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 사찰 순례기(2011.6.23-6.27 4박 5일)
법광
1년여 전부터 마음먹었던 중국 사찰성지순례를 드디어 실행하게 되었다.
목적지는 시안(西安). 수행자의 천국, 종남산(終南山)을 중심으로 중국 불교 8大宗派(현장의 법상종, 불공삼장의 밀교, 도선의 남산율종, 구마라집의 삼론종, 선도의 정토종, 두순의 화엄종, 천태지의의 천태종, 달마대사의 선종) 중 천태종과 선종을 제외한 6개 종파의 조정(祖廷)이 있는 곳이다.
이곳 종남산은 서안의 상징물이자, 도교와 불교의 근원지요, 중국 철학의 발원지다. 서안은 샨시성(陜西省)의 성도(省都)로서 황하문명의 중심지. 중국고대역사의 출발점이며 秦.漢.隨.唐 등 13개 왕조 73명의 황제가 총 1062년 동안 수도로 삼은 곳이다.
대상되는 사찰 및 유적지는 정운스님이 엄선했고, 여행안내는 마야투어 여행사가 맡았다. 늙은 오빠(거사들) 4명을 낀 일행은 모두 16명. 니련선하원 불서읽기모임과 정사모 멤버들! 정운스님을 가깝게 알고 있는 보살, 거사들이다.
◆ 출발(첫째 날, 6월 23일. 목)
- 6:30에 인천공항에서 만나다.
전날 저녁 모임에서 과음을 하고보니 하마터면 비행기를 못탈뻔하다. 구반포 정류장을 경유하는 5:30 공항버스는 40여분 만에 공항에 도착했다. 쾌속이다. 하지만 不飮酒戒를 어긴 과보는 피할 수 없는 것. 속은 쓰렸고, 카메라 충전기, 선글라스를 챙기지 못하고 떠나왔다. 여행기간 내내 후회스러웠다.
세 시간을 날아서 西安에 도착하다. 시차는 1시간 늦다. 대한항공 승무원들은 외국항공사에 비하여 예쁘고 친절하였으며, 현지에서 빌린 전세버스는 쾌적하였으며, 특히 운전기사(연따거!)는 여행기간 내내 불평한마디 없이 성의를 다해주었다.
- 점심을 먹고 제1차 목적지, 진시황릉 병마용 갱을 구경하다.
불로장생의 약초와 묘약을 구하라며, 동해의 신선을 찾아 童男童女 삼천 명을 보내놓고, 진시황은 한편으로 37년에 걸쳐 자기가 죽어 사후에 들어갈 묏자리를 파고 있었다.
무덤은 거대하였으며, 산인지 숲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주위에 植樹를 해 위장하였다. 무덤 안에는 진시황을 모시는 시종과 신하, 그리고 호위병과 군마 등 수만 개의 토용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 산채로 함께 순장된 궁녀와 공사기술자도 부지기수였다. 완전 발굴에는 앞으로도 수십 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예나 지금이나 피할 수 없는 속성인가. 그러나 세계 각국의 여행자가 시안을 찾는 주목적은 병마용 관광이라고 하니 지금의 西安을 먹여 살리는 것은 진시황의 어리석은 토목공사 결과.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 아닌가!
- 두 번째 목적지, 목탑사(禪定寺) 유적지를 찾다.
신라왕자 無相대사가 머물며 수행한 곳이다. 無相대사(682-762)는 당나라에 들어가 여러곳을 다니며 수행하였고 당나라 현종을 뵙고 중국 선종 초기 정중종(淨衆宗)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無相은 중국의 500나한 중 455번째 나한이 될 정도로 중국 불교사적 위치에서 비중이 크며, 禪師 마조도일의 스승이다. 또한 티베트에 최초로 선(禪)을 전했다. 지금은 찾아오는 관광객도 없는 한적한 공원. 이곳은 현지 가이드조차 잘 모르고 입장료도 안 받는 호수공원으로 변해 있다.
◆ 둘째 날(6월 24일. 금)
- 호텔 뷔페식으로 아침을 먹고(아침은 매번 이렇게 때웠다) 7:30에 정업사(淨業寺)로 향하다.
宗祖 도선(道宣)율사(596-667)의 南山律宗 朝廷이다. 산길 오르막을 30여분 헐떡거리며 오르니 ‘以戒爲師’ 현판이 걸려있는 계율종 사찰이다. 암, 戒는 수행의 기본이지!
일행 중 한국스님(정운)이 있음을 알고 한 스님이 친절히 안내하며 茶 한잔씩 권한다. 절에서 특히 낯선 중국 땅에서 차 얻어 마시기는 처음이다. 절에 시주도 하고, 같이 모여 천수경, 반야심경을 독송하다. 이곳의 목탁은 전기밥솥보다 더 크다. 차라리 나무 북이라 해야 맞다. 목탁소리 또한 북소리다.
- 구마라집이 있는 초당사 순례
‘煩惱卽菩提’ 당우 편액이 걸려있다. 고생을 해야 그 고생이 후에 복이 된다는 말이 있던데, 인간의 깨달음도 인간의 번뇌 속에서 깨달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라.
名僧 구마라집을 얻기 위해 前秦 王 부견은 구마라집의 귀자국(현 쿠차)을 정벌토록 하였고, 구마라집을 만나보기도 전에 왕이 죽자, 장군 呂光(후량국 왕), 姚興(후진 왕)역시 구마라집을 귀중한 國寶로 취급한다.
중국 대승불교를 일으킨 최대의 공헌자. 반야계통의 대승경전과 용수의 三論部 논서 번역으로 유명하다.
정운 스님은 구마라집의 사리탑(八寶玉石塔)이 세상에서 최고 아름답다고 말했는데, 막상 사찰에서는 문을 굳게 잠가놓고 손도 대지 못하게 한다. 그래도 문틈으로나마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불과 30여 년 전 문화대혁명 기에는 전국에 있는 사찰은 거의 모두 때려 부수고 승려에게는 온갖 박해를 가하더니 이제 와서는 돈벌이 황금거위 쯤으로 여기는지, 지나치게 요란을 떨며 관리하고 있다. 불상 중에는 부서졌던 파편 조각을 조각조각 땜질하여 붙여 복원한 것도 부지기수다.
연무정(煙霧井, 구마라집의 타지 않은 혀에 관한 전설이 있는 ‘蓮花井’과는 다르다)이란 곳에서는 우물에서 찬 구름이 뿜어져 나와 신기해했더니 이곳 주위에 온천이 있다는 소문이다. 지열에 의한 안개인가 보다.
초당사 경내 관람중, 관음상과 선재동자의 53선지식 순례구도 벽화가 감동적이다.
- 대안탑(大雁塔) 순례.
慈恩寺 도량 내의 7층탑이다. 삼장법사 현장의 번역 작업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과거에 흥성하던 시절보다는 면적이 훨씬 작아졌는데, 탑을 오르려면 다시 입장료(30元)를 내야한다. 중국의 사찰은 핑계만 있으면 입장료 부스를 만들어 사람을 두고, 돈을 받는다. 이렇게라도 하여 자국민의 일자리를 만들고 돈벌이도 겸하고 있다. 시간도 없지만, 기분이 상해서 입장은 포기하고 사찰 경내만 돌았다.
- 와룡사 순례
중국 불교 전래(서기 67년) 초기(漢, 168년)에 창건된 1800년 고찰. 복응선원(漢)→관음사(唐)→와룡사(宋)로 이름이 바뀌어 왔으며 섬서성 최고 사찰로서 선사들의 수행처. 중국 사회주의자들로부터 탄압의 표적이 된 절이다. 중국 근. 현대의 위대한 스님인 虛雲과 쌍벽을 이룬 來果 스님의 선 수행 가풍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念佛是誰 照顧話頭’(염불시수 조고화두, 염불하는 이놈은 누구인가? 화두를 잘 살피 거라) 경구가 사찰 곳곳에 붙어있다.
마당에는 촛불, 분향 장소가 상갓집 화톳불만큼이나 어마어마한데, 너무 지저분하고 향과 촛불 타는 냄새가 강렬해서 인상이 쓰인다. ‘아미타불’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북소리 같은 목탁소리와 함께.
- 소안탑 순례
소안탑은 서안 시내 천복사(薦福寺)라는 사찰 경내에 있다. 707년 唐 중종 때 건립된 塼塔인데, 玄藏보다 늦게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온 고승 의정(義淨: 635-713)이 이곳에서 불경을 번역하고 불경을 보관한 곳이다.(참고로 중국의 4대 譯經家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천복사는 戰禍로 소실되었으며 소안탑은 높이 45m로 15층에 달하는 큰 규모였으나 지진과 벼락으로 윗부분이 파손되었다. 날씨는 땡볕. 여기 그늘에서 길거리에서 사온 자두. 살구. 체리 등 과일을 맛있게 먹었다.
- 回族 거주지(시장), 골목 구경하기
중국에 와서 기념품을 사거나 茶, 술 등을 살적에는 가격흥정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품질이 일정하지 않고, 표준이 되는 것이 없다. 더구나 직장과 집만을 왔다갔다만 하고 시장구경이나 생활용품 거래에 경험 없는 居士들에겐 장바구니 물가 감각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살림과는 거리가 먼 듯한 우리 스님이 “싸다!”고 해야 안심이 된다.
서안의 도로를 건너는 요령은 눈치작전이다. 기(氣)싸움이다. 신호 무시하고 적당히 알아서 건너야 한다. 건너려는 사람들이 하나씩 모여 떼가 형성되면, 차도로 밀어나가고, 위협적으로 달려오던 차량은 이제는 눈치껏 알아서 브레이크를 밟는다.
◆ 셋째 날(6월 25일. 토)
- 지상사 순례
전세버스로는 가파른 산길을 올라갈 수 없어서 작은 차로 옮겨 타고 꼬부랑길 지상사 산길을 아슬아슬 달린다. 신라 의상대사(625-702)가 수행한 사찰이다. 화엄종 2祖인 지엄 화상의 문하에서 화엄을 공부한 뒤 귀국하여 해동 화엄종을 연 開祖다. 法性偈(華嚴一乘法系圖)로 유명하고 관음도량인 강원도 낙상사와 영주 부석사의 전설로도 널리 알려진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해, 몇 년 전 우리나라 지관 스님 외에 몇몇 독지가가 ‘의상대사 법성게비’를 이곳에 세웠다. 비문 내용은 감동적인데, 이 비석을 세운 장소는 사람도 다니지 않는 건물의 뒤쪽 구석이었다. 절 마당 한 그루 이름 없는 나무만도 못한 대접을 받다니! 씁쓸한 뒷맛. 중국에서 현재 공인하고 있는 종교는 불교, 기독교, 가톨릭, 이슬람교라고 하고 있지만 종교적 예의나 배려는 다분히 상업적인 느낌.
- 흥교사 순례
현장법사의 유골이 묻힌 절이다. 도량 내에는 현장의 사리탑(5층)과 그의 제자들 탑 2기가 있는데, 圓測법사와 窺基법사의 3층탑이다.
신라 왕족 출신 圓測법사는 窺基법사보다도 나이가 19세 더 많으며, 학문도 규기 법사보다 더욱 뛰어났다. 그런데도 현장법사는 唯識 중심의 法統(法相宗)을 제자 窺基(632-682)에게 잇게 했다. 圓測법사는 현장의 唯識 강의를 몰래 엿들어야 했다.
우리 일행은 법당에도 약간씩 보시를 하였고, 사찰을 관리하는 노스님께도 조금 보시를 하였는데, 기분이 좋아진 그 스님은 원측스님의 사리탑을 가까이 순례하도록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하였다.
- 화엄사 순례
서안에서 15Km 떨어진 언덕배기 밑에서 버스를 내려 땡볕을 걸어 올라갔다. 현재 승려는 살지 않고 화엄종의 初祖 두순과 청량국사의 탑만 서 있다. 사찰은 건축 중인데, 절 뒤는 황토 절벽으로 군데군데 굴을 뚫어 놓았다. 그런데도 굴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이 고장이 비가 많지 않은 탓 일 것이다.
여행하면서 가장 조심스러운 것이 배탈과 화장실 이용이다.
작년 로마 유적지 여행에서는 효도 관광으로 따라온 어떤 할머니가, ‘세계적인 아이스크림’이라는 가이드의 소개에 혹해서 찬 아이스크림 한 컵 먹고는 바로 설사를 하고 곤혹스러워했던 일이 있었다. 이곳은 화장실 시설이 무척 조악하다.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지! 뒤가 급해 허둥댔던 한 거사님 왈 “측간 부처님 만나고 왔다”며 환하게 웃는 모습…….
- 향적사 순례
정토종의 朝廷사찰이다. 스님의 탑돌이 귀띔에 善導화상의 탑을 세 바퀴 돌았다.
아직은 탑이나 불상에 대해 간절한 귀의심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본 정토종을 창종한 호오넹(法然, 1132-1212)은 선도화상을 존경하고 의지했으며, 1980년 이후 일본에서는 중국 향적사를 일본 정토종의 조정사찰로 여긴다. 물론 큰돈을 시주하고 있을 터이다. 정원에 자그마한 탑들을 조성한 것이 아담하고 일본적이다.
- 흥선사 순례
密敎 사찰로서 北印度 출신 不空三藏(705-774)이 흥선사에 머물려 번역했던 밀교 포교지로 유명하다. 3세기 말에 창건되었다는 서안에서 가장 오래된 절.
善無畏(637-735, 중인도 출신), 金剛智(669-741, 남인도 출신)때에 체계적인 밀교 경전이 번역되고 불공삼장은 이를 계승하여, 밀교를 선양하고 당나라 3대에 걸쳐 황제의 귀의를 받았다.
제자 혜과(惠果)는 밀교 朝廷 사찰인 청룡사에서 많은 제자를 지도했는데, 일본 진언종의 開祖인 쿠우까이(空海)대사(774-835)도 이중 하나다. (현재 목포 유달산에는 쿠우까이 대사의 석상이 크게 조각되어 있으며, 맞은편에 不動明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일제 강점기의 흔적으로, 존폐에 대한 논란이 있다)
◆ 넷째 날(6월 26일. 일)
- 법문사 순례
서안 서쪽 115Km, 세계유일의 불지사리 친견의 꿈을 안고 버스에 타다.
두 시간 정도. 중국은 ‘세계 제일’, ‘세계유일’ 등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다. 국내에서도 부처님 진신사리 얘기를 많이 들어왔는데 또 무슨 세계유일인지 헷갈린다.
387년 수나라 때 지하궁을 열어서 황제들은 불사리에 공양을 올렸는데 唐代에 와서 흐지부지되고 佛指사리와 보물은 전설 속에 묻히고, 그 위에 목탑-전탑이 차례로 세워졌다가는 무너진 후, 省 당국의 탑 기반 정리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근 1000년 만에 드러난 탑 지하궁의 불사리와 보물은 세계적 뉴스거리가 되었다. 내가 부처님 불지사리를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다.
경내는 참으로 넓어 입구에서 걸어가는데 만 30여분이 걸리는 듯하다. 탑에 다가가는 길 양쪽에 부처님 생전의 모습과 보살상을 잘 조각해 놓아 구경거리가 된다.
스님들이 250여명 상주한다는데, 이날 우리 옆에는 중국 공산당의 VIP이거나 경찰 고위직인 듯한 중년남자 일행이 관람을 왔다. 부인과 가족을 동반하였고 수행원이 둘이나 따라붙은 것을 보면 짐작은 가는데, 주지 스님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양손을 허리에 꺾어 붙이고 말하는 모양은 보기에 썩 좋지는 않다. 오늘은 일요일. 공무도 아니지 않는가.
- 자유 시간, 기념품 챙기기
이번 여행은 패키지여행이 아니어서, 비교적 느긋한 마음으로 순례여행도 하고, 쇼핑도 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중국차(보이 차, 鐵觀音)와 기념품을 몇 점 챙기다. 아직 익숙하지 않고 또한 실제 필요한 물건도 없다.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는데, 이곳 시안에서는 별로 느낌이 없다.
◆ 다섯째 날(6월 27일. 월)
시안을 출발하여 귀국하는 날.
아침을 마친 후 일행이 모두 모여 그동안 여행 소감과 각자의 자기소개를 곁들였다. 사람의 진면목을 엿보려면 여행을 해보면 알 수 있다는데, 길지 않은 일정이라서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각자의 개성을 확인하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 정확하게 도착한 비행기에서 내려 곧바로 헤어지는 게 서운하여 호프 한 잔 하고 공항철도로 연계되는 지하철로 느긋하게 귀가했다.
◆ 여행 소감
국외 사찰 순례여행은 처음이었다.
국내에서도 특별히 사찰순례를 프로그램으로 한 것은 경주 남산 순례정도였다. 대개는 수려한 산수경치를 즐기며 심신을 쉬게 하려는 것이었다. 유럽 여행에서의 교회, 성당 건축에 대해서도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었다.
이번에는 마음준비가 좀 있었다. 불서읽기 모임을 통해 1세기 초부터 북인도를 거쳐 중국에 불법이 전해지면서, 수많은 구도자, 순례자들의 노력과 희생을 공부하였다. 크고 작은 수많은 사람들의 구도행각과 모험, 희생의 공덕이 아니었다면 불법은 이어지지 못했으리라. 지나치게 物神主義에 젖어버린 중국의 사찰기행을 하면서도 내면에 깔린 그 흔적과 냄새를 찾아보려했다. 특히 현장의 죽음을 무릅쓴 16년간의 인도구법여행길. 법현-구마라집-의정 등의 역경사업, 달마에서 허운스님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선사, 조사들의 발자취를 생각해보면서, 조금은 마음이 깊어졌다. 불상과 불교 건축과 불교문화가 몸과 마음에 조금 젖었음을 느낀다.
盆地인 시안 시내의 전체 시가지 모습을 조망해보지 못해 아쉽고, 도교 사찰과 화산 관광을 못하고 떠나오게 되어 미련이 남는다. 끝.
<부록> 중국의 4대 역경가(譯經家)
첫댓글 사찰 소개는 스님이 많이 잘 해주시기 때문에 중복적으로 여기에 글을 올릴 것인지 망설였습니다만,
느낀 감정은 다를 것이라 올리자는 의견을 따랐습니다.
다시한번 꼼 꼼히 읽어보았습니다. 정리를 잘 하셨더군요. 저녁마다 사케를 마셔서 힘들어 하시는줄 알았는데, 꼼꼼히 체크도 하시고, 눈여겨 보신 부분마다 정확히 보았습니다. 서안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법문사는 스님들께서 많이 사는 공간으로 내부를 제가 데리고 다니면서 소개해주었다면 더 많은 느낌이 있었을텐데, 그때 제가 조금 지쳐서 못해주었습니다. 다음 기회에...
감사합니다. 글 싣는 장소를 '중국불교, 여행'코너에 옮길까 하다가,
스님의 여행 안내 사이트에 감히 끼어들기가 쑥스러워서, 여기에 그냥 둡니다.
오늘 kbs 2tv를 보다 시안의 병마용 과 대안탑이 화면에 비치니 반가운 마음이 앞서네요. 끝에 본 것이 되어 실제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번여행은 보람있는 성지순례 였습니다. 거사님들 덕분에 더 많은 것을 공부했습니다.
좋은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