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리 농악`의 기능보유자이자 대전시 무형문화재 1호인 송순갑(宋淳甲)옹 2001년12월10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사물장단·노래·춤의 종합예술/풍물생활 77년의 송옹… 8순에도 쇠가락잡으면 신들린듯 (작성:1995년)
○무형문화재로 지정 농악은 꽹과리와 징, 장구와 북으로 장단을 치며 날나리(태평소)를 불고 상모를 돌리며 농부가의 구성진 가락에 맞춰 신명난 춤사위를 펼치는 종합예술이다. 민속극·민속무용·민속놀이의 배경음악으로 빼어놓을 수 없는 다정다감한 우리의 가락이다. 겨레의 숨결이며 한국인의 흥과 멋이 어우러진 민족의 선율로 생활속에 깊이 뿌리박고 전해내려왔다. 해거름에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것도 농악의 안내였고 길가던 나그네가 옷을 벗어젖히고 논에 뛰어들어 모를 심을 수 있는 원동력도 바로 농악의 고동과 맥박이었다. 연주·노래·춤·놀이·극 등이 융합된 농악을 정병호교수(중앙대)는 「오케스트라형식의 연주 무용」이라고 성격짓고 있다. 『깽마갱깽 깽마갱깽/깽매깽마갱 깽마갱깽』 웃다리농악의 상쇠 송순갑옹(83). 풍물생활 77년의 그의 쇠가락은 신기에 가까워 충청도에선 최고수로 꼽히고 있다.
호남 좌도농악에서 가장 빼어나다는 진안의 김봉렬옹(80)과 천하 제일을 다툰다고 웃다리농악대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대전 웃다리농악은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송옹의 연주기량과 긴 세월동안 민중의 기호와 사회변동에 발맞추어 자신 역시 끊임없이 변신해가는 중에 닦여진 세련된 판제로 꼽히고있다. 웃다리농악의 본거지인 대전시 중구 대흥2동 326의 44 중앙농악회를 찾은 주초의 날씨는 봄기운이 완연했으나 바람이 제법 살을 파고들었다. 농악회회장인 송옹은 왜소한 체구에 여느 노인과 다를 바없는 인상이었으며 유난히 힘이 없어 보였다. 몇분간 잡이들과 소리를 맞춰보고는 꽃술이 달린 상쇠의 꽹과리채를 들어 잡이들을 끌고 나간다. 바로뒤에 부쇠 이규헌(81) 박영길(70) 김창덕(77) 유창렬(40) 안도경(26)씨가 따르고 있다. 이규헌옹 역시 쇠가락이 탁월하고 비나리(고삿소리)가 일품이다. 이어 성운식씨(68)와 농악회 총무인 장택수씨(58)등 징수가 따르고 황흥선(73) 조성호(61) 성리경(65) 성보경(58) 장병천(26·장택수씨의 차남) 조세영 (25·조성호씨의 장남)씨 등 장고수들이 뒤를 받치고 있다. 북수로는 전병학(73) 강정렬(70) 김팔남(70), 소구잡이는 박해석(77) 송덕길(35) 박헌영(30) 김용준(22) 김지춘(26) 복성수(29)한기복(26)씨가, 호적수에는 정필환씨(72) 등이 흥을 돋우고 있다. 덕길씨는 송옹의 외아들로 어머니 김금련씨(72)의 반대로 농악을 하지 않다가 최근에서야 배우기 시작했다. 조동호(72) 김병수(72) 김중렬(70)씨 등 기수들은 용당기와 농기 영기(령기)등에 자리를 잡은지 오래다. 소리가 힘을 받기 시작한 탓일까. 송옹의 쇠가락에 군마치가 들어가면서 발끝이 가뿐해지고 있다. 조였다가는 풀고, 주었다 받으며, 밀고 당기고, 뭉치고 흩어지고는 얽히고 설킴속에서 속도와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고 빨라지기도 한다. 『지난 87년에는 대장수술을 받았어요. 그땐 돌아가시는줄 알고 수의까지 모두 준비했었습니다』
○칠채오방감기 절묘 정준용 전회장(69)은 『지난해 7월엔 송옹이 서대전광장에서 풍물을 마치고 기력이 쇠진해 쓰러졌다가 소생했다』면서 『힘이 없다가도 쇠만 잡으면 신이들린다』고 말했다. 판굿은 인사굿 돌림법구 당산벌림 칠채오방진 무동쾌자놀이 소구절굿대놀이 가새치기 사통배기 좌우치기 쩍쩍이굿 풍년굿 고사리꺾기 도독굿 소구판굿놀이 무동꽃받기 개인놀이 끝인사 등 17가지로 짜여 있다. 웃다리농악이 자랑하는 오방진법은 별자리 28숙을 뜻해 28채라고도 하는데 반드시 칠채를 치며 상쇠를 따라 동서남북 중앙으로 멍석말이를 계속한다. 중앙의 토에서 시작해 서방 금으로, 북방 수와 동방 목, 그리고 남방 화로 해서 다시 중앙 토에 와서 오행상생법에 따라 생문방을 찾아서 몰아 쌓게 되어있다. 이때 칠채는 늦은 칠채에서 전동작이 2배이상 빨라지는 잦은 칠채로, 다시 늦은 칠채로 절묘한 변화를 추구하고있다. 충청도의 웃다리가락이 잔가락과 음양(강약)으로 무한한 기술을 보일 수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이어 적벽에서 숨진 1백만 원혼을 달래준다는 영산다드라기의 소쩍새울음, 아낙들의 빨래다듬질소리 등이 가락으로 묘사되며 당산벌림·고사리꺾기·절구대놀이 ·도독굿·사통배기·가새치기·전후좌우치기등 몸동작이나 형태 등이 소리로 이어진다. 송옹은 『몇년전부터 기력이 급격히 쇠진해 살판·자반뒤지기·앉은뱅이모말리기등 땅재주를 부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땅재주는 본래 농악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남사당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송옹 역시 남사당 뜬쇠였다. 그의 발자취는 그대로가 민중예술사의 한 토막으로 평가받고 있다. 1912년 부여군 은산면 신대리에서 3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4살때 부모를 여의고 7살때부터 농악판에 뛰어들어 이우문솟대패에서 땅재주를, 17세에는 김승서패에서 박첨지를 배웠다. 꽃나부로 시작해 버꾸·장구잡이를 거쳐 8·15해방뒤 세계사 걸립을 하면서 상쇠를 받았다. 「송버꾸」(법고) 「송장구」등의 별명도 당시에 얻은 것이다.
그의 예능적 소질은 웃다리농악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받기도 했다.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그는 웃다리농악의 대들보이다. 지난해 10월 전주체육관에서 열린 8도대항 전국농악대회에서는 송옹이 지켜보는 가운데 쇠잡이중 가장 젊은 안도경씨가 상쇠를 맡았으나 우승을 할 수 있었다. 쇠를 치지않고 있어도 다른 농악대들이 주눅이 든다는 것이다. 중앙농악회는 8년간 전주대사습에 참가, 2차례나 장원을 차지했으나 86년엔 예선탈락의 쓰라린 경험도 갖고 있다. 사람이 부족한 데다 잦은 교체로 연습을 제대로 못한 탓으로 이는 천하의 송옹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올해도 버꾸(소구)잡이가 부족한 데다 여름엔 대전서 전국농악대회가 있고 가을에는 춘천의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는 대전시 부사동 칠성놀이의 농악대로 참가해야 한다. 『회비를 걷어 농악회를 운영해야 하는 등 경제적인 문제도 크지만 회원들이 노인과 젊디 젊은 층이고 중간패가 없어 큰일이에요』
○일반인에 농악전수 그래도 요즘엔 토요일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농악을 전수할 수 있는게 보람이다. 송옹에게 쇠와 장구를 배운 제자만도 1천명은 족히 될 것이란다. 사물놀이의 김덕수(42) 박은하(34)씨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중앙농악회가 장병천·조세영·안도경·김용준 등 젊은 회원으로 창단한 소리마당도 요즘 맹렬한공부와 활동으로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예전엔 논과 밭, 집 등 모두가 놀이마당이었는데…』 두레굿이 펼쳐지던 생산의 현장이나 정초에 벌이던 지신밟기, 걸립굿을 치던 집집의 마당이 농악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길에서 놀면 길놀이, 마당에서 놀면 마당놀이였는데 축원적 농악에서 시작해 노작농악·걸립농악·연희농악으로 발전하면서 점차 현장을 떠나게되고 관중을 의식하게 되면서 박제화하고있다. 상쇠일이 된듯 송옹이 『끙』하는 소리와 함께 왼손으로 꽹과리끈을 얽어 쥐고 채를 들어 가락을 다시 다스려나갔다. 잡이들의 사물과 날나리소리가 흥을 돋우며 감정을 요동치게 한다. 19세기이후 동학혁명과 일제침략기, 한국전쟁과 근대화 등 수난기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명맥을 이어온 농악. 농촌의 황폐화와 UR협상타결 등으로 또다시 격랑에 내몰린 농민의 소리, 농악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고 어떤 소리를 낼 것인가. <대전=이 용기자>
◎충청 이북지역서 즐긴 놀이/「웃다리 농악」 웃다리농악은 경기·충청 등 중부이북지역에서 성행했고 아랫다리농악은 전라·경상 등 남부지역에서 성행했다. 웃다리농악은 상쇠의 기능이 우세하고 아랫다리농악에선 장구와 소구의 기능이 두드러진다. 대전 웃다리농악(사진)은 1960년 장구·꽹과리에 일가를 이룬 송순갑옹 등 충북 중원의 세계사 걸립패들이 주축이돼 대전에 중앙농악회를 창립하면서 본격적으로 보존 전승되고 있다. 회원들의 계와 당국의 지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대전웃다리농악의 편성은 기 9명, 호적 10명, 꽹과리 4명, 징 2명, 장구 6명, 북 4명, 버꾸 8명, 무동 8명, 잡색 3명 등 54명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모양상의 특징은 농악대들이 머리에 고깔을 쓰지않고 전립을 착용하고 있다. 음악적으로는 판제가 다양하고 특이하며, 경쾌하다. 다른지역 농악에 비해 장단이 세련미가 있고 칠채가락을 쓰며 무동타기가 발달되어 있다. 이러한 특색은 황해도의 일부지역 농악과도 상통한다. 잡색은 양반·중·포수 등이 등장하나 기녀는 들어가지 않는다. 대전의 직할시 승격과 함께 칠채 오방감기가락으로 시 무형문화재 제 1호로 지정되었고 송옹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사물놀이의 김덕수 ◎신기의 장단 세계를 매료/격렬한 휘몰이에 한국의 신명/5살부터 남사당패 따라다녀… 작년 「한울림」 새출범/농악·무속가락 정리 세계의 소리로… 현대음악과 접목등 실험도 94년은 국악의 해. 수천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국악이 양악에 밀려 뒷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는 것은 문화민족을 자랑해온 우리에게는 분명 부끄러운 부분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산천 곳곳에는 끈질긴 예맥을 탕탕히 이어가고 있는 재인들이 버티고 있고 마을사람 모두가 예술가인 예향도 적지않다. 때로는 한맺힌 가락으로, 때로는 멋과 해학의 예술로 민족의 희로애락을 담아온 우리 소리. 그 자취를 찾아보는 「소리여행」을 시리즈로 엮는다.【
편집자주】 김덕수(42). 그는 이전의 모든 장구 명인들이 그랬듯 왼손잡이이다. 밥먹을때고 전화기 단추를 누를때고 한결같이 오른손을 쓰지만 장구채만은 왼손으로 잡는다. 다섯살때부터 남사당패의 당당한 일원이 된 그가 어른들과 쌍장구를 치면서 든 버릇이다. 그의 신묘한 왼손에 장구채가 들리면 그것은 더이상 나무막대기가 아니다. 『하나아 두울』.호흡을 고르며 장구를 구스르다가 북채의 움직임이 눈에 잡히지 않을만큼 휘몰아칠 즈음 그는 마침내 장구와 하나가 된다. 장구가 김덕수인지, 김덕수가 장구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땀을 사방에 흩뿌리며 장구채를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릴때 그의 얼굴에는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이 나타난다. 그러다가 옆자리의 동료들을 바라보며 벙긋이 웃는다. 휘모리니 굿거리 보다는 차라리 산들바람, 보슬비, 소나기, 천둥, 번개, 태풍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차라리 쉬운 신기에 가까운 연주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던 관객들은 김덕수의 벙끗 웃음에 비로소 긴장을 풀고 어깨춤을 들썩거리게 마련이다. 지난해 12월18일 연세대학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가진 송년연주회에서도 그랬다. 78년 서울 원서동 공간사랑에서 첫 두드림을 시작한 이래 15년간 사물놀이패로 활동해온 그에게 93년은 일대 변신을 꾀한 뜻깊은 한해였다. 그는 각 분야의 예인, 공연 기획자등과 함께 사물놀이 한울림을 발족시켰고 20명 내외의 규모로 사물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엑스포가 열린 한밭벌에서 각나라의 북 명인들과 함께 「세계 북잔치」를 열었고 군인, 국민학생, 고등학생들 1천여명이 동원된 「천명 사물놀이」를 펼쳤다. 그런가하면 11월에는 뉴욕에 첫 해외지부를 설립했다. 해외에 사물놀이 전용무대를 갖고싶다는 꿈이 실현될 날도 멀지않은 셈이다. 12월18일의 공연은 그 모든 큼직한 공연과 사업들을 모두 안으로 끌어들여 정리하고 한울림 예술단의 1년간의 성장을 보여주는 조촐한 자리였다. 『혼인대사 주당살, 마루대청 성주님살, 건넌방에는 근옹살, 내외지간에 공방살… 일체액살 휘몰아가다가 금일 정성 대를 받쳐 원강천리 소멸하니 만사가 대길하고 백사가 여일하고 마음과 뜻 잡순대로 소원성취 발원이다』 비나리로 시작된 이날 공연에서 16명의 설장구가락, 16명 사물오케스트라가 첫 선을 보였다. 한 할머니의 『거참 직사박사하게 두들겨 버리네. 참말로 재주있는 사람들이여』라는 걸쭉한 감탄이 한울림의 우렁찬 북소리에 잦아들었다.
예술가 김덕수의 첫번째 모습은 조선말 최고의 종합예술집단인 남사당패의 천재소년,그것이다. 법고잡이였던 부친 김문학씨(78년 작고)를 따라 처음 섰던 무대가 조치원의 란장. 당시 5세였던 그는 양도일씨등 당대의 뜬쇠(각 장르의 1인자)들에게 상모돌리기, 법고, 장구, 쇠, 춤, 버나(접시 돌리기), 덜미(꼭두각시), 어름(줄타기)을 다 배웠다. 그는 태어나길 예인으로 난 마지막 세대라는 자부심이 짱짱하다. 『이맘때쯤이면 너무 추워서 울면서 업혀다녔어요. 해뜨기전에 우리끼리의 의식을 치르고 나면 밤에 하는 밤굿까지 모두가 공연이고 그게다 공부였지요. 예술을 했다기 보다는 살아남기위한 끝없는 투쟁이었다는 편이 옳아요. 먹고 살기위해서는 둘째여서는 안됐지요』 7살때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탄 어린 대가는 12살때 동경올림픽에 참가한 이래 줄곧 해외공연을 다녔다. 그렇게 견문을 넓히면서 어르신들 하던 것만 되풀이해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김용배,최종실,이광수등을 규합했다. 공간사랑에서 실험적으로 선보인 웃다리 농악이 호평을 받자 청년 넷은 합숙까지 하며 삼도농악, 무속가락을 현장 연구,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사물놀이이다. 우리가 아는 「김덕수패」는 김용배씨가 뜻밖에 자살하고 최종실씨가 대학진학을 위해 떠났으며 지난해 이광수씨마저 민족음악원을 창립, 떨어져 나감으로써 모두 흩어져버렸다. 김용배씨의 빈자리를 메웠던 강민석씨만이 그의 옆에 남아있다. 『우리들은 보통 친구 사이가 아니었어요. 코흘리개 시절부터 사물을 함께 해왔으니까요. 저가 나였고 내가 저였는데 세월이 흐르니 헤어지게도 되더군요.아프지 않은건 아니예요. 그렇지만 농사꾼이 아프다고해서 농사 안지을수도 없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네사람이 연주해냈던 절묘한 소리를 잊지못한다. 그들은 현해탄 선상, 뮌헨의 무기창고, 시부야 거리, 뉴욕의 센트럴파크,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 등 어디에서나 판을 벌였고 외국인들을 매료시켰다. 가장 원초적 악기인 북, 꽹과리등을 단지 「두드릴뿐」인데 보고 듣는 사람들은 재즈보다, 록보다 더 현대적이고 감동적이라고 감탄한다. 미국의 대아시아문화창구인 아시아 소사이어티는 한 단체에 한번만 초청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김덕수패」만은 다섯번 불러들였다. 그 단체의 총감독인 비아터 고든은 『사물놀이는 하나의 사건이다. 음악의 심장은 리듬인데 이들은 메트로놈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리듬을 갖고있다』고 말했다. 김덕수씨는 해외에서 사물놀이 캠프를 열때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한국이 어디있는지부터 말해준다. 그다음에 우리말로 하나, 둘, 셋, 넷을 외우게 하고 우리식으로 숨쉬기를 가르친다. 그는 뉴욕타임스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이 음악을 지켜나갈 수 있는것은 우리 조상과 신령 덕택』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으며 지난해 첫회를 벌인 북잔치는 영어로도 역시 「북 페스티벌」이라고 썼다. 그 결과가 세계 곳곳에 포진한 사물노리안(Samulnorian)들이다. 악기로만 계산해도 매년 2백세트 이상의 사물을 내보내 현재 우리 북, 꽹과리, 장구, 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1만여명에 이른다. 올해 우리나라 전체의 화두가 「국제화」인데 이토록 흐뭇한 국제화를 이룬 경우는 태권도 말고는 일찍이 없었다. 서울 대현동에 자리잡은 사물놀이 공연장겸 연습장 「난장」을 찾았을때 그는 젊은 놀이패 20여명과 함께 앉은반을 연습중이었다. 『휘몰이가 더 힘들것같지. 하지만 시냇물 흘러가듯 잦아지는 부분이 더 중요해. 풍요롭게,살풀이 추듯이』. 김덕수씨는 예의 쉰듯한 목청으로 단원들을 독려했다. 연습이 끝난후 그는 기자에게 『한울림 창단공연때보다 어떻습니까. 훨씬 낫지요』하고 물었다. 특별히 대답을 원하는것 같지는 않았다. 땀을 흘리고있는 단원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평균 25세입니다. 2천년대의 사물놀이는 저사람들이 끌어나가겠지요. 아마 잘 해낼겁니다』하고 말했다. 그는 당대의 영광에 만족하지않고 미래를 내다보는 뜬쇠이다.〈한혜진기자〉 ◎「사물놀이」란/북·꽹과리·장구·징 사물의 공연 사물놀이란 말은 김덕수패와 함께 태어난 신조어이다. 북, 꽹과리, 장구, 징등 네가지 타악기를 일컫는 「사물」과 농악대나 걸립패의 공연을 가리키는 「놀이」를 결합시킨 계기를 만든것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김용배(84년 작고). 남사당패의 마지막 후손으로 각각 타악기의 귀재로 손꼽히던 젊은이 4명이 78 년2월 서울 원서동의 공간사랑에서 농악가락을 선보였다. 당시 이들의 진지함과 예술성에 매료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이 두번째 공연을 갖자 민속학자 심우성씨가 사물놀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동안 사물놀이라 함은 이들 4명의 걸출한 놀이패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고 김용배씨가 국립국악원에서 국악원 사물놀이를 만든것을 시작으로 부산의 메구놀이패, 국립무용단 풍물놀이, 시립무용단 앉은반등이 생기면서 「소규모의 농악 또는 걸립패 형태의 전통공연양식」이란 뜻을 가진 보통명사로 바뀌었다. 그때문에 애초의 사물놀이는 다른 패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김덕수패」라는 머리를 덧씌우게됐다. 지금은 풍물패 사물놀이, 뜬쇠 사물놀이, 진쇠 사물놀이등 전국에 걸쳐 50여개 직업팀이 생겨났고 각 대학이나 직장의 농악패까지 합치면 그 숫자를 이루 밝히기 어려울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