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먼 땅에, 고향은 하늘에.
인간의 환경은 고향과 같은 곳이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자연을 비롯한 모든 외적 환경에 친숙해지고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자유와 고향을 상실한 인간은 인간이 아닌가? 문득 떠오른 의문에 뺨을 쓸자 딱딱한 가두의 단면이 닿았다. 인간의 요소 두 가지를 버리고 온 피살자는 복수심에 피가 끓어오르다 식기를 반복한다. 본능에 이성을 앞세워 기억을 흐리게 물들이길 바라면서도 이미 저만치 튀어 나간 감정과의 간극은 이 손에 날붙이를 들게 했다. 흙먼지 날리는 연무장보다 서고 특유의 글 향이 번지는 실내를 더 선호했던 그의 기질이 바뀐 것처럼. 변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칠 년 전의 일이다.
명가는 본디 소료 사신문 중 하나인 천영의 가신문으로 기십 년 세월 동안 봉공하면서 공작의 신임을 놓친 적이 없었다. 가내에 편파가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많은 무게를 짊어지느냐의 차이였다. 당주의 믿음이란 단순히 건네는 임무에 불과하지 않으며 권한과 막중한 책임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길 바라거나 가문 내의 입지를 넓히길 원하는 이들은 책임은 뒷전이고 눈에 보이는 권한부터 수중에 쥐려 했다. 공작에게서 얻는 신임이 크면 클수록 떨어지는 것이 큰 까닭이었다. 무수히 많은 가신의 우열을 가리라면 그가 지닌 힘이 무엇인가를 보고 판별했다. 마치 황가의 주인인 천자의 총애가 깃드는 만큼 위세를 부릴 수 있는 액정의 후궁들처럼. 여기는 소위 말하자면 작은 궁정이었고 제가 갖지 못한 것을 타인이 가졌을 때 벌어지는 암투란 궁중의 것 못지않았다.
당주가 그토록 신임하던 명현을 흔적도 없이 이 땅에서 말살시키려 한 건 누군가의 모함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공산이 컸다. 공작을 대리하여 영지를 다스리는 번한으로부터 올라온 서신 속에 적힌 내용은 명가의 일원뿐만 아니라 공작이라 할 지라도 믿기 어려운 것에 불과했으니. 조사는 그만큼 철저하게 빈틈없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창고 가운데 곡창에 든 재고를 기록해 둔 장부가 증거품으로 내밀어졌을 때 누구보다 놀라 굳어있던 명현은 항변 한마디 하지 못하고 있다가 공작의 시선을 마주한 후 입을 닫았다. 가신문에서 추방된 명가는 천영의 지척에 머물 수 없어 대도를 떠나야 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곁에서 모신 세월이 얼마인데 내가 그걸 모를 리가.
진실이 어떠하든 장부를 살핀 당주의 검은 눈동자에는 자신을 향한 신뢰가 깨어져 있었노라 전하는 아버지의 한마디에 울음 삼키는 소리가 걸음마다 파묻혔다. 나는 당신이 지난날 공작으로부터 창고 열쇠를 받고 어떤 얼굴을 했는지 선명히 기억했다. 기대에 부응치 못할까 염려하던 음성과 간헐적으로 흘려내던 육중한 한숨까지도. 이제 짐을 덜 때가 되었지. 먹먹한 눈으로 창공을 올려다보는 부친의 회한이 금번 사태에 대한 죄과나 죄의 삯은 아닐 거였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적어도 짊어진 무게를 줄이고자 충심 대신 손익을 따져 안배를 두는 위인은 못 되었으니까. 그러나 공작이 받은 배신감은 그를 자유로 풀어주기엔 지극히도 값비싼 모양이었다.
석양이 기울어 어둑서니 내려앉을 무렵까지 이동하느라 지친 가솔들은 쉴 곳을 마련했다. 제대로 챙기지 못한 끼니에 허기를 물로 채우고자 수통을 입에 대고 탈탈 터는 이도 있었다. 덮을 것이 모자라 풀잎을 베어 오는 모습은 어쩐지 불씨에 그을린 잔상 같기도 했는데. 연기에 일렁이는 환영처럼… 밤이 깊어 종일 이동하느라 무리한 몸이 피로감을 호소했다. 고목에 기댄 몸이 아래로, 아래로 주저앉으려 할 때. 졸음에 침몰해 가는 나를 깨우는 가노의 부름이 조금씩, 점점 더-
ㄷ…님, ..련님, 도련님!
커졌다가,
푹-
가까이에서 피 분수를 터트리며 사그라졌다. 아비규환이 된 수라장 속. 정신없이 뛰던 등. 숨 가쁘게 이어가다 멈춰버린 말소리. 누군가의 생명을 앗으려 바람을 가르고 날아와 박히는 무언가. …환영처럼, 그 모든 게 환영처럼 느껴졌다.
가끔 생각한다. 밤새도록 벌어지던 추격전과 겨우 제 아들만 기절시켜 숨겨놓고 멀리 달아나던 족적을. 의식을 차렸을 땐 많은 시간이 흘러 일이 끝난 다음이었다. 빠지지 않은 핏물이 낭자한 바닥,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야중. 그사이에 널린 건 그를 살펴주던 사람과 사람과 사람과 사람 … 텅 빈 하늘에 단말마 비명이 번져 나간다. 이명이 되어 뇌리를 파고드는 백색소음에 그만, 기울어 떨어지는 고개가 하나. 송장이 아파 봐야 송장이지. 자조하는 한마디가 유독 쓰려 가두의 측면을 두어 차례 두들겼다.
좌장군 사일. 명가의 생존자. 천영에서 추방된 지 칠 년 만에 가문으로 복귀해 전대 당주 시절 썼던 부친의 누명을 벗긴 일은 그에 대한 정보를 훑으면 나오는 내용의 전부다. 지난 칠 년여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불어난 소문이 그의 행적을 장식할 뿐. 무수한 추측성 소문 중 한때 그가 사용한 이름에 명가를 담지 않았다는 사실만 일치한다. 생로를 찾아 넘은 국경의 횟수가 두 번. 소료와 피사를 오가며 삶을 이어가는 동안 깨달은 바는 하나다. 모든 신화는
잃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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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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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는 건 몸이 고될지언정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본국으로 향한다는 피사의 행렬에 발맞추어 이동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살수를 만날까 경계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그의 도움을 받은 건 일생 다시 없을 행운이거나 혹은 기회였다. 시기가 맞아떨어졌든, 행운의 여신이 손잡고 좀 더 살 수 있는 길로 이끌어주었든 상관없었다. 만일 처음 생각한 대로 북쪽으로 가려 했다면 이 기연 또한 만나지 못했으리라. 대도를 벗어나 피사로 향하는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사일은 자신의 이름을 버렸고, 얼굴을 버렸고, 신분을 버렸다. 피사국이 가까워질 즈음에는 그의 본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미하일! 어제 라우뢰를 꺾었다며?
크게 움직이는 보폭과 뒷발을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에 걸걸한 남자의 음성이 닿기도 전, 누구인지 간파한 그가 답 대신 닦아낸 검을 휘두른다. 햇살에 빛나는 검날이 제법 날카롭다. 드디어 라우뢰를 이겼으니, 관직을 받으러 오는 건가? 곧 후임이 생기겠다고 좋아하는 그를 향해 검날을 세워 상태를 한번 확인한 미하일은 검 끝을 겨누었다. 네 밑에 있을 생각, 없어.
명가는 은혜를 잊지 않는다. 목숨을 부지하는 대은을 입었으니 구명지은의 보로 갚겠다. 무기를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손이 여물지 못한 게 눈에 거슬려서 사일은 그에게 훗날을 약조했다. 때가 되어 무르익거든 불러주십사 하고. 잠들 시간도 줄여가며 수련했다. 일대에 무기 좀 쓴다 하는 이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가 대련하면서 평생 겪어야 할 패배는 넘쳐날 정도로 겪었다. 미하일이 빠른 속도로 강해진 건 늘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앞에 두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살짝 뒤로 빼서 물러난 그가 침을 삼키고는 첨예한 날 끝을 보다 나를 응시했다. 입술이 아래쪽으로 늘어지며 내는 공포에 젖은 음성은 골백번도 더 들었던 말이었다. 눈이 돌았어, 눈이 돌았다고! 뒤돌아 발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확인하며 들고 있던 검을 내렸다. …등신인가.
왕세자가 데려온 호위대장 미하일은 비밀이 많아 신비스러운 사람이었다. 늘 착용하는 가두에 가려진 생김새조차도. 정체가 불분명한데 누구도 그의 출신을 따지지 않은 건 몸에 밴 귀족적인 행동을 두고 왈가왈부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말수가 적어 대체로 시선이나 갑갑한 공기, 분위기 따위로 사람을 상대하는 편이었다. 그를 조금이나마 겪어본 자들은 호기심이 생긴다고 해서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례적으로 비밀을 캐내어 다수의 궁금증을 해결해 보겠다 나섰던 자가 하루아침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외가 있다면 타이친이 유일했는데. 전란의 불꽃이 삼키고 남은 자리에 송장이 자란다.
미하일辟睱昵. 14세.
미하일辟睱昵. 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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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리우明 利優. 2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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