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님(이룻)님의 자전 소설(自傳小說) '노을을 품고 흐르는 강'
書評
이 작품은 영특하면서도 지혜롭고 의지력 강한 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다룬 다소 페이소스적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으로 만출(娩出) 될 때 유독 울음소리가 커서
한 자락 휘두를 인물을 예견했듯, 작품 속 화자의 세상살이는 치열하고 지난했다.
어릴 적 해방을 맞고 6.25 전쟁을 겪고 학생운동으로 군부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여인은 소용돌이치는 한 집안의 역사와 나라의 역사를 진술하듯 차분히
기록한다.
21세기를 맞은 현재,
팔순이 되신 저자는 현직에서 물러나 삶의 안정과 환희를 느끼지만,
인생의 종점 부근에 닿았다는 엄연한 사실에 깊은 딜레마에 빠진다.
작품 속,
민족주의자 조부는 국군에 의해 총살되고,인민군에 부역한 부친은
감옥살이와 방황,
오빠는 공비들로 들끓는 산속으로 잠적되고 '
고급 빨갱이' 자식으로 친척 간에게 조차
홀대를 받던 여인은 그러나 꿋꿋이 일어선다.
무엇보다 뇌성마비 장애아들을 핵물리학 박사로 당차게 키워낸
여인의 피나는 노력은 모성의 결정체로 감동케 한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자기 삶의 개척 또한 당당하게 일구어 낸
한 여인의 용기와 불굴의 의지력은,
수많은 꿈을 상실한 나약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의
귀감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해방 전 후 혼란기와 6.25발발 후 좌.우익 상황의 무법천지와
학생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롭고 논리정연, 정확하여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할 정도라면 과잉 표현일까?
본문 중에 가끔씩 삽입되는 여러 편의 시(詩)와 사랑을 앓는
회한의 묘사 등은 근엄하고 이지적인 여인의 심성을 유연하게
희석시키는 역할이 되어
쉼터와 같은 묘한 분위기로 독자를 매료시켜갔다.
필자는 저자인 여류시인에게 팔순인 이제부터 소설을 쓰시라
적극 권하고 싶을 만큼 그의 소설적 재능과 설득력은 탁월했다.
金芝娟(한국 소설가협회 이사장)
이정님(이룻)의 자전 소설(自傳小說) '노을을 품고 흐르는 강'
제7편 1장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전쟁은 국군과 UN연합군이 두만강까지 치고 올라가
대한민국의 완전 통일을 내다보게 되었다. 그러나 잠시였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와
미 대통령 트루먼이 만주에 대한 폭격 여부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는 사이 중공군이 참전하였다.
북한의 조•중연합사령부의 전시작전권은
이때를 기해 중화인민군에게 넘어갔다.
그 여세는 연합군에 불리하게 작용하였고
전 전선에서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토의 전투로 인해 새해 벽두
서울은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러한 와중에도 아이들의 교육은 계속되었다.
설아도 우여곡절끝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지만
그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필주가 부역자의 신분으로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말이다.
한겨울 추위를 겪으면서도 옷을 가져올 생각도 못했다.
채광리 외갓집에서 불안하게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구차한 삶을 지탱하는 가운데서도
정 여인은 일만 할 뿐이였다.
찔레꽃 같기도 하면서도 참으로 무던한 여인이었다.
얕은 산으로 올라가 땔나무를 해오는가 하면,
들에나가 추수를 거둔 뒤 이삭을 줍기도 했다.
비록 친정집이었지만 한시도 편하게 지내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남편과 아들의 행방불명으로 인하여
불안해진 정서를 그렇게 일하는 것으로 풀고 있는 듯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친정에 신세지는 것을 가급적 피하기 위함이었다.
친정어머니는 면전의 그런 딸이 안타까웠지만
달리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자신은 이미 늙었고 많은 식구들의 살림은
큰며느리가 맡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설아네는 먹을 것이 늘 부족하여 나물죽을 끓이는 때가 많았으나
그나마도 밖에 나가 생사를 알 수 없는 두 식구를 생각하면
언제나 감지덕지할 뿐이었다.
겨울이 지나가고 다시 새 봄이 왔다.
전쟁이 일어나고 두 해째가 되는 해였다.
설아와 엄마는 역류하는 전쟁에 던져진 채
자신도 다 모르는 사이 다람쥐처럼 한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전쟁은 중부전선에서 밀고 밀리던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을 맺었다.
전쟁을 종식시키는 종전선언인 평화협정이 아니고
전쟁을 잠시 중단하자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휴전협정인 것이다.
결국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한국전쟁은 만 3년 동안
엄청난 인명의 희생만을 남기고 남북의,
기존의 경계선은 전쟁 전의 삼팔선을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그렇다면 이 참혹한 민족 간의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우리 민족은 폐허와 다름없는 가난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뿐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민족이 민족상잔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익을 본 나라는 바로 전범국 일본이었다.
그들은 이차대전의 패전국으로 입은 손실은
옆 나라의 전쟁 덕으로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참화를 겪은 남과 북으로선
참으로 통분해마지 않을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 무렵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이필주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소문이 동네에 돌았다.
교도소였지만 살아 있다는 소식은 참으로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 여인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인민군 남침 시에 부역으로 엉키기 시작하여
국군 진격 시 산으로 피신했으니 인민군과 어울린 공비라는
죄목일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친가, 외가 쪽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서 손쓰려 하지 않았다.
조금만 빌미가 보이면 공산주의로 몰려 죽을지 살지 모르는
서릿발 같은 냉랭한 시기에
선뜻 이필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친척들이 더 몸을 사리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죄목이 어마하리라 예상되었기에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손을 써야 하는지를 모르는 처지였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정 여인조차 남편의 구명운동
방법을 몰라 우왕좌왕하였다.
제 7편 1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끝
제 7편 2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그런 정여인에게 동네사람들 중에는 아예 이필주가
사형당할 게 십중팔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웃에 사는 뻐드렁니에 떠버리 정순이 엄마는 위로해주는 척하며
은근히 엄마의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데 재미 들린 여자 같았다.
참으로 몰지각한 반응들이었다.
그런 중에도 몇몇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그것만도 천만다행이 아니냐며 정 여인을 위로했다.
그러면서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했다.
설아도 엄마에게서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
의논할 만한 상대가 없는 정 여인은
이제 열네 살 먹은 딸이 가장 큰 의지처가 되었다.
설아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해 봤지만 어린 자신에게 별달리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던 어느 날,설아는 주일학교에 다닐 때
하느님께 기도하던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설아는 틈만 있으면 기도했다.
깨끗해서 백지같이 순진한 어린아이의 뇌리에 박힌
신앙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철저한 신념이며 희망이었다.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시면 하느님이 시키는 일을 모두 할게요.
인호, 인용이를 놀리지도 않고
앞으로는 고집부리는 일 절대 하지 않을게요.
하느님, 우리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우리 아버지 성함은 이필주라고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어린것이 골방에 들어가 나오지도 않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본 정 여인은 든든한 지원군이
옆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만사가 잘 풀릴 거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설아는 울부짖었다.
길을 오고 갈 때는 야베스의 기도로 중무장하고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리라는 각오로 기도에 매달렸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을 믿고 의지합니다. 기도하면 무조건 들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 제 기도 소리 듣고 계신 거지요. 제 무릎이, 제 눈물이,
제 손 두 손바닥이 닳아 없어져도 좋습니다.
제 아버지만 살려주신다면 제 평생 주님을 믿는 일에 앞장서겠습니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오셔야 제가 학교에 갈 수도 있고
엄마와 동생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기도가 부족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고 제발 저를 돌아보아 주시어
저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
설아의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는 일상이 되어 늘 하늘에 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 때 드디어 깜짝 놀랄만한 응답이 왔다.
어쩌면 주었다와 뺏겼다 식의 묘한 해석이
큰 역할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네사람들이 이필주의 구명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필주의 도움으로
인민군의 즉결재판에서 살아난 사람들 중 군청의 서기관이 있었다.
바로 그 사람이 나선 것이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면서 이필주가 살려낸 사람 중에
공직자로 복귀한 사람들과 연락을 취했다.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도 전개했다.
그 중에는 이필주가 이 노인의 초라한 장례를 모시고 났을 때
제 발로 찾아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던 그 사람도 끼어 있었다.
국군 실무자들을 찾아가 이필주가 어떻게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살렸는지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탄원했다.
서명에 참여한 사람 수는 면에서만도 천여 명이 넘었다.
서명은 남이 한다니까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평소의 이필주의 인품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군청이나 읍면 직원으로 일했다는 죄목으로 죽게 되었다
살아난 장본인이 나서니 오히려 감동을 받는 눈치였다.
그러한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이필주가
풀려날 가망은 요원하게만 보였다.
아버지 이 노인의 남로당 관련 전력과
산으로 도망간 아들 승우의 소재가 불분명한 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만약 승우가 살아 있다면 이필주가 필경 빨치산이나
공비가 되어 있을 아들과 내통하고 다닐지 모른다는 의문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충남 서천에는 설아의 당고모네가 살고 있었는데
당고모부가 경찰서에서 수사주임을 맡고 있었다.
이필주의 사람 됨됨이를 평소에 잘 알고 있던 당고무부는
기꺼이 대전으로 올라와 이필주의 보증을 서 주었다.
수사주임이 보증을 서자 법무당국은
그때서야 이필주의 석방할 빌미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이 이필주는 일시 집행유예로
목에 걸려 있던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집행정지가 아닌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음도
천만다행으로 여긴 이필주는 풀려나자마자 정 여인의 언니네가
살고 있는 충남 장항으로 급히 떠났다.
고향으로는 갈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동란 중에 쫓겼던 사실이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필주는 장항에서 큰동서의 도움으로
한 정미소에 일자리를 구했다.
제 7편 2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 끝
곧 이어 제 7편 3장 ' 1953년 휴전협정 학생증을 손에 쥐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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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사진:이정님(이룻)님 작가
2018년1월28일(월)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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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8월25일(수)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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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문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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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사진은 제게 해당되지 않는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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