는 한편 주위를 살펴보았다. 천지에는 괴이한 짐승도 많듯이 괴사도 많이 일어나기에 혹시 주변에 여인의 순음지기를 빨아들이는 괴물체가 없나를 살폈던 것이다. 그러나 동굴 안에는 건초더미만 있을 뿐 의심갈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궁호는 잠시 듣도 보도 못한 괴사에 어리둥절하다 뇌리에 기억된 모든 것들을 되짚어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니……. 그나저나 이대로 두면 한 시진 내로 모두 목내이처럼 변해 죽을 것이 뻔하다. 혹시 신체의 다른 상처 때문인가?' 남궁호는 서둘러 여인 가운데 하나의 의복을 벗기며 여기저기 나 있는 상처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효능이 뛰어난 금창약을 발랐는지 은은한 약향과 더불어 이제는 거의 아문 상흔을 볼 수 있던 그는 여인의 젖가리개를 풀었다. 그러자 안에 갇혀 있던 여인의 융기가 불룩 솟아났다. 마치 지금까지 갇혀 있어 답답하였다는 듯 솟은 융기는 놀랍게도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다. 다른 두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무림의 금기를 어기고 여인들의 가슴을 장력으로 공격한 모양이었다. '으으, 못된 놈들.' 남궁호는 치를 떨면서도 악독한 장력을 면밀히 살핀 끝에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 듣거나 보지는 못하였지만 누군가 한 번 장력에 격중당하면 순음지기가 서서히 사라지는 장법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들은 아마도 아까 보았던 백골로 화한 자들이리라는 것을 짐작하였던 것이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으음, 어떻게 하지?' 남궁호는 잠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인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천지음양화합술로 잃어버린 음기를 되찾게 하는 방법밖에 없었던 것이다. '의복을 보아하니 무림인 듯한데,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구해야 하나,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하나?' 남궁호는 여인들을 구하고 나면 그나마 있던 내공이 또 줄어들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장차 혈겁으로부터 천하를 구하려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바로 막강한 무공이 아니던가! '지금 천지음양화합술을 사용한다면 능히 여인들을 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자칫 천하를 구하는 데 막대한 타격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하나?' 중얼거리던 남궁호는 자신이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침으로 잠시 순음지기가 사라지는 것을 막았던 것이 다시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