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강과 들판이 만나는 천혜의 자연도시 전남 함평의 5월은 분주하다. 나비축제를 보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과 함평을 알리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선 주민들이 따사로운 봄 햇살처럼 어우러진다. ‘모두 평안하라’는 함평(咸平)의 이름처럼 사람들의 얼굴에선 인심 좋은 웃음이 묻어난다.
# 기도로 세워진 하나님의 고장
함평이 자랑하는 ‘나비축제’가 기도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함평의 기독교인들은 나비축제를 시작하기 전 한 자리에 모여 성공을 기원하는 예배를 드린다. 지역사회를 위한 기도로 마음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함평에는 시골마을에 흔하다는 장승조차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함평이 하나님의 도시로 세워져 있었던 덕분이다.
일제 식민통치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피폐해진 마을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 교회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교육, 복지, 선교의 3박자를 실천하며 함평의 부흥을 이끌었던 못자리 교회, ‘함평읍교회’(담임:박광석)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오는 2011년이면 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는 함평읍교회는 이 지역의 자랑이다. 98년이라는 오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잃지 않았고 전후 폐허가 된 한국사회에 “교회의 사명은 이런 것”이라며 그 역할을 보여준 역사의 모델이기도 하다.
1911년 류서벡선교사의 선교로 세워진 함평읍교회는 1942년 김병두전도사가 부임하면서 첫 시무장로를 세우며 조직교회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신앙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김병두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고초를 당했으며 일본의 징용으로 화순탄광에 끌려가 5개월 동안 광부 생활을 하는 등 교회만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을 맞았다. 교회를 세우는 일과 부흥시키는 일이 쉽지 않았던 일제 치하에서 김병두목사가 짜낸 아이디어는 일본인 부흥사를 초청하는 것. 부흥사로 알려진 일본인 모리후지선생을 초청, 합평읍교회에서 부흥회를 연 것은 교회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 인재를 키워낸 함평읍교회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모리후지선생의 부흥회에 참석한 후 변화된 많은 인물이 있었는데 시인 이수복선생과, CCC창설자인 김준곤목사, 예장 합동 총회장을 지낸 정규호, 김요한목사 등이 함평읍교회 부흥회를 통해 신앙의 변화를 체험하고 목회의 길을 걷게 됐다고 전해진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함평읍교회는 더욱 바빠졌다. 나라를 재건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담임이었던 김병두목사가 해방 후 곧장 한 일은 어린이 선교를 위해 유치원을 세운 것이었다. 이 지역에 세워진 첫 유치원인 함평유치원은 중앙대학교 전신인 중앙보육학교 출신 신여성들이 교사로 활동하면서 기도로 자라나는 신앙인재 양성을 시작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기독교 청년운동에 앞장서며 YMCA를 설립했고 대한 소년단을 조직하며 청소년과 청년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함평읍교회가 오늘날까지 존경받을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교육에 앞장서며 인재양성에 열정을 보인만큼 이웃을 섬기는 ‘구제와 선교’에도 단연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복지시설을 만들고 평신도로 하여금 빈민구호에 앞장서도록 도와준 것은 이 지역에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함평읍교회가 세운 고아원은 자광원과 삼애원, 성애원, 시온원 등 4개로 1개 군에 교회가 4개의 고아원을 세운 것은 전국적으로도 유일한 일이며 이 안에서 다시 한국사회와 교회를 이끌어 갈 인재들이 배출됐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함평읍교회는 이 시설들을 직접 소유하지 않고 헌신적인 평신도들에게 운영을 맡겨 훗날 모두 사회복지법인으로 전환시키면서 지역사회에 환원했다.
현재는 노인복지시설로 바뀐 성애원만 함평읍교회가 후원하고 있다. 함평읍교회는 매주 성애원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성도들의 자원봉사를 연결하고 한나회를 중심으로 지역봉사활동도 전개한다. 50년이 넘도록 어린이와 노인을 돌보는 사역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랑할 역사를 가진 함평읍교회는 목회자 한 사람의 교회가 아닌 성도들의 교회요, 지역의 교회다. 이곳을 거쳐 간 목회자도 여럿이지만 교회가 배출한 참 신앙인이 훨씬 많고 교회의 이름으로 남긴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50년대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교회의 역량이 극대화됐고 함평읍교회는 지역의 선진화를 주도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70년대 중후반에는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고 민주화운동을 이끄는 등 사회적인 목소리도 높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에는 절대적으로 순종하되 불의에는 항거하는 정의의 신앙을 가르친 것이다.
# 통일을 염원하는 구국의 기도
이러한 전통 때문인지 함평읍교회에는 특이한 기도회가 있다. 매월 8일 여신도회가 모여 ‘남북평화통일기도회’를 여는 것이다. ‘어머니의 기도로 통일을 이룬다’는 기치를 내걸고 통일을 위해 무릎을 꿇는다. 여신도회는 매월 기도회 후 평화통일 헌금을 적립, 소속 교단인 기장총회의 북한돕기 사역에 전액을 헌금한다. 여성들의 사역이 헌신과 봉사라는 수동적인 영역에만 머무는데 반해 함평읍교회 여신도회는 평화통일이라는 대사회적이고 민족적인 기도제목을 30년째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고비도 있었다. 1980년대 이후 도시 산업화와 농촌인구의 이농현상을 겪으면서 함평읍교회도 어려움에 직면했다. 하지만 당시 부임한 박종삼목사는 특유의 온유한 성품과 따뜻함으로 성도들을 섬기면서 성전을 증축하고 부활동산을 마련하는 등 교회 확장에 나섰다. 또 선교하는 교회로 역량을 확대하며 해외선교 지원과 미자립교회 후원도 확대했다. 교파를 초월해 하나님의 복음으로 지역을 발전시키는 일에 앞장섰으며 기독교연합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교회 부흥이 좀처럼 힘든 시골 도시에서 보여준 함평읍교회의 역량은 대단했다. 설립 당시 함평읍의 교회수는 다섯 손가락도 채우지 못했지만 1950년대 함평읍교회가 지역을 세우는 교회로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을 진두지휘하고 실의에 빠진 전후 세대들의 상처를 보듬는 사이 함평지역 교회는 수도 없이 늘어나 모두 함께 복음의 도시를 만들었다. 함평읍교회를 ‘못자리 교회’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2월 박종삼목사의 은퇴 후 함평읍교회는 군종목사로 오랫동안 청년 사역을 전개해온 박광석목사를 새로 맞이했다. 노령화된 교회를 젊고 역동적인 교회로 변화시키겠다는 바람이 담긴 결정이었다.
기대에 부응하듯 박광석목사는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어를 내걸고 한 영혼, 한 생명 구하기 전도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한 마리의 어린 양을 찾으러 나섰던 예수님의 그 절실한 심정으로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함평 주민들을 교회로 불러 구원의 계획을 알려주고자 함이다.
지역주민을 돕던 구제활동은 세계로 확대됐다. 기아와 질병에 고통받은 아프리카 아동을 돕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부임 직후 전교인 대심방과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실시한 박광석목사는 사순절 기간 한끼 금식을 통해 모은 헌금을 월드비전 전남지부에 기부하면서 앞으로 매년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를 진행할 계획이다.
올 부활절에는 축하예배를 드린 후 병원에 입원한 환우들을 방문, 100여 개의 선물을 전달하며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부활의 희망’을 전해 훈훈한 화제가 된 바 있다.
함평읍교회의 사역 중 조선족 어린이 청소년 장학금 지원도 자랑거리.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조선족 학생들의 한글 교육이 점차 쇠퇴되는 상황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지원하며 조선의 말과 글을 잊지 않고 사용하는 자랑스러운 민족 인재로 양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박광석 담임목사는 “교회가 지금보다 훨씬 작았던 그 옛날 역사에 남을 많은 일들을 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며 “과거 선배 목회자들이 보여준 사역들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목회의 귀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즉, 교회를 키우는 내적 성장보다 지역사회를 키우고 나라를 세우는 외적 사역이 교회로부터 시작됐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오늘날 함평읍교회의 과제를 다시 발견하게 됐다는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등불이 되어주었던 함평읍교회. 100년의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겠노라 약속한 함평읍교회는 사회분열과 경제위기로 혼란한 시대에 또 한번 함평을 살리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선구자적 교회로 도약을 거듭하고 있다.
“신앙유산 거름삼아 새 역사 향해 도약”
● 박광석목사
군에서 20년 사역했음에도 불구하고 박광석목사의 표정은 부드럽다. 박목사의 환한 웃음을 보니 시름이 사라지고 고민도 놓아진다. 노인들에게는 아들 같고 아이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 같은 함평읍교회 박광석목사. 청년 선교를 뒤로한 채 군교회가 아닌 일반 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한 그는 아직 ‘새내기’라며 겸손히 말을 꺼냈다.
“농사 인구가 1/3이고 젊은이들이 많지 않으니 아무래도 군선교와는 환경부터 많이 다르죠. 하지만 오히려 젊은이들과 어울렸던 목회 경험이 교회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교회를 지켜온 98년의 역사는 분명 후대에게 축복이다. 하지만 선배들의 열정적인 사역을 이끌어갈 후배 목회자에겐 버거운 짐일지도 모른다. 박광석목사는 과거와 전통을 소중히 계승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도약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교회의 역사와 함께 수고하신 선배들의 신앙을 이어가는 목회를 첫 번째로 꼽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함평읍교회가 지역을 위해 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웃주민들에게 존경받은 것은 물론이고 지역사회 유지들도 함평읍교회의 사역에 고마워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과거만큼 교회의 역할이 크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사회를 위해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나 먼저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은 교회들이 성도를 위해 무엇을 하나 지협적인 사역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내적으로는 부흥하고 외적으로는 지역을 선도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제 꿈입니다.”
박목사는 역사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교회의 100주년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함평읍교회에서 순교한 5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기념사업을 시작으로 100년사를 정리하고 지역사회 속에서 함평읍교회가 갖는 의미를 재점검할 예정이다.
미래를 향한 꿈은 더욱 원대하다. 미래를 내다보고 꿈꾸는 교회만이 생동감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박목사는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 기도가 살아있는 젊은 교회를 만들고자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외적인 사역도 교회 안에서 예배가 회복될 때 가능하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만들고 싶고 예배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내적으로 신앙을 바로 세운 후 박광석목사가 할 일은 지역사회를 향해 세계 복음화를 위해 살아 숨쉬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성도의 직장과 가정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도록 하며 세상 곳곳에 있는 고통 받은 이웃을 위해 나누고 섬기는 일이 바로 교회가 감당할 일이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 주고 싶다고 했다.
또 젊고 역동적인 교회를 위해 중고등부를 활성화 시키고 청년부를 부흥시키는 것도 군종목사 경험을 가진 박광석목사가 할 일이다. 물론 젊은이들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젊은 신앙을 갖게 하는데 1차적인 목표가 있다.
“교회의 제2부흥을 위해서는 뼈를 깎는 인내와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난관과 시험이 있겠지만 살아 계신 주님의 뜻을 묻고 주님의 인도하심만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 뿐 아니라 편리함에 빠져있는 교회들에게 변화하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우리를 죽이고 예수님만 살아계시도록 신앙을 개혁해야 합니다. 세상이 먼저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교회, 어려울 때마다 주님의 손길을 구하는 교회가 되도록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