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콩의 여자 후엔과 따이한의 병사 김문석
적으로, 또는 연인으로서 사랑과 배반,
그리고 회한으로 얼룩진 두 사람
제3세계국가의 운명 속에서
따뜻한 인간, 인간답게 살고자하는 욕망과 좌절을 그린
뮤지컬 <블루사이공>을 보고 새벽 4시에 전주에 도착했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는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혁명가 여전사 후엔이
김문석에게 던진 말이지요.
자세한 감상문은 저희 카페에서 정보를 얻고
인터넷으로 초대권을 얻어내신
핑크칼라님께서 써주시기로 했습니다.
이번 주말에 가신답니다.
(그러면 부석사는?)
다른 이야기 좀 하지요.
공연이 10시 10분에 끝났는데 열차표를 10시 50분 걸 샀거든요.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차가 막히고, 전철 환승 때 기다리고 하다가 3 분쯤 늦어서 못 탔습니다.
10시 10분부터 50분까지 40분간 애가 탔지요.(차는 못 타고)
끝까지 뛰면서 노력했는데 허사였어요.
아내가 고생을 참 많이 했는데.
증오하고 또 간절하게 기도한 40분!
뭐했냐구요? 한 명(차비 500원)이라도 더 태우려고 손님도 없는데
5분 이상을 더 기다리게 한 국립극장 셔틀버스 기사를 욕했습니다.
앗차 하는 순간 꺼져버린 신호등을 욕하고
빨리 오지 않는 전철에 대하여
아니, 승무원에 대하여 욕하고, 속으로 빨리 오기를 기대하고
그리고 연극을 예정보다 10분 늦게 끝낸 배우들을 원망하고
이 쪽으로 가면 열차 타는 곳 맞냐고 묻는데
빨리 대답 안하고 생각하고 있는 아가씨를 원망하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인데
억지를 쓰니까 타락하는 일만 남지요.
40분간에 한 40년간을 타락한 것 같아요.
가끔 일이 잘못되면 우리는 자꾸 남을 탓하지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도
"엄마 때문에……"
"너 때문에……"
"당신 때문에……"
그렇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말입니다.
40분을 그렇게 보내고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1시간은
왜 그렇게 한가하고 너그러워지는지……
참, 인간의 마음이 그렇지요?
아내와 역사 안에서 차를 마시고
서울역 광장에 나가 밤 불빛들을 바라보고
아무 목표 없이 60분이나 우리 부부에게 시간을 선사한
그래서 한없이 풍요롭게 한,
방금 욕하고 원망했던 모든 사람과 사물에 다시 감사했습니다.
(속죄를 한 거지요.)
그리고 11시 50분 차를 타고 새벽 4시에 집에 도착했지요.
오랜만에 밤 열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문득 옛날 일이 생각나서 전에 썼던 글 하나 올립니다.
좋은 하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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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강역을 아시나요
초강역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봄을 향해 비가 내리는 2월의 어느 오후 나는 초강역으로 달려갔다. 가다가 또 물었다. '혹시 초강역을 아세요?'라고 그러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가면서 묻고 또 물었다.
"신태인역을 지내서 좌측편짝으로 가먼 나올거시거만, 근디 뭐시 없을 턴디"
무엇이 없어도 좋다. 나는 그냥 호남선의 깜박이는 간이역 초강역으로만 족했다. 신태인을 지나 차로 10분쯤 달리자 허름한 역사(驛舍)가 보인다. 초강역(楚江驛)이란 역명이 걸린, 붉은 벽돌 건물이 이슬비와 석양빛에 졸고 있었다.
역사 안은 아무도 없었다. 승객도 없고 역무원도 없으니 물론 차표도 팔지 않는다. 경춘선 능내역이 그렇듯 차표는 기차 안에서 승무원에게 직접 사라는 안내문이 내 걸렸다. 이곳에서 탈 수 있는 기차라고 해도 특정 통일호 대전행 2회(06:57, 17:56)과 목포행 2회(08:52, 19:05)뿐이다.
한때 어디론가 떠나기 위한 설렘과 두려움으로 아니면, 누구를 마중하기 위해 두근거리며 기다렸을 파란 나무 의자는 몇 번의 페인트 덧칠로 누더기가 되어 놓여 있었다. 아련한 추억의 역사, 나는 아직도 처음 탔던 기차가 생생하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였다. 학원을 다니기 위해 정읍역에서 밤 11시 몇 분인가 탔던 노량진행 완행열차를……
그때 고급이었던 급행열차(통일호)를 타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완행열차(비둘기호)는 먼저 타는 사람이 좌석에 앉아서 갔다. 아버지와 나도 겨우 출입문 옆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밤을 새워 서울을 향해 가는 사람들, 그들의 얼굴은 흐릿한 객실의 불빛만큼이나 어두워 보였다. 그때 가끔씩 지나가던 홍익회의 수레는 나를 견딜 수가 없게 했다. 그 수레 위에 실려서 나를 유혹하는 '삶은 계란' 때문에 말이다. 수레가 지날 때마다 나는 옆구리로 주무시는 아버지를 깨웠으나, 뒤척이시다가 다시 눈을 감으실 뿐, 그 밤 내내 나는 달걀의 껍질을 벗길 수 없었다. 살짝 벗겨내면 탱탱히 윤기를 내며 흰 육질로 나를 반겨줬을 그 삶은 계란을 보고도 참아야 한다는 것은 고행이었다. 열일곱 소년의 왕성한 식욕으로 마냥 그 달걀을 쳐다보며 온 밤을 새우기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모두들 앉아서 혹은 의자나 객실의 벽에 기대서서 졸고 있었다. 밤 열차는 승객이 아닌 숙박객으로 휘청거렸으나 나는 잠들 수가 없었다. 차를 타자마자 아버지가 내게 던진 비수 같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나는 낼 내려 올랑게 공부 열씸히 허고, 당숙 말 잘 들어. 그러고 서울은 눈감으면 코 비어가는 곳이어, 허툴허툴 다니다가는 못 내려올 중 알어"
처음 가는 서울로 처음 열차를 탄 밤, 그 밤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서울이 가까워 올수록 나는 혼자 그 코 베어 간다는 도시에서 한 달을 견뎌야 한다는 두려움과 이웃들이 이사짐을 싸서 떠났던 꿈의 수도 서울에 대한 설렘으로 정신이 더 또렷해져갔다. 긴장의 눈빛으로 바라봤던 창 밖의 무수한 간이역들 그 속에 초강역도 빛나고 있었으리라.
파란 나무 의자를 만지며 나는 플랫홈으로 나갔다. 뿌리던 비가 그치고, 선로 위로 안개가 자욱 피어오른다. 그 위로 비추는 석양의 햇빛, 그 혼돈 속에 나는 서있는 것이다. 얼마 후면 추억의 뒤편으로 사라질 초강이라는 이 간이역에서 말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5시다. 앞으로 56분만 있으면 이 역에 열차가 선다. 서둘러 역을 빠져 나왔다.
역 앞에 '다정식당'엔 벌써부터 고기를 구워 술잔을 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좀 이른 저녁을 시켰다. 된장찌개를 시켰더니 밥을 새로 해야 한다고 기다릴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고는 은근히 술자리에 말을 던졌다.
"여기를 왜 초강이라고 부르죠?"
난데없는 질문 때문에 당황을 했는지 서로 얼굴을 살피더니,
"긍게, 나도 잘 모르것는디 여기를 그전에 '내머리'라고 불렀어. 요 앞까장 동진강 나룻배가 들어왔응게." 하고 응답한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더 이상 배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풀이나 가시가 우거진 탓에 불려진 이름 같다. 하루에 몇 명이나 기차를 타느냐고 묻자,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대답한다. 통학하는 학생들만 몇 명 타고 다니는데 학년말 방학이라 안 탄다는 것이다.
70년대까지 초강역은 한번에 백여 명이 타고 내리는 제법 흥성한 역이었다. 그때 정우면의 소재지는 이웃 수금리였으나 교통의 요지로 우체국, 농협 등이 이곳 초강에 들어오면서 번성했었다. 기차를 타고 이웃 익산으로 통학을 했다는 서현팔(60세) 씨는 "이리(익산)까장 잊어버리고 가야혀"라고, 그 때의 추억을 떠올린다. 통학열차 놓쳐서 익산에서 백리 길을 걸어오다가 와룡역에서 자고 다시 학교에 갔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술잔을 놓고 잠시 회상에 잠겼다. 그때 자기를 재워준 아주머니 댁이 너무 가난해서 저녁과 아침을 고구마 밥으로 때우고 도시락을 못 싸줘서 미안하다고 하더라는 부분에서는 더욱 숙연해 하면서 말이다. 술자리에서 초강역은 옛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가 참 좋았는디이."를 연발하면서……
초강 막걸리는 유명하다. 호남평야의 중심에 놓인 탓에 풍부한 자본과 수요를 기반으로 양조장이 생긴지 100여 년, 미원(지금의 대상)그룹 창업자(임대용)의 아버지 임종국씨도 한때 이 양조장을 경영했었다고 한다. 술자리의 말로는 초강이 개의 형상인데 양조장 자리가 젓꼭지에 해당하며 물이 아주 좋다는 것이다. 식당에서 막걸리를 시켰더니 없다고 했다. 서울로 하루 400ℓ씩 올라가서 동동주로 둔갑해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여그 사람덜도 맛도 못봐.' 하던, 서현팔 씨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양조장에 가서 한 병 사다드리라고 부탁한 덕에 막걸리를 마실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포천 막걸리보다 더 좋다고 자부심 대단한 그 막걸리를 말이다.
다시 역사로 들어갔다. 비가 완전히 그치고 석양의 노을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도 없으리라고 여겼는데 홈에는 할머니 두 분이 마대 짐을 옆에 두고 앉아 계셨다. '어디 가시느냐'고 묻자 대전 집에 간다고 한다. 대전에서 아침 열차 타고 멀리 이곳 초강역까지 냉이를 캐러 오셨다는 것이다. 너무 신통해서 어떻게 초강역에서 내릴 생각을 했냐고 하자. '그것도 모르겠냐.'고 한 마디를 던지고는 깊게 담배를 빨았다. 이윽고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달려왔다. 내리는 사람 하나 없이 두분 할머니가 짐을 들고 기차에 오르자 승무원은 붉은 깃발을 역무원대신 흔들고 떠났다.
다시 초강역은 텅 비었다. 저녁 7시 5분 목포행 열차가 지나고 나면 아침까지 어둠의 정적에 싸일 것이다. 호남선이 복선으로 변하면서 옛날의 역사는 모두 헐려 새로 지어졌고, 그래서 운치는 없어졌지만 추억의 간이역은 그대로 남아서 깜박거린다. 우리 나라의 간이역이 모두 그렇듯 승용차의 등장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초강역은 사라질 것이다. 그 동안의 역사적 소임을 다했고, 이제 할 일이 없다면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경제의 논리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졌던 눈물과 애환의 역사(歷史)를 잊어버릴까봐 그것이 두렵다. 역사를 빠져 나올 때 역등이 켜졌다. 초강이란 명패를 비추면서 아무도 없는 빈 역사를 지키듯 외롭게 역등만이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