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공부를 해야 하는데 정작 해야 할 공부보다는 연필 깎고, 노트 정리, 책상 정리까지 싹 하고 나면 그 다음엔 졸음이 엄청 쏟아져 그냥 자야 했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도 그랬다. 지난겨울부터 ‘원고를 써야 하는데, 써야 하는데’ 속으로 징징대며, 집에서도 쉬지 못하고 쓸데없이 서랍정리만 해댔다. 나는 메모를 많이 한다. 특별히 무엇을 계획하거나 작정을 하고 하는 것은 아니다. 기록하는 것이 오래된 버릇이다. 기록 안 하면 두드러기가 날 것 같아서…. ‘시골밥상’도 녹화 첫날부터 기록을 해왔다. 물론, ‘언젠가는 이 모든 기록을 책으로 담아 낼 날이 오겠지’ 이렇게 앞을 내다보고 기록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렇게 깜찍하게 준비하는 성격은 못 된다. 2008년 늦가을부터 햇수로 3년, 참 많은 어르신들을 찾아뵈었다. 그 어른신들과의 만남을 * 엄청 밝은 웃음! * 유쾌. 호탕하신 성격, 여장부!! * 세상에… 행주가 눈처럼 희어지도록 삶아놓으셨네. * 참기름을 좀 더 넣으려면 어머니는 작은 한숨을 쉬신다. * 여태 다닌 곳 중에서 유일하게 수저를 삶아놓으신 어머니. 등 나만이 알 수 있는 간단한 인상착의나 느낌 정도로 메모해놓았다. 그러니 언감생심 책 출간을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기록은 기록이고 흘러가는 건 흘려보내는 것일 뿐이라는 내 생각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시골밥상 녹화 가는 길에 기차역, 공항,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나는 많은 분들이 “오늘은 뭔 밥상 차리러 가요?” 하고 궁금해하셨다. 또 어떤 분들은 “지난 주말엔 민들레겉절이 만들어 먹는 것 보는데 침이 골딱 넘어가더라고요. 친정엄니 생각나서 혼났어요.” 하거나 “정말 그렇게 진짜 맛있어요?” 하며 우리를 반겨 주시고 관심을 보여 주셨다. 그런 분들에게 감사하는 내 마음을 표시하고 싶었다.
내가 처음 ‘시골밥상’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TV 속 리포터들의 하나같이 높은 목소리 톤과 호들갑, 그리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대꾸하는 것 등이 식상해서였다. 그런 프로그램들을 보며 혼자 속으로 ‘에구, 저런 건 좀 나이 든 이들이 제대로 알고 주고받는 얘기를 들려줘야지 원. 왜 나이 든 리포터는 없는 거야?” 발상의 전환. 역발상. 나이 든 이가 밖으로 다니며 방방 뛰고 젊은이가 안의 스튜디오에서 차분히 보고 배우면서 받아주면 오히려 괜찮을 듯싶은 생각이 들었다. 인연이 있는 <잘 먹고 잘 사는 법> 식구들에게 별 뜻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 <시골밥상>의 시작이 된 셈이다.
이 책에는 일반적인 요리책에 등장하는 현대적인 계량법은 없다. 그렇게 하면 시골밥상의 맛이 안 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레서피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무엇이든 무조건 그 댁 어머님 식을 따라 하면서 배웠다. 눈대중과 맛보기. “싱거운 건 고쳐도 짠 건 못 고쳐!” 하시면 “예, 예, 어머니.” 하면서 조금씩 간을 더했다. 그래도 몇 십 년-거의 반 백 년은 다 넘으셨다- 경력의 고수들이시라 “고마안!” 하시면 양념이며 간이 그렇게 맞아떨어질 수가 없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가슴 찡하고 애틋한 자식 사랑은 기본이라서 어머님들은 늘 우리를 예뻐해주셨다. “이렇게 와주시니 사람 사는 집 같아 좋네.” “재미졌어!!” “훈기가 돌아.” “좋아, 좋아. 언제 또 올껴?” 고즈넉한 일상을 깨뜨리는 우리들의 어수선함을 활기차다고, 마음을 열고 받아주셨다. 척박한 살림살이. 자식들 한입이라도 속 든든하게 거두어 먹이려 애쓰신 그 사랑이 있어 우리가 이렇게 어머니, 아버지 키보다 더 크게 자랐다.
갈수록 마구잡이로 들어오는 외래음식의 홍수 속에서 어머니들이 마음으로 차려주시는 소박한 소반 위의 밥과 반찬. 너무나도 그리운 그 밥상. 그러나 아무도 더 이상 차려주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한 그리움. 이 책을 준비하며 2008년 첫날부터 녹화해놓은 DVD를 보며 부족한 기록을 보강했다. 그러면서 ‘시골밥상’ 이 썩 좋은 프로그램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시골밥상은 서양식 입맛은 안 따라간다. 못 따라간다. 이 조리법과 입맛은 우리 핏속에 흐르는 맛이다. 그걸 잊거나 남에게 내어주면 안 된다. 또는 서양 사람들 먹기 좋으라고 먹기 쉽게 그들의 양념 맛을 따라가서도 안 된다. 장사는 그렇게 해야 살아남을지 몰라도 집에서 차려먹는 밥상은 그들 식을 따라가면 재미없다. 어린 날 우리가 외갓집에서 얻어먹던 그 음식의 맛을, 지금 어린 사람들이 그대로 배우고, 그대로 맛을 낼 줄 알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야 자손대대로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시골밥상을 복습한다. 그런데 복습할 때면 속이 상한다. 시골 어머님 댁에서 멋던 그 맛이 안 나기 때문이다. 나는 시장에 가서 일단 싱싱해 보이는 채소를 돈을 주고 사지만, 우리가 만난 어떤 어머니도 돈 주고 채소를 사시진 않으셨다. 집 앞, 뒤, 옆에다 텃밭을 일구셨고 웬만한 건 마당 한켠에서 조달하신다. 양념은 3~5년 묵은 간수 뺀 굵은소금, 어머니께서 담그신 간장, 된장, 고추장, 직접 농사지어서 짠 들기름, 참기름, 들깨부숭이, 참깨부숭이, 직접 농사지으신 파, 마늘…. 음식재료라야 그것뿐이다. 단순하다. 봄에 어린순 나올 때 산에 가서 일일이 다 따서 삶아 말려서 묵혀두고, 장아찌로 담고, 부각을 만들고…. 그 지혜롭고도 맵디매운 살림살이며 주름진 웃음. 그리움, 쓸쓸함 등이 전해져오는 어르신들과의 만남은 여운이 길다.
겨울부터 시작한 작업이 이렇듯 해를 넘겨 초록 잎이 무성할 때 끝을 맺게 됐다. 우리 ‘프레’ 식구들, 장소 물색하느라 애쓰는 식구들, 정말 고맙다. 우린 식당을 상대로 하는 게 아니라서 일일이 발품이 들어간다. <시골밥상>엔 대본도 없다. 그냥 실제상황으로 끌고 나간다. 반찬이 실패했으면 실패한 걸로 시청자들에게 여쭙고 어머님이 노인회관 가져가려고 따로 만드신 반찬으로 밥 먹은 적도 있다. 보기 좋으라고 상황을 꾸미는 법은 결코 없다. 많은 분들이 나를 만나면 물어오신다, “진짜로 맛있어요?” “예, 진짜 맛나요. 우린 거짓말 못 해요.” 이것이 내 대답이다.
●출판사 제공●
데뷔 40주년을 맞는 한국 대표 국민가수. 양희은. 1971년 ‘아침이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새노야’ 등이 담겨 있는 1집 앨범 <아침이슬>으로 데뷔한 그녀는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표되는 1970년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다. 이후 1993년부터 콘서트를 통해 대중과 만나기 시작한 그녀는 담담하면서도 울림이 깊은 노래로 진한 감동과 잔잔한 기쁨을 전해주고 있다.
현재 SBS-TV에서 매주 토요일 아침에 방송되는 ‘잘 먹고 잘 사는 법’에서 <양희은의 시골밥상>을 진행하고 있는 그녀는 실제, 요리와 살림에 일가견이 있는 24년차 주부이기도 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항상 종종거리면서도 직접 장을 보고 밥하고 요리해 가족 밥상을 차린다. 결혼 후 단 한 번도 주방을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 집 밥상은 내가 지킨다는 것이 그녀의 소신이다.
<시골밥상>이 더욱 빛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얼치기가 아니라 진짜 요리를 하고 요리를 아는 그녀가 전국 방방곡곡 시골마을을 찾아다니며 손맛의 고수들을 만나 ‘우리의’ 요리를 만들며 ‘맛’에 대해 ‘음식’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야말로 리얼 프로그램.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빠져들고 이 프로그램에 열광한다. <시골밥상> 진행을 시작한 지 날수로 1,000일. 그간 전국을 돌며 수없이 많은 어머니들을 만나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뿌리, 한국인의 밥상을 차려왔다. 그 건강한 기록을 이 책 <양희은이 차리는 시골밥상>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