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로 첫걸음을 내디디다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마친 스물여섯 살에 마리아 몬테소리는 베를린에서 열리는 국제여성회의 국가 대표로 선발된다. 이때부터 정치적으로 유력한 인물들, 즉 미국의 대통령, 인도의 간디, 교황 등에게 환대 받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녀의 화려한 약력이 시작된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나 다양한 정치 정당의 대표들이 자신과 자신이 대변하는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여성 문제 외에도 착취당하는 노동자나 교육조건 개선, 아동노동 퇴치 등 여러 사회 진보 운동에 참여하여 강연을 펼쳤고 덕분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녀는 몇 년 동안 대학 부설 정신병동에서 수련의로 근무하면서, 참혹한 환경에 방치된 장애환자들을 위해 치료시설을 찾고, 더 쉽게 치료될 수 있는 환자들을 선별하는 일을 했다. 이 활동으로 그녀는 한 걸음 더 교육학적 소명에 다가설 수 있었고 어른 정신병자들과 함께 감옥과도 같은 보호 시설에 갇혀 지내는 어린이 정신장애아들을 보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전역을 지배하던 의사들의 시각과 달리, 몬테소리는 정신지체 문제가 주로 의학적이라기보다 더 주요하게는 교육적인 것이라는 영감을 얻었다. 이러한 장애아들의 잠자는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교육학적으로 장애아에게 적합한 길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장애아를 가르치며 성공을 거두는 한편, 갑작스럽게 치료교육 연구소를 퇴직하면서 그녀는 일반 교육학에 더 가까이 가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새로운 교육 방법을 동원해 얻은 초기 경험들을 어떻게 하면 모든 아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의학도인 자신이 충분히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이 전공을 바꿔 교육학과 학생으로 대학에 등록했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 자신의 작품을 시작했고, 로마 대학과 교사 양성기관에서 강의를 하다 결국 인류학과 교수가 되었다.
산 로렌초의 첫 번째 어린이집
마리아 몬테소리는 처음에 돌볼 사람이 없는 어린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대규모 임대주택 단지에 마련된 놀이 시설의 감독을 의뢰 받고 곧 이 놀이시설에서 의미심장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 시설에서 그녀가 활동한 기간은 2년에 불과하지만 이 시간은 교육학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자각하는 데 충분했다. 그녀가 처음 접한 놀이시설은 성급한 건설 계획이 경제 하강 국면을 맞아 중단되면서 범죄와 매춘이 성행하고, 위생 상태가 엉망인 도시가 되어버린 산 로렌초에 위치해 있었다. 마리아 몬테소리의 눈에 1907년 이 어린이집의 아이들은 ‘문명과 무관한 어린이 집단’처럼 보였다.
초기에 몬테소리는 가끔 그곳에 머물면서 감독하는 역할만 했으나 어느 날 아이들이 전통적인 장난감보다 그녀가 제시한 자료를 가지고 노는 것을 더 좋아할 뿐 아니라 엄청난 집중력으로 이 대상들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된 후, 아이들이 이제껏 생각했던 선입견과는 달리 내면에 자신의 발달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알맞은 환경에 두고 발달에 적합한 자료를 제공하면,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내적인 동기에 따라 움직인다는 교육학의 근원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몬테소리가 할 일은 적합한 환경을 갖춘 조건을 찾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발달에 필요한 자료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만들어내며, 교육과정에서 교사의 과제를 새롭게 규정할 필요가 생겼다. 이로써 환경과 자료와 교사의 삼위일체를 통해 새로운 교육학의 기초가 마련되었고, 이 교육학을 일반 대중들에게 선전하고 확산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