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방송에서는 '대조영'이라는 사극을 방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연개소문은 상당히 거칠고 우악스런 인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연개소문집안은 대대로 귀족가문이며, 연개소문역시 출중한 학식과 문무를 겸비한 호걸이며, 누구 보다도 고려정신인 실사구시 자주정신으로 무장한 장군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연개소문을 무학자의 무식하고 흉포한 인물로 그린것은 동북공정을 일삼는 중공의 화하족이 날조 조작한 것임을 밝혀드립니다. 아래글은 이러한 연개소문을 다시 조명하고 고당전쟁에 대한 글입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까페 삼태극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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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淵蓋蘇文)
혹자는 조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당(唐)의 군사력과 맞서 싸운 탁월한 전략가이자 구국의 영웅이라고 칭송하고, 혹자는 국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그리하여 고구려를 멸망하게 만든 원흉이라고 비난한다.
신화의 베일에 가려진 채 극단적 평가를 받아왔던 연개소문. 그는 과연 역적인가, 혁명아인가?
연개소문은 왜 혁명을 일으키고 신흥강국 당과 전쟁도 불사했을까? 당나라는 거듭된 패배에도 왜 세번씩이나 고구려를 침략했을까? 신라는 또 왜 당을 끌어들이면서까지 고구려를 파멸로 이끌었을까? 그리고 중국의 사서들은 연개소문의 진실을 어떻게 왜곡시켰을까?
연개소문의 결단과 혁명, 그리고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과의 운명적 대결, 동아시아 최대의 '문명의 충돌'이었던 여당전쟁(麗唐戰爭)의 진상을 통해 연개소문의 고독한 싸움을 만나보자.
● 대를 이른 팽창 야욕
당나라는 거란을 굴복시키고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고구려를 삼면에서 포위하게 되었다. 반면, 고구려는 동맹세력을 잃고 외교적 고립에 처하게 되었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켜 달라는 신라의 요구를 만족시켜주는 대가로 고구려 공격에 신라군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장차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보급 등의 문제가 한결 수월해질 수 있게 되었다.
당나라는 백제의 땅과 산물을 당장 차지하겠다는 목적보다는 고구려 멸망이라는 더 큰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자국의 안보에 위협 대상도 아닌 백제를 멸망시킨 것이었다. 당나라는 이제 고구려 정벌을 위한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661년 4월 당황(唐皇) 고종(高宗)은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해 고구려를 정복하고자 하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자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다. 특히 울주자사 이군구(李群構)는 다음과 같이 그의 친정(親征)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국력을 기울여 무너뜨릴 것까지 잇겠습니까? 만일 고구려가 이미 멸망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군사를 동원해서 지켜야 합니다. 적게 군대를 동원하면 위엄이 떨쳐지지 않고, 많이 군사를 동원하면 백성들이 불안해 할 것입니다. 저는 고구려를 원정함은 원정하지 않음만 같지 못하며, 멸망은 멸망치 않음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처럼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켜서 그 땅을 완전히 지배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에 쌓인 원한과 질투심은 단순히 그 땅을 배앗고, 안 빼앗고의 문제를 이미 떠나 있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반드시 멸망시키겠다는 계획하에 15년 넘게 준비를 해온 터였다. 고종은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해 대외팽창을 지속했다. 특히 658년에는 서역(西域)을 평정해 서돌궐, 구차, 고창 등지에 당 세력을 더 강하게 침투시켰다. 당나라가 아직까지 굴복시키지 못한 것은 고구려뿐이었다. 고종은 아버지 태종 이세민이 하지 못했던 고구려 멸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다.
고종이 스스로 출전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은 이번 원정이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하던 시기보다 여러모로 당나라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당은 거란족의 대부분을 복속시켜 당의 동조자로 만듦으로써 요서 지역에서 안전한 보급로를 확보했다. 이로 인해 겨울철에도 고구려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둘째, 고구려에 대한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다양한 공격루트를 가졌다. 고구려는 수, 당이 침략해왔던 중요한 공격루트인 요동 지역에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함으로써 저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를 거두어왔다. 하지만 당나라는 이제 고구려의 강력한 요동방어망의 저지를 받지 않고 공격할 수 있는 새로운 공격루트를 찾았다. 그것은 황해를 건너 직접 고구려의 수도 장안성을 공격하는 길이었다.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숫자의 함선이 필요했지만, 오랜 준비의 결과 충분한 함선이 준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바다를 건너 백제 정벌이라는 실전 경험까지 축적해놓은 상태였다.
셋째, 고구려의 국력이 이전에 비해 약화되었다. 고구려가 비록 당군을 거듭 물리치기는 했지만, 전쟁터의 대부분이 요동 일대였기 때문에 생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또 대외무역도 위축되고, 새로운 포로도 많이 얻지 못해 피폐된 농경지를 완전히 복구하지도 못했다. 전쟁은 경제력의 싸움이다. 경제력 약화는 곧 군사력의 약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넷째 당나라에 도전하는 세력이 거의 사라졌다. 설연타를 멸망시키고, 서역 정벌까지 성공적으로 마쳤기 때문에 당나라 주변에는 고구려를 제외하고는 위협적인 세력이 없었다. 또한 내부의 혼란도 건국 초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은 국력을 기울여 고구려 공격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다섯째 백제 멸망으로 고구려를 도울 수 있는 우방국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도리어 백제 부흥을 위해 군대를 파견해여 했으므로 고구려에게 부담이 되었을 뿐이다. 반면, 당은 더 강력해진 신라를 병참기지 및 원군으로 더 많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섯째, 체제 정비로 인해 국력이 더욱 충실해졌다. 고종 시기에 당나라는 이세민 시기보다 호구로 조사된 인구가 늘어났고, 관중 지역만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다양하게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함선은 검남 지방에서 만들어졌고, 해군은 영남 지방에서 충원되었으며, 육군은 관중 지방의 부병들과 돌궐족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변화에도 이군구 등은 고구려 원정에서 당나라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다. 고종은 신하들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만류에 따라 직접 출정은 하지 않았지만,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명령은 거두지 않았다.
고구려 사람들도 백제 멸망, 간헐적인 당군의 침략, 거란족을 둘러싼 전쟁 등을 통해 당나라가 곧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해오리라는 것을 에상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당의 침략에 대한 대비를 소흘히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적대적인 신라에 대해서 적극적인 공격을 하지 못했고, 백제가 멸망당함에 이르러서도 대군을 출동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고구려가 충분히 전쟁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당나라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전쟁 초반부터 수세에 몰렸다. 그것은 당나라의 치밀한 준비와 엄청난 대군, 그리고 무엇보다 예상을 뒤엎은 그들의 진격로 때문이었다.
● 해로로 진격해온 당의 주력 부대
660년 12월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한 원정군 사령관을 발표했는데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 좌무위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 좌효위대장군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平壤道) 행군대총관, 정주자사 정명진(程明眞)을 루방도총관으로 각각 임명했다.
이때 구성된 원정군은 곧장 출발하지 않았다. 당은 661년 하남, 하북, 회남의 67개 주에서 군대를 모집해 4만 4천여명을 추가로 평양도와 루방도 부대로 가게 했다. 뿐만 아니라 홍로경 직위에 있던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으로 삼아서 회골 등 여러 이민족의 군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가게 했다.
부여도행군이 추가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당군이 고구려의 부여성을 공격하겠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부여성은 주변에 40여성을 거느린 큰 성으로 요동방어망을 돕는 후방 기지이자, 고구려 북부 지역의 중심지였다. 당나라가 이곳을 노린다는 것은 고구려와 북방의 여러 종족과의 유대 관계를 단절시키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군대를 편성해놓고 무엇인가 부족했던지 당나라는 661년 4월에 다시금 고구려 원정군의 편성을 바꾼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임아상(林娥相)을 패강도행군총관,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 소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 소사업을 부여도행군총관, 정명진을 루방도행군총관, 방효태(龐孝泰)를 옥저도행군총관(沃沮道行軍摠管)으로 각각 임명해 35개군을 거느리고서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고 되어 있다.
전년도에 비해 유백영이 빠지고 임아상이 새로 임명되었고, 소정방과 계필하력이 서로 임무를 교대했다. 또한 방효태가 옥저도행군통관으로 추가로 임명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년도에 대총관이던 계필하력, 소정방 등을 행군총관으로 낮춘 것은 부대의 규모가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그렇게 보기에는 의문이 따른다. 도리어 장수의 숫자가 4명, 5명, 6명으로 계속 늘어난 것을 통해 볼 때 원정군의 규모가 더 커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구당서(舊唐書)에는 661년 5월 고구려 원정군의 편성에 대해 좌효위대장군 양국공 계필하력 요동도행군대총관, 좌무위대장군 형국공 소정방 평양도행군대총관, 병부상서 동중서문하삼품 낙안현공 임아상 패강도대총관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이들이 모두 대총관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원정군에서 주목할 사실은 백제 원정군에 참전했던 다수의 장수들이 보인다는 점이다. 백제 원정군 사령관 소정방을 비롯해서 방효태, 유백영, 조계숙 등이 그들이다. 당나라가 7월 18일 백제를 멸망시키고, 9월 3일 곧바로 대군을 철수시킨 것은 처음부터 백제 멸망에 군대를 투입하기는 하되, 백제군 진압은 신라군에게 맡기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 원정군에 참여했던 자들은 결국 고구려 원정을 위해 사전 연습을 치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정방은 660년 12월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었다가, 661년에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변경 임명된 것에 주목해보면, 그가 해로를 이용해 백제를 공격했던 경험을 살려 다시금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공략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6개의 행군 중에 임아상의 패강도행군, 방효태의 옥저도행군도 해로를 통해 고구려 장안성을 공격하는 부대다. 소정방의 평양도행군가 함께 이들은 고구려의 수도를 향해 곧장 진격하는 주력군의 임무를 맡았다.
이것은 제1차 여당전쟁(麗唐戰爭)과 크게 다른 점이다. 이번 원정군에서 육군은 소사업의 부여도행군과 정명진의 루방도행군이다. 그런데 이들은 별다른 활동이 없다. 또한 육군이라고 추정되는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은 그 진로로 보았을 때 요동방어망을 공략하기 위한 부대가 아니었다. 도리어 압록강 지역을 공략해 고구려군 주력이 있는 요동 지역과 평양 지역을 중간에서 차단하는 임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요동도행군의 진로는 해로를 통해 압록강 방면으로 곧장 진격해 요동방어망을 통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제2차 여당전쟁 관련 기록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군과 당군 사이에 전투를 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진로 자체가 크게 변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군의 작전을 요약하면 요동의 고구려 성들은 적극 공력하기보다는 루방도행군과 부여도행군이 변죽만 울리면서 고구려 대군을 붙잡아두고, 요동의 고구려 대군이 평양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은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이 중간에서 차단하고, 나머지 패강도, 옥저도, 평양도 3개 행군이 고구려 장안성을 집중 공격하는 작전을 계획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나라에서 이러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엄청난 숫자의 함선을 건조해 수십만 대군을 바다를 건너 이동시킬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당군의 전체 규모는 6개 행군 35개군이었다. 이때 1군의 규모를 1만~1만 2천 5백명 정도로 보면 약 34만~44만명이 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오기(誤記)로 보아기는 하지만 35만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주력인 패강도행군, 평양도행군, 옥저도행군이 해로를 통해 왔다면 20만명 이상이 곧장 바다를 통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계필하력의 요동도행군도 해로로 욌다고 본다면 30만에 가까운 병력이 바다를 통해 고구려를 공격했다고 하겠다. 결국, 이때 동원된 당나라의 함선은 백제를 공격할 때보다 약 2배 정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서적; 김용만 著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바다출판사 版 (2003년), 김용만 著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版 (1999년), 김용만 著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版 (2001년), 강준식 著 '연개소문을 생각한다' 아름다운책 版 (2004년), 이덕일 著 '고구려 7백년의 수수께끼' 대산출판사 版 (2000년), 이덕일 著 '오국사기' 김영사 版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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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korea9000.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