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 입은 남자
황현숙
5남 1녀 중 넷째인 고명딸로 태어난 나는 남자 속에서 자랐고, 공부하는 데만 정신 쏟던 것이 체질이 되어 지금까지 여자로서의 매력을 많이 지니지 못하고 살아왔다.
불혹(不惑)이 지난 요즘에야 조금씩 깨닫고, 들떠 있는 벽지를 풀로 붙이거나 군데군데 얼룩을 제거했더니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녀석은 해가 서쪽에서 뜰 것이라 했다. 김치찌개를 끓여도 나의 솜씨가 아니란다. 나의 손길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지금까지 눈이 있었지만 제대로 찾거나 보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화장을 예쁘게 하고, 정리정돈은 그때그때 하고, 상하기 쉬운 음식이 없도록 냉장고는 청결히 하라고 남편과 시어머니에게서 수 없이 들어도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아 나 자신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던 일상이었다. '그 동안 이웃까지 들썩했던 우리 집, 풍비박산 날까봐 노심초사했던 원인이 바로 나에게 있지 않았을까?'
대학시절부터 교회를 다니다가 신앙을 갖지 않은 남편과 서른에 맞선을 보았는데 유머감각이 뛰어나며 깔끔하고 훤칠한 키에 호감이 갔다. 만나보니 계획성이 있고 성격이 아주 급하여 나와는 태생적으로 많이 달랐다. 급한 것이 없고 낙천적이며 계획성 없이 그때그때 직관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나로서는 서로 보완하여 살아가면 환상적일 것 같다는 생각에 국제결혼만큼이나 큰 환경의 차이를 뛰어넘었다. 한순간 우리의 자녀가 외형적인 것은 남편을, 내면적인 것은 나를 닮는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남편이 가장 먼저 추구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나중이어서 결혼을 하고 나니 남편의 불만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아이, 답답해. 당신과 나는 안 맞아."하고는 속상해서 나간 남편은 곧잘 술을 마시고 들어오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아들은 "아빠, 건강 생각 안 하시고 왜 그렇게 많이 마셔요?"라고 하면 "다 엄마 때문이야! 너는 이 다음에 엄마 같은 여자 얻지 마라."라며 자존심을 상하게 하였다. 나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데 남편은 나를 불신하게 되었고, 내가 다니던 교회의 교인들이 결혼을 말릴 때 듣지 않은 것이 후회될 때도 있었다.
지난 해 12월 어느 날이었던가. 내 양말과 속옷, 아이 양말을 뒤죽박죽이 되게 넣어 놓아 남편은 정리정돈 못하는 여자와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시어머님께 전화를 걸었다.
'쯔쯧, 아직도 유치원생' 내 잘못은 뒷전이고 일만 있으면 시댁에 전화하는 것이 못마땅해 나는 입을 씰룩씰룩했다. 큰 소리가 날 때마다, "아범아, 어멈은 착하지 않니? 다 가진 사람 없느니라. 의젓한 아이들을 봐라." 하시며 손자손녀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시어머님은 나를 많이 이해해주셨다. 결혼 후 5년 간, 최선을 다했으나 가정이 해체될까봐 불안했다. 아이가 한 명 더 있으면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에 둘째를 낳았는데 남편을 국화빵처럼 빼 닮은 딸이었다. 딸이 글씨를 깨우친 후로는 편지로, 때로는 춤과 노래로, 냉랭하고 썰렁한 집안 온도를 높이는데 크나큰 몫을 하고 있다.
삶의 일상에서 하찮은 일들로 남편과 다투고 말이 없으면, 지난해부터 연희가 가운데 누워서 남편의 왼손을 달라하고 그 위에 나의 오른손을 포개놓고 부부는 잘 못해도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포개진 손을 제자리로 가져오며 어린 딸만도 못한 것 같아 남편과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딸을 출산하고부터 시어머님은 2년 간 우리 집에 출퇴근을 하여 아기를 돌봐주시고 살림을 도맡아 해주셨다. 화장하는 것, 옷 입는 것, 반찬 만드는 것을 차근차근 가르쳐 주셨으나 연세보다 훨씬 신세대인 어머님의 생활방식은 아직도 많이 전수 받아야 할 정도이다. 결혼 직후부터 어머님과 남편은 내가 쌍꺼풀 수술을 하면 더 예쁠 것 같다고 하셨으나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5년이 지나서 수술을 하였다.
일생에 한 번 뿐인 결혼은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해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데, 남편의 장점만이 크게 보여서 나는 성급하게 결혼을 하였다. 가치관이 비슷해야 가정생활이 더 원만하리라. 가치관이 다르다면 서로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계절이 바뀌면 갈아입는 옷과 같이 가치관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그 땐 왜 몰랐던가. 정신적으로 많은 힘이 들 때는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갈등으로 몇 번인가 잠을 설쳐보기도 하였지만, 남의 밥에 있는 콩이 더 커 보인다는 말도 있고, 비단 깔아놓은 낙원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기에 눈물겨워도 가정의 울타리를 견고히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실 총명하고 건강한 아들딸의 장래에 남편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시끄러운 소용돌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남편이 추구하는 것을 따르기로 마음먹으니 크고 센 남편의 목소리가 나직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희망사항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어느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나는 그 일에만 집중하여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 속이 답답하다 못해 터지려고 하는 남편은 별거나 이혼을 들먹거렸단다. 가정이 시끄러운 이유가 내게 있음을 인정하니 아직도 소년 같은 남편은 술을 덜 마시고 정답고 자상하게 변하고 있다.
아침을 차리려고 일어나면 "방학인데 더 자. 내가 차려 먹고 출근할게" 식당업에 오랫동안 몸담으셨던 시어머님의 음식솜씨를 자연스레 전수 받은 남편이 뚝딱뚝딱하면 나는 옆에서 수저를 놓는다. "음, 아빠 웬 일이세요? 엄마한테 좋은 말도 하고. 매일 오늘 같았으면 좋겠어요." 초등학생인 딸이 남편에게 윙크하느라 한 쪽 눈을 찡긋했다.
우리의 전쟁을 방불케 한 부부싸움으로 초조하고 불안했을 아들딸과 어머님께 심려를 드렸던 것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마음이 맞지 않아 술로 세월을 낚은 남편의 고통과 아내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해 겪은 내 아픔이 양팔 저울의 그 어느 곳으로도 기울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앞으로는 우리 집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고 이른 아침, 나팔꽃이 노래하도록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보리라.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욱 행복하다면 이처럼 큰 행복도 없으리라.
누구에게나 무슨 일이나 힘든 고비가 있다. 최선의 모습에도 나쁜 점이 있고 최악의 상황에도 좋은 점이 있다. 짧지 않은 세월동안 시행착오를 겪어온 나의 가정이 땅속에 묻힌 김칫독에서 맛이 드는 김치처럼 토속적인 우리의 맛을 내는 가정으로 발돋움하리라. "당신은 내게 실로 소중한 분, 인정 많고 순수한 사람! 여보, 지금까진 미안해요. 정말로 사랑해요." 오늘 따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더 없이 높고 푸르러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