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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그 치열했던 핵폐기장 반대 시위 여파가 아직도 담벼락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마을
신석정 시인이 1915년부터 1952년 전주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던 선은마을. 지금 이 초가삼간은 시인이 26세때 지은 집을 복원한 것이라는데, 마당이고 뒤란이고 온통 코스모스가 키높이로 자라서 집 전체를 감싸고 있다. 가을에 코스모스 울긋불긋 피면 그 또한 장관이겠다.
“본질적으로 석정은 처음부터 뒤에 까지 일관하여 자연과 친근하여 그것을 등장 사사(師事)하는 가운데 시상(詩想)을 발전시키고 다듬어 온 전형의 자연시인이다.”(백철·한국신문학발달사)
“그는 한국 최초의 전원시인으로 소재를 거의 자연과 농촌에서 구했고, 목가적·전원적·명상적인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한 시인이다”(조남익·한국현대시해설)
“석정은 적극적으로 현실을 개조하려는 지사(志士)로서의 기질은 아니었을지라도 멍든 역사와 얼룩진 현실을 거부하려는 선비적 기질을 가진 시인이었다”(채수영·한국현대시의 색채의식 연구)
“시의 사상적 깊이와 진폭에 있어서는 만해, 지용, 영랑을 능가해 가고 있다”(박두진·한국현대시인론)
“한국근대시사에서 단 하나의 뿌리의 시인”(김윤식·신석정론)
“이 시인의 시작생활 50여년에 이르는 일생은 오로지 우리의 시문학에 헌신한 것이었고, 그 불요불굴의 정신은 민족문학에 커다란 거화(炬火)로 길이 우리 정신사를 빛내게 한 것이었다”(최승범·신석정의 생애와 시)
신석정(辛夕汀). 대나무처럼 키가 크고 눈썹이 시커먼 이 사나이(시인이자 석정의 동서인 張萬榮의 표현)는 일생동안 자연을 품에 안고 살아온 천성적인 시인이었다. 또한 평생을 향토에 터잡아 쓰여진 그의 시는 곧 우리의 산이요, 자연 그자체였다. 그러한 그의 시는 어느 시 보다도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의 시 ‘들길에서’ ‘산수도(山水圖)’등이 해방이후 중고교 국어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려 있었고 대표작이라 할수 있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비롯 ‘추석’ ‘봄을 기다리는 마음’ ‘소년을 위한 목가’ ‘들길에서’ ‘아직 촛불을 켤때가 아닙니다’ 등이 1970년대 이후 교과서에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서정적인 시들이 그동안 국민정서의 자양노릇을 했다고 할수 있다.
신석정은 1907년 부안읍 동중리에서 아버지 신기온과 어머니 이윤옥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성리학의 대가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석정이 8살때 남의 빚보증을 잘못 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으며 인근 선은동으로 옮겼다. 한폭의 수채화 같은 이 선은동은 석정이 꿈많던 소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석정은 이곳에서 한학자 할아버지로 부터 한학을 배우다 12살 나던 1918년 부안보통학교 2학년에 입학하였다. 졸업후 농사를 지으며 문학작품 탐독에 열중하였다. 그때 일본 작가의 단편과 투르게네프, 하이네 등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특히 한문공부와 함께 중국의 노장(老莊)철학, 도연명(陶淵明)과 인도 타고르의 시세계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자연속에 묻혀 순수한 독학으로 문학에의 길을 닦아갔던 셈이다.
18살이던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한 것을 시발로 동아, 중앙 등의 지상을 무대로 몸에 스민 고향의 자연에서 얻은 시편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다 1926년 박소정(朴小汀)과 결혼한후 1930년 분가를 하고 서울로 올라가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대종사 문하에 들어갔다. 중앙불교전문강원(동국대 전신)에서 1년 남짓 불전(佛典)을 공부하는 한편 원생들의 문예작품 회람지 원선(圓線)을 만들었다. 이때 박용철(朴龍喆)이 주관하는 ‘시문학(詩文學)’과 연결되어 당시 시단의 거두였던 정지용(鄭芝溶)을 비롯 이광수 한용운 주요한 김기림 등의 문인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1931년 시문학 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하고 시문학 동인이 되었다.
같은해 어머니 상을 당한 석정은 김기림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향, 물려받은 가난과 싸우며 계속 문학에의 길을 걷는다. 당시 시대 상황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는등 암담한 시절이었다. 석정은 10여 두락의 소작을 지으며 호구지책으로 한때 부안군 동진면사무소에 서기로 나가기도 했다.
낙향 3년만에 가까스로 조촐한 집을 장만해, 스스로 청구원(靑丘園)이라 이름 붙이고 벽오동 자귀대나무 모란 시누대 등을 심었다. 이 청구원에서 그는 빛나는 외로움 속에 첫시집 「촛불」과 두번째 시집 「슬픈 목가(牧歌)에 실린 시들을 썼다.
1939년 33살의 나이에 「촛불」이 나오자 문단에서는 시어(詩語)의 조탁, 각도의 참신, 형식의 세련등 종래의 시를 일변시킨 전원의 서정적 목가시인으로 찬사를 받게 되었다. 석정은 “빈한과 인고속에서 겨우 결실된 것이 「촛불」" 이라면서 “청구원 주변의 산과 구릉과 멀리 서해의 간지러운 해풍이 볼을 문지르고 지나갈때 얻은 꿈조각들”이라고 고백하였다.
이 시집에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직 촛불을 켤때가 아닙니다’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안습니까”등 초창기의 주옥같은 시 36편이 실려 있다.
해방이 되고 그는 1947년 「슬픈 목가」를 펴냈다. 일제 말기의 숨막혔던 상황속에서 악몽같은 세월을 견디며 써 모은 32편을 묶은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그는 ‘고운 심장’에서 “지치도록 고요한 하늘에 별도 얼어 붙어/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 밤이 이대로 억만년이야 갈리라구”라고 절규하였다. 이 시집에는 ‘산수도’ ‘슬픈 구도’ ‘대숲에 서서’‘애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장만영은 이 시집을 일러 “잃어진 자연을 그리워하는 애달픈 엘레지”라고 평했다.
이 무렵 그는 교직에 몸을 담아, 김제 죽산중(1947-1949), 부안중(1949-1950)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1950년 6·25 사변이 나자 그는 전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이후가 흔히 말하는 비사벌초사(比斯伐艸舍)시대다. 40평 남짓한 이 집에는 각종 화초와 나무 40여종이 가꿔져 마치 식물원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그는 1951년부터 태백신문 편집고문 일을 맡아 보았고 1954년에는 전주고 교사로 후진을 양성했다. 이듬해 부터 전북대와 영생대(전주대 전신) 등에서 시론을 강의하며 전북지역의 문학활동을 선도하였다.
1956년에는 제3시집 「빙하(氷河)」를 상재했다. 이 시집을 펴내기 전 그는 “서가의 책을 뽑아 종이장수의 저울에 넘겨야 하는”참담한 가난을 겪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불붙는 열정을 시작에 쏟으며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늬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꽃덤불) , “차라리 심장도 빙하되어 남은 피 한 천년 녹아/ 철철철 흘리고 싶다”고 노래했다. 이 시집에는 해방이후 6·25를 거치면서 쓰여진 64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석정은 회갑을 맞은 1967년 제4시집 「산의 서곡(序曲)」을 내놓았다. 이 시기는 생활이 비교적 안정기에 접어든 때였다. 100여종의 식물 이름이 등장하는 이 시집에는 자연뿐 아니라 치열한 역사의식과 짙은 현실참여를 담았다. 석정 스스로 “부조리와 현실에 대한 인간의 성실한 저항이 누구에게 보다도 시인에게 요구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4·19 가 일어난 다음해인 1961년, 전북일보와 삼남일보에 실린 「쥐구멍에 햇볕을 보내는 민주주의의 노래」와 「전아사」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엄숙한 역사의 선고도 동결된 지구에서/ 그렇게도 우리가 목마르게 대망하는 것은/ 결국/ 헤아릴수 없는 쥐구멍에/ 햇볕을 보내는 민주주의의 작업을 떠나선 의미가 없다”
“얼룩진 역사에 만가(輓歌)를 보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한 함성으로 / 다시 억만 별을 불러 사탄의 가슴에 창을 겨누리라/ 새벽종이 울때까지 창을 겨누리라”
1970년 그는 다섯째 시집 「대바람 소리」를 펴냈다. 이때 김제고(1961-1962)를 거쳐 전주상고(1963- 1972)에 재직하면서 유네스코와 예총 등의 활동을 벌였다. 24편의 시가 수록된 이 시집은 초기의 목가적인 세계로 회귀하면서 더욱 차분하고 고요한 관조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소한 대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 소리…
1972년 그는 교직에서 정년퇴임한후에도 시작에 전념하다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투병 6개월의 보람도 없이 “가슴에는 무더기로/ 떨어지는 백목련 낙화소리…”처럼 1974년 홀연히 가고 말았다.
1976년과 1991년 전주 덕진공원과 1991년 부안군 변산면 해창 해변공원에 그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유고 수필집으로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1974년)이 있고 가람 이병기와의 공저 「명시감상법」(1958년), 「대역(對譯)중국시집」(1954년), 「대역 매창시집」(1958년) 등을 남겼다.
▣ 일화와 석정문학회
키가 훤출하고 코가 늘씬한 석정은 마도로스 파이프를 물고 술을 즐기던 멋쟁이였다. 좌우명이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로 뜻을 항상 저 높은 산과 흐르는 물, 즉 지조에 두었던 듯 하다. 그러면서도 천진스런 일화를 많이 남겼다.
시인 이기반씨에 따르면 1950년대, 지금 경원동 부근에는 석정의 단골술집이 있었다고 한다. 석양무렵 허름한 그곳에는 손님들이 많이 몰려들어도 석정 자리는 항상 비워둘 정도였고 그집 여주인을 문인들은 석정댁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는 나무중 태산목을 유난히 좋아했고 꽃이 필 무렵이면 가까운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태산목 잎에 술을 부어 마시는 풍류를 즐겼다. 한번은 술에 취해 전주상공회의소 앞길에서 교통경찰을 밀치고 자신이 수신호로 교통정리를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한 소년을 무척 좋아해서 어린 학생들이 지나가면 볼을 부벼 대었다고 한다.
한편 석정은 1959년과 1960년 「자유문학」지에 이 지역 시인들을 추천, 등단시켰다. 당시 추천된 사람은 이병훈(전 군산문화원장), 김민성(부안여중고 이사장), 이기반(전 전주대 학장), 황길현(전 삼례여고 교사), 허소라(군산대 교수), 전재보(전 전북도경) 등 6명이었다. 이들 중 전재보를 제외한 5명이 석정 작고 10주기인 1984년 석정문학회를 결성했다.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 문학회는 첫해에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필두로 「신석정대표시평설」등 올까지 12권째의 동인지를 발행해 왔다. 창립 이후 홍석영(원광대 명예교수), 박순호(원광대 교수), 정열(시인·작고), 문두근(순천공업대 교수), 김혜선(여류시인) 등이 더 가담했다.
석정은 4남3녀를 두었으며 큰 사위 최승범 전북대 명예교수가 시인으로서 그의 뜻을 잇고 있다.
자료협조 : 전북일보 『20C 전북50인』
경 력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 발표
▲1930년 중앙불교전문강원 입학
▲1931년 「시문학」에 ‘선물’발표
▲1939년 처녀시집 「촛불」발간
▲1947년 제2시집 「슬픈 목가」발간
▲1954년 전주고 교사
▲1955년 이후 전북대 등에서 강의
▲1956년 제3시집 「빙하」발간
▲1958년 전라북도 문화상 수상
▲1961-1972년 김제고·전주상고 교사
▲1967년 예총 전북지부장, 제4시집「산의 서곡」발간
▲1968년 한국문학상 수상
▲1970년 제5시집 「대바람 소리」출간
▲1973년 한국예술문학상 수상
전라북도 기념물 84호로 지정된 이 '신석정 고택'은 본디 측백나무 울타리에 벽오동, 은행나무, 목련, 시누대, 산수유, 철쭉, 등나무 등 여러 나무들이 자라는 정원이었다는데 지금은 사철나무를 비롯한 잡목 울타리에 뜰 안은 온통 코스모스 뿐 다른 나무는 없다. 코스모스도 좋지만 당시 시인이 심고 가꾸었던 나무들을 심으면 더 좋으리라. 안내판에는 시인이 1954년 전주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신석정 [辛夕汀, 1907.7.7~1974.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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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0주년을 맞아 1995년 한국문인협회에서 세운 '청구원(靑丘苑)' 표석. '원'자가 현판 글씨와 다르다. 역시 코스모스 속에 묻혀있다. ![]()
대숲에 서서 / 신석정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 안개에 벌레 소리 젖어 흐르고 벌레 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 대숲을 좋더라. 싱글어 좋더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더라. 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 기척 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꺼나.
![]() 가운데 방은 나무판자가 깔린 대청인데 뒷문 위에 <망향의 노래>가 김병기 글씨로 걸려있다. 마루에 밀짚모자 내 모자.
망향(망향)의 노래 / 신석정
한 이파리
![]() 마루에 걸린 '청구원(靑丘園)' 편액. 김병기 글씨
전아사 / 신석정
좌표 없는 대낮이 밤보다 어둔 속을 어디서 음악 같은 가녀린 소리 연이어 달려오는 인자한 얼굴들이 있어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 이해와 감상 화자는 '포옹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다. 얼룩진 역사 속에서 살아왔다는 뜻일 터이다. 통곡을 하기에는 젊음이 스스러워 그는 어느 지점에 멈춰 서 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는 그러나 좌표를 알 수 없어 대낮인데도 밤보다 어둡게 느껴진다. 그런 속에서 그는 음악과도 같고, 가을비가 스쳐가는 것과도 같고.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것과도 같은, 목마르게 기다리던 그리운 목소리를 듣고, 연이어 달려오는 '당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 목소리와 모습이 마치 '지혜'처럼 빛나며 좌표를 잃고 어둠 속을 헤매던 그를 다시 각성케 한다. 조국의 부름 같은 그 '거룩한 목소리'가 있는 한 그는 세상을 어둡게 하는 사탄의 가슴에 창을 겨누고 싸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하여 얼룩진 역사에 종언을 고하고 새벽을 맞이하겠다는 의지를 다짐한다. 순수시적 경향의 시인으로만 알아 왔던 신석정의 역사 의식을 가늠케 하는 시이다. 이 시인이 암담한 시절에 처해 목가적인 시만 읊기에는 너무도 뜨거운 가슴을 지니고 있었음을 우리는 광복 직후의 시 '꽃덤불'에서도 확인한다. 일제 시대가 '밤'의 어둠으로 인식되었다면, 신석정이 광복 후의 우리 시대를 '대낮'의 어둠으로 표현하고 있음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 초가삼간 오른쪽 방 문 위에 붓글씨로 걸린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깊은 삼림대(森林帶)를 끼고 돌면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어머니,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어머니,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 왼쪽 방 벽에 걸린 신석정 사진. 열린 창문 사이로 밖에서 찍었다.
슬픈 구도 / 신석정
나와
꽃 한 송이 피어 낼 지구도 없고
나와
밀리고 흐르는 게 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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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짐승 신석정
난(蘭)이와 나는
난(蘭)이와 나는
난(蘭)이와 내가
난(蘭)이와 나는 ![]()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1946년 《신문학》(제2호)에 발표되었으며, 같은 해에 간행된 《해방기념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광복 직후에 창작된 이 시는 조국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해방기념 축시이다. 일제강점기의 고통스러웠던 민족사를 바탕으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운 애국지사들의 투쟁과 우리 민족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이상세계의 건설을 노래하고 있다. 전5연 17행으로 이루어진 자유시로서 내재율을 지니고 있다. 시의 제재는 태양이고, 주제는 광복의 기쁨과 새로운 민족국가 수립의 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시대의 체험을 '어둠(밤)'과 '광명(태양)'이라는 대립적 이미지를 통해 비유적·상징적 심상으로 노래한, 참여적 성격을 띤 서정시이다. 상징법과 반복법이 주된 표현기법으로 사용되었다. 비판적이며 회상적인 어조로 조국의 희망적인 미래를 염원한 이 시는 일제강점기에서 풀려나기 전부터 광복 직후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제1연에서는 식민지 치하에서 은밀하게 진행된 독립투쟁을 개괄적으로 보여준다. '태양을 등진 곳'이라는 표현은 일제강점기의 우리민족의 암울한 삶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제2연은 식민지 치하의 어두운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조국산천을 떠돌며 조국 광복의 그날을 위해 분투하던 민족적 체험을 노래한다. 여기서 '헐어진 성터'는 국권상실의 비극을 상징하고, 국권회복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라는 시어를 반복함으로써 강조하고 있다. 제3연에서는 국권회복을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비롯된 죽음, 유랑, 변절, 전향이라는 쓰라린 상실의 고통을 반복된 문장을 통해 이야기한다. 제4연에서는 직접적인 서술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36년이 지나갔음을 이야기한다. 특히 한 행을 과감히 연으로 처리함으로써 선언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제5연에서는 비록 광복은 되었으나 혼란과 갈등이 격화되는 당시의 현실을 근심스럽게 바라보며,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장차 이루어야 할 희망적인 조국의 미래를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과 '꽃덤불'이라는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단순히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축시로서의 의미보다는 당시의 혼란한 시대적 상황을 바라보며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을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낙원회귀를 상징하는 '꽃덤불'의 이미지에 빗대 노래한 사회참여적인 작품이다. 당시 우익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시인이 당대의 정치적 현실을 직시하고 민족사적 과제에 부응하는 시를 창작한 점과 그러한 작품 속에 '시문학파' 시절에 보여주던 시적 긴장미와 서정성을 유지한 점은 높이 평가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