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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발 4,500m 고지에 올라서자 신천지가 펼쳐졌다. 빙하호수 초롤파는 얼음과 흰 눈으로 눈부시도록 반짝였고, 주변의 설산들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솟구쳤다. 2 베딩을 출발, 나가온을 향할 즈음 구름이 피어오르면서 가우리상카는 더욱 신비감 넘치는 고봉으로 변신했다. 3 아침 햇살에 수채화 같은 정취를 자아내는 시미가온. 4 트레킹을 끝마칠 때까지 일행의 식사를 담당한 키친보이 템바 셰르파. 5 베딩으로 향하는 사이 깊은 골짜기 위로 모습을 드러낸 가우리상카. 6 수루무체 부근에서 남편과 함께 티숍을 운영하는 젊은 여인과 아이. 7 샤크파카르파로 다가설 즈음 골짜기 끝에 솟구친 체키고. |
롤왈링 히말(Rolwaling Himal)은 아직 한국 산악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가 솟아오른 쿰부 히말(Khumbu Himal) 남서쪽에 위치한 롤왈링 히말은 가우리상카(Gaurisankar·7,134m)라는 명봉 외에도 체키고(Chekigo·6,257m), 초부체(Chobuche·6,685m) 등 6,000m급 설봉이 즐비한 곳이다. 이 고봉들은 클라이머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덕분에 아직도 대다수가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다.
카트만두에서 출발, 루클라에 공항이 생기기 전 쿰부히말 등반과 트레킹의 기점이었던 지리(Jiri·1,955m) 도로를 따르다 차리코트(Charikot·1,980m)를 지나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길로 볼레(Bhorle·1,000m)에 접근한 일행은 이튿날인 3월 23일부터 11일간의 도보 트레킹에 나섰다. 6,000m급 설산들이 좌우로 도열한 롤왈링계곡을 따라 해발 5,750m 높이의 테시랍차(Tesi Lapcha·일명 Transhi Labsta)를 넘어선 다음 쿰부히말의 타메(Thame·3,800m)로 이어지는 이 길은 1951년 봄 그 2년 뒤 인류 최초로 세계 최고봉 정상에 선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 등반 전초전으로 삼아 나선 초오유 원정 때 넘어섰던 길이기도 하다.
원시의 세계로 들어서는 순간 흰산 가우리상카 솟아올라
늘 그렇듯 낯선 곳에 들어선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롤왈링 히말이 그런 곳이었다. 트레킹 가이드북과 지형도를 통해 길과 마을 이름, 산명을 익히고 사진을 통해 그곳의 명봉 몇 개를 본 것이 롤왈링 히말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그런 상태로 현지인의 말만 믿고 빙하 깊숙이 들어섰다. 묘했다. 야크, 양, 염소와 뒤섞여 사는 사람들의 거처는 칙칙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주변은 달랐다. 설봉은 유난히 반짝이고, 거벽은 유독 가파르고 험난하게 느껴졌다.
“첫날부터 아예 곤죽을 만드는 거 아냐? 이래서 포터들이 패스 넘어갈 수 있겠어?”
마을 위쪽 라마바가르(Lamabagar) 일원의 댐 공사에 앞서 도로 공사로 어수선한 쳇쳇(Chetchet·1,450m)에서 티베트 고원에서 형성된 물줄기와 롤왈링 추(Rolwaling Chhu) 물줄기가 합쳐져 규모가 제법 커진 보테계곡(Bhote Kosi)을 건너 시미가온(Simi Gaon·2,000m)으로 오르는 산길은 성벽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미가온은 ‘히말라야 성채’의 망루나 다름없었다.
“두 명? 네 명? 16명! 우와!”
거의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 오후 6시경 마을 맨 위쪽(맨 아래 집과 맨 윗집의 표고차가 150m 가까이 된다)에 위치한 로지에 도착하자 여주인은 신이 났다. 우리가 올 들어 첫 여행객이니 반갑지 않을 수 없는 일. 주전자를 얼른 화덕 위에 올리며 밀크티를 마시겠느냐, 블랙티를 마시겠느냐 묻는다(물론 나중에 다 계산해서 받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원선·최준회씨와 함께 펨바 셰르파(Pemba Sherpa)가 닭 한 마리를 가슴에 안고 들어왔다. 먹을거리를 짊어진 키친보이들이 한참 뒤로 처지자 마을에서 닭 한 마리를 구해온 펨바는 노련한 솜씨로 잡은 닭과 쌀을 커다란 냄비에 넣더니 얼마 뒤 근사한 백숙을 저녁식사로 내놓았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자 시미가온은 전날 저녁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급사면의 농지는 누런빛으로 빛나고 너와지붕을 인 민가들도 명암이 뚜렷해졌다. 아침을 맞아 집 밖으로 나온 이들이 동네를 나다니면서 엊저녁의 칙칙한 분위기와 달리 생동감이 넘쳤다. 티베트 쪽 무명봉들이 정수리를 든 채 반짝여 히말라야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어제 워낙 늦게까지 짐을 나르느라 피곤했고, 또 늦게 식사를 하고 늦도록 창(네팔식 막걸리)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느라 느지막히 잠자리에 들다 보니 모든 일정이 한 시간쯤 미뤄지고 출발도 계획보다 1시간 이상 늦춰져 오전 8시15분이 돼서야 이루어졌다. 트레커들의 짐을 나르기 위해 모이는 포터들은 실상 서로 아는 사이가 드물다. 그런데 만난 지 한 시간쯤 지나면 꼭 한 동네 사람들처럼 가까워지고 얘기도 잘 나눈다. 서로 눈살을 찌푸리거나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어 더욱 친근감이 든다.
오늘 막영 예정지인 동라(Dong La·2,725m) 가는 길은 하늘 길을 따르다 원시림 속으로 이어졌다. 어제 걸었던 보테계곡 건너편으로 산허리를 가르며 댐공사 예정지인 라마바가르(Lamabagar·약 2,000m)로 이어지는 도로를 바라보며 골짜기로 들어서자 울창한 숲속. 네팔 국화(國花)인 랄리구라스 빨간 꽃이 반기고 바위마다 푸른 이끼로 덮인 산길은 원시의 세계로 들어서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무엇보다 숲을 뚫고 솟구친 흰산 가우리상카가 압권이다.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반짝이는 가우리상카는 산이 아닌 말 그대로 신들의 거처다 싶을 만큼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숲길은 외딴 카르카 움막으로 길을 잇고 그 뒤로 이어진 산길은 또 자그마한 움막집으로 이어졌다. 제주 올레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라면 롤왈링 숲길은 외딴 집과 외딴 집, 숲과 숲을 잇는 길이었다.
“벌써 낙엽이 지네. 우리 지금 겨울로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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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가온으로 향하다 커다란 바윗덩이 밑에서 쉬고 있다. 2 초롤파 둑을 오르며 환하게 웃고 있다. 등 뒤로 롤왈링 계곡이 바라보인다. 3 4 라마 사원 부근의 바위에 그려진 만다라. 부처가 증험한 것을 나타낸 그림이다. 5 나가온에서 로지를 운영하는 도르지 락파 셰르파. 1977년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가, 손가락 8개를 잃었다 한다. 6 나가온에서 초롤파로 향하는 포터들. 30kg 안팎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다닌다. 7 초롤파에서 캠프지로 향하는 일행. 8 초롤파 둑에 있는 수문. 나가온·베딩 같은 호수 아랫마을의 안전을 위해 수위를 조절한다. 9 초롤파 캠프지로 향하는 일행 뒤로 캉나추고 동면이 바라보인다. 10 초롤파 둑 아래 위치한 캠프장. 티숍과 취사장이 갖춰져 있다. |
어제 카트만두는 후텁지근한 여름이었고, 버스에서 내린 볼레는 늦여름이었다. 그러다 쳇쳇을 지나 절벽 길을 올라가는 사이 차츰 기온이 떨어지더니 시미가온 로지에서 잘 때에는 간간이 침낭을 끌어당길 만큼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숲길 바닥은 간혹 낙엽이 떨어져 있어 늦가을을 연상케 했다.
찔끔찔끔 오르막을 오르다 대나무 숲을 빠져나가자 하늘이 터지면서 외딴 집이 나타났다. 젊은 부부가 갓난아이와 함께 지내는 티숍(Tea Shop·2,435m)이다. 여기서 5분 거리인 수르무체 카르카(Surmuche Kharka)에서 살면서 5년 전부터 트레킹 시즌이면 이곳으로 옮겨와 트레커를 상대로 장사를 하는 이들은 이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인 돌라카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도시 생활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는 귀농 부부였다. 남편은 2008년 가을에 한국 트레커를 만났고, 지난해 가을에도 한국 원정대를 본 적이 있다며 “롤왈링 히말 트레킹은 10월이 가장 좋다”고 알려주었다.
일정을 하루 당기기 위해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11시간 동안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걸은 어제와 달리 오늘은 노닥이며 쉬엄쉬엄 걷는 여유로운 트레킹이었다. 점심 때 머리도 감고, 따스한 햇살도 즐기며 여유를 부렸다. 포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그들은 볼레에서 짐을 멜 사람을 구하지 못해 2인분의 짐을 나눠 메야 했고, 그로 인해 짐이 가벼운 우리 4명은 11시간을 걸었지만 무거운 짐을 진 그들은 13시간에서 14시간이나 걸어야 했다. 자기 배낭에 짐까지 얹은 사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미가온에서 베딩까지 짐을 나를 짐꾼 2명을 구했으니 힘도 던 셈이었다. 그러나 짐꾼이라고 해봤자 15살짜리 소년들이었고, 막내아들뻘인 두 아이가 무거운 짐을 나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쓰러운 일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죠.”
점심식사 후 긴 오르막이 해발 2,900m 고지대까지 이어졌다. 2,700m 고지의 부서진 움막을 지나자 빠알간 랄리구라스와 하얀 산목련이 화사하게 꽃을 피워 봄 분위기에 흠뻑 젖게 했다. 길가 샘터를 지나자 숲이 벗겨지면서 하늘이 뻥 터지는데 바위 위에 올라앉아 있던 다와 셰르파가 “여기서 30분쯤 더 가면 캠핑 예정지가 나오지만 조망은 이곳이 훨씬 낫다”고 했다.
목부들이 머무는 움막과 티하우스가 있는 샤크파카르카(Shakpakharka·2,760m)는 다와가 권하지 않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널찍하게 초지가 형성돼 있는 데다 모처럼 롤왈링 히말을 상징하는 가우리상카의 하얀 정수리가 눈에 들어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좋다. 구름이 기회를 줘야 하지만 간간이 가우리상카와 골 끝으로 피라미드 형상의 체키고가 우뚝 솟아올라 히말라야 깊숙이 들어선다는 느낌을 한껏 고조시켜 주었다.
염소고기 특식에 ‘야크 황’의 얼굴에 미소 가득
“아니! 그럼 저 높이란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우뚝 솟구친 체키고와 우리가 등정을 목표로 삼고 있는 파르차모(Parchamo·6,273m)의 높이는 엇비슷했다. 한데 골짜기 끝에 하늘 높이 솟구친 체키코를 보니 고산등반 경험이 없는 일행 모두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녁을 먹고 나니 날이 어두워지고 하늘에 달이 떠올랐다. 이틀 전 초승달이 벌써 반달처럼 커졌다. 저 달이 동그레질 무렵이면 우리는 파르차모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것이다.
“얼굴에 정전기가 일어나요. 이것도 고소증세인가요?”
최준회씨는 “얼굴에 정전기가 일어나는 것 같은 게 아무래도 낮에 머리 감은 게 문제를 일으킨 것 같다”며 고소증을 걱정했다. 해발 2,760m. 이제 시작인데 너무 빠르다. 지나친 걱정에서 오는 현상 같기도 하고. 아무튼 식사 양이나 몸을 움직이는 모습에서는 그리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싶었다.
3월 25일. 지도와 달리 허릿길을 따라 한참 돌았다. 그 사이 가우리상카는 날카로운 정수리를 간간이 드러냈다. 계곡으로 내려서자 어제 캠핑 예정지인 동라. 현지인들이 동앙(Dong Ang)이라 부르는 이곳 역시 대여섯 살배기 어린 아들을 키우는 부부가 사는 허름한 집과 그릇과 잔을 제대로 갖춰놓은 집 등 티숍이 두 집 있다.
해발 3,000m를 넘어서자 풍광이 다시 변한다. 한층 좁아진 골짜기 끝으로 체키고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왼쪽 지계곡으로 가우리상카가 거대한 남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잿빛 장벽은 위로 오를수록 각도가 세어지다가 막판에는 위압적인 오버행을 이루고 있다.
시바신의 현신(現身)으로 간주되는 가우리(남봉·7,010m)와 황금 여신의 현신으로 여기는 상카(북봉·7,134m) 2개 봉으로 이루어진 가우리상카는 1950년대부터 등반이 시도되어 미국의 유명 산악인 존 로스켈리가 1979년 봄 네팔의 도르지 셰르파와 함께 표고차 3,000m 높이의 서벽을 타고 상카를 초등하고 그 해 가을 영국의 피터 보드맨 일행이 암탑과 빙탑, 눈처마로 이어지는 길이 4km의 서릉을 돌파하고 가우리를 초등했다. 한국은 1985년 여름 우정산악회가 남서릉으로 등정을 시도해 6,500m를 최고 도달점으로 기록했고, 같은 해 겨울 진주 마차푸차레산악회가 남서릉에 도전해 제3등을 기록하며 등정에 성공했다. 2008년 겨울에는 한국산악회팀(대장 강성우)이 서벽으로 정상을 노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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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골짜기를 덮칠 듯 위압적인 바몽고~캉나추고 남벽. 2 가우리상카를 배경으로 서 있는 일행. 왼쪽부터 황원선, 다와 셰르파, 양효용, 최준회씨. 3 베딩을 향하다 만난 시미가온 아낙네들. 황원선씨의 익살에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4 에베레스트를 8회나 등정했다는 베딩의 나왕 텐징 셰르파와 아내. |
“와~, 이게 뭐야. 냉면 아냐!”
히말라야 산중에서 냉면을 먹는다는 것은 호사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원정대의 키친보이를 몇 차례 한 바 있는 쿡 펨바는 한국말은 많이 서툴지만 음식은 어지간한 가정주부보다 나은 수준이다. 해서 오늘 낮에는 냉면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라! 냉면은 차가운 빙하수로 그대로 씻을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육수 역시 계곡 물이 그대로 사용될 경우가 많고, 그로 인해 히말라야에서 냉면과 같은 찬 육수를 이용한 음식을 먹을 경우 배탈이 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점심을 먹은 뒤 산길은 표고 100여m 위로 훌쩍 올라서더니 절벽 하단에 형성된 완경사 테라스를 따라 줄곧 이어졌다. 숲이 우거진 골짜기 끝으로 체키고가 피라미드 봉을 멋지게 일으켜 세워놓은 롤왈링 콜라(Rolwaling Khola·Chhu)를 따라 1시간쯤 걸었을까. 시미가온을 향해 내려서는 주민들에게 오늘 막영지인 베딩(Beding·3,690m)까지 걸리는 시간을 물으니 3시간 안팎이란다.
높이의 변화가 거의 없는 테라스 길이지만 골짜기 안으로 들어설수록 나무는 키가 작아지고 그 수도 적어지더니 나무가 아예 없어지면서 거대한 절벽을 등진 채 감자밭을 앞에 둔 돌집 대여섯 채가 나타났다. 그 뒤로 바위절벽은 파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솟구쳐 있지만 마을에는 차가운 바람만 불어대고 있었다.
산허리를 한 굽이 돌아서자 더욱 큰 마을이 나타나고 집과 집을 잇는 전깃줄이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저 아래 골짜기 한쪽에 수로와 터빈이 보인다. 저곳에서 만들어낸 전기를 마을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베딩인가 싶었던 마을에서 폭포를 구경하며 출렁다리를 건너고 다시 언덕배기를 올라서자 물줄기 옆으로 널찍한 평원이 펼쳐지고 그 왼쪽 바위 절벽 아래 계단식으로 조성된 돌집들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해발 3,600m를 넘어섰다. 롤왈링계곡에서 가장 큰 마을인 베딩이다. 개울가 널찍한 자갈밭에서는 시커먼 야크들이 어슬렁거리며 풀을 뜯고 민가 텃밭 주변에서는 염소들이 저마다 작고 귀여운 새끼들을 데리고 저녁 먹을거리를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층계식 돌집 한가운데에서 누군가 손을 흔든다. 사다 다와다. 다와는 하얀 염소를 끌어안은 채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염소는 오늘 포터들의 배를 불려줄 희생양이었다.
쿡 펨바가 안내한 멘룽체 뷰 로지(Menlungtse View Lodge)에 들어서자 널찍한 마룻바닥 한쪽 진열대에 옷 여러 벌이 개어져 있고 그 맞은편에는 부처를 모신 제단이 마련돼 있었다. 주인인 나왕 텐징 셰르파(Nawang Tenging Sherpa·45)는 에베레스트 8회, 초오유 4회, 시샤팡마 2회 등 8,000m급 고봉만 해도 14회 등정했다는 클라이밍 셰르파로 이제 8,000m 고봉 등반을 하기에는 나이가 많지만 올 봄 노르웨이 사람들과 함께 테시랍차를 넘어 쿰부히말의 중앙에 위치한 남체바자르(Namche Bazar·3,400m)까지 안내할 계획이라 한다.
오후 5시 반이 넘자 베딩에 도착한 키친보이와 포터들은 싱글벙글하고, 반면 염소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는지 살려 달라 절규하는 듯 울어댔다. 네팔 히말라야를 트레킹할 때, 특히 이번처럼 텐트 트레킹을 할 때는 많은 포터와 함께 쿡·키친보이가 동행한다. 포터들은 단순히 짐만 나르면 되지만 쿡·키친보이는 손님 트레커에게 매 끼니 식사를 공급하는 일 외에 포터들에게도 밥을 해대야 한다. 게다가 키친보이는 자신의 짐에 취사도구와 식량까지 짊어지고 다니면서도 손님보다 빨리 야영지나 점심식사 예정지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 하루가 무척 바쁘다.
오늘은 그러한 현지인들에게 특식이 제공되는 날이다. 파키스탄은 트레킹 규정상 현지 포터들에게 일정량의 고기를 지급하게 돼 있지만 네팔은 그런 규정이 없다. 하지만 힘든 일을 하는 포터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힘을 북돋아주기 위해 트레커들이나 원정대는 염소나 양 혹은 야크 고기 등을 특식으로 제공하곤 한다. 덕분에 우리의 저녁식사도 염소 수육에 내장볶음, 갈비까지 얹혀 나온다. 좋은 안주에 술이 곁들여지지 않을 수 없는 일. 하지만 히말라야 초보자인 최준회씨와 또 몸 관리에 철저한 양효용씨는 술을 마시려 하지 않고, 그 덕분에 야크처럼 힘이 좋다 하여 ‘야크 황’이란 별명이 붙은 황원선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아무튼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사람의 다리는 대단하다. 슬쩍 모습을 보이던 가우리상카는 이제 비켜 지나쳤고, 골 끄트머리에 우뚝 솟아 있던 체키고도 바로 옆에 솟아 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어디서 몰려왔는지 안개가 조망을 삼켜버렸다. 하지만 답답하지 않다. 곧 밤하늘은 별로 가득 찰 것이고, 다시 날이 밝으면 또 다른 풍광이 가슴 설레게 할 것이다.
300년 된 셰르파들의 마을 베딩과 나가온
기대했던 대로 아침이 되자 가우리상카는 바위산 험봉을 삐죽 솟구치고, 체키고 등 주변의 6,000m급 설산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300년 전부터 티베트와 쿰부 히말의 타메(Thame·3,800m)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베딩 역시 새 날을 맞아 활기 찬 모습이다. 3시간쯤 위쪽에 위치한 마을인 나가온(Na Gaon·4,180m)과 합치면 약 65가구에 500여 명이 거주한다는 베딩은 이 일원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때문에 쿡 펨바는 테시랍차를 넘어 타메에 갈 때까지 포터들이 먹을 감자와 쌀 등 식량을 이곳에서 구입했다.
위로 오를수록 가우리상카는 또 다른 모습으로 흥분시킨다. 베딩으로 올라올 때는 하나의 장벽 같던 산이 2개의 피크에서 3개의 설봉으로 바뀌고, 설릉으로 이어진 3개의 신비스런 봉을 장벽 같은 동벽이 떠받치고 있었다. 산은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감동케 했다.
시끄럽던 물소리가 서서히 작아지고 대신 새소리가 흥겹게 울려퍼진다. 이제 계곡 대신 빙하를 치맛자락처럼 늘어뜨린 장벽을 양옆에 끼고 걷는다. 왼쪽으로는 체키고~밤몽고(Bamongo·6,400m)~캉나추고(Kang Nachugo·6,735m)로 이어지는 대장벽이요, 오른쪽은 얄룽리(Yalung Li·5,630m)와 추키마고(Chukyima Go·6,259m) 2개 봉이 솟구치면서 형성된 거대한 사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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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집에서 늙수그레한 현지인이 뛰어나오며 반겼다. 이 마을 유일의 로지인 롤왈링 마운틴 리조트를 운영하는 도르지 락파 셰르파(Dorgi Lakpa Sherpa·54)는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 8개가 동상으로 한 마디 이상씩 잘려나간 상태다. 하지만 그는 이튿날 아침 헤어질 때까지도 시종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도르지는 1977년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했고, 당시 고상돈이 정상에 오를 때 사용한 산소통을 마지막 캠프까지 올려주었다. 당시 제3캠프(7,300m)로 내려서던 중 손가락 동상에 걸린 것이라고 한다. 27명의 셰르파 가운데 유일하게 나가온 출신이라는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1977년 당시 한국 에베레스트 초등이 이루어지기까지 이러한 현지인들의 피눈물나는 고통과 노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료들이 낮잠을 자는 모습을 확인하고 슬그머니 마을 뒤편의 개울로 올라가 머리를 감고 가볍게 구석구석을 씻고 다시 로지로 돌아왔다. 마침 부식을 정리하는 포터들과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노닥거리다가 불현듯 아침에 지나친 라마사원이 떠올라 발길을 베딩 쪽으로 돌렸다. 오를 때와 내려갈 때의 풍광이 전혀 달랐다. 골짜기는 오히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아침에 보았던 사원은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절벽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뭔가 홀린 듯한 기분으로 50분 정도 걸려 라마사원으로 올라서는 사이 향나무 숲에서 시커먼 새가 한 마리 하늘로 날아올랐다. 등은 흰색이요, 꼬리 부분은 보랏빛이 도는 네팔 국조(國鳥) 단테(Dante)다. 길조인가. 신비스럽고 경외스런 풍광의 절벽 사원 기슭은 온통 측백나무 군락이다. 향이 피어나는 사원이란 뜻인가.
그 위로 바위절벽에 고색창연한 빛을 띤 라마사원이 올라앉아 있었다. 아쉽게도 라마승은 서너 시간 전 베딩으로 내려가 사원은 빈 상태였다. 사원이라기보다 수도처 같은 분위기다. 사원 곳곳에 매달려 있는 퇴색한 룽다가 바람에 펄럭여 분위기는 한층 을씨년스럽다. 그래도 동쪽 멀리 초롤파(Tsho Rolpa·4,540m·일명 Chhyugima Pokhari) 빙하호수 양옆의 장벽과 설벽은 저녁 햇살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듯 더욱 반짝였다. 히말라야는 밤을 맞기 전 이렇게 빛나고 있었다.
사원을 내려설 무렵 하늘에서 눈발이 날렸다. 서설인가 싶어 즐거워했으나 저녁 먹고 다와에게 물어보니 “서쪽 하늘이 좋으면 다음날 동쪽 하늘이 맑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서쪽 하늘이 시커멓다. 앞으로 테시랍차에 올라설 때까지 나흘만 좋으면 되는데-.
다행히 이튿날은 환상적인 날씨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 코발트빛 하늘에 설산들은 햇살을 그대로 반사시키는 듯 반짝였다. 체키고와 작별하며 초롤파로 향하는 사이 왼쪽으로 바몽고~캉나추고는 거대한 장벽을 곧추세우고 눈과 얼음으로 채색한 채 반짝인다. 그러다 초롤파 모레인 언덕이 다가오자 골 끝 오른쪽으로 또 다른 설산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둑 아래 갈림목에서 사다가 권하는 대로 왼쪽 길을 따르는 사이 흥분케 하는 풍광이 연이어 펼쳐졌다. 숨을 몰아쉬며 초롤파 둑 8부 능선에 올라서자 캉나추고는 피라미드 형상으로 솟구친 뒤 그 우측으로 또 다른 암봉들과 이어지며 장벽을 이루고, 그 우측 5,500m대 플라토 뒤로 6,000m대로 보이는 암봉들이 기운차게 솟구쳐 있다. 그 봉우리들은 네팔과 중국 티베트와의 국경이기도 했다.
별천지 같은 풍광을 자아내는 초롤파 일원
“와~, 스노 레이크다. 이런 풍광을 보려고 히말라야에 오는 거 아니겠어.”
거대한 둑 위로 올라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별천지가 펼쳐졌다. 가이드북을 통해 글로만 봐온 초롤파는 어마어마한 빙하호수였다. 그 빙하호수는 겨울의 냉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하얗게 빛나고 있고, 그 양옆으로 초보제(6,689m)와 드라그케르고(Dragker Go·6,793m)가 거대한 절벽을 이루며 치솟아 있고, 오른쪽으로는 추키마고가 우뚝 솟아 있었다. 하지만 이 봉우리들은 단지 6,000m급 설산에 불과했다.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빙하호수와 그 뒤로 거대한 설산이 뭉게구름 일 듯 둥실둥실 떠올랐다. 8,000m급 고산을 연상케 할 만큼 거대한 설산을 이룬 비그페라고샤르(Bigphera-Go Shar·6,729m)~비그페라고눕(Bigphera-Go Nup·6,666m) 연봉이다. 우리가 목표로 삼는 파르체모는 비그페라고샤르 바로 왼쪽에 솟아 있으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빙하 호숫가 한쪽에 수로가 만들어져 있고 관리소도 세워져 있었다. 히말라야는 20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빙하호의 위험이 부각되고 있다. 지구온난화현상으로 빙하가 급속도로 녹아 내리고 그 물이 빙하호로 스며들면서 둑이 무너지고 그 아랫마을이 느닷없이 쏟아져 내린 급류에 쑥밭이 되곤 하는 것이다. 다와는 날이 더워지는 4월부터 관리소에 사람이 머물면서 수위를 체크하고, 수위가 높을 경우 나가온과 베딩 일원의 주민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린다고 한다.
초롤파 일원의 아름다운 풍광에 한동안 빠져 지내다 호숫가 길을 따라 30분쯤 거슬러 올라가다 티숍 부근에 텐트를 치고 점심을 먹은 뒤 다시 둑 위로 올라섰다. 초롤파 빙하호수는 순백의 세계였다. 불현듯 59년 전 이곳을 지났을 힐러리 경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순백의 초롤파 역시 그에게는 탐험의 대상이었을까. 저 앞의 거대한 설산 역시 도전의 대상이었을까. 갑자기 하늘에서 눈이 휘날리기 시작하더니 눈발이 점점 굵어졌다. 이제 우리 앞에도 도전의 대상이 나타나려는 것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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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인터뷰 ]
빌라에베레스트 사장 앙 도르지 셰르파
“패키지 트레킹이 안전합니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한식당과 게스트하우스를 겸한 빌라에베레스트(Villa Everest)를 운영하는 앙 도르지 셰르파(Ang Dorge Sherpa·49)는 한국 산악인뿐 아니라 트레커들에게는 유명인사다. 한국 원정대 가운데 많은 이들이 어려운 일이 생기면 찾는 이가 바로 앙 도르지 셰르파다.
에베레스트 등반 기점인 루클라 남서쪽으로 사흘 거리인 오칼룽가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후반인 1978년부터 5년간 쿨레카니에서 수력발전소를 건설한 삼부토건의 식당에서 근무해오다가 20대 중반인 1983년 양정고 동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키친보이로서 한국 산악인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90년 동국대 동계 에베레스트 원정에 이르기까지 20여 개 한국 원정대의 쿡을 맡아왔다. 그러나 앙 도르지 셰르파는 한국인들과 20년 넘게 지내오면서도 정확하게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자 1990년 하던 일을 접고 어학연수에 나섰다.
“이근후 박사님과 박영석 대장의 집에서 숙식은 해결했지만 비행기 값은 큰 부담이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석 달밖에 비자를 내주지 않아 6개월간 지내는 사이 도중에 네팔을 다녀와야 했으니까요. 돈을 벌어도 시원찮을 때인데 쓰기만 하자니 부담이 많이 됐죠. 그래서 이화여대 어학당에서 6개월만 연수하고 돌아간 거예요.”
앙 도르지 셰르파는 1991년 박영석씨가 인수한 빌라에베레스트의 동업자로서 식당과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여행업도 하고 있다. 빌라에베레스트 한식당에서는 된장찌개, 김치찌개, 돌솥비빔밥, 닭칼국수, 삼겹살 외에 통돼지바비큐도 내놓고 있다. 앙 도르지씨는 “초창기에는 한국인들과 성품이 달라 애를 많이 먹었지만 이제는 적응이 많이 돼 어려움이 거의 없다”고 말한다.
“네팔은 103개 종족이 65개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랍니다. 종교와 문화도 다양하고요. 성격도 느긋하고요. 그래서 성격이 급한 한국인들과 마찰이 있곤 한 겁니다.그런 특수성을 한국인들이 이해를 해주어야 합니다.”
앙 도르지씨는 오랜 세월 한국 산악인들과 인연을 맺어오다 보니 좋은 일, 나쁜 일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었다.
“사고 당한 한국 산악인들의 얼굴이 지금도 선해요. 1993년 동국대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남원우와 안진섭, 2007년 남서벽에서 사고를 당한 오희준과 이현조…. 1998년 캉첸중가 원정 때에는 대단했어요. 사람과 식량을 나르기 위해 헬기를 수없이 띄우고. 막판에는 대원 한 명과 기자가 사고를 당해 또 헬기를 띄웠으니까요. 허가를 받지 않은 채 등반하다 사고 난 기자 때문에 애도 많이 먹었고요.”
현지인과 외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한식당을 운영하면서 여행업으로도 자리를 잡은 앙 도르지는 “예전에는 트레커 대부분 여행사를 거쳤는데 요즘은 인터넷이나 여행가이드북 등에 정보가 많아 스스로 해결하는 트레커가 많아지고 있다”며 “그런 가운데에서도 백지상태에서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서는 이들이 간혹 있어 문제”라고 말한다.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 도중 토롱라(5,416m)를 넘다가 심한 고소증 때문에 잠이 들었던 사람이 있어요. 빌라에베레스트를 찾아왔는데 손가락이 시커멓게 죽어 있지 뭐예요. 그런데 동상에 걸린 줄 모르고 있는 거예요. 3년 전 83세에 트레킹을 했던 분이 올해 다시 네팔에 오셨어요. 말렸어요. 시내 관광하시는 게 건강에 좋을 거라고요.”
트레킹뿐 아니라 크고 작은 원정도 핸들링하는 앙 도르지는 “4월 1일자로 트레킹 규정이 바뀐 게 많다”며 “특히 여행사를 거치지 않으면 포터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앙 도르지는 “잘 알려진 대행사를 통하거나 적어도 정보를 많이 수집하고 준비를 단단히 한 상태에서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서줄 것”을 당부했다.
주소 PO Box 3165, Thamel, Kathmandu Nepal, 977-1-444-1593, 팩스 977-1-441-0161, 이메일 nekotreks@ecomail.com.np, 웹사이트 www.nekotrekking.com.
/ 글·사진 한필석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