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땅끝에서 경험한 암릉, 바람, 바다 그리고 고찰(古刹)
1. 일자: 2017. 11. 18 (토)
2. 장소: 두륜산(703m)
3. 행로와 시간
[오소재(12:27) -> 오심재(12:59) -> 헬기장/흔들바위(13:07, 두륜봉 1.24km) -> (어험로) -> 노승봉(13:26, 685m) -> (험로) -> 가련봉(13:38, 703m) -> 만일재(14:02~14) -> 구름다리/두륜봉(14:27, 630m, 진불암 0.8km) -> (너덜) -> 진불암(14:57, 대흥사 2.8km) -> (포장도로+오솔길) -> 대흥사(15:30~15:44) -> 유선여관(15:48) -> (도로) -> 주차장(16:17)]
< 두륜산 산행을 준비하며 >
4시간 산행을 위해 10시간 넘게 버스를 타는 건 분명 비효율이다. 다시 두륜산 산행을 준비하며 고개를 쳐든 회의론이다. 늘 그렇듯 오늘 이 산에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로 많이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아무래도 나는 산으로 가야겠다. 이유는 지난 기록에서 찾는다.
[노승봉을 지나면서부터 좌측으로 남해바다의 절경이 펼쳐진다. 바람이 거세지만
하늘은 더 없이 맑다. 너른 해남 평야 끝으로 바다가 이어진다. 더없이
넉넉하고 포근한 풍경이다. (중략) 만일재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10여 분 걸어 두륜봉 밑 구름다리에 도착했다. 구름다리 혹은 코끼리
다리라 명명되어 있지만 내 눈에는‘두 마리 코뿔소가 머리를 맞대고 겨루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자연은 보고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여겨지나 보다. (중략) 대흥사에서 올려다 보니 산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두륜봉은 부처님의 머리, 좌측의
두륜산이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반열에 오른 이유는,‘한반도의 최남단 해남 반도에 솟은 산으로 왕벚나무 자생지가 있으며, 다도해를 조망하기에 적합하고,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점 등이 감안되었다. 봄 춘백, 여름 녹음, 가을 단풍, 겨울 동백이 유명하며 유자와 차의 산지로 명성이 높음. 보물인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는 대흥사가 있다.’
겨울과 봄이 공존하던 애매한 시기, 그 아찔한 암릉과 광활한 평야와 바다가 만나는 절경을 품은 길을 얼떨결에 다녀 와서는 오래 마음에 두고 다시 찾을 날을 꿈꾸는 산이 되어 버렸다. 바로 그곳에 다시 간다.
< 지난 산행의 추억 >
(여기까지는 오래 전 두륜산 산행을 다시 준비하며 기록해 둔 것이다.)
< 희망사항 >
오랫동안 마음에 묻어두면 짐이 되는 일이 있다. 두륜산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마음은 좀처럼 실행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해야 할 숙제를 미루며 8년 넘게 시간이 흘렸다. 그간 여러 번 기회가 있었다. 멀다는 이유로, 주작 덕룡 종주와 함께 하는 부담으로, 버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등등의 변명으로 일관하다 이번을 놓치면 아주 멀어질 것 같아 금요일 늦은 오후 마음을 굳힌다.
사실 오랜 세월 두륜산에 마음을 둔 이유는 산행 자체보다는 산행기에 있다. 100명산 완주는 처음부터 계획한 일은 아니지만 언제부턴가 목표가 되었고, 조금 더 욕심을 내서 ‘100대 명산 산행기’를 완성하자는 바램이 커졌다. 무작정 쓰던 글을 2009년 5월 황매산 산행부터 지금의 틀 즉,‘~~산행을 준비하며, 희망사항, ~~ 가는 길에, 구간별 산행기록, 에필로그’형식을 갖추게 되었고, 그전에 다녀온 산행 기록은 훗날 이 형식으로 다시 썼는데 유독 두륜산만은 예외였다. 오늘 산행은 100대 명산 산행기의 마무리를 위한 길이다.
공교롭게도 어제 밤 알쓸신잡에 해남 이야기가 나왔다. 잠 욕심에 다 보지 못했지만 남도답사일번지로의 여행은 모든 이들의 로망이다. 남녘으로 향한다. 지난번과는 계절의 대척점에서 떠난다. 무언가 보람된 일을 한다는 뿌듯한 느낌이 든다.
< 해남 가는 길에 >
인기 있는 좋은사람들 주말 산행이 반토막 난 이유가 궁금했는데, 답은 이른 아침 집을 나서며 알게 되었다. 날씨가 몹시 춥다, 바람도 장난이 아니다. 일기예보를 살핀다. 해남 두륜산의 풍속은 18km/h를 넘나 든다. 약한 태풍급이다. 힘겹게 버티던 가을의 끝자락, 나뭇잎이 맥 없이 떨어져 거리에 흩어진다. 바야흐로 겨울에 들어서는 느낌이다. 이 바람이 그치면 겨울이리라.
커피 한 잔 사 들고 버스에 오른다. 옆자리까지 내 차지다. 작은 여유에 행복해진다.
멀다. 창 밖 풍경이 참 따뜻하다. 빛은 바람을 잊게 한다. 고창, 영광, 목포를 지나 해남 땅에 들어선다. 남녘은 아직 가을이다. 햇살은 빛 바랜 잎들에게 환한 생명을 불어 넣는다.
들머리에 서니 12:25. 늦었다. 마음이 급해진다.
< 오소재~노승봉 >
하산 완료 시간은 오후 5시 반, 험한 암릉 구간에 계단이 놓여 그리 힘든 곳이 없으니 여유 있게 가라는 대장의 말은 귓가로 흘리고, 오소재부터 앞으로 치고 나와 걷는다. 완만한 오르막이 오심재까지 이어진다. 비고가 350m라 여기고 바삐 걸었는데 250m 수준이다. 푸른 잎과 단풍이 공존하는 등로를 오르자 오심재, 깨달음을 터득한다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고갯마루 이정표에는‘五十峙’란 한자 표기가 있다. 좌측으로는 높다란 노승봉이 위용을 자랑하고, 우측으로는 고계봉이 단풍에 물들어간다. 일단 한 고비 넘었다는 안도감이 든다.
노승봉 커다란 암봉이 하늘과 맞닿는 모습이 근사하다. 발길이 서둘러 그리로 향한다. 무척 가파르다. 오르며 돌아보는 눈에 고계봉 넘어 케이블카 승강장이 우뚝하다. 지나온 오심재가 점점 작아진다. 온 산이 울긋불긋하다. 최상의 날씨는 아니지만 늦가을 정취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헐떡거리며 헬기장에 도착한다. 바람이 몹시 분다. 사진을 부탁하고 싶었지만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에 생각을 접는다. 내 얇은 바람막이로 거센 바람을 버텨낼지 걱정이다.
< 노승봉에서 본 가련봉 / 늦가을 숲 >
흔들바위 이정표에 이끌려 바위난간에 선다. 작은 전망대 옆에 커다란 바위가 서 있다. 바위 자체보다 그 밑으로 내려다 보이는 대흥사의 전경이 더 근사하다. 시작 길에 벌써 날머리를 바라보는 특이한 경험을 한다. 노승봉 암릉을 돌아든다. 몹시 가파르다. 산죽 군락이 나타난다 초록빛 색감이 참 좋다.
계단이 나타난다. 예전엔 쇠 발 받침을 딛고 힘겹게 올랐던 기억이 나는데…. 세월을 실감한다. 모퉁이를 돌자 거센 바람이 인다. 서 있기도 힘겹다. 맨 손에 닿는 바위의 감촉이 차다. 계단이 보상한 길을 바람이 힘겹게 한다. 돌아보는 풍경에 케이블 카 승강장이 아득하다. 뒤편으로 해남읍내 모습도 감지된다. 사진은 바람을 담지 못했다. 그저 풍요로운 늦가을 풍경만 화면에 남을 뿐이다.
< 노승봉 오름 길에 본 풍경 >
좌측으로 해남 바다가 펼쳐진다. 지난 번도 그랬지만 바다보다도 너른 평야가 더 인상적이다. 누런 색감이 해변마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우측으로 다시 대흥사가 내려다 보인다. 사방 산으로 둘러 쌓인 작은 분지, 아득한 느낌이 드는 길지에 절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평온 그 자체다.
13:26 노승봉에 선다. 널따란 반석이 우뚝 서 있다. 사방이 트인다. 두륜산의 실질적인 우듬지다. 바다와 산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굽이치며 흐르는 남녘 산의 조망이 그만이다. 풍경에는 바람이 묻어나지 않는다. 형체 없이 소리로 그 존재를 드러내는 바람은 그러나, 서 있기 조차 힘겹게 몰아친다. 매서운 바람에 손이 곱아온다. 사진을 부탁하는 손이 미안하다. 몇 컷 찍고 나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사진은 사진일 뿐, 풍경은 마음에 담아 두어야 오래 기억에 남음을 알기에 바람을 이겨내고 인내심을 발휘한다. 모든 게 내 발 밑이다. 암릉과 평야, 산과 바다, 도시와 사찰 그 공존하기 쉽지 않은 것들을 바라본다. 멀 길이 아깝지 않다.
가야 할 가련봉이 보인다. 암릉 사이로 난 계단이 표식 역할을 해 준다. 하나 둘 산객들과 조우한다. 모두 추위에 떨고 있지만 하나 같이 풍경에 넋을 잃은 모습이다. 노승을 지나 가련으로 향한다. 가파르고 긴 계단을 내려서며 그 옆에 아직도 남아 있는 로프와 발판을 보며 옛 생각에 젓는다. 저 길을 어찌 내려 왔단 말인가? 당시엔 얼음도 녹지 않았는데….
< 노승봉에서 >
< 노승봉~두륜봉 >
바람이 몹시 부는 아찔한 계단을 내려온다. 바람 부는 사면 반대에 서니 아늑한 기분이 든다. 햇살이 따스하다. 해남 너른 들녘이 빤히 내려다 보인다. 풍요로움 그 자체다. 남도의 풍요는 다 이유가 있었다.
가련봉 원경의 인상은 험악함이다. 거친 바위 사이로 길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 암봉 뒤편으로 바다가 보인다. 위안이 된다. 또 계단을 올라선다. 그리곤 한참 내려선다. 아찔하다. 바람에 모자가 몇 번이나 날려갈 뻔했다. 위험을 느끼면서도 그 스릴이 싫지 않은 이유는 뭘까? 바람과 풍경에 취해 정신이 혼미하다.
< 가련봉 가는 길에 본 풍경 >
10여분 너무도 다이나믹한 암릉을 넘어 가련봉에 도착했다. 높이로나 놓임새로나 두륜산의 정상이다. 100대 명산을 종주하는 산객의 사진을 찍어준다. 그도 완주의 유혹에 이끌려 이 먼 곳으로 왔으리라. 산등성이를 따라 고운 단풍이 펼쳐진다. 색의 변화가 감지된다. 단풍은 산을 따라 하산 중이었다. 내년 봄 저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올 초록을 그려본다.
많은 게 기대이상이다. 바람이 잦아들었으면 하는 것과 희뿌연 기운이 없어져 푸른 바다 풍경을 감상했으면 하는 바램이 없지 않지만 이만하면 충분하다. 더 이상의 바램은 욕심이리라. 가련봉에 올랐으니 산행의 큰 줄기는 이루었다. 이제부턴 대세 내리막이고 시간 여유도 많다. 천천히 즐기며 가야겠다.
< 가련봉에서 >
지나온 등로와 가야 할 길과 번갈아 바라본다. 지나온 길은 아득하다. 고계봉 뒤편으로 해남읍내가 보이고, 노승봉에는 산객이 서성인다. 험악한 계단은 작아 보이고, 암릉은 공깃돌 같다. 무엇보다. 풍경에는 바람이 없다. 그저 평화로움만이 느껴진다. 가야 할 길은 풍요롭다. 능선 따라 주름진 사면이 굴곡진 아름다움을 뽐낸다. 간간이 보이는 바위는 애교다. 그 뒤편으로 바다가 있다. 새삼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에 반한다. 변화 무쌍이다.
< 가련봉에서 바라본 노승봉과 주변 풍경 >
다시 긴 계단과 돌 길을 내려선다. 노승봉 내림 길보다는 덜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리기는 매일반이다. 만일재가 내려다 보인다. 이 험한 산에 어울리지 않은 너른 공터다. 그곳에 가면 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발걸음이 빨라진다.
인근에서 친구들이 여행을 왔나 보다. 시끌벅쩍 유쾌한 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커다란 카메라를 메고 있다. 잘 되었다. 이왕이면 고수에게 사진 부탁을 한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내 모습을 담아 준다. 먼저 내려가는 그들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다 나도 몇 컷 모습을 담는다.
만일재 위는 두륜봉이다. 커다랗고 앙칼진 암봉이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고갯마루로 향하는 계단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근사하다. 두륜산에서는 계단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간다.
< 가련봉에서 만일재로 향하며 >
만일재가 바로 밑에 내려다 보인다. 억새가 나부낀다. 가을의 정취가 제대로다. 억새와 두륜봉과 만일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찍고 보니 역광인데도 그런대로 좋았다. 부픈 마음으로 만일재에 선다. 햇살이 따사롭다. 공터 한 켠에 자리를 마련한다. 제대로 해바라기를 하며 굶주린 배를 채운다.
걸음을 멈추니 춥다. 비상용으로 가져온 패딩이 큰 몫을 한다. 간식을 먹으며 지나는 이를 살핀다. 이 좋은 계절, 멋진 곳에 온 기쁨이 웃는 얼굴에 가득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기분도 좋아진다. 억새 넘어 바다가 보인다. 이 가을 최고의 풍광을 만끽하고는 두륜봉으로 향한다.
< 만일재와 두륜봉과 바다를 배경으로 >
짧은 오름에 힘겨워한다. 지나온 만일재가 점점 작아진다. 두륜봉을 우회해 가는 길에 색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작은 협곡이 나타나고 그 사이로 산과 바다가 보인다. 눈이 호강한다.
산행 시작 2시간 만에 구름다리에 닿는다. 예전엔 두륜봉을 가지 않고 이곳에서 하산했던 기억이 난다. 그새 구름다리 밑으로 계단이 놓였다. 덕분에 편하게 올라 두륜봉에 오른다. 만일재에서 볼 때는 거대한 암봉이었으나 반대 방향에서는 그저 그런 작은 봉우리다. 풍광이 노승봉과 가련봉만 못하다. 이름이 실제를 반영하지 못한다.
< 두륜봉에서 / 진불암 하산 길 풍경 >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남는 시간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럴 거 왜 더 여유롭게 산행하지 못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ㅋㅋ
< 두륜봉~대흥사 >
계단을 내려선다. 새로 난 길 같다. 햇살이 밝게 빛나는 내리막, 운치 있다. 허겁지겁 내달린 반성으로 부러 여유를 갖는다. 너덜이 나타난다. 제법 길다. 천천히 내려선다. 이내 언제 돌이 있었냐는 듯 평탄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걷기에 그만이다. 진불암까지의 거리가 점점 줄어든다. 밑으로 내려올수록 숲의 푸르름이 짙어진다. 동백의 푸른 잎에 윤기가 돋아난다. 산 밑은 여전히 가을이다. 낙엽 푹신한 산사 가는 오솔길을 느긋한 마음으로 걷는 건 이번 산행의 또 다른 재미다.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좌측으로 몇 발자국 가니 진불암이다. 겉모습 만으로는 대단한 곳이 아니다. 기와로 치장한 돌담에 서면 먼 풍경이 보일까 했는데 아무것도 없다. 그저 치장이다. 뜰 앞 커다란 돌들도 생뚱맞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겠지 하는 생각만 가져 보니 왔던 길을 도로 내려온다.
임도 갈림에서 표충사로 방향을 잡는다. 표충사/대흥사 이름이 잠시 헷갈린다. 숲이 걷기에 그만이다. 푹신한 낙엽을 밟는 소리가 좋다. 산사는 그 자체보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이 더 멋진 법,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갈림이 나타난다. 길을 막아 둔 곳으로 낙엽이 짙게 쌓여 있다. 가지 못하는 길에 대한 호기심을 뒤로 하고 표충사 경내로 들어선다. 말이 표충사지 실은 대흥사와 구별이 없다. 인기척 없는 경내로 들어선다. 어사각이라는 전각에 표충사라는 표식이 있다. 왠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싫어 이내 돌아 나온다. 초의선사 석상을 지나 대흥사 경내로 들어온다.
< 대흥사 전경 1 >
사찰 탐방은 일주문부터라 했는데 거꾸로 내려가며 살핀다. 널찍한 절 마당에 서서 전각을 살핀다. 고요하다. 전각과 석탑보다 뒤편 두륜산 정상 암봉이 더 눈길을 끈다. 지나온 암봉의 기세가 늠름하다. 이리 잘 생긴 바위가 병풍처럼 떠받치고 있어 대흥사가 명찰이 되었나 보다. 돌 계단을 내려서고 석탑을 지나고도 눈 길은 계속 뒤로 향한다.
대웅전으로 향한다. 절은 심란을 잠재워 형상 너머 본질을 보는 곳이라 했다. 작은 다리를 건너 피안으로 들어선다. 한국 사찰 건축의 아름다움은 건물과 건물이 만들어내는 공간에 있다. 사찰 건물의 진정한 보물은 전각을 떠받치고 있는 기단과 석축 그리고 돌담이다. 그런 의미에서 뜬금없는 야자수가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모습은 눈길은 끌지는 모르지만 우리네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 이질적이다. 피씩 웃음이 난다. 너무 나간 발상 아닌가 싶다. 차라리 고목과 작은 돌로 쌓아 올린 돌탑이 고찰과 더 어울린다.
< 대흥사 전경 2 >
사천왕문에서 바라보는 대흥사와 두륜산의 모습은 오늘 풍경 중 제일이었다. 자연과 어우러진 절집의 전경은 명품이다. 이런 곳에는 굳이 치장이 필요 없다. 그저 정갈한 그대로가 바로 보물이다. 한참을 바라본다. 오래 보아도 지겹지 않다는 건 그만큼 대단한 것이리라. 경내를 벗어난다. 도로를 따라 걷는다. 일주문을 지난다.
< 대흥사 전경 3 >
산악회 버스는 한참 더 내려가야 있다. 유선여관에 잠시 들른다. 숙박시설로의 기능보다는 음식점으로 완전 탈바꿈해 있었다. 뒤편 계곡에 단풍이 곱게 들어 있다. 유선여관을 지나자 도로가 이어진다. 색색의 단풍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지나는 청춘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본다. 근사하다. 젊음이 부럽고, 다정한 모습이 부럽고, 길과의 어울림이 좋았다. 어쩌면 한없이 지겨운 하산로가 낭만의 길로 여겨지는 건 아무도 시간의 여유와 늦가을의 정취가 아닌가 싶다. 터벅터벅 그러나 운치 있게 남은 길을 걸었다.
< 에필로그 >
8년 8개월 전 산행기 제목은‘해남 땅끝에서 경험한 바위, 바람 그리고 바다.’였다. 오늘 역시 다르지 않다. 한 가지를 더하자면 대흥사의 늦가을 정도이다. 세월이 흘러 암릉에 계단이 놓이고, 새 건물이 세워져도 산과 절의 본질에는 변화가 없다. 다르다고 여기지만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아쉬운 게 있다면 생각보다 짧았다는 게 유일하다. 암릉에 놓인 계단이 시간을 단축시켰을 게다. 오심재와 만일재 너른 공터를 내려다 보는 마음은 풍요롭고, 노승봉/가련봉/두륜봉 정상에서의 확 트인 조망은 압권이었고, 산정에서 내려다 보는 바다와 그 바다로 이어지는 들녘도 인상 깊었다. 대흥사는 호남 절 집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었고, 늦은 오후 환한 빛을 받은 산사 가는 길 풍경도 낭만이었다.
목표한 산행기도 완성했고 해남의 풍성한 자연도 만끽했다. 형체는 없으나 그 존재는 의심할 바 없는 바람, 그 바람을 맞으며 바램을 이루었다. 오래 기억될 산행이었다.
< 두륜산 산행 궤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