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타라고나5 - 고대 로마극장과 로마광장의 폐허를 보고 투우장으로 가다!
5월 16일에 발렌시아 에서 기차를 타고 타라고나 Tarragona 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지중해의 발코니 Balco del Mediterani 와 로마 원형 경기장 Circo
Romano de Tarraco 이며 고고학박물관 Museu Arqueologic 과 대성당 카테트랄
Catedral 에 로마 시대 성벽 을 보고는 람블라 거리에서 인간탑 쌓기 조형물 을 보았습니다.
호텔로 돌아와서는 하룻밤을 자고난 후 5월 17일 아침에 일어나 텔레비전을 켜니
지중해 바다에서 일출과 일몰이며 새들이 떼를 지어 나는 모습에....
새들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구경하고 호텔을 나와 아래쪽으로 걷습니다.
여기 타라고나는 산에 언덕을 따라 건설된 도시로 곳곳이 계단으로 이루어진 도시임을
깨닫는데... 로마는 스페인을 정복해 3개 주를 설치했으니 타라코(타라고나) 는
그중에 가장 큰 히스파니아-타라코넨시스주의 주도 로 로마제국에서
2위를 자랑하던 대도시 이자..... 주민들은 로마 시민권 을 부여받는 특전을 누렸습니다.
언덕길을 내려와서는 우회전을 하니 도중에 담벼락에서 무슨 그림이 보이는데 한눈에도
일본풍 이라! 그동안 유럽 여행에서 일본 그림을 보는건 아주 흔한 일이라...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다가도...... 묘한 느낌 을 주는 그림 이라 다시 한번 더 쳐다 봅니다.
그러고는 조금 더 걸어서 드디어 아주 오래된 엣날 유적지 에 도착하는데....
여기 아래쪽은 고대 로마 극장 Roman Theatre 이라지만 세월이
오래 되어 이제는 거의 폐허로 변한지라 옛 모습을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오른쪽 길을 5분 남짓 걸으니 여기도 고대 로마시대 유적 이
나타나는데... 그리스 시대 세련된 코린트식 을 연상 시키는
몇 개 기둥 은 오랜 세월에도 현재 까지도 예전 그대로 남아 있는걸 봅니다.
시내 지도를 살펴보니 여긴 로마 광장 Forum Roma 이라고 적혀 있는데,
유적지는 2개로 잘려 도로가 가운데로 났으니..... 두 유적지를
구름 다리로 연결해 주는데 역시나 세월 앞에 무느지고 부숴진걸 봅니다!
2천년전의 건물들이 그 오랜 세월 수많은 전쟁 에다가 기독교 치하에서 그리스와 로마는
이교도의 나라라 해서 우상파괴의 광풍 이 불었고... 또 지진 에다가 또 사람들이 집을
지으면서 건축자재로 돌을 빼어 갔으니 지금까지 남아 남은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입니다?
유럽의 고고학 박물관에 가면 사람의 조각상에 목이 없는게 많은데... 이는 서기 392년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후 우상파괴
광풍이 불어 기독교도들이 옛 그리스와 로마시대 동상의 목을 부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로마를 방문해 콜로세움을 지나 뒤쪽에 포로 로마노 에서 원로원등을 보고는
언덕을 넘으면 카피톨리노 언덕 으로 주피터 신전 이 세워진 곳인데
지금은 미켈란젤로의 설계로 계단과 광장에 박물관이 섰으니.....
거기에 "명상록" 을 쓴 철학자인 아우렐리우스 로마 황제의 기마상 이 있습니다.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이 동상만이 극적으로
살아남은 유래 를 생각해 보는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된 이래 천년을 이어 내려온
고대 그리스 올림픽을 폐지 하고 중세에 이르기 까지 여러차례 우상파괴 운동 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IS 나 탈레반의 불교 불상 파괴처럼 그리스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들의 조상인 로마인들이
만든 신전과 조각품이며 역대 황제들의 인물상 들도 모조리 부수는 것이었으니... 그런데
로마 시내 판테온과 산 조반니인 라테라노 는 기독교 교회 로 사용됨으로써 파괴를 면했습니다.
또 저 마르쿠스 황제의 동상은 당시대인들이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로오해 한데서 살아 남았던 것인데..... 로마제국이 붕괴했을 때 황제들의
청동 기마상이 22개 나 있었다는데 후일 기독교도들이 우상파괴의 광풍 속에
21개는 부수거나 녹여 버리고...... 오직 저것 하나만 오해로 살아 남았던 것 입니다!!!
그리스나 로마인들은 제우스(주피터) 등 많은 신들을 믿었는데, 기독교 입장에서는 모두
이교도 라.... 설사 자기네 조상의 유물 이라고 하더래도 부수고 없애야할 대상이었던
것이었으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동상은 5세기의 광풍에서 살아남아 13세기
까지 라테라노 성당 앞 광장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라는 명패를 달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13세기에 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시대는 이미 르네상스시대 라 무사할수 있었으니...
15세기에는 도나텔로, 베로키오,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청동 기마상을 만들려고 하는
조각가들이 찾아와 견학하며 스케치 를 하다가, 미켈란젤로 가 사람과 말을
분리한후 10명의 남자들이 끄는 수레에 실어서 카피톨리노 언덕 으로 옮겼다고 하네요!
476년에 로마가 멸망한 이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14세기 까지 천년 중세 기독교 사회를
“문명의 암흑시대”라 하는건 기독교도들이 그리스-로마 서적 들을 진시황의 분서갱유
처럼 이교도의 것이라 불태워버렸으니 고대문명이 사라진 땅에서 믿음의 시대라 교회가
우주와 자연현상까지 설명해주니 지적 호기심이 필요 없는지라 과학 이 싹틀수 없었습니다.
중세 기독교 시대 사람들은 병을 마귀가 우리 몸에 들어와 생기는 것이라 믿었으니
교회에서 신부님이 기도 를 해주는걸 제1로 쳤고 다음은 마귀가 놀라서 몸에서
빠져 나오라고 환자에게 몽둥이 찜질 을 했으며 3번째는 마귀는 피속에
있으니 중환자의 몸에서 피를 뽑아 내는데.... 그러고서야 사람이 살 수가 없지요?
유적지 중에 폐허가 된 절반은 어린이들의 놀이터 가 된걸 보면서 떠오르는게 있으니...
5세기부터 15세기 까지 중세 유럽인들의 도시생활 모습인데 역사학자
제임스 버크 (James Burke)는 8세기 중세 도시민들의 전형적인 생활양식을 기술합니다.
“그들은 좁다란 골목길 가운데로 나 있는 하수 도랑에 온갖 쓰레기들을 내다버렸다. 그들
스스로는 익숙한 나머지 별달리 인식하지 못했을 터이지만 사방이 악취로 진동했을 것이
틀림없다. 지저분한 바닥은 똥과 오줌으로 범벅이 된 갈대나 밀짚으로 덮여있었을 뿐이다"
당시 이교도 이슬람 아랍 문명권 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이집트 문명이 전해오고
있었는데다가 그리스 문명 까지 동방으로 전해져 아리스토텔레스등이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거기다가 인도와 중국문명 까지 합쳐져 5개 문명이 융합하며 발전 을
이루어 문명적인 도시생활 을 한데 비해 유럽 기독교 사회는 미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런던에 가로등이 하나도 없던 9세기초 이슬람 지도자인 압둘라만 3세가 세운 코르도바 는
700여개의 이슬람 사원과 300여개의 공중목욕탕과 인공분수, 과수로 장식된 정원 에
난방시설 이 갖추어진 저택들이 즐비한 50만 인구의 별천지 같은 도시였음에
비해 유럽 그리스도교인들의 불결한 생활상은 미개.... 그 자체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거룩한 성전인 십자군 전쟁 이 이교도들에게 패배해 쫃겨
오면서 "의문" 이 고개를 들자.... 교회의 권위와 억압적인 통제 가 무느지면서
아랍에서 들여온 탈레스와 피타고라스, 플라톤, 히포크라테스, 아낙시만드로스 등
옛 그리스문명 서적들을 라틴어로 번역하게 되면서 북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가 일어납니다.
인문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져있는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1304~1374) 는
역사속에서 인간성이 존중 되고 인간 본연의 창조적 힘이 발흥되어 문화가 만개
했던 행복의 시대를 이교도들의 시절인 그리스· 로마시대에서 발견 했으며 그
유산인 고전학문의 부흥 을 통해 그러한 시대가 다시금 도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중세 기독교 사회 는 그리스· 로마 황금시대와 이후에 도래할 황금시대 사이의 중간시대
(Middle Ages) 이자 추악한 시대 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졌으니 르네상스 시기 를
한 시대로 정착시킨 스위스 역사학자 부르크하르트 (1818~1897) 역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를 중세와 철저히 대립된 정신 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제시했습니다.
이런 저런 회상을 떨치고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니 거기에 투우장 Pl, de Tarod 이
나타나는데, 이번 주는 투우가 열리지 않는지 아님 지금이 시즌이 아닌지 문이
닫혀있는 것을 보는데, 몇 년전에 바르셀로나에서 투우를 본 기억 이 되살아 납니다.
원래 투우는 과감하게 돌진하는 소 를 말을 탄 기수가 정교한 기마술과 창 으로 막아내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18세기초 남부 안달루시아에서 투우사가 말과 함께
쓰러져 안장 밑에 깔리자 관중 한사람이 뛰어 내려와 챙이 넓은
모자로 성난 소의 눈을 가린데서..... 오늘날의 투우경기 모습으로 변하였다고 합니다.
투우는 3월 19일 발렌시아의 산호세 불꽃 축제 를 시작으로 10월 12일 사라고사의 필라르
축제 까지 이어지는데 개막시간은 봄에는 5시, 여름에는 7시이며 일몰까지 2시간
진행되는데.... 바르셀로나에서는 일요일 저녁 모누멘탈 투우장에서 투우경기를 실시합니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외에 세비야, 발렌시아, 사라고사, 빌바오, 코르도바 및 타라고나
등 여려 도시에서 경기를 하는데 입장권은 4일전 부터 발매하며 당일 투우장 입구
에서도 살수 있으니 입장권은 솔 이솜브라를 20유로 정도에 구입하는게 적당하다고 합니다.
좌석 등급은 줄이 우선이니 바레라 Barrera(맨앞줄), 텐디도 Tendido(1층 상중하), 그라다
Grada(2층), 안다나다 Andanada(3층) 로 나뉘는데, 물론 낮을수록 비싸며 투우장을
1-8 구역으로 나누는데 Sol(양지), 솔이솜브라 Sol y Sombra(중간), 솜브라 Sombra
(음지) 등급이니 투우는 음지인 솜브라 가까운데서 벌어지므로 솜브라가 가장 비쌉니다.
경기는 6명으로 구성된 한팀 이 두차례 경기 를 하며 모두 3팀이므로 6마리의 소를 상대로
6차례 경기 를 하는 셈인데.... 17세기 펠리페 4세 시대의 의상 을 입고 말을
타고 선두에 서는 자를 알과실 이라 하며 그 뒤로 주인공인 마타도르 3명,
반데리예르, 피카도르(말탄자) 가 따르고 마지막으로 노새를 끈 마부들이 뒤따릅니다.
경기 방식은 ① 마타도르가 성난 소를 가까이 오게하여 카포테 (겉면은 분홍색, 속은 황색
으로 된 망토) 하나로 아슬 아슬하게 피하며 소의 성질과, 속력 및 버릇 을 파악한다
② 피카도르 (2명) 가 등장하여 마상에서 창을 소의 크루스(등) 에 찔러 힘을 약화시킨다
③ 마테도르는 다시 카포테 를 휘둘러 말에게 덤벼들르는 소를 유인한다
④ 반데리요르 (3명) 가 장식이 달린 2개 1조의 작살 3조를 번갈아 소에게 찌른다.
⑤ 마타도르가 물레타 (붉고 둥근 플라넬천으로 한가운데 막대기 끼여있다) 를 들고 기술을
구사하며 관객에게 소를 받친다는 뜻으로 모자를 어깨 너머로 던지고는 물레타를 놓고
맨몸으로 맞서는 아도르노 동작을 취한후 검으로 크루스 부분을 찔러 소의 숨통을 끊는다.
투우에서 주인공에 해당하는 멋진 옷을 입은 마타도르가 멋진 연기를 보이면
관중은 손수건을 흔들어 포상을 요구 하는데 이 때 죽은 소의 귀나 꼬리
가 수여되며..... 출장 횟수와 귀의 수로 마타도르의 실력 이 평가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잔에 투우를 관람했던 바르셀로나의 모뉴멘탈 투우장 은 동물보호
단체들이 항의 시위가 시민들의 호응을 받아 지금은 폐지된 상태 라고 하는데
금년 2월에 바르셀로나의 어느 민박집에서 올린 글을 보니...... 투우장
에서 길거리 음식 파티 도 하고...... 작은 음악 축제의 장소 로 사용되는 모양입니다.
투우에 대한 회상을 접고는 5분쯤 걸어서... 시우타 공원 을 찾아서
구경하고는 임페리얼 타라코 광장을 지나 람블라노바
Rambla de Nova 거리를 천천히 걸어서 호텔로 되돌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