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綠豆)빛 '더블부레스트'를 젖히고 한대(寒帶)의 바다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검은 머리
의 '웨이브'를 휘날리면서 광화문통 네거리를 건너가는 한 청년의 풍채는 나로 하여금 때때
로 그 주위를 '몽·파르나스'로 환각 시킨다. 그렇건마는 며칠 전 어느날 오후에 그의 시집
『사슴』을 받아 들고는 외모와는 너무나 딴판인 그의 육체의 또 다른 비밀에 부딪쳤을때
나의 놀램은 오히려 당황에 가까운 것이었다.
표장(表裝)으로부터 종이·활자·여백의 배정에 이르기까지 그 시인의 주관의 호흡과 맥
박과 취미를 이처럼 강하고 솔직하게 나타낸 시집을 나는 조선서는 처음 보았다.
백석의 시에 대해서는 벌써 《조광》지상을 통해서 오래 전부터 친분을 느꺼오던 터이지
만 이번에 한 권의 시집으로 성과된 것과 대면하고는 나의 머리의 한구석에 아직까지는 다
소 몽롱했던 시인 白石의 너무나 뚜렷한 존재의 굳센 자기 주장에 거의 압도되었다.
'유니크'하다고 하는 것은 한 시인, 한 작품의 생명적인 부분에 해당한다. 어떠한 시인이나
작품에 우리가 매혹하는 것은 그의 또는 그것의 '유니크'한 풍모에 틀림없다.
시집 『사슴』의 세계는 그 시인의 기억 속에 쭈그리고 있는 동화와 전설의 나라다. 그리
고 그 속에서 실로 속임없는 향토의 얼굴이 표정한다. 그렇건마는 우리는 거기서 아무러한
회상적인 감상주의에도, 불어오는 복고주의에도 만나지 않아서 더없이 유쾌하다.
백석은 우리를 충분히 애상적(哀傷的)이게 만들 수 있는 세계를 주무르면서 그것 속에 빠
져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얼마나 추태라는 것을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시인이다. 차라리
거의 철석(鐵石)의 냉담에 필적하는 불발한 정신을 가지고 대상과 마주선다.
그 점에 『사슴』은 그 외관의 철저한 향토 취미에도 불구하고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
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는 것이다.
'유니크'하다는 것은 그의 작품의 성격에 대한 형용이지만 또한 그태도에 있어서 우리를
경복(敬服)시키는 것은 한걸음의 양보의 여지조차를 보이지 않는 그 치열한 비타협성이다.
어디까지든지 그 일류의 풍모를 잃지 아니한 한 권의 시집을 그는 실로 한 개의 포탄을 던
지는 것처럼 새해 첫머리에 시단에 내던졌다.
그러나 그는 그가 내던진 포탄의 영향에 대하여는 도무지 고려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는
결코 일부러 사람들에게 향하여 그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유(阿諛 : 빌붙
임. 아첨함) 라고 하는 것은 그하고는 무릇 거리가 먼 예외다. 그러면서도 사람으로 하여금
끝내 그를 인정시키고야 만다. 누가 그 순결한 자세에 감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온실 속의 고사리가 아니다. 표본실의 인조 사슴은 더군다나 아니다.
심산유곡의 영기를 그대로 감춘 한 마리의 '사슴'은 이미 시인의 품을 떠나서 달려가고 있
다.
그가 가지고 온 산나물은 우리들의 미각에 한 경이임을 잊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이 아담하고 초연한『사슴』을 안고 느낀 감격의 일단이나마 동호의 여러 벗에게 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상기같은 기쁨을 가지기를 독자에게 권하려 한다. 妄言多識.
白石氏의 詩集 『사슴』 一卷을 처음 대할때에 作品全體의 姿態(자태)를 우리의 눈에서 가리어버리도록 크게 앞에서는 것은 그 修整(수정)없는 平安道方言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作品이 주는바를 받아들이려는 好意(호의)를 가지고 이것을 熱讀(열독)한 結果(결과)는 解得(해득)하기 어려운 若干(약간)의 語彙(어휘)를 그냥 包含(포함)한채로 그 全體를 鑑味(감미)하는데 아무 支障(지장)이 없다는 母語(모어)의 偉大(위대)한 힘을 깨닫게 된다.
第一部 '얼럭소새끼의영각'은 우리에게 그 이상스리 다정한 幼年期(유년기)의 回想(회상)을 문득 불러일으킨다. 엄마와 단둘이 외딴집에서 무서워서 이불속에 파묻혀 숨도못쉬는밤. 명절이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집에 시집갔던 고모들도 아이들을 다리고오고 집안이 모도 모여서 아랫방에서는 어른들이 이야기하고 놀고 웃간에서는 아이들끼리 장난을하고 놀던일. 오리치 노려 논으로 나려간 아배를 등말랭이에서 기다리다가 못해 악이나서는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짝을 모조리 뒷개울물에다 내어던지는 아이.
이러한 事件(사건)은 어느곳 아이들에게나 어느아이에게나 다 있었던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修整(수정)없는 生生한 語彙(어휘)로 여기 生生한 表現(표현)을 줄 수 있는 것은 한 詩人의 特異(특이)한 才能(재능)이다. 오래된 記憶(기억)이란 그서슬이 달아져서 朦朧(몽롱)한 抽象(추상)으로만 남기가 쉽고 成熱(성열)과 敎養(교양)이란 野生的(야생적)이고 初生的(초생적)인것의 모든角(각)을 다듬어 버린다.
比喩(비유)를 빌어 말할 수가 있다면 方言(방언)은 곧 깨트려서 뿌다귀와 모소리가 있는 돌이오 辭典(사전)에 오르는 標準語(中和語)는 그것들이 맞부듸쳐서 깎기고 달아져 동글아진 돌이다. 會話語(회화어)가 막자갈이라면 文語(문어)는 바독돌이다. 自然國語(자연국어)가 뿔있는 돌이라면 非話用語(비화용어) 漢文古文(한문고문)이나 羅甸文(나전문)이나 新造語(신조어) 에스페란토같은 것은 동그라진 돌이다. 鄕土(향토)의 野性(야성)과 都會(도회)의 文化를 自然한돌과 練磨(연마)된 도에 비길수도 있다. 다듬이돌이 槪念(개념)의 固定(고정)과 存在(존재)의 安定(안정)을 얻은 反面(반면)에 뿔있는 돌은 生生히 流動(유동)하는 生命(생명)을 가지고 있다. 지나친 結論(결론)이나 文化(문화)란 것은 그 自體(자체)가 제가 成長(성장)해나온 肉身(육신)과 大地(대지)와 氣候(기후)를 얼마쯤 떠난곳에서 練摩(연마)되고 圓熱(원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때때로 그 本源(본원)에서 新規補充兵(신규보충병)의 增援(증원)을 받아야 그 生活(생활)한 生命(생명)을 維持(유지)한다.
修整(수정)없는 方言(방언)에 依(의)하야 表出(표출)된 鄕土生活(향토생활)의 詩篇(시편)들을 琢磨(탁마)를 經(경)한 寶玉類(보옥류)의 藝術(예술)에 屬(속)하는 것이 아니라 서슬이선 돌 生命(생명)의 本源(본원)과 接近(접근)해있는 藝術(예술)인 것이다. 그것의 힘은 鄕土趣味程道(향토취미정도)의 微溫(미온)한 作爲(작위)가 아니고 鄕土(향토)의 生活(생활)이 제스사로의 强烈(강렬)에 依(의)하야 必然(필연)적인 表現(표현)의 衣裳(의상)을 입었다는데 있다.
第二部以下(제이부이하)에도 若干(약간)의 技術的詩篇(기술적시편)들이 있으나 視覺(시각)의 印象(인상)을 스켓취한것들이 그 大部分(대부분)을 占(점)한다. 여기서도 이 詩人은 眼前(안전)의 光景(광경)을 極(극)히 生生하게 우리앞에 提供(제공)하는 能力(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統營(통영)」,「修羅(수라)」等(등)에서 우리는 詩人의 素朴(소박)한 情念(정념)의 그림자에 잠깐 접촉할 수 있는 듯 하나 이 詩人의 포-즈는 全體(전체)를 通(통)해 冷然(냉연)한 散文的(산문적)인 포-즈다.
曠 原 (광원)
흙꽃이는 이른봄의 무연한 벌을 輕便鐵道(경편철도)가 노새의 맘을먹고 지나간다
멀리 바다가 뵈이는
假停車場(가정거장)도 없는 벌판에서
車는 머물고
젊은 새악시 둘이 나린다.
이렇게 單純(단순)한 印象畵(인상화)도 있고 또는 冷徹(냉철)한 유리를 通(통)해보는것과 같이 정말 事實(사실)보다 더 차고 더 또렷한 視覺的(시각적)效果(효과)를 걷운것도 있으나 그가 말없이 提供(제공)한 視覺的(시각적)表象(표상)은 渺(표묘)한 情調(정조)의 背景色(배경색)을 띤 것이 많은 것을 우리는 發見(발견)한다.
이 詩人은 現在(현재)의 우리 言語가 全般的(전반적)으로 侵蝕(침식)받고있는 溫血作用(온혈작용)에 對(대)해서 그 純粹(순수)를 지키려는 意識的(의식적)反撥(반발)을 表示(표시)하고 있다. 이 詩集(시집)이 나타내는바 苟且(구차)하지 않고 妥協(타협)이 없는 强(강)한 信念(신념)은 한 偶然的(우연적)이고 附隨的(부수적)인 事件(사건)이라기 보다 이 詩人의 本質的(본질적)表現(표현)의 一部(일부)인가 싶다.
우리는 이 詩人의 現在(현재)의 業績(업적)에 對(대)해 아무 失體(실체)되는 判斷(판단)없이 이 詩人의 길고 큰 將來(장래)를 祝福(축복)할 수 있다.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이다. 그러나 그는 본명인 백기행 대신 필명인 백석을 자신의 이름으로 애용하였다. 특히 백석은 문학활동을 전개하면서 본명을 쓰지 않고 필명을 줄곧 사용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백기행이라는 본명보다 백석이라는 필명이 보다 친숙하게 자리잡고 있다.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1013호에서, 수원 백씨 17대손인 아버지 백시박과 단양 이씨인 모친 이봉우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때 백석의 부친 백시박은 37세였고 그의 모친 이봉우는 24세였다. 이같은 환경에서 백석이 태어난 1912년은 역사적으로 보아 이 땅에 한일합방(1910)이 이루어진 지 두 해가 지난 때요, 문단사적으로 보면 이인직, 이해조, 최찬식 등에 의하여 소위 신소설이 창작, 출간되던 때이다. 그런가 하면 이때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1910년 출생)이 태어나고 두 해가 지난 해이다.
한편 백석이 태어난 평안북도 정주는 역사적으로 서양의 신문화가 일찍 유입된 곳이요, 동시에 문단사적으로 보면 이광수, 김억, 김소월등의 대가들이 태어나고 성정한 곳이기도 하다. 이광수의 출생지는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940번지로 백석의 출생지와 번지수만 다르며, 김억의 출생지는 평북 정주군 관단면 관삽리로 백석과 같은 정주군이고, 김소월 역시 출생지는 외가인 평북 구성군이지만 실제의 본적지는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으로 백석과 같은 군이다. 이렇듯 백석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인 정주는 우리 문학사 속의 대가급 인물들이 출생하였으며 동시에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백석은 7살이 되던 1918년에 오산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3살이 되던 1924년에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8세가 되던 1929년에 오산고보를 졸업하였다. 말하자면 대학 이전까지의 학창시절 전부를 백석은 정주의 오산학교 교정에서 보낸 셈이다. 이처럼 백석이 12년이나 되는 긴 기간의 학교생활을 한 곳이 바로 오산학교 교정이거니와, 이런 오산학교를 생각하면 우리들의 머리 속에는 이 학교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오산학교는 정주 출신의 상인이었던 남강 이승훈이 민족주의자인 안창호의 연설에 감동을 받고 그가 세웠던 서당을 개편하여 설립한 학교이다. 둘째, 오산학교는 교육의 목표가 애국적 지도자 양성에 있는 만큼 민족주의 정신이 학교의 기본정신을 이루었고 실제로 일제 강점기 하에 3·1만세 사건을 주도하는 등 당대의 민족운동을 이끌어갔던 핵심적인 기관이었다. 셋째,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운영자는 남강 이승훈이었지만 그이외에 학교를 이끌어가는 초대 교장엔 정주의 선비 치당 백이행(백석과 종씨이며 돌림자도 같음)이, 2대 교장엔 경기도 출신으로 한학과 신학문에도 조예가 깊은 근대적 선각자 여준이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백석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우리 역사 속에 널리 알려진 고당 조만식이 교장으로 임명되어 학교를 이끌어 나갔다. 넷째, 이들 이외에도 오산학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그 학교의 교사로 우리 근대소설사의 선구자인 이광수가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또한 우리 근대시사의 앞자리에 놓이는 김억이 이 학교의 교사가 되어 역시 우리 근대시사의 문제적 시인인 김소월을 이 학교에서 발굴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미술사의 문제적 화가인 이중섭도 오산학교 출신이다.
이렇듯, 백석이 대학 이전까지의 학창시절을 보낸 오산학교는 우리의 역사와 교육사 그리고 문학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학교였다. 이와 더불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백석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교장이었던 고당 조만식이 당시 하숙을 쳐서 가계를 이끌어가기도 했던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점이 백석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이런 사실을 통하여 당시의 분위기를 얼마간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백석은 오산학교 시절에 남다르게 두각을 나타낸 것 같지는 않다. 백석과 관련된 연구자료를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그리고 충실하게 모은 『시인 백석 일대기』의 저자 송준의 말에 의하면 백석은 성적에 있어서 급우 40여명 중 10등 정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당시 문학과 불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백석이 오산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 학교의 졸업생들은 상당수가 서울을 비롯한 국내의 대학 혹은 일본에 있는 여러 대학에 진학하였을 만큼 학고열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백석은 가정 형편상 진학을 하지 못하고 1년간 집에서 머무렀다. 하지만 이 1년간이 백석에게는 전혀 무익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이 1년 동안 그가 이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문학공부를 계속하여 다음해인 1930년 1월의 《조선일보》 신춘문예 공모에서 소설부문에서의 당선이라는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때 《조선일보》를 통하여 신춘문예 작품으로 당선한 소설의 제목은 「그 母와 아들」이다. 이 당시 백석의 당선은 제2회 신춘문예에서 이루어진 것인 만큼 초창기에 해당되는데, 참고로 밝히자면 제1회당선자는 여성 소설가 백신애였다. 그리고 백석이 당선되던 제2회 신춘문예에서는 백석 말고도 김용송과 정순정이라는 두 젊은이가 각각 「과민증」과 「어머니와 나」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당선되어, 백석과 공동당선자로 문단에 나왔다.
이렇듯, 백석의 공식적인 문단활동은 그의 간판격인 시분야에서 시작되지 않고 소설분야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 백석은 두 편의 단편소설, 즉 「마을의 遺話)와 「닭을 채인 이야기」를 쓰고 세 편의 외국소설을 번역한 것 말고는 거의 모든 힘을 시창작에 쏟아부었다. 그럼으로써 백석은 명실공히 시인으로서의 위상을 분명하게 굳히었고 그의 문학적 재능 또한 시분야에서 보다 탁월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이 시분야뿐만 아니라 소설을 포함한 다른 산문분야에도 관심과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가 영어를 비롯한 러시아어 등에 조예가 있어서 외국작품도 번역하였으며 그 중에는 방금 말했듯이 소설도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백석의 전모를 이해하는 데 좋은 바탕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와 아울러 백석이 분단 이후 그가 살던 북한에 남아 역시 시 이외에도 산문분야인 아동문학평론이나 수필 등을 썼다는 사실의 인식 또한 백석의 전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신춘문예(당시의 이름으로는 <신년현상문예>)에 소설로 당선을 하고 난 후 백석은 정주에서 금광으로 부자가 된 계초 방응모의 후원에 힘입어 그 장학금으로 일본의 동경에 있는 청산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계초 방응모는 조선일보사를 1933년에 사들여서 운영하였다.
백석은 당시(1930년 3월) 19세의 나이로 일본에 있는 명문사학 청산학원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청산학원은 주지하다시피 감리교 재단에서 설립한 학교이다. 우리 근대 문학사 속에서 청산학원을 다닌 문인으로는 전영택, 김동명, 박용철 그리고 염상섭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 땅의 문인들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은 동경의 청산 학원은 그것을 설립한 재단의 성격처럼 기독교적인 분위기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런 사실을 뒷받침이나 하듯이 백석 또한 청산학원 내에 있는 청산학원교회에서 입학한 다음해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그의 구체적인 삶과 문학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속단하기는 어렵고,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도 기독교적인 흔적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게 사실이다.
백석은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석은 기독교와 영문학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유학시절에 새로게 인식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평안북도 정주를 비롯한 서북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기독교가 이 땅에 먼저 유입, 정착된 곳이며 백석이 다녔던 오산학교도 그 기독교를 앞서서 받아들인 남강 이승훈이 세운 학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백석에게 청산학원의 기독교적인 분위기는 그렇게 낯설은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짐작을 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백석이 청산학원을 다닌 것은 1930년 봄부터 1934년 봄까지이다. 백석이 청산학원의 교정을 중심으로 하여 동경생활을 하는 가운데 지니게 된 특징적인 면모로는 우선 기독교적인 분위기의 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함으로 인하여 이른바 서구적인 세계를 이곳으로부터 직접 만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기독교와 영어로 대변되는 것이 서구적인 세계라면 그 핵심을 백석은 동경의 청산학원에서 접하였던 것이다. 또한 동경의 청산학원 시절 백석은 어학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전공하는 영어는 물론 일본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학적인 재능을 여러 곳에서 한껏 발휘하였다. 이런 사실로 인하여 백석은 훗날 함흥의 영생고보 시절에 이론은 물론 회화에 능통한 영어교사로 그 명성을 날렸고, 또한 외국문학 작품을 번역하는 데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전반적으로 백석은 청산학원 시절에 유능한 학생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두각을 나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구적인 세계의 본질을 익히고 또한 실력도 쌓아 가지고 백석은 조업과 동시에 조선으로 돌아오T다. 그가 돌아오던 1934년, 백석은 조선일보사 교정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이처럼 한편 신문사 일을 하면서 다른 한편 개인적으로 작품의 창작과 번역, 소개에서 활발한 면모를 보였는데 그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약 1, 2년 동안 한 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관심을 받을 만하다.
우선 흥미로운 것은 백석이 졸업 후 조선땅으로 돌아와 먼저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시가 아니라 이러저러한 유형의 산문에 속하는 것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먼저 「耳說 귀ㅅ고리」라는 수필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臨終 체홉의 六月」이라는 서간문을 번역하여 소개하였으며, 「'조이쓰'와 愛蘭文學」이라는 티·에스·마르키스의 논문을 번역하여 소개하였고, 다음에는 「마을의 遺話」와 「닭을 채인 이야기」라는 창작 단편 소설을 직접 발표하였다. 이런 점으로 비추어 볼 때 백석은 그가 가지고 있는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하여 외국문학과 관련된 글을 소개하였던 것이고, 또한 그의 등단이 시가 아니라 단편소설을 통하여 이루어졌던 것처럼 산문분야에 대한 관심을 일차적으로 표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초기의 과정을 거친 후에 백석은 집중적으로 시작품을 창작하고 그것을 발표하였다. 그러니까 그는 산문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간혹 외국시를 번역하여 소개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였어도, 그 이후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자신이 직접 창작한 시를 발표하였던 것이다. 백석이 시단에 등단한 것은 1935년 8월 31일, 조선일보 지면에 「定州城」이라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의 시단 데뷔는 그가 소설가로 데뷔한 지 5년 정도의 시간이 경과하고서이다. 백석의 고향은 이 글의 앞부분에서 밝혔듯이 평안북도 정주이다. 백석은 바로 그 정주에 있는 정주성을 소재로 삼아 그의 데뷔작을 발표하였던 것인데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山턱원두막은뷔였나 불빛이외롭다
헌깁심지에 아즈까리기름의 쪼는 소리가들리는 듯하다
잠자리조을든 문허진城터
반디불이난다 파란魂들같다
어데서말있는 듯이 크다란山새한마리 어두운 곬작이로난다
헐리다남은성문이
한을빛같이훤하다
날이밝으면 또 메기수염의늙은이가 청배를팔려올 것이다
- 「定州城」의 전문
백석은 데뷔작인 위 인용작품에서 대상만을 묘사할 뿐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조금도 작품 속에서 직접 표출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위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정주성의 주변 정황이나 풍경을 상상할 뿐, 이 시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위 작품으로부터 추측하기 어렵다. 이런 시작방법은 백석의 독특한 영역에 속하거니와, 그로부터 우리는 백석의 시세계에 모더니즘적 특성이 근본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백석은 시 「定州城」으로 문단에 나와 주로《조선일보》와 그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 잡지 《조광》에 시를 발표하였다. 「山地」「주막」「비」「나와지렝이」「여우난곬族」「통영」「힌밤」등이 다 그렇게 발표된 작품이다. 그후 백석은 1936년에 이르러 『사슴』이라는 제목의 첫 시집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간행하였다. 시집의 뒷면에 인쇄된 내용을 보면 백석의 시집 『사슴』은 그 당시 정가가 2원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가격은 '조선 초유의 고가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백석은 이 시집을 출간함으로써 일약 1930년대 우리 시단의 신예시인으로 그 자리를 확고하게 굳히며 많은 관심 속에서 중요한 논의의 대상으로 떠올랐고, 우리 시사의 문제적인 시인으로 평가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김기림, 박용철, 임화, 오장환 등이 백석의 시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들은 동시대의 이름있는 문인들로서 백석과 함께 당시의 문단을 만들어 나갔던 사람들이다.
백석이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근무한 기간은 약 2년 정도이다. 이 기간 동안 백석은 직장인으로서 신문사의 일도 하였지만 작품의 발표와 시집의 출간을 통하여 한 사람의 능력있는 문인으로 인정을 받았도, 나아가서 많은 문인들을 사귀었다. 그가 이 기간 동안 만나서 함께 어울린 당시의 문인들로는 안석영, 이원조, 김기림, 신석정, 허준, 홍기문, 함대훈 등을 들 수 있다. 백석이 활동하던 이 1930년대 중반이란 문학사적으로 보면 카프가 해산계를 제출하고 문단의 이면으로 잠ㅈ복하던 때이며, 시문학파로 시작활동을 전개하던 정지용과 김영랑이 각각 첫 시집을 출간하던 때이고, 이효석, 박태원, ladbwjd 등이 이른바 구인회를 결성하여 순수문학적 경향을 문단의 본류로 이끌어들이던 때이며, 최재서, 김기림 등의 영문학자들에 의하여 모더니즘 이론이 소개되던 때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문학사의 정황 속에서 백석은 문단활동을 시작하였고, 그런 가운데서 이런저런 문우들을 사귀었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가 어떤 유파나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혼자 작품 활동을 전개해 나아갔다는 점이다. 따라서 백석을 논의할 째, 우리는 그를 어떤 그룹에 소속시켜서 논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백석의 조선일보 시절은 그에게 상당히 많은 내외적 발전을 가져다준 기간이라고 생각된다.그러나 백석은 더 이상 조선일보사에 머물지 않고 1936년 월 초순, 함흥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함흥영생고보는 본래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세운 영생학교에서 시작하여 1931년에 영생고보로 승격된 학교이다. 그런 만큼 영생고보는 기독교 정신을 근간으로 삼아 설립, 운영되고 있는 학교였으며, 이와 아울러 1919년의 3·1독립운동을 주도했을 정도로 민족주의 정신이 또한 강하게 살아 있는 학교였다. 그러고 보면 백석과 기도교 사이에는 오랫동안 깊은 인연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어린 시절 다녔던 오산학교가 그렇고, 그가 유학을 가서 다녔던 청산학원이 그렇고, 또 그가 돌아와 교사생활을 하고 있는 함흥영생고보가 바로 기독교 정신 위에 세워진 학교이기 때문이다.
함흥의 영생고보에서 교사생활을 하는 동안, 백석은 주변 사람들과 학생들로부터 상당한 관심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영어교사로서 그가 지닌 탁월한 영어실력, 시집『사슴』을 출간한 당대 신예시인으로서의 문학적 능력, 준수한 용모와 열정이 겸비된 젊은 지성인의 자세등이 바로 주변 사람들과 학생들로 하여금 그를 관심 속에서 지켜보도록 만든 요인이리라 생각된다. 함흥고보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백석은 학생들의 연극반 활동에도 관심을 가졌고 축구부를 지도하는 교사였던 것으로도 또한 아려져 있다. 그는 학생들의 연극반 활동을 이끌면서 나이는 자신보다 많지만 친구처럼 지내고 있는 당대의 연극인이며 미술가이자 영화인이자 문필가인 안석영(안석주)을 서울로부터 초빙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하였고, 학생들을 축구대회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서울로 인솔해가기도 하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백석은 시, 소설, 수필, 번역, 연극, 아동문학,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과 재능을 자랑한 사람이었다고 판단된다.
백석이 함흥영생고보에 재직한 것은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약 2년간이다. 그 기간 동안의 생활이 백석의 문학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외형상 분명한 것은 그가 첫 시집 『사슴』이후의 시세계를 이곳에서부터 준비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며, 첫 시집 이후의 시세계에 눈에 띄는 변화가 찾아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백석은 첫 시집 『사슴』에서와 달리 그 이후의 시작품 속에서 나로 표상되는 시인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표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시인 자신은 뒤로 물러서고 그 대신 외부의 대상이나 정황만이 담담하게 제시되었던 것이 시집 『사슴』의 경우였다면,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외부의 대상이나 정황 대신 시인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등이 적극적으로 전면에 표출된 것이 함흥 시절에서부터 쓰여진 작품의 경우이다.
백석이 함흥에 머무르기 시작한 것은 그가 동경의 청산학원을 졸업하고 돌아온 지 2년이 지난 시점이요, 백석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이다. 다라서 백석이 함흥에 머문 것은 그의 나이 25세부터 27세까지의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 백석은 그곳에서 권번 출신의 김자야라는 한여성을 만나 k랑을 하게 된다. 이 김자야와의 만남은 3,4년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백석의 생활과 그의 문학에 사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김자야에 의하여 그가 백석과 나누었던 사랑 이야기의 비밀이 『내 사랑 백석』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김자야가 밝힌 내용에 따르자면, 백석은 김자야와 실질적인 부부생활을 해가면서도 부모들의 권유와 강압에 못 이겨 두 번이나 봉건적인 중매결혼을 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때마다 백석은 결혼식만 치르고 뛰쳐나와 김자야에게로 달려오T다고 말하였으나 아무리 부모의 강권이 작용했다 하더라도 왜 백석이 두 번씩이나 무책임하게 결혼을 하였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물론 당대의 많은 문인들이 봉건적 유습과 신문화 사이의 갈등으로 인하여 부모의 뜻에 따라 타의로 결혼한 전처를 버리거나 그와 이혼을 하고 이른바 신여성과 새로이 결혼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백분 감안한다 하더라도 백석이 두 번씩이나 결혼식을 올리고, 또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집을 뛰쳐나온 대목은 쉽게 납득되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도덕적으로 납득하기는 어려워도 그와 같은 백석의 처지가 그를 얼마나 고통과 갈등 속으로 휘몰아 넣었을까 하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함흥시절을 청산하고 백석은 서울로 다시 돌아와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재입사하여 《여성》지 편집일을 담당하였다. 이미 백석은 몇 년 전에 조선일보사에 근무하며 《조광》지니, 《여성》지니 하는 조선일보사 계열의 잡지에 관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이야말로 백석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백석이 왜 함흥영생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는지 그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외적으로 보면 1930년대 말이란 일제의 군국주의적 폭력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때이고, 그런 폭력은 백석이 근무하던 함흥영생고보에도 노골적으로 가해졌지만, 이런 외적 요인 이외에도 무엇인가 개인적인 내밀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백석은 함흥영생고보를 떠나 서울로 돌아왔을 것이다. 여기서 밝히자면 그가 가진 개인적인 문제는 서울에 머물고 있는 그의 애인 김자야가 그리웠고 그와 함께 지내고 싶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백석이 시인 노자영의 뒤를 이어 《여성》지의 편집일을 담당한 기간은 무척이나 짧다. 그는 바로 입사한 그 해 말에 《여성》지 편집일을 사임하고 서울을 떠나 만주의 신경(현재는 장춘)으로 갔기 때문이다. 김자야의 말에 의하면 백석이 서울을 떠난 문주로 간 것은 그가 부모의 강권에 의하여 이 해에 두 번째 결혼을 치르는 등 복잡한 가정사와 봉건적인 관습 등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백석의 집은 정주를 떠나 백석의 부친이 조선일보사의 사진부에 근무하였기 때문에 서울에 있었다. 백석은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북만주로 떠나려고 할 대, 김자야에게 같이 가자고 데의를 했다고 김자야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김자야는 백석을 사랑하면서도 그가 정식으로 결혼을 한 두 번째 여성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인 논리에 부담을 느껴서 백석을 피해 다니다가 마침내는 백석만을 만주로 떠나보내고 만 것이다.
백석이 북만주의 신경으로 떠난 것은 그의 나이 28세 때인 1939년 말이었다. 그는 직장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문우들을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만주땅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도 그의 이 같은 떠남이 무슨 이유에 의한 것이었는지 못내 석연치 않다. 김자야가 말하듯이 복잡한 가정사와 봉건적인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북만주행을 결심할 수도 있으나 이것만으로 직장과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설득력이 좀 약하다.
어쨌든 백석은 서울을 떠났다. 그럼으로써 그는 1930년대를 떠돌이로 보낸 셈이다. 요컨대 그가 태어났고 오산학교를 다녔던 정주로부터 떠나와 그는 일본의 동경으로, 조선의 서울로, 함흥으로, 다시 서울로, 그리고는 마침내 중국의 만주 지방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20대의 젊은 시기를 보냈던 것이다. 그 동안 백석에게는 뚜렷하게 항일운동을 하였다든지, 그룹을 만들어 문학활동을 하였다든지, 일제나 관으로부터 직접적인 가해를 받았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는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그 시대적 압력을 벗어날 수 없었고, 봉건유습이 남아 있는 당대의 현실 속에서 갈등과 번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문학적 재능을 타고 난 사람으로서 문학적 형식으로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동경 유학까지 한 젊은이로서 교육과 문화활동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20대의 청춘으로서 여인과의 사랑문제로 마음을 썩이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따라서 굵직한 어떤 일이 그에게 나타났던 것은 아니지만, 백석의 20대와 그의 문학작품 속에는 1930년대를 이땅에서 살아낸 지식인의 전형적인 한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 있다. 요컨대 일본에의 유학, 기독교 문화와 서구문학과의 만남, 봉건유습과의 충돌, 신문사나 잡지사에 근무, 신식 교육을 하는 주체, 일본제국주의와의 갈등, 신문학과 신문화의 창출자, 만주나 간도로의 유랑 등의 면모를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이 당대의 백석과 같은 지식인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내용들이다.
백석은 만주의 신경으로 떠난 이후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국내에서 발행된 당시의 문학지《문장》이나《인문평론》등에 「北方에서」,「힌 바람벽이 있어」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조광》지나《야담》지 같은 데는 러시아 작가의 소설을 번역하여 수록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1940년에 조광사에서 토마스 하디의 소설『테스』를 번역, 출간하는 등 거처만 서울에서 만주로 바꾸었을 뿐 국내문단과 관계를 갖고 여전히 작품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백석 작품에는 북방의 서늘한 분위기와 뿌리를 잃은 당대 지식인의 우울한 내면세계가 담겨 있으며 백석의 작품 중 절창이라고 불리우는 몇몇 작품이 들어있다. 이 점은 백석이 이곳에서 어느 때보다도 내외적으로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해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백석은 만주로 간 후, 신경시 東三馬路 시영주택 '황씨집'에 살았다. 송지영이 김자야에게 전한 내용에 의하면 그는 이곳에서 무슨 관청인가를 다녔는데 창씨개명을 하라는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그 직장을 나왔다고 한다. 이 점은 1940년에 들어와 일제가 창시개명을 시작하였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시키는 등, 조선인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다다르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쉽게 납득되는 부분이다(이때 백석은 송지영과 같은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
백석은 그 관청을 나와 많은 고생을 하였을 것이라고 하는데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곳에서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소작인 생활 등을 하다가 안동의 세관에 근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매우 궁금한 점이 있다. 그것은 영문학을 전공한 백석이 어떻게 측량보조원이나 측량서기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그가 측량관계의 일을 한 것은 물론 남의 밭을 얻어 소작인 생활을 한 것이 나타나 있다.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은 그가 1941년도 4월, 《조광》지를 통하여 발표한 시작품 「귀농」이다. 이 작품 가운데서 필요한 부분을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백구둔(白狗屯)의 눈녹이는 밭가운데 땅풀리는 밭가운데
촌부자 노왕(老王)하고 같이 서서
밭최뚝에 즘부러진 땅벋들의 버들개지 피여나는데서
볕은 장글장글 따사롭고 바람은 솔솔 보드라운데
나는 땅님자 노왕한테 석상디기 밭을 얻는다
노왕은 집에 말과 나귀며 오리에 닭도 우울거리고
고방엔 그득히 감자에 콩곡석도 들여 쌓이고
노왕은 채매도 힘이들고 하루종일 백령조 소리나 들으려고
밭을 오늘 나한테 주는것이고
나는 이젠 귀치않은 測量도 文書도 실증이 나고
낮에는 마음놓고 낮잠도 한잠 자고싶어서
아전노릇을 그만두고 밭을 노왕한테 얻는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하여 불 때 백석이 측량사 노릇과 관청 일을 하였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일에 매력을 못 느껴서 마침내 그것을 그만두고 부자인 노왕으로부터 밭을 얻어 농사일을 하며 쓸쓸하지만 자족하듯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처럼 백석은 만주에서 자신의 전공이나 취향과는 무관하게,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며 외로움과 적막함속에서 생계를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또한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 볼 때, 그 당시 백석이 이런 생활을 하며 식민 시대의 지식인으로, 조국과 고향을 떠난 유랑객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만 하는 봉건 유습의 피해자로, 적성에 맞지 않는 생활인으로, 그야말로 쓸쓸하고 외롭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음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특히 그의 작품 「힌 바람벽이 있어」「북방에서」「조당에서」「杜甫보나李白같이」등에 이런 사실이 잘 표출돼 있다. 이런 사실은, 백석의 영생고보 제자로서 지금은 의사인 김희모가 스승인 백석을 찾아 뵙고 그가 얼마나 초라하고 우울한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었는가를 전해준 자료에서도 잘 드러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신의주로 거처를 옮겼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보면 제목 그대로 이 작품이 그가 신의주로 거처를 옮기고 유동에 있는 박시봉 씨 집 방에 살면서 쓴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백석의 친구인 허준이 해방 이전부터 가지고 있다가 백석이 북쪽에 있는 동안 허준에 의하여 1948년 《學風》지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런점은 작품의 내용과 백석이 신의주에 간 시기를 생각할 때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이다. 왜냐하면 분명 이 작품은 백석이 신의주에 있는 유동의 박시봉 씨 방에 살면서 창작한 것으로 그 내용이 되어 있는데, 백석이 만주에서 신의주로 간 것은 해방 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백석의 시를 해방기 동안 남한 문단에 발표해준 허준과 백석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허준은 백석과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하나다. 소설 「殘燈」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허준은 1910년 생으로 백석보다 두 살이 많다. 그는 백석이 만주로 떠난 후 역시 백석의 친한 친구였던 수필가이자 의사인 정근양과 함께 백석의 뒤를 따라 만주로 갔을 만큼 백석과 가까웠으며 방금 말한 바 처럼 백석의 작품을 갖고 있다가 해방기의 남한 문단에 발표해주었을 만큼 백석을 아꼈다. 그러나 이런 허준도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였다가 6·25이전에 월북을 하게 되거니와 그로 인하여 허준의 존재도 우리 문단에서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상태이다. 백석이 1940년, 이처럼 각별했던 허준에게 「許俊」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자신의 마음을 실어보낸 시 한편을 여기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 말고 거륵한 눈물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그 따마하고 살틀한 볓살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눈물의 또 볓살의 나라에서 당신은
이세상에 나들이를 온 것이다
쓸쓸한 나들이를 단기려 온 것이다
눈물의 또 볓살의 나라 사람이여
당신이 그 긴 허리를 구피고 뒤짐을 지고 지치운 다리로
싸움과 흥정으로 왁자짓걸하는 거리를 지날때든가
추운겨울밤 병들어누운 가난한 동무의 머리맡에 앉어
말없이 무릎우 어린고양이의 등만 쓰다듬는때든가
당신의 그 고요한 가슴안에 온순한 눈가에
당신네 나라의 맑은 한울이 떠오를것이고
당신의 그 푸른 이마에 삐여진 억개쭉지에
당신네 나라의 따스한 바람결이 스치고 갈 것이다
― 「許俊」의 부분
백석은 신의주에서 잠시 머물다가 이내 고향인 정주로 갔다. 일본으로, 중국으로, 만주로, 시베리아로, 하와이로 떠났던 사람들이 해방을 맞이하여 이른바 귀소본능을 어쩌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것처럼 백석도 해방이 되자 그가 태어나서 자랐던 평안북도의 정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그가 정주에 돌아간 것이 해방 후의 일이고, 거의 해방기 동안 남한문단과의 교류가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상에 따라 월북 혹은 월남할 수 있는 것이 당시의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주에 남아 있었던 점을 생각해본다면, 백석이 북한에 그대로 머문 것은 얼마간 그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그가 분명하게 선택하였다기보다 어쩌다 보니 그곳에 머물게 됐을 수도 있으나, 적어도 조선일보사의 기자 노릇을 하였다든지, 함흥영생고보의 교사노릇을 하였다든지, 만주에서의 생활을 하였다든지 하는 점 등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가 시대의 문제를 판단할 만한 고급 지식인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의 북한 잔류 행위가 보다 선택적이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그렇다고 해도 또한 석연치 않은 점은 있다. 그것은 해방 이전까지 백석이 보여준 일반적인 행동이나 그의 작품 활동을 보면 어느 구석에서도 카프의 구성원들을 비롯한 좌익문인들이 드러냈던 행동이나 문학적 특성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토속적인 소재로, 모더니즘적인 방법론을 동원하여, 어느 단체에도 끼지 않은 채 탈정치적이며 탈이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찌보면 백석과 친했던 허준이 월북을 했고, 역시 백석과 가까웠던 연극인이고 동시에 문인으로 활동했던 안석영이 카프의 일원이었으며, 대체로 당대 지식인들이 일반적으로 좌익 쪽에 기울어져 있던 해방기의 문단상황이 그로 하여금 북한에 거주하게 만든 하나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을지 모른다고 짐작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짐작이다.
어쨋든 백석은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그런데 혹자는 백석이 만주로부터 고향인 정주로 돌아가 한때 고당 조만식의 비서로 있었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 점은 크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물론 백석이 오산학교를 다닐 시절 그 당시의 오산학교 교장이 고당 조만식이었고 또한 고당이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한 일까지 있는 것을 상기한다면 고당과 백석사의 친밀한 관계를 상정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1961년도까지 백석이조선작가동맹 기관지인《조선문학》에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해볼 때 백석이 고당의 비서 노릇을 하였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고당 조만식은 북한에서 일찍이 김일성 저우에 의하여 숙청을 당하였는데 만약 백석이 고당의 비서 노릇을 하였다면 그가 1950년대에는 물론 1961년 까지 공산당 산하에 있는 조선작가동맹의 맹원이 되어 그 기관지인 《조선문학》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학활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백석이 6·25때 북진한 국군에 의하여 한때 정주 군수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는 이야기도 설득력이 거의없다. 이 점 역시 만약 백석이 남한군에 의하여 점령된 정주땅에서 중주군수직에 있었다면 그야말로 전쟁 직후에 수청당했어야 마땅하지 1961년까지 살아 남아 조선작가동맹 산하에서 문학활도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백석의 북한 거주가 어느 정도 선택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가 적어도 1961년까지는 공산당 산하 조선작가동맹에 문인으로 소속되어 조선작가동맹 기관지인 월간 《조선문학》지에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는 점을 보아서도 얼마간 짐작된다. 백석이 《조선문학》지에 발표한 글로는 아동문학평론, 창작시, 수필, 번역시가 있다. 물론 백석이 북한에서 그간 발표한 작품으로 이것만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김자야의 책 『내 사랑 백석』의 뒷부분에 밝혀놓은 목록을 일부 자료로 해서 《조선문학》지를 통하여 찾아본 것만을 놓고 본다면 백석은 북한에서 아동문학에 상당히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조선작가 동맹의 아동문학분과에 소속돼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조선문학》지에 실린 백석의 아동문학 관련 평론으로 밝혀진 것만 하더라도 3편이나 된다. 그러나 이 숫자만을 놓고 생각하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조선문학》지에 아동문학작품과 관련된 평론을 쓴 사람으로는 백석 이외에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으며 백석이 같은 기간에 발표한 시작품이 네 차례에 걸쳐 12편임을 고려해볼 때, 그가 북한에서 아동문학 작품에 보여준 관심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석이 북한에서 《조선문학》지에 발표한 아동문학작품 관련의 평론 세 편은 《조선문학》 1956년 5월호에 실린 「동화 문학의 발전을 위하여」와《조선문학》1956년 9월호에 실린 「나의 항의, 나의 제의 : 아동시와 관련하여, 아동 문학의 새 분야와 관련하여」 그리고 《조선문학》1957년 6월호에 실린 「큰 문제, 작은 고찰」이다. 여기서 백석은 일관되게 아동문학은 교양과 선전의 무기로서 사회주의 혁명의 한 부분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이외에도 백석은 창작시를 《조선문학》지에 발표하고 있는데 그 창작방법이나 정신은 당의 방침에 충실한 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석이 북한에서 발표한 시는 분단 이전에 그가 발표한 시와 그 성격이 무척이나 다르다. 이런 사정은 그가 번역한 시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백석은 소련 시인 이.뜨왈도브스끼의 작품 「레인과 난로공」을 번역하여 《조선문학》1956년 4워호에 발표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레닌이 난로공을 찾아와 보살피고 위로할 만큼 따뜻하고 위대한 지도자임을 찬미하고 있는 내용의 글이다. 그리고 그는 수필에서도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는 바탕위에서 소위 사회주의적 도덕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확인된 작품만을 놓고 본다면 백석은 적어도 북한에서 그의 나이 50이 되던 1961년 까지 조선작가동맹에 소속되어 창작을 하고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때는 그동안 출세가도를 달린 한설야와 그 계열의 문인들이 숙청당하기 직전이다. 그러니까 백석은 해방 후 약 15년 동안은 북한에 살면서 그 체제에 동조하는 글을 쓴 셈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백석은 1961년 까지 북한 사회의 충실한 작가로서 글을 쓰다가 한설야 계열이 숙청당할 때 함께 숙청을 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이후에도 계속 북한체제와 이념을 따르거나 주창하면서 다른 지면을 통하여 글을 썼는지 확실하게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그 이후 백석의 이름이 이기영이나 박세영, 백인준이나 홍명희 등의 경우와 같이 전면으로 부각된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걸 보면 북한 문단에서 그는 성공적으로 끝까지 활동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1912년 생인 백석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그는 우리 나이로 85세이다. 1913년 생인 김동리가 비교적 장수를 한 후 작년에 작고했으며, 1915년생으로 평안북도 출신이고 한때 백석이 다녔던 정주의 오산학교를 다니기도 했던 황순원이 월남하여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것을 본다면 백석이 살아있을 가능성도 희박하나마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추측이다. 그리고 그가 1961년까지는 작가동맹에 소속되어 작품을 발표하였다는 것만 사실일 뿐 그에 대한 다른 뒷소식은 거의 전해지는 바가 없다.
샛별같은 모국어에 실린 민족현실
"차디찬 아침인데 /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저고리를 입고 /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계집아이는 자성으로 간다고 하는데 /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밖에 / 내지인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밈을낸다 / 계집아이는 몇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 이렇게 추운 아침인데도 손이 꽁꽁 얼어서 /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팔원>전문)
1930 년 대는 일제가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면서 식민지 수탈을 더욱 강화한 엄혹한 시기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문학이 두드러진 활기를 띠고 활짝 꽃핀 시기이기도 하다. 연세대 이선영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30년 대에 생산된 작품의 양은 20년 대의 세배를 훨씬 웃돌고 40년 대의 두배가 넘으며 심지어 50 년 대보다도 더 많다.
시의 경우만 보아도 김기림 정지용 김광균 김영랑 박용철 오장환 이육사 유치환 이용악 서정주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설정식 임화 윤동주 김상용 등 빛나는 별들이 이리저리 무리지어, 모더니즘 계열, 순수서정 계열, 민족의식 계열 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구인회, 시문학파, 카프 등등의 이름으로 성좌를 이루며 30년 대 문학의 천체도를 수놓고 있다.
그 별들 가운데 하나가 백석이다. 30년 대의 어둠을 밝힌 일등성이 틀림없는, 그리고 특히 '민족문학'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보면 그 밝기가 더욱 도드라질 이 별은 그러나 오랫동안 남북한 문학의 천체도에서 누락돼 있었다. 남한의 문학사에서 그가 누락된 것은, 임화나 이용악의 경우가 그들의 정치적 입장과 실천이 직접적 이유가 된 것과는 달리, 해방과 분단의 시기에 그가 우연히 자신의 고향인 북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모국어를 수호, 보전하고 그 모국어 속에 민족적 삶의 실감을 담아 내는 것이 식민지의 시인에게 맡겨진 최대의 소명이라고 한다면 백석은 자신의 소명을 누구 못지않게 충실히 수행한 사람이다.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수원 백씨 백용삼으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석(白石,白奭)은 필명이고 본명은 기행이다.
그의 부친은 우리나라 사진사의 초창기 인물로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으로 일했고, 퇴임 뒤에는 낙향해 정주에서 하숙을 쳤다.
분단 이전에 경의선을 타면 서울에서부터 서른 네 번째 역인 정주는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번성하던 지역이지만, 백석의 집안은 기독교와는 무관한 분위기였다. 시인이 어린시절을 보낸 이곳 주위의 풍경은 "산턱 원두막은 뷔었나 불빛이 외롭다/ 헌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 잠자리 조을든 문허진 성터 /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 ..."로 시작되는 '정주성'을 비롯해 첫 시집 <사슴> 속의 많은 시에 녹아들어가 있다.
백석은 이곳에서 오산소학교와 오산학교를 다녔다. 이 시절 그는 처음으로 서울을 다녀왔는데 뒷날 이때의 서울 인상을 "건건쩝쩔한 내음새나고 저녁때 같은 서글픈 거리" 라고 저고 있다.
18살 때인 1929년 오산고보로 이름을 바꾼 이 학교를 졸업한 백석은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에 유학해 아오야마 학원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 한다.
백석은 대학시절인 1930년 1월 한 여성의 기구한 삶을 그린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나온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 확인된 백석의 유일한 소설이다.
1934년 귀국한 그는 조선일보사 출판부기자로 입사해 당시 이 신문사가 내던 잡지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리고 이듬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해 시단에 얼굴을 내민다. 이 시를 발표하기 전부터 백석은 정주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추억을 담은 시를 여럿 쓰고 있었고, 그 덕분에 시단 데뷔 이듬해인 1936년 1월 35편의 시가 <사슴>이란 표제로 묶여 나올 수 있었다. 1월 29일 서울 태서관에서 열린 이 시집 출판기념회의 발기인은 안석영 함대훈 홍기운 김규택 이원조 이갑섭 문동표 김해균 신현중 허준 김기림 등 11인으로 돼 있어 당시 백석의 교우관계를 짐작하게 해준다.
한국 만화 , 영화계의 선구자인 안석영을 포함해 소설가 허준 함대훈 그리고 김기림 등 발기인의 많은 수가 조선일보사의 동료들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학예부에 있던 시인 김기림은 이 신문의 신간소개란에 쓴 '<사슴>을 안고'라는 글에서 "<사슴>은 그 외관의 철저한 향토추미에도 불구하고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김기림은 <사슴>의 시들이 보여주는 감정의 지적 통제에서 모더니즘의 영향을 읽어낸 것이다.
그러나 초기 백석이 시각적 이미지 묘사를 중시한 이미지즘 계열의 모더니스트적 면모를 다소 드러냈다고 하더라도 뒷날의 시편들과 함께 <사슴>을 더욱 또렷이 특징지우는 것은 북방정서, 강한 방언주의 그리고 민족주체의 민중정서 같은 것들이다.
그가 이용악 등과 함께 나누고 있는 북방정서도 우리 시의 주류에서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눈여겨볼 만하지만, 지난 87년 <백석시전집>을 엮어낸 시인 이동순씨(영남대교수)는 특히 그의 방언주의에 주목한다. 전집 뒤에 낱말풀이를 붙여야 했을 정도로 심했던 백석의 방언주의는 이씨에 따르면 민족언어의 뿌리조차 말살하고자 획책했던 일제의 파쇼적 불법성 앞에서 그를 지탱해준 목구어 정신의 표상이다. 그리고 그 방언주의는 민족 주체성의 확보와 모든 동족 사물들 사이의 관계의 합일에 목표를 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타는 모닥불 / / ... "로 시작되는 시 '모닥불'은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개체, 개인을 '모닥불'이라는 합일의례의 공간 속에서 융화시키며 시인의 평등사상,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여승'의 ".../ /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덩판 /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섶벌 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 갔다 /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 ..." 같은 구절들은 지아비와 딸을 잃은 여성의 삶을 통해 식민지의 한 가정이 파괴되는 과정을 압축함으로써 뒷날 '팔원' 같은 시에서 더 심화될 민족현실의 탁월한 시적 형상화를 예고하고 있다.
백석은 <사슴>을 낸 해에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전직한다. 그의 전직은 그보다 1년 앞서 영생학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평론가 백철의 추천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동문학가 강소천씨와 목사 김관석씨가 이 시절 백석에게 배웠다. 이들과 함께 백석의 제자였던 충북 청주시의 개업의 김희모(70)씨는 이동순씨가 정리해 월간 <현대시> 90년 5월호에 기고한 '내 고보시절의 은사 백석선생'에서 이 시절의 백석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김씨에 따르면 백석은 뛰어난 기억력과 훌륭한 영어발음을 갖춘 '모던보이' 였고, 수업시간에 러시아 작가들에 관해 주로 얘기했으며, 축구부의 지도교사였다.
백석은 교직 생활 2년 만인 38년 이 학교를 사직하고 다시 서울로 와 <여성>의 편집을 보다가 이듬해에 만주의 장춘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백석의 생애는 그의 문학사적 중요도에 견주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영생고보의 취직부터 만주로 건너갈 때까지 3년 동안의 행적은 이 시기에 그와 동거했던 '자야 여사'의 회고에 의해 그 편린이 밝혀지고 있다. 성이 김씨인 자야 여사는 현재 76살로 미국에 살고 있는데, 그가 서울에 살던 3년 전 이동순씨를 만나 행한 백석에 관한 회고가 <창작과 비평> 복간호 (1988년 봄)에 실려 있다.
그가 백석을 만난 것은 36년 가을 함흥에서였고 '자야'는 백석이 그에게 지어준 호라고 한다.
자야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은 37년과 39년 부모의 강권으로 두 차례에 걸쳐 고향에서 혼례를 치렀다. 그러나 그 때마다 며칠을 못 채우고 다시 자야 여사에게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당시 백석과 가까웠던 사람들로는 시집 < 사슴 >의 발기인들외에 함께 유학을 했던 정근양, 동향선배 백철, 서양화가 정현웅 등이 있었다. 정현웅은 31년 선전에서 작품 '여인상'으로 특선한, 백석의 <여성> 동료이다.
영생학원을 그만둔 백석이 서울로 돌아와 자야 여사와 살림을 차린 곳은 청진동이었는데 그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이 바로 이 청진동 집이라고 한다.
자야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백석은 일본작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이야기를 자주 했으나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은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또 육류를 싫어하고 나물반찬을 좋아했다고 한다.
백석의 시에는 동치미국, 댕추가루, 명태창난젓, 맨모밀국수 등 음식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경상대 유재천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백석의 ㅣ에 등장하는 음식물 명칭은 1백여가지에 이른다. 유 교수는 백석의 시에서 음식물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만주로 건너간 백석은 그곳에서 생계유지를 위해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소작인 생활, 세관업무 등에 종사하며 해방이 될 때까지 머문다.
이 시절 만주의 하얼빈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김희모씨가 백석이 일하던 안동의 세관에 들러 인사를 한 적이 있는데, 백석은 지난날의 멋스러움과 생기발랄함이 사라진 초라한 중년사내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백석은 40년 10월에는 자신이 번역한 토머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의 출간을 앞두고 교정을 보기 위해 잠시 서울에 다녀가기도 했다.
백석의 대부분의 시가 만주 이주 이전에 쓰이기는 했으나, 만주시절에도 그는 10여편의 시를 국내의 잡지에 발표했다. 대개 40년초부터 41년 4월까지 1년 남짓 사이에 쓴 그 시들은, 연구자들에 따르면, 역사에 대한 가책과 회의 그리고 고향 상실감과 운명론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로 시작해서 시들어가는 민족사를 부끄러움에 담아 슬프게 노래한 '북방에서'나 이역생활의 쓸쓸함과 망향의 그리움이 짙게 배어있는 '흰 바람벽이 있어', 두보나 이백같이' 같은 시들이 그 예이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조국으로 돌아와 한때 신의주에 거주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분단과 함께 그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추적하는 것이 남쪽에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6ㆍ25때 북진한 국군에 의해 한때 정주군수로 임명되었다가 그 때문에 그 뒤에 숙청되어 늙마를 불우하게 보냈다고 한다. 반면에 전쟁 뒤에도 그가 김일성대학에서 얼마동안 강의를 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문학>에 의하면 62년까지 그가 시와 평론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단고 밝힌 이동순씨는 그러나 백석의 방언주의와 북한의 문화어정책이 조화를 이룰 수는 없었을 터이므로 그의 문학활동이 활발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모국어의 지역성과 향토성을 짙게 풍기는 어법에 주목한 30면대의 시인 박용철에 의해 "전반적으로 침식받고 있는 조선어에 대한 혼혈작용 앞에서 민족의 순수를 지키려는 으식적 반발의 표시"로 해석된 백석의 시는 이렇게 남북 양쪽으로부터 홀대받았다.
그러나 백석 시의 영향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는 이동순씨는 백석의 시가 민족주체성이 망가진 시대에서 고향의식과 그 끈질긴 생명력을 팽팽히 응집합으로써 꺼져가는 이 나라 모국어시의 명맥을 되살려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백석의 모더니즘 세례를 주목하는 시인 최두석씨(강릉대 교수)도 백석은 외래적인 모더니즘의 단순한 수용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장 주체적인 입장에서 소화하여 독자적인 세계를 열어보였다는 점에서 김광균이나 김기림 같은 군소시인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고종석 (1991.10.11)
본문 내용중에 확인된 소설이 < 그 모와 아들 > 한편이라 하였는데 그밖에 <마을의 유화> - 1935, <닭을 채인 이야기> - 1935 등이 알려져 있고 자야 여사의 경우 작년 (1999)에 타계 했습니다.
백석은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1936년 200부 한정본으로 낸 첫시집 <사슴>이 살아 묶은 시집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의 시는 나라잃은 시기, 우리문학이 이룬 빼어나고도 소중한 보석상자다. 그의 시는 왜로(倭虜) 제국주의자들이 망가뜨린 토착 민속 현실과 전통 정서를 옹골차게 끌어 안으며, 그것을 부풀림없이 속속들이 되살려 내는 일에 아낌없이 바쳐졌다.
그의 시 곳곳에서 반짝이는 기물 상상력이나, 다양하고도 흥겨운 민속 체험, 게다가 친족과 겨레 공동체의 아픈 현실에 대한 한결같은 공감과 장소사랑, 식민자들의 지배언어와 맞선 고향 평북의 생생한 토박이말뿐 아니라, 그것을 두루 끌어 안은 생명 존중과 합일의 정신 속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제국주의의 노예 문화와 공간 지배에 맞선 대항문화로서 지닌 바 값지면서도 당당한 속뜻은 그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백석은 광복 뒤 북한에 그냥 머물며 활동했다. 그나마 1962년부터는 북한문단에서 숙청된 듯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 탓에 남북한 문학사 모두에서 그는 이제껏 알게 모르게 잊혀진 시인이 되어 있었다. 그에 대한 연구논문이 나오기 시작한 때는 1980년을 지난 몇 해 뒤부터였으며, 이동순이 처음으로 <백석시전집>을 묶어 세상에 널리 그의 시를 다시 알린 때는 지금부터 고작 십 년 앞섰을 뿐인 1987년이었다.
그 뒤 김학동이 엮은 <백석전집>과 시전집 <가즈랑집할머니>이 나왔고, 1950년대 발표했던 번역시까지 모아 송준이 <백석시전집>을 내놓은 해가 1995년이었다. 정효구가 엮은 <백석>이 그 뒤를 이었으며, 이동순은 1997년에 이르러 새로이 시전집 <여우난골족>을 묶어냈다. 이리 보면 세상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낸 지 십 년을 넘어서는 짧은 동안에 백석의 작품은 여섯 차례나 전집 꼴로 묶여지는 행운(?)을 얻은 셈이다.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해서 지나친 말이 아니겠다.게다가 여러 종에 이르는 선집까지 들면 그 수는 더한다. 올곧고 바른 창작 정신은 끝내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그의 문학은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백석 시는 벌써부터 뒷날의 시인들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주기에 이르렀다. 어느덧 그의 시에 대한 영향사가 따로 씌어지고 있는 사실이 그 점을 잘 말해 준다. 반갑고 기쁜 일이다.
이제 젊은 비평가 김재용이 그동안에 나왔던 백석전집에서 훌쩍 더 나아간 <백석전집>을 새로이 엮었다. 나라잃은 시기에 씌어진 시 95편, 수필 3편, 소설 3편에다, 광복 뒤 발표한 동화시 12편, 시 13편, 평문 4편, 그리고 정론 3편을 이번 전집은 싣고 있다. 새로이 여러 작품을 힘들여 찾아내고 간추려, 이제까지 나온 전집 가운데서 가장 많은 작품이 실렸다. 이 일만으로도 엮은이는 우리문학사에 큰 공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서도 각별히 1957년 북한에서 낸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와 동화평론을 처음으로 찾아 되살려 낸 점이 돋보인다. 백석은 광복 뒤 북한에 남아 있으면서, 한동안 조만식선생의 비서로 일하기도 한 사람이다. 그 뒤 북한의 정치 변혁 속에서 어렵사리 살길을 찾아 나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석이 새로이 찾아들어 섰던 아동문학의 세계는 북쪽에서 마냥 곤고했을 그의 삶자리를 일깨워 주는 좋은 고리가 되는 까닭이다.
목숨의 있고 없음, 슬픔과 위안을 하나로 태워 주는 넉넉한 <모닥불>에서부터, 혈연적 친밀감으로 환하게 살아 오르는 <여우난골족>, 배달겨레의 끊일 수 없는 기골을 그려 준 <북방에서>, 노예 현실에 대한 아픈 공감이 잘 옹근 <팔원>, 게다가 절망에도 품격이 있음을 아름답게 보여 주는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의 목소리를 따라 가면서 백석전집을 펼치다 보면, 어느 작품에서나 그의 시가 주는 감동은 새롭다.
읽는 이들은 그의 작품을 따라 읽으며 백석의 고향 평북 정주 벌판 - 백석이 좋아 했던 선배시인이었던 소월의 고향 곽산과 이웃한 곳이다 - 을 꿈꾸어 볼 일이다. 진달래꽃이 아름답게 핀 약산 동대는 먼 곳, 그 곳을 바라보며 백석이 사랑해 마지 않았던 여인과 지중지중 게처럼 거닐었을 원산 앞바다를 뒤 따라 걸어도 좋으리라. 백석이 끌어다 주는 밝은 시의 볓살이 읽는이의 마음을 따사롭고도 따사로이 비춰줄 것이다.
새로이 전집이 나온 일을 기회 삼아 백석 시 연구뿐 아니라, 백석 시가 일반인 속에서 더 널리 사랑 받게 되기를 바란다. 읽는이들은 백석이 지녔던 섬세한 생명에 대한 사랑과 심지 굳은 합일의 정신을 따라 가면서 독특하면서 흔하지 않은 감동에 젖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한 백석 시에 대한 관심이 더욱 꼼꼼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연구가들의 잇다른 분발 또한 이 책이 재촉하는 바다.
백석, 그는 우리 겨레가 오래도록 사랑할 나머지를 한참 더 남겨 둔 시인이다. 그의 시는 나라잃은 시대 우리문학이 절망과 비탄 속에서 솟구쳐 올린 이채롭고도 환한 붙박이별이다. 하늘로 솟아 올라 환하게 빛나는 문학, 그런 문학을 우리는 고전이라 일컫는다. 백석의 시는 우리 겨레가 알게 모르게 잊고, 돌아보지 않았을 때에도 일찌감치 하늘 드높이 올라서 스스로 빛나는 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