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뿌르를 나와 바라나시(와르느시)를 간다.
인도인의 영혼이 머무르는 곳이고, 인도인의 삶의 염원인 와르느시 그곳엘 가는 길이다.
마음이 구름 위를 걷듯 긴장되는 순간이다. 얼마 전 이전에 모시던 분을 뵙고
저녁식사를 하던 중에 그분께서 인도의 갠지즈 강(강가 강)에 가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죽음 그 순간에도 환하게 웃고
삶의 마지막을 그곳에서 보내기 위해서 모여드는 그들이 보고 싶다고 하셨던 곳이다.
그곳엘 내가 간다. 지금!!
버스로 산시크리스 유니버스트 게이트에서 내렸다.
이제 이곳에서 숙소까지 릭샤를 타고 가야 하는데 짐은 많고, 시간은 저녁이 되어가고,
거리는 많은 인파로 인해서 아주 북적거린다. 복잡한 고대도시 와르느시는 사람의 혼을 빼앗는다.
일렬로 늘어선 릭샤에 3사람씩 타고 우리는 다싸스와매트가트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가트에 인접해서는 더 이상 릭샤를 갈 수 없고,
구시가지인 고돌리아에서 모두들 내리게 되었다.
힘겹게 릭샤를 운전하신 아저씨에게 미안해서 40Rs를 주도록 약속이 되어있었는데
동생과 나는 또 10Rs를 덤으로 드리고 고돌리아에서 내렸다.
이곳까지 왔는데 내게 변고가 생겼다.
아까 버스에서 오면서 잠시 먹은 오징어가 화근이었는지 체기가 왔다.
버스에서 내리면서부터 이상하였는데 결국 고돌리아에 내려 집결장소에 오니
그곳의 오물냄새로 인해서 내 몸은 역겨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속이 좋지 않은데 고돌리아의 시장통 입구에는 소와 돼지의 오물냄새가
나를 먼저 반기니 힘에 겨워 일행이 다 도착할 때까지 나는 쭈그리고 앉는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했을까?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숙소까지 한 사람이 겨우 지나 다닐 수 있는 길을 뱅글뱅글 돌아
숙소를 배정받고 난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와르느시의 첫날밤은 그렇게 온몸의 열을 토해내면서 가버렸다.
모두들 강가강의 뿌자의식을 보고 아름다운 저녁식사를 하고 왔는데
내겐 아무런 기억이 없는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아픔에는 두려움도 없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밤시간이 지나간 것이었다.
와르느시…….
약 기운이었을까 개운하게 일어날수가 있었다.
땀을 많이 흘려서 샤워를 해야만 했다. 다행히 오랫만에 뜨거운 물을 만날 수 있어
몇 일 만의 개운함을 맛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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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르느시의 일출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해서 서둘렀다.
분주히 설치고 준비하여 옥상으로 올라가 강가강의 일출을 보려고 했지만
희뿌연 스모그로 인해서 일출은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았다.
가트와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은 이유도 우리가 이동하면서
여행을 즐기기 쉽게 새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가가 내려다보이는 숙소 그곳에서는 라자가 자는 방이 있다고
1000Rs를 더 지불하고 라자의 방에서 잠을 청한이도 있었다.
돔 형식의 지붕에 강가가 바로 보이는 방일뿐이었다.
라자의 방 치고는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불한 돈이 아깝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인도인 주인은 말을 했다. 라자가 잔 방이라고 말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라자가 자는 방이라고 해서 아주 스페셜한 방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우리의 생각이었던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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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바에서 내려다 본 강가 강의 일출을 보기 위한 보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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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를 즐기는 외국인들 (어느 나라의 승려인지 잘 모르겠지만 사진을 찍으니 이쁘게 앉아 주셨다.)
이미 많은 외국인들은 강가강의 일출을 보트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앗! 뿔사! 저렇게 해보았어야 하는구나…….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스모그 틈 사이로 올라오는 해를 바라보며
시뻘건 하늘을 슬쩍 만끽하려고 하니 온통 원숭이들이 소리를 내며 다닌다.
밤사이 아픈 몸이라 몰랐었는데 밤새 창문을 두드리는 원숭이소리로 인해서 많이
시끄러웠다는 것이다.
스모그를 비집고 해가 올라온다. 붉게 피어 오르는 장관은 아니지만 엄마의 강에서
해가 뜨는 아침을 맞이했다. 서서히 올라오던 해는 스모그 속에서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더니
어느 순간 벌겋게 달구어진 채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와르느시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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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바의 사원
호텔에서 조식을 하고 우리는 강가 강에서 보트를 타기로 했다.
고불고불 골목길도 찾기 힘이 들었다. 가트로 내려가는 길이 두 사람이 나란히 설 수는 없는
골목길이었다. 뱅글 뱅글 돌아 서 가트로 내려가는 동안 쉬바의 사원이 곳곳에 있었다.
특별히 사원의 표기를 해둔 것은 아니지만 링가가 세워져 있었고,
새벽에 이들은 신에게 기도를 드렸는지 꽃이 놓여져 있었다.
쉬바의 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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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는 하는 모습!(빨래는 돈을 주고 하는 빨래이다.)
목욕하시는 분
가트로 내려와 보트를 타기 위해 이러 저리 왔다갔다하면서 보트를 고르는 있었다.
빨래를 하는 사람, 목욕을 하는 사람 등 강가 강에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한 젊은이가 다가와서 보트를 탈거냐고 협상을 하길래 승낙을 했다.
돈은 이미 사전에 알고 왔으므로 우리는 그 돈에 지불 할 것을 이야기하니
흔쾌히 승낙을 했고 청년은 한국말을 할 줄 알아서 우리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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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 아마도라는 수식어를 많이 사용한다. 한국말이 서툴러서이다.
만수!!
다싸스와매트가트의 만수…….
보트맨 만수! 보트를 운전하면서 한국인 가이드가 되고 싶다고 했다.
만수는 굉장히 부지런한 청년이었고, 카주라호의 민수보다는 한국말이 어설펐지만
알아 듣기에는 충분했다. 만수는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인 가이드가 되고 싶다고 했다.
벌써 결혼을 해서 세 아이의 아버지인 만수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과업인 보트맨이다.
만수는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와르느시…….
바라나시라고 하지 않는 것은 영국식 발음이기 때문이란다.
갠지스강 또한 영국인의 발음이라고 했다. 그들은 강가 강이라고 부르고
갠지스강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식민지 시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일제시대를 잊어버리고 싶은 것과 같은 생각인 것만 같다.
만수도 그 시대를 살지 않았고, 나 또한 일제 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사람들마다 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은 것이다.
내가 굳이 이렇게 표기하는 것도 그들에 대한 예의 일거라 생각해서이다.
강가 강은 엄마의 강이다. 만수는 엄마의 강에서 삶을 살고 돈을 번다.
그들은 엄마의 강에서 기도도 하고, 죽음도 맞이한다.
아마도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인도인의 염원을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와르느시는 워르나와 아씨 사이의 이름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만수는 손으로 가리킨다. 저 뒤의 다리건너 마지막 아씨가트와 맨 앞에 있는
라자카드 사이를 말한다고 한다. 예전 이름은 까시 버나러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와르느시라고 만수는 설명을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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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는 시신이 있을수도 있다고 한다
보트를 타고 가트를 돌아보는 동안 화장 가터를 보았다.
아침이라 화장을 하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아직도 연기가 올라오는 곳이 보인다.
강가 강에는 4가지의 시신은 화장을 하지 않고 그냥 버린다고 한다.
1. 사제의 시신
2. 어린아이의 시신
3. 임산부의 시신(배속에 어린아이가 있기 때문이란다)
4. 소의 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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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트들 사이에 즐비하게 늘어선 건물들
많은 설명서에 보면 강가 강에는 시신이 떠돌아 다닌다고 하지만 가트를 다니는 동안 보이지 않았는데, 그건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배 옆을 돌아드니 소의 시체가 있었고, 또 조금 가다 보니 아이의 시신이 섞어가고 있었다.
인도는 6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이다.
그때는 가트에 물이 많이 차서 보트를 잘 탈 수가 없어 보트 하나에 3~4명 정도 탈 수 있고
그것도 물살이 좋은 날 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와르느시에는 많은 축제가 있는데 바로 얼마 전에 문(Moon)축제가 있었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하니 인도로 출발하는 날이 한국에서의 음력보름이었으니
아마도 그때에 축제가 있었나보다. 우리가 인도에 도착하던 날…….
축제는 대게 하루 만에 끝이 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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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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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 강
화장 가트에서 화장을 하는 사람은 수트라 계급이지만 화장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그래서 만수도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가트 하나 하나 손가락으로 가르쳐주며 이름을 물을 때마다 대답을 해주었는데
나는 금방 잊어버린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렇게까진 하고 싶진 않다.
보트 유람을 끝내고 만수 동생이 운영하는 실크가게로 갔다.
스카프를 사고 동생과 나는 펀자비를 사서 오늘부터 입고 다니기로 했다.
카주라호에서 사온 스카프도 터번으로 두르고, 그렇게 인도인답게 인도를 즐겨보자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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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트
만수는 두 동생이 있었는데, 영수와 세창이다. 세창이는 일본어를 잘 하고 일본여행도 다녀왔다.
그 곳에는 한국 에세이 책이 있었는데 만수가 공부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에게 선물로 줄 몇 장의 스카프를 그 곳에서 다 구매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서른 장이 넘는 스카프를 사고, 옷도 사서 만수에게 기쁨을 주었는지 모르지만
선물로 팔찌를 받아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만수를 다시 찾는 날에 만수가 멋진 한국인 가이드가 되어 있기를
만수가 믿는 쉬바신에게 기원해본다.
펀자비를 갈아입고 오후를 준비하는 동안 왜 그렇게 좋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인도인이 되어 있는 듯 행복한 모습을 얼굴에서 감출 수가 없었다.
힌두신을 믿는 것도 아닌데, 괜시리 그들처럼 행동해야 할 것 같고 그들처럼 인사를 해야 할 듯한지
동생과 나는 옷을 입음과 동시에 손을 모으고 보는이 마다 “나마스테”라고 인사를 했다.
내가 전생에 인도인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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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파는 소녀에게 꽃을 사서 강가에 띄우며 염원을 빌었다.
첫댓글 인도 네팔에서 한달간 돌아다니는 사이 나의 입에서는 "" 나마스테 "" 란 인사말이 자연스럽게 튀어 나왔다...
특히 이곳 와르느시 강가 강 화장터는 인도 사람들이 죽어서 이곳에서 장사지내 주기를 기대하는 곳이어서
나는 관심을 갖고 이들의 장례식을 가까이서 보았다.....
좁은 골목길로 워치케 시체를 메고 들어오는지 자세히 보았고.....
시체를 태울때 나무는 어느정도 쌓아 놓는지 ...그리고 시체를 강가강물에 집어 넣었다가 얼마만에 끌어내어서
장작 위에 놓고 태우는지.....그리고 잘 태우기 위해서 어떻게 막대기로 잘 쑤셔거리는지를 보고 또 보았다....
시체 태우는 냄새를 맡을만 했다....
강가강에서.죽은 소의 시체를 보았고 죽은 아이의 시체도 보았습니다 죽은자들은 모두들 그렇게 엄마의 강으로 그렇게 다시 그 품으로 돌려 보내는 그들의 의식이지 않을까요.....
처음태어날때의 엄마의 자궁속처럼....
한국에서 같았으면 감히 시체 태우는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겠지만....
손목이 툭 떨어지고 ...머리도 태우다 보면 또 툭 떨이지고....
집게로 집어 올려서 태우고.....
상주들이 우리나라처럼 울고 불고 하지를 않는데....
아마 윤회를 믿기 때문이겠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하여간 강가강에서 배도 타보았고....시체타는 연기를 맡으면서 식사도 하고.....
그런 나를 보면서 나는 이미 한국 사람이 아니고 ....인도 사람이 다 되었구나 ....라고 생각 했다....
인도 바라나시...갠지스강....(와르느시....강가강).....
참으로 이 지구상에서 가장 특별한곳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곳이 바로 인도중의 인도 였다...
저도 그랬습니다. 정말 인도 중의 인도라고....별로 가보진 못했지만...
너무나 끔직하면서도 그것을 이해하는 그네들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것 또한 그들은 이미 삶에 녹아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