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소화(小花)… 천하를 바라보며 천공(天空),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천공에 핏빛 석양이 부서지고 있다. 무산(武山), 화천장에서 백 리 가량 떨어진 이곳 무산의 허리에 안개가 걸려 있었다. 무산의 정상(頂上). 일노일소(一老一少)가 마악 무산의 정상에 발을 딛고 있었다. "린아야! 힘들지 않으냐?" 다정한 음성으로 소동을 돌아보는 노인은 바로 절대무제 백운천이었다. "응! 힘들지 않아!" 백무린의 음성이 더없이 맑았다. 그의 맑은 눈이 백운천을 바라보았다. "헌데…… 왜 별안간 산에 내려오는 거야?" "허허허……" 백운천이 뜻없이 미소를 터뜨렸다. 그의 안색은 왠지 어둡기 이를 데 없었다. "린아!" "응?" "내가 너를 데리고 이곳에 온 것은……" "……" "너와 꼭 할말이 있기 때문이란다." '……?' 백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어떤 이야기인데 산에서 해야 하는 거지?" "……" 백운천이 자애스러운 미소를 보냈다. 허나 그 순간 백무린은 얼굴에서 한 가닥 암영을 발견했다. "이상한데…… 할아버지! 뭐 걱정거리가 있지?" "……" 백운천은 그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문득 백무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너의 얼굴을 보는 마직막 순간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백운천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우수가 스쳐갔다. 백운천은 정상에 이르자 멀리 아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였다. "린아야! 춥지 않으냐?" "응! 하나도 안 추워!" 백무린은 신기하다는 듯 정상의 곳곳을 둘러보며 대꾸했다. 무산의 정상에는 아직도 곳곳에 잔설(殘雪)이 남아 있었다. "와! 이곳에는 아직도 눈이 남아 있네……!" 백무린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백무린이 전혀 추위를 타지 않자 백운천의 눈에 순간 기광이 나왔다. '마황금사종의 기연을 얻은 후 린아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몸을 지니고 있는 듯하구나.……' 휘……잉…… 산정(山頂)의 바람은 매섭기 이를데 없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 동기이기는 하지만……' 백운천이 멀리 산하(山河)를 굽어보며 정색했다. "린아야!" "……?" "너는 커서 어떤 인물이 되고 싶으냐?" "커서……?" 잠시 생각하던 백무린이 주저없이 대답했다. "음…… 나는 꽃이나 가꾸며 책이나 읽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백운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허……! 평생 그렇게 살고 싶단 말이야?" "응! 정말이야. 린아는 지금 이대로가 가장 좋아!" 백무린의 맑은 눈에 행복에 찬 감정이 가득했다. "할아버지가 있고 숙부님들도 나에게 너무 잘해 주시니……" 백무린. 소화…… 작은 꽃이라 불리우는 소년. 그의 꿈은 너무도 소박한 것이었다. 허나…… 그의 소박한 꿈조차 실현되지 않을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백운천의 얼굴에 또다시 그늘이 어렸다. '으음…… 내가 린아에게 큰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 이렇 듯 순박한 꿈을 지니고 있는 린아를 무림에 끌어들이려 하다니……' 백운천이 손을 들어 산하에 펼쳐져 있는 광활한 대지를 가리켰다. "린아야! 저 들판이 보이느냐?" "응! 아주 파랗게……" 무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대지. 그것은 실로 장관이었다. 인간이 대우주에 비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느끼게 하는 것 이었고. 또한, 드넓은 대지를 바라보노라면 사나이의 웅지(雄志)가 솟아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장관이었다. "저것이…… 천하(天下)란다!" 백운천의 음성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천하(天下)-! "……" 백무린은 천하라는 말에 알 수 없는 강한 감동을 받았다. "린아야!" "……" "너는, 저 천하를 웅비(雄飛)하는 그런 인물이 되고 싶지 않느냐?" 휘이잉-! 또다시 산정에 한풍이 불어와 백운천의 장삼을 말아올렸다. "저 산아래 보이는 넓은 대지에……" 백운천이 돌연 백무린의 눈을 뜨겁게 직시했다. "무림이라는 세계가 있단다-!" 무림-! 사나이의 열혈(熱血)이 들끓는 곳, "수많은 영웅과 효웅(梟雄)이 각기 꿈을 키우는 곳, 무림이란 바로 그런 곳이란다." "……" "이 할아비 역시 한때 저곳에서 꿈을 키웠단다." "할아버지도?" 백무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몇 째……?" 백무린의 질문은 실로 어린아이다운 순진한 것이었다. "몇 째? 허허허……" 백운천이 부드럽게 웃었다. "몇 째라 말할 수는 없지만…… 이 할아비는 무림에서 절대무제(絶代武帝)라 불리웠단다." "절대무제? 와! 그럼 할아버지가 최고였나보다!" "허허허…… 최고라는 말할 수는 없단다. 단지 조금 알려졌을 뿐이지." "그럼 진짜로 몇 째나 되는 거야……?" 백운천이 백무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허허허……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까……?" 백무린의 눈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치이…… 겨우!" "겨우라니……?" 백운천이 문득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천하에서 절대무제 백운천에게 겨우라고 한 사람은 너 뿐이란다." 백무린도 마주 웃음을 흘려냈다. 이어, "할아버지! 그 검은 수염의 할아버지는 몇 째나 돼?" '허……! 린아가 어느새 형님에게 정을 느낀 모양이구나!' 백운천은 눈을 빛낸 후 정색했다. "그분은…… 당금천하에서 최고라 할 수 있단다." 순간, 백무린이 고개를 흔들지 않는가? "피……! 그렇지 않아!" 백무린의 확신에 찬 말에 백운천은 커다란 의혹을 느꼈다. "왜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냐?" "그 검은 수염의 할아버지는……" 백무린이 산하(山河)를 응시하면서 정색했다. "너무 엄한 것 같았어. 그런 사람에게는 적이 많다고 책에 쓰여 있어. 적이 많은 사람이 천하 제일인자라고 할 수 없잖아?" 백무린의 말에 백운천의 어깨가 진동했다. "진정한 영웅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 이 린아는……" 아아! 백무린의 말. 이것이 어찌 십 세의 소년이 할 수 있는 말이겠는가? "……" 백운천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다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너는 이 할아비의 친구 중에 누가 과연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백운천의 눈은 백무린의 얼굴을 긴장된 빛으로 직시했다. 백무린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린아가 생각할 때…… 바로 그런 사람은 할아버지인 것 같애." "으음……" 백운천이 신음했다. "사실 화천장에 오신 친구분들은 모두 서로 경계하는 것 같은데 유독 할아버지하고는 모두들 친한 것 같았어." "……!" "그 벽안의 아줌마는 할아버지를 미워하는 척하나 내가 보기에는 그분도 할아버지를 좋아하는 것 같아." "허……!" 백운천의 입에서 신음같은 경악성이 저절로 터져나오고 있었다. "친구가 많고 적이 없다는 것은 곧……" "곧……?" "실질적인 천하제일인이라는 뜻이 아니겠어?" "……!" 백운천은 기가 질린 듯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으허허허…… 천하에 정사칠천을 놓고 평가할 인물은 린아 뿐인 듯하구나!" 백운천은 기쁨에 넘친 대소를 터뜨리며 백무린을 와락 끌어 안았다. "정사칠천……?" 백운천의 품속에서 백무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곱 개의 하늘……? 멋있는데!" "허허허……" 백운천은 백무린을 안은 채 정사칠천과 태조 홍무제에 대하여 입을 열기 시작했다. "……!" 결코 짧지 않은 이야기였다. 백무린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내며 백무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허나, 그는 조금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후후후…… 이 린아는 언제부터인가 할아버지가 굉장한 신분을 지니고 있을 줄 알았어." 백운천이 말을 끝내자 백무린이 귀엽게 웃으며 말했다. 절대무제 백운천, 천하제일의 노웅(老雄)을 자신의 할아버지로 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한 밝은 미소였다. 이때, 돌연 백운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정사칠천…… 백 년 전만 해도 아무도 우리에게 도전하는 사람이 없었단다." "……!" "헌데 백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얼굴에 그늘이 소리없이 덮였다. "누군가가 우리를 죽이고 나아가 천하를 뒤엎으려 하고 있단다." "……?" 백무린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이내 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졌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또 무림에……?" "그렇단다. 지금 자금성에 있는 친우(親友)의 후손들이 나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구나." 백운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생사고락을 같이 하던 지기가 세상을 뜬 이 마당에 이 할아비는 더욱 그들을 돕지 않을 수 없으니……" "……" 백운천의 눈이 문득 다시 발밑의 광활한 대지를 응시했다. "저 산아래 보이는 중원천하는 지금…… 피와 죽음의 땅으로 변하고 있단다." 천하의 안위를 염려하는 노영웅의 백미에 근심이 이슬처럼 맺히고 있었다. "이 린아가…… 할아버지를 도울 수는 없을까……?" 백운천의 모습을 바라보며 백무린이 안타까운 듯 입을 열었다. "……!" 백무린을 안고 있는 백운천의 팔에 힘이 주어졌다. 그의 눈에 감격이 깃들었다. 노안(老眼)에 소리없이 물기가 어렸다. 허나, 그는 대소를 터뜨렸다. "허허허…… 해서 린아에게 할아비가 한 가지 부탁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겠느냐?" "어떻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게!" 백무린이 결연한 표정으로 외쳤다. "린아야!" 백운천의 음성에 어떤 격동의 빛이 일었다. "린아는 이 할아버지하고 잠시 헤어져 있을 수 있겠지?" "얼, 얼마나?" 백무린이 짐짓 호기롭게 대꾸했으나 그 음성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십 년(十年)!" "십, 십 년이나……?" 백무린이 울상을 지으려다 어깨를 펴며 말했다. "좋, 좋아! 할아버지의 부탁이라면." "그래! 린아는 남자이니 십 년 쯤이야 능히 참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백운천이 백무린을 힘있게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린아야! 너는 내일부터 십 년 동안 화천장의 무고에서 무공을 익혀야 한단다." "무공?" "그래! 이 할아비가 백 년 동안 만든 곳이다." 백운천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백무린의 눈에 물기가 솟았다. "그럼 할아버지는 어디에 있을거야?" "자금성에…… 있겠지. 허나 그것은 지금의 내 계획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란다." 백운천이 고개를 돌렸다. 백무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이 린아는 무공을 익힌 후… 할아버지를 찾을 거야, 그 때는 할아버지가 하늘 끝에 계시더라도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거야!" "허허허…… 고맙구나!" 백무린의 말에 섬칫한 무엇을 느끼던 백운천이 고개를 돌린 채 짐짓 무심한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린, 린아야! 혹 이 할아버지가 천하에서 사라진다면……?" 아아! 백운천은 지금 어떤 불안을 느끼고 있단 말인가? 백운천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백무린이 어찌 눈치채지 못하겠는가? 순간, "그 때는…… 린아는 가만 있지 않을 거야!" 백무린의 눈에서 무서운 한기가 치솟았다. "천하를 저 태양보다 더 붉은 핏빛 지옥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백무린, 아아! 그의 눈에서는 지금 이 순간 가공할 녹광(錄光)- 지옥의 불길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지 않은가? '헉! 이 아이가!' 백운천은 백무린의 전신에서 이는 가공할 기세에 안색이 굳어졌다. '으음…… 이 아이가 결심하면…… 정녕 천하는 그렇게 되고 말리라. 이 일을…… 어찌 해야 옳은가?' 이 때였다. 딸랑! 딸랑! 천공을 무서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백무린의 품속에서 돌연 신비한 종소리가 울려나오지 않는가? 아아! 바로 마황금사종이 내는 마음(魔音) '헉! 마종이 저절로……' 백운천이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으음…… 마황금사종이 완전히 린아와…… 린아의 감응(感應)을 받아 종이 울릴 정도이니……' 백운천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면…… 린아의 무공수련은 십 년이 채 필요치 않을 듯하구나!' 이때, 백무린이 백운천의 품속을 빠져나오며 발밑의 넓은 대지를 직시했다. "하지만…… 나는 믿어. 할아버지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야. 이 린아의 할아버지이니까!" "허허허…… 그렇지!" 백무린의 전신에서 한기가 걷힘을 느끼며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저 하늘보다 더 넓고 높은 대인(大人)이 되어야 한다." "……?" "나는 무공을 익히면 천하제일이 될 거야-!" 아아! 이 얼마나 광오한 말인가! 허나 백운천은 백무린을 결코 광오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허허…… 누군가 들으면 비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허나…… 나는 믿는다!' 백운천의 눈이 경외의 빛을 담은 채 백무린을 응시했다. '아암! 너는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는 천하최강의 고수가 되고 말고……' 백무린- 소화(小花). 작은 꽃이었다. 핏빛 석양! 점차 어둠에 밀려가고 있었다. 하늘(天)과 하늘 가운데에 찬란하게 필 소화, 백무린의 별리를 잉태한 채…… |
첫댓글 잼 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