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든 경상도사내의 부끄러운 하소연
"살 거면 다 잊고 살아라. 그래도 힘들면 그만 해도 된다"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나 커다란 위기를 맞이할 때가 있다고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던 것 같다.
그동안 읽었던 모든 고전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전부 위기에 빠져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우리의 주인공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구덩이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인생의 짐을 무겁게 지며 한 발짝씩 걷고 있는 주인공들은 대개 초반에는 좌절하지만
결국에는 타고난 능력으로 행복을 쟁취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위기가 찾아오면 현명하게 대처하리라 마음먹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인생이란 생각처럼 되는 것이 아닌지라,
나에게 찾아온 어려움 속에서 현명한 주인공이 되기란 정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려웠다.
아주 오래전 봄날이었다.
남편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성과 술을 마시고 집에 오다가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역시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에게 들었다. 나는 이것이 사실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멍하게 있었지만
소문은 바람보다 빨랐다.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도 아파트 이웃들이 나를 보며 힐끔거리는 눈초리를 감내해야 했고,
친한 친구들이 내 손을 잡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결국 남편은 구속이 되었고 피해자 측과 재판까지 가게 되었다.
고전 속 주인공들에게도 위기가 하나만 오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의 위기도 겹으로 찾아왔다.
근 15년간 밖으로만 돌던 남편이 그동안 제2금융권에서 돈을 빌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남편이 구치소에 있는 사이 러쉬앤 캐쉬, 카카오뱅크, 융창저축은행...
이름도 생소한 대부업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경고장이 날아들었다.
종이 위에 적혀 있는 숫자는 무서운 속도로 크기를 키워갔고 나는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공포에 사로 잡혀 있었다.
고2, 중3, 초등학교 5학년,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춘기 아이들은 날마다 날아오는 고지서와
추문에 쌓인 채 감옥에 간 아버지 덕분에 그야말로 날카로운 바늘위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그쯤이었다.
부산에서 택배상자가 왔다. 돈 달라는 독촉장이 아니라 생소한 곳에서 온 선물상자였다.
선생님이 보내신 쌀이었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아이들과 식탁에 동그랗게 둘러 앉아 말없이 뜨거운 밥을 먹었다.
이후로도 상자는 계속 도착했다. 어떤 날에는 수건과 과자가 들어있었고, 또 어떤 날에는 사과상자가 왔고,
산 낙지가 배달되어 온 적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보낸 꽁꽁 언 과메기 떡이 커다란 상자 가득 들어있었던 날도 있었다.
나와 아이들은 차가운 겨울 동안 선생님께서 보내 주신 상자를 따뜻하게 받아먹었다.
잘 받아서 잘 먹었다고 감사 전화를 드릴 때에도 선생님께서는 별 말씀 없으셨다.
오로지 죽고 사는 것이 아니면 큰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만 하셨다. 맛있게 먹으면 그것으로 되었다고만 하셨다.
전화기를 통해 선생님의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들을 때마다 목이 막히고 눈물이 고였다.
보내주신 사랑에 대해서 뭐라고 해야 할지 딱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계속 감사하다고만 했던 것 같다.
오래전 한 겨울, 중3이었던 둘째아들이 막 고등학교를 결정했을 때였다.
선생님께서 아이가 학교에 가기 전에 다 함께 저녁 한 끼 하자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우리 어머니의 친구이시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수원과 평택 사이에 살고 계시니 장소는 당연히 어머니 집 근처로 결정되었다.
해가 어둑하게 지는 토요일 저녁에, 작은 간이역 앞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남자 치고도 그렇게 크지 않은 키에 어쩐지 단단해 보이는 몸집의 경상도 사나이가 빠른 걸음으로 역을 걸어 나오셨다.
양복을 입으셨지만 양손 가득 무엇인가 가지고 오셨더랬다.
전부터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던 지라 처음 뵙는 자리라 차분하게 인사를 하려 했지만
선생님께서는 훠이 훠이 손을 젓고, 긴 인사는 생략하고 어서 빨리 밥이나 먹자고 자동차에 오르셨다.
우리는 시끌벅적한 해산물 뷔페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이 각자 자신의 접시를 채우러 간 사이에 정기효 선생님께서 드디어 입을 여셨다.
“네 남편 나와서 살 거면, 다 잊고 살아라. 대신 살다가 정 힘들면 나와도 된다.”
이게 무슨 말씀인지. 주변 테이블에서 울리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잘 못 들은 것은 아닐까.
그야말로 옛날 드라마 속 아버지들이 남편에게 맞고 와서 훌쩍거리는 딸을 앞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고작 이 말씀 때문에 새벽부터 부산에서 KTX를 타고 그 멀리서 오셨단 말인가.
그 뒤로도 선생님께서 몇 말씀 더 하셨지만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 테이블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경상도 사투리를 잘 알아듣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투박한 사투리가 내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아 다른 것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때는 용서라는 단어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에 선생님의 말씀이 더 충격적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집에 올 때까지 서운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 대신 든든한 뒷배가 되어서,
죽일 놈, 못된 놈 하면서 남편 욕을 해주실 줄 알았는데 잊으라니. 어쩐지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말이다. 처음에는 서운하게만 들렸던, 경상도 사나이가 기차를 타고 와서 툭 던지신 그 말씀이
시간이 지나자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살 거면 다 잊고 살아라. 힘들면 그만 해도 된다.’ 그 투박한 말씀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세상에 맞설 용기가 생겼다.
내가 강간미수로 형을 살고 있는 남편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가족을 속이고 빚을 진 남편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받아들였는데도 남편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땐 그만해도 되는 구나.
그러자 그동안 마음을 짓눌렀던 수치심이, 절망감이 훨씬 가벼워졌다.
해 보고 아니면 포기해도 되는구나. 반드시 성공할 필요도 없구나.
동시에 내가 현재 겪고 있는 이 일이 어쩌면 그다지 큰 일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라는 깨달음이 왔다.
내 마음을 비워낸다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겠구나.
이렇게 세상을 살아간다면 정말로 죽고 사는 일을 제외하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없을 수 있겠다 싶었다.
도대체 이 무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뱉어내기까지 선생님은 어떤 삶을 살아오신 걸까.
지금까지 살아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잊어야만 했을까.
가족에게 배신당한 고통, 믿었던 사람들에게 받은 억울함, 아픔, 서러움, 그리움, 통한...
어떤 것들을 흘려보내시고 이 기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신 걸까. 그리고 그 남은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내 어머니께 듣기로 선생님께서는 부산 작은회사의 전무로 회계 일을 보고 계신다고 하셨다.
힘든일이지만 십 몇 년 째 장애인 단체 활동을 하고 계시고, 특히 좌식탁구를 후원하고 계신다고 했다.
좌식탁구란 말이 생소해서 알아보았더니 말 그대로 앉아서 하는 탁구로,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동등하게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라고 한다.
주변에 지인이 많으셔서 명절 때가 되면 크고 작은 선물들이 많이 들어오시지만,
대부분 다시 주변 분들에게 보내주신다고 하셨다. 그래, 맞다.
선생님께 선물 감사하다고 전화를 드리면 긴 말씀 안 하시고 꼭 이렇게만 대답하셨다.
“감사할 거 없다. 잘 먹고 잘 쓰면 되는 거지. 우리 집에 무엇이든지 2개 있는 꼴을 못 보니 보내는 거다.”
선생님께서는 아픈 것들만 잊고 사는 게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들,
알리고 싶은 것들도 모두 흘려보내고 사시는 것 같았다.
젊었을 적에는 고아가 된 형제들을 거두어 키운 일도 있으시고 그밖에도
지금껏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셨지만, 특별히 그 이후를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 두시지를 않으셨다.
아마도 선생님이 살아오기 위해 비어버린 그 자리는 여전히 텅 빈 자리로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커다란 통로가 되어 수많은 인생들이 지쳐있을 때,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위로를 전해주는 기차가 다니는 철로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경상도 무둑둑한 사나이가 기차를 타고 와서 내게 전한 한마디말씀
"살 거면 다 잊고 살아라....그래도 힘들면 그만 해도 된다."
추신
친구야
부모를 대신하여 무어라고 "이렇게 살아야한단다" 하고
나를 의지하며 한마디 듣고싶어 찾아온 딸여식인데
세상이 변하여
아무리 지좋으면 되는 세상이라지만 이건 좀 그렇다
친구의 딸래미 하소연인데 아무말도 못하고 그렇다고 위로의 한마디도 해주지 못하는
무능력한 나자산이 서글퍼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면서 화가나는 하찮은 나를 본다
어른으로 사내로써 미안함과 가장의 역활이 무언지 많은 생각을 해본다
친구야
너의 아들이나 딸래미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단다" 하고
한마디 해주고 싶은지 묻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