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聖山) 장기려 박사의 신앙과 영성
출처: 2013년 06월 17일 (월) 교회와 신앙 webmaster@amennews.com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94
2017.4.12
[이 글은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한복협, 회장 김명혁 목사)가
지난 6월 14일 서울 명일동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에서 개최한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발표된 논문입니다. 이날 월례기도회
는 작은 교회 목회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행사로 진행
됐으며, 전국 120여 명의 미 자립교회 목회자 및 사모들이 참석해
잔잔한 감동의 목회현장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편집자주>]
이상규 교수 / 고신대학교 역사신학
2017.4.12
성산 장기려 박사는 가난한 자, 약자들을 위해 봉사했던 선한 의사로서 그의 삶의 여정을 결정했던 가치체계는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는 무교회 신앙과 무교회주의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나 교회주의를 부정하지 않았고, 장로교회의 울타리 안에 정주하면서도 무교회주의를 수용하였던 인물로서 그는 교파적 한계에 안주하지 않았던 실천적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유일성은 인정하되 신앙의 다양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복음병원의 설립과 봉사, 청십자의료조합의 결성, 청십자병원의 설립 등 기독교의사로서의 삶을 통해, 사랑과 선의, 무사무욕, 자선과 봉사로서의 윤리, 그리고 함께 사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이를 통해 장기려는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하고, 기독교적 사회참여방식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성산(聖山) 장기려(張起呂, 1911-1995) 박사는 선한 의사로 일생을 살며 기독자적 삶을 살았던 분으로 한국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951년 복음병원의 설립에서부터 1976년까지 25년간 원장으로 일했고, 여러 의료기관에서 봉사하였다. 특히 그는 청 십자 의료협동조합을 창설하고 청신자 의원을 개원하는 등 가난한 서민을 위한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고,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한 여러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실천적 의사로서, 그의 삶을 결정했던 행동양식 (behavior pattern), 신념체계 (value system)의 기초는 기독교 신앙이었고, 그의 사회적 활동(social action)을 결정했던 동기는 그의 기독교적 영성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삶의 여정과 기독교 신앙, 그리고 그 신앙에 기초한 봉사의 삶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삶의 여정
장기려(張起呂, 1911-1995)는 1911년 음력 8월 14일 (호적상으로는 1909년 7월 15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양하면(楊下面) 입암동(立岩洞) 739번지에서 한학자였던 장운섭(張雲燮, ?-1953)과 최윤경(崔允卿, 1870-1968)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함석헌과 동향으로서 장기려가 태어난 곳은 함석헌이 출생한 용천군 부라면 원성리와는 불과 30리 거리였다. 성산의 모친은 초대선교사를 통해 기독교신자가 되었고, 부친은 후에 입신했으나 후일 장로가 되었다. 비교적 부유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한 장기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조모이신 이경심이었다. 장기려가 12살 때까지 생존했던 할머니는 신앙과 삶의 여정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으로 열려져 있다.
장기려는 여섯 살 때인 1918년 부친이 설립한 의성학교(義聖學校)에 입학하였고, 5년간 교육을 받은 후 1923년 졸업하였다. 송도(松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 그는 5년간의 수학하고 1928년 졸업하였다. 한 때 모교인 의성학교 교원으로 일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로 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專)에 지원하였다. 그가 경성의전에 입학하던 1928년 당시 조선인 인구는 1천 900만 명, 71개의 사립병원과 43개의 관립병원 등 총 114개소의 병원이 전국에 산재해 있었고, 1,622명의 의사가 있었으나 한국인이 운영하는 병원은 8개 처에 불과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병원이 42개 처, 외국인(주로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이 20개 처였다고 한다. 1928년 당시 한국인 의사는 806명, 일본인 의사는 786명이 있었다.
장기려가 세브란스의전이 아닌 경성의전을 선택한 것은 저렴한 학비 때문이었다고 한다. 경성의전은 일 년 학비가 35원으로서 사립인 세브란스의전의 100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장기려는 가정 사정을 고려하여 학비가 싼 학교를 선택했으나, 경성의전은 입학정원의 3분지 2를 일본인으로 충원하도록 도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기려는 이 학교에 입학하게만 해 준다면 치료한 번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2) 아마 이것이 ‘선한 의사’로서의 생애를 결단했던 첫 출발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학교에 입학한 그는 5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1932년 3월 졸업하였고, 그해 4월 9일 김봉숙(金鳳淑)과 결혼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는 장인이 된 김하식(金夏植)의 권유로 백인제(白麟濟) 선생 문하에서 외과를 전공하였다. 그 후 그는 후복막 봉과직염(後腹膜 蜂窠織炎)과 패혈증(敗血症)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1940년 3월에는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라는 제목의 의학박사 학위 청구논문을 나고야(名古屋)대학에 제출하였고 그해 9월에 통과되어 의학박사가 되었다.
그 동안 경성의전 외과에서 봉사했던 그는 이용설(李容卨)의 소개로 1940년 3월 평양의 연합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갔다. 이 병원은 1891년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감리교의 윌리엄 홀(Dr William Hall, 1860-1895)이 1894년 11월 34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에 의해 1897년 설립된 기홀병원(紀忽病院, The Hall Memorial Hospital)으로 시작되었는데, 1921년에는 평양의 장로교병원3) 과 합병되어 운영해 오다가 1923년에는 역시 평양의 광혜여원(廣惠女院)4) 과도 합병되어 평양 연합기독병원(Pyengyang Union Christian Hospital)으로 개칭되었다. 이 병원을 연합병원이라고 한 것은 감리교 선교부와 장로교선교부가 연합하여 운영하던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장기려 박사가 이 병원으로 옮겨 간지 두 달 후인 그해 11월에는 원장이었던 북감리교 선교사 안도선 (安道宣, Albin Garfield Anderson, 체한기간 1911-1941)이 귀국하게 되자 장기려는 박사학위 소지자라는 이유로 병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인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질시와 시기 때문에 두 달 만에 원장직에서 물러나 외과과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변함없이 성실히 봉사한 일은 아름다운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그는 이때를 회고하면서 “환자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는 강등 자체는 조금도 서럽지 않았으나 텃세는 서러웠다”고 술회하고 다시 외과과장직으로 돌아와 일한 10개월 동안은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밀도 있는 신앙생활을 했다” 고 했다. 이곳에서 믿음으로 사면초가를 극복한 일은 “평생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보람이 있었을 때였다”6) 고 회고했다.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일한 기간인 1942년에는 후학인 민광식(閔珖植)과 함께 “농흉(膿胸)에 관한 세균학적 연구”라는 논문을 조선의학회지(朝鮮醫學會誌)에, 단독연구인 “근염(筋炎)의 조직학적 소견”을 일본외과학회에서 발표했다. 1943년에는 간상변부에 발생한 간암의 설상절제수술(楔狀切除手術)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조선의학회에서 발표하여 주목을 받은 일도 있다. 신경쇄약으로 휴양 중에 해방을 맞은 장기려는 그해 11월에는 평양도립병원장 겸 외과과장으로 약 일 년 간 일했다. 1947년 1월부터는 김일성대학의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일했다. 그는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이 대학으로 갔고, 이 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주일을 지키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먼저 기도하는 등 일관된 신앙의 길을 갔다고 한다. 그의 성실함과 신실함, 그리고 검소한 생활 때문에 이곳에서도 그는 신뢰를 얻었고, 1948년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다.
1950년의 한국전쟁과 분단은 커다란 시련을 안겨 주었다. 장기려는 1950년 12월 차남 가용(家鏞)과 친구 7-8인과 함께 남하하여 그 달 18일 부산에 도착했다. 평양 종로 앞에서 본 아내의 모습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대면이었고, 다른 가족이 함께 남하하지 못한 것은 일생동안의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부산에 온 그는 곧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약 6개월간 봉사했고, 1951년 6월부터는 경남구제위원회의 총무 전영창(全永昌), 서기겸 회계인 김상도(金相道), 초량교회 담임목사였던 한상동(韓尙東)의 요청으로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했다.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7) 이때부터 그는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 일했는데 초기 복음병원 시절은 의사로서 가장 보람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8) 그는 복음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1953. 3.-1956. 9),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및 학장(1956. 9-1961. 10), 그리고 서울 가톨릭의대 외과학 교수(1965-1972. 12)로 봉사하기도 했다.
이 당시 부산, 경남지방에는 의료기관이 많지 않았고, 복음병원은 지역사회를 위해 기여했다. 특히 그가 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기간 동안 복음 병원은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구호, 자선병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장기려는 간 연구가 미진했던 1959년 2월 당시 간의 대량절제수술을 성공하였고, 1961년에는 간암에 대한 연구로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의료 활동 외에도 1956년에는 성경공부를 위한 “부산모임”9) 을 시작하였고, 1959년에는 일신병원 설립자였던 매켄지(Dr Helen Mackenzie), 내과의사인 이준철(李俊哲), 치과의사인 유기형(劉基亨) 등과 함께 '부산기독의사회'를 조직하였다. 또 1968년에는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복음병원 분원에서 채규철(蔡奎哲), 조광제(趙光濟), 김서민(金瑞敏), 김영환(金永煥) 등과 함께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했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 라는 취지로 시작된 이 의료보험조합은 순수 민간단체에 의한 의료보험 기구로서 영세민들에게 의료 복지 혜택을 주기 위한 기구였다. 정부가 의료보험제를 실시하기보다 10년 앞서 시작된 이 의료보험조합은 1975년에는 의료보험조합 직영의 청십자의원 개원을 가능케 했고, 이듬해에는 한국 청십자 사회복지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그의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79년 8월에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장기려는 복음병원에서 은퇴한 후에도 청십자의원에서 진료하는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였다. 기독교적 가치를 보여 주는 그의 삶의 여정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볼 때 사랑, 생명, 평화는 그의 생애를 엮어간 주요어 였고, 이런 삶의 근저에는 기독교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고려 없는 장기려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2. 그의 삶의 기초로서의 기독교 신앙
장기려의 생애와 그의 삶의 여정을 헤아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前提)는 기독교 신앙이었다. 기독교신앙은 그의 삶과 인격, 신념 체계와 행동양식, 그리고 세계관의 기초였다. 그의 이타적(利他的) 삶,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과 인술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앙은 그의 삶의 근거이자 기초였고, 그의 삶의 과정에 의미를 주었던 동력원이었으며 그의 삶의 목표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그의 84년간의 생애를 움직여 왔던 축이었다고 볼 수 있다.
1) 무교회주의의 영향
전기한 바와 같이 그는 조모이신 이경심을 통해 신앙을 배웠고 교회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인 1925년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깨닫고 신앙적 삶을 모색하게 된 것은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 그는 후지이 다께시(藤井武),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 야나이하라 다대오(失內原忠雄), 김교신(金敎臣, 1901-1945), 함석헌(咸錫憲, 1901-1989) 등의 저서를 읽었는데10) 일본의 무교회적 인사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특히 그는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정기구독 하였고, 1942년 3월 <성서조선> 제158호의 권두문인 “조와”(弔蛙)라는 글이 문제가 되었을 때 그는 정기 구독자라는 이유 때문에 김석목(金錫穆), 유달영(柳達永) 등과 함께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12일간 구금된 일이 있다. 김교신이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때는 1927년 3월이었고, 이들은 우찌무라의 영향을 받아11) 조국의 복음화를 가슴에 안고 “성경을 조선위에, 조선을 성경위에” 라는 일념으로 1927년 7월 <성서조선>을 창간했었다. 장기려가 일본 무교회 인물들의 저작을 접했을 때가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였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아마도 1930년대 초부터 <성서조선>을 구독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장기려는 김교신12), 함석헌13)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장기려는 “김교신은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14) 라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또 10년 연배로서 동향인이었던 함석헌으로 부터도 적지 않는 영향을 받았는데, 그를 처음 만난 때는 1940년 1월초 서울 정릉에 있던 김교신의 집에서였다.15) 이때부터 그는 함석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존경하였고 깊은 교우관계를 유지하였다.16)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장기려는 당시 대표적인 무교회주의자들과 교제하였고 저들을 통해 깊은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교회주의자로 머물러 있었다. 해방과 함께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던 산정현교회가 다시 회집을 시작했던 1945년 9월부터 그는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17) 곧 집사가 되었다. 또 청년반의 성경강해를 맡아 봉사했는데, 로마서를 강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는 그가 평양인민병원 원장 겸 외과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18) 1948년 8월에는 양재연집사와 함께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았다. 말하자면 교회주의자로 제도교회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연구와 그 가르침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주기철과 무교회주의자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았고, 후일에는 신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상합할 수 없는 함석헌과 한상동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지 않았으며, 양자와 깊이 교제했다. 그는 교리적 일관성보다는 영적 유익을 우선시했고, 교리적 다양성을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 장기려는 어느 극단에 안주하여 다른 종파를 무시하는 교조주의적 편협성에 빠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남하한 이후 장기려는 이이라 장로, 박덕술 권사와 함께 1951년 10월 부산 중구 동광동에서 북에 두고 온 산정현 교회를 재건하였다. 그가 남하한 이후 첫 주일인 1950년 12월 24일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에 참석하여 예배드렸고 제3육군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정보기관, 삼일사에 끌려가 일주일간 조사를 받은 일이 있는데 이때 한상동 목사와 미국정통장로교(OPC) 선교사인 치과의사 최의손(崔義遜, Dr William H. Chisholm)이 그의 신원을 보증해 주어 풀려난 일이 있다. 장기려는 산정현교회를 재건하기까지 초량교회에 출석하였고,19) 때로 영도교회, 곧 지금의 영도제일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한상동과는 평양에서부터 이미 교제가 있었고 그의 요청으로 복음병원을 개원, 상호 협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상동목사가 삼일교회를 설립할 때 한상동 목사를 따르지 않고 전기한 인사들과 함께 산정현 교회를 재건한 것은 아마도 제도 교회의 문제점, 특히 교단분열과 대립의 와중에서 비본질적인 문제에 관여하지 않고, 도리어 이런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산정현교회를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교회로 한 것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하다.21) 이렇게 볼 때 장기려는 비록 제도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무교회적 가르침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성서조선>의 동인이었던 송두용은 장기려에 대하여 “교회도 떠나지 않고 무교회의 신앙을 이해하며 그것에 대하여 변치 않는 태도가 좋다.” 고 말한 바 있다. 산정현교회 장로로 봉사해 온 그는 1981년 12월 시무장로에서 은퇴하였고 원로장로로 추대되었다. 1987년부터는 흔히 ‘종들의 모임’이라고 불리는 비교파적, 비 조직적 초기교회적 신앙운동 단체에 관여하였고23) 그가 치료차 서울로 옮겨가기까지 이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평소 제도교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보고 지냈던 그는 모든 외형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복음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따라서 그는 ‘종들의 모임’에서 영적 안식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그의 신앙 여정을 종합해 볼 때 그의 신앙사상에는 무교회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건전한 종교”라는 글에서 “종교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회당에 서 있고 사람의 의식에 치중하고 또 신앙 개조 만을 고조하고 음악과 예술적 표현 및 통계만을 들어 평가하게 될 때에는 그 종교는 불건전하다.”고 말하고 이런 외형적인 것에 메이지 않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적 신앙이 참된 종교라고 강조한 바가 있다.24) 이렇게 볼 때 그는 교회의 전통이나 신앙고백, 교리적 내용 (doctrinal integrity)에 대한 관심 보다는 이런 것들에 메이지 않는 신앙운동, 신앙적 실천, 삶이 있는 신앙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신앙의 정통성(Orthodoxy)의 문제보다는 신앙의 정체성(Identity)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분으로 평가된다.
2) 기독교 유일성과 신앙적 다양성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기려는 김교신과 함석헌으로부터 적지 않는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김교신은 1945년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함석헌과의 관계가 보다 깊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함석헌의 모든 사념(思念)을 다 수용한 것은 아니다. 함석헌은 1970년 4월 <씨의 소리>를 발행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으나, 장기려는 이런 일에는 직접적으로 간여하지 않았다. 함석헌이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 점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했으나 한국사회의 문제, 곧 민주화를 이룩하려는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아마도 장기려는 함석헌의 사회참여 방식이 사회문제의 근본적 해결의 길이라고는 보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어떤 점에서 함석헌은 현실주의자였다면 선생님은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차라리 김교신처럼 신앙운동,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개혁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장기려가 함석헌의 입장을 수용하고 있는 점에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함석헌의 신학 혹은 신앙사상은 변화가 많았고, 또 종교상대주의자 혹은 다원(凡)종교주의자였는데 어떻게 기독교 유일사상의 신봉자인 그가 함석헌의 사상을 수용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함석헌은 1921년 오산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유영모(柳永模)를 통해 무교회주의를 배우고 도일한 이후 김교신을 따라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25) 그래서 그는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무교회주의자였다. 그러나 1960년대를 거쳐 가면서 퀘이커교도(Quaker)로 전향하였다. 객관적 말씀 혹은 외적 말씀으로서 기록된 성경 보다는 내적 말씀 곧 내적 빛(Inner light)을 강조하는 주관주의적 성향이 짙은 반전주의적(反戰主義的)인 퀘이커는 함석헌에게 매력적이었고, 결국 그는 형식적으로는 무교회주의에서 떠났다.
비록 그가 1964년 10월 일본의 무교회 인물인 마사이게(政池 仁)와의 대담에서 “나 자신은 무교회 신자라고 생각 한다”라고 했으나26) 사실 그는 퀘이커 집단의 일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함석헌에게는 변화가 많았다. 특히 함석헌은 제도교회의 무용론을 지나치게 역설했고, 심지어는 교회주의는 바리새주의라고27) 매도하고 “조직적 교회를 시인하는 것은 분명히 비그리스도적이다”28) 라고 하였다. 한숭홍교수는 “함석헌은 교회란 마치 악마적 권위로서 신앙인을 위협하고, 협박하고 금전적인 것을 수탈하기 위해 인위적인 미신적 의례를 신성한 효험과 신의 본체로서 믿도록 강요하고 계속 복종을 강요하는 집단으로 분석하고 있다”29) 고 지적했다.
함석헌은 교회주의를 이처럼 비판하면서도 타 종교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1942년 <성서조선>사건으로 감옥에 있는 동안 “불교경전을 조금 읽었다. …그러는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는 근본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고,30) 6.25 동란 중에 “인도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고 읽을수록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분명해 졌다.”31) 라고 했다. 또 1964년에는 “나는 지금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32) 함석헌은 교회제도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신앙, 성례, 교의, 신앙고백, 교회조직 까지 부정하는 극단적 무교회주의자였는데 후기에 와서는 기독교의 유일성까지 부정하고 종교상대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로 발전하였다. 그는 중세 신비주의와 매우 흡사한 주지주의적 신비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그의 사상 때문에 신비적 성향이 강한 퀘이커에로의 전향이 무리 없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후기 행적을 보면 어떤 점에서 함석헌은 기독교 신앙인이라기보다는 범종교주의자(凡宗敎主義者)였다.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듯하면서 동시에 타종교와의 경계선을 제거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종교상대주의 혹은 종교다원주의에 머물지 않고 범 종교주의적 사상으로 발전하였다.33) 이런 점에서 그는 김교신과는 분명히 달랐다.34) 그러나 장기려의 함석헌과의 교분은 계속하였다. 그가 함석헌과의 오랜 교분과 인간적인 우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탓할 바가 못 된다. 문제는 자신의 신앙정신과는 명백하게 다른 함석헌을 ‘부산 모임’의 월1회 정기 강사로 청하였고, 1968년부터 1988년 6월까지 20년간35) 그의 강의를 듣도록 한 일은 장기려의 ‘오직 믿음’의 길을 이해하는데 다소 혼란을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를 장기려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 곧 동향인이라는 지역적 연대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난제가 있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문제는 개인적 친분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선생님의 대승적(大乘的) 포용성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장기려 박사 자신의 주장처럼 복음전도를 위한 ‘부산모임’에 월 1회 범종교주의자를 강사로 청했다는 점은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필자도 이 모임에 참석한 일이 있지만 월1회 함석헌을 초청한 부산모임은 전도를 위한 집회가 아니라, 시국강연회의 성격이 짙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장기려는 교회의 전통이나, 신학, 혹은 교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장기려는 자신의 신앙적 확신을 보지하면서도 타인의 신앙이나 믿음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불관여적 성격’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장기려는 동료의사들이게나 휘하의 제자들에게 신앙적 안내나 지남(指南)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복음병원 재직 중 자신의 휘하에 있는 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권하거나 안내한 일이 드물었다는 공통된 증언은 이런 그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장기려의 입장은 18세기의 경건주의적 입장인데, 그의 신앙적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정리하면, 장기려의 신앙사상은 교회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기보다는 현실적 응답을, 공동체적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성격이 짙으며, 교회적 제도나 조직으로부터 떠나고자 했던 자유교회적이었다.
3. 실천적 삶과 영성
앞에서 지적했지만 장기려의 삶의 양식을 결정했던 신념체계, 사회적 활동 혹은 행동양식의 기초는 기독교신앙이었다. 이 점을 제거하고 나면 그는 한 사람의 휴메니스트일 뿐이다. 그의 생애와 삶의 자취들은 그가 단순히 인도주의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기독교적 영성 때문이다. 그의 삶과 실천은 그의 신앙고백이었고, 신적 명령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래서 의료인으로서 그의 모든 활동은 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였고, 아래로 인간을 섬기는 행위였다. 장기려에게 있어서 의사라는 직업은 마치 루터가 이해했던 것처럼 더 낫고 더 높은 신분에로의 부름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일하도록 부르신 하나님이 소명(召命)이었다. 그 소명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이웃을 섬기는 행위였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두 가지 측면은 그의 의료 활동, 그의 윤리와 행동을 이끌어 가는 축이었다. 장기려의 삶의 행로를 결정했던 신앙적 영성을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사랑과 선의(goodwill)
장기려가 남긴 글 중에 사랑을 주제로 한 글이 절대적으로 다수를 점한다.36) 이점은 그의 삶에 있어서 사랑의 실천이 중요한 주제였음을 보여준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외연(外延)으로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선의는 그의 윤리의 동기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하는 이 말에서 우리는 사랑의 본체를 발견한다. 사랑은 확실히 인생의 지상선이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한다. 도덕의 도덕, 생명의 생명은 사랑이다.”고 했다.37) 그는 이 사랑의 행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38)
장기려는 사랑을 강조한 요한서신을 특히 좋아하였다. 그는 “요한의 사랑의 철학”이라는 글39) 에서,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혁명이다”고 전재하고,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사랑의 본체를 발견한다. 사랑은 확실히 인생의 지상선이다. 사랑에 있어서 율법은 완성된다. 도덕의 도덕, 생명 중 생명은 사랑이다.” 라고 한 다음,
사랑의 유일한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과 결부되지 않고는 사람은 결국 사랑할 줄 알지 못한다. 그런데 한번 깊이 생각할 바가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자연이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리라고 해서 사람에 대한 사랑의 부족을 변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들에 대한 사랑의 반향은 우리들의 하나님의 사랑보다도 차라리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바울의 사랑의 찬미”라는 글 에서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은 영원하며 사랑은 생명 그 자체라고 했다. 그는 사랑과 생명, 평화 이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겼고, 그의 삶은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생애였다.
장기려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는 도움을 준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록 복음병원 제단으로서는 불만이었으나 복음병원 원장으로 있으면서도 서울을 왕래하며 다른 의료기관에 동조(同助)하였고, 본직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자신의 봉급을 삭감해서 받기도 했다고 한다.42) 그가 부산 복음병원 원장직에서 은퇴한 이후에 청십자의료조합과 청십자의원을 개원한 것이나 부산의 아동병원, 거제도의 애광원 그리고 보건원의 자문의로 봉사한 것도 그와 같은 정신의 결과였다. 그는 냉정한 이성으로 헤아리기 보다는 뜨거운 사랑으로 실천한 분이었다. 그의 의료윤리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환자에 대한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
2) 무사무욕(無私無慾, unselfishness)
장기려는 물질이나 돈에 대해 무관심했고, 사리나 사욕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이익추구를 가능케 해 주는 자본주의 제도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필자와의 대화에서 대형교회적 구조나 무리한 교회 건축, 그리고 한국교회의 지나친 성장제일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비판한 일도 있다.43) 인간생명에 대한 고결함, 이것이 의사로서의 그의 관심사였고 그가 추구한 가치였다. 그는 “늙어서 별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다소 기쁨이기는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겸손해 하셨다. 그는 “참되게 사는 사람”이라는 글45) 에서 사리사욕이나 이해타산을 추구하는 것은 두마음(二心)을 가진 자, 변심(變心)하는 자와 함께 참되지 못하고, 진실치 못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무사무욕은 한 시대를 이끌어간 명의로서 갖기 어려운 삶의 태도이다. 그는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았고, 철저한 무욕, 그리고 무소유는 그의 이웃을 위한 사랑과 배품의 윤리였다.
3) 자선(charity)과 봉사로서의 윤리
장기려는 의학적 지성(mind)과 자애의 가슴(heart)을 지닌 의료인이었다. “인술은 자비심”이라는 글에서 그는 의술은 자비의 행위이며 인술은 곧 의(義)라고까지 말했다.46) 또 그는 “참되게 사는 사람”이란 글에서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진리와 겸손을 섬기는 사람’과 함께 참 진실 되게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 글에서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어느 누구든지 다 같이 동일하게 대우하여 주신다. 인격의 차별을 두지 않으신다. 우리도 공의를 행하는 참된 삶을 살려면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고아와 과부, 신체장애자, 정신박약아들을 참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참되게 사는 사람이다.”고 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한 여러 자선활동은 그의 윤리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속받은 자로서 1932년에 의사가 되어”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이고자 했다. 의료를 통한 봉사 그것이 그의 윤리이자 영성이었다.
4) 함께 사는 사회(togetherness)
장기려가 추구했던 또 한 가지는 ‘함께하는 사회’였다. 그의 생애여정과 그의 활동은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창설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도 같이 살기 위한 것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보호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조합운동을 시작할 때 “건강할 때 병자를 돕고, 병에 걸렸을 때 도움을 받자”는 공생(共生)과 상상(相生)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1975년에 부산 수정동에서 청십자 의원을 시작한 것도 가난한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행려환자의 구호, 기독의사회를 통한 구급활동, 간질병환자를 위한 장미회의 운영, 가난한 이웃을 위한 의료보험조합운동, 이것은 공생과 동거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형제애로 살고자 했고, 이북의 무신론자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대하고자 했다. 그는 “이북이 어찌 우리의 적이요 원수란 말인가? 우리의 가족이요 동포가 아닌가?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고 용서해야 한다.”47) 고 했는데 그것은 공생의 정신에서 한 말이다. ‘함께 사는 사회’는 그의 일관된 신념이자 실천 강령이었다. 결국 그는 사랑의 보편주의 (love-universalism)를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맺는 말: 그가 남긴 것
이상에서 우리는 장기려 박사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영성의 흔적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는 비록 교리나 신학전통에 대한 무관심으로 경건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으나, 그의 순수한 신앙, 복음에 대한 순전한 열정, 기독자적 삶에 대한 일관된 생애는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의 생애 여정 속에 서 보여준 몇 가지 열매들에 대해 정리해 두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적 가치(Christian value)를 고양했다는 점이다. 그는 기독자적 사랑을 강조하였고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즉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굴절된 삶의 행태로 비난받는 우리 시대에서 언행일치, 신행일치의 삶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하여 주었고, 기독자적 삶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둘째, 그의 삶은 한국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가 복음의 본질적인 활동보다는 외적 성장이나 외형적 확장을 중시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검소하고도 청빈한 삶을 통해 자본주의적 가치를 비판했다. 그는 혁명적인 방법으로 이 사회를 개혁하고자 시도하지 않고 자신의 의로운 삶을 통해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셋째, 기독교적 사회참여 방식의 한 모델을 제시했다. 한국교회의 사회참여 방식은 양극화되어 있었다. 진보적 교회는 1970년대 이후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등 제도나 조직의 개선을 위해 싸웠고, 개인구원에 대한 무관심은 죄의 심각성을 간과하는 약점이 있었다. 반면에 보수적인 교회는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구원에 일차적인 관심을 둠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였고, 기독교 이념의 사회화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따라서 사회변화와 개선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장기려는 이런 양극단을 지향하고 기독교 정신의 사회화를 추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운동이었다. 기독교적 사랑,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 이타적 생활방식, 이것은 기독교 정신이며 개인의 생활을 통해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독교적 정신을 개인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이를 조직화하고 제도화한 것이 바로 의료보험조합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운동은 기독교의 건실한 사회참여 혹은 사회봉사 방식을 보여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초기 한국교회가 기독교학교를 설립함으로써 특수계층의 사람들만이 누리던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 학교교육을 대중화하여 기독교 교육을 가능하게 했던 것과 같다. 또 병원을 설립하여 현대의학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던 것과 같다. 의료보험조합은 국가 주도의 의료 보험제도가 시작되기 앞서 자의적, 자발적 참여를 통해 영세민들에게 의료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길을 연 것으로서 이 운동은 가난하고 핍절된 이웃을 돌아보는 이상적인 사회참여 혹은 사회봉사의 한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사회개혁을 외친 일이 없다. 또 인권을 위해서나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한 일도 없다. 그러나 그는 우리 사회를 개혁하고 개선하는데 누구보다도 더 큰 기여를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일생동안 생명, 사랑, 평화를 소중히 여겼고 자신의 희생적인 삶을 통해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노예해방이나 사회개혁을 위해 정치적인 투쟁을 한 일은 없으나 그가 가르친 사랑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사회를 개혁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것과 같다. 이렇게 볼 때 장기려는 기독교적 사랑에 기초한 사회참여 혹은 사회봉사의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생애와 삶은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