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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위한 시각예술이미지의 조직-강수미(완)[1].hwp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위한 시각예술이미지의 조직(Ⅰ)
: 아방가르드와 대중문화예술의 교차점
강 수 미*
Ⅰ. 서론
Ⅱ. 유미주의․아방가르드․대중문화예술
1. 이론적 고찰의 구도
2. 접속과 갈등
Ⅲ. 아방가르드와 대중 현실의 교차 이미지
1. 미래파: 기계적 지속과 역동성의 실패
2. 러시아 구성주의: 생산 예술의 정치화
Ⅳ. 결론: 역사적 실패로부터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미래로
Ⅰ. 서론
이 연구에서 우리는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첫째, 물질적 발전과 풍요가 인간과 자연의 삶을 어떤 형태로든 억압, 착취하지 않는 사회. 둘째, ‘좋은 삶’을 향한 다양한 가치, 관심, 욕구, 감각, 인식들이 다자(多者)적인 동시에 집합적으로 창발(創發, Emergence)하는 이타적이고 유연한 사회라 전제한다. 이 같은 공동체의 구축과 지속에, 인문학은 ‘부분이 아닌 전체의 총체적 지식(integrated knowledge: the total, not just the parts)’으로 물질과 정신,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계, 존재, 다양성, 차이 등을 사고하고, 그 근거와 의미를 생성하는 영역으로서 기여한다. 그리고 시각예술은 개별 감각, 감성, 경험, 의식을 이미지를 통해 공동체의 의식과 감각 활동에 결부시켜 조직하는(configure) 장(場)이자, 사적․주관적 차원과 공공적․객관적 현실 차원이 함께 공존하는 장으로서 역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유연한 관계 맺기와 수평적 변화, 그리고 미래 상(像)의 제시가 가능하다. 이에 크게 두 편의 논문으로 수행할 본 연구는,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위해 우리가 어떤 사회적 의식과 지향으로 시각예술을 조직해야 하는가, 사회에서 시각예술의 구조와 기능은 어떠해야 하며, 어떤 이미지가 그에 값하는가를 전체 주제로 삼는다.
이를 위한 첫 시도로 본 논문은 미학․미술비평의 입장에서 역사적 고찰을 수행할 것이다. 우리의 논제는 20세기 초중반 대립 또는 상호 영향이라는 복합적 관계에 놓였던 ‘서구 아방가르드 예술과 대중문화예술’이다. 이 상관된 양자에 대한 고찰은 필수적으로 예술/사회, 예술/정치, 유미주의 예술/아방가르드 예술/대중문화예술, 문화/테크놀로지의 내외적 연관성을 비롯한 제반 문제를 포괄한다. 이 점에서 아방가르드 예술과 대중문화예술은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것으로서 가까운 과거의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집단적 삶의 경향과 현실 역학(力學)을 파악할 타당한 연구 대상이다. 동시에 예술을 생활 실천으로 지양하면서, 삶의 심미화를 통해 유토피아적 미래상을 조직하고자 한 근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집단적 운동이 과거에 추구했던 바와 실패했던 부분으로부터, 현재의 시각예술과 대중문화예술의 환경을 새로 조성할 방안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모델이 된다.
본문 첫 장에서 우리는 유미주의 예술, 아방가르드 예술, 대중문화예술의 역학관계와 그것이 근대사회에서 접속과 갈등으로 표출된 맥락을 역사철학적, 미학적 관점에서 논할 것이다. 특히 뷔르거(Peter Bürger)와 포지올리(Renato Poggioli)의 선행 아방가르드 이론을 검토하여, 두 연구가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 대한 이론적 고찰에서 가지는 한계를 짚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보완으로, 아방가르드를 포함한 새로운 형식의 예술과 대중, 대중문화예술의 생산적인 상호 영향관계에 주목한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유물론적 예술이론을 참조하겠다. 본문의 둘째 장에서는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의 논쟁적 선례인 이탈리아 미래파(Futurism), 러시아 구성주의(Constructivism)가 주 연구 대상이다. 역사적 시기로는 비슷하고 지형학적․실제 전개 양상으로는 상이했던 이 두 아방가르드는, 당대 정치적 역학과 기술(계급관계와 생산조건)의 격변 속에서, 근대사회 공동체 현존의 문제에 깊이 연루된 예술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히 선별해 논할 가치가 있다. 우리는 이들 아방가르드의 목표와 논리, 그리고 구체적 작품들을 분석하면서 근대사회 공동체의 대중 현실과 시각이미지의 문제적 교차, 그리고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과 대중문화예술의 미학․정치학을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유미주의․아방가르드․대중문화예술
1. 이론적 고찰의 구도
과거 20세기는 산업기술의 생산력, 과학의 합목적성, 정치 혁명, 그리고 경제적․물질적 진보를 통해 ‘대중 유토피아(mass utopia)’를 현실에서 건설하고자 한 시대다. 다수의 물질적 풍요와 평등하고 자유로운 현존, 자연의 강압으로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합리적 사회 질서를 구축하고, 인간 삶의 지평을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확장하는 것, 이것이 대중 유토피아의 꿈 내용이었다. 소위 ‘모더니티’를 성취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추동력으로서,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 민주주의 또는 공산주의 모두가 표방하고 목표했던 그 꿈은 집단성을 띠었다. 테일러주의(Taylorism)와 포드주의(Fordism)에 따른 기계 노동의 집단화, 상품의 대량생산과 소비에서의 집단화, 대도시에서의 집단적 거주와 정치에 대한 민주적 참여, 여가문화가 대중 유토피아를 원형으로 근대사회에 구조화됐다.
하지만 서구 예술, 특히 유럽의 순수예술(Beaux-Arts, fine arts)은 18세기 관념론 미학의 체계 안에서 정립됐고, 19세기를 거치며 박물관․살롱․아카데미와 같은 예술 제도를 통해 정교한 형태로 정착된 유미주의 예술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대중 사회 집단을 중심으로 재구조화된 사회의 제반 체제와는 달리 유독 예술은 소수 부르주아 계급의 권내에 안주하며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삶을 영위했다는 것이다. 또 사회의 집단적 생산과 소비, 집단적 정치 행위, 생활방식, 문화 활동과는 달리, 그 부르주아적 예술은 개인의 내적 영역에서 제한적인 창작과 관조의 ‘부정적’ 순환구조를 고수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근대시기 예술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현실사회 구조의 변화와 부조화를 이뤘다. 각각이 차이를 갖지만, 크게 봐서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은 이 같은 기존 예술 체제에 대한 비판과 극복의 맥락에서, ‘예술의 혁신’과 ‘예술을 실생활로 돌려보내기’를 기치로 내걸고 출현했다. 즉 관념론 미학의 유미주의 예술전통에 대한 투쟁으로서 전위(前衛, avant-garde)예술이자, 예술과 사회 사이에 놓인 분리의 경계선을 돌파하는 예술실천으로서 전위인 것이다.
다른 한편, 근대의 사회적 변화와 테크놀로지의 발전 속에서 대중문화예술이 형성됐다. 전근대사회까지 민중의 삶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문화와는 달리, 대중문화예술은 19세기 초반부터 본격화된 산업적 근대성과 부르주아 중심의 사회 프로그램에 따라 발생하고 정착될 수 있었던 문화형태이다. 그런데 프랑스 시민혁명이후 이어진 정치적 민주화와 대중 교육은 역사적으로 교회, 왕, 전제군주 또는 봉건귀족은 물론 새로 부르주아지가 소유한 문화의 독점적 권리 행사 구조를 깨뜨렸다. 특히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자본주의의 본격화에 힘입어 출현한 다양한 기계장치 및 매체는 과거 특정 부류에만 한정됐던 문화와 예술의 발생과 수용의 구조를 대중과 시장에 개방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문화 예술은 진일보한 테크놀로지를 통해 기존에는 소수만 독점했던 책(지식), 그림, 음악(예술), 가구(사치품) 등이 싼값에 충분한 양으로 재생산 가능해져 시장을 만족시키는 식으로, 또는 사진, 영화, 신문, 잡지, 탐정소설―이후에는 라디오, 텔레비전 등―처럼 새로운 매체형식과 내용의 것들이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고 욕망을 재조직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대중문화에 대한 초기 비판적 이론들, 특히 마르크스주의 비평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대중문화예술은 겉보기와는 달리 민주적이고 해방적이기보다는 “고급문화에 기생하면서 암적으로 성장”한 측면이 있다. 또한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아도르노(Theodor W. Adorno)가 논박했듯이, 산업 및 상업과 결부돼있는 속성상 대중문화예술은 “모든 것을 동질화”하는 문화산업 메커니즘에 따라 평균적 미감과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형식 및 내용을 ‘양화(量化)의 법칙’으로 유지하면서, 대중을 말초적 오락과 수동적 감상의 소비자 객체로 묶어뒀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은 이러한 대중문화예술과 대립각을 세웠다. 애초 그 운동이 기성 권력 체제에의 순응, 도구적 이성에 대한 맹신, 문화의 물신화, 예술의 상품화에 대한 총체적 비판과 그런 현실에 대한 파괴적 혁신, 나아가 예술로 새로운 사회 조직하기를 목표로 내세웠을 때, 당시 대중문화예술의 문제적 상황 또한 예외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크게 두 방향에서 살펴본 근대사회조건 속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과 대중문화예술의 성립과 그 정체는 우리에게 유미주의/아방가르드/대중문화예술의 관계를 동시에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선행이론과 비교하며 살펴보자.
문예학과 미술사는 일반적으로 20세기 전반기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으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러시아 구성주의, 미래파, 표현주의, 입체파를 꼽는다. 각 운동 또는 유파마다 고유한 의도와 실행 방법론을 갖고 있었지만, 이들은 예술을 포함한 기존 전통과의 철저한 단절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런데 학계에는 이들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한 역사적 고찰에서 조금 상이한 관점을 제시하는 두 이론이 존재한다. 뷔르거와 포지올리의 아방가르드 이론이 그것이다. 뷔르거는 1974년 발표한『아방가르드의 이론』에서 아방가르드를 ‘역사적 아방가르드(제1차 세계대전 무렵)’와 ‘네오아방가르드(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구분한다. 그리고 전자가 “시민사회[bourgeois society]에서 형성돼온 예술제도에 대해 반기”를 들며 예술을 실생활로 지양하려 했던 의도는 역사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그것은 다시 반복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후자 네오아방가르드는 1950-60년대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저항이 이미 ‘박물관화’된 상태에서, “아방가르드를 예술로서 제도화함으로써 진정으로 아방가르드적인 의도들을 부정”하는 “자율적 예술”일 뿐이라는 논지에서다. 요컨대 뷔르거의 이론에서 아방가르드는 처음으로 ‘예술 제도를 자기비판’하고, ‘미적 경험을 실천적인 것으로 전환하려 시도’했다는 두 측면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뷔르거보다 앞선 1962년,『아방가르드 예술론』을 펴낸 포지올리는 아방가르드의 역사를 19세기 초중반으로까지 거슬러 잡는다. 그에 따르면, 아방가르드는 ‘사회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예술적 아방가르드’로 나눌 수 있다. 즉 1830년과 1848년, 프랑스의 두 혁명 기간 동안 공상적 사회주의인 푸리에주의(Fourierism)에 영향 받아 “예술과 사회의 상호 의존성”을 주창한 정치적 급진주의 아방가르드와, 그에 이어 1870년대 파리 코뮌 당시 “과거의 예술 전통을 영원히 청산”할 것을 요구하며 나타난 예술적 급진주의 아방가르드로 가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지올리는 역사적으로 이 두 아방가르드의 동맹은 짧았으며, 이후로 “아방가르드는 당연히 예술적 아방가르드와 동의어”가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관점에 기초해 아방가르드가 “부르주아 심미안에 반발하는 기능”을 가졌으나, 무정부주의적이고 비대중적이며 예술적․지적 엘리트만을 위한 “소외 상태”의 예술로 귀착했다고 결론 내린다.
여기서 뷔르거와 포지올리의 두 이론 중 어느 쪽이 더 옳고 그른지를 논할 수는 없다. 그 이론들이 대상으로 삼는 역사적 시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며, 연구의 범위 또한 뷔르거가 역사적 아방가르드와 예술제도에 대한 내재적 고찰에 집중한다면, 포지올리는 아방가르드의 역사적․정치적․사회문화적 전개 양상을 포괄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다만 이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두 이론가의 논의는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의 목적이 ‘전통에 대한 청산’과 ‘반(反)부르주아적 예술 실험을 통한 예술과 삶의 관계 회복’에 있었다는 점에서 일치를 보인다. 우리는 이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는 뷔르거의 관점에서든 포지올리의 그것에서든,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 대한 고찰은 필수적으로 부르주아 유미주의 예술과 상관한 측면, 그와 동시에 현실 삶의 문화와 상관한 측면 모두를 고려할 필요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뷔르거는 아방가르드의 핵심 목표가 ‘예술의 삶으로의 지양’이었음을 부단히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논의는 기성 관념론 미학 또는 유미주의 예술제도 대(對)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저항이라는 관계 축에 집중하면서, 아방가르드와 현실 삶의 문화예술이라는 관계 축은 간과한다. 반면 포지올리는 아방가르드와 대중, 대중문화의 관계를 구체적인 논거들―유행, 공중, 대중성, 기술, 현대성 등―을 들어 교차 논의함으로써 보다 합당한 연구범위를 탐색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이 둘의 관계에서 지나치게 ‘대립’구도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방가르드 운동이 삶의 실천적․정치적 차원과는 단절한 채 심미적 급진성에 몰두한 “소수파의 문화”이자 사회적으로 “소외된 실천”이었다는 단선적 결론을 강제하는 것이다. 포지올리의 이 같은 설명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원칙적으로 ‘동시대에 대한 예술의 인식과 실천’, ‘삶의 경화되고 부정적인 양상을 예술로 극복하기’를 자체 운동의 근간으로 삼았고, 그 예술의 질료와 매체, 기술 및 실천 방법을 정치적이고 일상적인 현실로부터 발견했다는 점에서, 그 관계를 단순히 대립으로만 파악해서는 이론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뷔르거와 포지올리의 이론적 고찰과는 다른 방향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앞서 썼듯이 아방가르드 예술은 변화하는 사회적 현실과는 단절하고 전통을 보수화하면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한 유미주의, 그 부르주아 계급 문화의 배타성, 허위의식, 예술제도에 대한 예술 비판적 운동이다. 그리고 태생적으로 비(非)부르주아적이고 비(非)미학적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대중문화예술은, 실제로는 서구 왕정과 귀족 중심 사회를 타파하고 나선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경제․사회구조․문화적 조건이 배태한 문화 형태다. 이런 맥락에서 유미주의, 아방가르드, 대중문화예술은 근대 부르주아 사회라는 시대적 상황과 사회구조를 공통기반으로 하면서도, 각기 상이한 목적과 대상, 기능을 갖고 전개된 것들로서 함께 다뤄져야 한다. 여기서 벤야민의 이론은, 우리에게 중요한 전거가 된다.
1920년대 중후반 경부터 1940년 마지막까지 벤야민의 미학 또는 예술이론 저작은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유미주의, 아방가르드, 대중문화예술’을 이론적으로 상관된 구도로 설정하고 논한 것으로 읽힌다. 잘 알려진 벤야민의 논문「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하「기술복제」, 1936)은 사진과 영화를 동시대성(contemporaneous)의 예술로 판단한다. 그는 이 판단의 근거 논리를 한편으로 관념론 미학과 유미주의 예술의 시대착오적 한계와 그것이 정치 이데올로기나 경제적 대상으로 전용되는 현실적 위험을 지적하는 것으로 가름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진과 영화 같은 새로운 예술 형태 안에 잠재된 대중 혁명 및 대중 실천 매체로서의 기능을 미학적으로 이론화하는 방법으로 관철한다. 또 벤야민은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와 같이 가까운 과거의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서, 유미주의 예술(제도)과 부르주아 계급 문화를 비판적으로 해체하고자 했던 시도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충분하게 전개된 지점을 지적하면서 그 운동에 매장된 잠재성을 현실화할 계기를 이론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요컨대 아방가르드 예술이 정치적 경향성을 갖고 근대 기술의 혁명과 집단의 ‘지배와 착취 없는 사회’를 향한 혁명을 다시 매개할 가능성을 타진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이론적 고찰의 구도는 대중이 주체가 되는 사회에서 새로운 예술의 정립을 목표로 한 것으로서, 그의 역사철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또 문화예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그 자신의 유물론적 관찰 또는 사유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에 따라 그의 예술에 대한 고찰은 특정 예술에 내재적으로 소급하는 분석이 아니라, 역사적․사회적․정치경제적 제반 조건들과의 연계 속에서 이뤄진다. 이를 본 논의에 적용하면, 근대사회 속 유미주의 예술,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 대중문화예술, 이렇게 삼자의 역학관계 및 전개 내용에 대한 종합적 고찰이다. 이하에서 이들의 관계가 20세기 초중반 모더니티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접속하고 갈등하는지 살펴보자.
2. 접속과 갈등
‘대중 유토피아의 현세적 건설’이라는 근대의 꿈은 대중문화 또는 대중예술이 파종되고 꽃피우는 최적의 토양이었다. 그 꿈의 프로젝트가 펼쳐진 19세기에 서구의 산업화․도시화와 더불어 대중문화예술의 주체이자 객체인 대중(mass)이 출현했다. 이들은 사회 계급적 개념으로도 포섭되지 않고, 개인의 존재 방식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형태의 집단이었다. 하지만 대중은 20세기 들어서 “완벽한 사회적 힘을 취득한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산업과 경제 분야만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의 영역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구체적으로 말해, 도시민, 여행객, 소비자, 산책자, 관중, 고객으로서 대중의 소비력과 유동성, 다수성과 집합적 힘이 당대 문화 예술의 형식과 내용, 나아가 한 공동체의 미래를 향한 무의식적 꿈의 조직에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벤야민은「기술복제」논문에서 대중을 “예술작품을 대하는 일체의 전통적 태도가 새로운 모습을 하고 다시 태어나는 모태”라 규정함으로써, 바로 이와 같은 당대적 현상에 대한 예술의 적확한 조응 및 모색할 변화의 방향을 짚었다. 비단 작품에 대한 수용 태도만이 아니다. 그는 기술적으로 예술작품이 복제(reproduction) 가능해진 시대에 “현실이 대중에 맞추고 대중이 현실에 맞추는 현상”이야말로 당대예술의 형성사적 원인이자 “발전 과정”이라 본다. 유물론적 예술이론으로서 벤야민의 이런 판단은 현대 분석미학의 대중예술에 대한 정의에서 확인할 수 있듯, 객관적 조건을 고려한 것이다. 요컨대 대중예술이란 “역사적 관점에서 한 작품이 산업시대(대량생산 시대)의 대중매체(mass media)에 의해 많은 사람을 위해 제작되고 전달” 가능한 형태의 예술이다. 대표적으로 영화나 사진, 녹음된 음악, 공예 디자인 용품, 만화, 포스터 등 산업사회 대량생산 기술을 통해, 대중에 의해, 대중을 위해 만들어지고, 쉬운 접근성(easy accessibility)을 특징으로 대량 유포․소비되는 현실 삶의 예술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반대 방향의 역학관계 또한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20세기 전반기 본격 모더니티의 정치 경제 사회적 구조와 물질적이고 의식적인 목적에 ‘의해’ 대중의 문화, 대중의 예술, 더하여 대중의 유토피아적이고 무의식적인 꿈 내용이 조직되었다는 점이다. 이때 정치 경제 사회 구조는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 자본주의, 도구적 실용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또 물질적․의식적 목적은 진보와 발전의 극대화, 객관성과 합목적성의 실현으로 정리할 수 있다. 대중문화와 예술, 대중의 꿈은 ‘피와 살’로 결합된 민족에 바탕을 둔 각각의 국가가 설정한 정치적 이상과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도록 조직됐다. 그리고 산업기계에 의한 생산과 소비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맞춰 효율적이고 채산성 높게 만들어지고 작동해야 했다. 때문에 근대의 대중문화에 대해 “인류학적 의미에서의 문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한 것이다. 대중문화는 민중에 의해 “아래로부터 성장한”, “그들 자신에 의해 형성된” 문화나 예술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대중문화는 위로부터 부과된”, 대중 집단을 위해 기술적으로 조립된 문화나 예술이라는 경험적이고 실질적인 의미에서 대중적인(popular) 문화다. 즉 불특정 다수의 익명적 덩어리(agglomeration, mass)로서 대중을 겨냥해, 쉽게 수용되고 소비되는 문화가 전면화된 사회의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대중문화예술이 “부르주아 문화에서 비롯된 가장 특징적인 문화형태”라는 주장,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부르주아화가 일어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역으로 문화의 프롤레타리아화가 직접적으로 맞물려 발생”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렇다면 당대 아방가르드는 이 두 얼굴의 대중문화예술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아방가르드 예술은, 앞서 벤야민의 유물론적 예술이론이 전망했듯 대중을 기반으로 하고 그들의 영향력 안에서 조직된 형태의 대중문화예술이 아니라,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 메커니즘이 파생시킨 동질적으로 집단화, 집합화된 문화로서 대중문화예술에 대립했다. 대중문화예술이 자본주의 산업과 상업의 메커니즘에 종속되거나, 대중의 퇴행을 조장하는 지배세력의 정치적․사회적 이데올로기 선전도구로 전용된 채 문화 예술을 변질시키고 사람들을 그에 길들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미주의 예술이 규범적 전통과 예술제도에 안주하며 상투적인 예술을 답습하고 미적 경험을 관례화한 것과 동일 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인식 하에서 비판적 관점을 강하게 밀고 나갈 경우, 예술의 진정한 아방가르드는 오염된 사회 혹은 일상의 저급한 문화와 철저하게 분리되어야만 한다는 입장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 입장에서 우리는 아방가르드 예술과 대중문화예술이 적대적으로 대립하거나 위계적 차별관계로 분열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모더니즘 미술의 대표적 비평가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아방가르드 예술 논변은 그 대표적 예인데, 시각예술분야에서 순수미술/대중예술, 고급/하위, 아방가르드/키치(kitsch), 엘리트/대중이라는 위계적․대립적 이분법 구도가 그로부터 고착됐다. 그린버그는 미국문화가 대공황 직후 대중문화로 재편돼 가던 시기에「아방가르드와 키치」(1939)를 썼다. 그는 이를 통해, 상업화에 저항한 유럽 모더니즘 예술의 아방가르드적 가치와 의미를 미국에 인식시킨 것은 물론, 예술의 진정성과 자율성을 급진적으로 추구하는 새로운 미국식 아방가르드를 아방가르드의 본거지라 할 유럽에 인식시켰다. 이 글에서 그는 아방가르드를 “사회로부터 그 자체를 분리”시키고 예술에 대한 자기비판을 수행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추상 또는 비대상적 예술(nonobjective art)에 도달”한 예술로 규정한다. 반면에 그가 잡지 표지 삽화, 길거리 소설, 할리우드 영화, 대중가요를 예로 들며 지목한 키치는 아방가르드의 대척점이자 대중의 오락과 기분전환을 위해 조성된 저속한 취미일 뿐이다. 이런 그린버그의 관점은, 아방가르드와 키치를 특정 사회 정치 경제 상황에서 유발된 문화 예술적 대립물로 놓고, 압도적으로 전자가 후자보다 위계상 상위에 있으며 창조적 혁명성을 갖는다고 보는 입장을 대변한다.
그런데 그린버그의 글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가 “동일한 하나의 문명이 서로 다른 둘을 동시적으로 생산”한다고 말한 대목이다. 여기서 둘은 그린버그가 키치라 지칭한 미국식 대중문화예술과, 엘리엇(T. S. Eliot)의 시와 브라크(Georges Braque)의 회화를 예로 든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예술이다. 이 양자를 동일한 문명의 쇠퇴 단계에서 나온다고―그러나 정작 자신의 글에서 극단적으로 차별하며 구분 짓는―말함으로써, 그린버그는 기술과 자본 중심의 문명을 비판하고자 했다. 이 문명은 유행, 대중성, 기계적 복제와 소비를 추앙하면서, 자체의 문화를 생산할 능력은 고갈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고전주의 예술이 유일하고 영원하며 절대적인 미를 속성으로 했던 것과는 달리, 부르주아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방가르드든 키치든 예술은 매번 새롭고 다중(多衆)적이며 상대적인 것, 참신성과 기이함, 놀라움과 물의를 빚는 것을 긍정한다. 또한 전자가 기술의 모방과 반복적 훈련을 통해 전체성 또는 완전성의 미의 세계를 추구했다면, 후자는 그런 성격의 모방과 반복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산업 기술과 매체의 효율성과 간편성을 활용하며, 전체성이나 완전성을 신화라고 비판하면서 파편 혹은 부분들의 짜깁기에 몰두한다. 그린버그는 모더니즘 예술이든 그것의 저급한 모방으로서 키치든 동일한 사회조건 속에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아방가르드 예술의 과제가 오히려 그러한 조건의 극복 혹은 그 사회조건과의 단절에 있다는 자신의 논지를 보다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자 했다. 만약 예술이 자본주의 생산과 소비조건 또는 각종 사회적 장치(apparatus)들과 교섭할 경우, 그것은 키치처럼 공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작동하면서, 본질적으로 언제나 같지만 스타일에 따라 변하는 거짓 감각과 대리적 경험만을 제공하리라 본 것이다. 혹은 소비자에게 금전 이외에는 어떤 것도, 심지어 시간조차도 요구하지 않는 상업 예술로 전락하리라 전망한 것이다. 1930년대 당시 미국과 러시아에서, 키치는 빈곤한 현실을 과장하고 드라마틱하게 만든다는 점, 특별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즐길 수 있고, 기성품 시장에서 살 수 있으며, 대중의 비위를 맞춘다는 점에서 번성했다. 이러한 정세가 그린버그로 하여금 예술지상주의적 아방가르드 예술, 현실과 대중으로부터 극단적으로 절연한 예술을 강력히 요구하게 했다. 하지만 나중에 보겠지만, 벤야민은 사회의 생산조건, 매체의 변화가 어떻게 이미 주어진 예술의 진정성과 순수성을 훼손하는가가 아니라, 현재의 예술은 어떻게 그러한 사회장치들, 사회 변화와 관계 맺으면서 공동체 집단을 해방시키는 데 기여하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아방가르드는 전자와 같은 현실 문명에 보수적으로 맞서는 예술이 아니라, 후자와 같은 혁명적 기능을 수행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점에서, 그린버그가 소위 ‘아방가르드’라고 옹호하는 예술이 모더니즘 추상 또는 비대상적 예술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그의 아방가르드 이론은 20세기 초 유럽의 아방가르드가 ‘예술 해체와 삶으로의 예술 지양’을 목적한 바와는 달리, 점증하는 대중문화예술의 사회적 영향력과 파급 효과에 맞서 예술의 권위, 순수성, 자율성을 더욱더 확보하기 위해 내재적 자기비판에 몰두하는 예술―이후 미국식 모더니즘 형식주의 미술로 정립된 예술―을 아방가르드로 간주했다. 물론 이는 한편으로 1930년대 후반 그의 러시아 스탈린 체제에 대한 반공산주의적 입장과 유럽 파시즘화에 대한 위기의식, 거기에 내셔널리즘에 입각한 자의적 해석과 이론화가 겹쳐 독단화한 탓이 크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미학적 아방가르드 이론은 애초 유럽의 아방가르드가 유미주의와 맺고 있는 관계에 내장된 모순을 드러내는 진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유미주의는 삶과의 분리, 또는 현실생활과의 단절을 작품의 형식적 차원이 아니라 ‘내용’으로 삼았다. 유미주의가 표방한 예술의 자율성은 예술을 사회로부터 구분하는 하나의 형식을 넘어, ‘객관적 이성의 계몽주의와 합목적적 근대화’가 주도하는 사회생활과는 다른 ‘미적 정신과 감각’을 의미하며 그 자체가 예술의 내용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앞서 그린버그가 아방가르드 미술이라 정의한 추상미술, 비재현적 미술은 뒤집어 보면 유미주의 예술의 예술을 위한 예술, 비대상적 예술이다. 이 점에서 유미주의와 그 비판자로서의 아방가르드는 접속한다. 즉 독점적 고유 영역으로서 유미주의 예술이 이성의 합목적적 사용에 구속 받지 않는 ‘심미적인 것’과 ‘초월적 정신’을 예술의 배타적 내용으로 삼은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은 체제에 대한 비순응적(저항) 예술 인식을 토대로 사회의 의고적 체제와 관료성, 예술의 상품화 등에 맞서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방가르드는 전투적인 유미주의로 여겨질 수 있다. 이를 뷔르거는 “아방가르디스트들은 유미주의자들이 표현했던, 합목적적으로 조직된 세계에 대한 거부를 유미주의자들과 공유한다.”는 말로 정확히 지적했다. 이렇게 아방가르드 예술에 담겨있고, 유미주의 예술과 공유되는 속성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를 서구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체계적으로 조직된 대중문화예술에 대한 대립자 혹은 그로부터 자발적으로 소외되는 자로 이끌었다. 또 세속적이고 시민으로서의 자각이 없는 대중에 적대적인 부르주아 엘리트 집단의 예술 운동, 혹은 정치적 급진성과 폭력성을 예술을 통해 표출하는 비대중적 집단의 그것으로 보이게 했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방가르드 예술과 대중문화예술 간의 전체 내용은 아니다. 뷔르거가 앞서의 지적에 이어 강조하듯이,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은 유미주의 예술과는 달리, 예술로부터 새로운 실생활을 조직하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물론 포지올리가 고찰한 것처럼, 아방가르드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이행하면서 점차 정치적 아방가르드에서 예술적 아방가르드로 그 성격이 좁혀졌다. 하지만 예술적 아방가르드는 예술의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잠재력을 주장하면서도, 그 내부에서 ‘삶은 급진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목표를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공유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이러한 정치성에 기반을 두고, 한편으로 기존 계급문화의 엘리트주의를 거부하는 반(反)엘리트주의자로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실행하기 위해 대중에 대한 지휘권과 책임감을 스스로 짊어진 엘리트로서 면모를 보였다. 그 점에서 아방가르드의 엘리트는 과거의 지배계급이나 집단과는 다르다. 이들은 반엘리트적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엘리트로서, 그들이 최종 유토피아적 목적으로 삼은 ‘삶의 모든 이로움(benefits)을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공유한다’는 생각을 실생활에서 관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대중문화예술이 역사적 전개에서 종속적이거나 퇴행적이며 비혁명적인 측면을 띠었다하더라도, 애초 그것에 내재한 여러 속성은 그와는 다른 전개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벤야민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급진적 목표와 혁명적 시도에 대중의 집단성, 대중문화의 유희성, 기술력과 생산성, 수용성이 연대할 경우, 유미주의 예술의 폐해와 더불어 대중문화예술의 부정적 측면이 극복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실제로 그는 1900년대 초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운동, 그리고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아방가르드 실천에서 그 연대의 가능성을 찾았다. 반면 20세기 유럽 아방가르드 중 가장 앞서 출현한 미래파, 그리고 독일 표현주의나 신즉물주의에 대해서는 기술의 오도된 수용, 기술에 의해 변화된 지각의 예술적 만족, 정신적 엘리트주의, 삶의 비참한 상태를 시각적 소비의 대상으로 만드는 미적 변용, 부르주아지의 프롤레타리아적 모방이라는 논점을 들어 비판했다. 결국 관건은 아방가르드적이냐 대중 문화적이냐가 아니라, 어떤 예술 운동이 자체로 목표하는 바와 실행의 방식을 어떻게 현실사회와 관계 맺으며 조직하고, 그 속에서 기능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어지는 장에서 미래파와 러시아 구성주의, 이렇게 두 경우로 나눠 논할 것이다.
Ⅲ. 아방가르드와 대중 현실의 교차 이미지
벤야민 역사철학의 핵심은 역사의 연속성과 미래로의 자동적 진보를 가정하는 역사주의의 연대기적 역사서술을 비판하면서, 불연속의 시간성과 과거를 통한 현재의 구원, 이를 위해 인식의 현재시간에 과거를 변증법적으로 읽고 당면한 현실의 폐허를 복구할 의미를 구성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요컨대 과거의 실패로부터 오늘의 진정한 상태를 각성하고, 과거 세대의 유토피아적 꿈을 기억함으로써 현재 세대의 왜곡된 현실을 해결할 길을 찾는 것이다. 벤야민은 20세기 초기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 대해 긍정과 비판이라는 양가적 입장으로 임했다. 그러나 벤야민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운동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아니라, 과거 그 운동의 실패로부터 어떻게 20세기 전반에 임박한 파시즘과 나치즘, 공황 상태에 빠진 자본주의, 스탈린 체제 하 러시아 공산주의의 문제적 상황들을 변혁할 길을 찾을 것인가이다. 그는 아방가르드 운동들이 계급관계 또는 생산관계, 그리고 생산조건에 매인 대중의 문화와 접속해 생산기구를 억압받는 집단의 편으로 새롭게 조직하지 못하고, 결국 예술 내부의 혁명적 시도에 그쳤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시도는 궁극적으로 공동체 집단의 혁명으로 연결되지 못한 가까운 과거의 실패였던 것이다. 벤야민의 유물론적 예술이론은 그 실패를 변증법적으로 전회하기 위해, 아방가르드 예술과 대중에 애초 담겨있는 변혁적이고 능동적인 잠재력을 현재화(Aktualisierung)하는 데 초점이 있다.
다른 한편, 벤야민은「기술복제」논문을 위해 준비해온 노트들에 예술의 역사를 “예언의 역사”로 규정해 놓았다. 이를테면 그는 예술을 근본적으로 미래를 예견하는 활동 영역으로 간주한다. 동시에 자신의 역사철학과 마찬가지로 예술에 관해서도, 과거시대에 행해진 예술의 예언은 잠재성의 상태에 있다가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현재의 관점에서” 파악되고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곧 아방가르드 예술의 경우에 직접적으로 해당한다. 왜냐하면 아방가르드란 본래부터 시대의 최전선에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돌파하는 것인 만큼, 그 자체로 현재라는 시간에서는 예언의 형태를 띠는 것이며, 그것의 실현은 현재 이후에 오는 ‘다음 현재’의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상황 속에서만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같은 벤야민의 사유를 염두에 두면서, 이제 미래파, 러시아 구성주의를 각기 다뤄 그 예술 운동의 원래 목적과 실패 지점, 그리고 현실 삶 또는 대중문화예술과 상관된 측면을 살펴볼 것이다.
1. 미래파: 기계적 지속과 역동성의 실패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모더니즘 시대 근대화의 핵심 면모와 유사하게,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 진보의 빠른 속도와 단절의 시간성, 선구적 실험, 요란한 슬로건, 집단적 활동, 파괴적이고 도발적이며 부조리한 행위와 반대로 지적이며 논쟁적이고 선언적인 언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아방가르드가 “모더니티의 급진화되고 강력하게 유토피아화된 버전”임을 환기시켜준다. 근대화와 연관해서,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 고대 문화예술 전통이 강한 이탈리아, 유미주의 예술제도가 확실히 정립된 프랑스,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제정시대를 끝내고 세계 최초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러시아를 중심으로 전개됐다는 점은, 일면 역설적이고 일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즉 과거 전통에 대한 고수 때문에 상대적으로 근대화에 뒤졌다는 인식, 현실정치와 물질문명의 격류 속에서 더 이상 전통적인 예술 체제로는 대응할 수 없다는 인식이 예술가들로 하여금 모더니티에 입각한 유토피아적 혁신을 요구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미래파는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 중 가장 먼저 출현했고, 이후의 다른 어떤 아방가르드 운동보다 더 적극적으로 모더니티의 물질적 진보와 테크놀로지의 역능, 산업시대의 호전성을 신봉했다. 이것이 외적 세계의 근대화에 대한 감격과 맹목적인 믿음에 근거한 것이든 그에 뒤떨어졌다는 자각에 이은 어쩔 수 없는 대처의 한 방식이었든 간에, 그들의 선언문과 작품들에 드러난 것은 결과적으로 테크놀로지에 대한 열광적 찬미, 기계문명에 대한 동경의 이미지다. 심지어 미래파는 미(美)를 ‘공격’과 ‘투쟁’에서 찾으면서 전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기까지 했다. 그 점에서 이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은 바야흐로 산업과 기술 중심의 근대성이 대중 유토피아를 실현시켜줄 것이라 믿었으나, 반대로 사회적 억압, 전 세계에 걸친 전쟁, 전체주의의 도래 등으로 파국의 위기를 맞은 당시 서구 근대 사회의 딜레마를 표상한다. 미래파는 근대화에 후진적인 조국을 당대 첨단의 산업, 공학, 과학, 철학으로 무장한 혁명적 예술을 통해 혁신할 것을 기치로 내걸었다. 하지만 평화주의 독트린을 거부하고 국가주의의 침략전쟁을 촉발한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파시즘에 동조함으로써, 유토피아가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디스토피아의 현실을 촉진시켰다. 이는 많은 논자들이 진단한 것처럼 단지 미래파 예술가 중 일부가 정치와 결탁해서라거나, 그 예술적 투쟁이 정치라는 안팎의 투쟁주의에 스스로를 방기한 채 희생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정확한 요인은, 벤야민이 지적하듯이, 이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 자체의 예술 이념 또는 미학 내부에서부터 “전쟁미학”을 숭배했고, 그 문제적인 “미적 쾌락”의 의식이 “파시즘이 행하는 정치의 심미화”와 동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전통의 파괴와 미래 지향을 응축한 ‘반(反)과거주의’를 절대적 미학 원칙으로 상정한 미래파의 태도가 단적으로 표명된 곳은, 이 운동의 주창자이자 정신적 리더인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가 작성해 1909년 2월 프랑스 신문 「피가로」(Le Figaro)에 발표한 <미래파 선언>이다. 여기서 그는 “숙명적으로 지치고 왜소해지고 짓눌린 상태로 간신히 빠져나온 저 전통”을 계속 찬미함으로써 힘을 낭비할 것이냐고 묻는다. 미래파가 내놓은 답은 그들의 또 다른 미학적 원칙인 ‘기술주의’ 또는 ‘기계 미학’을 통한 탈 전통, ‘금속성’ 미래의 선취이다. 이는 자신들이 속한 시대의 현대성에 전적으로 참여하고, 사회의 기술적 생산조건과 진보의 속도를 예술로 따라잡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선언문 곳곳에서 강조된다. 현대 기술의 산물이자 급속한 변화의 상징인 자동차가 예술의 전범이자 인류 문명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고대 헬레니즘 조각보다 더 아름답다는 선언문의 유명한 구절이 대표적 증거다.
마리네티가 처음 선언문을 발표한 이후, 미래파는 연이어 분야를 특정해서 여러 선언들을 쏟아냈다. <미래파 화가선언>(1910. 2), <미래파 회화: 기술선언>(1910. 4), <미래파 음악가선언>(1910), <미래파 조각: 기술선언>(1912), <미래파 의상선언>(1913), <미래파 건축선언>(1914)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미래파는 전 방위적으로 자신들의 창조적인 활동을 확산시키려 했다. 주목할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특히 ‘조형예술분야’에서 두드러지게 실험을 모색했다는 것과 ‘기술적인(technical)’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시한 선언들 중 <미래파 화가선언>과 <미래파 회화: 기술선언>은 미래파의 대표적 화가인 보치오니(Umberto Boccioni), 카르라(Carlo Carrā), 발라(Giacomo Balla), 세베리니(Gino Serverini), 루솔로(Luigi Russolo)가 마리네티의 최초 선언을 반영하면서 회화의 조형이념을 새롭게 제시한 것이다. 이들은 그때까지 회화가 고수해온 색채나 형태는 회화의 진리를 찾는 데 불완전한 것이며, 오직 역동적 힘만이 유일하고 최고의 미라 주장했다. 여기서 미래파 회화의 핵심 개념인 ‘역동성(dynamism)’이 부상한다. 이를테면 미래파의 화가들은 역동성에 대한 찬미로 근대 물질문명의 진보와 기계기술의 동력학을 반영하는 동시에, 서구 고전주의 예술 전통을 따라 정립된 조형예술의 이념―공간, 균형, 신비함, 영원성 등―을 폐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들은 당대 회화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미적 내용으로 상정한 다이너미즘의 표현 대상으로, 당시 기계문명의 상징인 기관차, 자동차, 대도시뿐만 아니라 군중, 투쟁, 폭동, 전쟁의 이미지까지 포함시켰다. 예컨대 보치오니의 1910년 작 <대회랑의 폭동>(도판 1)을 보자. 그림은 불빛이 쏟아지는 대형건물이 즐비한 도시 한 가운데서 남녀노소의 무리들이 뒤엉켜 싸우는 상황을 점묘법으로 묘사한 것인데, 감상자에게 그 이미지는 갈등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나 비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매스게임처럼 리드미컬하게 조직된 집단적 움직임이 유발하는 역동성과 강렬한 빛의 색채가 보는 이에게 카니발적 희열을 조장한다. 이는 화가가 그림의 주제를, 자신들이 새로운 미로 선언한 역동성의 조형 기술적 표현 대상으로만 인지했기 때문이다. 사실 보치오니뿐만 아니라 미래파의 많은 예술가들이 사회적 의식과 실제 기술력의 차원에서보다는, 조형적 표현기교나 모티브의 탐닉 차원에서 새로운 모더니티 환경, 기계문명, 그리고 전쟁 등의 외관만을 탐미적으로 취한 경향이 강하다. 단적으로 이들이 근대적 매체인 사진이나 영상기기를 직접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 또는 장치의 효과를 회화나 조각의 전통적 매체를 고수하면서 모방적으로 얻으려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1936년 마리네티가 발표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전쟁 선언문이나 1925년 미래파 디자이너 데페로(Fortunato Depero)가 도안한 <전쟁=페스티벌>(도판 2)―같은 해 ‘파리 국제 장식미술전’에서 금메달 수상―이라는 태피스트리에서 보듯, 그들은 전쟁의 폭력과 인류의 파국을 “새로운 시, 새로운 조형예술을 위한 […] 투쟁”의 무대, 장식 정도로 간주했음이 이를 확인시켜준다.
여기에 더해 미래파는 과학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변화와 생성의 철학을 수용함으로써, 프랑스 중심 현대미술경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혁명적 조형예술의 성과를 내려했다. 가령 그들은 예술가의 감각을 ‘엑스레이(X-ray)적 시각’으로 배가시키려 했고, 베르그손(Henri Bergson)의 철학, 특히 그의 기억이론 중 시간 규정과 지속(durée) 개념에서 자신들의 예술 운동이 가진 논리적 측면을 확보하려 했다. 우리는 여기서 특히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과 미래파 회화의 조형적 주제인 역동성, 동시성(simultaneity)을 살펴볼 것인데, 이는 미래파가 결국 인류 현존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파시즘에 동조하게 된 원인을 그들 미학의 원리에서 읽어낼 한 계기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은『물질과 기억』(1896)에서 ‘현재’라는 개념을 존재론적 사변으로 설명하지 않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체험된” 신체 경험으로 논한다. 그 첫 전제는 “시간의 고유한 본성은 흐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므로, 따라서 현재는 “직접적 과거에 대한 지각[“감각”]임과 동시에 직접적 미래에 대한 결정[“행동 또는 운동”]”이다. 설명하자면, 현재의 나는 과거를 기억 이미지로 지각하며, 미래에 어떤 행동을 할지 결정하는데, 이 둘이 지속하며 흐르는 때가 바로 현재시간인 것이다. 베르그손은 이렇게 현재라는 시간을 신체적 경험으로 설명함으로써, “현재는 본질적으로 감각-운동적”이라는 것, “신체는 생성의 현실적 상태, 나의 지속 속에서 형성 중에 있는 것”이라는 논지를 세웠다. 요컨대 이를 통해 그는 시간과 운동을 관념적으로 규정하고 영원과 불변을 절대시한 서구 관념론과 실재론을 공박하면서, 시간과 운동의 경험적 차원을 밝히고 지속 속의 생성과 변화를 주장하는 철학을 제시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특히 미래파 화가들은 이러한 베르그손의 철학에 심취했다. 그의 이론은 감각적으로 복잡하고 불협화음의 충격에 노출된 새로운 도시생활의 리얼리티와 기술발전의 결과에 들어맞으면서, 현실의 리듬과 속도, 생명력을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래파는 생활 속의 순간들을 그들이 추구한 새로운 미인 ‘역동성’으로 포착하고, 세계의 사물을 물질적 신체가 지속적으로 생성 중에 있는 것처럼 이미지화했다. 예컨대 보치오니의 1912년 브론즈 조각 <공간 속에서 병의 전개>(도판 3)가 병을 고정된 텅 빈 중심부(“절대적 운동”)와 여러 면들이 겹치며 회전하는 외피(“상대적 운동”)로 해체-재구성한 것(“절대적 운동+상대적 운동=역동성”)처럼, 베르그손의 ‘지속 속의 운동과 생성’ 개념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또 미래파 회화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동시성’은 시간 속 움직이는 물체의 이미지를 공간의 연속된 이미지로 절단, 전개해 표현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도 베르그손 철학과의 상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현재적 순간을 ‘흐르는 유동체 속에서 우리 지각이 실행하는 거의 순간적인 절단을 통해 구성된 것’이라 정의하고, 그 절단이 바로 우리 앞에 펼쳐진 이미지들의 세계, 그에 따르면 “우리가 물질적 세계라 부르는 것”이라 했다. 이는 <미래파회화: 기술선언>이 표명한 시각적 세계 인식, 즉 “움직이는 물체는 눈의 망막에 이미지가 남음으로써 이미지가 불어나고 왜곡되어 마치 진동처럼 그 이미지가 지나온 공간에 연속되어 나타난다.”는 관점으로 수렴된다. 발라의 1912년 작 <발코니에서 달리는 소녀>(도판 4)는 이를 예시한다할만한 작품이다. 그림은 마치 카메라가 연속촬영을 통해 포착한 것처럼, 뛰어가는 소녀의 옆모습을 특히 다리의 움직임을 부각시켜 장면을 펼치고 포개서 점묘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은 명백히 1880년대 머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나 머레이(Etienne-Jules Marey)가 카메라의 연속촬영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운동/이동을 시간적으로 기록한 연구보다 무려 20여 년 늦게 나온 것이다.(도판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라는 회화 영역에서 동시성을 묘사한 자신의 탐구를 혁신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베르그손의 철학적 주장과 미래파 회화의 조형 원리, 그리고 작품의 이미지에서 발견하는 상관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미술사가 등의 논자들은 다음과 같은 한계를 지적한다. 무엇보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을 앞세웠지만 정작 미래파의 작품들은 그 성취 수준이 낮거나 이미 프랑스에서 입체파가 실험한 바를 변주한 것에 그칠 뿐이라는 점, 그리고 이렇게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이론에 의존하는 경향 탓에 미래파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들이다. 또는 형식주의 예술처럼, 이 운동의 논리들이 형이상학적 관계들의 체계로 변형돼, 애초 창작을 위한 자극제 역할을 했던 이론이 나중에는 미적 내용이자 판단의 기준으로 전도돼 버렸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 짚어볼 문제가 있다. 그것은 베르그손의 기억이론과 지속개념이 당대 모더니티 사회의 변화된 현실적 인간 존재와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 즉 그의 개념들이 인간학적․역사적․사회학적 고찰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미래파는 테크놀로지나 기계에 열광하면서도 단지 과학과 기술의 이미지를 차용할 뿐 예술의 매체는 조금도 변경하지 않고, 조형 기술과 표현 방법론으로 차용․변주하는 데 도취됐다는 점이다.
벤야민은『물질과 기억』에서 표명된 베르그손의 철학이 “거대 산업시대의 불친절하고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현혹하는] 경험”을 다룬 것이 아니라, “경험에 대한 어떤 역사적 규정화도 거부”한 것이라 봤다. 또한 그의 행동 개념은 “사회학적 규정”을 간과한 것이라 주장한다. 즉 베르그송의 이론은 당대 현실사회의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삶의 조건 변화, 인간 지각의 변화를 논의에서 배제했다는 것이다. 이 점이 문제적인 것은, 그 이론의 불완전함보다는 베르그송의 독자 내지 수용자의 입장에서 당면한 현실의 ‘현재’에 대한 인식, ‘경험’과 ‘지각’에 대한 객관화가 더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베르그송 철학의 독자로서 미래파는 그들이 동경하고 주창한 기술 산업화, 속도의 삶, 역동적이고 동시적인 지각을 다만 조형예술 안에서―붓과 캔버스, 브론즈 등 전통적인 매체를 버리지 않으면서―실험하는 데 몰두했고, 그에 따라 기계적 메커니즘이 사람들에게 유발하는 부정적 이면(裏面), 즉 충격, 고립화, 폭력적 성향 등을 미화하고 그 진정한 해결에 대해서는 각성할 수 없었다. 또 실제 산업화된 도시 현실에서 대중이 경험하게 되는 육체적 고통, 심리적 외상, 돌발 증상 등도 간과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왜 이후 마리네티를 위시해 미래파가 대중을 선전 선동 대열에 세워 전쟁으로 내몬 파시즘에 동조했는지, 왜 파시즘의 ‘정치적 삶의 심미화’에 자발적으로 복무했는지를 설명할 단서이다. 파시즘은 기존 사회의 계급관계를 철폐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화된 대중이 권리를 확보하도록 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들의 문화정치학은 새로 형성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기반 정치학에 위협받는 부르주아적 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로마의 대리석 스타디움(Stadio del Marmi)에서 보듯 아우라적 제의의 예술 형식을 빌려 노동자 계급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식으로, 표현상으로만 노동자 대중의 권리를 호출했다. 대중은 규율을 갖춘 군대 열병식이나 스포츠 제전의 스펙터클로, 대규모 정치 집회의 장식으로, 애국주의적 전쟁의 행동대(Squadre d' Azione)로 표현된 것이다. 벤야민에게 이는 파시즘이 당대 사회의 파편화되고 다원적인 조류에 심미화된 이데올로기를 부과함으로써, 근대화로 야기된 사회정치적 분열을 봉합하는 기만적 시도로 보였다. 미래파는 자신들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비현실적인 차원, 즉 조형적 실험과 관념적 운동의 차원에서 전개함으로써, 이 같은 파시즘의 정치학을 선동했고, 그에 기여했다. 또는 실제 사회 현실과 전쟁터의 상황에서 초래되는 인간의 고통, 문명의 폐허, 세계의 비인간화를 “예술지상주의의 마지막 완성”과 맞바꿀 수 있었다. 파시즘이든 미래파든, 위와 같이 사회관계는 그대로 둔 채 대중을 심미적 표현의 조각난 부분들에 동원한 것은 실제 역사적 변화에 대한 부정이다. 다시 말해 “영원히 변화하고, 역동적인 인간 역사의 조건을 닫혀있고, 획일적이며 정태적인 유기체의 완전성 모델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 모델 속에서는 현실 삶의 사회정치적 히에라르키가 외적 변화와는 달리 그 중심부에서 영원히 경화되고 고정된 채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의 ‘지속 속 생성 개념’ 모델이 전제하고, 보치오니의 “절대적 운동+상대적 운동=역동성”이라는 조형 도식이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미래파와 파시즘의 만남은 역사적으로 필연이었다고 말해진다. 전자가 주창한 정신과 시도는 결국 비슷한 이념, 그러나 자신들보다 더 크고 강력한 정치 이념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특히 미래파 운동의 지도자 마리네티의 사회적 의식의 부재, 기술의 목적(telos)에 대한 현세적 왜곡이 극단적인 결과를 견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의 진정한 면모가, 무엇보다 그들이 대중의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현실을 조직하는 데 예술의 쓰임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정치와 결탁해 권력을 팽창하고자 했던 눈 먼 욕망에 있었다고 본다. 우리의 논의가 미래파를 역사적으로 되돌아봐야 했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2. 러시아 구성주의: 생산 예술의 정치화
시각예술에서 아방가르드는 우파 파시즘과 좌파 공산주의 둘 다와 연합했다. 전자의 가장 강력한 예증이 앞서 살폈듯 미래파가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권력 부상에 협조한 것이라면, 후자로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무엇보다도 구성주의가 볼셰비키 혁명을 환영했고, 혁명 이후 첫 해 동안 공산당이 이들을 관대하게 용인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스탈린 정권이 출범하기 전, 1920년대 내내 러시아 구성주의는 혁명 후 권력을 장악한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약속한 정의로운 세계, 모든 인민이 경제적 보장을 제공받는 세계, 그리고 특히 예술적으로 완전히 조직화된 조화로운 삶의 창조에 동의했다. 나아가 자신들이 그 정치적 약속의 예술적 실행자 또는 ‘기술자, 건설가, 생산자’임을 자처했다. 당시 러시아 혁명의 이데올로기는 서구에서 수입된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혁명이 경과하는 동안 러시아 지식인 및 대다수 국민들은 서구의 근대화된 국가들에 열등감을 느꼈고 자국의 전통을 후진적인 것으로 인식해,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조직하고 창조한다는 이념에 동참했다. 여기에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은, 예술의 기능을 세계를 모방적으로 서술하는 데서 세계를 재형성하는 것으로 전환하고, 그 행위를 정치를 통해 현실사회 속에서 실현함으로써 서구 유럽의 진보를 넘어서는 도약을 이뤄낸다는 목표로 참여했다. 물론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가장 유명한 화가인 말레비치(Kashmir Malevich)가 “새로운 미술 운동들은 산업의 금속성, 대도시의 속도를 흡수해버린 사회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한 데서 보듯, 당시 러시아 예술가들은 서구 근대화와 산업화에서 예술의 위기를 감지했다. 거기에 한편으로는 초기 아방가르디스트인 말레비치가 순수 논리적이고 비현세적인 ‘절대주의 (Suprematism) 미학’을 주창한 바와 같이, 고도의 정신으로 구성된 예술을 강조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초기 아방가르드의 기술적 진보에 대한 대항과는 반대로, 이후의 여러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기술적 장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산업 예술과 기계 미학―이탈리아 미래파나 프랑스 입체파의 간접적 영향 속에서―을 발전시켰다. 여기서 특히 러시아의 초창기 권력기간 동안 러시아 구성주의는 ‘생산주의’라는 자체의 예술적 계획을 정치 차원에서 실현하려 했고, 이를 위해 특정한 예술적․정치적 언술행위를 발전시켰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 언술행위에서는 예술작품의 심미적인 구성과 관련된 예술적인 결정이 정치적인 결정으로 평가되었고, 역으로 모든 정치적인 결정의 평가는 심미적인 결과에 근거를 두었다. 요컨대 이 ‘예술의 정치화’가 구성주의를 여타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구별 짓는 특수한 지점이다.
“어떻게 하면 정치의 영역에서 파시즘으로 이끄는 힘들의 유익한 기능을 예술의 영역에서 기대할 수 있을까?”「기술복제」논문을 ‘파시즘이 행하는 정치의 심미화에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 맞선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끝낸 벤야민은, 논문과 관련한 노트 한 곳에 이렇게 썼다. 그는 대중이 근대라는 “역사 무대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대중의 집단적 힘이 파시즘의 전제 정치와 폭력 전쟁에 기만적으로 동원되지 않고 사회적 삶의 경향들에 내재된 갈등―계급 갈등, 기계문명과 자연(인간)의 충돌, 빈부격차 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쓰일 수 있는지, 예술의 어떤 점이 그에 기여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그의 답은 예술에는 개인들이 삶에서 겪는 갈등의 차원을 넘어, 그보다 더 집약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갈등이 해결되도록 유도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구체적으로 집단의 무의식에 새겨진 꿈과 소망의 이미지, 즉 계급 지배와 착취 없는 유토피아적 사회의 이미지를 현재 인류에게 친숙해지도록 하는 것, 그리고 파괴적인 사회 경향들이 현실 사회가 아니라 이미지의 세계에서 표현되도록 하는 것이 “예술의 두 기능”이라 지목한다. 요컨대 예술은 인간의 근원적 소망을 현재시간에 일깨우고, 사회의 파괴와 폭력성을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로 해소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벤야민이 명료하게 정리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예술의 기능을 사회에서 발생시키고, 여러 문화적․기술적․제도적 장치들을 그에 맞춰 변혁, 조직하는 것이 바로 그가 말한 ‘예술의 정치화’이다. 또한 러시아 구성주의가 ‘생산주의’ 예술 프로그램을 정치적 언술형식과 물리적 장치들을 통해 구현하려 했던 방식이기도 하다.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 타틀린(Vladimir Tatlin), 리시츠키(El Lissitzky) 등이 대표하는 러시아 구성주의는, 1923년경 순수예술(pure art)로는 더 이상 혁명적 실천을 수행할 수 없다고 보고, 스스로가 산업 노동의 의무를 지는 예술적 입장을 채택했다. 그들은 예술적 행위의 목표가 ‘유용한 사물들의 형성’에 있다며 “생산 예술(production art)”의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 표현의 독자적 형식이 구성주의였다. 이들은 일종의 실용주의 미학을 주창한 것인데, 이는 한편으로 유럽 아방가르드가 유미주의 예술의 자율성과 반(反)일상성 전통에 반기를 든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주의처럼 그들에 앞선 아방가르드 세대가 예술의 자기 충족성과 추상성을 이념화한 것에 대한 비판, 그리고 구성주의자 자신들이 1910년대 중후반 경 구조주의 언어학에 심취해 준(準)과학적이며 체계적인 방식으로 회화와 조각의 형식, 질료, 구성을 분석하고 관람자의 지각을 탐구했던 데서 자기 변화한 맥락이기도 하다. 혁명 전후 러시아 문화예술 상황은 회화의 절대주의, 건축의 합리주의, 민중 연극 등으로 아방가르드 내부조차 이론과 조직화의 문제에서 서로 다른 경향들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양상이었다. 그런 때 구성주의는 균일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실천의 측면에서 종종 다른 방식 또는 그 경향들 중 다른 것들과 상호작용했다. 당시 생산주의 예술의 이론가였던 아르바토프(Boris Arvatov)에 따르면, 1921년 러시아에서 좌파 미술가들을 결집시켰던 예술문화기구가 해체된 직후, 구성주의자들은 “실제 재료들을 탐구하고 다루는 자신들의 실천을 기술자의 건설 활동으로의 이행 단계[로 간주해] 자기충족적인 구성작업을 그만두고 산업혁명에 즉각 참여하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취하기로” 했다. 이는 타틀린의 “낡지 않은 것, 새롭지 않은 것, 그러나 필요한 것”이라는 창작 구호로 표명된 바와 공명한다. 그리고 예를 들어 로드첸코의 작업이 변화한 과정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는 1920년만 해도 <매달려 있는 구조물>(도판 6)이라는 작품 등을 통해 ‘색과 선의 분리, 형태와 면의 통합’이라는 조형적 구성과 질료의 기술적 수단을 분석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그 후 몇 년 사이 작업을 광고 포스터, 로고타입, 책과 잡지 표지, 영화 타이틀, 가구, 노동자 클럽의 실내장식(도판 7), 그리고 영화와 연극의 무대로 광범위하게 확장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구성주의자들이 조형 예술 장르에서 산업 생산 예술 영역으로 이행한 사실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매체와 방법론으로 그것을 수행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성주의는 로드첸코의 사례에서 보듯이 다양한 영역에서 ‘생산-예술 활동’을 했기 때문에 다룬 매체 또한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특징적으로는 사진과 영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 정치․산업․대중 영역의 장치들―선전 포스터, 상품광고, 대중 행사 및 전시, 매스 미디어 등―을 폭넓게 활용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특히 포토콜라주와 포토몽타주를 활용한 것들이 많은데, 1919년 무렵 이미 일상생활에서 광고나 상업사진에 일반적으로 쓰였던 포토몽타주는 1920년대 초 구성주의자들에게는 과거 모방적 재현만이 아니라 기계적 재현이 가진 한계를 극복할 탁월한 형식으로 각광받았다. 즉 그림처럼 대상을 도상(icon) 기호로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진처럼 대상을 순수한 지표(index)로 ‘환원’해버리는 것도 아닌, 이 둘의 결합으로서 포토몽타주는 기술복제이미지인 사진을 이용해 특정한 의미, 해석, 메시지를 담은 상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포토몽타주는 언어와 이미지를 집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보다 명료한 의미를 보다 풍부한 시각성으로 구축할 수 있었다. 구성주의자들은 이처럼 각각의 매체가 가진 특수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기능적으로 재조직하여 이미지 또는 생산물을 만들었다. 그 재조직의 의도는 궁극적으로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성취하고자 했던 것, 즉 ‘관람자에게 충격을 가해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1924년 구성주의의 기관지인「레프(LEF)」에 발표된 <포토몽타주>라는 글에는 이 점이 분명하게 표명돼 있다. “사진의 조합이 도형적 재현의 구성을 대신하는데, 그 이유는 인화된 사진이 시각적 사실을 스케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확히 고착시킨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 정확성과 다큐멘터리적 성격 때문에 사진은 관람자에게 […] 도형적 재현이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진 매체의 정확한 기록성이 기성의 회화나 조각 등 조형 예술적 재현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지각적 충격의 발생 인자로서 구성주의자들에게 채택됐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그들은 전혀 상이한 문맥과 상황에서 유래한 사진의 파편들―산업 생산물을 클로즈업한 이미지, 빌딩들, 일반적이지 않은 앵글로 포착한 형상들, 또는 사물을 고립시켜 세부만 보여주는 이미지들―을 몽타주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성주의는 바야흐로 공업화의 도정에 들어선 러시아의 대도시 일상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당 정치 체제 아래 대중이 느끼는 삶의 충격, 자극적인 경험에 상응하는 미적 지각을 만들어내려 했던 것이다. 동시에 광고의 관습과 전략에 유비되는 선전 선동 이미지를 통해 러시아 도시 대중을 공적 장으로 불러내고, 각종 당 정치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이것이 앞서 말한 구성주의가 관람자를 변화시키고자 한 바이다.
생산 예술을 표방한 구성주의 예술가들은 제작의 매체와 방법론뿐만 아니라 보급방식과 이를 유포하고 수용하는 기관들도 달라져야 한다고 봤다. 구성주의자들이 앞서 소개한 포토몽타주를 개별 예술작품으로 전시한 것이 아니라, 신문이나 잡지의 표지 또는 거리의 포스터, 광고, 전시의 일환으로 썼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6년 리시츠키는 현대 예술생산에 관련한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 하나가 예술의 생산형식을 결정하는 주요 인자로 관객 대중을 상정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책이나 그래픽 디자인, 영화처럼 대규모로 배급되는 ‘동시적이고 집단적인’ 예술 수용 또는 유포 형태의 발명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이론은 “관람객 대중이 현재 갖고 있는 필요 및 예술생산수단에서 유용한 기법과 기준 모두에 동시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유효한 미학적 틀을 세우려는 시도”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포토몽타주는 전기제판방식으로 이미지를 복제하고 거기에 다른 이미지와 텍스트를 재구성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생산물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대량화하며 다른 형태의 제시 방식―전시, 입간판, 신문 등―으로 쉽게 전이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리시츠키가 “사회적으로 규정된 미적 형식”이라 부른 바로 그것이었다. 특히 그것은 연극 또는 영화적 공간의 극적 경험과 그림 또는 사진 몽타주 및 활자 기호의 정적인 지각을 통합해, 관람자가 수동적이고 명상적인 감상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촉각적인 수용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했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로 우리는 리시츠키가 러시아 당 위원회의 위촉을 받아, 1928년 독일 쾰른에서 열린 <국제 신문도서출판 전시회(Pressa)>(도판 8)의 소련관을 전시 디자인한 경우를 들 수 있다. 리시츠키가 총괄 기획을 맡고, 그래픽 디자이너를 포함해 38명 정도가 집단 작업한 이 전시에는 227개 작품이 출품됐는데, 그 중심에는 혁명 이후 러시아 출판 산업의 역사와 출판을 통한 대중 문맹 교육의 성과를 선전하는 대형 포토몽타주가 있었다. 인쇄물 등을 다양한 앵글로 포착한 대형 사진 프린트물이 공간의 흐름을 만들며 역동적으로 배치된 이 전시는, 마치 영화관의 관객이 그런 것처럼, 감상자에게 실제 시공간 속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서사시를 관통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제공했다.
마지막으로 구성주의에서는 예술가 본인이 대부분의 작업을 직접 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작자 개인의 독창적이고 배타적인 권리에 개의치 않았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위 리시츠키의 경우도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가 개별 작가와 그들의 작품으로 구분하는 러시아 구성주의 작품들은 사실 당시에는 집단 창작의 결과물인 경우가 허다했고, 가령 개별 창작의 경우에도 작가를 밝히기는 했지만 그렇게 분명하게 창작자의 소유권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로드첸코가 1923년 혁명 연극 또는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과 베르토프(Ziga Vertov)의 영화와 관련 있는 한 잡지(「About It」)를 위해 만든 포토몽타주에서 보듯, 구성주의 작품들은 여러 영역들과 교섭하면서 당시 러시아의 사회적 현실을 재현하는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진보적인 수단으로 기능하는 데 충실했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폈듯이 러시아 구성주의가 기존 예술 전통 혹은 관례와는 다른 생산 주체 및 절차, 제시 및 배급방식, 수용 주체와 그 형태를 고안하려 했던 전체 프로그램에 속한다.
뷔르거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요구한 예술의 새로운 실천성은 단순히 예술작품의 내용이 사회적으로 의미심장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영향을 결정짓는 요소인, 사회 내에서 예술의 기능방식을 겨냥한 요구”라 했다. 이는 러시아 구성주의의 경우 전적으로 해당하는 말이다. 이제까지 살폈던 것을 정리해보면 이들이야말로 조형원리, 범주, 예술가 정체성, 매체, 표현 방법론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는 유미주의 예술 세계를 벗어나, 사회 속에서 직접적으로 작용하고 관계 맺고 영향을 주고받는 실천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생산자로서의 작가」에서 주장한 바를 참조하면, 우리는 어떤 예술이 생산관계에 대해 취하는 입장을 문제시하기 전에, 생산관계 속에서 그 예술이 어떻게 스스로를 정립하고 기능하는가의 문제를 우선시할 필요가 있다.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생산관계 속에서 예술은 그 어느 편에 서야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그 관계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나가야 할지, 그러기 위해서 예술은 무엇을 해야 할지, 기술적 장치들을 어떻게 새롭게 조직할지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 구성주의가 생산주의 예술을 표방하고, 프롤레타리아 중심 공산주의 산업 국가 건설을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한 사회적 과제를 ‘예술가-기술자’로서 수행하려 했던 점, 그리고 특히 주어진 매체들 또는 장치들을 구성하고 조직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구성주의는 지나치게 공산당 정치에 삽입됨으로써, 그들의 예술을 단지 특정한 정치력이 통제하는 사회 현실과만 관련지은 점은 문제적이다. 새로운 세계를 예술을 통해 조화롭고 총체적으로 건설한다는 구성주의의 기획이 이제 현실정치권력에 넘어갔고, 정치가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임무를 대신 수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파시즘과는 다른 형태로 정치가 예술을 심미적 수단으로 쓰는 것인데, 실제로 1930년대 스탈린 독재 체제가 들어서면서 러시아 당국은 구성주의가 표방했던 총체적 사회의 건설이라는 예술 과제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넘겨줬다. 애초 1921년 레닌(Vladimir Lenin)이 집권할 당시에 반(反)모더니즘적 예술가 그룹이 당의 지원을 받으면서 기초가 마련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스탈린 체제 하에서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삶의 창조를 위해서, 예술이 당연히 공산당의 직접적 통제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굳혔던 것이다. 이는 러시아 구성주의의 꿈이 역설적인 방식으로 현실화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리시츠키나 로드첸코는 30년대 당국이 주최한 전시와 국영 출판사 일을 통해 체제 선전에 열정적으로 꾸준히 참여하면서 이 전도된 상황을 문제시하지 않았던 것 같다.
구성주의가 남긴 또 다른 과제는 이들이 시행한 생산 예술의 방법론, 즉 사진 영상 매체와 같은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재조직하여 대중을 변화시키려한 시도가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과 독일 나치 체제의 선전 선동 미학과 기술로 접합되었다는 점이다. 또 구성주의의 예술적 기술들이 1942년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이 MoMA에서 기획한 ‘승리의 길’이나 1955년 기획한 ‘인간 가족’(도판 9)전에서 보듯, 미국에서는 애국주의나 휴머니즘을 가장한 미국중심 정치 이데올로기(Pax Americana)를 대중에게 침윤시키는 기념비적 형상으로, 혹은 자본주의 생산과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대중문화기술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전자에게 포토몽타주는 대중 관람자의 능동적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수단이었다면, 후자들에게는 대중을 집단적으로 재현하고 애국심의 깃발 아래 끌어 모으는 수단이 된 것이다. 앞서 벤야민이 파시스트의 대중 표현 방식, 즉 계급관계를 건드리지 않은 채 그들을 집합적 이미지로 재현하는 식의 기만을 비판했던 점을 상기하면, 러시아 구성주의의 생산 예술이 파시즘과 나치즘의 선전 선동 예술로, 미국식 ‘대중을 위한 문화와 예술 방식’으로 변용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극히 문제적이다. 먼저 현실의 구성된 면모를 몽타주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해방의 가능성, 현실의 변화 가능성을 추동했던 방식은, 이제 개인이나 대중을 넘어선 거대한 권력의 면모를 다각적이고 입체적으로 그들에게 주입하는 정치기술 또는 문화산업기술이 된다. 또 개인과 집단 간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재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나 자본주의의 통일된 질서 속에 편입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학습시킨다. 끝으로 사람들에게 지배와 통제, 억압과 감시를 내면화시켜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사회 경향을 전면화하거나, 반대로 그들이 어떤 역사적 갈등이나 현실적 투쟁에서도 벗어난 평화롭고 자유로운 주체인 것처럼 오인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을 통한 삶의 변혁, 정치적 해방을 시도했던 20세기 초 아방가르드가 사회주의, 민주주의, 전체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막론하고 대중의 삶과 현실 정치에 모순적이고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지점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Ⅳ. 결론: 역사적 실패로부터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미래로
지금까지 우리는 20세기 초중반 서구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을 유미주의 예술과 대중문화예술이라는 삼자 구도로 접근해, 서로 내적으로 접속과 갈등의 연결고리를 갖은 그 각 영역들이 현실 삶의 지형에서 복잡다단하게 표출한 바를 논했다. 특히 우리 논의는 관념론 미학과 유미주의 예술 제도의 비판자로서 아방가르드보다는, 예술을 생활 실천으로 지양하려 한 아방가르드가 근대사회 속에서 ‘변혁의 동력’이자 ‘기만의 대상’이라는 이중성을 가진 대중, 대중문화예술과 형성한 관계에 주목했다. 이는 예술의 정체와 목적, 그 기능이 예술 내재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 현존의 구체적 지평들에서 정립되고 그 의의를 빚어나간다는 인간학적 미학과 비평 관점에 입각해서다. 이러한 관점에서 돌아본 지난 세기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 특히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핀 미래파와 러시아 구성주의는 공히 당대 사회적 삶의 급격한 변화, 패러다임 이동에 적극적으로, 그러나 내외적 한계와 문제를 동반한 채로 반응했다. 이들의 시간은 반동적 전통이 아니라 혁명적 미래에 맞춰졌으나, 실제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그 운동의 방향은 왜곡된 양태로 흘렀다. 또 이들의 활동 공간은 상대적으로 협소한 예술 영역이 아니라 대중 현실 또는 사회 정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 것이었나, 그 확장의 결과가 반드시 집단의 삶에 생산적이거나 공동체의 현존에 기여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는 양가적인 의미에서, 20세기 초중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구체화시켜 놓은 환경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미래파든 러시아 구성주의든, 그 예술 운동들이 남긴 역사적 과오, 실패, 불충분성은 오늘 우리가 미술사 내적으로 중립화해 기록하거나, 미학의 유미적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잠재워둘 성격의 것은 아니다. 미래파의 맹목적 기술 찬미, 전쟁과 폭력성 예찬, 테크놀로지와 매체를 사회관계 변화에 결부시켜 예술로 조직화해내지 못한 무능은 지금 현재까지도 예술의 독창성과 실험성을 위해서라면 미술은 어떤 것을 해도 좋다는 식의 폐쇄적 조형예술 논리로 이어진다. 또 러시아 구성주의의 생산적이고 기능적인 태도, 그들이 대중 참여를 위해 고안한 시각이미지방법론이 파시즘, 나치즘, 그리고 미국의 애국주의와 포퓰리즘으로 손쉽게 번안된 역사적 경우에서 보듯, 예술에서 고유한 의도와 판단, 목적은 이미 항상 시대의 맥락과 상황 앞에 매우 취약하다.
많은 논자들이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의 실패를 제도 미술이 그것을 인정하고, 그 운동의 결과물들이 ‘현대 명작’으로서 박물관화․상품화된 역사적 정황에서 찾는다. 유럽 아방가르드든 러시아 아방가르든, 아방가르드는 그 원래 정체성과 목표점과는 달리 서구 예술의 주류가 되었고, 그 예술가들이 비판했던 자본주의 체제의 부유한 귀속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방가르드의 미술관 입성, 현대미술사의 인정, 시장에서의 높은 가격 등, 일련의 현상만을 가지고, 그 운동이 실패했다고 단정 지어서는 문제의 절반만 보는 것이다. 그 공식문화화와 제도적 인정에 의해 역사적으로 아방가르드가 추구하고 실행했던 것들이 지금 여기 사람들에게, 즉 현재도 사회적 억압과 기만 아래 처한 이들에게 혁명과 전위, 예술적 실천을 통한 유토피아적 미래의 선취를 각성시킨다면 그 자체로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 심각한 문제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그러한 통로, 방법, 즉 공식문화와 일상현실을 매개하고 보다 나은 삶을 조직하는 데 하나의 매체로 기능할 수 있는 구체적 형식과 방법론을 창안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혹은 그런 것을 발명했다하더라도 지속가능한 형태로 현재의 세대에게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 지속성의 결여가 역설적이지만, 오늘 여기 글로벌리즘으로 더 극심해진 자본주의, 시장주의, 소비주의의 전횡, 산업과 자본을 맹신하는 문화예술 생태, 경제위기와 전쟁 공포, 집단 폭력과 상호 착취의 일상화를 지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후반기, 당대 문화지형을 재편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 서구 근대의 이성 중심주의 해체, 동일성의 정치학에 맞선 타자성의 문화, 고급-엘리트 문화에 억압된 대중문화에 대한 가치부여를 내세우며 오래 지속된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보고자 했다. 이후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성’, ‘차이’, ‘혼성’이 문화의 주요 화두로 떠올랐고, 서로 차이진 삶의 방식과 모습을 존중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다문화, 다원주의 모델이 제시됐다. 그러나 가까운 과거 우리 삶의 모습을 뒤돌아보건대, 이는 담론 차원에 한정된 면이 있으며, 실제 현실 사회에서 진행된 이질적 변화들,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에 우리는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지구 환경의 위기, 빈부의 양극화, 문화자본의 소유와 문화예술 향유 기회의 쏠림현상, 테러․반인권적 폭력․국지적 전쟁의 일상화 같은 부정적 현상이 전면화 됐다. 그리고 근대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소외와 차별, 분리와 위계가 지금 우리 현존의 내밀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파생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1세기의 전 지구적 화두로 ‘지속가능한 공동체’가 인문사회 및 예술분야에서 제기된 것은 이 같은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인식적․감각적 경험과 각성을 배경으로 한다. 본 연구는 시각예술분야에서 우리 현존의 부정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갈 방안을 찾기 위한 시도로, 여기서 과거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과 대중문화예술이 교차한 지점 혹은 그 둘의 난점을 고찰했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고찰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반성만이 아니라 구체적 방향과 방법의 제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서 본 뷔르거는 아방가르드를 “이미 역사적 현상”으로 간주했고, 다시 반복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을 과거 20세기 초 예술세계에 나타난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구체적 삶 속에서 예술이 언제나 새롭게 실행할 수 있는 하나의 비판적 실천이자 대안적 운동으로 여길 필요가 있지 않은가? 우리가 벤야민을 따라, 과거의 실패한 예술에는 ‘미래의 시대를 위해 담아둔 예언’이 새겨져있다고 할 때, 그것을 지금 여기서 해독하고 실현하는 일은 현재 진행형이다. 본 연구는 그 진행형의 고찰을,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위한 시각예술이미지 논의의 다음 과제로 약속하면서 본고의 결론을 맺는다.
참고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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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본 연구의 목적은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시각예술 영역이 어떠한 사회적 의식과 지향으로 이미지를 조직해야 하는가, 그런 예술의 구조와 기능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미학․미술비평의 입장에서 논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물질적 진보가 인간과 자연의 삶을 억압, 착취하지 않고, ‘좋은 삶’을 향한 다양한 가치, 관심, 욕구, 감각, 인식들이 다자적인 동시에 집합적으로 창발하는 이타적이고 유연한 사회라 상정한다.
이에 입각해 첫 연구 단계로, 과거 20세기 초중반 서구 유럽의 유미주의 예술,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 그리고 대중문화예술의 역학 관계와 실제 전개 과정을 고찰한다. 우리는 이 삼자의 관계를 동시적으로 고찰하는 이론적 구도의 정당성을 뷔르거, 포지올리의 선행 아방가르드 이론에 대한 비판적 읽기와 동시에 벤야민의 유물론적 예술이론에 대한 참조를 통해 확보할 것이다. 이를 통해 근대 사회에서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이 수행한 유미주의 예술 비판, 그리고 반면에 불발에 그쳤던 그 운동의 대중 혁명적 기능을 복합적이고 다면적으로 논할 수 있다. 특히 우리는 이탈리아 미래파와 러시아 구성주의를 역사의 구체적 사례로 들어, 이 두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의 특수성, 성공적 측면, 그리고 실패의 맥락을 분석한다. 구체적으로 본문은, 미래파가 모더니티 산업과 기술을 통한 진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도, 사회와 인간 삶의 전반을 통찰하지 못하고 예술 내적 실험에 몰두함으로써 초래한 파괴적 결과, 즉 파시즘에 동조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그에 이어 러시아 구성주의의 ‘생산 예술’에 입각한 실천, 즉 조형 예술 내재적 차원을 벗어나 집단의 삶과 사회 정치적 메커니즘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생산적으로 기능하려 했던 과정을 논한다.
우리는 이 같은 역사적 고찰을 통해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현존과 미래를 위해, 시각예술의 실천은 동시대의 구체적 삶 속에서 언제나 새롭게 실행하는, 비판적 인식과 감각의 이미지이자 대안적 운동으로서 조직되어야 함을 볼 것이다.
핵심어
지속가능성, 공동체, 아방가르드, 대중문화예술, 유미주의, 미래파, 구성주의, 포토몽타주
ABSTRACT
The Configuration of the Visual Arts Images
for Sustainable Community (Ⅰ)
: The Crux of Avant-garde and Mass Culture
Su-Mi Kang*
There is subject which is of utmost importance in society at the present moment. This subject is the sustainability of world, human being and community. In this aesthetic and art critical research, I discusses that how visual arts are configured with social consciousness and intention for the sustainable community, what their structures and functions are in this context. What is the sustainable community? My suggestion is, the sustainable community is the society without any repression or exploitation. And the social communities can become more flexible and altruistic by through our intentions and practices toward the well-being.
On the historical perspectives, the visual arts would be configured as the invention, analysis, practice, and intervention of all contemporary social initiatives. That is my research’s point. I hope to provide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larger questions about the relation of art and social life that frame this study.
Key words
aestheticism, avant-garde, community, constructivism, futurism, mass culture, photo-montage, sustainability
<본문; 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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