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제국사
콤네누스 왕조(1056~1185)
미카일 6세의 재위는 1년을 채우지 못했다. 1057년 봄 군부에서 황제를 폐위하고 군인 출신의 황제를 세우자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당연히 총사령관 이사키우스 콤네누스가 뽑혔고 소아시아의 군대가 1057년 6월 8일 그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 소식이 콘스탄티노플에 전해지자 원로원은 미카일 6세에게 황위 포기를 강요했고 미카일 6세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했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며 얼마 못 가서 세상을 하직했다.
이사키우스 콤네누스는 1057년 9월 1일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했는데 미카일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콘스탄티노플의 모든 주민들이 쏟아져 나와 그를 맞이했다. 그가 신이라도 되는 듯 횃불을 치켜든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의 머리 위로 향수를 뿌렸다. 모두들 자신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그를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예외 없이 모두들 이날을 축일로 여겼다.
도처에 춤과 환희가 넘쳤고 …… 나는 평생 그러한 화려한 축제를 본 적이 없었다. 그 행복한 무리에는 콘스탄티노플 주민과 원로원 의원, 농부, 상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학대학 학생, 산꼭대기에 사는 사람, 바위 무덤으로 들어간 은거자(隱居者), 공중에 사는 이들까지 참여했다. 암굴에서 나온 이, 공중에서 내려온 이, 높은 산에서 내려온 이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도시로 입성하는 황제의 행렬을 도저히 잊지 못할 장관으로 만들었다.
이사키우스는 즉시 완전 개각을 단행하여 그동안 문치 정책에 의해 밀려났던 군부 세력을 강화했다. 그는 마자르족의 침공을 저지하고 1059년 도나우 강을 건너 쳐들어온 남러시아 평원 출신의 유목민족 페체네그족을 섬멸하는 원정도 승리로 이끌어 제국의 아시아쪽과 유럽 쪽 국경을 성공저으로 지켰다. 그러나 원정에서 승리를 거둔 해 말에 사냥을 나갔다가 걸린 감기가 폐렴으로까지 진행되더니 그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이사키우스는 죽음을 앞두고 후계자를 결정해야 했는데 가장 유력한 후보는 그의 동생 요하네스였다. 그러나 군인 지주 귀족들이 자신들의 대표 콘스탄티누스 두카스를 새 황제로 세우도록 그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두카스가 1059년 11월 23일 콘스탄티누스 10세로 즉위했다. 황위에서 물러나 수도원으로 들어간 이사키우스는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사키우스가 죽자 그의 동생 요하네스 콤네누스는 아내 안나 달라세나와 여덟 자녀를 거느리고 은둔했다. 요하네스가 1067년경에 사망한 뒤 안나는 장군이 된 세 아들 마누엘, 이사키우스, 알렉시우스와 함께 두카스 가문으로부터 황권을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한편 콘스탄티누스 10세는 즉위 후 에우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와 재혼했는데 프셀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에우도키아는 “대단히 정력적이고 미모가 눈부신 여자”로 황제에게 일곱 자녀를 안겨주었다. 콘스탄티누스 10세는 황제로서는 너무도 무능했다.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외국 용병들을 고용하고 군사력을 소홀히 했으며 관료들이 이사키우스의 개혁 이전처럼 부패하도록 방치했다. 그 결과 정부와 군대가 심각하게 약화되었는데 이 시기에 비잔틴 제국은 강력한 새 적들의 부상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 족이 남이탈리아를 침공했고 페르시아를 정복한 셀주크 투르크족이 소아시아로 깊숙이 침투하여 그곳을 침략 거점으로 삼았다.
1066년은 하늘이 불타오르는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유명한데 후세에 이것은 핼리 혜성의 출현으로 밝혀졌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몰락의 징조처럼 보였다. 콘스탄티누스 10세는 중병에 걸렸고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아내 에우도키아를 후계자로, 16세의 아들 미카일을 공동 황제로 선언했다. 또한 동생인 카이사르 요하네스를 자신의 자녀들의 후견인으로 임명한 뒤 1067년 5월에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에우도키아는 황위에 올라 명목상의 공동 황제인 아들 미카일과 함께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가 가기 전에 그녀는 콘스탄티누스 10세에 의해 추방되었던 로마누스 디오게네스 장군과의 결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로마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자 1068년 1월1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고 같은 날 새 황제 로마누스 4세가 탄생했다.
로마누스는 즉시 제국의 군대를 개편하고 셀주크 투르크족을 물리치기 위해 1068년과 1069년에 원정을 떠났다. 1071년 여름, 그는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위해 야심만만하게 출정했으나 8월 26일 동 아나톨리아의 만지케르트에서 셀주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 참패하여 사실상 군대가 전멸당했다. 로마누스 4세는 알프 아르슬란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제국의 남동쪽 속주들을 양도하고 해마다 거금의 보상금을 바친다는 조건 아래 풀려났다. 그리고 바로 그해에 노르만족은 이탈리아에 남아 있던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모조리 점령했다.
만지케르트에서의 참패 소식이 콘스탄티노플에 전해지자 로마누스 4세가 돌아오기 전에 카이사르 요하네스 두카스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조카 미카일 두카스를 단독 황제로 선언하고 황후 에우도키아는 작고한 이사키우스의 제수 안나 달라세나와 함께 추방했다. 요하네스 크시필리누스 총대주교가 1071년 10월 24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새 황제 미카일 7세의 대관식을 집행했다.
한편 로마누스는 황권을 되찾기 위해 세력을 규합했지만 결국 체포되어 두 눈을 잃었다. 그리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가 1072년 8월 4일 숨을 거뒀다.
미카일 7세는 즉위 직후 그루지아의 왕 바그라트 4세의 딸 마르타 공주와 결혼했으며 마르타는 마리아로 개명했다. 그녀는 알라니족의 마리아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건 그녀가 알라니족 공주라는 잘못된 상식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아들 하나만을 얻었는데 이름은 콘스탄티누스였다. 미카일 7세는 1078년 봄 니케포루스 보티니아테스 장군에 의해 축출되었다. 목숨을 건진 미카일 7세는 수도가 되어 12년을 더 살았고 마리아는 그와의 결혼이 무효화된 상태에서 아들 콘스탄티누스와 함께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1078년 3월 24일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보티니아테스는 같은 날 하기아 소피아에서 니케포루스 3세로 태어났다.
니케포루스는 황위에 올랐을 때 이미 70 후반의 나이였다. 그는 무자식의 홀아비였기 떄문에 후계자를 갖기 위해 마리아에게 청혼했다. 마리아는 아들을 황제 자리에 앉히기 위해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혼 후 니케포루스가 콘스탄티누스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지 않자 그녀는 안나 달라세나의 아들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와 공모했다. 알렉시우스는 서유럽 영통의 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후 1078년 카이사르 요하네스 두카스의 손녀딸 이레네 두키나와 결혼하여 콤네누스 가문과 두카스 가문의 막강한 결합을 이루어낸 인물이었다.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1081년 황권을 거머쥐기 위한 행보를 시작했을 때 요하네스 두카스는 뒤에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그해 4월 1일 요하네스 두카스는 콘스탄티노플 성문을 지키는 독일 용병들을 매수하여 알렉시우스와 그의 군대를 통과시키도록 했고 그 덕에 알렉시우스는 빠르게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니케포루스는 폐위되어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바로 세상을 떠났다.
1081년 4월 4일 새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등극했다. 그때 그는 24살이었고 그의 아내 이레네는 15살이 채 안 된 나이였다. 그들은 아들 넷과 딸 다섯을 얻게 되는데 장녀 안나는 후에 부친의 재위기의 역사를 담은 <알렉시아스>를 저술한다. 그들의 장남은 요하네스 2세가 되는데 1088년에 태어나 4년 후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다.
알렉시우스는 황제가 되자 즉시 어머니 안나 달라세나를 아우구스타(여황제)의 서열에 올렸다. 안나 달라세나는 1100년까지 막후 실력자로 행세하다가 골든혼 위의 자신이 몸소 세운 성 구세주 판테포프테스(전지하신 그리스도) 교회 부속 수녀원으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알렉시우스는 제국이 사방으로 막강한 적들과 대치한 상황에서 통치를 시작했다. 그 시기쯤 소아시아를 거의 장악한 셀주크는 그곳에 롬 술탄국(수도는 이코니움인데 곧 코니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을 세워놓고 있었다. 한편 노르만 족은 이미 그리스를 침공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겠다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꿈은 1085년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이렇게 노르만족의 위협에서 벗어나기가 무섭게 발칸 반도에 새로운 적이 등장했고 알렉시우스는 페체네그족과 또 다른 투르크계 민족인 쿠만족의 침략을 저지해야만 했다. 1090년 페체네그족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을 때 바다에서는 스미르나의 투르크족 수장 차카의 함대가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비잔틴 해군은 ‘그리스의 불’로 투르크 함대를 격파하고 알렉시우스는 육지에서 페체네그군을 전멸시켰다.
알렉시우스는 1차 십자군 원정의 시작으로 다시금 위기에 직면했다. 1096년 말 서유럽의 거물급 영주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속속 도착했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부이용 출신의 고드프루아와 작고한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들인 타란토 출신의 보에몽이였다. 알렉시우스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밖에서 십자군과 전투를 벌인 후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고드푸르아와 보에몽을 설득했고 그들은 원래 비잔틴 제국에 속했던 땅을 탈환하면 제국에 돌려주기로 서약했다.
알렉시우스는 재위기의 마지막 20년을 소아시아 투르크족과의 전투로 보냈다. 그는 1118년 8월 15일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요하네스가 황위를 계승했다. 요하네스는 이미 헝가리 왕 라디슬라스의 딸 프리스카 공주와 결혼한 상태였으며 프리스카는 결혼 후 이레네로 개명했다. 이레네는 요하네스에게 아들 넷, 딸 넷을 안겨주었으며 쌍둥이도 한 쌍 있었다. 그녀가 1126년에 사망하자 요하네스는 그녀와 함께 세운 구세주 판토크라토르 교회 수도원에 묻었다.
요하네스 2세는 119년에 처음 출정하였으며 이오니아(그리스), 리디아(서부 아나톨리아), 팜필리아(소아시아 남부)에서 투르크 족을 몰아냈다. 그리고 1121년과 1122년에 페체네그족을 물리쳐 페체네그족 병사들로 황실군을 충원했다. 이 승리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페체네그의 날이라는 공휴일까지 만들어져 오래도록 기념되었다.
요하네스 2세는 1122년부터 1125년까지 베네치아를 상대로 또 싸웠고 1129년에는 헝가리의 스테파누스 2세를 물리쳤다. 또 1137년에서 1143년까지 라틴족에게서 안티오크를 재탈환하기 위한 일련의 전투를 벌였다. 그러던 중 사냥을 하다가 사고로 화살을 맞게 되었으며 1143년 4월 8일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 판토크라토르 교회의 아내 곁에 묻혔다. 그는 당대에 칼로얀니스(아름다운 요하네스)라고 불렸으며 연대기 작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콤네누스 가문 출신의 요하네스 2세는 비잔틴 황제 자리에 앉았던 이들 중 가장 훌륭했다.”고 썼다.
요하네스 2세의 아들 마누엘이 1143년 11월 28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마누엘의 첫 아내 이레네는 1160년에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에 마누엘은 안티오크 출신의 마리아와 재혼했는데 한 연대기 작가는 그녀에 대해 “당대의 가장 아름다운 공주”라고 칭했다. 8년 후 마리아는 아들 알렉시우스를 낳아 이미 자신의 질녀이며 정부인 테오도라에게서 사생아 아들을 두고 있던 마누엘에게 마침내 적출 후계자를 안겨주었다.
마누엘은 재위 첫 3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의 방비 강화에 힘써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여섯 번째 언덕 부분을 마누엘 콤네누스 성벽으로 알려진 새 성벽으로 대체했다. 또 보스포루스 입구의 아시아 쪽 해안에 있는 작은 섬을 요새화했는데 그곳은 현재 키즈 쿨레시(레안드로스의 탑)로 알려져 있다.
마누엘의 첫 전투 상대는 안티오크의 라틴족이었는데 그는 1144녀에 승리를 거두어 선황이 죽었을 때 라틴족에게 빼앗긴 킬리키아의 요새들을 되찾았다. 라틴족은 매우 약해져서 투르크족에 간단히 에데사(현재의 터키 우르파)를 빼앗기고 이로 인해 1146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가 2차 십자군을 소집하게 되었다.
십자군의 한 무리는 콘라드 왕의 지휘 아래 독일에서 출발하였고 또 한 무리는 루이 7세를 따라 프랑스에서 떠났는데 두 무리 다 성지로 가는 길에 콘스탄티노플을 경유할 예정이었다. 독일에서 출발한 십자군이 먼저 콘스탄티노플에 당도했고 비잔틴 사람들이 거세게 대항하자 그들은 해협을 거너 니코메디아로 갔다.
마누엘은 프랑스군과는 문제가 없었고 루이 왕을 궁전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되이 출신의 오도는 2차 십자군 원정을 기록한 연대기에서 루이 왕과 프랑스 기사들이 구경한 궁전과 다른 명소에 대해 소개하며 “콘스탄티노플은 명성도 높지만 실제로 그보다 많은 걸 갖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궁전과 하기아 소피아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빈곤층의 열악한 삶에 대한 놀라움도 표현했다.
도시 자체는 지저분하고 악취를 풍기며 여러 곳이 영구한 어둠으로 손상되어 있다. 부자들이 건물들로 거리에 그늘을 드리웠고 더럽고 어두운 곳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여행객들의 차지다. 그런 곳들에서 살인, 강도 따위의 어둠을 좋아하는 범죄들이 저질러진다. 더욱이 이 도시는 무법천지에다 귀족들은 다 부자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다 도둑이며 범죄가 법에 의해 처벌되지도, 만천하에 드러나지도 않기에 범죄자들은 두려움도, 수치심도 모른다. 이 도시는 모든 점에서 중도를 넘어선다. 다른 도시들보다 부도 월등히 앞서지만 악도 마찬가지다.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에 의하면 12세기의 콘스탄티노플은 폭력적인 도시로 주민들은 늘 폭동이나 반란을 일으킬 태세가 되어 있었다.
다른 도시의 군중들도 무질서를 즐기고 통제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시장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무질서하며 무분별함을 즐기고 삐딱한 행보를 보인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 관리되고 업종도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그곳의 정신은 변화무쌍하다고 말할 수 있다. 늘 최악의 것이 승리하고 신 포도들 중에서 잘 익은 포도를 발견하기가 어려운 법이므로 시장 주민들은 무슨 일을 벌이건 선의로, 합리적으로, 적절하게 행하지를 못한다. 말 한마디에도 폭동을 일으켜 물보다 더 파괴적인 존재가 되며 …… 따라서 그들은 변덕스럽고 진실하지 못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일을 하는 법이 없고 좋은 충고를 해줘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불리한 일들만을 한다. …… 또한 통치자들에 대한 무관심은 타고난 고질병이다. 그들은 자기들 손으로 행정장관을 뽑아놓고 1년도 못되어 그를 갈가리 찢어놓는다. 그들은 이성과 논리를 가지고 이런 행동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단순함과 무지함으로 이 일을 벌인다.
마누엘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제국의 영토를 되찾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기에 긴 재위기의 대부분을 전쟁과 협상으로 보냈다. 그는 서쪽으로는 노르만, 베네치아, 세르비아, 헝가리와 싸웠고 동쪽에서는 셀주크 투르크와 아르메니아를 상대했다.
비잔틴 제국이 베네치아와 갈등을 빚게 된 것은 1171년 3월 12일 마누엘 황제가 100년 가까이 골든혼 해안의 제노아인 거주 지역과 피사인 거주 지역에 인접한 한 지역을 차지하고 살아온 베네치아인 상인들을 추방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함대를 파견하여 그리스 해안과 섬들의 비잔틴 항구들을 공격하는 한편 비잔틴에 대항하기 위해 게르만, 노르만과 동맹을 맺었다. 결국 무장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마누엘의 남은 재위 기간 동안 비잔티움과 베네치아 사이의 외교, 통상 관계가 모두 단절되었다. 또한 동방 그리스정교회와 서방 라틴교회 사이의 분열도 가속화되어 로마 카톨릭을 믿는 유럽 국가들이 비잔티움을 분리주의자로 몰아 반대편에 섰고 비잔티움은 비잔티움대로 문명화된 지 얼마 안 되는 서방인들과 그들의 신생 통치자들을 경멸했다. 마누엘 황제 재위기에 콘스탄티노플에 정착한 피사인 후고 에테리아노는 당시 라틴(이탈리아, 프랑스, 노르만, 스페인) 사람들이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에서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고 썼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가증스런 라틴인들……우리의 소유물을 탐내고 우리 비잔틴인들을 말살시키려 한다. …… 그들과 우리 사이엔 증오라는 넓은 심연이 존재하며 서로 견해도 완전히 다르고 가는 길도 반대 방향이다.”라고 했다.
이렇듯 동방과 서방이 서로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마누엘 자신은 서방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서방의 기사들을 만나보고는 그들의 무용에 감탄했고 히포드롬에서 개최하는 마상 창시합에서 라틴인들을 물리치려고 애썼다. 궁정에서도 그리스인보다 라틴인을 우선시하여 비잔틴 사람들의 외국인 혐오를 가중시켰다.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인들은 서방 라틴인들을 멸시해서 고대 헬라스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찾았으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헬레네스라고 칭했다.
마누엘의 서방에 대한 마지막 외교 노력은 자신의 아들 알렉시우스를 프랑스 루이 7세의 딸 아네스 공주와 결혼시킨 것이다. 프랑스를 떠날 때 겨우 여덟 살이던 어린 공주는 1180년 3월 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열두 살의 알렉시우스와 결혼하면서 안나로 개명했다.
당시 마누엘은 병에 걸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있었으며 1180년 9월 24일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무덤 옆에는 1차 십자군 원정으로 해방된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가장 귀한 성물 중의 하나인 그리스도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져 눕혀진 곳이며 성모의 눈물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알려진 반암 석판이 놓였다.
마누엘의 뒤를 이어 알렉시우스가 황위에 올랐다. 당시 그가 겨우 열두 살이었기에 그의 어머니인 안티오크 출신의 마리아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마리아는 거의 대부분의 요직에 라틴인을 앉혔고 그로 인해 콘스탄티노플의 평민들과 그리스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땅에 떨어졌으며 ‘외국 여자’라는 빈정거림을 받았다. 결국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요하네스 2세의 조카 안드로니쿠스 콤네누스를 지지하게 되었다.
안드로니쿠스는 수려한 용모와 씩씩한 기상을 지닌 모험가로 전장에서 용맹을 떨쳐 명성을 얻었으나 모의를 꾸미다가 마누엘 황제에게 추방되었다. 마누엘 황제가 승하했을 때 안드로니쿠스는 65의 나이로 파플라고니아에 있는 저택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에 따르면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활기 차고 건강이 넘쳤다. “그의 몸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위엄 있는 모습에 기골이 장대했으며 얼굴은 청년 같았다. 그는 방탕하지도, 식탐을 부리지도 않았고 주정뱅이도 아니었으며 호메로스의 영웅들처럼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기에 눈에 띄게 건강했다.” 안드로니쿠스는 1182년 초봄에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하다가 보스포루스에 이르자 일단 멈추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군대를 들여보냈고 그 군대는 주민들과 연합하여 라틴인 대학살을 벌였다. 안드로니쿠스는 그 후에야 수도로 입성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황후 마리아는 재판에 회부되어 반역죄를 선고받았고 처음에는 수녀원에 유폐되었다가 나중에 비밀리에 익사당했다. 안드로니쿠스는 자신을 알렉시우스 2세의 섭정으로 선언한 뒤 1182년 9월 공동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알렉시우스 2세를 교살하고 황후 안나를 열세 살의 미망인으로 만들었다. 그해 말 안드로니쿠스는 나이차가 50년이나 나는 안나와 결혼하여 비잔틴 세계와 서유럽을 분개시켰다.
안드로니쿠스는 처음부터 공포정치를 실시하여 황권에 위협이 될 만한 존재는 모두 처형했다. 마침 이때 그리스를 침공한 노르만, 셀주크, 헝가리가 침략해 왔다. 노르만군은 1185년 여름 테살로니카를 점령한 뒤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해 왔다. 라틴인의 접근에 공황 상태에 빠진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도시를 방어할 준비를 하지 못한 안드로니쿠스를 비난했다. 그러자 안드로니쿠스는 반대파를 모조리 잡아들여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중에 콤네누스 가문의 먼 친척뻘 되는 이사키우스 앙겔루스가 도망쳐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하여 주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주민들은 그의 호소에 응했고 1185년 9월 12일 그는 이사키우스 2세로 즉위했다.
안드로니쿠스는 도망쳤으나 붙잡혀서 궁전의 탑에 갇혔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감옥에서 끌려나와 낙타 등에 거꾸로 태워져 시내를 한 바퀴 돈 후 히포드롬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사지를 잘리고 몸통을 난도질당했으며 그의 시신은 경기장 근처에서 며칠 동안 방치되어 부패하다가 마침내 바다에 던져졌다.안드로니쿠스의 죽음으로 한 세기 넘게 비잔틴 제국을 통치한 콤네누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안드로니쿠스의 손자들인 알렉시우스 콤네누스와 다비드 콤네누스가 트라브존(현재 터키 북동부 흑해 연안의 지방)에서 또 다른 비잔틴 왕조를 시작하면서 왕조의 혈통은 계속 이어졌으며 트라브존은 비록 단 몇 해이긴 하지만 비잔티움보다 더 오래 존속했다.
라틴 정복기(1185~1261)
이사키우스 2세 앙겔루스가 즉위했을 당시 노르만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키우스 2세는 1년 안에 침략자들을 물리쳐 도로 이탈리아로 돌아가도록 만들었고 노르만족은 이탈리아 반도 남쪽 끝과 시칠리아에 왕국을 세웠다.
이사키우스 2세는 황제가 되었을 때 딸 둘과 장차 알렉시우스 4세가 될 아들 하나를 둔 홀아비였다. 그의 딸 이레네는 1192년 시칠리아의 로제르 왕과 결혼했으나 식을 올리고 18개월 만에 남편을 잃었다. 그녀는 1197년 독일 황제 하인리히 6세의 동생인 슈바벤의 필리프와 재혼했다.
이사키우스는 홀아비의 몸이었기에 서유럽 왕가에서 배우자감을 물색했으며 헝가리의 벨라 3세가 사신을 보내오자 벨라 3세의 딸 마르가레트와의 결혼을 위한 협상을 벌였다. 그 협상이 성공리에 마무리되어 1186년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마르가레트 공주는 콘스탄티노플로 와서 이사키우스와 결혼하고 마리아로 개명했다.
이사키우스 2세는 즉위 2년 후 3차 십자군 원정에 대처해야 했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이끄는 독일군은 아무 사건 없이 콘스탄티노플을 통과했으며 다른 십자군들은 바닷길로 소아시아 남쪽 해안으로 갔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1190년 6울 10일 소아시아 남부에서 강을 건너다 익사하는 바람에 끝내 성지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한편 이사키우스 2세는 소아시아의 셀주크를 꼼짝 못하도록 묶어놓고 발칸 반도의 왈라키아(현재의 루마니아 남부 평원 지역), 불가르, 세르비아, 쿠만족과 싸웠다. 황실군이 1190년과 1194년 두 차례에 걸쳐 왈라키아와 불가르에 패하자 이사키우스 2세는 직접 전장으로 나섰다. 그러나 1195년 여름 그가 출정한 사이 그의 형 알렉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붙잡아 눈알을 뽑았다. 그후 이사키우스 2세는 아들 알렉시우스와 함께 궁전의 탑에 갇혔다. 그의 형은 하기아 소피아에서 알렉시우스 3세로 즉위했고 형수 에우프로시네는 황후가 되었다.
알렉시우스 3세는 재위 첫 5년 동안 몸소 몇 차례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소아시아의 셀주크나 발칸 반도의 왈라키아와 싸웠다. 1201년 왈라키아와의 전투에서 그는 감옥에 가두었던 조카 알렉시우스를 동반했다. 알렉시우스는 전장에서 도망쳐 슈바벤의 필리프와 결혼한 누이 이레네를 찾아갔으며 서유럽 국가들에 자신의 부친 이사키우스 2세가 황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서유럽에서는 1198년 1월 인노겐티우스 3세가 교황 자리를 승계했고 그해 8월 그는 4차 십자군 원정을 촉구했다. 1199년 11월 다수의 프랑스 귀족들이 십자군에 가담하면서 원정대의 주축이 결성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플랑드르의 보두앵 백작이었다. 프랑스 백작들의 대표단은 십자군을 수송할 배편을 구하기 위해 베네치아의 엔리코 단돌로 총독을 찾아갔다. 베네치아는 수송료를 정한 뒤 십자군이 원정 중에 정복을 통해 얻는 이익을 동등하게 나누다는 조건으로 군사를 가득 태운 전함 50척을 제공했다. 대표단이 돌아온 후 수아송에서 회의가 열렸고 몸페라토의 보니파키우스 후작이 십자군 원정 대장으로 선출되었다.
막상 십자군 지도자들이 이탈리아에서 병력을 모아보니 예상 인원의 3분의 1인 1만 1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베네치아에 약속한 수송료를 지불할 수 없었고 처음에는 원정 자체가 무산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단돌로 총독이 헝가리에 빼앗긴 달마치아(아드리아 해에 면한 현재의 크로아티아 지방)의 도시 자다르(현재 크로아티아 서쪽 달마치아 지방의 도시)를 되찾도록 도와주면 남은 수송료의 지불을 유예해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십자군 기사들은 그 제안에 응했고 1202년 9월 8일 총독의 갤리선이 이끄는 480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진 베네치아 함대가 자다르를 향해 출격했다.
베네치아 함대는 11월 10일에 자다르에 도착하여 공격을 시작했고 두 주 동안의 포위 공격 끝에 도시를 점령했다. 라틴군은 자다르의 수비대와 주민들을 해치진 않았지만 그곳에서 운반 가능한 것은 모조리 약탈하여 나누어 가졌다. 그러다 보니 에게 해를 항해하기엔 너무 추워져서 원정대는 자다르에서 겨울을 났다.
보니파키우스는 12월 중순에 자다르에서 십자군에 합류했다. 두 주 후 알렉시우스 앙겔루스의 서신을 지닌 사절이 도착했는데 그 서신에는 만일 십자군이 자신의 부친 이사키우스의 복위를 도와주면 그리스정교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키겠다는 약속이 들어 있었다. 또 십자군에 거금을 지불할 것이며 원정의 지체로 인해 발생되는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고도 했다. 십자군 지휘관들은 그 청을 수락했고 단돌로 총독 역시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리는 것에 합의했다.
1203년 6월 24일에 칼케돈에 닿은 라틴 함대는 해협의 아시아 쪽 해안에 상륙했다. 그들은 보스포루스를 건너 골든혼 입구에 쳐놓은 쇠사슬을 뚫고 골든혼의 요새 갈라타성을 쳤다. 그들은 배들로 다리를 만들어 골든혼을 건넌 뒤 성벽 바깥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 다음에 베네치아 함대가 항구 안쪽으로 들어가 골든혼을 따라 이어진 해안 성벽을 공격했다.
십자군은 열흘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 7월 17일에 골든혼의 해안 성벽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단돌로 총독은 베네치아 국기인 성 마르코 깃발을 앞에 펼치고 기함 뱃머리에 우뚝 서 있다가 성벽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자 부하들에게 자신을 물가에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해안 성벽의 성탑 25개를 빼앗았고 성벽 안쪽으로 불이 붙은 나무 막대기를 던져 아래쪽 동네 전체를 불태웠다.
알렉시우스 3세는 어둠이 내리자마자 금화 1만 개와 왕관 보석을 챙겨서 딸 이레네를 데리고 도망쳤다. 이날 밤 황제에게 버림받은 관료들은 궁전 탑에 갇힌 이사키우스 2세를 풀어주고 복위시켰다. 동이 트기 직전에 그들은 라틴군에게 전령을 보내 그런 사실을 알렸고 이사키우스 2세는 아들 알렉시우스가 십자군에게 한 약속을 지키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런 뒤 도시의 문을 열어 그의 아들 알렉시우스를 동반한 라틴군이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게 했다. 다음날 라틴군은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의 폭동을 피하기 위해 군대를 도시 바깥으로 철수시켰다. 이사키우스의 아들은 1203년 8월 1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부친과 함께 공동 황제로 임명되어 알렉시우스 4세로 탄생했다.
알렉시우스 4세는 날마다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라틴군과 술잔치를 벌이며 흥청거렸기에 콘스탄티노플 주미들 사이에서 인기가 땅에 떨어졌다. 게다가 라틴군도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점점 안달이 나서 교회들의 금붙이와 은붙이를 강탈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8월 19일에 폭동이 일어났고 폭도들이 라틴인 거주지를 공격하면서 지른 불이 하기아 소피아 현관을 태웠으며 이로 인해 주민들의 좌절과 분노는 더욱 커졌다.
콘스탄티노플의 귀족들 역시 주민들과 라틴군 못잖게 알렉시우스 4세에게 불만이 많았다. 알렉시우스 4세의 반대 세력의 우두머리는 알렉시우스 두카스 무르츠프루스(검은 눈썹)였다. 무르츠플루스는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의 고손자였고 그의 지지자들은 앙겔루스 가문 사람보다 그가 훨씬 더 황제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1204년 1월 하순, 주민들이 하기아 소피아에서 황제의 폐위를 주장하는 집회를 갖자 무르츠플루스는 겁에 질린 알렉시우스 4세에게 그를 죽이러 궁전으로 쳐들어오고 있는 폭도들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무르츠플루스는 알렉시우스를 궁전에서 몰래 빠져나가게 한 후 도시 바깥의 은신처에 감금했다. 그리고 1204년 2월 5일 알렉시우스 5세로 등극했다. 이 시기쯤 이사키우스 2세는 자연사하여 무르츠플루스가 제거해야 할 적수에서 제외되었다. 무르츠플루스는 갇혀 있는 알렉시우스 4세를 독살하려고 했으나 두 차례나 실패하자 목매달아 죽였다.
무르츠플루스는 전권을 장악하자 즉시 십자군에게 일주일 내로 자시의 영토를 떠나라는 전갈을 보냈다. 단돌로와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라틴군의 공격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할 준비를 시작했다.
1204년 4월 9일에 공격을 개시한 라틴군은 궁전 바깥의 육지 성벽을 공략했다. 그러나 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골든혼의 해안 성벽을 겨냥한 해상 공격 역시 남풍이 불어 배들이 해안에서 먼 바다 쪽으로 떠밀려 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들은 사흘 후 공격을 재개했는데 이번에는 그들에게 유리한 북풍이 불어 공격의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해안 성벽의 성문들이 열리자 말탄 기사들이 배에서 내려 도시 안으로 들어갔고 대병력이 운집했다. 독일인 백작 베르트홀트가 약탈을 하는 비잔틴 주민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몇 군데 불을 질렀는데 그 불길이 번져서 골든혼 해안의 건물들이 거의 파괴되었다. 그것이 콘스탄티노플에서 한 해 동안 일어난 세 번째 대화재였고 이 세 차례의 대화재로 콘스탄티노플의 건물 절반이 파괴되었다.
그날 밤 무르츠플루스는 지지자들을 모으려고 애썼지만 모두들 도망치거나 집에 숨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새벽이 밝아오기 전에 가족과 신하들을 데리고 도시를 빠져나가 알렉시우스 3세와 그의 지지자들이 숨어 있는 트라키아의 모시노폴리스로 갔다. 그러나 그를 적수로 여긴 알렉시우스 3세는 그의 눈을 멀게 하고 감금했다. 무르츠플루스는 그해에 라틴군에게 잡혀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었으며 테오도시우스 기둥 꼭대기에서 던져졌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라틴군은 사흘 동안 도시를 약탈하며 2,000명 가량의 그리스인을 죽였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의 기록을 보면 라틴군이 어떤 식으로 하기아 소피아를 약탈하고 모독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황폐화시켰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전 세계가 감탄한 예술 작품인 중앙 제단을 파괴하고 귀중품들을 나누어 가졌다. …… 또한 옥좌와 설교단에서 떼어낸 조각 장식이 된 금붙이와 은붙이, 신성한 그릇들을 운반하기 위해 말들과 노새들을 교회 안으로 끌고 왔다. …… 매춘부를 총대주교의 의자에 앉혀놓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욕적인 말을 던지게 했고 그 매춘부는 음란한 노래를 불러 신성한 장소를 모독했다. …… 정숙하고 순결한 아가씨들과 하느님께 자신을 바친 처녀들(아마 수녀를 의미함)에게까지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 거리의 집들과 교회들에서는 비명과 탄식 소리만이 들려왔다. …… 여기서는 약탈품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고 저기서는 사람들이 끌려가고, 도처에 강간당한 여자들과 부상당한 사람들 사이에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다.
라틴군은 1204년 5월 9일 저녁 황제를 선출하기 위해 모였는데 열두 명의 위원들 중 절반이 베네치아인이었다. 첫 번째 투표 결과 플랑드르의 보두앵이 9표, 몸페라토의 보니파키우스가 3표를 얻었다. 보니파키우스의 지지자들이 백기를 들고 보두앵 편에 섰고 다음 투표에서 보두앵은 만장일치로 황제로 선출되었다. 다음날 하기아 소피아에서 황제로 즉위한 보두앵은 궁전으로 들어갔다.
라틴인들은 '파르티티토 로마눔'으로 알려진 협약에 의해 제국을 분할하였으며 협약의 최종적인 세부 사항은 1204년 10월에 제창되었다. 협약에 다라 제국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라틴 황제가 4분의 1, 베네치아가 8분의 1, 그리고 나머지 십자군이 8분의 3을 가졌으며 각각의 몫은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땅과 콘스탄티노플에서 먼 땅으로 다시 나뉘었다. 그렇게 '로마인들의 왕국'이라는 뜻의 로마니아로 알려진 라틴 제국이 성립되었으며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8분의 3의 주인이자 전제군주'라 칭했던 단돌로 총독은 자신의 영토를 얼마 다스리지 못하고 1205년 3월에 죽어 하기아 소피아에 묻혔으며 그곳의 남쪽 회랑 바닥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석관 뚜껑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라틴 통치기에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콘스탄티노플의 많은 교회들이 로마 카톨릭 의례를 택하게 되었다.
보두앵 황제의 통치기 역시 짧아 그는 1205년 4월 14일 트라키아에서 불가르의 칼로얀 황제에게 패한 뒤 얼마 못 가서 불가르 감옥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보두앵의 동생 앙리가 섭정 노릇을 하다가 1206년 8월 20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대관식은 콘스탄티노플의 새 총대주교로 선출된 베네치아인 토마소 모로시니가 맡았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정교회 주교들 대부분은 모로시니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거나 비잔틴 제국의 망명 정부가 세워진 니케아로 도망쳤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세 군데에 비잔틴 국가가 생겨났는데 니케아 제국, 트라브존 공국, 에피루스 공국이 그것들이었다.
니케아 제국은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 테오도루스 1세 라스카리스에 의해 세워졌다. 테오도루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쳐 니케아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2년 후 그는 미카일 아우토레아누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하였고 미카일 총대주교는 니케아의 하기아 소피아에서 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그때부터 서부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은 니케아를 비잔틴 제국 망명정부의 수도로 여기게 되었다.
새 제국의 가장 당면한 위협은 룸 셀주크로 그곳의 술탄 기야스 앗딘 케이 쿠스라우 1세는 테오도루스의 장인 알렉시우스 3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었다. 룸 셀주크의 술탄은 1211년 알렉시우스 3세를 동반하고 니케아을 향해 진군해 왔다. 그러나 테오도루스는 그들을 물리치고 술탄을 죽였으며 알렉시우스 3세는 생포하여 니케아의 수도원에 평생 감금하였다.
뒤이은 반세기 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대여섯명의 무능한 라틴 통치자들이 연이어 황위에 오른 반면 니케아에서는 라스카리스 왕조가 뛰어난 통치력을 보이며 비잔틴 문화의 르네상스를 태동시켰다. 라스카리스 왕조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황제는 요하네스 4세로 1258년 8월 16일에 부친 테오도루스 2세가 서거했을 때 겨우 네 살 반이었다. 테오도루스 2세는 눈을 감기 직전에 게오르기오스 무잘란을 아들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9일 후 니케아의 귀족들은 무잘란을 암살하고 자신들의 대표인 미카일 팔라이올로구스 대공을 섭정 자리에 앉혔다. 석 달 후 팔라이올로구스는 전제군주로 임명되었고 12월 공동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 초 총대주교는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구스와 요하네스 4세 라스카리스의 대관식을 함께 거행했다. 팔라이올로구스가 먼저 관을 썼는데 모두들 그가 황제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린 요하네스 4세는 곧 공동 통치자의 포로나 마찬가지의 신세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듬해 미카일 8세는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라틴 연합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그리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되찾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은 베네치아 공화국을 빼고 모두 제거되었다. 미카일은 베네치아의 오랜 숙적이었던 제노바에 협조를 청했다. 1261년 3월 13일 님파이움에서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는 협조의 댓가로 제노바에 대대적인 상업적 특권을 제공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 탈환은 아주 우연하게, 용두사미처럼 이루어졌다. 1260년 8월 그리스인들과 라틴인들 사이에 1년간의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는데 이 휴전 기간이 끝나갈 무렵 미카일 8세는 알렉시우스 스트라테고풀루스에게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로 가서 콘스탄티노플의 동정을 살피도록 명령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셀림브리아 문에 닿은 스트라테고풀루스는 베네치아 함대 대부분이 라틴 수비대를 태우고 흑해 급습에 나서서 콘스탄티노플이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다는 첩보를 얻었다. 그는 야음을 틈타 콘스탄티노플로 접근했고 부하 몇 명을 성문 근처의 성벽 아래에 있는 비밀 통로를 통해 안으로 잠입시켰다. 그들은 성문 안쪽의 보초들을 덮친 뒤 경보가 울리기 전에 성문을 열어 아군을 들여보냈다.
이튿날인 1261년 7월 25일 아침, 스트라테고풀루스는 도시에 남아 있던 라틴군과 시가전을 벌인 후 도시를 장악했다. 궁전에서 자고 있다가 소란에 깬 보두앵 2세는 처소에 황제의 관과 홀을 둔채로 허둥지둥 항구의 베네치아 배에 올라 어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스트라테고풀루스는 그리스계 주민들의 권고에 따라 골든혼 해안의 베네치아인 거주지에 불을 놓았다.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라틴 함대의 베네치아인들은 자신들의 집과 창고가 화염에 휩싸여 있고 가족들이 한 연대기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연기에 쫓겨 나온 벌 떼처럼” 골든혼 해변에서 배회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족들을 갤리선에 태워 떠나는 것뿐이었고 그렇게 라틴인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막을 내렸다.
미카일 8세가 그 소식을 들은 건 300킬로미터 떨어진 그리스에서였는데 그는 즉시 막사를 걷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그는 8월 14일에 성벽에 도착하여 황금문으로의 입성을 성모 몽소 승천 축일인 다음 날로 미루었다. 이튿날 아침 시지쿠스의 총대주교 게오르기오스 켈리다스가 황금문의 탑들 중 하나에 올라가 호데게트리아(길의 인도자이신 성모) 성화를 달았다. 그런 다음 그는 큰소리로 기도문을 읆었고 황제와 수행원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보게 될 황제를 환영하러 나온 수많은 그리스인들은 무릎을 꿇었다. 기도가 끝나자 도시로 들어간 황제의 행렬은 먼저 세례 요한 교회에 들렀다가 하기아 소피아로 갔다. 그곳에서 황제는 아르세니우스 총대주교를 총대주교 자리로 안내했으며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가 그 광경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 황제는 총대주교에게 성당을 넘겨주기 위해 신성한 건물, 성 지혜의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곳에는 황제를 비롯하여 모든 명망있는 집정관들과 대중 전체가 모였다. 그러자 황제는 총대주교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가서 그대의 자리에 앉으시오. 너무도 오랫동안 빼앗겼던 그대의 자리를 즐기시오.”
그렇게 비잔틴 제국은 보스포루스의 옛 수도를 되찾고 그 유구한 역사의 마지막 두 세기의 발걸음을 떼었다.
르네상스와 내전
1261년 8월 15일 콘스탄티노플로 개선한 미카일 8세는 하기아 소피아에서 다시 대관식을 치렀고 그의 아내 테오도라 역시 다시 황후의 관을 썼다. 그 자리에서 그들의 두 살 된 아들 안드로니쿠스도 공동 황제이자 차기 황제로 임명되었다.
적통 황제인 열 살의 요하네스 4세 라스카리스는 미카일 8세가 니케아에 두고 와서 하기아 소피아의 대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몇 달 후 미카일 8세는 요하네스의 눈을 실명시키고 마르마라 해의 다키비제 요새에 가뒀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아르세니우스 총대주교는 미카일을 파문했다. 이에 미카일은 아르세니우스를 면직시켰지만 다음 총대주교 게르마누스 3세 역시 황제를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여 다시 요세프 2세로 총대주교를 바꿨다. 새 총대주교는 마침내 1267년 2월 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열린 미사에 황제를 받아들였다.
다시금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플은 반쯤은 방치된 황폐한 도시였다. 1204년의 약탈과 파괴 외에도 라틴 점령기에 일어난 네 차례의 대화재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미카일 8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재건과 재식민에 총력을 쏟느라 제국을 파산 직전으로 몰고 말았다. 그리하여 결국 병력과 상선의 규모를 줄이고 해상 무역을 제노바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는 제노바에 골든혼 건너 갈라타 지역의 영토를 주었고, 그곳에 제노바인의 자치적인 도시국가가 새워졌다. 제노바에서 해마다 파견되는 행정관이 그 도시국가를 통치했다. 또한 제노바는 북 보스포루스의 아시아 쪽 해안에 있는 비잔티움의 히에론 요새를 점령했는데 그곳의 인상적인 유적은 오늘날까지도 제노바 성으로 불리고 있다.
다른 이탈리아 국가들도 콘스탄티노플의 골든혼 해안에 영토를 분할받았다. 피사와 베네치아는 라틴 정복 이전에 양도했던 땅을 되찾았고 아말피와 안코나는 새 영토를 받았는데 예전에 가졌던 영토처럼 해아의 가느다란 띠 모양의 땅이었다.
되찾은 비잔틴 제국은 전성기 때 영토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사방으로 적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적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인 앙주 왕가의 샤를 1세로 그는 1267년에 비테르보에서 교황 클레멘트 4세를 만나 분리주의자 그리스인들의 손에서 콘스탄티노플을 되찾는 ‘성스러운 임무’에 헌신하겠노라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미카일은 남은 재위 기간 동안 샤를 1세와 그의 동맹 세력의 침략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1282년 봄 샤를은 오랫동안 별러온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나서기 위해 메시나(이탈리아 남부 시실리 섬의 항구도시)에서 함대를 집결했다. 그러나 그 해 3월 30일 팔레르모(이탈리아 남부 시실리 섬의 최대 도시) 시민들이 성령 교회에 모여 저녁기도를 올리던 중 갑자기 폭동을 일으켜 그곳의 프랑스인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시칠리아의 저녁기도’라고 불리게 된 그 폭동은 삽시간에 섬 전체로 퍼져 메시나 주민들이 앙주의 함대를 모조리 파괴하고 프랑스군을 섬에서 몰아냈다. 그리하여 샤를은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야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미카일 8세는 1282년 12월 11일 트라키아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아들 안드로니쿠스가 임종을 지켰으며 그는 최후의 유언으로 아들을 후계자로 임명했다. 새황제는 선황제의 장례를 치른 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하기아 소피아에서 안드로니쿠스 2세로 등극했다.
안드로니쿠스 2세는 황위에 올랐을 때 23살이었으며 20년을 공동 황제로 지낸 경력이 있었다. 그는 1272년에 헝가리의 안나와 결혼하여 두 아들 미카일과 콘스탄티누스를 얻은 상태였다. 그는 1294년 5월 21일 아들 미카일을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이듬해에 미카일 9세는 아르메니아의 리타 공주와 결혼했고 리타는 마리아로 개명했다. 마리아는 미카일에게 딸 둘, 아들 둘을 안겨주었으며 그중 맏아들은 장차 안드로니쿠스 3세가 된다.
1296년 여름에 일련의 지진이 발생하여 콘스탄티노플과 북서 소아시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마지막 지진이 끝난 지 일주일도 채 안된 7월 21일 베네치아 함대가 갈라타의 제노바인 거주지를 공격, 창고들에 불을 지르고 골든혼 해안 성벽 바깥의 그리스인 가옥들까지 불태웠다. 그에 대한 응징으로 안드로니쿠스 2세는 도시 안의 베네치아인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한편 제노바인들은 법을 무시하고 보복에 나서 1296년 12월 콘스탄티노플의 거물급 베네치아인들을 학살했다. 베네치아도 이듬해 여름 함대를 몰고 와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고 그동안 입은 손실에 대한 보상을 받은 뒤에야 돌아갔다. 미카일 8세의 경제정책으로 비잔틴 해군은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베네치아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 함대는 1302년 7월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고 안드로니쿠스 2세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베네치아 총독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는 순간 비잔틴군이 니코메디아에서 투르크군에 대패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 투르크군은 오스만 족장이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신앙의 용사’라는 뜻의 ‘가지’로, 그의 추종자들은 오스만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324년 오스만 가지가 세상을 떠날 때쯤 오스만군은 요새화된 도시들을 제외한 비티니아 전역을 장악한 상태였으며 그의 아들 오르한 가지 시대에 요새화된 도시들도 함락되었다.
제노바인들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1304년 갈라타를 둘러싸는 방어벽을 쌓았다. 이 방어벽의 거점은 지금은 갈라타 탑으로 알려진 거대한 그리스도 탑으로 1348년 항구 위의 언덕에 세워졌다. 그들은 갈라타에 교회도 여러 채 지었는데 그중 하나인 성 도메니쿠스와 파울루스 교회는 ‘아랍인들의 모스크’란 뜻의 아랍 자미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도움이 절실했던 안드로니쿠스 2세는 로제르 데 플로르가 이끄는 카탈루냐 동지회(주로 카탈루냐인으로 구성된 에스파냐 직업 용병들)을 고용했다. 6,500명 가량의 전사들로 구성된 카탈루냐 동지회가 그해 9월 가족들을 거느리고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카탈루냐 동지회는 처음엔 승리를 거뒀으나 투르크에게 빼앗은 땅을 이내 도로 빼앗겼다. 그러다 1305년 로제르 데 플로르가 안드로니쿠스 2세의 알라니족 용병에게 암살당하자 카탈루냐 동지회는 새 지도자를 선출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의 갈리폴리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안드로니쿠스 2세는 1316년 아들은 물론 손자의 황위 계승까지 공고히 하기 위해 손자 안드로니쿠스를 공동 황제이자 황위 계승 서열 2위로 임명했다. 당시 19세이던 안드로니쿠스 3세는 이듬해에 브룬스위크의 아델라이데 공주와 결혼했고 아델라이데는 이레네로 개명했다. 그러나 안드로니쿠스 3세는 아내에게 충실하지 않고 정부를 두었으며 그 정부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자 질투심에 불타올랐다. 그는 자객을 시켜 그 남자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수로 자신의 동생 마누엘 왕자를 죽이고 말았다. 그의 부친 미카일 9세는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1320년 10월 12일 테살로니카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진노한 안드로니쿠스 2세는 손자를 폐적시켰다. 이 사건은 결국 14세기의 남은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간 일련의 내전들 중 첫 번째 내전을 야기한다.
첫 내전은 1321년 부활절에 안드로니쿠스 3세가 아드리아노플로 가서 조부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오른팔은 어릴 적 친구였던 요하네스 칸타쿠제누스로 두 차례의 무장 휴전기를 거치면서 7년간 계속된 내전에서 그를 보좌했다. 이윽고 우위를 점한 안드로니쿠스 3세는 1328년 5월 23일 요하네스 칸타쿠제누스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했다. 손자는 할아버지를 폐위시키고 단독 황제에 올랐으며 할아버지를 특별히 예우하여 궁전에 머물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2년 후 수도원으로 보냈고 안드로니쿠스 2세는 1332년 2월 13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드로니쿠스 2세의 긴 재위기 동안 제국은 심각하게 쇠약해졌지만 학문과 예술 장려 정책에 힘입어 문화적으로는 번영하여 니케아의 라스카리스 왕조 때 싹튼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안드로니쿠스 3세는 단독 황제에 올랐을 때 나이가 31살이었다. 첫 부인 이레네는 1324년에 죽었고 하나뿐인 자식도 어려서 잃었다. 두 번째 부인인 사부아 출신의 안나가 1332년 6월 18일 그에게 아들을 안겨주었다. 니케포루스 그레고라스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는 장차 요하네스 5세로 등극할 아들의 출생을 라틴인 황후가 들여온 서유럽 방식으로 마상 창시합을 벌여 축하했다.
한편 오스만 투르크의 오르한은 1326년에 프루사(마르마라해 연안에서 30킬로미터 내륙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도시)를 정복했다. 그는 프루사를 부르사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첫 수도로 정했으며 그곳에서 술탄이란 칭호를 가졌다. 그렇게 시작된 오스만 황통은 6세기 가까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1329년 봄 투르크를 치기 위해 출정한 안드로니쿠스 3세는 요하네스 칸타쿠제누스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해협을 건너 비티니아로 들어갔으며 펠레카논에서 오르한의 군대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패했고 안드로니쿠스 3세는 다리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지만 칸타쿠제누스가 생존자들을 규합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펠레카논에서의 패배로 비잔틴 제국은 비티니아에 남아 있던 영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1331년 3월 2일 니케아도 오르한에게 넘어갔다. 니케아를 잃은 안드로니쿠스는 1333년 9월 투르크의 술탄과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안드로니쿠스 3세는 병석에 누운 지 얼마 안 되어 1341년 6월 15일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황위 계승에 위기가 닥쳤는데 그의 장자 요하네스는 겨우 9살인 데다 아직 공동 황제로 임명되지도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황후 아나와 요하네스 14세 칼레카스 총대주교는 요하네스 칸타쿠제누스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황제의 죽음으로 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투르크와 불가르가 제국의 영토를 침입했다. 1341년 9월 23일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트라키아로 출정하게 된 칸타쿠제누스는 보스포루스를 지킬 비잔틴 함대의 사령관으로 알렉시우스 아포카우쿠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아포카우쿠스는 그를 배신하고 총대주교와 황후에게 그가 황권을 노리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에 안나 황후는 칸타쿠제누스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칸타쿠제누스의 지지자 40명 정도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쳐 그의 막사로 갔으며 그곳에서 10월 26일에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역사가들은 비잔틴 황제들의 목록에서 요하네스 6세 칸타쿠제누스를 요하네스 5세 팔라이올로구스 다음으로 놓는다.
1341년 시작된 내전은 즉시 계급 간의 싸움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비잔틴 제국 역사에 기록된 다른 많은 내전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지주,귀족 계급은 칸타쿠제누스의 편에 선 반면 보통 시민들과 농노들은 요하네스 5세의 깃발 아래 섰다. 요하네스 6세 칸타쿠제누스는 <역사>라는 저서에서 내전의 참사를 이렇게 서술했다.
그것은 끔찍한 악성 질병처럼 퍼져 온건하고 양식 있는 사람들마저도 극단적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 도시 전체가 귀족에 대한 반란에 뛰어들었고 늦게 뛰어든 사람들은 앞선 이들보다 더 과격한 행동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했다. 그들은 온갖 잔인한 행위들을 자행했고 심지어 학살까지 했다. 무분별한 충동은 용맹으로 미화되었고 몰인정함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불렸다.
내전은 6년을 끌었는데 그동안 칸타쿠제누스는 오스만 투르크와 동맹을 맺고 자신의 딸 테오도라를 술탄 오르한에게 주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에서 칸타쿠제누스를 지지하는 일당이 1347년 2월 2일 밤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갈라진 틈으로 칸타쿠제누스와 그의 부하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날이 밝자 칸타쿠제누스는 궁전 주위에 군대를 집결시켰고 대중이 그를 지지하러 달려온다는 소문이 도시 전체에 퍼졌다. 안나 황후는 칸타쿠제누스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일주일 후 그는 요하네스 5세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었다.
요하네스 칸타쿠제누스는 1347년 5월 13일 콘스탄티노플의 신임 총대주교 이시도루스 1세의 손을 빌려 황제의 관을 썼다. 황위에 오른 그는 자신의 딸 헬레나를 겨우 15살 밖에 안 된 요하네스 5세와 결혼시켰다. 결혼식은 성모 교회에서 치러졌는데 하기아 소피아는 전 해에 중앙 돔이 절반이나 붕괴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어서였다. 콘스탄티노플이 긴 내전의 참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국고도 완전히 바닥이 난 터라 그 결혼식은 비잔틴 예식의 화려함을 결여하고 있었다. 황관의 보석까지도 안나 황후가 이들을 위한 돈을 마련하고자 베네치아의 전당포에 맡겨놓은 상태였다. 하기아 소피아의 보수를 위한 기금은 정교의 보호자임을 자처한 모스크바 대공 시메온이 내놓았다. 그러나 칸타쿠제누스는 그 돈을 투르크 용병을 사는 데 쓸 수밖에 없었고 결국 하기아 소피아의 복원은 추가로 기금을 마련한 1355년으로 미루어졌다.
칸타쿠제누스가 통치를 시작하기가 무섭게 콘스탄티노플은 끔찍한 대역병의 공격을 받았다. 1347년 크림에서 온 제노바인들의 배에서부터 퍼져 나간 이 대역병은 이듬해까지 기세를 떨치며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3분의 1의 목숨을 앗아갔다.
비잔틴 제국은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1348년부터 1352년까지 골든혼에서 벌인 해상 전쟁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비잔틴 함대를 갖추고 있었지만 1351년 2월 13일 제노바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출정했다가 갑작스러운 폭풍우를 만나 배들이 모조리 난파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은 이탈리아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지만 칸타쿠제누스는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침략을 저지하는 우호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한편 칸타쿠제누스는 자신의 두 아들을 속주들에 파견하여 통치하도록 했다. 큰아들 마테오는 서부 트라키아를, 마누엘은 펠레포네소스를 다스리게 되었다. 펠레폰네소스 속주는 모레아 공국으로 알려지게 되며 후에 비잔틴 제국의 최후의 전초기지 중 하나가 된다.
칸타쿠제누스는 1350년 테살로니카를 재탈환하자 요하네스 5세를 그곳의 통치자로 보냈다. 이로 인해 또다시 내전이 터져 4년을 끄는 사이 투르크가 헬레스폰트(다르다넬스 해협)를 건너 갈리폴리 반도를 점령했다. 마침내 요하네스 5세가 1354년 11월 29일 야음을 틈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면서 내전은 종식되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도시 전체로 퍼졌고 그는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궁전으로 향했다. 이틀 후 요하네스 5세와 요하네스 칸타쿠제누스가 만나 휴전에 합의했다. 칸타쿠제누스는 1354년 12월 10일 궁전에서 열린 의식에서 정식으로 황위를 포기했고 수도사가 되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요하네스 칸타쿠제누스는 그후 사반세기 이상을 더 살다가 1383년 88세로 죽었다. 그는 황위에서 물러나고 첫 3년 동안 당대의 연대기인 <역사>를 써냈는데 이 책은 비잔틴 제국이 쇠망 직전 마지막으로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던 14세기 전반기에 대한 비잔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역사>에서 칸타쿠제누스는 자신의 임관식을 회상하며 그때부터 비잔틴의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 사건으로 “일찍이 로마인들이 겪었던 최악의 내전이 일어나며 전쟁이 거의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비잔틴 제국은 이전의 위용의 희미한 그림자로 전락하고 말았기”때문이었다. 그는 이 글을 수도원에서 썼는데 그곳에는 아직도 반쯤 매몰된 잔재 사이로 수도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1354~1453)
요하네스 5세 팔라이올로구스는 1354년 12월 22세의 나이로 단독 황제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세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희망은 유럽의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원조를 얻어내는 것뿐임을 알았고 빠르게 전진해 오는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과의 동맹에 나섰다.
1355년 초 요하네스 5세는 누이 마리아를 제노바인 모험가 프란체스코 갈틸루시오와 결혼시키고 그에게 레스보스(그리스 동부 에게 해에 있는 섬들의 집단)의 수도 미틸레네를 하사했다. 황제는 그해에 제노바인들에게 키오스 섬(에게 해의 서부, 소아시아 반도에 인접한 초승달 모양의 섬)을 내주어 이후 그 섬은 주스티니아니 가문 무역상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1362년에 오르한이 세상을 뜨고 그의 아들 무라드 1세가 술탄 자리에 올랐다. 그 이듬해 무라드는 비잔틴을 유럽으로부터 차단했다. 그리고 9년 후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하여 이름을 에디르네로 바꾸고 새 수도로 삼았다.
한편 요하네스 5세는 교황에게 도움을 청하러 이탈리아로 갔다. 그동안 콘스탄티노플은 맏아들에게 맡겼는데 맏아들 안드로니쿠스 4세는 공동 황제였고 둘째 아들 마누엘은 테살로니카를 통치하고 있었다. 요하네스 5세는 1367년 10월 21일 로마에서 교황 우르반 5세를 만나 그리스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의 통합에 합의했다. 이에 교황은 서유럽의 군주들에게 요하네스 5세는 이제 로마 카톨릭 교인이 되었으니 원조를 얻을 자격을 갖추었다는 내용의 회칙을 보냈다. 로마를 떠난 요하네스 5세는 베네치아로 갔는데 비잔틴이 베네치아에 진 거액의 부채를 갚을 능력이 없어서 그곳에 억류되었다. 아들 마누엘이 달려와 부친이 풀려날 수 있도록 돈을 빌렸고 그 돈으로 첫 상환금을 낼 때까지 몸소 인질로 잡혀 있었다.
요하네스 5세는 1371년 10월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에 당도했다. 1년 후에는 술탄 무라드와 오스만 투르크의 종주권을 승인하는 협정을 맺었다. 1373년 초 그는 소아시아에서 술탄 무라드의 봉신(封臣)으로 전투에 참여했고, 이에 대해 교황은 그가 카톨릭 군주가 되었는데도 이교도와 ‘사악한 동맹’을 맺을 만큼 타락했다고 비난했다.
요하네스 5세는 이 전투를 위해 떠나면서 다시금 안드로니쿠스 4세에게 콘스탄티노플을 맡겼다. 안드로니쿠스는 이 기회를 틈타 1373년 5월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요하네스 5세는 아들의 반란을 즉시 진압했다. 이 사건은 1391년 2월 16일 요하네스 5세가 죽음을 맞을 때까지 이어진 일련의 내전의 신호탄이 되었다. 안드로니쿠스 4세는 부친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요하네스 7세가 여섯 달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기도 했으나 요하네스 5세의 둘째 아들 마누엘 2세가 1391년에 조카를 몰아내고 단독 황제에 올랐다.
마누엘 2세는 세르비아 공주 헬레나 드라가스와 결혼한 다음 날인 1392년 2월 11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스몰렌스크 출신의 러시아인 순례자 이그나티우스가 그의 대관식을 목격했는데 동이 트기도 전에 하기아 소피아에 도착했지만 교회 안은 이미 그곳에서 꼬박 밤을 샌 숭배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곳엔 수많은 군중이 운집해 있었으며 남자들은 교회 안에, 여자들은 회랑에 있었다. 장치도 매우 교묘하여 여자들을 비단 휘장 뒤에 세워 남자 신도에게는 아름답게 꾸민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구경할 것은 모두 구경하게 했다. 성가대가 근사한 예복 차림으로 서 있었느데 …… 일부는 능라 옷을, 나머지는 비단 옷을 입었고 어깨에 금몰이 달려 있었으며 머리에 쓴 뾰족한 모자에도 금몰이 달려 있었다. …… 갈라타에서 온 프랑크인(유럽인), 콘스탄티노플 주민, 제노바인, 베네치아인이 있었다.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두 패로 나뉘어 서 있었고 일부는 자주색 벨벳 예복을, 나머지는 선홍색 벨벳 예복을 입고 있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어서 황제의 행렬에 대해서도 썼는데 새벽에 황제가 회랑을 지나 황제의 문을 통해 본당으로 들어섰고 그동안 “성가대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진기한 노래를 불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쇠사슬 갑옷으로 무장한 열두 명의 병사들이 양쪽에서 황제를 호위했고 그들 앞에는 붉은색 지팡이를 들고 붉은색 옷을 입고 붉은색 모자를 쓴 검은 머리의 기수 둘이 걸었다. 그리고 은을 씌운 지팡이를 든 의전관들이 기수들 앞에서 걸었다. 황제는 자주색 옷을 입고 카이사르의 관을 쓰고 있었다. 그는 황후를 옥좌로 에스코트했다. 황제와 황후가 옥좌에 앉자 식이 시작되었다.
한편 술탄 무라드가 이끄는 투르크는 거듭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무슬림은 물론 기독교인 보충병들까지 뽑아 날로 강해져가고 있었다. 1389년 초 무라드는 라자르 왕자가 투르크에 대항하는 연합군을 결성한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나섰다. 양쪽 군대는 1389년 6월 15일 코소보 평원에서 만났고 투르크는 기독교 연합군을 무참히 학살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무라드는 승리의 순간에 목숨을 잃었고 그의 아들 바예지드 1세가 지휘권을 이어받아 라자르와 나머지 세르비아 귀족들을 모조리 죽였다.
새 술탄은 군대를 이끌고 유럽 쪽 국경과 아시아 쪽 국경 사이를 번개같이 오간다고 하여 일디림(번개)이라고 불렸다. 바예지드는 아시아 원정을 통해 아이딘, 사루한, 센테세의 공국들을 정복했고 유럽에서는 부친의 점령지들을 통합했다.
그때쯤엔 오스만 투르크가 소아시아에 남아 있던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모두 점령하였고 마누엘 황제는 술탄의 봉신(封臣)으로서 해마다 배상금을 바쳐야 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바예지드는 마누엘에게 성벽 안쪽에 대한 통치권만을 허락하면서 성벽 밖의 영토는 술탄의 소유라고 주장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내에 투르크인 거주지를 만들게 했고, 그곳에서 이슬람인들은 자체적으로 카디(이슬람범에 의거해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를 둘 수 있었다. 이제 비잔틴 제국은 거의 콘스탄티노플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마저 1394년 초 바예지드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급속한 부상은 유럽의 기독교 세력을 놀라고 겁에 질리게 만들었으며 이윽고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가 투르크에 대항하는 십자군 원정을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1396년 7월 부다(도나우 강 우안, 오늘날의 부다페스트)에서 지기스문트의 깃발 아래 헝가리, 왈라키아, 프랑스, 독일, 폴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으로부터 파견된 10만 명에 육박하는 기독교 군대가 집결했고 한편 바다에서는 제노바, 베네치아, 로도스 기사단에서 보낸 연합 함대가 해협과 흑해 연안을 순시했다. 십자군은 도나우 계곡을 따라 니코폴리스로 내려가 투르크에 점령된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나 바예지드가 그곳으로 달려와서 1396년 9월 25일 십자군을 완전히 패주시켰다.
바예지드는 승리를 거둔 후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이듬해에 그는 보스포루스 해협 병목 구간의 아시아 쪽 해안에 아나돌루 히사르라는 요새를 지어 흑해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는 곡물 공급로를 차단했다.
마누엘은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 자신의 포위된 도시에 대한 원조를 요청했다. 이에 프랑스의 샤를 6세가 부시코 사령관이 이끄는 원정대를 파견했으며 1399년 여름 1,200명의 병력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부시코 사령관은 투르크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구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함을 바로 깨닫고는 마누엘 황제에게 자신과 함께 프랑스로 가서 샤를 왕에게 직접 상황을 알리자고 권고했다. 마누엘은 서유럽 순방에 나서 파리에서 샤를 6세를 만난 뒤 헨리 4세를 만나러 런던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동방에서 온 위대한 기독교인 군주’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희망에 부풀어 순방길에 올랐던 마누엘은 현실적으로 원조를 받기가 어려움을 깨닫게 되었다. 서유럽의 왕들은 모두 제 코가 석 자라 십자군 원정에 나설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 시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5분의 1도 못 되었으며 많은 건물들이 방치되고 폐허가 된 상태였다. 1400년 사마르칸트(중앙 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도시)의 티무르 제국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콘스탄티노플에 들르게 된 스페인 여행가 루이 곤살레스 데 클라비호는 자신이 목격한 콘스탄티노플에 대해 “도처에 위대한 궁전들과 교회들, 수도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쇠락하기 전의 콘스탄티노플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수도 중 하나였을 것임에 분명하다.”고 썼다.
1402년 봄, 티무르가 이끄는 군대가 소아시를 침략하자 바예지드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포위를 풀고 그곳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양쪽 군대는 1402년 7월 28일 앙카라(아나톨리아 중심부에 위치한 현재 터키의 수도) 근처에서 대결했고 티무르군이 오스만 투르크와 그 기독교 봉국들을 물리쳤다. 바예지드는 티무르에게 생포되어 곧 세상을 하직했다. 그리하여 바예지드의 생존한 네 아들 쉴레이만, 무사, 이사, 메메드 사이에 11년에 걸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고 그 덕에 콘스탄티노플은 생각지도 못했던 휴식기를 누렸다. 마침내 메메드가 세 형제를 죽이고 승리자가 되었으며 그는 비잔티움의 도움을 받아 1413년 술탄 자리에 올랐다.
메메드 1세는 1421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무라드 2세가 17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이듬해에 무라드 2세는 테살로니카와 콘스탄티노플을 치기 위해 출정했고 콘스탄티노플의 포위 공격을 몸소 지휘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지 못하고 1422년 9월 6일 포위를 풀었다.
1422년 10월 1일 마누엘 황제가 치명적인 졸증을 일으켜 그의 아들 요하네스가 섭정으로서 정사를 돌보게 되었다. 마누엘은 1425년 7월 21일 75세의 나이로, 34년간의 통치를 마감하고 세상을 떴다. 그의 장례식에서 추도연설을 한 트라브존의 베사리온은 후에 니케아의 대주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추기경 자리에까지 올랐다.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스프란체스는 마누엘의 장례식에 대해 “역대 어느 황제의 장례식에서도 볼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애도 행렬이었다.”고 썼다.
요하네스 8세는 32살의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의 첫 번째 부인 소피아는 모스크바 공국의 바실리 1세의 딸이었으며 1418년 역병으로 죽었다. 요하네스 8세는 1421년에 몸페라토의 소피아와 재혼했으나 그녀를 몹시 혐오해서 그녀는 1426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쳐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그는 트라브존의 알렉시우스 4세의 딸인 아름다운 마리아 콤네나와 다시 결혼했다. 그러나 세 번이나 결혼했는데도 자식을 얻지 못하여 비잔틴 제국은 말기에까지 황위 계승의 위기를 겪었다.
테살로니카는 1430년 3월 29일 마침내 투르크에 함락되었고 7,000명 가량의 주민들이 노예로 끌려갔다. 이에 요하네스 8세는 서방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고 교황 마르티누스 5세에게 그리스 정교회와 라틴 교회의 화해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1438년에 페라라에서 교황 에우게니우스가 주최하는 공의회가 열렸고 이듬해에는 피렌체로 장소를 옮겼다. 비잔티움에서는 요하네스 8세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세프 2세가 대표로 참가했다. 1439년 7월 5일 일요일, 마침내 그리스 정교회와 라틴 교회가 교황의 보호 아래 통합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교황 에우게니우스는 투르크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구하기 위한 십자군을 소집할 준비에 들어갔다.
요하네스 8세는 1440년 2월까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사랑하는 마리아가 1439년에 역병으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한편 공의회의 조약에 서명했던 일부 성직자들이 이듬해에 성명을 발표하고 자신들의 결정을 철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셀림브리아를 통치하던 요하네스 8세의 동생 드미트리에가 이 사태를 이용하여 정교회의 옹호자임을 자처하며 황위 찬탈을 꾀했다. 그는 투르크의 원조를 얻어 1442년 여름 콘스탄티노플을 치기 위한 원정에 올랐다. 그러나 모레아를 통치하던 다른 형제 콘스탄티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달려와 반란을 진압하고 요하네스 8세를 지켜주었다.
한편 교황의 십자군 소집으로 폴란드와 헝가리의 왕 라슬로 3세와 그의 장군 야노슈 후니아디의 깃발 아래 육군이 결성되었고 교황과 부르고뉴 공작, 베네치아 총독이 해군을 파병했다. 1444년 6월에 십자군이 출정할 때 술탄 무라드는 소아시아에 있었지만 즉시 군대를 이끌고 달려와 5개월 후 불가리아의 흑해 연안에 있는 바르나에서 십자군과 대치했다. 1444년 11월 10일 그곳에서 무라드의 군대는 십자군을 전멸시키다시피 했고 야노슈 후니아디 장군을 포함한 극히 일부만 피신했다.
바르나 전투 직후 술탄 무라드는 13세 밖에 안 된 아들 메메드에게 술탄 자리를 넘겼다. 그러나 아들이 너무 어리고 미숙하여 1446년 9월 도로 집권하면서 아들을 마니사(아시아권 터키의 서쪽 끝)의 통치자로 보냈다.
한편 야노슈 후니아디는 군사를 모은 뒤 알바니아의 반란군 지도자 스칸데르베그와 힘을 합쳐 투르크에 대항했다. 무라드는 1389년 세르비아군과 싸워 이긴 적이 있는 코소보에서 후니아디의 군대와 맞붙었다. 1448년 10월 17일부터 20일까지 이어진 코소보에서의 두 번째 전투 역시 투르크가 기독교 군대를 물리쳤다.
요하네스 8세는 1448년 10월 31일에 죽어 황후 마리아와 선황 마누엘 2세 곁에 묻혔다. 그에겐 세 동생 콘스탄티누스, 드미트리에, 토마스가 있었고 어머니 헬레나 드라가스 역시 생존해 있었다. 남은 세 형제 중 맏이인 콘스탄티누스는 어머니의 처녀 적 성을 물려받아 그리스식 성 드라가세스를 썼다. 요하네스 8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콘스탄티누스와 토마스는 모레아 공국의 수도 미스트라에, 드미트리에는 셀림브리아에 있었다. 드미트리에는 형의 죽음에 대해 듣자마자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모후 헬레나는 콘스탄티누스를 황위 계승자로 결정하고 있었기에 드미트리에가 권력을 잡는 것을 막고 자신이 섭정 노릇을 했다. 그녀는 미스트라로 전령을 보내 콘스탄티누스에게 황위 계승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소식을 접한 뒤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는 대관식을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미스트라에서 치르기로 결정했고 1449년 1월 6일 콘스탄티누스 11세로 즉위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황제로 즉위했을 때 44세였다. 그는 첫 부인 막달레나 토코가 1429년에 사망하자 도리노 가틸루시오와 재혼했지만 그녀 역시 144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두 부인에게서 후사를 얻지 못하여 황제가 된 후 왕가와의 결혼을 추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대관식이 끝난 뒤 모레아 공국을 둘로 쪼개어 토마스에게는 아카이아를, 드미트리에에게는 미스트라를 통치하게 했다. 그리고 미스트라를 떠나 1449년 3월 12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당도했다. 그는 즉시 술탄 무라드에게 사신을 보내 인사를 전하고 평화협정을 제안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성직자와 주민들이 동서 교회의 통합에 완강히 반대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방의 원조가 절실하다고 믿었기에 양 교회의 통합을 지지했다. 반대 세력의 우두머리는 게오리기오스 스콜라리우스로 1450년 관직에서 물러나 수도사가 되어 겐나디우스로 개명했다. 총대주교 그레고리우스 3세 맘메스는 황제의 뜻을 받들면서 동시에 교회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겐나디우스를 비롯한 반대파가 말과 글을 통해 거세게 대항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451년 8월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로마로 갔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술탄 무라드 2세는 1451년 2월 3일 에디르네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大) 와지르(총리) 찬다를리 할릴은 메메드 왕자가 에디르네로 와서 왕권을 잡을 때까지 그의 죽음을 비밀로 붙였다. 메메드는 1451년 2월 18일 에디르네에 도착했고 그날로 군대에 의해 술탄 메메드 2세로 추대되었다.
메메드 2세는 술탄이 된 즉시 콘스탄티노플 정복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 첫 단계는 보스포루스의 유럽 쪽 해안, 아나돌루 히사르 건너편에 루멜리 히사르라는 요새를 세우는 것이었다. 1452년 8월에 완성된 그 요새는 콘스탄티노플을 흑해로부터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유럽으로부터 원조를 얻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교황 니콜라스 5세는 키예프의 이시도레 추기경을 콘스탄티노플에 교황사절로 파견했다. 200명의 나폴리 궁수들도 함께 보냈는데 그들은 1452년 10월 26일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이시도레는 황제에게 동서 교회의 통합을 공식적으로 선언할 것을 촉구했고 그해 12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황제는 공식적으로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주민 대부분은 교회 통합에 반대했기에 하기아 소피아를 멀리했다.
그해 겨우내 콘스탄티누스는 투르크의 임박한 포위공격에 몸이 달아 식량과 군수품을 비축하고 주민들을 동원하여 성벽을 보수했다. 그는 도시 안의 몸 성한 남자들의 수를 조사하게 했는데 그리스인을 돕겠다고 자원한 베네치아인과 제노바인을 모두 합쳐도 7,000명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한 수치는 15세기 상반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인구가 얼마나 감소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데 몰락해 가는 도시를 떠나 유럽으로 간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이다. 외부의 원군이라곤 제노바에서 보낸 지오반니 주스티니아니 롱기가 이끄는 700명의 파병대뿐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방어에 투입되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는 베네치아인들은 황제에게 자신들의 함대를 내주었다.
메메드는 1453년 초봄 전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출격했고 선발대가 4월 2일 부활절 월요일에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보이는 지점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사흘 후 메메드가 나머지 군사들과 함께 도착했는데 8만에 이르는 병력이었다. 메메드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중간쯤에 있는 성 로마누스 성문이 보이는 곳에 지휘본부를 차렸다. 그 다음 포대를 배치했는데 그의 포대의 자랑은 500킬로그램 무게의 포탄을 1.5킬로미터 지점까지 쏘아 보낼 수 있는 ‘우르반’이라는 거대한 대포였다. 4월 6일 첫 포격이 시작되어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우르반의 거대한 대포알이 콘스탄티노플의 육지 성벽을 부수었다. 그러나 밤마다 주민들이 황제의 격려를 받으며 손상된 성벽을 복구했다.
투르크 함대는 골든혼 입구에 쳐놓은 쇠사슬을 돌파하려다가 격퇴당했다. 그러다 4월 18일 투르크 보병대가 성벽의 가장 피해가 큰 부분을 기습공격했다. 그러나 투르크군의 사나움가 파괴 정도가 심한 성벽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 공격 또한 저지되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제노바와 시칠리아에서 보낸 보급물자를 실은 배 네 척이 골든혼 입구를 지키고 있는 투르크 전함들을 피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것이 콘스탄티노플이 받은 마지막 원조가 되었다. 골든혼 입구의 쇠사슬을 뚫지 못하던 투르크군이 4월 22일 전함들을 육지로 끌어올려 페라 언덕을 넘어 골든혼 안쪽으로 들어와 항구를 장악한 것이다.
메메드는 5월 27일 일요일까지 포격을 계속하다가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항복하면 콘스탄티누스에게는 투르크의 속국 하나를 떼어주고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에게도 ‘자비’를 베풀겠으나 끝까지 버티면 철저히 응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그 제안을 거절하자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함락에 성공하면 사흘간 도시를 마음껏 약탈할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군사들에게 약속했다.
콘스탄티누스도 다음 날 투르크의 공격을 막기 위한 최후의 준비를 했다. 도시 안의 교회들에서 성유물들을 모두 들고 나와 수세기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었던 성모 호데게트리아와 블라케르니오티사의 성상을 앞세워 행렬을 벌이게 했다.
그날 저녁 성벽 보수에 나선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주민들이 하기아 소피아에 모여 자신들의 도시를 구해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황제 자신도 자정 직전에 그리스인과 이탈리아인 기사들을 거느리고 하기아 소피아를 찾았는데 제단 앞에 엎드려 한참 동안 완전한 침묵 속에서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러곤 친구인 게오르기오스 스프란체스와 함께 궁전으로 갔다. 스프란체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가족들을 모아놓고 한 사람씩 차례로 작별인사를 한 후 자신이 혹 잘못한 게 있다면 용서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프란체스는 이어 이렇게 적고 있다. “궁전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과 한숨을 그 누가 글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아무리 목석같은 인간이라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와 스프란체스는 궁전을 나와 말을 타고 성문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말을 내렸고 콘스탄티누스는 스프란체스를 그곳에 세워두고 근처에 있는 탑으로 올라가 최후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투르크군의 무시무시한 함성을 듣고 나서 탑에서 내려와 다시 말 등에 올랐다. 그리고 스프란체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황제가 지휘 본부가 있는 성 로마누스 성문 근처의 성벽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밤새 투르크 공병대는 주 공격이 이루어질 성벽 앞의 해자를 메우는 작업을 했다. 5월 29일 화요일 새벽 2시경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메메드는 공격 개시 신호를 보냈다. 첫 공격은 비정규군 기습부대가 맡았는데 그들은 북소리에 맞추어 거친 함성을 올리며 돌격했다. 콘스탄티노플 안의 성탑들의 보초병들이 그 소리를 듣고 도시 안의 교회의 종들을 일제히 울려 주민들에게 위험을 알렸다. 한편 투르크 기습부대는 해자를 건너 성벽에 사다리들을 걸치고 기어 올라갔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투르크군과 그들을 저지하는 비잔틴군의 치열한 싸움이 두 시간 넘게 이어진 후 기습부대는 후퇴했는데 비잔틴군 역시 그들의 끈질긴 공격을 막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메메드는 2단계로 아샤크 파샤가 이끄는 아나톨리아 보병대를 내보냈는데 그들은 지축을 뒤흔드는 포격 소리와 함께 진격했다. 동트기 한 시간 전에 거포 우르반이 성벽을 명중시켜 커다란 구멍을 뚫었고 그 구멍으로 300명 가량의 투르크 보병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끄는 비잔틴군에 바로 포위되어 모두 학살당했다. 이에 공격의 예봉이 꺾인 아샤크 파샤는 보병대를 이끌고 철수했다.
다음 단계로 술탄은 투르크군의 정예부대 예니체리를 출격시켰다. 예니체리 부대는 단숨에 안쪽 성벽까지 뚫고 들어가 그곳에서 비잔틴군과 육박전을 벌였다. 예니체리 부대의 한 무리가 ‘케르고포르타’라는 이름의 비상문을 통과하여 성탑을 점거하고 초승달이 그려진 투르크 깃발을 휘날렸다. 그 순간 주스티니아니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에게로 급히 달려가 자리를 지켜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주스티니아니는 자리에 남아 있을 상태가 못 되어 골든혼에 있는 제노바의 배로 옮겨졌다.
술탄은 다음 공격을 명했고 울루바틀리 하산이라는 거구의 예니체리가 이끄는 부대가 선봉에 섰다. 하산은 안쪽 성벽을 오르다가 비잔틴군의 공격에 쓰러졌고 그의 부하들은 도시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성탑 위에서 투르크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본 투르크군은 도시가 함락되었다고 외쳤고 비잔틴군이 허둥대는 틈을 노려 성벽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적군의 홍수를 막으려 애썼으며 충성스러운 동지 요하네스 달마타와 함께 지휘본부에서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황제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이 지금의 베파 지구에 몰래 묻어주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적군에 포위된 채 저항을 계속하던 비잔티움군은 오전이 끝나기 전에 완전히 소탕되었고 살아남은 이탈리아군은 그리스인들이 비운의 종말을 맞도록 방치하고 베네치아의 배로 피신했다. 술탄 메메드는 이제 자신의 소유가 된 건물들을 파괴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으로 병사들에게 사흘간의 약탈을 허용했다. 그러나 당대의 기록에 의하면 투르크군은 약탈과 노예화, 강간, 학살의 과정에서 도시를 심각하게 파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의 많은 연대기 작가들이 투르크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의 참상에 대해 썼는데 그중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은 임브로스(에게 해에 있는 섬으로 현재 터키 령이며 괴크체아다 섬으로 불린다.) 출신의 크리토볼로스의 것으로 4,000명 가량의 콘스탄티노플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크리토볼로스는 술탄 메메드가 자신이 정복한 위대한 도시에 입성하면서 도처의 파괴 현장을 보며 충격을 받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해 놓았다.
술탄은 도시로 들어가 그 거대한 규모와 위치, 그 장대함과 아름다움, 그 넘치는 인구, 그 매력, 교회들과 공공건물들의 화려함을 목도했고 …… 무수한 주민들이 목숨을 잃고 도시가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보고 연민에 가득 차서 파괴와 약탈을 꽤 후회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깊고 뜨겁게 탄식했다. “이런 위대한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하다니!”
같은 날 술탄은 궁전을 살펴보았다. 정복자는 폐허가 된 궁전의 복도를 걸으면서 깊은 슬픔에 잠겼다. 한 투르크인 연대기 작가에 의하면 그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페르시아 시인 사디의 우울한 이행시를 읆었다고 한다.
황제들의 궁전에서 거미가 커튼집게 노릇을 하네.
아프라시암 성탑 위에서 올빼미가 야경꾼 노릇을 하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소식이 서방에 처음 전해진 것은 1453년 6월 9일 크레타의 배가 칸디아(현재 크레타 헤라클리온)에 정박했을 때이다. 크레타 중부 아가라토스 수도원의 필경사는 그 소식을 듣고 문서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사건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참담한 심경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슬퍼하는 내용의 그리스 민요들에 아직도 남아 있으며 <하기아 소피아에서의 마지막 미사>라는 만가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붕괴된 성벽 위에서 유다나무들이 지금처럼 활짝 꽃을 피우고 있는 사이에 이 위대한 도시는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땅에 또 하나의 제국의 자취가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